다시듣고 싶어서 오랫동안 음원을 찾았는데 멜론에도 없고 벅스에도 없고... 앨범을 사야하나 그러다 네이버 블로그에서 우연히 오늘 발견.
2018년 1월 29일 월요일
2018년 1월 16일 화요일
그리 중요하지 않은
글을 보다 보면 텔레비전을 대부분 television set라고 표현하는 걸 볼 수 있는데 이게 왜 그런지 항상 궁금했다. 그래서 검색해보니, 텔레비전의 본래 명칭이 텔레비전 세트라고.
아마도 텔레비전이 고유명사가 되기 전, 텔레비전, 즉, '멀리 보기 위한 기계 모음'라는 의미로 이 기계 세트를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게 줄어서 텔레비전이란 고유명사가 된 것이 아닐지.
+ 여기에 좀 더 설득력 있는 커멘트가.
"Remember, TV was a direct descendant of radio. Hobbyists had radio (or "wireless") "sets" that were a collection of distinct components: the battery(s) (often several jars of acid, not the small snap-in "dry cells" we all know today), the receiver, an antenna (another throwback monstrosity: often a clothesline-type affair), headphones, and -- if you wanted to transmit too -- a telegraph key. (Which brings up another point... I would not be surprised if radio borrowed the term "set" from the ye olde non-wireless telegraph, another arrangement that required many separate batteries and a key, at least.)
It's no great leap that the lingo that described these early component radios stuck through the era of the all-in-one radio-in-a-box to the age of the TV-in-a-box.
The real question, IMO, is whether "set" was introduced by early radio (or telegraph) practicioners to describe a collection of components (as in, "I have a new set of batteries") or as a shorthand of the term "setup.""
아마도 텔레비전이 고유명사가 되기 전, 텔레비전, 즉, '멀리 보기 위한 기계 모음'라는 의미로 이 기계 세트를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게 줄어서 텔레비전이란 고유명사가 된 것이 아닐지.
+ 여기에 좀 더 설득력 있는 커멘트가.
"Remember, TV was a direct descendant of radio. Hobbyists had radio (or "wireless") "sets" that were a collection of distinct components: the battery(s) (often several jars of acid, not the small snap-in "dry cells" we all know today), the receiver, an antenna (another throwback monstrosity: often a clothesline-type affair), headphones, and -- if you wanted to transmit too -- a telegraph key. (Which brings up another point... I would not be surprised if radio borrowed the term "set" from the ye olde non-wireless telegraph, another arrangement that required many separate batteries and a key, at least.)
It's no great leap that the lingo that described these early component radios stuck through the era of the all-in-one radio-in-a-box to the age of the TV-in-a-box.
The real question, IMO, is whether "set" was introduced by early radio (or telegraph) practicioners to describe a collection of components (as in, "I have a new set of batteries") or as a shorthand of the term "setup.""
2018년 1월 13일 토요일
2018년 1월 12일 금요일
J. Nicholas Entrikin, The Betweenness of Place: Towards a Geography of Modernity (1990)
https://www.amazon.com/Betweenness-Place-Towards-Geography-Modernity/dp/0801840848


What makes New York City different from Moscow? Are small towns looking more and more alike? What criteria should we use to distinguish onw place from another? Today, geographers and other social scientists are debating not only the answers to these sorts of questions but even whether or not to ask them at all. This ongoing controversy about how (or whether) to study place and its meaning in modern life forms the focus of J. Nicholas Entrikin's pioneering work.
Those who point to a decline in the study of place in geography, Entrikin explains, cite three main causes: the apparent homogenization of world culture; the belief that studying particular places is somehow "parochial"; and the tendency of the scientific method to generalize. Entrikin treats each of these in turn, addressing topics that include the Marxist view of a world economy, the moral implications of place (in such notions as community and provincialism), and the empiricist versus neo-Kantian traditions in philosophy.
To geographers arguing the merits of hard, scientific data versus subjective experience, Entrikin offers a compromise. "To understand place", he suggests, "requires that we have access to both an objective and a subjective reality. From the decentered vantage point of the theoretical scientist, place becomes either location or a set of generic relations and loses much of its significance for human action. From the centered viewpoint of the subjective self, place has meaning only in relation to one's own goals and concerns. Place is best viewed from points in-between."


What makes New York City different from Moscow? Are small towns looking more and more alike? What criteria should we use to distinguish onw place from another? Today, geographers and other social scientists are debating not only the answers to these sorts of questions but even whether or not to ask them at all. This ongoing controversy about how (or whether) to study place and its meaning in modern life forms the focus of J. Nicholas Entrikin's pioneering work.
Those who point to a decline in the study of place in geography, Entrikin explains, cite three main causes: the apparent homogenization of world culture; the belief that studying particular places is somehow "parochial"; and the tendency of the scientific method to generalize. Entrikin treats each of these in turn, addressing topics that include the Marxist view of a world economy, the moral implications of place (in such notions as community and provincialism), and the empiricist versus neo-Kantian traditions in philosophy.
To geographers arguing the merits of hard, scientific data versus subjective experience, Entrikin offers a compromise. "To understand place", he suggests, "requires that we have access to both an objective and a subjective reality. From the decentered vantage point of the theoretical scientist, place becomes either location or a set of generic relations and loses much of its significance for human action. From the centered viewpoint of the subjective self, place has meaning only in relation to one's own goals and concerns. Place is best viewed from points in-between."
2018년 1월 11일 목요일
2018년 1월 8일 월요일
from ambient television
"텔레비전을 장소특정적 형태로 보는 것 안에, 그리고 특정한 장소 속 그것의 역할을 적절하게 통찰하는 것 안에 포함되어 있는 그 도전의 예비적 힌트는 비-가내적nondomestic 티비 장소를 카테고리화하는 불편하고 뜻하지 않은 용어를 불러 일으키는데, 그것은 이 연구의 기반을 형성하는 바다. 우리가 비록 쇼핑몰이나 레스토랑 같은 장소를 "공공" 장소라고 부르지만, 어떤 점에선 사적이기도 하다. 그런 장소는 사적으로 소유될 수 있으며, 특정한 무리들이나 개인의 접근을 제한할 수도 있으며, 그 장소 안에서 어떤 종류의 발언이나 행위를 제한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러한 장소sites는 공공적이지도 사적이지도 않은반면, 어떤점에선, 그런 장소는 공공과 사사로움 사이의 관계의 특정한 감각sense을 육화한다." <ambient television> 3
제도적인 것과 루틴한 것에 관한 <앰비언트 텔레비전>의 관심은 이런 것을 의미한다. 집 밖 텔레비전 문화정치의 그 계정은 스크린문화의 스펙터클한 차원보다 일상적인 것banal을 더욱 강조한다는 뜻이다. 이런 견지에서 이 책은 공공 안의 표준적이고 저널리즘적인 계정으로부터 벗어난다. 그것은 전쟁이나 스캔달, 스포츠경기, 선거로부터의 미디어 이벤트에 관한 공공 의견의 증거를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티비를 보는 장소에 방문하기 위한 뉴스 리포팅의 세트피스다. <ambient television> 8
그러한 스텐스를 취하는 것은 아카데믹한 학제로서 복잡한 인식론적 지리학의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며, 또한 특히 몹시 까다롭고 변동적인 지리학적 지식의 카테고리, 즉 스케일로 들어가는 것이다. 네일 스미스가 규정했듯이, 스케일이란 "공간적 차이의 언어"다. 이 용어는 글로벌부터 로컬(하지만 이들 용어 스스로는 의미를 설정하지 못한다)에 이르는 차이를 다룬다--그것들은 근본적으로 관계적이며, 그들 차이를 통해 서로 서로를 구축한다. 스케일은 그러므로 문화연구에서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개념이다. 사적인 것의 결정determinations처럼, "로컬"을 설명해주는 것의 결정이란 권력에 의해 침투된다: "지리학적 스케일은 ... 경계를 결정하며 컨트롤이 발휘되고 다퉈지는 것 주변의 아이젠티티를 결합한다."[18] 스미스에게 스케일의 정치란 미국 도시에 있는 무거처성의 사회적 경험에 의해 쉽게 설명된다: 무거처성의 상태는 거리의 로컬한 스케일을 향한 개인적 활동을 제한하고 그런 스케일 위에 형성되는 콜렉티비티의 힘을 앗아가는데, 왜냐면 그것은 더 넓은 제도적 수준 위의 정의 및 권력의 작용과 연결되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막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민 영역 속으로의 참여를 차단하며, 그것을 고려해 봤을 때 후자로의 진입은 더욱 현저하게 스케일된 공간 속에 뿌리박힌다: 가정. 소유권과 돈, 고용, 소비의 장소.[19]
스케일의 개념은 텔레비전 연구에서 중심적이게 되는데 이유는 그것이 정치 경제학자의 문화연구적 비평으로서 특정한 방법론적 토론의 심장에 자리잡기 때문만은 아니다. 되려 그것이 미디엄 자체의 복잡성을 몹시나 생성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미지의 장소없는 생성성과 (그것들이 모든 사이즈의 스크린과 모든 종류의 공간에서 나타날 때) 그것의 터미널적 형태의 특정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신호화된 복잡성을 생성한다는 의미에서 스케일은 텔레비전 연구에서 중심적이다. 존 하틀리가 가정내 공간 속 티비에 관해서 썼듯이, "각각의 티비 프로그램은 백만 시청자에게 동일할지도 모르지만, "티비에" 무엇이 나오느냐--말 그대로 그것에--는 같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중요하다. ... 토대에서, 그러므로, 텔레비전 스크린이 그것을 둘러싼 비매개적 공간--수용의 마이크로 레벨--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는 일이란 어떻게 이 두 가지 스케일이 연결되어 있는지 묻는 일이며, 어떻게 이미지의 표준화한 "elsewhere"이 특정한 공간 속의 물질적 형식을 취하는지 탐험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란 환경 속 티비의 역할이, 이 연구의 케이스에서, 다양한 수준, 그러니까 어떤 장소 유형에 특정성--그러니까 공항 같은 "비장소"--을 부과하는 양자적 사회적 힘부터, 탑다운 제도 시스템(그것들에 관한 관람성 모델을 부과하려고 하는)에 이르는 다양한 수준의 모양을 취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을 포함한다. 10-11
..
복잡한 스케일의 정치는 내 티비 연구를 다양한 방식으로 장소특정적 문화 형태로 모양짓는다. 무엇보다, 일반적인것과 특정적인 것 사이의 비동일성discrepancy의 감각은 언제나 일상의 분석 안에서 결합된다. 주체의 경험과 객관화하는 지식의 양태 사이의 긴장, 대량문화의 익명성과 개인과 문화에 의해 다양하게 전유되는 것의 형언 불가능한 특정성 사이의 긴장은 해결 되어야 할 분석적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마이크로 레벨 위에서 사회적 공간 생산의 다양한 양상이기도 하다. 루스 지아드Luce Giad가 썼듯이, "일상의 분석은 이론적인 것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그래서 특정하고 분위기적인 것에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 끊임없이 오고 갈 수밖에 없다."[22] 텔레비전은 이런 운동에 포획되어 있으며, 이것은 개인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 로컬한 것 대 대중적인 것, "장소" 대 "공간" 사이의 대립으로는 쉽게 매핑되지 않는다. 되려, 시간time과 거듭 환경적 담론과 퍼블릭 스크린의 실천은 상호간 가로지르며, 실로 각각 환경의 사회적 공간의 문법을 위한 기구로서 복무하면서 명백한 대립을 보여준다. 장소특정적 접근은 그러므로 정확하게 스케일에 맞춰질 수밖에 없으며 그것 위에 행위와 제스쳐, 언술행위가 특정한 환경 안의 텔레비전의 현전을 통하여 형성된다. 드 세라토가 티비 수상기의 전략--공간의 표준화 제도화 실천 안에서 그것의 활용--과 텔레비전의 전술--이것 안에서 스크린은 개인적 여정 위의 공간을 통해 유저가 통행할 때 유저의 일시적이고 불연속적인 오퍼레이션 안에서 착취되어지는 리소스로 복무한다--이라고 불렀을법한 무엇 둘 다를 시험하면서 말이다.[23]
많은 비평가가 지적햇듯이 과도하게 그 둘은 이분법적이지만, 드 세라토의 카테고리 쌍은 공공 공간 속 티비 스크린을 상황화하는 관계성에 관해 생각하기 위한 유용한 프레임워크를 제공한다.[24] 왜냐면 둘은 과정에 관한 우리의 주의를 주목하며 그것을 통해 제도와, 제도에 대한 도전은 마이크로 레벨 위의 물질적인 형태를 취하며, 그 둘은 미디어가 표류하는 공간 속 권력의 텍스쳐와 시각성에 관해 생각하기 위한 어휘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공항에서, 텔레비전 스크린은 여행자로서의 관람자의 시공간적 코디네이션의 플롯을 짜는 전략의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일종의 제도적 목소리로서 복무하면서 말이다. 쉽게 컴퓨터를 통해 업데이트된 출발과 도착을 방송하면서, 모니터는 트레픽을 조정하며 인간 정보-제공자information givers를 표준화된 목적 시간표로 대체한다. 패트리샤 멜란캠프가 썼듯이, 이런 스크린은 "'제시간on time'의 미션과 욕망"을 일시정지된 시간suspended time의 익명성 속에서 무시간성과 무맥락성, 고삐풀림, 비장소의 느낌을 주는 가운데 지원한다.[25] 그러한 장소 안의 상업적 실천은 비슷하게 장소에, 브랜딩 전략을 통해 의미의 그리드를 부과하며 작동한다. CNN 에어포트 네트워크의 케이스에서, 카-렌탈 광고와 스폰 받은 일기예보, 도착 도시에 관한 참조물은--관중의 정체경제학에서--광고주에게 팔기위한 공간 속에 관람자의 위치를 상업화하는 프로그램 형태다.
그럼에도 그러한 고도로 경찰화된, 상업 네트워크 전략은 또한 사용자 전술의 도구로 가능하기도 하다. 아주 단순한 수준에서 그것들은 어떤이가 앉아 있는 장소 속 인터렉션의 즉각적 장소로부터 어떤이를 떼어 놓는 방법을 제공한다. 내가 또 다른 진행중의 CNN 벤처--카페 USA, 푸드코트 엔터테인먼트 네트워크--를 보기 위해 쇼핑몰 푸드코트에 방문했을 때, 애 딸린 부모가 끊임없이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아이들은 장난치느라 그것을 무시하는 동안에 말이다. 분명하게도 스크린은 부모가 잠깐동안 가족의 세계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사용된 전술적 리소스였다.[26]
더욱 극명한 케이스에서 티비 수상기는 공간 속에서 저항적이거나 전술적인 기동술의 스케일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방콕의 돈 무앙 공항에서 텔레비전 스크린이 연루된 사건에 관한 최근 뉴스 리포트를 생각해보라. 이 상황에서, 방콕 포스트에 따르면, 명백하게 불만을 가진 공항의 내부 텔레비전 시스템 고용자는 타이와 베트남 사이의 챔피언 축구 경기를 보는 것을 하드코어 포르노 영화 20초짜리 클립을 가지고 방해했다. 방콕 포스트가 리포트하길, 사건에 뒤이어 그 영상은 공항 비디오가 7일동안 계속해서 공항 비디오 스크린에 사과방송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그 아티클이 쓰길, 차른차이 이사라세나락이라는 교통부 장관 비서가 말하길, 장관은 국가의 명성에 누를 끼친 미디어 네트워크스(폐쇄회로 회사)를 당장 고발했다"라고 말했다.[27] 이 예에서 텔레비전의 전략적 제도적 공간의 담요는 순간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전술적 행위에 의해 방해됐으며 이 행위의 결과는, 더군다나, 비매개적 스크린의 공간보다 훨씬 넓은 네트워크를 따라, 그리고 긴 시간에 걸쳐 반향된다. ...
마이크로 레벨 속에서 전략과 전술 둘 다에서 텔레비전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특정성과 스케일의 정치가 이 책이 스크린과 환경 사이의 관계의 분석을 모양짓는 하나의 방식은 아니다. 다른 것은, 보기에 개념적이거나 용어적이거나 방법론적인 문제로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공공 장소의 텔레비전에 관해 검색할 때, 우리는 공공 시청각 장치의 농밀하고 분위기적인ambient 클러스터를 발견하는데, 곧이 곧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텔레비전에 관한 반쪽penumbral 규정으로 떨어지게 된다: 조금 적자면, 비디오 벽과 터치스크린, 동전 넣는 거치기계와 프로젝션 스크린, 테이프 플레이어, 케이블 시스템, 네트워크 이미지, 레이저 디스크 플레이어. 어떻게 우리는 권력과 루틴, 즐거움의 일상 영역에서 텔레비전의 역할을 탐침할 수 있을까? 테크놀로지적 용어로 그 미디엄을 정의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데? 실로, 이런 교착점에서, 나는 내 연구 목적을 규정하면서 미끄러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은, 결국에, 비디오의 헤테로지니어스 한 형태와 우리가 집밖에서 마주하는 방송 이미저리에겐 몹시 일반적인 용어다. 뉴욕타임즈스퀘어에 있는 다이아몬드비전 스크린은 내 동네 세탁소 코너에 있는 홈메이드 선반 위에 거치된 조그만 흑백 콘솔과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모든 텔레비전의 불확정적인 스케일을 까발리는, 그들의 주소address의 스케일은 전적으로 다른 "종들"에 그것들이 포함된다고 제안하는 것 같다.
궁극적으로, 내가 생각하길, 우리는 이런 미끄러짐성을 미디엄으로서의 텔레비전의 특정성의 부분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사회적 공간 속의 미디어 오브젝트로의 적응능력의 독특한 특징으로서 말이다. 우리가 텔레비전 세트의 분석 위에 탑승할 때 텔레비전이란 단어의 모호한 일반성을 하나의 테크놀로지적 형태와 다른 그것의 형태 사이의 예비적 방법론적 선택으로 만들기 위한 이유로 보고싶은 유혹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대안적으로, 텔레비전의 확장된 용어학을, 한때는 해결된, 더욱 세밀하고 "정확한 미디엄의 정의를 가져오는 이론적 문제로서 연구하기 위한 상황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덜 현학적인 옵션은 이런 것이다. 공간 속 오브젝트로서, 그리고 공간 사이의 관계로서의 텔레비전의 변증법적 질을 보존할지도 모르는 그런 옵션은 이런 테크놀로지적 다양성이 텔레비전의 장소특정성의 반영임을, 환경적 미디어 장체로서 그것의 유연성flexiblity의 반영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필름과는 다르게, 텔레비전은 장소 안에 엄청난 물리적이고 기술적인 조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변ambient의 빛 속의 많은 조정 없이, 감독 없이도 작동한다; 그것의 프로그래밍 소스는 쉽게 접근된다; 그리고 그것의 스크린 사이즈와 볼륨은 다양하다. 텔레비전은 모든 장소의 다른 전자 기기와 다른 미디어 형식, 다른 상업 디스플레이와 잘 섞인다. ...
하지만, 누군가가 미디엄으로서의 티비에 일반적으로 원인이 있다고 생각되는 공간적 작동으로 스크린의 장소의 관계를 사려할 때, 특정 장소에서 텔레비전의 장소특정적 작동의 분석을 위한 컨셉으로서 스케일의 복잡성과 그것의 가치는 몹시 명백하다. 테크놀로지적 장체로서의 텔레비전의 많은 이론가가 적었듯이, 텔레비전은 (포스트)모더니티의 공간적 프로세스의 도드라지는 표현이다. 모든 곳으로부터 오는 이미지의 소스로서, 한시적이고 자리잡을 없는 전자마그네틱 스펙트럼의 피직스와 상호작용하는 테크놀로지로서, 텔레비전은 오직 그것이 보여지는 장소의 비매개적 사회적 스케일 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사실인데, 텔레비전은 트랜스미션의 미디엄, 즉 거리distance를 가로지르는 커뮤니케이션의 미디엄이며, 그 말은--종종 시간적 비매개성의 아우라로 채워진--텔레비쥬얼한 재현은 이종적인 장소를 연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뮤엘 베버가 "공간-결속space-binding"--전자 미디어가 공간을 침잠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효과impression--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트랜스미션의 형이상학은 네트워크의 터미널 포인트, 즉 스크린을 다른 장소--스튜디오, 재난지역, 리모트 뉴스 장소--로 연결시키며, 이런 연결은 어떤 면에서 이런 공간과 스크린이 설치된 공간 사이의 거리를 붕괴시킨다. "실시간성", "공간-결속"이라고 부르든 "스케일-쉬프팅"이란 용어를 만들든 간에, 이런 공간적 조작의 속성, 그리고 그것들이 지탱하는 시간적 동시성의 신화는 티비스크린을 독특한 일종의 물체thing로 만든다.[30]
그러나 텔레비전의 "물체성thingness"은 그 공간성의 다른 사용역, 즉 시공간적 둘러쌈의 이데올로기를 따라서 존재하는 그것의 또 다른 사용역을 시사한다. 스피겔이 썼듯이, 텔레비전은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창문"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가구로서 동시에 특징화된다.[31] 그녀가 추적하는 전후 텔레비전의 가정으로의 도달 속에 있는 문화적 판타지와 불안은 가내 공간의 텔레비전의 퍼포레이션perforation 위에서만 중심화된 것이 아니라 스크린이 친숙한 것처럼 보이는 젠더화된 가정의 사회적 공간의 인테리어 배열 위에도 중심화된다. 텔레비전은 베버의 말에 따르면, "한꺼번에 최소한 세 장소에서" 존재하는 물체다.[32] 비평가들의 말을 따라 텔레비전이 지방과 지역성을 식민화하고 "대량성"이나 "민족성"으로 관람자를 표준화한다는 의미에서 공간과 시간을 텔레비전이 파괴한다면, 이것도 똑같이 진실인데, 가내의 보기 실천에 관한 많은 문학이 묘사하듯, 텔레비전은 공간-결속의 마이크로레벨의 힘으로부터 로컬의 요구를 확실히 구별시키는 데 복무하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 매일의 장소의 다양한 루틴으로 우리를 포함시키는 미디엄이다.[33] 브루노 라투르가 썼듯이, "긴 네트워크일수록 모든 포인트에서 로컬을 남긴다."[34] 우리가 텔레비전을 공간적 기구instroment(사회적 공간에서 동시에 물리적 오브젝트이면서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발생하는, 그리고 디스플레이되는, 발성enunciations의 소스로 접근할 수 있는 팩트는 스크린이 한 장소 이상에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의 스케일 이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로컬 프로세스가 이미지의 "글로벌" 제정화determination와 만나는 물리적 공간이다.[35]
더군다나, 장소 안의, 사이의, 스케일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성립시키는 시공간적 힘으로서, 텔레비전은 분명히 고도로 변증법적 퀄리티를 가진 사회적 아파라투스다. 장소특정적 방법으로, 특정한 공간 속의 이미지의 무거처적 공간을 물질화하는 가운데, 텔레비전은 데이비드 하비의 변증법적 추론의 간명한 정의를 예시화한다: "물체의 자기증명적 세계"에 관한 우리의 관심에 주목하는 대신에 텔레비전의 공간적 복잡성은 물체로서 표현되는 관계성과 흐름의 혼란스러운 세계"를 육화한다.[36] 이런 관점으로붗터 두 가지 분석적 스케일--정치경제학자의 마이크로레벨과 문화 리서처의 마이크로레벨--은 결국에 전혀 화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되려, 티비 세트와 티비 세팅의 문화 정치를 이해하는 데 절대적으로 둘 다 필요하다. 실로, 내가 여기서 아웃라인하는 텔레비전 테크놀로지의 로컬한 유연성은 더 넓은 경제적 사회적 유연성 개념과 유사하다. 아이화 옹Aihwa Ong이 썼듯이, 모더니티에서 플렉서블 개념과 실천의 부상을 위한 다양한 소스와 도메인이 출현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작동을 지시한다."[37] 어떻게 가라오케가 "싱가포르와 홍콩, 테이페이의 단면들"을 중국 본토의 일상 공간에 도입소개했지에 대한 옹의 설득력있는 분석은 다양한초국가성의 양태를 지역화하는 가은데 텔레비전 세트의 중요한 역할을 시연한다. 그런 역할을 향해 이 책은, 광범위한 미국적 제도적 포커스를 가지고 제스쳐만 할 수 있을 뿐이다.[38]
그러므로, 비록 이 책이 티비 스크린의 물리적 장소의 로컬한 특정성과 연관되지만, 똑같이 그것은 어떻게 미디엄의 더 넓은 이데올로기적 프로세스가 이 장소site 안에서 물질적 형태를 취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것과도 연루된다. 내가 계속해서 제안해왔듯이, 만약 스크린과 세팅의 마이크로레벨의 텔레비전 문화 정치가 장소에따라 몹시 다르게 보인다면, 아마 텔레비전과 가깝게 연관된 포괄적 이데올로기--그것의 공간-결착, 그것의 옵씬한 시각성--는 역설적으로, 고도로 그들의 수단means과 오퍼레이션 안에 로컬라이즈되어 있을 수도 있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텔레비전의 작동을 규정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할 때, 그것은 멈춰서, 미디어 이데올로기가 특정하나 장소에서 그것들이 스크린에 의해 구체적으로 만들어질 때 꽤나 다양하고 문맥적인 의미를 획득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고려하게 도와준다.[39] 내가 앞으로 논하겠지만, 우리는 문화 형식으로서의 텔레비전의 다양한 새로운 면모와 빌드된 공공 환경의 일부로서의 관람성을 감지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텔레비전의 다양한 스케일에 관한 효과 사이의 이런 불일치적 관계의 섣부른 화해를 피한다면 말이다. 다른 말로, 우리가 텔레비전이 공간-결착과 내가 장소특정성이라고 불러온 무엇을 모두 포괄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미디어 코퍼레이션을 규정하는 글로벌 네트워크 권력을 향한 소규모 스케일 스크린 실천과 연결되는 일상적 미디어 실천의 정치적 지형학과 매커니즘의 더 분명한 감각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자주 내가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하듯이, 다양한 장소site의 텔레비전 인스톨레이션은 제인 프로이어Jane Feuer가 라이브니스liveness라고 부른 텔레비전의 이데올로기를 재현한다: 문제의 방송이 "문자 그대로" 라이브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시그널을 동시에 전송하고 받을 수 있는 텔레비전의 기술적 능력으로부터 떠오르는 비매개성과 현전, 직접적 재현의 충만한 감각.[40] 이런 공간적 연결성과 붕괴의 이데올로기를 일깨우면서, 나는 어떻게 그것이 각각 안에서 다른 의미를 필요로 하면서 특정한 문맥에서 자리잡게 됐는지 시연하려고 한다. 바에서 집단적으로 보게 되는 스포츠 방송의 "라이브니스"와 전자상점의 디스플레이 모델 캠코더에 붙어 있는 모니터에서 뜻밖에 보게되는 누군가 자신의 이미지의 "라이브니스" 사이에는 굉장히 많은 차이가 있다. 장소에서 장소에 이르기까지, 물리적 스크린 설치의 관습에서부터 티비가 할 수 있는 무엇에 관한 주변적 담론에서의 관람자의 건설에 이르기까지, 환경과 스크린의 관계성에 함께 있는 표준화하고 개인화하는 힘의 특이한 혼합에 우리가 주목할 때, 우리는 이런 장소를 통치하는 제도를 특징화하는 내재적 모순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티비 스크린과 연관된 문화적 역능agency은 이런 혹은 저런 스케일--마이크로나 매크로--위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세팅 안에서 모든 스케일 사이의 관계성이 모양을 취한다는 이런 특정한 방식 안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한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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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가 공공 자소에서의 티비와 관계해 내가 정의해야만하는 마지막 지형학적 이슈로 이끈다: "장소"의 아이디어. 현행, "장소"는 미디어 스터디에서 우선적으로 특정한 나라의 지역이나 국가의 연방에 적용되는 컨셉이며, 그것은 가장 자주 국가 방송 시스템을 향한 지역의 관계의 논의에서 일깨워진다.[42] 내가 그리고자하는 장소의 개념은 최근의 지리학적 이론이 안에서 발전된 것이며, 다시 말하면 장소에 대한 그런 아이디어는 또한 어떻게 스케일 사이의 관계성, 특정성과 일반성의 인지 사이의 관계성이 특정한 담론과 실천의 배열을 통해 다양한 로컬리티 안에서 생산되는지에 관한 아이디어다. 이제 내가 제안하고 싶은, 장소는 로컬과텔레비전의 장소특정적 힘과 장치의 글로벌화하는 이데올로기의 공간결착과 "스케일 쉬프팅" 사이의 관계성을 이해하기 위한 중심적인 개념이다.[43]
정확히 어떤 종류의 지형학적 오브젝트를 이 단어 장소가 설계하는가? 장소는 진정한 "키워드"로서,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적었듯이, "그것의 의미의 문제는 논의되고 있는 그 문제와 밀접하게 엮여있다." 컨셉으로서, 장소란 말은 공간의 지형학자와 철학자에게 특정한 방법론적 도전을 부과한다. 언어학적 레벨에서 이것은 단어 장소가 공간적 차이화의 상식적 카테고리(우리가 다양한 문맥에서 매일 사용하는 것)와 지형학의 과학적 재현의 이론적으로 복잡한 유니트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경험적experiential인 명칭designations과 대상적objective인 명칭 사이의 이런 긴장은 니콜라스 엔트리켄J. Nicholas Entriken이 장소의 "사이성"--그것의 의미가 버내큘러적인 공간 어휘lexicons와 경험적인empirical 공간 어휘 사이의 무엇에 놓인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기억과 주체성은 카토그라픽적이고 양적인 과학에 스친다--이라고 부른 것이다.[44] 도린 매세이Doreen Massey와 하비 같은 막스주의 지형학자에게 이런 특정ㅇ성과 일반성 사이의 긴장은 정치적인 것만큼 인식론적이다. 각각은 다른 방식으로, 장소의 변증법적인 이해를 위해 논한다: 그들이 논하길, 장소는 배타적이고 무시간적이지 않을뿐만 아니라, 되려 "사회 관계의 더 넓은 네트워크 속에서의 특정한 순간이다."(매시)[45] 그것들이 제안하길, 장소site는 (종종 모더니티의 힘에 의해 위태로움에 빠졌더라도, 무시간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내재적인, 고정된 문화와 커뮤니티의 속성으로부터가 아니라, "밖으로부터의 개입과 영향의 장소 속에서 작동해 나가는 것을 통해"(하비) 구별적인 성격을 획득한다.[46]
이렇게 보다 더 변증법적인 관점으로부터, 그러니까 "물체로 표명된 관계와 흐름"으로서 장소에 접근했을 때, 공공장소 속 텔레비전과 비디오가 어떻게 결속되고 통합된 유나이티를 관통하는 파괴의 에이전트보다는, 그것들이 장소의 구축의 에이전트가 될 수 있는지 쉽게 볼 수 있다. 메시의 말로, 장소는 "더 넓고 더욱 로컬한 사회관계의 구별된 혼합체의 주목"이며, 거기서 "이런 관계의 중첩은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효과를 생산해낼지도 모르며,"[48] 그러므로 물론 텔레비전은 하나의 물리적 장소site에서 로컬과 글로벌을 혼합하고 중첩하는 이런 과정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장소를 향한 지리학적 접근은, 그리고 스케일과 공간적 관계 사이의 통로로서 텔레비전의 역할을 향한 지리학적 접근은, 일상 환경 속 티비 스크린(공간적 변화와 변형 속 텔레비전의 역할의 결정론적 계정을 덜 허락하는 것 대신 "장소의 비 감각"[49]으로서의 텔레비전의 더욱 예상가능한 내러티브 속에서 제공된 것)의 주목할만한 이데올로기적 유연력과 물질적 적응능력과 잘 맞다.
특정한 환경을 향한 텔레비전의 관계에 관한 대부분의 학문적 계정은 엔트리킨이 '일반적generic' 장소의 아이디어라고 부른 것을 통해 텔레비전 세트를 접근해야만 한다. 일반적 장소는 지구 위의 독특한 로케이션이 아니라(그가 지역 연구, 지도제작술chorography을 따라서 만든 "지도제작적 장소"라고 부른) 비교가능한 스케일과 사회적 비슷함, 제도적 관계 같은 인접성contiguities에 기반을 둔 장소의 카테고리화다. 우리는 명확한 아티클article--집, 바bar--을 사용함에 의해 일반적 장소의 이해를 드러낸다. 우리가 이런 환경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 말이다.[50] 그러나 장소는 또한--"지역"이라는 불분명한 카테고리부터 특정한 마을의 더욱 특정한 카테고리까지, 개별적 주택, 실제 가정에 이르기까지--지구위의 독특한 장소를 의미할 수도 있다. 내가 따라오는 챕터에서 말할 공간적 스토리는 "일반적 장소와 특별한, "지도제작적" 장소를 모두 포함한다.[51] 나는 장소의 특정한 일반적 퀄리티--교통의, 레저의, 소비의, 관료주의적 행정의 사이트로 설계된 공간--를 지지하는 가운데 스크린의 역할에 관해 일반적으로 주목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우리가 노동계급 바나, 중산층 가정이나, 디스카운트 몰 신발 리테일러의 일반적 공간에서, 티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도심 네이버후드의 삶이나 혹은 교외이거나 리테일링의 성장하는 풍경 안에 있는 그러한 장소를 모양짓는 더 넓은 역사적 과정--산업의 운동, 도심 발전의 투자, 인구재위치화--에 관한 무언가를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는 장소의 코로그라픽 센스와 함께 일반적인 센스도 필요로 한다. 이런 변화과정이 지역적으로 특정하기 때문에, 불균등한 발전의 로컬화된 과정에 의해 통제된다--도심재생 정치와 공장폐쇄는, 예를 들어, 도시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때때로 나는 어떤 일반적 사이트 속 티비를 둘러싼 그 레토릭과 실천에 관한 내 리딩을 실제 지역의 코로그라픽한 프로세스의 분석으로 보충한다.
따라오는 텔레비전의 공간적 이야기가 제너릭하고 코로그라픽한 장소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두 번째 길은 이 책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첫번째 절반은 특정 장소--상점, 대기실, 바--와 티비의 관계에 관한 제도적 담론에 우선적으로 주목한다. 어떤점에서 역사적인,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제도적 에이전트가, 텔레비전의 역사라는 선택된 관점에서, 주체와 공간, 이미지 사이의 장소특정적 관계성으로서 관람성의 결과에 관해 생각해 왔는지를 추적한다. 두 번째 절반의 이야기는 유니크한 사이트--실제 상점, 바, 레스토랑, 몰, 대기실--에서 티비 스크린의 물질적 실천을 추적한다. 실제 장소 속 특정한 스크린에 관한 이런 주목은 그러므로 고로그래픽하며, 그것은 사회공간에서 공공 스크린의 제도와 문화가 취하는 몹시 구체적이면서도 촉각적인 형태를 부여잡기 위해 사진이나 사진에 기반을 둔 아티스트의 렌더링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두 부분 모두에서 나는 제너릭한 장소--예를 들어 바the bar--의 감각과 특정한 장소--실제 바, 그것의 실제 티비 세트--의 감각 사이를 크로스오버하는 데 관심이 있다. 그 결과, 어떤점에서 라투르주의적 소스의 혼합체, 데이터, 인상은 어떻게 텔레비전 그 자체가 사이트 안에서 일반성과 특정성의 힘의 에이전트로서 복무했는지 진짜로 부여잡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처럼 보인다.
방법론과 지도
만약 티비가 장소특정적이어서, 주체에 관한 더 넓은 제도적 아이디어를 물질화하고, 다양한 마이크로레벨의 사회논리적 일상 영역 안에서 그 주체의 개별적 여정을 뒤쫒는다면, 그렇다면 그것을 향한 최고의 접근법은 로렌스 그로스버그의 용어 "독특한 문화연구의 논리: 그것은 이미 질문되어진 문맥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 질문은 자체는 그 문맥을 규정한다"를 향한 비판적 실천을 통한 것이다.[52] ......
제도적인 것과 루틴한 것에 관한 <앰비언트 텔레비전>의 관심은 이런 것을 의미한다. 집 밖 텔레비전 문화정치의 그 계정은 스크린문화의 스펙터클한 차원보다 일상적인 것banal을 더욱 강조한다는 뜻이다. 이런 견지에서 이 책은 공공 안의 표준적이고 저널리즘적인 계정으로부터 벗어난다. 그것은 전쟁이나 스캔달, 스포츠경기, 선거로부터의 미디어 이벤트에 관한 공공 의견의 증거를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티비를 보는 장소에 방문하기 위한 뉴스 리포팅의 세트피스다. <ambient television> 8
그러한 스텐스를 취하는 것은 아카데믹한 학제로서 복잡한 인식론적 지리학의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며, 또한 특히 몹시 까다롭고 변동적인 지리학적 지식의 카테고리, 즉 스케일로 들어가는 것이다. 네일 스미스가 규정했듯이, 스케일이란 "공간적 차이의 언어"다. 이 용어는 글로벌부터 로컬(하지만 이들 용어 스스로는 의미를 설정하지 못한다)에 이르는 차이를 다룬다--그것들은 근본적으로 관계적이며, 그들 차이를 통해 서로 서로를 구축한다. 스케일은 그러므로 문화연구에서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개념이다. 사적인 것의 결정determinations처럼, "로컬"을 설명해주는 것의 결정이란 권력에 의해 침투된다: "지리학적 스케일은 ... 경계를 결정하며 컨트롤이 발휘되고 다퉈지는 것 주변의 아이젠티티를 결합한다."[18] 스미스에게 스케일의 정치란 미국 도시에 있는 무거처성의 사회적 경험에 의해 쉽게 설명된다: 무거처성의 상태는 거리의 로컬한 스케일을 향한 개인적 활동을 제한하고 그런 스케일 위에 형성되는 콜렉티비티의 힘을 앗아가는데, 왜냐면 그것은 더 넓은 제도적 수준 위의 정의 및 권력의 작용과 연결되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막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민 영역 속으로의 참여를 차단하며, 그것을 고려해 봤을 때 후자로의 진입은 더욱 현저하게 스케일된 공간 속에 뿌리박힌다: 가정. 소유권과 돈, 고용, 소비의 장소.[19]
스케일의 개념은 텔레비전 연구에서 중심적이게 되는데 이유는 그것이 정치 경제학자의 문화연구적 비평으로서 특정한 방법론적 토론의 심장에 자리잡기 때문만은 아니다. 되려 그것이 미디엄 자체의 복잡성을 몹시나 생성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미지의 장소없는 생성성과 (그것들이 모든 사이즈의 스크린과 모든 종류의 공간에서 나타날 때) 그것의 터미널적 형태의 특정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신호화된 복잡성을 생성한다는 의미에서 스케일은 텔레비전 연구에서 중심적이다. 존 하틀리가 가정내 공간 속 티비에 관해서 썼듯이, "각각의 티비 프로그램은 백만 시청자에게 동일할지도 모르지만, "티비에" 무엇이 나오느냐--말 그대로 그것에--는 같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중요하다. ... 토대에서, 그러므로, 텔레비전 스크린이 그것을 둘러싼 비매개적 공간--수용의 마이크로 레벨--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는 일이란 어떻게 이 두 가지 스케일이 연결되어 있는지 묻는 일이며, 어떻게 이미지의 표준화한 "elsewhere"이 특정한 공간 속의 물질적 형식을 취하는지 탐험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란 환경 속 티비의 역할이, 이 연구의 케이스에서, 다양한 수준, 그러니까 어떤 장소 유형에 특정성--그러니까 공항 같은 "비장소"--을 부과하는 양자적 사회적 힘부터, 탑다운 제도 시스템(그것들에 관한 관람성 모델을 부과하려고 하는)에 이르는 다양한 수준의 모양을 취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을 포함한다.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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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스케일의 정치는 내 티비 연구를 다양한 방식으로 장소특정적 문화 형태로 모양짓는다. 무엇보다, 일반적인것과 특정적인 것 사이의 비동일성discrepancy의 감각은 언제나 일상의 분석 안에서 결합된다. 주체의 경험과 객관화하는 지식의 양태 사이의 긴장, 대량문화의 익명성과 개인과 문화에 의해 다양하게 전유되는 것의 형언 불가능한 특정성 사이의 긴장은 해결 되어야 할 분석적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마이크로 레벨 위에서 사회적 공간 생산의 다양한 양상이기도 하다. 루스 지아드Luce Giad가 썼듯이, "일상의 분석은 이론적인 것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그래서 특정하고 분위기적인 것에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 끊임없이 오고 갈 수밖에 없다."[22] 텔레비전은 이런 운동에 포획되어 있으며, 이것은 개인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 로컬한 것 대 대중적인 것, "장소" 대 "공간" 사이의 대립으로는 쉽게 매핑되지 않는다. 되려, 시간time과 거듭 환경적 담론과 퍼블릭 스크린의 실천은 상호간 가로지르며, 실로 각각 환경의 사회적 공간의 문법을 위한 기구로서 복무하면서 명백한 대립을 보여준다. 장소특정적 접근은 그러므로 정확하게 스케일에 맞춰질 수밖에 없으며 그것 위에 행위와 제스쳐, 언술행위가 특정한 환경 안의 텔레비전의 현전을 통하여 형성된다. 드 세라토가 티비 수상기의 전략--공간의 표준화 제도화 실천 안에서 그것의 활용--과 텔레비전의 전술--이것 안에서 스크린은 개인적 여정 위의 공간을 통해 유저가 통행할 때 유저의 일시적이고 불연속적인 오퍼레이션 안에서 착취되어지는 리소스로 복무한다--이라고 불렀을법한 무엇 둘 다를 시험하면서 말이다.[23]
많은 비평가가 지적햇듯이 과도하게 그 둘은 이분법적이지만, 드 세라토의 카테고리 쌍은 공공 공간 속 티비 스크린을 상황화하는 관계성에 관해 생각하기 위한 유용한 프레임워크를 제공한다.[24] 왜냐면 둘은 과정에 관한 우리의 주의를 주목하며 그것을 통해 제도와, 제도에 대한 도전은 마이크로 레벨 위의 물질적인 형태를 취하며, 그 둘은 미디어가 표류하는 공간 속 권력의 텍스쳐와 시각성에 관해 생각하기 위한 어휘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공항에서, 텔레비전 스크린은 여행자로서의 관람자의 시공간적 코디네이션의 플롯을 짜는 전략의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일종의 제도적 목소리로서 복무하면서 말이다. 쉽게 컴퓨터를 통해 업데이트된 출발과 도착을 방송하면서, 모니터는 트레픽을 조정하며 인간 정보-제공자information givers를 표준화된 목적 시간표로 대체한다. 패트리샤 멜란캠프가 썼듯이, 이런 스크린은 "'제시간on time'의 미션과 욕망"을 일시정지된 시간suspended time의 익명성 속에서 무시간성과 무맥락성, 고삐풀림, 비장소의 느낌을 주는 가운데 지원한다.[25] 그러한 장소 안의 상업적 실천은 비슷하게 장소에, 브랜딩 전략을 통해 의미의 그리드를 부과하며 작동한다. CNN 에어포트 네트워크의 케이스에서, 카-렌탈 광고와 스폰 받은 일기예보, 도착 도시에 관한 참조물은--관중의 정체경제학에서--광고주에게 팔기위한 공간 속에 관람자의 위치를 상업화하는 프로그램 형태다.
그럼에도 그러한 고도로 경찰화된, 상업 네트워크 전략은 또한 사용자 전술의 도구로 가능하기도 하다. 아주 단순한 수준에서 그것들은 어떤이가 앉아 있는 장소 속 인터렉션의 즉각적 장소로부터 어떤이를 떼어 놓는 방법을 제공한다. 내가 또 다른 진행중의 CNN 벤처--카페 USA, 푸드코트 엔터테인먼트 네트워크--를 보기 위해 쇼핑몰 푸드코트에 방문했을 때, 애 딸린 부모가 끊임없이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아이들은 장난치느라 그것을 무시하는 동안에 말이다. 분명하게도 스크린은 부모가 잠깐동안 가족의 세계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사용된 전술적 리소스였다.[26]
더욱 극명한 케이스에서 티비 수상기는 공간 속에서 저항적이거나 전술적인 기동술의 스케일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방콕의 돈 무앙 공항에서 텔레비전 스크린이 연루된 사건에 관한 최근 뉴스 리포트를 생각해보라. 이 상황에서, 방콕 포스트에 따르면, 명백하게 불만을 가진 공항의 내부 텔레비전 시스템 고용자는 타이와 베트남 사이의 챔피언 축구 경기를 보는 것을 하드코어 포르노 영화 20초짜리 클립을 가지고 방해했다. 방콕 포스트가 리포트하길, 사건에 뒤이어 그 영상은 공항 비디오가 7일동안 계속해서 공항 비디오 스크린에 사과방송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그 아티클이 쓰길, 차른차이 이사라세나락이라는 교통부 장관 비서가 말하길, 장관은 국가의 명성에 누를 끼친 미디어 네트워크스(폐쇄회로 회사)를 당장 고발했다"라고 말했다.[27] 이 예에서 텔레비전의 전략적 제도적 공간의 담요는 순간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전술적 행위에 의해 방해됐으며 이 행위의 결과는, 더군다나, 비매개적 스크린의 공간보다 훨씬 넓은 네트워크를 따라, 그리고 긴 시간에 걸쳐 반향된다. ...
마이크로 레벨 속에서 전략과 전술 둘 다에서 텔레비전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특정성과 스케일의 정치가 이 책이 스크린과 환경 사이의 관계의 분석을 모양짓는 하나의 방식은 아니다. 다른 것은, 보기에 개념적이거나 용어적이거나 방법론적인 문제로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공공 장소의 텔레비전에 관해 검색할 때, 우리는 공공 시청각 장치의 농밀하고 분위기적인ambient 클러스터를 발견하는데, 곧이 곧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텔레비전에 관한 반쪽penumbral 규정으로 떨어지게 된다: 조금 적자면, 비디오 벽과 터치스크린, 동전 넣는 거치기계와 프로젝션 스크린, 테이프 플레이어, 케이블 시스템, 네트워크 이미지, 레이저 디스크 플레이어. 어떻게 우리는 권력과 루틴, 즐거움의 일상 영역에서 텔레비전의 역할을 탐침할 수 있을까? 테크놀로지적 용어로 그 미디엄을 정의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데? 실로, 이런 교착점에서, 나는 내 연구 목적을 규정하면서 미끄러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은, 결국에, 비디오의 헤테로지니어스 한 형태와 우리가 집밖에서 마주하는 방송 이미저리에겐 몹시 일반적인 용어다. 뉴욕타임즈스퀘어에 있는 다이아몬드비전 스크린은 내 동네 세탁소 코너에 있는 홈메이드 선반 위에 거치된 조그만 흑백 콘솔과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모든 텔레비전의 불확정적인 스케일을 까발리는, 그들의 주소address의 스케일은 전적으로 다른 "종들"에 그것들이 포함된다고 제안하는 것 같다.
궁극적으로, 내가 생각하길, 우리는 이런 미끄러짐성을 미디엄으로서의 텔레비전의 특정성의 부분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사회적 공간 속의 미디어 오브젝트로의 적응능력의 독특한 특징으로서 말이다. 우리가 텔레비전 세트의 분석 위에 탑승할 때 텔레비전이란 단어의 모호한 일반성을 하나의 테크놀로지적 형태와 다른 그것의 형태 사이의 예비적 방법론적 선택으로 만들기 위한 이유로 보고싶은 유혹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대안적으로, 텔레비전의 확장된 용어학을, 한때는 해결된, 더욱 세밀하고 "정확한 미디엄의 정의를 가져오는 이론적 문제로서 연구하기 위한 상황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덜 현학적인 옵션은 이런 것이다. 공간 속 오브젝트로서, 그리고 공간 사이의 관계로서의 텔레비전의 변증법적 질을 보존할지도 모르는 그런 옵션은 이런 테크놀로지적 다양성이 텔레비전의 장소특정성의 반영임을, 환경적 미디어 장체로서 그것의 유연성flexiblity의 반영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필름과는 다르게, 텔레비전은 장소 안에 엄청난 물리적이고 기술적인 조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변ambient의 빛 속의 많은 조정 없이, 감독 없이도 작동한다; 그것의 프로그래밍 소스는 쉽게 접근된다; 그리고 그것의 스크린 사이즈와 볼륨은 다양하다. 텔레비전은 모든 장소의 다른 전자 기기와 다른 미디어 형식, 다른 상업 디스플레이와 잘 섞인다. ...
하지만, 누군가가 미디엄으로서의 티비에 일반적으로 원인이 있다고 생각되는 공간적 작동으로 스크린의 장소의 관계를 사려할 때, 특정 장소에서 텔레비전의 장소특정적 작동의 분석을 위한 컨셉으로서 스케일의 복잡성과 그것의 가치는 몹시 명백하다. 테크놀로지적 장체로서의 텔레비전의 많은 이론가가 적었듯이, 텔레비전은 (포스트)모더니티의 공간적 프로세스의 도드라지는 표현이다. 모든 곳으로부터 오는 이미지의 소스로서, 한시적이고 자리잡을 없는 전자마그네틱 스펙트럼의 피직스와 상호작용하는 테크놀로지로서, 텔레비전은 오직 그것이 보여지는 장소의 비매개적 사회적 스케일 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사실인데, 텔레비전은 트랜스미션의 미디엄, 즉 거리distance를 가로지르는 커뮤니케이션의 미디엄이며, 그 말은--종종 시간적 비매개성의 아우라로 채워진--텔레비쥬얼한 재현은 이종적인 장소를 연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뮤엘 베버가 "공간-결속space-binding"--전자 미디어가 공간을 침잠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효과impression--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트랜스미션의 형이상학은 네트워크의 터미널 포인트, 즉 스크린을 다른 장소--스튜디오, 재난지역, 리모트 뉴스 장소--로 연결시키며, 이런 연결은 어떤 면에서 이런 공간과 스크린이 설치된 공간 사이의 거리를 붕괴시킨다. "실시간성", "공간-결속"이라고 부르든 "스케일-쉬프팅"이란 용어를 만들든 간에, 이런 공간적 조작의 속성, 그리고 그것들이 지탱하는 시간적 동시성의 신화는 티비스크린을 독특한 일종의 물체thing로 만든다.[30]
그러나 텔레비전의 "물체성thingness"은 그 공간성의 다른 사용역, 즉 시공간적 둘러쌈의 이데올로기를 따라서 존재하는 그것의 또 다른 사용역을 시사한다. 스피겔이 썼듯이, 텔레비전은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창문"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가구로서 동시에 특징화된다.[31] 그녀가 추적하는 전후 텔레비전의 가정으로의 도달 속에 있는 문화적 판타지와 불안은 가내 공간의 텔레비전의 퍼포레이션perforation 위에서만 중심화된 것이 아니라 스크린이 친숙한 것처럼 보이는 젠더화된 가정의 사회적 공간의 인테리어 배열 위에도 중심화된다. 텔레비전은 베버의 말에 따르면, "한꺼번에 최소한 세 장소에서" 존재하는 물체다.[32] 비평가들의 말을 따라 텔레비전이 지방과 지역성을 식민화하고 "대량성"이나 "민족성"으로 관람자를 표준화한다는 의미에서 공간과 시간을 텔레비전이 파괴한다면, 이것도 똑같이 진실인데, 가내의 보기 실천에 관한 많은 문학이 묘사하듯, 텔레비전은 공간-결속의 마이크로레벨의 힘으로부터 로컬의 요구를 확실히 구별시키는 데 복무하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 매일의 장소의 다양한 루틴으로 우리를 포함시키는 미디엄이다.[33] 브루노 라투르가 썼듯이, "긴 네트워크일수록 모든 포인트에서 로컬을 남긴다."[34] 우리가 텔레비전을 공간적 기구instroment(사회적 공간에서 동시에 물리적 오브젝트이면서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발생하는, 그리고 디스플레이되는, 발성enunciations의 소스로 접근할 수 있는 팩트는 스크린이 한 장소 이상에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의 스케일 이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로컬 프로세스가 이미지의 "글로벌" 제정화determination와 만나는 물리적 공간이다.[35]
더군다나, 장소 안의, 사이의, 스케일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성립시키는 시공간적 힘으로서, 텔레비전은 분명히 고도로 변증법적 퀄리티를 가진 사회적 아파라투스다. 장소특정적 방법으로, 특정한 공간 속의 이미지의 무거처적 공간을 물질화하는 가운데, 텔레비전은 데이비드 하비의 변증법적 추론의 간명한 정의를 예시화한다: "물체의 자기증명적 세계"에 관한 우리의 관심에 주목하는 대신에 텔레비전의 공간적 복잡성은 물체로서 표현되는 관계성과 흐름의 혼란스러운 세계"를 육화한다.[36] 이런 관점으로붗터 두 가지 분석적 스케일--정치경제학자의 마이크로레벨과 문화 리서처의 마이크로레벨--은 결국에 전혀 화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되려, 티비 세트와 티비 세팅의 문화 정치를 이해하는 데 절대적으로 둘 다 필요하다. 실로, 내가 여기서 아웃라인하는 텔레비전 테크놀로지의 로컬한 유연성은 더 넓은 경제적 사회적 유연성 개념과 유사하다. 아이화 옹Aihwa Ong이 썼듯이, 모더니티에서 플렉서블 개념과 실천의 부상을 위한 다양한 소스와 도메인이 출현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작동을 지시한다."[37] 어떻게 가라오케가 "싱가포르와 홍콩, 테이페이의 단면들"을 중국 본토의 일상 공간에 도입소개했지에 대한 옹의 설득력있는 분석은 다양한초국가성의 양태를 지역화하는 가은데 텔레비전 세트의 중요한 역할을 시연한다. 그런 역할을 향해 이 책은, 광범위한 미국적 제도적 포커스를 가지고 제스쳐만 할 수 있을 뿐이다.[38]
그러므로, 비록 이 책이 티비 스크린의 물리적 장소의 로컬한 특정성과 연관되지만, 똑같이 그것은 어떻게 미디엄의 더 넓은 이데올로기적 프로세스가 이 장소site 안에서 물질적 형태를 취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것과도 연루된다. 내가 계속해서 제안해왔듯이, 만약 스크린과 세팅의 마이크로레벨의 텔레비전 문화 정치가 장소에따라 몹시 다르게 보인다면, 아마 텔레비전과 가깝게 연관된 포괄적 이데올로기--그것의 공간-결착, 그것의 옵씬한 시각성--는 역설적으로, 고도로 그들의 수단means과 오퍼레이션 안에 로컬라이즈되어 있을 수도 있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텔레비전의 작동을 규정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할 때, 그것은 멈춰서, 미디어 이데올로기가 특정하나 장소에서 그것들이 스크린에 의해 구체적으로 만들어질 때 꽤나 다양하고 문맥적인 의미를 획득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고려하게 도와준다.[39] 내가 앞으로 논하겠지만, 우리는 문화 형식으로서의 텔레비전의 다양한 새로운 면모와 빌드된 공공 환경의 일부로서의 관람성을 감지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텔레비전의 다양한 스케일에 관한 효과 사이의 이런 불일치적 관계의 섣부른 화해를 피한다면 말이다. 다른 말로, 우리가 텔레비전이 공간-결착과 내가 장소특정성이라고 불러온 무엇을 모두 포괄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미디어 코퍼레이션을 규정하는 글로벌 네트워크 권력을 향한 소규모 스케일 스크린 실천과 연결되는 일상적 미디어 실천의 정치적 지형학과 매커니즘의 더 분명한 감각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자주 내가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하듯이, 다양한 장소site의 텔레비전 인스톨레이션은 제인 프로이어Jane Feuer가 라이브니스liveness라고 부른 텔레비전의 이데올로기를 재현한다: 문제의 방송이 "문자 그대로" 라이브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시그널을 동시에 전송하고 받을 수 있는 텔레비전의 기술적 능력으로부터 떠오르는 비매개성과 현전, 직접적 재현의 충만한 감각.[40] 이런 공간적 연결성과 붕괴의 이데올로기를 일깨우면서, 나는 어떻게 그것이 각각 안에서 다른 의미를 필요로 하면서 특정한 문맥에서 자리잡게 됐는지 시연하려고 한다. 바에서 집단적으로 보게 되는 스포츠 방송의 "라이브니스"와 전자상점의 디스플레이 모델 캠코더에 붙어 있는 모니터에서 뜻밖에 보게되는 누군가 자신의 이미지의 "라이브니스" 사이에는 굉장히 많은 차이가 있다. 장소에서 장소에 이르기까지, 물리적 스크린 설치의 관습에서부터 티비가 할 수 있는 무엇에 관한 주변적 담론에서의 관람자의 건설에 이르기까지, 환경과 스크린의 관계성에 함께 있는 표준화하고 개인화하는 힘의 특이한 혼합에 우리가 주목할 때, 우리는 이런 장소를 통치하는 제도를 특징화하는 내재적 모순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티비 스크린과 연관된 문화적 역능agency은 이런 혹은 저런 스케일--마이크로나 매크로--위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세팅 안에서 모든 스케일 사이의 관계성이 모양을 취한다는 이런 특정한 방식 안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한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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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가 공공 자소에서의 티비와 관계해 내가 정의해야만하는 마지막 지형학적 이슈로 이끈다: "장소"의 아이디어. 현행, "장소"는 미디어 스터디에서 우선적으로 특정한 나라의 지역이나 국가의 연방에 적용되는 컨셉이며, 그것은 가장 자주 국가 방송 시스템을 향한 지역의 관계의 논의에서 일깨워진다.[42] 내가 그리고자하는 장소의 개념은 최근의 지리학적 이론이 안에서 발전된 것이며, 다시 말하면 장소에 대한 그런 아이디어는 또한 어떻게 스케일 사이의 관계성, 특정성과 일반성의 인지 사이의 관계성이 특정한 담론과 실천의 배열을 통해 다양한 로컬리티 안에서 생산되는지에 관한 아이디어다. 이제 내가 제안하고 싶은, 장소는 로컬과텔레비전의 장소특정적 힘과 장치의 글로벌화하는 이데올로기의 공간결착과 "스케일 쉬프팅" 사이의 관계성을 이해하기 위한 중심적인 개념이다.[43]
정확히 어떤 종류의 지형학적 오브젝트를 이 단어 장소가 설계하는가? 장소는 진정한 "키워드"로서,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적었듯이, "그것의 의미의 문제는 논의되고 있는 그 문제와 밀접하게 엮여있다." 컨셉으로서, 장소란 말은 공간의 지형학자와 철학자에게 특정한 방법론적 도전을 부과한다. 언어학적 레벨에서 이것은 단어 장소가 공간적 차이화의 상식적 카테고리(우리가 다양한 문맥에서 매일 사용하는 것)와 지형학의 과학적 재현의 이론적으로 복잡한 유니트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경험적experiential인 명칭designations과 대상적objective인 명칭 사이의 이런 긴장은 니콜라스 엔트리켄J. Nicholas Entriken이 장소의 "사이성"--그것의 의미가 버내큘러적인 공간 어휘lexicons와 경험적인empirical 공간 어휘 사이의 무엇에 놓인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기억과 주체성은 카토그라픽적이고 양적인 과학에 스친다--이라고 부른 것이다.[44] 도린 매세이Doreen Massey와 하비 같은 막스주의 지형학자에게 이런 특정ㅇ성과 일반성 사이의 긴장은 정치적인 것만큼 인식론적이다. 각각은 다른 방식으로, 장소의 변증법적인 이해를 위해 논한다: 그들이 논하길, 장소는 배타적이고 무시간적이지 않을뿐만 아니라, 되려 "사회 관계의 더 넓은 네트워크 속에서의 특정한 순간이다."(매시)[45] 그것들이 제안하길, 장소site는 (종종 모더니티의 힘에 의해 위태로움에 빠졌더라도, 무시간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내재적인, 고정된 문화와 커뮤니티의 속성으로부터가 아니라, "밖으로부터의 개입과 영향의 장소 속에서 작동해 나가는 것을 통해"(하비) 구별적인 성격을 획득한다.[46]
이렇게 보다 더 변증법적인 관점으로부터, 그러니까 "물체로 표명된 관계와 흐름"으로서 장소에 접근했을 때, 공공장소 속 텔레비전과 비디오가 어떻게 결속되고 통합된 유나이티를 관통하는 파괴의 에이전트보다는, 그것들이 장소의 구축의 에이전트가 될 수 있는지 쉽게 볼 수 있다. 메시의 말로, 장소는 "더 넓고 더욱 로컬한 사회관계의 구별된 혼합체의 주목"이며, 거기서 "이런 관계의 중첩은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효과를 생산해낼지도 모르며,"[48] 그러므로 물론 텔레비전은 하나의 물리적 장소site에서 로컬과 글로벌을 혼합하고 중첩하는 이런 과정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장소를 향한 지리학적 접근은, 그리고 스케일과 공간적 관계 사이의 통로로서 텔레비전의 역할을 향한 지리학적 접근은, 일상 환경 속 티비 스크린(공간적 변화와 변형 속 텔레비전의 역할의 결정론적 계정을 덜 허락하는 것 대신 "장소의 비 감각"[49]으로서의 텔레비전의 더욱 예상가능한 내러티브 속에서 제공된 것)의 주목할만한 이데올로기적 유연력과 물질적 적응능력과 잘 맞다.
특정한 환경을 향한 텔레비전의 관계에 관한 대부분의 학문적 계정은 엔트리킨이 '일반적generic' 장소의 아이디어라고 부른 것을 통해 텔레비전 세트를 접근해야만 한다. 일반적 장소는 지구 위의 독특한 로케이션이 아니라(그가 지역 연구, 지도제작술chorography을 따라서 만든 "지도제작적 장소"라고 부른) 비교가능한 스케일과 사회적 비슷함, 제도적 관계 같은 인접성contiguities에 기반을 둔 장소의 카테고리화다. 우리는 명확한 아티클article--집, 바bar--을 사용함에 의해 일반적 장소의 이해를 드러낸다. 우리가 이런 환경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 말이다.[50] 그러나 장소는 또한--"지역"이라는 불분명한 카테고리부터 특정한 마을의 더욱 특정한 카테고리까지, 개별적 주택, 실제 가정에 이르기까지--지구위의 독특한 장소를 의미할 수도 있다. 내가 따라오는 챕터에서 말할 공간적 스토리는 "일반적 장소와 특별한, "지도제작적" 장소를 모두 포함한다.[51] 나는 장소의 특정한 일반적 퀄리티--교통의, 레저의, 소비의, 관료주의적 행정의 사이트로 설계된 공간--를 지지하는 가운데 스크린의 역할에 관해 일반적으로 주목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우리가 노동계급 바나, 중산층 가정이나, 디스카운트 몰 신발 리테일러의 일반적 공간에서, 티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도심 네이버후드의 삶이나 혹은 교외이거나 리테일링의 성장하는 풍경 안에 있는 그러한 장소를 모양짓는 더 넓은 역사적 과정--산업의 운동, 도심 발전의 투자, 인구재위치화--에 관한 무언가를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는 장소의 코로그라픽 센스와 함께 일반적인 센스도 필요로 한다. 이런 변화과정이 지역적으로 특정하기 때문에, 불균등한 발전의 로컬화된 과정에 의해 통제된다--도심재생 정치와 공장폐쇄는, 예를 들어, 도시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때때로 나는 어떤 일반적 사이트 속 티비를 둘러싼 그 레토릭과 실천에 관한 내 리딩을 실제 지역의 코로그라픽한 프로세스의 분석으로 보충한다.
따라오는 텔레비전의 공간적 이야기가 제너릭하고 코로그라픽한 장소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두 번째 길은 이 책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첫번째 절반은 특정 장소--상점, 대기실, 바--와 티비의 관계에 관한 제도적 담론에 우선적으로 주목한다. 어떤점에서 역사적인,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제도적 에이전트가, 텔레비전의 역사라는 선택된 관점에서, 주체와 공간, 이미지 사이의 장소특정적 관계성으로서 관람성의 결과에 관해 생각해 왔는지를 추적한다. 두 번째 절반의 이야기는 유니크한 사이트--실제 상점, 바, 레스토랑, 몰, 대기실--에서 티비 스크린의 물질적 실천을 추적한다. 실제 장소 속 특정한 스크린에 관한 이런 주목은 그러므로 고로그래픽하며, 그것은 사회공간에서 공공 스크린의 제도와 문화가 취하는 몹시 구체적이면서도 촉각적인 형태를 부여잡기 위해 사진이나 사진에 기반을 둔 아티스트의 렌더링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두 부분 모두에서 나는 제너릭한 장소--예를 들어 바the bar--의 감각과 특정한 장소--실제 바, 그것의 실제 티비 세트--의 감각 사이를 크로스오버하는 데 관심이 있다. 그 결과, 어떤점에서 라투르주의적 소스의 혼합체, 데이터, 인상은 어떻게 텔레비전 그 자체가 사이트 안에서 일반성과 특정성의 힘의 에이전트로서 복무했는지 진짜로 부여잡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처럼 보인다.
방법론과 지도
만약 티비가 장소특정적이어서, 주체에 관한 더 넓은 제도적 아이디어를 물질화하고, 다양한 마이크로레벨의 사회논리적 일상 영역 안에서 그 주체의 개별적 여정을 뒤쫒는다면, 그렇다면 그것을 향한 최고의 접근법은 로렌스 그로스버그의 용어 "독특한 문화연구의 논리: 그것은 이미 질문되어진 문맥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 질문은 자체는 그 문맥을 규정한다"를 향한 비판적 실천을 통한 것이다.[52] ......
2018년 1월 7일 일요일
2018년 1월 5일 금요일
심은진, <바쟁과 텔레비전> 중에서
“텔레비전의 즐 거움은 스펙터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 보는 사람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환상에 토대를 둔다.” 6)
텔레(téle-비전vision은 멀리서 본다는 의미이다. 영화는 커다란 스크린 위에 관객의 욕 망을 투사하면서 관람의 즐거움을 만들어 준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이미지가 투사되는 표면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텔레비전은 우리 시각 기관의 연장처럼 기능하며, 보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영화는 무엇을 보는가가 중요하다면, 텔레비전은 본다는 행위가 중요하다. 즉 이미지를 동시에 도처에서 본다는 행위, ‘현전présence’이 중요한다. 텔레-비전, 멀리서 본다 는 것은 멀리서(téle)-현전(présence)하는 것이다. 바쟁은 ‘현전성’을 텔레 비전의 중요한 특징으로 설명한다. “텔레비전은 각자가 증인이 되는 예 술이다.” 7) 심은진, <바쟁과 텔레비전> 143-4
바쟁의 딜레마는 재현 매체인 영화가 전송 매체인 텔레비전의 생방송 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었다. 1955년 영화를 각색한 <죄 와 벌Crime et Châtiment>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한 글에서 바쟁은 영화가배울수있는점을말한다. 이드라마에서살인장면은이미촬영 된것을끼워넣은것이지만, 드라마전체가나무랄바없이잘연출되었
. 바쟁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드라마 전체가 이미 촬영된 이었다면? 그래도 생방송처럼 전달되지 않았을까?”25) 그는 촬영과 제 이 아니라 수용의 관점에서, 즉 시청자의 관점에서 생방송 형식에 대
해 생각하게 된다. 비록 생방송이 아니더라도 생방송 형식으로 제작된 드라마는 보는 사람에게 생방송의 효과를 만들어 낸다고 설명한다. 바쟁 은 이것을 ‘지연된 생방송’이라고 표현한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미래는 영 화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개량된 생방송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26) 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