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보다 "제도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의 조건이 창조되고 영속화하는 데 있어 우리의 역할을 부인한다. 우리는 일상의 공모, 타협, 검열--무엇보다 자기 검열--에 대해 책임을 거부하거나 그것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 필드에 있는 우리의 관심과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이끌어내는 이익에 의해 추동된다. 이것은 안이나 밖에 대한 질문이나, 예술의 생산과 프레젠테이션과 배포를 위해 다양하게 조직된 장소의 수와 스케일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이것은 제도에 맞서며 있기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우리는 제도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제도인지에 대한 질문이며 우리가 제도화하는 것이 어떤 종류의 가치이냐는 질문이며, 우리가 얻는 보상이 어떤 실천의 형태인지에 관한 질문이며, 우리가 열망하는 것이 어떤 종류의 보상인지에 관한 질문이다. 예술의 제도가 개인에 의해 내면화되고, 육화되고 , 수행되기 때문에, 이런 질문들은 곧 제도 비판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물어볼 것을 요구한다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이런 자기-질문(self-questioning)--"제도" 같은 테마적인 것보다 훨씬 더, 이것이 얼마나 광의적으로 정의되든 간에--은 제도 비판을 실천으로 정의한다는 의미다. 뷔르거가 언급했듯이, 만약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자기비판이 "자율적 예술을 폐기"하고 "삶의 프락시스로" 그것을 통합하는 것을 의도했다면, 그것은 목표와 전략 모두에서 실패했다.[12] 그러나, 이 실패를 표식하는 그 제도화는 제도비판의 조건이 된다. 실패과 그것의 결과를 인지함으로써 제도비판은 예술의 제도를 분해하거나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는 네오아방가르드의 한층 나쁜 신념으로부터 돌아서서 바로 그 제도를 지키려고 했다. 아방가르드의 "자기비판"의 제도화가 그 제도에 가능성을 창조하며 말이다: 비판의 제도. 그리고 바로 이런 제도화는 제도비판으로 하여금 예술의 제도를 재판하게 한다. 제도의 합법화 담론의 비판적 요청에 맞서는, 저항과 논쟁의 장소로서 그것의 자기 재현에 맞서는, 급진성의 신화와 상징적 혁명에 맞서는.
=>비판의 제도는 제도가 내면화된 예술가(제도)의 자기질문. 예술가가 제도 자체.
2019년 7월 2일 화요일
2019년 6월 10일 월요일
from Picasso and Truth
"So it seems that Kahnweiler responds in exactly the way Picasso's kind of l-saying invites when he says that the picture of Marie-Therese looks as if it had been painted by a goat-man or a giant. He sees straight away that what the picture articulates is another's eroticism, a dream of the body's availability as it might manifest itself in a more (or less) than human world. The remark thrown out by Picasso himself a few days earlier, about the blind man and touch, is characteristic, not least in its lack of originality. but strikes me as leading viewers in the wrong direction. Touch-the imagination of contact and softness and curvature-is consumed in the Nude on Black Armchair by something else: a higher, shallower, in the end more abstract visuality, which will never be anyone's property. The nude's near hand, holding on to the clawlike white flower, is an emblem of this: fingers and petals become pure (predatory) silhouette. The body's pale mauve is as otherworldly a color-as unlocatable on the spectrum of flesh tone-as the yellow and orange in the sky. Maybe in the picture night is falling. The blue wall to the left is icy cold. The woman's blonde hair is sucked violently into a vortex next to her breast. Blacks encase her as iffor eternity. The rubber plant tries to escape through the window.
Which is to say- I am adopting Kahnweiler's strategy, of course, and casting about for metaphors appropriate to a metaphorical triumph-that the picture's whole point seems to be that "Marie-Therese" is both thereand not-there in the space provided; and that the same goes, a fortiori, for who- or whatever brought her into (non)being. Is the black-and-mauve body close to that being, and to us looking on from that being's place? Or far away? Is it touchable or untouchable? Exultant or comatose? Compli- ant or self-enclosed?" (10-11)
Which is to say- I am adopting Kahnweiler's strategy, of course, and casting about for metaphors appropriate to a metaphorical triumph-that the picture's whole point seems to be that "Marie-Therese" is both thereand not-there in the space provided; and that the same goes, a fortiori, for who- or whatever brought her into (non)being. Is the black-and-mauve body close to that being, and to us looking on from that being's place? Or far away? Is it touchable or untouchable? Exultant or comatose? Compli- ant or self-enclosed?" (10-11)
2019년 5월 22일 수요일
Naum Gabo, Antoine Pevsner 중에서
구축주의 예술가가 겨냥한 것은 “진짜 현실의 선명한 비전”을 주는 것이었고, 때문에 이 목표는 본질적으로 미학적 활동이 아니라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과학의 객관성(objectivity)와 예술의 창조성(creativity)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 하나는 “정보(inform)를 주려고” 하며, 다른 하나는 “즐거움(please)을 주려고” 한다. 예술작업에 의해 제공되는 즐거움은 감정의 탐닉이나 감수성의 채널을 취할 필요가 없다. 즐거움은 인식의 다양한 급으로부터 도출되며 순수한 즐거움은, 내가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관점에 따르면, 지적이면서도 (동시에) 감성적이다. 이런 가장 정제된 즐거움의 급은 오직 훈육된 노력을 향한 응답에서 주어진다. 이런 예술의 훈육은 a) 구축 기술(skill) b) 선택적 관찰 c) 통합적 비전이다. 기술과 관찰은 모든 유형의 예술에서 필수적이며 그 효과에서 예술 작업들은 질적으로 차이가 크지 않다. (가보가 실천한 관찰은 레오나르도나 콘스터블이 싶언한 관찰과 다르지 않다.)
Herbert Read, "Introduction," Naum Gabo, Antoine Pevsner,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48,) exhibition catalogue, p. 11.
Herbert Read, "Introduction," Naum Gabo, Antoine Pevsner,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48,) exhibition catalogue, p. 11.
2018년 8월 7일 화요일
2018년 8월 4일 토요일
2018년 7월 19일 목요일
매저키즘 중에서
매저키즘의 주체가 속좌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자신과 아버지의 유사성, 자신 내부에 숨어 있는 아버지와의 닮은 모습이다. 매저키즘의 공식은 바로 굴욕을 당하는 아버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매질을 가하는 사람이 아니라 매질을 당하는 사람이다. 세 명의 어머니들에 대한 환상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의 하나는, 모든 아버지의 기능을 이 세 명의 여성들에게 상징적으로 전이시키거나 재분배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제외되며, 아버지의 가치 또한 완전히 무시된다. 대부분의 마조흐 작품에는 사냥하는 장면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매저키스트의 이상적인 여성이 곰이나 늑대를 사냥하고 그 털가죽을 벗긴다. 이것을 남성에 대한 여성의 상징적 저항이며 여성이 결국 승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매저키즘의 시작은 여성이 이미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곰과 털가죽에는 독자적인 여성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동물은 탄생 이전의 어머니, 고대의 창녀와 같은 어머니를 나타내며, 구강적 이미지의 어머니를 위해 사냥감이 되어 쫓기고 털가죽을 벗기우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아버지의 역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제2의 탄생, 단성생식에 의한 재생을 위한 것이다.
2018년 7월 15일 일요일
from Helene Cixous, Fiction and Its Phantoms: A Reading of Freud's Das Unheimlich
올랭피아에 대한 노트; 혹은 샌드맨의 또 다른 이야기: 노트의 형태에서, 사실은, 프로이트는 2번째 내러티브를 우리에게 주는데, 그것은 아마도 오직 "재설립된reestablished," 첫번째이자 오리지널 버전일뿐이며, 케이스의 해석(interpretation)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이 요소들과 함께 시작하는 창작자의 상상에 의해 초래된 전치(displacement)가 아니라 말이다. 더 이상 샌드맨에 대한 질문이 여기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분석 버전에 대한 질문이 있다. 코펠리우스는 여기서 가공할만한 아버지로 설정된다. 프로이트는 신경증으로 인해 겪는 것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는 신화의 구조를 만든다. 이 샌드맨은 (Obsessed-Man으로부터 빌려온 몇몇 요소들을 가지고 한) 울프맨의 은밀한 재독해이기도 하다[10]: 나타니엘의 메이드의 기능과 울프맨의 난자의 기능; ... 분명하게도, 그 아날로지는 과학적 가치를 가지지 않지만 이 이야기의 명백한 citation인데, 그 이야기는 이 분석의 나머지를 성격화한다 (프로이트가 Kleiner Schriften zur Neurosenlehre를 참조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유아기때 아버지를 향한 나타니엘의 페미닌한 태도의 인격화 이상일 수 없다"라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분명하게도! 호모섹슈얼리티가 이 챠밍한 인물 아래의 리얼리티 속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올랭피아는 나타니엘에게서 떨어져나간 컴플렉스 이상이다. 만약 올랭피아가 그것 이상이 아니라면, 왜 춤과 노래, 메커니즘, artificer가 게임에 도로 데려와지거나 프로이트에 의해 이론화됐을까? 독일 낭만주의 무대를 배회하는 이 꼭두각시를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기대했던 것일까?[11]
거듭, 그 아름다운 올랭피아는 그녀가 재현하는 것에 의해 지워진다. 프로이트는 그녀를 위한 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여성은 옵씬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녀는 "누군가one"가 그녀가 나타날 거라고 기대하지 못한 곳에서 출현하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프로이트가 우회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만약 그 인형이 여성이 된다면? 만약, 그녀를 보는 가운데, 우리가 그녀를 애니메이션 시켰다면?
오래되어 정리된(superannuate), 그 씬으로부터 격리된, 그 인형이 밖으로 나온다 . . . 두 개의 행위 사이에서. (538)
2018년 7월 8일 일요일
Laura Wertheim Joseph, Messy Bodies and Frilly Valentines: Charlotte Moorman's Opera Sextronique
샬럿 무어먼은 학창시절부터 페미닌. 심지어 병실에서도 메이크업과 헤어스프레이를 쥐고 놓지 않음.
백남준은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Room for Charlotte Moorman>을 설치. 무어만이 좋아하던 가운들.
무어먼의 커리어는 페미니즘 제2물결과 동시에 있음. 그에 따르면 무어먼은 스테레오타입의 페미니니티를 가지고 있음. 그래서 마사 로슬러가 비판: 백남준의 프로젝트의 "body as an instrument that plays itself."그 당시 분위기란 1968년 미스 아메리카에 반대하는 데모를 여성 단체가 함. 브라를 던지고... (<Topless Cellist>에 따르면 무어만이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티비 브라>를 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라는 사실.)
무어먼은 남부 미국의 페미니니티의 관습을 가지고 있었음. 무어먼이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통해 경찰에 잡혀갔을 때, 그녀가 드러낸 페미니니티를 향한 페미니즘 진영의 감정은 좋지 않았음. 세컨 웨이브 페미니스트 Andrea Dworkin은 무어먼을 harlot창녀라고 부름. 또 그녀의 커리어를 process of extended rape라고 함. 플럭서스 동료 엘리슨 놀즈는 무어먼의 subservience와 유아성에 비관적이었음.(charlotte moorman: cello anthology 씨디의 평론 참고)
...
브루스 맥퍼슨이 <More Than Meat, Joy>, 슈니만의 퍼포먼스와 글 선집의 미드커리어 연구를 기획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슈니만에게 글을 하나 기고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슈니만은 맥퍼슨의 손편지에게 손글씨 메시지를 더했다. 그녀는 이렇게 메모했다:
우리의 길고 환상적인 공유된 모험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마음에 들어 온다. 아마도 당신의 첫 번째 누디티에 관한 스토리, 내가 발코니 오르막을 위해 무척 느슨하게 종이를 당신 주변에 달았을 때?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던지! 사랑하는 C.
"첫 번째 누디티"에 관해서 슈니만은 칼하인츠 슈톡하우젠의 <오리기날레>의 미국 프리미어에서 발생했던 레퍼런스를 만든다. 백남준은 실제로 이렇게 주장했는데, 무어만이 섹스를 가지고 음악을 증폭시킨다는 뜻으로 선진화된 음악을 향한 백남준 자신의 욕망에 복무하는 가운데 세미누드를 어필하라고 무어만을 설득한 최초의 사람이 자신이라고 말이다. (1965년 파리에서 무어먼은 백남준의 <생상의 테마에 관한 변주곡>을 위해 가운 대신에 셀로판을 입었다.)[28] 그러나 그 해보다 전에, 슈니만의 제안에서 무어만은 <오리기날레> 캐스트에서 "현악기주자"를 연주한 저녁 동안 얇은 거즈로 몸을 감싸는 것을 어필했다. 인터뷰에서, 무어먼은 또한 그녀의 누디티에 관한 첫 번째 실험에 관한 기억을 슈톡하우젠의 스코어가 표시한 기간동안 "그녀 자신을 연주했을" 때라고 더듬었다. 의상의 적용에 슈니만의 크레딧을 주기 보다는, 무어만은 앨런캐프로, 미국 프로덕션의 디렉터가 무어만을 "디페미나이즈defeminize"하는 노력 가운데 제안을 만들었다고 리포트했다.[30] 무어먼은 어떻게 (예상과는 다르게!) 얇은 페브릭이 자신의 페미닌한 보디 피쳐를, 그것으로부터 주의를 돌리는 게 아니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는지 강조하면서 그 일화를 끝맺는다.
슈니만의 실망에 관해서 이야기 하자면, 무어먼이 슈니만이 책임성을 갖고 있었던 퍼포먼스의 요소를 캐프로에게 크래딧을 주는 일은 한 번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다음 해, 무어먼의 세 번 째 연례 아방가르드 페스티벌(1965)에서, 슈니만은 캐프로의 해프닝 <Pull and Push>의 제 고유한 버전을 감독했다. 작품 지시보에 따르면, 그녀는 저드슨 홀을 퇴장한 다음 혼합매체 환경을 만드는 데 사용하기 위한 부드러운 메터리얼을 찾으면서 57번가를 쏘다니기 위해 초대됐다. 슈니만은 그 이벤트에는 "광란"이 따랐다고 그렸는데, 참여자는 차로부터 허브캡을 찢었고, 금속 포스트로부터 길표시를.... 경찰의 시선을 끌었다.[32] 체포를 피하기 위해 슈니만과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의 참여자 몇몇은 뒷문을 통해 탈출해 텍시에 뛰어 들었다.[33]
몇년이 지난 뒤, <소호 뉴스>를 위해 제랄드 마조라티와 인터뷰를 하는 당시, 무어먼은 그 날의 카오스적인 사건에 관해 회상했는데, 쿠어먼은 "그 폭동"의 책임이 슈니만이 아니라 캐프로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인터뷰를 읽은 다음, 슈니만은 무어먼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 슈니만은 많은 근심 걱정을 표현했다. 슈니만은 그 사건이 일어나던 때 만약 <Push and Pull>의 [자신의] 디렉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발전이 생겼다면, 그것이 앨런--더 일려지고, 존경받는, 남성--에게 다이렉트로 축적될까봐 두렵다고 덧붙였다. 프로덕션을 캐프로에게 크레딧을 줌으써, 무어먼이 슈니만이 "최근 역사의 많은 왜곡... 오래된 관력, 남성적 전통...."이라고 부른 것에 기여한다고 슈니만은 주장했다. 슈니만은 무어먼이 그 당시 분위기를 분명하게 기억해주길 바랐다: <Push and Pull>은 그녀 자신과 무어먼 사이의 콜라보레이션이었다. 그것은 무어먼이 오거나이즈했던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의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35] (48-9)
...
무어먼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의 퍼포먼스가 왜 예술비평과 예술사에 깔린 우세한 규범에 위협을 만들었는 명확하다고 해도, 나는 왜 무어먼이 페미니즘 예술의 역사 안에서 자신의 장소를 찾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시대의 페미니즘 바디아트가 노스킬이나 비예술성 때문에 조롱받았던 반면, 무어먼은 바로 그 페미니스트에게 비난받았는데, 이유는 그녀의 퍼포먼스에서, 무어먼은 그녀의 신체와 그녀의 기교를 모두 디스플레이했기 때문이다. 무어먼은 자신의 노동과 기교 안의 일종의 에이전시를 주장하는 동안, masquerade의 퀄리티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페미니니티의 퍼포먼스에서 일종의 에이전시를 주장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 두 가지 전략 가운데의 긴장이었다. 그 방법 안에서 그 둘은 불협했고 서로를 문질렀다. 그것은 무어먼의 신체--노동하고laboring 파업하는striking 포즈로서의 신체--를 몹시 읽기 난해하게 만들었다.
클래식 첼로를 플레이하기 위한 무어먼의 농축된 품행과 능력은 종종 전통적 음악의 젠더화된 위계에 복종하는 표시일뿐이라고 묵살당했다. 그녀의 페미니니티의 디스플레이가 헤테로섹슈얼하고 가부장적 규범을 유지시키는 데만 오직 복무하는 가운데 작동하고 있다고 추정되면서 말이다. 탈식민적 페미니스트 사바 마무드는 서구 페미니스트가 어떤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사실이란 특정 불화의 전략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종속이라고 이해하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거장 피아니스트의 예를 제공하는데, 그녀는
<An Artist in the Courtroom>에서 무어의 증언에 관한 무어먼의 논의에서, 무어먼은 내가 결론내고 싶은 바에 관해 명확한 포인트를 제공한다. 그녀는 자신의 퍼포먼스의 의도가, 무어가 제안한 것처럼, 사회의 풍습을 과시적으로 무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가짜와 위선을 [풍자하기]위해 서였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그를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데로 나아간다: "아이러니의 중첩은 새로운 [퍼포머티브한] 접근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아이러니의 포인트는 예술적 긴장을 ... 창조한다."[74] 그러한 긴장--주체성과 객채성, 명연주자와 장난감, 브람스와 비키니, 예술과 포르노그래피--는 역사가가 종종 정돈하려고 생략하는 지저분함을 창출한다. 되려, 나는 이렇게 제안한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젤리같고 클라우디한, 스테이지 위에서 서성거리는 범핑 바디"의 불결정성에 남아 있다고. (56-7)
훈육적 실천의 고통스러운 체제에 그녀 자신을 내주는 것 만큼 견습기간의 위계적 구조를 향해 자신을 내준다. 능숙한 솜씨로 악기instrument를 연주하기 위한 능력--필요한 에이전시--을 얻기 위해서. 중요하게도, 그녀의 에이전시는 가르침을 받아야만 하는 그녀의 능력에 입각된다. 그 컨디션은 클래식하게 "순종성"으로 참조된다.[72]마무드가 참조하는 전통적인 콘서트 관습 안에서, 페미닌한 드레스와 행위는 프로페셔널한 여성 첼로주자의 "레퍼토리"의 완전히 중성적인 요소다. 그녀가 첼로 자체와 가지는 관계성처럼 말이다.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무어먼은 이 관습을 향하는 식별 가능한 레퍼런스를 만든다--재판에서 무어먼은 코트에게 이렇게 강조했는데, 두 아리아를 위한 그녀의 앙상블은 콘서트 의상으로서 참조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검사 갈리나가 의심했듯이, 그리고 피고쪽 증인 카만 무어가 확증했듯이, 무어먼 또한 질문에 그러한 음악적 관습의 중성화를 요청하는 데 있어, "전자 비키니"와 상반신탈의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masquerade와 퍼포머티비티의 명백한 레퍼런스를 만든 마스크와 소품을 통해서도 그렇게 했다. 무어먼은 이렇게 전통적 여성 음악가의 노동을 말소하고 미학화는 것에 대한 주목을 요청한다.
<An Artist in the Courtroom>에서 무어의 증언에 관한 무어먼의 논의에서, 무어먼은 내가 결론내고 싶은 바에 관해 명확한 포인트를 제공한다. 그녀는 자신의 퍼포먼스의 의도가, 무어가 제안한 것처럼, 사회의 풍습을 과시적으로 무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가짜와 위선을 [풍자하기]위해 서였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그를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데로 나아간다: "아이러니의 중첩은 새로운 [퍼포머티브한] 접근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아이러니의 포인트는 예술적 긴장을 ... 창조한다."[74] 그러한 긴장--주체성과 객채성, 명연주자와 장난감, 브람스와 비키니, 예술과 포르노그래피--는 역사가가 종종 정돈하려고 생략하는 지저분함을 창출한다. 되려, 나는 이렇게 제안한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젤리같고 클라우디한, 스테이지 위에서 서성거리는 범핑 바디"의 불결정성에 남아 있다고. (56-7)
2018년 7월 5일 목요일
2018년 6월 22일 금요일
2018년 2월 9일 금요일
from Christine Mehring, Television Art's Abstract Starts: Europe circa 1944-1969, October (125), Summer 2, 2008
모든 과거의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와는 다르게,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우선적으로, 우선적으로 컨텐츠를 정의하지 않거나 거의 하지 않은 채로, 추상적 프로세스로서 전송하고 수용하기 위해 고안된 시스템이다. 컨텐츠에 관한 질문이 부상했을 때, 그것은 해소됐다, 대체로, 의존적으로parasitically. . . . 그것은 수요에 우선하는 방송 시설의 보급인 것만이 아니었다. 그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은 컨텐츠에 우선했던 것이었다. - 레이먼드 윌리엄스, 텔레비전 (p. 29)
It was made by artists who primarily worked nonfiguratively in other media and who used the new medium to produce abstract images of a self-reflexive nature. Modernist artists and critics routinely posited abstraction as the culmination of a process of reduction of long-established media like painting and sculpture to their essence. By contrast, the pioneering television artists turned to already-established abstraction in a foundational gesture of isolating the medium's essence to open up yet unknown possibilities. The implications of this are twofold. For one, the essential qualities they turned up paradoxically mapped onto preexisting concerns that had emerged from their work in more traditional media. (p. 30)
It was made by artists who primarily worked nonfiguratively in other media and who used the new medium to produce abstract images of a self-reflexive nature. Modernist artists and critics routinely posited abstraction as the culmination of a process of reduction of long-established media like painting and sculpture to their essence. By contrast, the pioneering television artists turned to already-established abstraction in a foundational gesture of isolating the medium's essence to open up yet unknown possibilities. The implications of this are twofold. For one, the essential qualities they turned up paradoxically mapped onto preexisting concerns that had emerged from their work in more traditional media. (p. 30)
2018년 1월 8일 월요일
from ambient television
"텔레비전을 장소특정적 형태로 보는 것 안에, 그리고 특정한 장소 속 그것의 역할을 적절하게 통찰하는 것 안에 포함되어 있는 그 도전의 예비적 힌트는 비-가내적nondomestic 티비 장소를 카테고리화하는 불편하고 뜻하지 않은 용어를 불러 일으키는데, 그것은 이 연구의 기반을 형성하는 바다. 우리가 비록 쇼핑몰이나 레스토랑 같은 장소를 "공공" 장소라고 부르지만, 어떤 점에선 사적이기도 하다. 그런 장소는 사적으로 소유될 수 있으며, 특정한 무리들이나 개인의 접근을 제한할 수도 있으며, 그 장소 안에서 어떤 종류의 발언이나 행위를 제한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러한 장소sites는 공공적이지도 사적이지도 않은반면, 어떤점에선, 그런 장소는 공공과 사사로움 사이의 관계의 특정한 감각sense을 육화한다." <ambient television> 3
제도적인 것과 루틴한 것에 관한 <앰비언트 텔레비전>의 관심은 이런 것을 의미한다. 집 밖 텔레비전 문화정치의 그 계정은 스크린문화의 스펙터클한 차원보다 일상적인 것banal을 더욱 강조한다는 뜻이다. 이런 견지에서 이 책은 공공 안의 표준적이고 저널리즘적인 계정으로부터 벗어난다. 그것은 전쟁이나 스캔달, 스포츠경기, 선거로부터의 미디어 이벤트에 관한 공공 의견의 증거를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티비를 보는 장소에 방문하기 위한 뉴스 리포팅의 세트피스다. <ambient television> 8
그러한 스텐스를 취하는 것은 아카데믹한 학제로서 복잡한 인식론적 지리학의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며, 또한 특히 몹시 까다롭고 변동적인 지리학적 지식의 카테고리, 즉 스케일로 들어가는 것이다. 네일 스미스가 규정했듯이, 스케일이란 "공간적 차이의 언어"다. 이 용어는 글로벌부터 로컬(하지만 이들 용어 스스로는 의미를 설정하지 못한다)에 이르는 차이를 다룬다--그것들은 근본적으로 관계적이며, 그들 차이를 통해 서로 서로를 구축한다. 스케일은 그러므로 문화연구에서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개념이다. 사적인 것의 결정determinations처럼, "로컬"을 설명해주는 것의 결정이란 권력에 의해 침투된다: "지리학적 스케일은 ... 경계를 결정하며 컨트롤이 발휘되고 다퉈지는 것 주변의 아이젠티티를 결합한다."[18] 스미스에게 스케일의 정치란 미국 도시에 있는 무거처성의 사회적 경험에 의해 쉽게 설명된다: 무거처성의 상태는 거리의 로컬한 스케일을 향한 개인적 활동을 제한하고 그런 스케일 위에 형성되는 콜렉티비티의 힘을 앗아가는데, 왜냐면 그것은 더 넓은 제도적 수준 위의 정의 및 권력의 작용과 연결되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막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민 영역 속으로의 참여를 차단하며, 그것을 고려해 봤을 때 후자로의 진입은 더욱 현저하게 스케일된 공간 속에 뿌리박힌다: 가정. 소유권과 돈, 고용, 소비의 장소.[19]
스케일의 개념은 텔레비전 연구에서 중심적이게 되는데 이유는 그것이 정치 경제학자의 문화연구적 비평으로서 특정한 방법론적 토론의 심장에 자리잡기 때문만은 아니다. 되려 그것이 미디엄 자체의 복잡성을 몹시나 생성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미지의 장소없는 생성성과 (그것들이 모든 사이즈의 스크린과 모든 종류의 공간에서 나타날 때) 그것의 터미널적 형태의 특정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신호화된 복잡성을 생성한다는 의미에서 스케일은 텔레비전 연구에서 중심적이다. 존 하틀리가 가정내 공간 속 티비에 관해서 썼듯이, "각각의 티비 프로그램은 백만 시청자에게 동일할지도 모르지만, "티비에" 무엇이 나오느냐--말 그대로 그것에--는 같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중요하다. ... 토대에서, 그러므로, 텔레비전 스크린이 그것을 둘러싼 비매개적 공간--수용의 마이크로 레벨--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는 일이란 어떻게 이 두 가지 스케일이 연결되어 있는지 묻는 일이며, 어떻게 이미지의 표준화한 "elsewhere"이 특정한 공간 속의 물질적 형식을 취하는지 탐험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란 환경 속 티비의 역할이, 이 연구의 케이스에서, 다양한 수준, 그러니까 어떤 장소 유형에 특정성--그러니까 공항 같은 "비장소"--을 부과하는 양자적 사회적 힘부터, 탑다운 제도 시스템(그것들에 관한 관람성 모델을 부과하려고 하는)에 이르는 다양한 수준의 모양을 취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을 포함한다.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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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스케일의 정치는 내 티비 연구를 다양한 방식으로 장소특정적 문화 형태로 모양짓는다. 무엇보다, 일반적인것과 특정적인 것 사이의 비동일성discrepancy의 감각은 언제나 일상의 분석 안에서 결합된다. 주체의 경험과 객관화하는 지식의 양태 사이의 긴장, 대량문화의 익명성과 개인과 문화에 의해 다양하게 전유되는 것의 형언 불가능한 특정성 사이의 긴장은 해결 되어야 할 분석적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마이크로 레벨 위에서 사회적 공간 생산의 다양한 양상이기도 하다. 루스 지아드Luce Giad가 썼듯이, "일상의 분석은 이론적인 것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그래서 특정하고 분위기적인 것에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 끊임없이 오고 갈 수밖에 없다."[22] 텔레비전은 이런 운동에 포획되어 있으며, 이것은 개인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 로컬한 것 대 대중적인 것, "장소" 대 "공간" 사이의 대립으로는 쉽게 매핑되지 않는다. 되려, 시간time과 거듭 환경적 담론과 퍼블릭 스크린의 실천은 상호간 가로지르며, 실로 각각 환경의 사회적 공간의 문법을 위한 기구로서 복무하면서 명백한 대립을 보여준다. 장소특정적 접근은 그러므로 정확하게 스케일에 맞춰질 수밖에 없으며 그것 위에 행위와 제스쳐, 언술행위가 특정한 환경 안의 텔레비전의 현전을 통하여 형성된다. 드 세라토가 티비 수상기의 전략--공간의 표준화 제도화 실천 안에서 그것의 활용--과 텔레비전의 전술--이것 안에서 스크린은 개인적 여정 위의 공간을 통해 유저가 통행할 때 유저의 일시적이고 불연속적인 오퍼레이션 안에서 착취되어지는 리소스로 복무한다--이라고 불렀을법한 무엇 둘 다를 시험하면서 말이다.[23]
많은 비평가가 지적햇듯이 과도하게 그 둘은 이분법적이지만, 드 세라토의 카테고리 쌍은 공공 공간 속 티비 스크린을 상황화하는 관계성에 관해 생각하기 위한 유용한 프레임워크를 제공한다.[24] 왜냐면 둘은 과정에 관한 우리의 주의를 주목하며 그것을 통해 제도와, 제도에 대한 도전은 마이크로 레벨 위의 물질적인 형태를 취하며, 그 둘은 미디어가 표류하는 공간 속 권력의 텍스쳐와 시각성에 관해 생각하기 위한 어휘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공항에서, 텔레비전 스크린은 여행자로서의 관람자의 시공간적 코디네이션의 플롯을 짜는 전략의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일종의 제도적 목소리로서 복무하면서 말이다. 쉽게 컴퓨터를 통해 업데이트된 출발과 도착을 방송하면서, 모니터는 트레픽을 조정하며 인간 정보-제공자information givers를 표준화된 목적 시간표로 대체한다. 패트리샤 멜란캠프가 썼듯이, 이런 스크린은 "'제시간on time'의 미션과 욕망"을 일시정지된 시간suspended time의 익명성 속에서 무시간성과 무맥락성, 고삐풀림, 비장소의 느낌을 주는 가운데 지원한다.[25] 그러한 장소 안의 상업적 실천은 비슷하게 장소에, 브랜딩 전략을 통해 의미의 그리드를 부과하며 작동한다. CNN 에어포트 네트워크의 케이스에서, 카-렌탈 광고와 스폰 받은 일기예보, 도착 도시에 관한 참조물은--관중의 정체경제학에서--광고주에게 팔기위한 공간 속에 관람자의 위치를 상업화하는 프로그램 형태다.
그럼에도 그러한 고도로 경찰화된, 상업 네트워크 전략은 또한 사용자 전술의 도구로 가능하기도 하다. 아주 단순한 수준에서 그것들은 어떤이가 앉아 있는 장소 속 인터렉션의 즉각적 장소로부터 어떤이를 떼어 놓는 방법을 제공한다. 내가 또 다른 진행중의 CNN 벤처--카페 USA, 푸드코트 엔터테인먼트 네트워크--를 보기 위해 쇼핑몰 푸드코트에 방문했을 때, 애 딸린 부모가 끊임없이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아이들은 장난치느라 그것을 무시하는 동안에 말이다. 분명하게도 스크린은 부모가 잠깐동안 가족의 세계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사용된 전술적 리소스였다.[26]
더욱 극명한 케이스에서 티비 수상기는 공간 속에서 저항적이거나 전술적인 기동술의 스케일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방콕의 돈 무앙 공항에서 텔레비전 스크린이 연루된 사건에 관한 최근 뉴스 리포트를 생각해보라. 이 상황에서, 방콕 포스트에 따르면, 명백하게 불만을 가진 공항의 내부 텔레비전 시스템 고용자는 타이와 베트남 사이의 챔피언 축구 경기를 보는 것을 하드코어 포르노 영화 20초짜리 클립을 가지고 방해했다. 방콕 포스트가 리포트하길, 사건에 뒤이어 그 영상은 공항 비디오가 7일동안 계속해서 공항 비디오 스크린에 사과방송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그 아티클이 쓰길, 차른차이 이사라세나락이라는 교통부 장관 비서가 말하길, 장관은 국가의 명성에 누를 끼친 미디어 네트워크스(폐쇄회로 회사)를 당장 고발했다"라고 말했다.[27] 이 예에서 텔레비전의 전략적 제도적 공간의 담요는 순간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전술적 행위에 의해 방해됐으며 이 행위의 결과는, 더군다나, 비매개적 스크린의 공간보다 훨씬 넓은 네트워크를 따라, 그리고 긴 시간에 걸쳐 반향된다. ...
마이크로 레벨 속에서 전략과 전술 둘 다에서 텔레비전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특정성과 스케일의 정치가 이 책이 스크린과 환경 사이의 관계의 분석을 모양짓는 하나의 방식은 아니다. 다른 것은, 보기에 개념적이거나 용어적이거나 방법론적인 문제로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공공 장소의 텔레비전에 관해 검색할 때, 우리는 공공 시청각 장치의 농밀하고 분위기적인ambient 클러스터를 발견하는데, 곧이 곧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텔레비전에 관한 반쪽penumbral 규정으로 떨어지게 된다: 조금 적자면, 비디오 벽과 터치스크린, 동전 넣는 거치기계와 프로젝션 스크린, 테이프 플레이어, 케이블 시스템, 네트워크 이미지, 레이저 디스크 플레이어. 어떻게 우리는 권력과 루틴, 즐거움의 일상 영역에서 텔레비전의 역할을 탐침할 수 있을까? 테크놀로지적 용어로 그 미디엄을 정의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데? 실로, 이런 교착점에서, 나는 내 연구 목적을 규정하면서 미끄러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은, 결국에, 비디오의 헤테로지니어스 한 형태와 우리가 집밖에서 마주하는 방송 이미저리에겐 몹시 일반적인 용어다. 뉴욕타임즈스퀘어에 있는 다이아몬드비전 스크린은 내 동네 세탁소 코너에 있는 홈메이드 선반 위에 거치된 조그만 흑백 콘솔과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모든 텔레비전의 불확정적인 스케일을 까발리는, 그들의 주소address의 스케일은 전적으로 다른 "종들"에 그것들이 포함된다고 제안하는 것 같다.
궁극적으로, 내가 생각하길, 우리는 이런 미끄러짐성을 미디엄으로서의 텔레비전의 특정성의 부분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사회적 공간 속의 미디어 오브젝트로의 적응능력의 독특한 특징으로서 말이다. 우리가 텔레비전 세트의 분석 위에 탑승할 때 텔레비전이란 단어의 모호한 일반성을 하나의 테크놀로지적 형태와 다른 그것의 형태 사이의 예비적 방법론적 선택으로 만들기 위한 이유로 보고싶은 유혹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대안적으로, 텔레비전의 확장된 용어학을, 한때는 해결된, 더욱 세밀하고 "정확한 미디엄의 정의를 가져오는 이론적 문제로서 연구하기 위한 상황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덜 현학적인 옵션은 이런 것이다. 공간 속 오브젝트로서, 그리고 공간 사이의 관계로서의 텔레비전의 변증법적 질을 보존할지도 모르는 그런 옵션은 이런 테크놀로지적 다양성이 텔레비전의 장소특정성의 반영임을, 환경적 미디어 장체로서 그것의 유연성flexiblity의 반영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필름과는 다르게, 텔레비전은 장소 안에 엄청난 물리적이고 기술적인 조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변ambient의 빛 속의 많은 조정 없이, 감독 없이도 작동한다; 그것의 프로그래밍 소스는 쉽게 접근된다; 그리고 그것의 스크린 사이즈와 볼륨은 다양하다. 텔레비전은 모든 장소의 다른 전자 기기와 다른 미디어 형식, 다른 상업 디스플레이와 잘 섞인다. ...
하지만, 누군가가 미디엄으로서의 티비에 일반적으로 원인이 있다고 생각되는 공간적 작동으로 스크린의 장소의 관계를 사려할 때, 특정 장소에서 텔레비전의 장소특정적 작동의 분석을 위한 컨셉으로서 스케일의 복잡성과 그것의 가치는 몹시 명백하다. 테크놀로지적 장체로서의 텔레비전의 많은 이론가가 적었듯이, 텔레비전은 (포스트)모더니티의 공간적 프로세스의 도드라지는 표현이다. 모든 곳으로부터 오는 이미지의 소스로서, 한시적이고 자리잡을 없는 전자마그네틱 스펙트럼의 피직스와 상호작용하는 테크놀로지로서, 텔레비전은 오직 그것이 보여지는 장소의 비매개적 사회적 스케일 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사실인데, 텔레비전은 트랜스미션의 미디엄, 즉 거리distance를 가로지르는 커뮤니케이션의 미디엄이며, 그 말은--종종 시간적 비매개성의 아우라로 채워진--텔레비쥬얼한 재현은 이종적인 장소를 연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뮤엘 베버가 "공간-결속space-binding"--전자 미디어가 공간을 침잠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효과impression--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트랜스미션의 형이상학은 네트워크의 터미널 포인트, 즉 스크린을 다른 장소--스튜디오, 재난지역, 리모트 뉴스 장소--로 연결시키며, 이런 연결은 어떤 면에서 이런 공간과 스크린이 설치된 공간 사이의 거리를 붕괴시킨다. "실시간성", "공간-결속"이라고 부르든 "스케일-쉬프팅"이란 용어를 만들든 간에, 이런 공간적 조작의 속성, 그리고 그것들이 지탱하는 시간적 동시성의 신화는 티비스크린을 독특한 일종의 물체thing로 만든다.[30]
그러나 텔레비전의 "물체성thingness"은 그 공간성의 다른 사용역, 즉 시공간적 둘러쌈의 이데올로기를 따라서 존재하는 그것의 또 다른 사용역을 시사한다. 스피겔이 썼듯이, 텔레비전은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창문"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가구로서 동시에 특징화된다.[31] 그녀가 추적하는 전후 텔레비전의 가정으로의 도달 속에 있는 문화적 판타지와 불안은 가내 공간의 텔레비전의 퍼포레이션perforation 위에서만 중심화된 것이 아니라 스크린이 친숙한 것처럼 보이는 젠더화된 가정의 사회적 공간의 인테리어 배열 위에도 중심화된다. 텔레비전은 베버의 말에 따르면, "한꺼번에 최소한 세 장소에서" 존재하는 물체다.[32] 비평가들의 말을 따라 텔레비전이 지방과 지역성을 식민화하고 "대량성"이나 "민족성"으로 관람자를 표준화한다는 의미에서 공간과 시간을 텔레비전이 파괴한다면, 이것도 똑같이 진실인데, 가내의 보기 실천에 관한 많은 문학이 묘사하듯, 텔레비전은 공간-결속의 마이크로레벨의 힘으로부터 로컬의 요구를 확실히 구별시키는 데 복무하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 매일의 장소의 다양한 루틴으로 우리를 포함시키는 미디엄이다.[33] 브루노 라투르가 썼듯이, "긴 네트워크일수록 모든 포인트에서 로컬을 남긴다."[34] 우리가 텔레비전을 공간적 기구instroment(사회적 공간에서 동시에 물리적 오브젝트이면서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발생하는, 그리고 디스플레이되는, 발성enunciations의 소스로 접근할 수 있는 팩트는 스크린이 한 장소 이상에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의 스케일 이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로컬 프로세스가 이미지의 "글로벌" 제정화determination와 만나는 물리적 공간이다.[35]
더군다나, 장소 안의, 사이의, 스케일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성립시키는 시공간적 힘으로서, 텔레비전은 분명히 고도로 변증법적 퀄리티를 가진 사회적 아파라투스다. 장소특정적 방법으로, 특정한 공간 속의 이미지의 무거처적 공간을 물질화하는 가운데, 텔레비전은 데이비드 하비의 변증법적 추론의 간명한 정의를 예시화한다: "물체의 자기증명적 세계"에 관한 우리의 관심에 주목하는 대신에 텔레비전의 공간적 복잡성은 물체로서 표현되는 관계성과 흐름의 혼란스러운 세계"를 육화한다.[36] 이런 관점으로붗터 두 가지 분석적 스케일--정치경제학자의 마이크로레벨과 문화 리서처의 마이크로레벨--은 결국에 전혀 화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되려, 티비 세트와 티비 세팅의 문화 정치를 이해하는 데 절대적으로 둘 다 필요하다. 실로, 내가 여기서 아웃라인하는 텔레비전 테크놀로지의 로컬한 유연성은 더 넓은 경제적 사회적 유연성 개념과 유사하다. 아이화 옹Aihwa Ong이 썼듯이, 모더니티에서 플렉서블 개념과 실천의 부상을 위한 다양한 소스와 도메인이 출현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작동을 지시한다."[37] 어떻게 가라오케가 "싱가포르와 홍콩, 테이페이의 단면들"을 중국 본토의 일상 공간에 도입소개했지에 대한 옹의 설득력있는 분석은 다양한초국가성의 양태를 지역화하는 가은데 텔레비전 세트의 중요한 역할을 시연한다. 그런 역할을 향해 이 책은, 광범위한 미국적 제도적 포커스를 가지고 제스쳐만 할 수 있을 뿐이다.[38]
그러므로, 비록 이 책이 티비 스크린의 물리적 장소의 로컬한 특정성과 연관되지만, 똑같이 그것은 어떻게 미디엄의 더 넓은 이데올로기적 프로세스가 이 장소site 안에서 물질적 형태를 취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것과도 연루된다. 내가 계속해서 제안해왔듯이, 만약 스크린과 세팅의 마이크로레벨의 텔레비전 문화 정치가 장소에따라 몹시 다르게 보인다면, 아마 텔레비전과 가깝게 연관된 포괄적 이데올로기--그것의 공간-결착, 그것의 옵씬한 시각성--는 역설적으로, 고도로 그들의 수단means과 오퍼레이션 안에 로컬라이즈되어 있을 수도 있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텔레비전의 작동을 규정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할 때, 그것은 멈춰서, 미디어 이데올로기가 특정하나 장소에서 그것들이 스크린에 의해 구체적으로 만들어질 때 꽤나 다양하고 문맥적인 의미를 획득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고려하게 도와준다.[39] 내가 앞으로 논하겠지만, 우리는 문화 형식으로서의 텔레비전의 다양한 새로운 면모와 빌드된 공공 환경의 일부로서의 관람성을 감지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텔레비전의 다양한 스케일에 관한 효과 사이의 이런 불일치적 관계의 섣부른 화해를 피한다면 말이다. 다른 말로, 우리가 텔레비전이 공간-결착과 내가 장소특정성이라고 불러온 무엇을 모두 포괄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미디어 코퍼레이션을 규정하는 글로벌 네트워크 권력을 향한 소규모 스케일 스크린 실천과 연결되는 일상적 미디어 실천의 정치적 지형학과 매커니즘의 더 분명한 감각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자주 내가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하듯이, 다양한 장소site의 텔레비전 인스톨레이션은 제인 프로이어Jane Feuer가 라이브니스liveness라고 부른 텔레비전의 이데올로기를 재현한다: 문제의 방송이 "문자 그대로" 라이브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시그널을 동시에 전송하고 받을 수 있는 텔레비전의 기술적 능력으로부터 떠오르는 비매개성과 현전, 직접적 재현의 충만한 감각.[40] 이런 공간적 연결성과 붕괴의 이데올로기를 일깨우면서, 나는 어떻게 그것이 각각 안에서 다른 의미를 필요로 하면서 특정한 문맥에서 자리잡게 됐는지 시연하려고 한다. 바에서 집단적으로 보게 되는 스포츠 방송의 "라이브니스"와 전자상점의 디스플레이 모델 캠코더에 붙어 있는 모니터에서 뜻밖에 보게되는 누군가 자신의 이미지의 "라이브니스" 사이에는 굉장히 많은 차이가 있다. 장소에서 장소에 이르기까지, 물리적 스크린 설치의 관습에서부터 티비가 할 수 있는 무엇에 관한 주변적 담론에서의 관람자의 건설에 이르기까지, 환경과 스크린의 관계성에 함께 있는 표준화하고 개인화하는 힘의 특이한 혼합에 우리가 주목할 때, 우리는 이런 장소를 통치하는 제도를 특징화하는 내재적 모순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티비 스크린과 연관된 문화적 역능agency은 이런 혹은 저런 스케일--마이크로나 매크로--위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세팅 안에서 모든 스케일 사이의 관계성이 모양을 취한다는 이런 특정한 방식 안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한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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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가 공공 자소에서의 티비와 관계해 내가 정의해야만하는 마지막 지형학적 이슈로 이끈다: "장소"의 아이디어. 현행, "장소"는 미디어 스터디에서 우선적으로 특정한 나라의 지역이나 국가의 연방에 적용되는 컨셉이며, 그것은 가장 자주 국가 방송 시스템을 향한 지역의 관계의 논의에서 일깨워진다.[42] 내가 그리고자하는 장소의 개념은 최근의 지리학적 이론이 안에서 발전된 것이며, 다시 말하면 장소에 대한 그런 아이디어는 또한 어떻게 스케일 사이의 관계성, 특정성과 일반성의 인지 사이의 관계성이 특정한 담론과 실천의 배열을 통해 다양한 로컬리티 안에서 생산되는지에 관한 아이디어다. 이제 내가 제안하고 싶은, 장소는 로컬과텔레비전의 장소특정적 힘과 장치의 글로벌화하는 이데올로기의 공간결착과 "스케일 쉬프팅" 사이의 관계성을 이해하기 위한 중심적인 개념이다.[43]
정확히 어떤 종류의 지형학적 오브젝트를 이 단어 장소가 설계하는가? 장소는 진정한 "키워드"로서,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적었듯이, "그것의 의미의 문제는 논의되고 있는 그 문제와 밀접하게 엮여있다." 컨셉으로서, 장소란 말은 공간의 지형학자와 철학자에게 특정한 방법론적 도전을 부과한다. 언어학적 레벨에서 이것은 단어 장소가 공간적 차이화의 상식적 카테고리(우리가 다양한 문맥에서 매일 사용하는 것)와 지형학의 과학적 재현의 이론적으로 복잡한 유니트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경험적experiential인 명칭designations과 대상적objective인 명칭 사이의 이런 긴장은 니콜라스 엔트리켄J. Nicholas Entriken이 장소의 "사이성"--그것의 의미가 버내큘러적인 공간 어휘lexicons와 경험적인empirical 공간 어휘 사이의 무엇에 놓인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기억과 주체성은 카토그라픽적이고 양적인 과학에 스친다--이라고 부른 것이다.[44] 도린 매세이Doreen Massey와 하비 같은 막스주의 지형학자에게 이런 특정ㅇ성과 일반성 사이의 긴장은 정치적인 것만큼 인식론적이다. 각각은 다른 방식으로, 장소의 변증법적인 이해를 위해 논한다: 그들이 논하길, 장소는 배타적이고 무시간적이지 않을뿐만 아니라, 되려 "사회 관계의 더 넓은 네트워크 속에서의 특정한 순간이다."(매시)[45] 그것들이 제안하길, 장소site는 (종종 모더니티의 힘에 의해 위태로움에 빠졌더라도, 무시간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내재적인, 고정된 문화와 커뮤니티의 속성으로부터가 아니라, "밖으로부터의 개입과 영향의 장소 속에서 작동해 나가는 것을 통해"(하비) 구별적인 성격을 획득한다.[46]
이렇게 보다 더 변증법적인 관점으로부터, 그러니까 "물체로 표명된 관계와 흐름"으로서 장소에 접근했을 때, 공공장소 속 텔레비전과 비디오가 어떻게 결속되고 통합된 유나이티를 관통하는 파괴의 에이전트보다는, 그것들이 장소의 구축의 에이전트가 될 수 있는지 쉽게 볼 수 있다. 메시의 말로, 장소는 "더 넓고 더욱 로컬한 사회관계의 구별된 혼합체의 주목"이며, 거기서 "이런 관계의 중첩은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효과를 생산해낼지도 모르며,"[48] 그러므로 물론 텔레비전은 하나의 물리적 장소site에서 로컬과 글로벌을 혼합하고 중첩하는 이런 과정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장소를 향한 지리학적 접근은, 그리고 스케일과 공간적 관계 사이의 통로로서 텔레비전의 역할을 향한 지리학적 접근은, 일상 환경 속 티비 스크린(공간적 변화와 변형 속 텔레비전의 역할의 결정론적 계정을 덜 허락하는 것 대신 "장소의 비 감각"[49]으로서의 텔레비전의 더욱 예상가능한 내러티브 속에서 제공된 것)의 주목할만한 이데올로기적 유연력과 물질적 적응능력과 잘 맞다.
특정한 환경을 향한 텔레비전의 관계에 관한 대부분의 학문적 계정은 엔트리킨이 '일반적generic' 장소의 아이디어라고 부른 것을 통해 텔레비전 세트를 접근해야만 한다. 일반적 장소는 지구 위의 독특한 로케이션이 아니라(그가 지역 연구, 지도제작술chorography을 따라서 만든 "지도제작적 장소"라고 부른) 비교가능한 스케일과 사회적 비슷함, 제도적 관계 같은 인접성contiguities에 기반을 둔 장소의 카테고리화다. 우리는 명확한 아티클article--집, 바bar--을 사용함에 의해 일반적 장소의 이해를 드러낸다. 우리가 이런 환경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 말이다.[50] 그러나 장소는 또한--"지역"이라는 불분명한 카테고리부터 특정한 마을의 더욱 특정한 카테고리까지, 개별적 주택, 실제 가정에 이르기까지--지구위의 독특한 장소를 의미할 수도 있다. 내가 따라오는 챕터에서 말할 공간적 스토리는 "일반적 장소와 특별한, "지도제작적" 장소를 모두 포함한다.[51] 나는 장소의 특정한 일반적 퀄리티--교통의, 레저의, 소비의, 관료주의적 행정의 사이트로 설계된 공간--를 지지하는 가운데 스크린의 역할에 관해 일반적으로 주목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우리가 노동계급 바나, 중산층 가정이나, 디스카운트 몰 신발 리테일러의 일반적 공간에서, 티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도심 네이버후드의 삶이나 혹은 교외이거나 리테일링의 성장하는 풍경 안에 있는 그러한 장소를 모양짓는 더 넓은 역사적 과정--산업의 운동, 도심 발전의 투자, 인구재위치화--에 관한 무언가를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는 장소의 코로그라픽 센스와 함께 일반적인 센스도 필요로 한다. 이런 변화과정이 지역적으로 특정하기 때문에, 불균등한 발전의 로컬화된 과정에 의해 통제된다--도심재생 정치와 공장폐쇄는, 예를 들어, 도시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때때로 나는 어떤 일반적 사이트 속 티비를 둘러싼 그 레토릭과 실천에 관한 내 리딩을 실제 지역의 코로그라픽한 프로세스의 분석으로 보충한다.
따라오는 텔레비전의 공간적 이야기가 제너릭하고 코로그라픽한 장소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두 번째 길은 이 책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첫번째 절반은 특정 장소--상점, 대기실, 바--와 티비의 관계에 관한 제도적 담론에 우선적으로 주목한다. 어떤점에서 역사적인,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제도적 에이전트가, 텔레비전의 역사라는 선택된 관점에서, 주체와 공간, 이미지 사이의 장소특정적 관계성으로서 관람성의 결과에 관해 생각해 왔는지를 추적한다. 두 번째 절반의 이야기는 유니크한 사이트--실제 상점, 바, 레스토랑, 몰, 대기실--에서 티비 스크린의 물질적 실천을 추적한다. 실제 장소 속 특정한 스크린에 관한 이런 주목은 그러므로 고로그래픽하며, 그것은 사회공간에서 공공 스크린의 제도와 문화가 취하는 몹시 구체적이면서도 촉각적인 형태를 부여잡기 위해 사진이나 사진에 기반을 둔 아티스트의 렌더링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두 부분 모두에서 나는 제너릭한 장소--예를 들어 바the bar--의 감각과 특정한 장소--실제 바, 그것의 실제 티비 세트--의 감각 사이를 크로스오버하는 데 관심이 있다. 그 결과, 어떤점에서 라투르주의적 소스의 혼합체, 데이터, 인상은 어떻게 텔레비전 그 자체가 사이트 안에서 일반성과 특정성의 힘의 에이전트로서 복무했는지 진짜로 부여잡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처럼 보인다.
방법론과 지도
만약 티비가 장소특정적이어서, 주체에 관한 더 넓은 제도적 아이디어를 물질화하고, 다양한 마이크로레벨의 사회논리적 일상 영역 안에서 그 주체의 개별적 여정을 뒤쫒는다면, 그렇다면 그것을 향한 최고의 접근법은 로렌스 그로스버그의 용어 "독특한 문화연구의 논리: 그것은 이미 질문되어진 문맥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 질문은 자체는 그 문맥을 규정한다"를 향한 비판적 실천을 통한 것이다.[52] ......
제도적인 것과 루틴한 것에 관한 <앰비언트 텔레비전>의 관심은 이런 것을 의미한다. 집 밖 텔레비전 문화정치의 그 계정은 스크린문화의 스펙터클한 차원보다 일상적인 것banal을 더욱 강조한다는 뜻이다. 이런 견지에서 이 책은 공공 안의 표준적이고 저널리즘적인 계정으로부터 벗어난다. 그것은 전쟁이나 스캔달, 스포츠경기, 선거로부터의 미디어 이벤트에 관한 공공 의견의 증거를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티비를 보는 장소에 방문하기 위한 뉴스 리포팅의 세트피스다. <ambient television> 8
그러한 스텐스를 취하는 것은 아카데믹한 학제로서 복잡한 인식론적 지리학의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며, 또한 특히 몹시 까다롭고 변동적인 지리학적 지식의 카테고리, 즉 스케일로 들어가는 것이다. 네일 스미스가 규정했듯이, 스케일이란 "공간적 차이의 언어"다. 이 용어는 글로벌부터 로컬(하지만 이들 용어 스스로는 의미를 설정하지 못한다)에 이르는 차이를 다룬다--그것들은 근본적으로 관계적이며, 그들 차이를 통해 서로 서로를 구축한다. 스케일은 그러므로 문화연구에서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개념이다. 사적인 것의 결정determinations처럼, "로컬"을 설명해주는 것의 결정이란 권력에 의해 침투된다: "지리학적 스케일은 ... 경계를 결정하며 컨트롤이 발휘되고 다퉈지는 것 주변의 아이젠티티를 결합한다."[18] 스미스에게 스케일의 정치란 미국 도시에 있는 무거처성의 사회적 경험에 의해 쉽게 설명된다: 무거처성의 상태는 거리의 로컬한 스케일을 향한 개인적 활동을 제한하고 그런 스케일 위에 형성되는 콜렉티비티의 힘을 앗아가는데, 왜냐면 그것은 더 넓은 제도적 수준 위의 정의 및 권력의 작용과 연결되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막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민 영역 속으로의 참여를 차단하며, 그것을 고려해 봤을 때 후자로의 진입은 더욱 현저하게 스케일된 공간 속에 뿌리박힌다: 가정. 소유권과 돈, 고용, 소비의 장소.[19]
스케일의 개념은 텔레비전 연구에서 중심적이게 되는데 이유는 그것이 정치 경제학자의 문화연구적 비평으로서 특정한 방법론적 토론의 심장에 자리잡기 때문만은 아니다. 되려 그것이 미디엄 자체의 복잡성을 몹시나 생성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미지의 장소없는 생성성과 (그것들이 모든 사이즈의 스크린과 모든 종류의 공간에서 나타날 때) 그것의 터미널적 형태의 특정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신호화된 복잡성을 생성한다는 의미에서 스케일은 텔레비전 연구에서 중심적이다. 존 하틀리가 가정내 공간 속 티비에 관해서 썼듯이, "각각의 티비 프로그램은 백만 시청자에게 동일할지도 모르지만, "티비에" 무엇이 나오느냐--말 그대로 그것에--는 같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중요하다. ... 토대에서, 그러므로, 텔레비전 스크린이 그것을 둘러싼 비매개적 공간--수용의 마이크로 레벨--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는 일이란 어떻게 이 두 가지 스케일이 연결되어 있는지 묻는 일이며, 어떻게 이미지의 표준화한 "elsewhere"이 특정한 공간 속의 물질적 형식을 취하는지 탐험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란 환경 속 티비의 역할이, 이 연구의 케이스에서, 다양한 수준, 그러니까 어떤 장소 유형에 특정성--그러니까 공항 같은 "비장소"--을 부과하는 양자적 사회적 힘부터, 탑다운 제도 시스템(그것들에 관한 관람성 모델을 부과하려고 하는)에 이르는 다양한 수준의 모양을 취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을 포함한다.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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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스케일의 정치는 내 티비 연구를 다양한 방식으로 장소특정적 문화 형태로 모양짓는다. 무엇보다, 일반적인것과 특정적인 것 사이의 비동일성discrepancy의 감각은 언제나 일상의 분석 안에서 결합된다. 주체의 경험과 객관화하는 지식의 양태 사이의 긴장, 대량문화의 익명성과 개인과 문화에 의해 다양하게 전유되는 것의 형언 불가능한 특정성 사이의 긴장은 해결 되어야 할 분석적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마이크로 레벨 위에서 사회적 공간 생산의 다양한 양상이기도 하다. 루스 지아드Luce Giad가 썼듯이, "일상의 분석은 이론적인 것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그래서 특정하고 분위기적인 것에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 끊임없이 오고 갈 수밖에 없다."[22] 텔레비전은 이런 운동에 포획되어 있으며, 이것은 개인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 로컬한 것 대 대중적인 것, "장소" 대 "공간" 사이의 대립으로는 쉽게 매핑되지 않는다. 되려, 시간time과 거듭 환경적 담론과 퍼블릭 스크린의 실천은 상호간 가로지르며, 실로 각각 환경의 사회적 공간의 문법을 위한 기구로서 복무하면서 명백한 대립을 보여준다. 장소특정적 접근은 그러므로 정확하게 스케일에 맞춰질 수밖에 없으며 그것 위에 행위와 제스쳐, 언술행위가 특정한 환경 안의 텔레비전의 현전을 통하여 형성된다. 드 세라토가 티비 수상기의 전략--공간의 표준화 제도화 실천 안에서 그것의 활용--과 텔레비전의 전술--이것 안에서 스크린은 개인적 여정 위의 공간을 통해 유저가 통행할 때 유저의 일시적이고 불연속적인 오퍼레이션 안에서 착취되어지는 리소스로 복무한다--이라고 불렀을법한 무엇 둘 다를 시험하면서 말이다.[23]
많은 비평가가 지적햇듯이 과도하게 그 둘은 이분법적이지만, 드 세라토의 카테고리 쌍은 공공 공간 속 티비 스크린을 상황화하는 관계성에 관해 생각하기 위한 유용한 프레임워크를 제공한다.[24] 왜냐면 둘은 과정에 관한 우리의 주의를 주목하며 그것을 통해 제도와, 제도에 대한 도전은 마이크로 레벨 위의 물질적인 형태를 취하며, 그 둘은 미디어가 표류하는 공간 속 권력의 텍스쳐와 시각성에 관해 생각하기 위한 어휘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공항에서, 텔레비전 스크린은 여행자로서의 관람자의 시공간적 코디네이션의 플롯을 짜는 전략의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일종의 제도적 목소리로서 복무하면서 말이다. 쉽게 컴퓨터를 통해 업데이트된 출발과 도착을 방송하면서, 모니터는 트레픽을 조정하며 인간 정보-제공자information givers를 표준화된 목적 시간표로 대체한다. 패트리샤 멜란캠프가 썼듯이, 이런 스크린은 "'제시간on time'의 미션과 욕망"을 일시정지된 시간suspended time의 익명성 속에서 무시간성과 무맥락성, 고삐풀림, 비장소의 느낌을 주는 가운데 지원한다.[25] 그러한 장소 안의 상업적 실천은 비슷하게 장소에, 브랜딩 전략을 통해 의미의 그리드를 부과하며 작동한다. CNN 에어포트 네트워크의 케이스에서, 카-렌탈 광고와 스폰 받은 일기예보, 도착 도시에 관한 참조물은--관중의 정체경제학에서--광고주에게 팔기위한 공간 속에 관람자의 위치를 상업화하는 프로그램 형태다.
그럼에도 그러한 고도로 경찰화된, 상업 네트워크 전략은 또한 사용자 전술의 도구로 가능하기도 하다. 아주 단순한 수준에서 그것들은 어떤이가 앉아 있는 장소 속 인터렉션의 즉각적 장소로부터 어떤이를 떼어 놓는 방법을 제공한다. 내가 또 다른 진행중의 CNN 벤처--카페 USA, 푸드코트 엔터테인먼트 네트워크--를 보기 위해 쇼핑몰 푸드코트에 방문했을 때, 애 딸린 부모가 끊임없이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아이들은 장난치느라 그것을 무시하는 동안에 말이다. 분명하게도 스크린은 부모가 잠깐동안 가족의 세계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사용된 전술적 리소스였다.[26]
더욱 극명한 케이스에서 티비 수상기는 공간 속에서 저항적이거나 전술적인 기동술의 스케일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방콕의 돈 무앙 공항에서 텔레비전 스크린이 연루된 사건에 관한 최근 뉴스 리포트를 생각해보라. 이 상황에서, 방콕 포스트에 따르면, 명백하게 불만을 가진 공항의 내부 텔레비전 시스템 고용자는 타이와 베트남 사이의 챔피언 축구 경기를 보는 것을 하드코어 포르노 영화 20초짜리 클립을 가지고 방해했다. 방콕 포스트가 리포트하길, 사건에 뒤이어 그 영상은 공항 비디오가 7일동안 계속해서 공항 비디오 스크린에 사과방송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그 아티클이 쓰길, 차른차이 이사라세나락이라는 교통부 장관 비서가 말하길, 장관은 국가의 명성에 누를 끼친 미디어 네트워크스(폐쇄회로 회사)를 당장 고발했다"라고 말했다.[27] 이 예에서 텔레비전의 전략적 제도적 공간의 담요는 순간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전술적 행위에 의해 방해됐으며 이 행위의 결과는, 더군다나, 비매개적 스크린의 공간보다 훨씬 넓은 네트워크를 따라, 그리고 긴 시간에 걸쳐 반향된다. ...
마이크로 레벨 속에서 전략과 전술 둘 다에서 텔레비전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특정성과 스케일의 정치가 이 책이 스크린과 환경 사이의 관계의 분석을 모양짓는 하나의 방식은 아니다. 다른 것은, 보기에 개념적이거나 용어적이거나 방법론적인 문제로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공공 장소의 텔레비전에 관해 검색할 때, 우리는 공공 시청각 장치의 농밀하고 분위기적인ambient 클러스터를 발견하는데, 곧이 곧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텔레비전에 관한 반쪽penumbral 규정으로 떨어지게 된다: 조금 적자면, 비디오 벽과 터치스크린, 동전 넣는 거치기계와 프로젝션 스크린, 테이프 플레이어, 케이블 시스템, 네트워크 이미지, 레이저 디스크 플레이어. 어떻게 우리는 권력과 루틴, 즐거움의 일상 영역에서 텔레비전의 역할을 탐침할 수 있을까? 테크놀로지적 용어로 그 미디엄을 정의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데? 실로, 이런 교착점에서, 나는 내 연구 목적을 규정하면서 미끄러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은, 결국에, 비디오의 헤테로지니어스 한 형태와 우리가 집밖에서 마주하는 방송 이미저리에겐 몹시 일반적인 용어다. 뉴욕타임즈스퀘어에 있는 다이아몬드비전 스크린은 내 동네 세탁소 코너에 있는 홈메이드 선반 위에 거치된 조그만 흑백 콘솔과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모든 텔레비전의 불확정적인 스케일을 까발리는, 그들의 주소address의 스케일은 전적으로 다른 "종들"에 그것들이 포함된다고 제안하는 것 같다.
궁극적으로, 내가 생각하길, 우리는 이런 미끄러짐성을 미디엄으로서의 텔레비전의 특정성의 부분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사회적 공간 속의 미디어 오브젝트로의 적응능력의 독특한 특징으로서 말이다. 우리가 텔레비전 세트의 분석 위에 탑승할 때 텔레비전이란 단어의 모호한 일반성을 하나의 테크놀로지적 형태와 다른 그것의 형태 사이의 예비적 방법론적 선택으로 만들기 위한 이유로 보고싶은 유혹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대안적으로, 텔레비전의 확장된 용어학을, 한때는 해결된, 더욱 세밀하고 "정확한 미디엄의 정의를 가져오는 이론적 문제로서 연구하기 위한 상황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덜 현학적인 옵션은 이런 것이다. 공간 속 오브젝트로서, 그리고 공간 사이의 관계로서의 텔레비전의 변증법적 질을 보존할지도 모르는 그런 옵션은 이런 테크놀로지적 다양성이 텔레비전의 장소특정성의 반영임을, 환경적 미디어 장체로서 그것의 유연성flexiblity의 반영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필름과는 다르게, 텔레비전은 장소 안에 엄청난 물리적이고 기술적인 조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변ambient의 빛 속의 많은 조정 없이, 감독 없이도 작동한다; 그것의 프로그래밍 소스는 쉽게 접근된다; 그리고 그것의 스크린 사이즈와 볼륨은 다양하다. 텔레비전은 모든 장소의 다른 전자 기기와 다른 미디어 형식, 다른 상업 디스플레이와 잘 섞인다. ...
하지만, 누군가가 미디엄으로서의 티비에 일반적으로 원인이 있다고 생각되는 공간적 작동으로 스크린의 장소의 관계를 사려할 때, 특정 장소에서 텔레비전의 장소특정적 작동의 분석을 위한 컨셉으로서 스케일의 복잡성과 그것의 가치는 몹시 명백하다. 테크놀로지적 장체로서의 텔레비전의 많은 이론가가 적었듯이, 텔레비전은 (포스트)모더니티의 공간적 프로세스의 도드라지는 표현이다. 모든 곳으로부터 오는 이미지의 소스로서, 한시적이고 자리잡을 없는 전자마그네틱 스펙트럼의 피직스와 상호작용하는 테크놀로지로서, 텔레비전은 오직 그것이 보여지는 장소의 비매개적 사회적 스케일 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사실인데, 텔레비전은 트랜스미션의 미디엄, 즉 거리distance를 가로지르는 커뮤니케이션의 미디엄이며, 그 말은--종종 시간적 비매개성의 아우라로 채워진--텔레비쥬얼한 재현은 이종적인 장소를 연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뮤엘 베버가 "공간-결속space-binding"--전자 미디어가 공간을 침잠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효과impression--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트랜스미션의 형이상학은 네트워크의 터미널 포인트, 즉 스크린을 다른 장소--스튜디오, 재난지역, 리모트 뉴스 장소--로 연결시키며, 이런 연결은 어떤 면에서 이런 공간과 스크린이 설치된 공간 사이의 거리를 붕괴시킨다. "실시간성", "공간-결속"이라고 부르든 "스케일-쉬프팅"이란 용어를 만들든 간에, 이런 공간적 조작의 속성, 그리고 그것들이 지탱하는 시간적 동시성의 신화는 티비스크린을 독특한 일종의 물체thing로 만든다.[30]
그러나 텔레비전의 "물체성thingness"은 그 공간성의 다른 사용역, 즉 시공간적 둘러쌈의 이데올로기를 따라서 존재하는 그것의 또 다른 사용역을 시사한다. 스피겔이 썼듯이, 텔레비전은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창문"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가구로서 동시에 특징화된다.[31] 그녀가 추적하는 전후 텔레비전의 가정으로의 도달 속에 있는 문화적 판타지와 불안은 가내 공간의 텔레비전의 퍼포레이션perforation 위에서만 중심화된 것이 아니라 스크린이 친숙한 것처럼 보이는 젠더화된 가정의 사회적 공간의 인테리어 배열 위에도 중심화된다. 텔레비전은 베버의 말에 따르면, "한꺼번에 최소한 세 장소에서" 존재하는 물체다.[32] 비평가들의 말을 따라 텔레비전이 지방과 지역성을 식민화하고 "대량성"이나 "민족성"으로 관람자를 표준화한다는 의미에서 공간과 시간을 텔레비전이 파괴한다면, 이것도 똑같이 진실인데, 가내의 보기 실천에 관한 많은 문학이 묘사하듯, 텔레비전은 공간-결속의 마이크로레벨의 힘으로부터 로컬의 요구를 확실히 구별시키는 데 복무하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 매일의 장소의 다양한 루틴으로 우리를 포함시키는 미디엄이다.[33] 브루노 라투르가 썼듯이, "긴 네트워크일수록 모든 포인트에서 로컬을 남긴다."[34] 우리가 텔레비전을 공간적 기구instroment(사회적 공간에서 동시에 물리적 오브젝트이면서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발생하는, 그리고 디스플레이되는, 발성enunciations의 소스로 접근할 수 있는 팩트는 스크린이 한 장소 이상에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의 스케일 이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로컬 프로세스가 이미지의 "글로벌" 제정화determination와 만나는 물리적 공간이다.[35]
더군다나, 장소 안의, 사이의, 스케일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성립시키는 시공간적 힘으로서, 텔레비전은 분명히 고도로 변증법적 퀄리티를 가진 사회적 아파라투스다. 장소특정적 방법으로, 특정한 공간 속의 이미지의 무거처적 공간을 물질화하는 가운데, 텔레비전은 데이비드 하비의 변증법적 추론의 간명한 정의를 예시화한다: "물체의 자기증명적 세계"에 관한 우리의 관심에 주목하는 대신에 텔레비전의 공간적 복잡성은 물체로서 표현되는 관계성과 흐름의 혼란스러운 세계"를 육화한다.[36] 이런 관점으로붗터 두 가지 분석적 스케일--정치경제학자의 마이크로레벨과 문화 리서처의 마이크로레벨--은 결국에 전혀 화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되려, 티비 세트와 티비 세팅의 문화 정치를 이해하는 데 절대적으로 둘 다 필요하다. 실로, 내가 여기서 아웃라인하는 텔레비전 테크놀로지의 로컬한 유연성은 더 넓은 경제적 사회적 유연성 개념과 유사하다. 아이화 옹Aihwa Ong이 썼듯이, 모더니티에서 플렉서블 개념과 실천의 부상을 위한 다양한 소스와 도메인이 출현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작동을 지시한다."[37] 어떻게 가라오케가 "싱가포르와 홍콩, 테이페이의 단면들"을 중국 본토의 일상 공간에 도입소개했지에 대한 옹의 설득력있는 분석은 다양한초국가성의 양태를 지역화하는 가은데 텔레비전 세트의 중요한 역할을 시연한다. 그런 역할을 향해 이 책은, 광범위한 미국적 제도적 포커스를 가지고 제스쳐만 할 수 있을 뿐이다.[38]
그러므로, 비록 이 책이 티비 스크린의 물리적 장소의 로컬한 특정성과 연관되지만, 똑같이 그것은 어떻게 미디엄의 더 넓은 이데올로기적 프로세스가 이 장소site 안에서 물질적 형태를 취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것과도 연루된다. 내가 계속해서 제안해왔듯이, 만약 스크린과 세팅의 마이크로레벨의 텔레비전 문화 정치가 장소에따라 몹시 다르게 보인다면, 아마 텔레비전과 가깝게 연관된 포괄적 이데올로기--그것의 공간-결착, 그것의 옵씬한 시각성--는 역설적으로, 고도로 그들의 수단means과 오퍼레이션 안에 로컬라이즈되어 있을 수도 있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텔레비전의 작동을 규정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할 때, 그것은 멈춰서, 미디어 이데올로기가 특정하나 장소에서 그것들이 스크린에 의해 구체적으로 만들어질 때 꽤나 다양하고 문맥적인 의미를 획득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고려하게 도와준다.[39] 내가 앞으로 논하겠지만, 우리는 문화 형식으로서의 텔레비전의 다양한 새로운 면모와 빌드된 공공 환경의 일부로서의 관람성을 감지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텔레비전의 다양한 스케일에 관한 효과 사이의 이런 불일치적 관계의 섣부른 화해를 피한다면 말이다. 다른 말로, 우리가 텔레비전이 공간-결착과 내가 장소특정성이라고 불러온 무엇을 모두 포괄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미디어 코퍼레이션을 규정하는 글로벌 네트워크 권력을 향한 소규모 스케일 스크린 실천과 연결되는 일상적 미디어 실천의 정치적 지형학과 매커니즘의 더 분명한 감각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자주 내가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하듯이, 다양한 장소site의 텔레비전 인스톨레이션은 제인 프로이어Jane Feuer가 라이브니스liveness라고 부른 텔레비전의 이데올로기를 재현한다: 문제의 방송이 "문자 그대로" 라이브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시그널을 동시에 전송하고 받을 수 있는 텔레비전의 기술적 능력으로부터 떠오르는 비매개성과 현전, 직접적 재현의 충만한 감각.[40] 이런 공간적 연결성과 붕괴의 이데올로기를 일깨우면서, 나는 어떻게 그것이 각각 안에서 다른 의미를 필요로 하면서 특정한 문맥에서 자리잡게 됐는지 시연하려고 한다. 바에서 집단적으로 보게 되는 스포츠 방송의 "라이브니스"와 전자상점의 디스플레이 모델 캠코더에 붙어 있는 모니터에서 뜻밖에 보게되는 누군가 자신의 이미지의 "라이브니스" 사이에는 굉장히 많은 차이가 있다. 장소에서 장소에 이르기까지, 물리적 스크린 설치의 관습에서부터 티비가 할 수 있는 무엇에 관한 주변적 담론에서의 관람자의 건설에 이르기까지, 환경과 스크린의 관계성에 함께 있는 표준화하고 개인화하는 힘의 특이한 혼합에 우리가 주목할 때, 우리는 이런 장소를 통치하는 제도를 특징화하는 내재적 모순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티비 스크린과 연관된 문화적 역능agency은 이런 혹은 저런 스케일--마이크로나 매크로--위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세팅 안에서 모든 스케일 사이의 관계성이 모양을 취한다는 이런 특정한 방식 안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한다.[41]
...
이것은 내가 공공 자소에서의 티비와 관계해 내가 정의해야만하는 마지막 지형학적 이슈로 이끈다: "장소"의 아이디어. 현행, "장소"는 미디어 스터디에서 우선적으로 특정한 나라의 지역이나 국가의 연방에 적용되는 컨셉이며, 그것은 가장 자주 국가 방송 시스템을 향한 지역의 관계의 논의에서 일깨워진다.[42] 내가 그리고자하는 장소의 개념은 최근의 지리학적 이론이 안에서 발전된 것이며, 다시 말하면 장소에 대한 그런 아이디어는 또한 어떻게 스케일 사이의 관계성, 특정성과 일반성의 인지 사이의 관계성이 특정한 담론과 실천의 배열을 통해 다양한 로컬리티 안에서 생산되는지에 관한 아이디어다. 이제 내가 제안하고 싶은, 장소는 로컬과텔레비전의 장소특정적 힘과 장치의 글로벌화하는 이데올로기의 공간결착과 "스케일 쉬프팅" 사이의 관계성을 이해하기 위한 중심적인 개념이다.[43]
정확히 어떤 종류의 지형학적 오브젝트를 이 단어 장소가 설계하는가? 장소는 진정한 "키워드"로서,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적었듯이, "그것의 의미의 문제는 논의되고 있는 그 문제와 밀접하게 엮여있다." 컨셉으로서, 장소란 말은 공간의 지형학자와 철학자에게 특정한 방법론적 도전을 부과한다. 언어학적 레벨에서 이것은 단어 장소가 공간적 차이화의 상식적 카테고리(우리가 다양한 문맥에서 매일 사용하는 것)와 지형학의 과학적 재현의 이론적으로 복잡한 유니트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경험적experiential인 명칭designations과 대상적objective인 명칭 사이의 이런 긴장은 니콜라스 엔트리켄J. Nicholas Entriken이 장소의 "사이성"--그것의 의미가 버내큘러적인 공간 어휘lexicons와 경험적인empirical 공간 어휘 사이의 무엇에 놓인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기억과 주체성은 카토그라픽적이고 양적인 과학에 스친다--이라고 부른 것이다.[44] 도린 매세이Doreen Massey와 하비 같은 막스주의 지형학자에게 이런 특정ㅇ성과 일반성 사이의 긴장은 정치적인 것만큼 인식론적이다. 각각은 다른 방식으로, 장소의 변증법적인 이해를 위해 논한다: 그들이 논하길, 장소는 배타적이고 무시간적이지 않을뿐만 아니라, 되려 "사회 관계의 더 넓은 네트워크 속에서의 특정한 순간이다."(매시)[45] 그것들이 제안하길, 장소site는 (종종 모더니티의 힘에 의해 위태로움에 빠졌더라도, 무시간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내재적인, 고정된 문화와 커뮤니티의 속성으로부터가 아니라, "밖으로부터의 개입과 영향의 장소 속에서 작동해 나가는 것을 통해"(하비) 구별적인 성격을 획득한다.[46]
이렇게 보다 더 변증법적인 관점으로부터, 그러니까 "물체로 표명된 관계와 흐름"으로서 장소에 접근했을 때, 공공장소 속 텔레비전과 비디오가 어떻게 결속되고 통합된 유나이티를 관통하는 파괴의 에이전트보다는, 그것들이 장소의 구축의 에이전트가 될 수 있는지 쉽게 볼 수 있다. 메시의 말로, 장소는 "더 넓고 더욱 로컬한 사회관계의 구별된 혼합체의 주목"이며, 거기서 "이런 관계의 중첩은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효과를 생산해낼지도 모르며,"[48] 그러므로 물론 텔레비전은 하나의 물리적 장소site에서 로컬과 글로벌을 혼합하고 중첩하는 이런 과정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장소를 향한 지리학적 접근은, 그리고 스케일과 공간적 관계 사이의 통로로서 텔레비전의 역할을 향한 지리학적 접근은, 일상 환경 속 티비 스크린(공간적 변화와 변형 속 텔레비전의 역할의 결정론적 계정을 덜 허락하는 것 대신 "장소의 비 감각"[49]으로서의 텔레비전의 더욱 예상가능한 내러티브 속에서 제공된 것)의 주목할만한 이데올로기적 유연력과 물질적 적응능력과 잘 맞다.
특정한 환경을 향한 텔레비전의 관계에 관한 대부분의 학문적 계정은 엔트리킨이 '일반적generic' 장소의 아이디어라고 부른 것을 통해 텔레비전 세트를 접근해야만 한다. 일반적 장소는 지구 위의 독특한 로케이션이 아니라(그가 지역 연구, 지도제작술chorography을 따라서 만든 "지도제작적 장소"라고 부른) 비교가능한 스케일과 사회적 비슷함, 제도적 관계 같은 인접성contiguities에 기반을 둔 장소의 카테고리화다. 우리는 명확한 아티클article--집, 바bar--을 사용함에 의해 일반적 장소의 이해를 드러낸다. 우리가 이런 환경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 말이다.[50] 그러나 장소는 또한--"지역"이라는 불분명한 카테고리부터 특정한 마을의 더욱 특정한 카테고리까지, 개별적 주택, 실제 가정에 이르기까지--지구위의 독특한 장소를 의미할 수도 있다. 내가 따라오는 챕터에서 말할 공간적 스토리는 "일반적 장소와 특별한, "지도제작적" 장소를 모두 포함한다.[51] 나는 장소의 특정한 일반적 퀄리티--교통의, 레저의, 소비의, 관료주의적 행정의 사이트로 설계된 공간--를 지지하는 가운데 스크린의 역할에 관해 일반적으로 주목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우리가 노동계급 바나, 중산층 가정이나, 디스카운트 몰 신발 리테일러의 일반적 공간에서, 티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도심 네이버후드의 삶이나 혹은 교외이거나 리테일링의 성장하는 풍경 안에 있는 그러한 장소를 모양짓는 더 넓은 역사적 과정--산업의 운동, 도심 발전의 투자, 인구재위치화--에 관한 무언가를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는 장소의 코로그라픽 센스와 함께 일반적인 센스도 필요로 한다. 이런 변화과정이 지역적으로 특정하기 때문에, 불균등한 발전의 로컬화된 과정에 의해 통제된다--도심재생 정치와 공장폐쇄는, 예를 들어, 도시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때때로 나는 어떤 일반적 사이트 속 티비를 둘러싼 그 레토릭과 실천에 관한 내 리딩을 실제 지역의 코로그라픽한 프로세스의 분석으로 보충한다.
따라오는 텔레비전의 공간적 이야기가 제너릭하고 코로그라픽한 장소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두 번째 길은 이 책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첫번째 절반은 특정 장소--상점, 대기실, 바--와 티비의 관계에 관한 제도적 담론에 우선적으로 주목한다. 어떤점에서 역사적인,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제도적 에이전트가, 텔레비전의 역사라는 선택된 관점에서, 주체와 공간, 이미지 사이의 장소특정적 관계성으로서 관람성의 결과에 관해 생각해 왔는지를 추적한다. 두 번째 절반의 이야기는 유니크한 사이트--실제 상점, 바, 레스토랑, 몰, 대기실--에서 티비 스크린의 물질적 실천을 추적한다. 실제 장소 속 특정한 스크린에 관한 이런 주목은 그러므로 고로그래픽하며, 그것은 사회공간에서 공공 스크린의 제도와 문화가 취하는 몹시 구체적이면서도 촉각적인 형태를 부여잡기 위해 사진이나 사진에 기반을 둔 아티스트의 렌더링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두 부분 모두에서 나는 제너릭한 장소--예를 들어 바the bar--의 감각과 특정한 장소--실제 바, 그것의 실제 티비 세트--의 감각 사이를 크로스오버하는 데 관심이 있다. 그 결과, 어떤점에서 라투르주의적 소스의 혼합체, 데이터, 인상은 어떻게 텔레비전 그 자체가 사이트 안에서 일반성과 특정성의 힘의 에이전트로서 복무했는지 진짜로 부여잡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처럼 보인다.
방법론과 지도
만약 티비가 장소특정적이어서, 주체에 관한 더 넓은 제도적 아이디어를 물질화하고, 다양한 마이크로레벨의 사회논리적 일상 영역 안에서 그 주체의 개별적 여정을 뒤쫒는다면, 그렇다면 그것을 향한 최고의 접근법은 로렌스 그로스버그의 용어 "독특한 문화연구의 논리: 그것은 이미 질문되어진 문맥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 질문은 자체는 그 문맥을 규정한다"를 향한 비판적 실천을 통한 것이다.[52] ......
2018년 1월 5일 금요일
심은진, <바쟁과 텔레비전> 중에서
“텔레비전의 즐 거움은 스펙터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 보는 사람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환상에 토대를 둔다.” 6)
텔레(téle-비전vision은 멀리서 본다는 의미이다. 영화는 커다란 스크린 위에 관객의 욕 망을 투사하면서 관람의 즐거움을 만들어 준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이미지가 투사되는 표면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텔레비전은 우리 시각 기관의 연장처럼 기능하며, 보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영화는 무엇을 보는가가 중요하다면, 텔레비전은 본다는 행위가 중요하다. 즉 이미지를 동시에 도처에서 본다는 행위, ‘현전présence’이 중요한다. 텔레-비전, 멀리서 본다 는 것은 멀리서(téle)-현전(présence)하는 것이다. 바쟁은 ‘현전성’을 텔레 비전의 중요한 특징으로 설명한다. “텔레비전은 각자가 증인이 되는 예 술이다.” 7) 심은진, <바쟁과 텔레비전> 143-4
바쟁의 딜레마는 재현 매체인 영화가 전송 매체인 텔레비전의 생방송 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었다. 1955년 영화를 각색한 <죄 와 벌Crime et Châtiment>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한 글에서 바쟁은 영화가배울수있는점을말한다. 이드라마에서살인장면은이미촬영 된것을끼워넣은것이지만, 드라마전체가나무랄바없이잘연출되었
. 바쟁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드라마 전체가 이미 촬영된 이었다면? 그래도 생방송처럼 전달되지 않았을까?”25) 그는 촬영과 제 이 아니라 수용의 관점에서, 즉 시청자의 관점에서 생방송 형식에 대
해 생각하게 된다. 비록 생방송이 아니더라도 생방송 형식으로 제작된 드라마는 보는 사람에게 생방송의 효과를 만들어 낸다고 설명한다. 바쟁 은 이것을 ‘지연된 생방송’이라고 표현한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미래는 영 화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개량된 생방송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26) 150
2018년 1월 2일 화요일
2017년 10월 14일 토요일
진 영블러드, 시네마와 코드, in Future Cinema: The Cinematic Imaginary after Film, ed. Jeffery Shaw and Peter Weibel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03) 156-61.
소위 이야기하는 “디지털 이미징”의 주체는, 비디오와 컴퓨터 모드의 문맥에서 존재하며(차이는 오직 이미지 소스와 리얼타임 오퍼레이션의 가능성이다), 그것은 이미지 프로세싱과 이미지 신디사이징, 프로시저적이거나 언어학적 방법 안에서 디지털 코드를 쓰거나 조직하는 일의 생성적 영역을 포괄한다. 그러나 우리가 무빙이미지의 현상학을 참조하는 어떤 케이스에서나, 우리는 그것을 시네마라고 부른다. 우리에게는 시네마를 그것의 미디엄과 분리하는 것이 몹시 중요하다. 우리가 음악을 특정한 악기로부터 분리한 것처럼 말이다. 시네마는 시간 속 시청각 이벤트의 흐름을 조직하는 기술art이다. 그것은 사건-흐름이다. 꼭 음악처럼 말이다. 최소한 네 가지의 미디어가 있으며 그걸 통해 우리는 시네마를 실천할 수 있다—필름, 비디오, 홀로그라피, 구조화된 디지털 코드. 우리가 음악을 실천할 수 있는 많은 악기가 있듯이 말이다.
2017년 9월 28일 목요일
quotes from David Joselit, "The Self Readymade," in Infinite Regress: Marcel Duchamp 1910-1941
"만약 뒤샹의 수직으로 세워진 체스판이 "지워질 수 있는 아름다움"의 회화적 이상을 실현한다면, 트라비쉐는 두 번째 미학적 질서를 개진하는데, 여기서 게임의 움직임manoeuvre은 일상 공간으로 쏟아져 나온다. ... 이것이 스튜디오 공간 안에서 6년 뒤에 트리비쉐가 명백히 성취한 것이다: 트랩을 가장해서 일상의 영역으로 게임을 마이그레이션한 것. 체스는 그러므로 두 가지 방향 속에서 예술과 만난다--페인팅 면의 식민화를 통해, 그리고 레디메이드 영역으로 밖으로 프로젝션 한 것에 의해. 체스는 두 가지 공간을 점유할뿐만 아니라 경첩처럼 그것들을 통합한다."(160)
"체스에 관한 뒤샹의 강조점, Fresh Widow에서 똑같이 등장했던 그것은 뒤샹의 기계화 담론의 두 번째 변형을 구축한다--분리하는 기계의 근본적인 능력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나 힘의 경제로서의 상태status를 중심에 두는 것. 체스에 관한 뒤샹의 "발견"--나는 이것을 그가 게임을 했다는 게 아니라 미학적 유사어로서 이 용어를 채택했다는 의미에서 쓴다--은 그가 <자전거 바퀴>의 구축과 함께 1913년에 소개했던 그 문제를 풀었다. <자전거 바퀴>는 그가 <Rotary Glass Plates (Precision Optics)>에 이르기까지 그가 생산했던 유일한 키네틱 오브제다. 뒤샹은 미래주의자가 가졌던 움직임의 시뮬레이션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이어그램화하려고 했다. 측정 그리드로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서 말이다. 실로, 뒤샹의 큐비즘 페인은 그가 체스를 찬미했던 것의 반대를 성취했다. 만약 체스가 "정적static이라는 의미에서 지오메트릭하지 않고," "그것이 움직이기 때문에, 기술적이라면," 그의 큐비즘 명작은 <큰 유리>와 마찬가지로 움직임과 그 기계를 움직이지 못하게immobilize한다: 그것들이 도입하는 다이나미즘은 실로 정적이라는 의미에서 지오메트릭하다. 뒤샹은 움직임에 매혹됐지만, 그는 동일하게 그가 "도시적 인상주의"라고 부른 무엇에 떨어지지 않고 그것을 재현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자전거 바퀴>는 이런 어려움의 엠블렘이고, 벽에 걸린 체스판과 박닥에 못박힌 트레비쉐 사이에서 드러나는 그것의 현전은 언캐니하게 우리가 "뒤샹주의적 체스"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담론장을 완성시킨다. 체스와 함께 정적인 레디메이드는 <유리>에서 일깨워진 것보다 심지언 훨씬 더 복잡한 일련의 상호작용으로서 재무대화된다. 그 게임은 뒤샹에게 시스템적 기계 움직임 모델을 제공했는데, 그것은 <큰 유리>나 <갖 된 미망인>과는 다르게 가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예술 오브제이거나, 최소한 "지워질 수 있다erasable." 체스는 레디메이드 모델을 움직임 속에 놓는다. 체스판의 회화적 면과 함께 그리고 일상계 안에서.(163)
뒤샹이 1920년대 동안 체스 때문에 예술을 포기했다는 게 사실일지라도, 그러한 재뉘앙스화는 동어반복적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면 그에게 그 게임은 그의 예술이 선점했것의 심각한 이어나가기였기 때문이다. 사실은 뒤샹은 절대로 예술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164)
2017년 9월 21일 목요일
그레고리 베이트슨, <마음의 생태학>에서 "원시 예술의 스타일, 우아함, 그리고 정보"
물론 텔레비전의 경우 화면에 영상이 잘 나오면 기계의 많은 부품들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면서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사실이며, 의식의 '화면'에도 같은 생각을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제공되는 것은 단지 모든 부품이 작동하고 있다는 매우 간접적인 보고일 뿐이다. 만약 테레비전의 진공간이 터져 고장이 나거나, 중풍으로 사람이 고장난다면 이 병으로 인한 결과는 충분히 화면이나 의식에 드러나겠지만, 진단은 역시 전문가가 해야한다.
이는 예술의 본질을 떠받치는 문제다. 찌그러지거나 불완전한 그림을 제공하는 텔레비전은 어떤 의미에서 무의식적인 병링 대한 커뮤니케이션, 즉 증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어떤 예술가들이 그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256)
...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이 세상을 왜곡되게 보도록 만들고, 우리가 그 왜곡을 우리 것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이 왜곡은 흥미로울 수 있다. 취중진담. 이 또한 이;ㄴ간 자신의 일부나 진리의 일부란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낮아지거나 높아질 수 있다. 하지만 중독은 기술을 증가시키지 않으며, 기껏해야 이전에 습득된 기술을 발휘하게 해줄 뿐이다.
기술 없이는 예술도 없다.(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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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는 행위나 작품(역시 예술이라 불리는)은 거의 예외 없이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기술을 필요로 하거나 나타내며, 중복이나 패턴을 내포한다.
그러나 두 가지 특징은 분리될 수 없다. 기술이 먼저 확보되고 그 다음 기술이 중목을 조정하는 것이다.(262)
...
(6) 요약하면, 내가 볼 때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고요와 소란의 대비가 섞여 짜인 것이다. 이와 유사한 대비나 결합이 우리가 보았던 잎사귀 그림에도 표현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또한 넘쳐흐르는 자유가 명확하게 뒤덮여 있었다.
이러한 결론을 통해서, 이제 나는 앞에서 제기된 '체계적인 지혜라는 방향에서, 이러한 예술 작품의 창작이나 감상으로 어떤 종류의 교정이 얻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최종적인 분석에서, 그 그림은 인간의 목적으로 소요나 고요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저속한 잘못이 될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림을 그리거나 감상하는 것은 이러한 잘못이 드러나는 경험을 제공할 것이 틀림없다. 그림의 통일성과 조화는 그 대비되는 극들이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 극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배제한 선택을 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심오하고 일반적인 진리는 또한 성, 사회 조직, 죽음의 영역에서도 주장된다.(268-9)
노트:
인간성의 핵심문제는 우아함의 추구(올더스 헉슬리). 동물의 커뮤니케이션과 행동은 인간이 잃어버린 순진함과 단순성을 가지고 있다(월트 휘트먼). 인간의 기만 때문에 동물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우아함을 잃어버렸다.(235-6) 베이트슨은 동물과 신을 등치에 놓고 인간이 우아함을 결여하고 있다고 본다. 예술은 인간이 우아함을 추구하는 분야다.(236)
"어떤 문화는 이 어려운 통합에 전적인 의식이나 무의식 중 하나를 어리석게 선호함으로써 복잡성을 회피하는 부정적 접근을 조장하는 일이 있다. 그들의 예술이 '위대할' 것 같지는 않다."(236)
베이트슨은 어느 하나를 "어리석게 선호"하는 예술을 실패한 예술이라고 본다.
"나는 우아함이란 근본적으로 통합의 문제이며, 통합되어야 하는 것은 특히 한쪽 극단은 '의식'으로 부르고 다른 쪽 극단은 '무의식'으로 부르는 다양한 수준의 마음이라고 주장할 것이다."(236-7)
베이트슨은 우아함을 '통합'의 문제로 보고 있으며, 양극을 각각 의식과 무의식으로 설정한다. 그는 다양한 수준의 마음이라고 명한다.
"나는 예술 작품의 '표현'은 완전이 제쳐두고 그 속에 어떤 중요한 심리적 정보가 있는가를 ㅜ문제 삼고 있다. "스타일은 그 사람을 나타낸다"(뷔퐁). 스타일, 재료, 구성, 리듬, 기술 등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
... 인지된 물체나 인간(또는 신)을 나무나 페인트로 변형시키는 코드는 예술가나 문화에 관한 정보의 근원이 된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변형의 규칙은 바로--메시지가 아닌 코드다.
...
따라서 나는 코드화된 메시지가 아니라 선택된 코드의 의미에 대해서 묻고 있다. 하지만 '의미'라는 여전히 모호한 개념부터 규정되어야 한다."(289)
베이트슨은 코드 개념을 마공식의 감각으로 쓰고 있다.
"'의미'란 다음과 같은 패러다임 내에서 패턴, 중복, 정보, '제한'과 거의 동의어로 간주될 수 있다.
...
어떠한 사건들이나 사물의 집합체(예: 음소들의 연속, 그림, 개구리, 문화)는 만약 그 집합체가 어떤 식으로든 '빗금 표시'에 의해 나누어질 수 있고, 그리서 관찰자가 단지 빗금 표시의 한쪽에 있는 것만 보아도 다른 쪽에 있는 것에 대해 무작위한 결과보다 더 잘 추측할 수 있다면 '중복'이나 '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빗금 표시의 한쪽에 있는 것이 다른 쪽에 관한 정보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공학도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 집합체는 '중복'을 가지고 있다. 혹은 다시 말하자면, 사이버네틱스적 관찰자의 관점에서 빗금 표시의 한쪽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릇된 추측을 제한할(즉 확률을 줄일) 것이다."(239)
"커뮤니케이션의 핵심과 존재 이유는 중복, 의미, 패턴, 예측 가능성, 정보, 그리고/혹은 '제한'에 의한 무작위성의 축소를 창조하는 것이다.
'메시지' (즉 예술 작품) 자체가 내부적으로 패턴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를 더 큰 세계의 일부--문화나 문화의 일부--로 보게끔 만드는 개념 체계를 획득하는 것이 최우선으로 중요하다고 믿는다."(240)
세계가 패턴으로 직조되어 있다는 뜻.
마음의 지식
"(1) "새뮤얼 버틀러는 유기체가 어떤 것에 대해 더 잘 안다는 것은 자신의 지식이 되는 것에 대해 더 적게 의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지식(또는 습관--행동, 지극 혹은 사고의 습관)이 마음의 점점 더 깊은 수준으로 가라앉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선의 핵심 수련법인 이 현상은 또한 모든 예술과 기술에 관련된다.
(2) 에임스는 우리가 보고 있는 삼차원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의식은 우리가 완전히 의식하지 못하면서 사용하는 지각의 수학적 전제들과 관련된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입증했다. ...
(3) 일차적 과정으로 코드화된 은유인 꿈에 대한 프로이트 학파의 이론. 나는 스타일--짜임새, 선명한 대조 등--을 은유적 현상으로 간주할 것이며, 따라서 스타일을 일차적 과정이 지배력을 갖는 정신의 수준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4) 무의식을 억압의 과정에 의해 두렵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맡겨지는 지하실이나 찬장으로 여기는 프로이트의 관점.
전통 프로이트 학파의 이론은 꿈을 '꿈 작업'으로 생긴 이차적 산물로 가정했다. 의식적 사고에 수용될 수 없는 자료는 짐작건대 꿈꾸는 사람을 깨우지 않기 위해 일차적 과정의 은유적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은유적 언어는 억압의 과정에 의해 무의식에 잡혀있는 정보의 학목들에 딱 들어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포유동물의 상호작용에 대한 대부분의 전제들을 포함해서 다른 많은 종류의 정보들이 의식의 검열에 도달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이 항목들은 원래 일차적 과정의 언어로 존재하며, 단지 '이성적' 용어로 옮기기 어렵다는 게 맞는 것 같다. ...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의식을 신비롭고, 무의식, 예를 들면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필수적이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일차적 과정의 계산 수단으로 생각한다."(244-6)
"솜씨skill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기술의 실행에 많은 무의식적 요소들이 존재함이 드러난다.
따라서 '이 메시지 자료의 어떤 구성 요소들이 예술가에 대한 어떤 상태의 무의식(또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어떤 예술 작품을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이 질문은 비록 의식적이지는 않더라도, 날카로운 비평가가 언제나 묻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일종의 무의식에 관한 커뮤니케이션의 훈련이다. 또는,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예술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을 실행하고 좀더 완전하게 만드는 기능을 가진 일종의 놀이 행위다."(248)
-> 베이트슨에 따르면, 나는 백남준의 작업을 백남준의 (의식과) 무의식을 담은 일종의 메시지로 봐야 한다. "이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접촉면에 관한 메시지다."(249) 베이트슨은 기술, 솜씨에도 무의식적 요소가 있다고 본다.
"만약 예술가의 시도가 자기 작업의 무의식적인 요소들에 관한 커뮤니케이션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움직이는 계단(또는 에스컬레이터)에 타고서 자신의 위치에 관해 커뮤니케이션하려고 하지만 자신의 움직임 그 자체가 커뮤니케이션하려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함수라는 결론이 된다."(250)
-> 내용뿐 아니라 형식 자체가 메시지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매클루언의 잠언. (미디어의 이해 참고할 것.)
예술가=(프로이트적 의미에서) 꿈꾸는 자
이는 예술의 본질을 떠받치는 문제다. 찌그러지거나 불완전한 그림을 제공하는 텔레비전은 어떤 의미에서 무의식적인 병링 대한 커뮤니케이션, 즉 증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어떤 예술가들이 그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256)
...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이 세상을 왜곡되게 보도록 만들고, 우리가 그 왜곡을 우리 것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이 왜곡은 흥미로울 수 있다. 취중진담. 이 또한 이;ㄴ간 자신의 일부나 진리의 일부란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낮아지거나 높아질 수 있다. 하지만 중독은 기술을 증가시키지 않으며, 기껏해야 이전에 습득된 기술을 발휘하게 해줄 뿐이다.
기술 없이는 예술도 없다.(257)
...
예술이라는 행위나 작품(역시 예술이라 불리는)은 거의 예외 없이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기술을 필요로 하거나 나타내며, 중복이나 패턴을 내포한다.
그러나 두 가지 특징은 분리될 수 없다. 기술이 먼저 확보되고 그 다음 기술이 중목을 조정하는 것이다.(262)
...
(6) 요약하면, 내가 볼 때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고요와 소란의 대비가 섞여 짜인 것이다. 이와 유사한 대비나 결합이 우리가 보았던 잎사귀 그림에도 표현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또한 넘쳐흐르는 자유가 명확하게 뒤덮여 있었다.
이러한 결론을 통해서, 이제 나는 앞에서 제기된 '체계적인 지혜라는 방향에서, 이러한 예술 작품의 창작이나 감상으로 어떤 종류의 교정이 얻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최종적인 분석에서, 그 그림은 인간의 목적으로 소요나 고요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저속한 잘못이 될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림을 그리거나 감상하는 것은 이러한 잘못이 드러나는 경험을 제공할 것이 틀림없다. 그림의 통일성과 조화는 그 대비되는 극들이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 극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배제한 선택을 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심오하고 일반적인 진리는 또한 성, 사회 조직, 죽음의 영역에서도 주장된다.(268-9)
노트:
인간성의 핵심문제는 우아함의 추구(올더스 헉슬리). 동물의 커뮤니케이션과 행동은 인간이 잃어버린 순진함과 단순성을 가지고 있다(월트 휘트먼). 인간의 기만 때문에 동물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우아함을 잃어버렸다.(235-6) 베이트슨은 동물과 신을 등치에 놓고 인간이 우아함을 결여하고 있다고 본다. 예술은 인간이 우아함을 추구하는 분야다.(236)
"어떤 문화는 이 어려운 통합에 전적인 의식이나 무의식 중 하나를 어리석게 선호함으로써 복잡성을 회피하는 부정적 접근을 조장하는 일이 있다. 그들의 예술이 '위대할' 것 같지는 않다."(236)
베이트슨은 어느 하나를 "어리석게 선호"하는 예술을 실패한 예술이라고 본다.
"나는 우아함이란 근본적으로 통합의 문제이며, 통합되어야 하는 것은 특히 한쪽 극단은 '의식'으로 부르고 다른 쪽 극단은 '무의식'으로 부르는 다양한 수준의 마음이라고 주장할 것이다."(236-7)
베이트슨은 우아함을 '통합'의 문제로 보고 있으며, 양극을 각각 의식과 무의식으로 설정한다. 그는 다양한 수준의 마음이라고 명한다.
"나는 예술 작품의 '표현'은 완전이 제쳐두고 그 속에 어떤 중요한 심리적 정보가 있는가를 ㅜ문제 삼고 있다. "스타일은 그 사람을 나타낸다"(뷔퐁). 스타일, 재료, 구성, 리듬, 기술 등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
... 인지된 물체나 인간(또는 신)을 나무나 페인트로 변형시키는 코드는 예술가나 문화에 관한 정보의 근원이 된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변형의 규칙은 바로--메시지가 아닌 코드다.
...
따라서 나는 코드화된 메시지가 아니라 선택된 코드의 의미에 대해서 묻고 있다. 하지만 '의미'라는 여전히 모호한 개념부터 규정되어야 한다."(289)
베이트슨은 코드 개념을 마공식의 감각으로 쓰고 있다.
"'의미'란 다음과 같은 패러다임 내에서 패턴, 중복, 정보, '제한'과 거의 동의어로 간주될 수 있다.
...
어떠한 사건들이나 사물의 집합체(예: 음소들의 연속, 그림, 개구리, 문화)는 만약 그 집합체가 어떤 식으로든 '빗금 표시'에 의해 나누어질 수 있고, 그리서 관찰자가 단지 빗금 표시의 한쪽에 있는 것만 보아도 다른 쪽에 있는 것에 대해 무작위한 결과보다 더 잘 추측할 수 있다면 '중복'이나 '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빗금 표시의 한쪽에 있는 것이 다른 쪽에 관한 정보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공학도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 집합체는 '중복'을 가지고 있다. 혹은 다시 말하자면, 사이버네틱스적 관찰자의 관점에서 빗금 표시의 한쪽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릇된 추측을 제한할(즉 확률을 줄일) 것이다."(239)
"커뮤니케이션의 핵심과 존재 이유는 중복, 의미, 패턴, 예측 가능성, 정보, 그리고/혹은 '제한'에 의한 무작위성의 축소를 창조하는 것이다.
'메시지' (즉 예술 작품) 자체가 내부적으로 패턴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를 더 큰 세계의 일부--문화나 문화의 일부--로 보게끔 만드는 개념 체계를 획득하는 것이 최우선으로 중요하다고 믿는다."(240)
세계가 패턴으로 직조되어 있다는 뜻.
마음의 지식
"(1) "새뮤얼 버틀러는 유기체가 어떤 것에 대해 더 잘 안다는 것은 자신의 지식이 되는 것에 대해 더 적게 의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지식(또는 습관--행동, 지극 혹은 사고의 습관)이 마음의 점점 더 깊은 수준으로 가라앉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선의 핵심 수련법인 이 현상은 또한 모든 예술과 기술에 관련된다.
(2) 에임스는 우리가 보고 있는 삼차원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의식은 우리가 완전히 의식하지 못하면서 사용하는 지각의 수학적 전제들과 관련된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입증했다. ...
(3) 일차적 과정으로 코드화된 은유인 꿈에 대한 프로이트 학파의 이론. 나는 스타일--짜임새, 선명한 대조 등--을 은유적 현상으로 간주할 것이며, 따라서 스타일을 일차적 과정이 지배력을 갖는 정신의 수준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4) 무의식을 억압의 과정에 의해 두렵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맡겨지는 지하실이나 찬장으로 여기는 프로이트의 관점.
전통 프로이트 학파의 이론은 꿈을 '꿈 작업'으로 생긴 이차적 산물로 가정했다. 의식적 사고에 수용될 수 없는 자료는 짐작건대 꿈꾸는 사람을 깨우지 않기 위해 일차적 과정의 은유적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은유적 언어는 억압의 과정에 의해 무의식에 잡혀있는 정보의 학목들에 딱 들어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포유동물의 상호작용에 대한 대부분의 전제들을 포함해서 다른 많은 종류의 정보들이 의식의 검열에 도달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이 항목들은 원래 일차적 과정의 언어로 존재하며, 단지 '이성적' 용어로 옮기기 어렵다는 게 맞는 것 같다. ...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의식을 신비롭고, 무의식, 예를 들면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필수적이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일차적 과정의 계산 수단으로 생각한다."(244-6)
"솜씨skill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기술의 실행에 많은 무의식적 요소들이 존재함이 드러난다.
따라서 '이 메시지 자료의 어떤 구성 요소들이 예술가에 대한 어떤 상태의 무의식(또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어떤 예술 작품을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이 질문은 비록 의식적이지는 않더라도, 날카로운 비평가가 언제나 묻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일종의 무의식에 관한 커뮤니케이션의 훈련이다. 또는,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예술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을 실행하고 좀더 완전하게 만드는 기능을 가진 일종의 놀이 행위다."(248)
-> 베이트슨에 따르면, 나는 백남준의 작업을 백남준의 (의식과) 무의식을 담은 일종의 메시지로 봐야 한다. "이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접촉면에 관한 메시지다."(249) 베이트슨은 기술, 솜씨에도 무의식적 요소가 있다고 본다.
"만약 예술가의 시도가 자기 작업의 무의식적인 요소들에 관한 커뮤니케이션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움직이는 계단(또는 에스컬레이터)에 타고서 자신의 위치에 관해 커뮤니케이션하려고 하지만 자신의 움직임 그 자체가 커뮤니케이션하려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함수라는 결론이 된다."(250)
-> 내용뿐 아니라 형식 자체가 메시지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매클루언의 잠언. (미디어의 이해 참고할 것.)
예술가=(프로이트적 의미에서) 꿈꾸는 자
Edward A. Shanken, Introduction: Systems Thinking/Systems Art, in Systems (DOC)
... 레스 리바인은 자신의 인터렉티브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컨텍트: 사이버네틱 스컵쳐>(1969)를 "인간과 테크놀로지를 신시사이즈하는 시스템 ... 사람들은 소프트웨어다"라고 묘사했다. 이어서 말하길, "이런 응답 메커니즘의 '인격personality'은 관람자의 태도를 반영한다 ... 회로는 개방되어 있다."
...
시스템 사유하기systems thinking의 중요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시스템 이론과 사이버네틱스의 역사적 바탕이 도움될 수 있다. 생물학자 루드비히 폰 베르탈란피Ludwig von Bertalanffy는 처음으로 1930년대에 일반 시스템 이론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열린 시스템(끊임없이 환경이나 주변과 상호작용하는 무엇)을 이해하는 접근법이었다. 시스템 이론은 환원론보다 전체론holism을, 매커니즘보다 오가니즘을, 프로덕트보다 프로세스를 강조했다. 전통 서구 과학이 지식에 접근하는 방식과는 대조되게, 그것은 개인적인 면의 절대적인 퀄리티로부터 주의를 돌려, 전체의 오가니제이션을, 더욱 관계적인 의미에서, 구성 요소 가운데 다이나믹하게 상호작용하는 과정으로 다룬다. 광범위한 사이버네틱스의 학제간 필드는 시스템 이론을 위한 기술적 토대를 제공하며 시스템이론과 유의어가 된다.
사이버네틱스의 첫 물결은 어떻게 시스템이 피드백 루프를 통해 정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주목했으며, 그것은 자기-규제self-regulation을 가능하게 했다. 예를 들어, 피드백 루프를 구성하는 자기-규제하는 제어 매커니즘은 인간 신체 온도를 37도로 유지한다. 비슷하게 가정용 온도조절장치는 온도의 변화를 측정하고 거기에 반응한다. 원하는 온도를 유기하기 위해, 기후 제어 시스템을 실내의 뜨겁고 차가운 공기에 맞추면서 말이다. 엔지니어인 워런 위버의 정보 이론 정식을 끌고 오자면, 사이버네틱스는 제어와 커뮤니케이션의 과학을 제정했다. 그것은 동물과 기계 모두의 명백한 목표값 찾기goal seeking에 적용됐다. 이런 관점에서 사이버네틱스는 인공 지성과 로보틱스에 관한 초기 리서치에 활기를 불어 넣었으며, 그것에 의해 풍성해졌다. 사이버네틱스는 마치 생명체처럼 행위하는 기계적 시스템, 예를들어 매컬로크-피츠McCulloch-Pitts의 인공 뉴런, 그레이 월터Grey Walter의 자율적 로보틱 "거북이", 로스 애쉬비Ross Ashby의 자동제어장치homeostat를 구축하고 제어하기 위한 이론 모델을 제공했다. 이 모든 것은 현장의 풍부한 토양에서, 1946년과 1953년 사이에 뉴욕에서 매해 열린 메이시 컨퍼런스에서 선보여졌다 ...
두 번째 물결은 폰 푀스터von Foerster에 의해 지지되었는데, 시스템의 불가분한 일부로서 관찰자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렇게 반영성/재귀성reflexivity의 급진적 감각이 소개됐다. 과학자는 자신의 과학 실험에서 활성화된 참여자로 인식됐다. (관측의 반복되는 본성의) 이런 관측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우리의 발명품"이라는 구축주의적 포지션으로 이끌었다. 사이버네틱스와 시스템 이론은 근본적으로 지식 생산에 대한 관습적인 접근에 도전했다. 마인드셋의 이런 변환은 광범위한 예술 실천과 전시를 통해, 그리고 <래디컬 소프트웨어>와 <홀 어스 카탈로그> 같은 출판물을 통해 대중 문화속으로 스며들었다. <홀 어스 카탈로그>의 첫 번째 호(1968)는 "전일 시스템에 대한 이해"에 바쳐졌다.
문학 비평가 캐서린 헤일스는 사이버네틱스의 세 번째 물결을 복잡 시스템의 창발적 행동과 관련지어 정의했다. ...
...
시스템 사유하기systems thinking의 중요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시스템 이론과 사이버네틱스의 역사적 바탕이 도움될 수 있다. 생물학자 루드비히 폰 베르탈란피Ludwig von Bertalanffy는 처음으로 1930년대에 일반 시스템 이론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열린 시스템(끊임없이 환경이나 주변과 상호작용하는 무엇)을 이해하는 접근법이었다. 시스템 이론은 환원론보다 전체론holism을, 매커니즘보다 오가니즘을, 프로덕트보다 프로세스를 강조했다. 전통 서구 과학이 지식에 접근하는 방식과는 대조되게, 그것은 개인적인 면의 절대적인 퀄리티로부터 주의를 돌려, 전체의 오가니제이션을, 더욱 관계적인 의미에서, 구성 요소 가운데 다이나믹하게 상호작용하는 과정으로 다룬다. 광범위한 사이버네틱스의 학제간 필드는 시스템 이론을 위한 기술적 토대를 제공하며 시스템이론과 유의어가 된다.
사이버네틱스의 첫 물결은 어떻게 시스템이 피드백 루프를 통해 정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주목했으며, 그것은 자기-규제self-regulation을 가능하게 했다. 예를 들어, 피드백 루프를 구성하는 자기-규제하는 제어 매커니즘은 인간 신체 온도를 37도로 유지한다. 비슷하게 가정용 온도조절장치는 온도의 변화를 측정하고 거기에 반응한다. 원하는 온도를 유기하기 위해, 기후 제어 시스템을 실내의 뜨겁고 차가운 공기에 맞추면서 말이다. 엔지니어인 워런 위버의 정보 이론 정식을 끌고 오자면, 사이버네틱스는 제어와 커뮤니케이션의 과학을 제정했다. 그것은 동물과 기계 모두의 명백한 목표값 찾기goal seeking에 적용됐다. 이런 관점에서 사이버네틱스는 인공 지성과 로보틱스에 관한 초기 리서치에 활기를 불어 넣었으며, 그것에 의해 풍성해졌다. 사이버네틱스는 마치 생명체처럼 행위하는 기계적 시스템, 예를들어 매컬로크-피츠McCulloch-Pitts의 인공 뉴런, 그레이 월터Grey Walter의 자율적 로보틱 "거북이", 로스 애쉬비Ross Ashby의 자동제어장치homeostat를 구축하고 제어하기 위한 이론 모델을 제공했다. 이 모든 것은 현장의 풍부한 토양에서, 1946년과 1953년 사이에 뉴욕에서 매해 열린 메이시 컨퍼런스에서 선보여졌다 ...
두 번째 물결은 폰 푀스터von Foerster에 의해 지지되었는데, 시스템의 불가분한 일부로서 관찰자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렇게 반영성/재귀성reflexivity의 급진적 감각이 소개됐다. 과학자는 자신의 과학 실험에서 활성화된 참여자로 인식됐다. (관측의 반복되는 본성의) 이런 관측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우리의 발명품"이라는 구축주의적 포지션으로 이끌었다. 사이버네틱스와 시스템 이론은 근본적으로 지식 생산에 대한 관습적인 접근에 도전했다. 마인드셋의 이런 변환은 광범위한 예술 실천과 전시를 통해, 그리고 <래디컬 소프트웨어>와 <홀 어스 카탈로그> 같은 출판물을 통해 대중 문화속으로 스며들었다. <홀 어스 카탈로그>의 첫 번째 호(1968)는 "전일 시스템에 대한 이해"에 바쳐졌다.
문학 비평가 캐서린 헤일스는 사이버네틱스의 세 번째 물결을 복잡 시스템의 창발적 행동과 관련지어 정의했다. ...
2017년 9월 15일 금요일
대양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55802&cid=48639&categoryId=48639
https://en.wikipedia.org/wiki/Oceanic_feeling
https://en.wikipedia.org/wiki/Oceanic_feeling
"The oceanic effect of
synaesthetic cinema is similar to the mystical allure of the natural
elements: we stare in mindless wonder at the ocean or a lake or
river. We are drawn almost hypnotically to fire, gazing as though
spellbound. We see cathedrals in clouds, not thinking anything in
particular but feeling somehow secure and content. It is simial r to the
concept of no-mindedness in Zen, which also is the state of mantra
and mandala consciousness, the widest range of consciousness." (Expended Cinema, 92)
2017년 9월 11일 월요일
abstraction, relation and structure
"As nature becomes more abstract, a relation is more clearly felt. The new painting has clearly shown this. And that is why it has come to the point of expressing nothing but relations." Piet Mondrian, Plastic Art and Pure Plastic Art (New York: Wittenborn, Schultz, Inc., 1945), p. 50.
"The more the assignment is emptied of what could normatively be considered to be compelling social subject matter, the more visible it is simply as the instance of a structure, an order." Jeff Wall. "Marks of Indifference: Aspects of Photography in, or as, Conceptural Art," http://www.art.ucla.edu/photography/downloads/Wall001.pd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