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9일 금요일

성유물로서의 굿즈

굿즈는 일종의 성유물인 것 같다. 성유물은 성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파편으로 성인과 직접 연결할 수 있는 매개체다. 그래서 신비한 힘이 있다고 여겨진다. 중세 가톨릭의 면벌부 같은 것도 일종의 성유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애니 <페이트>에 보면 특정 소환수를 소환해 전투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 소환수와 관련된 전승이 있는 성유물이 필요하다. 미드 <로스트 룸>에서는 그러한 미스테리한 성유물이 가진 힘을 알아내어 범죄에 쓰기도 하고 성유물을 조합하여 제3의 힘을 사용하기도 한다. <페이트>나 <로스트 룸>은 성유물을 가지고 있으면 수동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은총을 너머 성유물의 힘을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앞으로 굿즈 역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단순히 우상의 파편을 소중히 간직하며 기분 좋아지는 것을 너머, 파편의 '기능성' 역시 중요해질 것 같다. 모 그런 걸 기획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려나? 개소리..

2025년 8월 28일 목요일

신세대 멘탈리티

아주 웃긴 이야길 봐서 옮긴다. "나와 비슷하게 시작한 거 같은데"에서 출발선을 평등의 기준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여기는 모습을 알 수 있고, "속도가 빨라서"라는 게 1+1은 2라는 식의 투여한 시간 대비 결과는 무조건 같을 것이라는 믿음, "내면의 시작점" 운운도 비슷한 인식. 또 "그 사람이 걸었던 길을 나도 유사하게라도 밟아보고 싶다"는 건 캐리어 패스 쌓는 과정을 게임이라고 보는, 그래서 공략집이 필요하다는 인식처럼 들린다. (만약 그렇다면 이건 그들의 진짜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실전인생'은 아닌 셈이다. 게임은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점에서.)

모두가 똑같은 계층에 있다, 혹은 무계급의 사회라는 이상은 말 그대로 유토피아라는 데 동의한다면, 혹은 적어도 한 세대의 사이클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민하가 프랑스의 예를 들려준 것과 같이, 계층 자체를 문제삼기보다는 계층과 상관없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유한자에게는 더욱 중요해 보일 수 있다. 그렇담 행복이란 무엇이냐?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면 조던 피터슨과 슬라보예 지젝 정도는 거론해야겠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행복해'라는 사회적 합의가 최소한 인문주의적 성찰을 통해 도출될 필요는 있어 보인다. 그것이 행복이란 불가능하다 이데올로기다 같은 해체적 성찰보다는 최소한의 스텐다드여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 하자면 '모든 사람들에게 더 나은, 더 많은 행복의 옵션이 인간적 수준에 부합하게 주어져야 한다.'

암튼 평등주의란 게 있다면 이 스레드가 약간의 힌트를 주는 것 같기도 하다.

2025년 8월 21일 목요일

미술비평 웹진 목록

[미술]

xhibits : 엑시빗

https://pong.pub/

ACK미술비평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

WEBZINE • ART IN CULTURE

마코

SSALAD

권태현, 라시내, 조형빈, 하상현, 하은빈, 한수민 – editorial collective null


[영화]

https://55cinema.tistory.com/

이슈 - ma-te-ri-al

http://www.ccoart.com/

https://cine21.com/

https://figk.net/


[기타]

웹진 《비유》

🦜AI 윤리 레터


[영어]

Triple Canopy

제작과 담론

제작과 담론은 미술의 두 가지 영역이다. 미술은 두 가지 모두 있어야 성립한다. 그런데 거칠게 둘은 서로 다른 활동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면서도 둘은 서로를 끌어 당겨야 한다. 좋은 작가나 큐레이터, 비평가는 두 가지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선 어떤가? 

작가들은 제작만 알고 비평가와 큐레이터는 담론만 안다. 이렇게 양분해야 공평한가 싶으나, 대부분의 큐레이터는 제작의 결과물을 재료삼아 또 다른 제작에 이용하면서 그걸 담론이라고 우긴다. 이건 따지고 보자면 덜떨어진 제작, 덜떨어진 담론이다. 그나마 비평가가 제작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하지만 그들은 현재 멸종위기종이다. 

한국에서 현재 미술이 근근이 성립한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소수 비평가의 노력에 의해서다. 작가와 큐레이터에 의한 제작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 작가는 담론의 영역에서 거의 기여하는 바가 없다. 큐레이터는 담론과 제작 영역에서 별로 기여하는 바가 없다. 비평가는? 노력은 한다. 결과물은 신통찮지만.

2025년 8월 20일 수요일

글쓰기

권시우는 언젠가부터 반자동기술법을 터득한 것 같다. 초현실주의 이후의 글쓰기 혁명이다. 미술계 자기고백적 글쓰기에서 가히 원탑이 아닌가 한다. 그 중 글쓰기에 대한 부분이 인상깊어 기록한다.

어제 집이 비어서, 빈 집에 주변 사람들을 좀 초대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그래서 혼자 술 마셨다. 막걸리와 소주 조금. 혼자서 마시니까, 금방 지루해지고 재미가 없어서 또 금방 그만뒀다. 책 안 읽은지 며칠 됐지? 얼마 안 됐다. 무슨 책이든 간에, 읽다 보면 글이 쓰고 싶어진다. 그런 충동이 싫다. (싫어졌다?) 그래서 무기한 회피 중인 것 같다. 무기한? 또 이러다 다시 읽겠지 싶지만, 중요한 건 루틴이 꼬였다는 거다. 책 안 읽고 글 안 쓰면 하루에 숭숭 구멍이 뚫린 것 같다. 왜일까? 내가 하루하루 멍청해지는 기분... 그래봤자 며칠이지만. 글쓰는 일을 잠깐 그만두면 정말로 멍청해지는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도, 참 이상한 강박이다.(권시우, 고민, 미래의 손 : 네이버 블로그)

읽다 보면 쓰고 싶다니..그런 충동이 싫다니 나로선 참 부럽다. 글쓰는 일을 잠깐 그만두면 멍청해진다는 질문에 나의 답은 '그렇다.' "그럴리가 없는데"란 부분은 부동의. 글쓰기는 수많은 '정립'하는 행위 중 가장 코어에 가까운 활동 중 하나다. 언어를 매체로 다루기 때문에. 최소한 근대 이후의 시대가 언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상 그렇다고 생각. 그리고 다음 문단.

푸코는 언젠가 (정확한 출처는 까먹었다.) 글쓰는 사람, 철학자든 비평가든 뭐든 간에 하여튼 ‘그들’은 범죄자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미 글을 써버려서, 그 사실만으로 그 사람한테 낙인이 생겼고, 그걸 계속 의식하는 한 이렇게 계속 쓸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여기서 범죄자의 정의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직업을 너무 과대 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와 별개로 글쓰는 사람은 글을 안 쓰면, 심지어 그러기로 본인이 선택한 게 아니라면, 갈수록 내적으로 망가지는 건 어느 정도까진 사실인 것 같다. 내적으로 망가지면, 외적으로도 망가진다. 외적인 것은 이를테면... 설거지, 집안일 같은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글을 안 쓰면 내적으로 망가진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사실 나로선 글을 안 쓰니 고통스럽다기보단 좀 깔끔해진 느낌이다. 어쩌면 멍청해진다는 말을 서로 다르게 표현하는 것일지도. (ㅎㅎ)

2025년 8월 19일 화요일

《녹색은 잎으로》에 부쳐

정석우, <녹색은 잎으로#1(Green is in the Leaf#1)>, 2025, 캔버스에 유채, 77cm x 72.7cm.

내가 정석우의 작업을 보고 처음으로 인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얻은 때를 더듬어 보면, 기억하기로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쯤, 파주에 있는 스튜디오에 놀러갔을 적이 아닌가 한다. 자그마한 체구와 항상 겸손하고 예의바른 태도와는 다른, 혹은 정반대의 느낌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작가 자신으로선 지겹고 싫은 말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작은’이라든지 ‘예의’ 같은 인신에 속하는 단어를 결례를 무릅쓰고 굳이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대비는 극명하달까, 그만큼 예외적이랄까. 캔버스 3개를 이어 붙여 외형상으론 한자로 山(뫼산) 비스무레한 형태를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문자 그대로 산과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갓 그림의 크기를 산의 크기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그러니까 물리적 크기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실로 나로선 그런 비슷한 ‘거대한 기운’을 느낀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나는 슬며시 크다는 의미에 기운이라는 말을 집어넣었는데, 무언가 이질적이고, 기분이 나빠지고, 그리고 허락한다면, 악마적이라고 할 법도 한 그런 종류의 기운이라고 부연해야 하겠다. 자문컨대, 바닥에서부터 또아리치는 거칠고 무수한 줄기, 혹은 곤충의 다리, 촉수와 같은 선 때문일까? 거듭 실례를 무릅쓰자면 우중충하다는 단어 말고 더 나은 표현을 찾기 힘든 배색이 인상주의 이래로 의심의 여지없이 자리 잡은 순색 선호의 미감을 무언가 건드린 것일까? 어두운 기운이 향하고 있는 소실점에서 희미하게 타오르는 빛의 기둥을 보면서 나는 왜 이단적 숭배의 감성을 느꼈던 것일까? 3개의 캔버스는 실로 유구한 가톨릭의 삼면화 전통을 흉내 내고 있었다. 이 작업의 제목은 <볼천지>라고 한다—생각해 보면 이 제목도 참으로 이상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언젠가는 왜 이렇게 구정물만 바르느냐고 농반진반 따져 물은 적이 있는데, 실로 범인의 눈으로 보기엔 팔레트에 혼색을 하고 남은, 원래라면 닦아 버려야 했을 오래된 물감 찌꺼기를 조용히 칠하고 있는 장면을 기어코 상상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는 진지하게 ‘탁색’이야말로 자신이 진정으로 매료된 연구 대상이며, 탁색을 잘 써야 색을 진짜 잘 쓰는 것이라고 자주 읊조렸다. 그런데 그 탁색이 대체 어떤 의미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런 색을 만드는 방식이 매우 기이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하기로 했다는 <사일런트 아크(Silent Arc)>(2021-2025)로 말하자면, 아직 유화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캔버스를 밖에 들고 나가서 눈에 맞힌다던지, 갑자기 그림을 며칠 밖에 눕혀 놓고 얼렸다가 실내로 가지고 들어와 녹인다던지, 물을 가득 채운 바가지로 화면을 때리듯 부어 제친다던지 했다는 것인데, 본디 회화가 물감층을 견고하게 쌓아가야 하는 이유는 반드시 있을 터이다. 물감과 기름의 배합에 따라 마르는 속도가 일정치 못하거나 불순물이 첨가되거나 온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지 못한다거나 하면 자연히 그림에 원치 않는 균열이 생기고 후에는 반드시 변질되며 이는 완성도의 결함과 직결될뿐더러 본의 아니게 그림을 사고자 하는 귀한 손님에게까지 의심을 사게 된다. 필시 화가라면 누구나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할 터인데, 정석우의 경우는 혹시 악의가 담긴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잘못된 행동을 정성을 들여 퍼붓는다는 것이다. 작가가 이런 과정을 ‘에이징(aging)’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나로선 조금은 웃음이 나기도 하고 그럴싸하다고나 할까. 이유는 아니나 다를까 와인 숙성 따위가 떠올라서 그런 것인데 흔히 작품에 붙이는 명제의 주요 항목이 와인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평소의 쓸 데 없는 단상 때문이다.

언젠가는 정석우의 많은 작업이 퇴적층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시간성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냐 물어본 적이 있는데, 미묘하게 반응이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작가 특유의 결정짓지 않는 태도 때문일 수도 있지만, 고쳐 생각해보면 질문 자체가 원인과 결과를 뒤바꿨던 건 아닐까. 고라니가 뿔을 가지지 않는 대신 송곳니를 가졌다던가 나무의 뿌리가 거미줄처럼 생겼다던가 구름이 솜사탕 같이 생긴 것이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듯이 말이다. 아무튼 에이징이 노화하는 과정이고 사람으로 치면 유물론적 견지에서 시간이 몸에다가 새겨지며 형질이 변형해가는 과정이라면 정석우의 작업 역시 그런 과정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관련해서 정석우는 그림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거시적인 삶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진술하기도 하고 거대한 규칙 속에서 작품이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상상도 한다고 하는데, 특히 후자는 초현실주의자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초현실주의자가 인간 내부의 비인간성을 사회에 해방하는 데 골몰해있었다면, 내가 알기로 정석우가 더욱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인간도 사회도 상관없는 몰인간적 세계라서 그렇다. 이렇게 색이 다양한 질감과 함께 쌓이고 쌓인다. 탁도가 올라간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색은 보이지 않고 다만 입자가 보인다. 정석우는 그 풍부하고 복잡한 질감을 빛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런 작업을 작가는 구도의 과정으로 여긴다. 뚱딴지같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오늘날 같이 인류세나 행성적 사유 따위의 말들이 많은 시대에 나는 정석우가 내가 아는 작가 중 가장 거기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하게 된다. 정말로 빛에 가까워지는 과정이 정석우의 구도라면, 정말 거기서 그런 세계를 봤다면 나도 그것을 함께 보고 싶은 의향이 있다.

2025. 8. 19. 

2025년 8월 13일 수요일

불평등과 불공정

수저론이란 게 한창 통용된 시기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너는 금수저 나는 흙수저. 금, 은, 흙은 공히 계급을 가르는 말이다. 내가 알기로 이 말을 쓰는 사람은 소위 좌파만큼 계급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계급 격차를 받아들이거나 어떤 면에서는 상위계급을 선망하기도 한다. 수저론은 대표적으로 불평등을 인정하는 담론이다.

다른 한편에서 공정성이란 말을 많이 듣는다. 공정성이란 말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이지만 좀 더 부정적인 맥락에서 보면 더욱 명쾌하다. 불공정하다는 건 우리 모두가 합의한 게임의 룰을 어긴 상황이다. 그러니까 시험을 쳤는데, 누군가 컨닝을 했다. 뭐 그런 식의 감각인 것이다. 공정성은 불공정을 인정하지 않는 담론이다.

불평등과 불공정을 면밀히 따진다면 서로 구별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별이 전혀 안 되는 건 아니다. 불평등은 좌파의 언어, 불공정은 우파의 언어다. 좌파는 불평등을 보편적인 문제라고 인식한다. 우파는 불공정이 일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좌파에겐 단 하나의 불평등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우파는 과정이 공정하기만 하다면 불평등은 결과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이 불평등은 참지만 불공정을 참지 못한다는 감각은 흥미롭다. 그런데 사실 같은 이야기다. 구조는 못보고 각론에 화낸다는 말도 되고 구조를 인정하기 때문에 각론에서만 화낸다는 말도 된다. 주어진 계급이란 게 있다. 내가 없애고 싶다고 해도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반대도 아니다. 사람들은 불평등한 세계를 살아가기로 결심했고 최소한 그 안에서 불공정한 대우는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불평등의 관점에서, 누군가는 불공정에 관점에서 조국을 본다. 불평등의 관점에서 조국을 보면 조국의 신분, 특권계층이 계급을 세습하기 위해서 자행하는 편법은 서글프게도 어느정도는 우리가 이미 합의한 불평등이어서 문제될 것이 없으며, 오히려 그가 하려는 사법개혁은 공정성의 룰을 정상화하려는 선의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어느정도 염치가 있는 행동이다. 나쁜 것은 공정성 기준의 정상화를 가로막는 표적 수사이다.

반면 불공정의 관점에서 보면, 조국이 자식을 위해 제공한 여러가지 편법이야말로 동일 선상에 놓여 있는 수험생에게 좌절감을 선사한 것 같다. 조국은 원래 불평등의 화신이어서 편법 역시 가능했지만, 어쩐지 표창장 편법은 불공정의 담론에 들어가는데, 요는 이런 것 같다. 불평등은 구조일지언정 가시화되면 안 된다. 가시화된 불평등, 즉 불공정의 단계에 진입하면 불평등의 죄까지 소급해서 물어야 한다. 그래서 불공정을 쑤시다가 보니 조국의 불평등한 특권적 자리가 튀어 나온다. 이때 사법개혁을 부르짖던 조국은 불공정의 심급, 불평등을 해결할 자격이 없는 자가 된다. 

2025년 8월 12일 화요일

Niklas Luhmann, The Function of Art and the Differentiation of the Art System (1995)

오늘날, 체계 이론은 고도로 발전했지만 논쟁적인 분석 도구이다. 체계 이론은 예술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 이론적 결정을 요구한다. (물론 이는 다른 예술 분석—예를 들어 기호학적 분석—에도 해당된다.) 사회가 기능적으로 분화된 체계이며, 이러한 형태가 역사적으로 고유하다는 명제와 결합하면, 체계이론적 관점은 추가적인 함의를 갖는다. 즉, 서로 다른 기능 체계들이 여러 측면에서 비교 가능한 대상으로 다루어진다는 뜻이다.

체계 형성과 체계 경계, 기능, 매체와 형식, 작동적 폐쇄(operative closure), 자기생산(autopoiesis), 1차 및 2차 관찰, 부호화(coding)와 프로그래밍 같은 문제들은 어떤 기능 체계에 대해서도 연구될 수 있다. 이러한 연구가 구체화되어 답을 얻게 되면, 사회 이론은 사회의 통일된 의미를 찾아내려는 시도—예를 들어, 사회를 인간 본성, 창립 계약, 궁극적 도덕 합의로부터 유도하려는 시도—에 의존하지 않게 된다. 이런 명제들은 사회 체계가 가질 수 있는 자기서술(self-description)의 다양한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바로 그 하위 체계들의 비교 가능성 속에서 나타난다.

예술(법, 과학, 정치 등과 마찬가지로)이라는 영역에서 발견되는 것은 예술만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라, ‘적절한 변경을 거쳐’ 다른 기능 체계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특성들이다. 예를 들어, 2차 관찰의 방식으로의 전환이 그렇다. 예술은 하나의 체계로서 스스로를 분화함으로써 사회에 참여하며, 이는 다른 기능 체계와 마찬가지로 작동적 폐쇄의 논리에 예술을 종속시킨다. 현대 예술은 작동적 의미에서 자율적이다. 아무도 예술이 하는 일을 대신하지 않는다. 현대 예술의 사회적 성격은 이러한 작동적 폐쇄와 자율성에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분에 기초하여 분석을 진행한다. 즉, 한편으로는 체계/환경 관계, 다른 한편으로는 체계/체계 관계라는 구분이다. 체계/환경 관계를 다룰 때, 체계는 형식의 내부를 구성하며, 환경은 표시되지 않은(unmarked) 공간이다. 그러나 체계/체계 관계를 다룰 경우, 다른 쪽도 표시되고 지시될 수 있다. 이 경우 예술은 더 이상 ‘나머지 모든 것’과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정치적 편의에 의해 동기 부여를 받았는지, 부유한 고객의 의뢰를 받았는지와 같은 문제를 다루게 된다.

다른 사회 영역—경제, 정치, 과학 등—이 기능 체계로서 확립된다면, 예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들이 특정 문제에 더 좁게 초점을 맞추고, 모든 것을 그 관점에서 바라보며, 궁극적으로 그 문제를 중심으로 폐쇄하게 된다면? 14세기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이 의심스러운 방식으로 획득한 돈을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예술을 후원하고, 그것을 정치적 지위를 강화하는 데 재투자한다면, 예술은 어떤 모습일까? 다른 체계들의 기능 지향적 분화가 사회 전체를 기능적 분화로 밀어붙인다면, 예술은 이제 다른 기능 체계의 노예가 될 것인가? 아니면—우리가 주장하듯—기능 체계들의 점증하는 자동화가 오히려 예술로 하여금 자기 고유의 기능을 발견하고 오로지 그 기능에만 집중하도록 촉구하는 것인가?

[...]

예술이 세계 속에서 만들어내는 차이를 보다 급진적으로 공식화해야 한다. 한 가지 가정은, 예술이 ‘지각’을 사용함으로써, 의식이 자기 바깥을 외화하는 활동 수준에서 의식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전달 불가능한 것—즉, 지각—을 사회의 의사소통 네트워크에 통합하는 데 있을 것이다. 칸트는 이미 예술의 기능(미적 관념의 제시)의 핵심을, 언어나 개념적 이해를 넘어서는 사고를 자극하는 능력에서 찾았다. 예술 체계는 지각하는 의식에게 작품 관찰이라는 고유한 모험을 허락하면서도, 그 모험을 촉발한 형식적 선택을 의사소통으로서 제공한다.

지각은, 사유나 의사소통과는 달리, 독립적으로 중복성과 다양성의 관계를 가진다. 지각은 놀라움과 인식을 단일한 순간에 제시할 수 있다. 예술은 이러한 지각의 가능성을 활용하고, 확장하며, 심지어 ‘착취’하여, 이 구별의 통일성을 제시할 수 있게 한다. 달리 말하면, 예술은 관찰이 놀라움과 인식 사이를 오가도록 허용한다. 예를 들어, 다른 작품에서의 전유를 통해 반복이 동시에 낯설고도 친숙하게 느껴지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의 식별은 개념적 추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에 의존한다. 예술은 이러한 문제에 특화되어 있으며, 이것이 일상 지각에서의 작은 불편을 해결하려는 평범한 시도와 구분되는 지점이다.

따라서 예술 작품은 일상의 현실과는 다른 고유한 현실을 수립한다. 그러나 작품의 지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성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동시에 또 다른 현실—그 의미가 허구적이거나 상상의—을 구성한다. 예술은 세계를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로 분리한다. 이는 언어의 상징 사용이나 종교의 성스러운 사물·사건 처리 방식과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예술의 기능은 이 분할의 의미와 관련된다. 이는 단순히 주어진 세계를 더 많은 사물(‘아름다운’ 것일지라도)로 풍부하게 만드는 문제가 아니다.

예술의 상상적 세계는 다른 어떤 것을 ‘현실’로 규정할 수 있는 위치를 제공한다. 이는 언어 세계가 오용의 가능성을 가지고 그렇게 하듯이, 또 종교 세계가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듯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차이의 표지가 없다면, 세계는 그저 있는 그대로일 것이다. 오직 ‘거기 밖에 있는’ 현실이 허구적 현실과 구별될 때만, 우리는 한쪽을 다른 쪽의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다. 언어와 종교는 이러한 ‘이중화(doubling)’를 수행하여, 주어진 세계를 현실로 지시할 수 있게 한다. 예술은 여기에 새로운 변화를 가한다. 즉, 상상을 거쳐 현실로 돌아오는 우회로를 통해, 그러나 지각 가능한 사물의 영역에서 자신을 실현한다. 현실과 꿈, 현실과 놀이, 현실과 환상, 심지어 현실과 예술 사이의 다른 어떤 이중화도 예술 세계의 상상적 현실 속으로 복제될 수 있다. 언어와 종교와 달리, 예술은 ‘만들어진 것’이기에, 형식 선택의 자유와 제약이 모두 존재한다.

오직 현실과 허구적·상상된 현실 사이의 분화가 구체적인 현실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예술은 현실이 보여주지 않는 것을 ‘모방’하거나(본질적 형태, 관념, 신성한 완전성 등), 현실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을 ‘비판’하거나(그 결함, ‘계급 지배’, 상업적 지향성 등), 혹은 현실을 ‘긍정’할 수도 있다(그 표현이 실제로 성공적이며, 작품 제작과 감상이 즐거움을 준다는 것을 보여줌). 모방/비판/긍정이라는 개념들은 가능성을 다 소진하지 않는다. 또 다른 목적은 관찰자를 개인으로 호명하여, 현실(결국 자기 자신과도)을 직면하게 하고, 현실에서 결코 배울 수 없는 방식으로 그것을 관찰하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질문을 다시 말하면, 예술이 있을 때 현실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현실의 복제를 만들어내어 현실을 관찰할 수 있게 하는 예술 작품은 관찰자가 이 분할을 극복하도록 맡길 수도 있다. 그것이 이상화적, 비판적, 긍정적 방식이든, 혹은 자신만의 경험을 발견하는 것이든 말이다. 어떤 텍스트는 긍정적이기를 의도하며, 지나친 부정성에 중독된 태도에 맞선다. 그러나 그 텍스트도 아이러니하거나 멜랑콜리한 태도로 읽힐 수 있고, 자신이 겪은 소통 경험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

예술은 그 형식을 사물에 내재시키므로, 현실에 대한 합의와 반대, 긍정과 비판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지 않는다. 예술은 합리적 정당성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지각 가능한 사물의 영역에서 자신의 설득력을 펼쳐 보임으로써 이를 증명한다. 전통적 교리에 따르면 예술 작품이 주는 ‘쾌감’은 허영심을 조롱하는 악의적 즐거움, 즉 이성을 통해 세계에 접근하려는 헛된 시도를 향한 경멸의 힌트를 포함한다.

독립적으로 발전한 예술의 형태 감각은 자율성의 증대로 이어지며, 특히 예술이 자기 자신에 반응하는 역동성을 발전시킬 때 그렇다. 일상생활은 예술의 가치 있는 대상이 되며, 예전에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왜곡되고 허위로 표현된다. 보편적 가치는 단순히 부정되거나 전복되는 것을 넘어서 중립화되고 거부된다. 이는 예술이 가치가 아닌 ‘가능성의 질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에 맞서 예술은 자체의 절차와 원칙을 발전시켰다. 즉, 새로움, 모호성, 스타일 의식, 그리고 다양한 예술 장르를 주제로 삼아 이들을 신(新) 합리주의와 구분 짓는 자기 서술이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실제 사물과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자신을 표현하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일반 사물이 스스로 평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길 요구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요구하는 작품은 그 자체로 자신을 배신한다. 이런 경우 예술의 기능은 예술의 차이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 이 차이를 없애려 하고 실패했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변명이나 비판보다 예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여기서 우리는 관찰해야 할 것은 차이의 불가피하고 지워지지 않는 법칙임을 배운다.

철학과 달리, 예술은 다른 경험들을 환상적이거나 상상적이라고 배제하거나, 2차적 속성이나 쾌락, 상식의 세계로 거부하는 ‘안전한 섬’을 찾지 않는다. 예술은 현실과 단지 가능한 것 사이의 차이를 급진화하여, 자신의 작품을 통해 가능성의 영역에도 결국 질서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 기능의 중력장 안에서, 현대 예술은 형식적 수단으로 실험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형식’이란, 현대 예술 초기에 중요했던 ‘형식과 물질’ 또는 ‘형식과 내용’의 구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의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가림하듯’ 관찰하는 ‘지시적 작용’의 특성을 뜻한다. 작품은 관찰자에게 형식 관찰의 관찰이라는 지점을 가리킨다. 이것이 ‘자기목적적(autotelic)’이라는 개념의 의미였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의 사회적 기능은 단순히 잠재적인 관찰 가능성을 재구성하는 것 이상이다. 오히려, 가능성의 영역에서 질서의 강력한 힘을 증명하는 데 있다.

예술은 어떤 작동적 연쇄 내에 ‘형태 발생(morphogenesis)’의 경향이 암시될 수 있는지, 그리고 관찰자가 ‘관찰하는 관찰’을 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어떤 질서를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되는지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 관점에서, 작품이 달성할 수 있는 형식적 복잡성은 결정적 변수이며, 핵심적이다. 형식의 ‘반대편’으로 작동하는 것은 자체로 또 다른 형식을 요구하고, 그 형식도 다시 ‘반대편’을 만들기 때문에, 작품의 재귀적 완전성이 얼마나 많은 다양성을 수용하고 통제할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된다.

널리 퍼진 통념과 달리, 예술의 기능은 더 이상 세계를 재현하거나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회에 대한 ‘비판’을 행하는 것도 아니다. 예술이 자율화되면, 강조점은 외부 참조에서 내부 참조로 이동하는데, 이것이 곧 자기 고립(self-isolation)이나 목적 자체를 위한 목적(art for art's sake)과는 다르다. 이런 과도기적 표현은 이해될 수 있지만, 자기 참조(형식) 없는 외부 참조는 없다. 자기 참조가 배제되는 순간, 자신을 어떻게 지시할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예술이 지각 또는 상상이라는 매체에서 자기 지시적 질서를 드러낼 때, 이는 실재뿐 아니라 허구적 현실에서도 표현되는 현실의 논리를 환기한다. 현실과 허구적 현실이라는 차이 내에서, 세계의 통일성(이 차이의 통일성)은 관찰을 피해 스스로를 구별의 형식의 질서로 제시한다.

예술은 미학적 통제를 통해 점점 확장되는 가능성의 영역에서 사회를 구원하려는 야망이 없다. 예술은 사회의 여러 기능 체계 중 하나에 불과하며, 비록 보편주의적 야망을 품을 수 있지만, 다른 체계를 대체하거나 지배하려는 진지한 의도는 없다. 예술의 기능적 우위는 오직 예술 자체에만 적용된다. 이런 이유로, 예술은 작동적 폐쇄에 의해 보호받으며, 자신의 기능에 집중하고, 내부에서 점점 넓어지는 경계 내에서 적합한 형식 결합을 지향하며 가능성의 영역을 관찰할 수 있다.

헤겔이 ‘예술의 종말’을 말할 때, 이는 오직 한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즉, 예술이 사회 및 세속적 문제와의 직접적 관계를 상실했고, 앞으로는 자신의 분화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여전히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보편적 역량을 주장할 수 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예술 자체의 한 형태로서,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고유한 작동 양식에 기반해서만 가능하다.

예술가가 대표하는 예술이 사회의 어느 곳에든 지식 있고 공감하는 상대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 역시 포기해야 한다. 만약 그런 ‘지원적 맥락’을 찾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가와 감식가가 상호보완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모델은 예술 체계와 사회 간 결합을 더 이상 나타내지 못한다. 오히려, 예술의 분화는 사회 내에서 소통으로서 이루어지며, 예술가, 전문가, 소비자 간의 상호작용은 오로지 예술 체계 내에서 이루어지고, 예술 체계는 이 과정으로써 자신을 확립하고 재생산한다.

낭만주의가 ‘예술 비평’이라 부르던 것은, 예술 체계에 ‘반성의 매체’로 통합되었으며, 이는 예술가의 작업을 완성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실제 반성하는 대상은 예술에 부과된 자율성, 즉 사회의 기능적 분화다.

예술 체계의 분화—연속성과 불연속성이 공존하는 과정—는 체계와 환경의 관계를 자기 참조와 외부 참조 관계로 다시 도입할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 참조는 외부 참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지시할 때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어떻게 표시할 수 있겠는가? 자기 참조와 외부 참조의 통일성이 문제될 때, ‘참조의 참조’라는 공통 분모를 찾는 것이 자연스럽다.

자기 참조와 외부 참조의 관계가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따라, 우리는 주로 상징적인 예술과 자신을 기호로 생각하는 예술을 구분하며, 더 나아가 형식 조합을 실험하는 예술도 구분한다.

분화 이전 예술은 상징적이라 여겨졌는데, 이는 응축된 장식적 관계에서 더 높은 의미를 추구했다. 궁정과 시장 중심의 분화 과정에서 예술은 기호(sign)로 변모했다. 기호는 객관적 참조를 가진 것으로 믿어졌고, 예술가, 감식가, 애호가가 공통으로 가진 것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 공동체의 분화가 의사소통으로서 실현되고 나면, 유일한 선택지는 예술 체계의 작동에서 자기 참조와 외부 참조의 균형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자기 참조와 외부 참조의 연결점은, 관찰의 관찰을 촉진하는 작품의 형식적 조합에서 발견된다.

Helen Mayer Harrison and Newton Harrison, Shifting Positions towards the Earth: Art and Environmental Awareness (1993)

우리의 작업은 상충하는 신념이나 모순된 은유로 인해 환경에서 이상 현상을 감지할 때 시작된다. 현실이 더 이상 매끄럽게 보이지 않고, 믿음의 대가가 터무니없어진 순간은 새로운 공간을 창조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 공간은 먼저 마음속에서, 그리고 이후에는 일상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는 우주를 수조 개의 목소리와 수십억 개의 언어로 동시에 진행되는 거대한 대화로 이해한다. 그중 대부분은 우리가 존재를 안다고 해도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목소리들 중,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줄 만큼 존재가 부딪혀 온 경우조차 우리는 그 관계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관계들로 얽힌 살아 있는 시스템을 함부로 파괴하거나 교란하는 것은 극도의 오만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우리에게 모든 것은 1960년대 후반,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한 생존의 문제만을 다루기로 한 결정에서 시작되었다. 각 작업은 ‘생존’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예술가로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더 크고 포괄적인 틀이나 이해를 모색했다. 예를 들어, <라군 사이클>의 ‘일곱 번째 라군’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을 다른 데이터베이스를 중심으로 재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 우리의 직관적 생각을 풀어내고 있다.

우리의 가장 최근 작업은 생태계를 위한 안전망, 즉 사회보장제도와 비슷한 ‘생태 안보 시스템’을 구축하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러나 인구 폭발과 같은 문제는 별도로, 그리고 포괄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마치 초원이 다른 모든 식생을 몰아내듯, 확장하는 인구 역시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발한 기술이 한편으로는 인구 압력을 해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히 확장하는 시장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생각은 단순한 환상이다. 모든 기업 활동은, 심지어 재활용조차도 생태계에 부과되는 하나의 세금이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

라군 사이클 (1973~1985)
이 작품은 길이 360피트, 평균 높이 8피트, 60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일부 벽화이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제작되었으며, 운반이 가능하도록 포토뮤럴 용지를 두꺼운 면 캔버스에 부착해 만들었다. 재료로는 사진, 유화, 흑연, 크레용, 잉크를 사용했다. 1985년 코넬 대학교 존슨 갤러리에서 처음 전시되었으며, 이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도 전시되었다.

<라군 사이클>은 7개의 이야기로 된 연작으로 읽을 수 있으며, 각 이야기는 피카레스크 소설처럼 독립적인 구성을 가진다. 아주 독특한 영화의 스토리보드로도 읽을 수 있다. 예술가로서 우리는 이것을 환경 서사로 보는데, 그 형태와 주제는 관람자를 완전히 둘러싸는 특성을 가진다. 이 작품은 20세기 환경 예술뿐만 아니라 과거의 다양한 벽화 프로그램들과도 관련된다.

이 이야기는 두 인물이 나누는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우리가 살아가는 은유가 서로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탐구한다. 즉, 우리가 세계관을 어떻게 만들고 또 그 세계관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준다. ‘라군 사이클’이라는 제목은 전 세계적으로 위기에 처한 하구 라군에서 따왔으며, 라군은 문화와 심지어 삶 자체의 은유로 사용된다.

이야기 속 두 인물은 ‘박물관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인한 생명체’를 찾기 위해 여정을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변모한다. 첫 번째 라군에서 두 인물은 서로 다른 가치와 인식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데, 한 명은 자신을 ‘라군 메이커’라 부르고, 다른 한 명은 ‘위트니스’라 부른다. 두 사람은 각자 그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하며, 결국 상황에 떠밀려 점점 더 큰 틀 속에서 대화를 이어가게 된다.

여섯 번째 라군: 은유와 담론에 대하여
다섯 번째 라군은 콜로라도 강의 수로에서 인위적 실수로 흘러넘친 물이 형성한 살턴 호수를 다룬다. 여섯 번째 라군은 콜로라도 강 전체 유역을 주제로 삼는다. 라군 메이커와 위트니스는 수생 생태계를 관찰하며 얻은 통찰을 되새긴다. 그들의 사고 범위는 살턴 호수에서 콜로라도 강 유역 전체로 확장된다. 이 지역은 엄청난 전력과 관개를 요구하는 생활 방식에 의해 크게 변화했다.

20세기의 폭발적인 거대기술은 환경에 충격을 주었으며, 스스로 ‘자리를 잡을’ 시간조차 없었다. 위트니스는 모든 자연을 요소들 간의 담론으로 보고, 두 인물 모두 이렇게 촉구한다. “신념 체계와 환경 체계 간의 담론에 주목하라.”


물의 흐름에 주목하라
흐르는 물의 온전함에 주목하라
물이 어디로 흐르는지 주목하라
물이 흐르기를 바라는 곳에 주목하라
물이 흐르도록 의도된 곳에 주목하라
물의 흐름과 소금의 섞임에 주목하라
물의 흐름과 흙과의 섞임에 주목하라
땅과 물의 담론의 온전함에 주목하라 — 유역은 그 결과물이다
땅, 물, 사람 사이의 담론에 주목하라 — 그 단절은 결과물이다
이러한 담론의 본질과 단절의 의미를 주목하라
결국 담론은 덧없고 일시적인 형태이며, 일종의 즉흥 연주다
그리고 누구든, 현재 상태를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면, 어떤 담론이든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릴 수 있다
상태의 변화를 주목하라

우리가 앞서 말했듯, 우리는 우주가 거대한 대화라고 믿으며, 새로운 생각, 은유, 가능성이 도입되면 그 대화는 변화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작품을 ‘만들어’ 왔지만, 태도와 행동의 변화를 이끄는 대화의 변화 또한 그 어떤 물리적 작품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R. Buckminster Fuller, Operating Manual for Spaceship Earth (1969)

사회는 전문화가 성공의 열쇠라는 이론 위에서 운영되고 있지만, 전문화가 종합적 사고를 가로막는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는 사회에 무수한 전문 분야들로부터 축적될 수 있는 잠재적으로 통합 가능한 기술·경제적 이점들이 종합적으로 이해되지 못하고, 따라서 실현되지 않거나, 실현되더라도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인류의 주요한 본능 중 하나는 이해하고 또 이해받으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생명체들은 매우 전문화된 과업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국지적 우주(local universe)의 사안들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조율하는 데 있어 독특한 존재로 보인다. [...]

우리의 대전략을 조직하려면, 먼저 우리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해야 한다. 즉, 보편적 진화의 틀 안에서 우리의 현재 항해 위치가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 ‘우주선 지구(Spaceship Earth)’ 위에서 우리의 위치를 설정하려면, 먼저 즉시 소비할 수 있고, 분명히 바람직하거나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자원이 지금까지는 우리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도록 충분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원은 결국 고갈되고 변질될 수 있는 것이며, 지금까지는 충분했지만 바로 이 중대한 시점까지가 한계였다. [...]

우리는 부분만을 다루는 전문가의 역할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대신 의도적으로 수축적 사고가 아닌 확장적 사고를 추구하며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전체를 생각할 수 있을까?” 만약 생각이 커질수록 그 효과가 오래 지속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크게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

현대 지적 우위의 도구 중 하나는 ‘일반 시스템 이론(general systems theory)’의 발전이다. 이를 활용하면 우리는 가장 크고 포괄적인 시스템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다. 먼저 문제에 작용하는 중요한 ‘이미 알려진’ 모든 변수를 목록화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큰’이란 것이 실제로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충분히 크게 시작하지 못할 수 있으며, 그 경우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중요한 변수를 시스템 밖에 두게 될 것이고, 그 변수들은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시스템의 자의적으로 정해진 경계 안팎에 존재하는 알려지지 않은 변수들의 상호작용은 아마도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명백히 잘못된 결론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가장 크고 또 가장 세밀하게 파고드는 방식으로 사고해야 한다. [...]

우리가 ‘우주(universe)’라는 개념을 충분히, 그리고 정확히 정의하고 진술할 수 있을까? 우주는, 추론적으로, 가장 큰 시스템이다. 만약 우리가 우주에서 출발할 수 있다면, 전략적으로 중요한 변수를 빠뜨리는 일은 자동적으로 피할 수 있을 것이다. [...]

과학자들의 경험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두고, 나는 물리적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우주(universe)’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주는 인간이 의식적으로 파악하고 전달한 모든 경험의 총합으로서, 이는 동시적이지 않고, 동일하지 않으며, 단지 부분적으로만 겹치고, 언제나 상호 보완적이며, 측정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모두 포함하고, 끊임없이 전면적으로 변형되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

전체 시스템을 충분히 정의한 뒤에는, 점진적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이는 두 부분으로 점차 나누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중 하나는, 정의상, 답을 포함할 수 없으므로 제거하고, 쓸모없는 부분을 버린다. 이렇게 하여 단계별로 보존되는 살아있는 부분 각각을 ‘비트(bit)’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는 이전에 남아 있던 살아있는 부분을 예/아니오의 이진 절단(bisection)으로 나누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걸러내기’ 작업의 규모는, 원하는 특정 정보를 고립시킬 때까지 필요한 연속적인 비트의 수로 결정된다. [...]

그렇다면 모든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찾고자 하는 특정 정보를 명확하게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몇 개의 ‘이진 절단 비트’가 필요할까? 첫 번째 우주 개념의 세분화 — 즉 첫 번째 비트 — 는 우리가 ‘시스템(system)’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나눈다. 시스템은 우주를 시스템 밖에 있는 모든 것(거시세계, macrocosm)과, 시스템 안에 있는 나머지 우주(미시세계, microcosm)로 나누는데, 이때 시스템 자체를 구성하는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은 예외로 한다. 시스템은 우주를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로 나눌 뿐 아니라, 동시에 우주의 전형적인 개념적 측면과 비개념적 측면으로도 나눈다. 즉, 한쪽에는 겹쳐서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연관 지을 수 없고, 겹쳐 고려할 수 없으며, 동시에 변환되지 않는, 주파수 범위가 서로 맞지 않는 사건들이 있다. [...]

시너지(Synergy) 는 언어 속에서 유일하게, 전체 시스템의 거동이 그 시스템의 개별 부품이나 부품의 하위 조합을 따로 관찰했을 때의 거동으로부터는 예측되지 않는 현상을 뜻하는 단어다. [...]

전자 하나만 가지고는 양성자를 예측할 수 없고, 지구나 달만 가지고는 태양의 공존을 예측할 수 없다. 태양계는 시너지적이며, 이는 그 개별 부품들만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태양이 지구의 ‘보급선’ 역할을 하는 것과, 달의 중력에 의해 발생하는 지구의 조석(潮汐) 맥동이 상호작용하여, 생물권의 화학적 조건을 만들어낸다. 이 조건은 생명의 재생을 가능하게 하지만, 생명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모두 시너지적이다. 지구의 녹색 식생이 호흡 작용을 통해 방출하는 가스에는, 그것이 모든 포유류의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예측하게 해주는 요소가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포유류가 호흡을 통해 내뿜는 가스가 지구 식생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것도 예측할 수 없다.

우주는 시너지적이다. 생명은 시너지적이다. [...]

James Lovelock, Geophysiology: The Science of Gaia (1989)

분리된 학문 분야별 접근만으로는 행성 규모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점점 커지고 있다. 행성의 구획 중 가장 단순한 부문인 대기를 이해하려고 해도, 단순히 지구물리학자만으로는 부족하며, 화학과 생물학의 지식도 필요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다른 학문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하는 연구팀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전문가들의 모임에 가본 사람이라면, 각 전문가는 자기 말만 하고 듣지 않거나, 혹은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

이를 개선하려면, 개별 학문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보다 폭넓은 기반의 일반과학 혹은 과학적 운영체계가 필요하다. 현대의 우려들은, 인간이 대기의 구성과 토지 표면 및 생물상을 변화시킨 결과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현대적 우려들은, 의학이 발달하던 초기 시절에 인체에 대해 가졌던 비슷한 우려들을 여러 면에서 반영한다.

19세기 말, 생화학과 미생물학은 이미 크게 발전했으나, 서로 단절되어 있었고 질병을 다루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생리학이라는 일반과학의 존재 덕분에 가능했다. 생리학은 학문 간 경계를 넘는(transdisciplinary) 학문이었고, 살아있는 유기체의 본질적인 창발적 특성(emergent properties) 을 인식했다. 예를 들어, 인체의 중심 체온이 섭씨 37도로 유지되는 원인을 알고자 할 때, 생화학적 접근만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 체온 조절은 시스템 제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리학에서 출발하면, 산화 대사와 같은 생화학적 측면이 자연스럽게 그 체계 안에 맞춰 들어간다.

이 글의 주된 목적은, 이러한 유추를 토대로 지구생리학(geophysiology) 이라는, 행성 규모 문제를 다루는 학문 간 환경을 제시하는 것이다. 특히 다양한 분야가 얽혀 있는 문제에 적용하기 위해서다. 창발적 특성이 존재한다고 가정(증명되지 않았더라도)할 때, 지구를 살아있는 유기체로 간주하는 것은 실용적인 목적에서 유용할 수 있다.

19세기 이전의 과학자들은 살아있는 지구라는 개념에 비교적 익숙했다. 그중 한 명인 제임스 허튼(James Hutton, 흔히 ‘지질학의 아버지’라 불림)은 그의 저서 『지구 이론(Theory of the Earth)』(1788)에서 지구를 초유기체(superorganism) 에 비유하며, 이를 연구하기 위한 과학으로 생리학을 권장했다.

그러나 허튼의 건전한 지구관은 지난 세기 초에 폐기되었다. 이는 지구와 생명 과학 모두에서 ‘기원’과 ‘진화 이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결과였을 것이다. 생물학자들에게는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종 진화라는 위대한 비전이 있었고, 지질학자들에게는 지구 물질 환경의 진화가 단순히 물리적·화학적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완전히 독립적인 이론이 있었다.

이로 인해 19세기에 지구 과학과 생명 과학의 분리는 불가피했다. 탐험과 개발이 진행되면서 지구에 관한 정보가 급격히 늘어났지만, 생물체를 연구하는 기법과 해양·대기·암석을 연구하는 기법은 매우 달랐다. 아마도 당시 과학은 흥분에 가득 찬 시기였을 것이다. 허튼의 ‘초유기체’ 개념을 지키거나 더 넓은 관점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놀라운 것은 과학이 분리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서로 매우 다른 두 가지 진화 이론이 오늘날까지 공존해왔다는 점이다.

이 분리가 지속된 이유는, 지구 과학자와 생물 과학자가 ‘적응(adaptation)’이라는 마취제 같은 개념을 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응이라는 개념은 의심스럽다. 현실 세계에서, 유기체가 적응하는 환경은 단순히 물리·화학적 힘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 생물들의 활동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세계에서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게임의 일부’일 수 있으며, 환경을 바꿈으로써 더 많은 자손을 남길 수 있다면, 유기체들이 물질 환경을 바꾸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윈의 시대에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것 —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바다, 암석이 모두 생물의 직접적인 산물 혹은 그들의 존재로 크게 변형되었다는 사실 — 을 알 수 없었다. 생물은 단지 ‘죽어 있는’ 물리·화학적으로만 결정된 세계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숨결과 뼈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살고 있으며, 지금도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

가이아(Gaia) 이론은 빅토리아 시대 생물학과 지질학의 ‘분리’를 비판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훨씬 더 나아간다. 가이아 이론은 대기·해양·지표 암석으로 구성된 물질 환경과 생물권(biota)이 긴밀히 결합된 시스템의 진화를 다룬다. 기후와 화학 조성 같은 중요한 성질의 자가 조절(self-regulation) 은 이러한 진화 과정의 결과로 본다. 살아있는 유기체나 많은 폐쇄 루프 자기 조절 시스템처럼, 전체는 부분의 합을 뛰어넘는 창발적 특성을 나타낼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시스템은 발명가들이 잘 아는 것처럼, 단순한 인과 관계의 논리로는 설명하기 매우 어렵다.

공학자와 생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피드백의 미묘함을 알고 있었다. 항상성(homeostasis)은 피드백이 적절한 세기(amplitude)와 위상(phase)으로, 그리고 시스템의 시간 상수(time constant)가 적절할 때만 가능하다. 긍정적·부정적 피드백 모두, 적용 시점에 따라 안정이나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 이론 생태학 모델이 수학적으로 난해한 것은 엔지니어에게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이를 ‘열린 루프 시스템(open loop system)’에서 피드백이 임의로 적용된 경우로 볼 것이다.

반면, 데이지월드(Daisyworld) 같은 지구생리학 모델은 부정적·긍정적 피드백을 일관되게 포함하며, 그 결과 견고하고 안정적이다. 이런 모델은 수많은 비선형 방정식을 포함해도 안정적인 어트랙터(attractor) 를 유지한다.

나는, 어떤 지구의 특정 성질의 조절이 전부 혹은 상당 부분 결정론적 물리·화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시스템은 화학을 경제적으로 사용하며, 물리·화학을 ‘더 잘 하려고’ 애쓸 이유가 없다. 가이아의 목적은 지구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고, 실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예측을 만드는 것이다.

가이아의 작동 원리를 고민하면서 생긴 호기심이 없었다면, 디메틸 설파이드, 이황화탄소, 메틸 요오드화물, 메틸 클로라이드와 같은 중요한 미량 기체들이 발견될 시점에 찾아지고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가이아 이론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1. 생명은 행성 규모의 현상이다. 행성 위에 생명이 드물게 존재하는 상태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동물의 절반만 존재하는 것처럼 불안정하다. 생명체는 그 행성을 조절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물리·화학 진화의 피할 수 없는 힘이 그 행성을 거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2. 가이아 이론은 다윈의 비전을 확장한다. 종의 진화를 환경의 진화와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두 과정은 단일하고 불가분한 하나의 과정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가장 많은 자손을 남기는 종이 성공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공은 유기체의 진화와 물질 환경의 진화가 일관성 있게 연결되는 것에도 달려 있다.

3. 가이아 이론이 지구물리학에 주는 선물은 알프레드 로트카(Alfred Lotka, 『물리생물학의 요소』1925)의 통찰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즉, 복잡한 역학의 혼돈이 부과하는 한계에 압도되지 않고, 자연의 비선형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수학적 지구관을 제시하는 것이다.

2025년 8월 11일 월요일

여미혜인지 뭔지

조국을 사면하라는 요구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조국 일가'가 벌인 일은 상류층 일반에 무감각하게 퍼진 계급의 불법적 세습 행위로, 그것에 동정하는 놈들은 모두 명예 부르주아로서, 진정한 평등의 장애물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법 앞에서의 평등은 별로 진정한 평등에 비해서 중요한 게 아닌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계급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부당하게 더 많이 버는 사람들이 있고 부당하게 더 쉽게 좋은 길로 가 좋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고 정당하게(?) 해도 덜 벌고 안 좋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이고 있다. 박권일에게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편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불평등, 차별에 저항하는 소수자가 '이미 존재'한다. 이들의 존재는 조국의 계급 세습을 위한 위법행위를 '법 앞에서의 평등'이란 말로 인정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이는 잘못된 것이라기보다 원래 그런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불평등의 감각을 느끼는 것이라기보다 각자의 위치에서 그럭저럭 살만한가? 일지도 모른다. 

<내가 감히 표창장을 위조할만한 힘이 없어 좋은 대학을 가지 못했지만 표창장을 위조할만한 힘이 있었다면 나도 당연히 했겠지.> 

박권일은 이를 비굴한 중산층 의식이라고 할 것이다. 박권일은 그것에 영합하기보다 최저층에 있는 헐벗은 생명의 편이 되고자 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지지하면서도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란 걸 안다. 나는 < > 안에 들어간 내용에 더욱 가까울지도 모른다. 박권일은 나 같은 소시민과 적대한다. 그런데 나 같은 소시민과 적대하는 게 무슨 이득이람?

소시민을 부정하기보다 소시민 의식이 현실의 불평등을 참으면서 바라는 결과가 무엇인지, 그것을 가지고 논쟁하는 편이 덜 숨이 막힐 것 같다. '진영이 아닌 의제'라는 명제는 뭐 그런 바람 아닐까 싶다.

조국 입시비리와 상류층 관행 관련된 팩트

 여미애

조국 사태는 진보진영에도 거의 악몽에 가까운 경험이었는데 아주 사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이 일로 5년을 만나던 사람과 결별했다. 남들이 우스게소리로 제네 이별 사유가 “조국”이야 하면서 농담을 하지만 실제 그랬다. 그애가 서초동 집회 나간 뒤로, 그리고 그런 그애하고 매주 싸운 뒤로 아마 헤어짐을 앞당겼던 것 같다.
조국 사태에 대한 입장들이 첨예하게 달라지면서 쏟아지는 글들을 다 따라가기도 바빴다. 당 내부에서도 내홍이 심했는데 사면 이야기가 나오는 시점 나는 내가 아는 것만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2010년대 초중반 수시 전형이었다. 논술 자소서 등을 업으로 하다보니 그때 상황이 생생하다. 당시 수시전형은 지금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전형”이었다. 사교육계에 종사하는 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전형이었다. 일단 기본틀은 서류+면접전형이었는데 서류전형의 아무 제한이 없었다.
1단계 서류 평가 특징은 연구참여, 인턴봉사, 비교과 활동을 모두 기록할 수 있고 증빙자료만 첨부하면 되는 식이었다. 쉽게 말하면 학교 밖에서 한 모든 일을 생활기록부에 적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때 내가 제일 많이 받은 오더는 논문 대필이었다. 학생 5명분의 원고료를 줄테니 5명을 논문 공저자로 만들어서 몇 가지 논문과 보고서를 완성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주문은 꽤 있었고 다른 사교육업체들 알아보니 장당 얼마씩으로 가격을 메겨 돈을 받고 있었다.
나는 석사로 최우수논문상을 탔고 박사과정에 재학하면서 독서수업으로 먹고 사는 중이었다. 학자금 대출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상황에서 나에게 학부모들이 제안한 금액은 내 한 학기 등록금에 가까웠다. (700정도)
주변에 알아보니 그 일로 떼돈을 보는 사교육업자가 대치동에 엄청 많았다. 논문 대필, 보고서, 자소서 대필은 사교육 시장에 거대한 기회였다. 심지어 평생 영어 수학만 수업하던 강사들이 날 보고 “너희 로또 맞은 거 아니냐 이때 왕창 벌어라” 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는 거절했다. 양심이 깊고 도덕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고 단순히 쫄아있었다. “대필해서 서류에 잔뜩 이름만 기재했다가 면접 때 다 들통날 게 뻔해요” 라며 거절했다. “차라리 논문 쓰는 법 강좌를 열테니 그걸 수강해서 학생이 직접 듣게 하면 어떨까요?” 라고 했다가 나에게 상담 요청했던 학부모들은 나를 손절했다. 성적과 수능에 신경써야해서 그런건 필요없다고 했다.
추후 교수님들에게 그 전형에 대해 물을 기회가 있었고 면접에서 그 진위를 가릴 수 있냐 물어보니 정말 나를 세상물정 모르는 인간이라는 표정으로 보면서 그건 그냥 잘사는 학생들을 뽑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한거 모르니? 라고 답해줬다.
그렇다고 나에게 그런 작업을 의뢰한 학부모들이 다 잘사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분들은 누구는 교수 딸이라 누구는 대기업 다니는 누구 아빠 아들이라 누구는 고위공직자라 서로 네트워크가 잘 돼 있어 다 부모 빽으로 알아서 처리해준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그럴 능력이 없어 이렇게 사교육 업계에 돈이라도 밀어넣어 해줘야하는 처지라고 했다.
끔찍한 시절이었다. 인턴과 봉사활동도 일반 학생들은 청소와 노인간호 말고 없는데 교수 공직자 아들 딸들은 여기저기 고급스러운 인턴과 봉사를 하고 심지어 하지 않아도 다 발급서를 끊어준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나는 그저 그런 의뢰들을 다 거절하고 구청에서 봉사활동을 하거나 청소를 한 학생들 자소서 작성을 도왔고 학생들하고 성실히 썼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쓰는 것을 금지했다. 상담 데스크에 아예 그런 류의 어떤 의뢰도 받지 않겠다고 적어놓기도 했다. 그 광기의 시절에 아등바등해 모든 악재를 뚫고 합격한 학생들도 있었다. 차라리 이딴 전형에 목숨거느니 수능 잘봐서 승부보겠다고 학교를 떠난 제자들도 꽤 있었다.
2017년~2020년쯤 돼서야 학교 밖 어떤 활동도 기재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런 제도는 족히 7년 이상 지속된 것이다.
조민과 비슷한 나이 또래 학생들은 웬만해선 그 트라우마를 다 가지고 있다.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뼈 때리게 경험한 세대. 그 세대들이 청년이 되어 586을 증오하고 진보를 참징하는 자들을 경멸하며 차라리 극우에 편에 서겠다고 했다면? 이 모든 것이 정말 아무 연관도 없는 이야기인가?
단순히 한 기득권 가정의 일탈일 뿐이며 검찰권력의 무도한 피해자로 정리될 수 있는지 맥락을 살펴야 한다.
진보적 의제를 내세우고 진보의 매력자본을 거머쥐고 법무부장관까지 된 그와 그들은 어떤 세대에 혹은 그 사회 전체에게 “아? 한국은 신분제 사회였지 참” 재확인 시킨일이라면 그 죄가 작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안은 없는가?

이여로의 글: 서울문화재단의 〈연극in〉 일방적 휴간에 부쳐: '2005년 체제'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이기는 싸움을 만들기로써… : 네이버 블로그

김민관의 글: 연극인, 남웅, 인미공에 대하여 :: ARTSCENE

둘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연극인>이란 게 (아방가르디스트라고 부르든 진보라고 부르든 엘리트라고 부르든) 소수에게 닫힌 영역, 그 소수가 소수성을 향해 그 영역을 열어 젖힌다는 역설을 포함한다면, <스파크>란 것은 다수성에게 열림으로써 반대로 소수성을 밋밋하게 해버린다는 것. 이건 가짜 민주적 지향이란 측면에서 기만이라는것.

짜치는 부분이 몇 군데 있지만 무엇보다 보편성을 지향하는 소수 엘리트의 아방가르드 실천을 '소수성'으로 부르는 장면인데. 사실 역사적으로도 현재도 그렇고 아방가르드는 남근적인 것이다. <연극인> 같은 채널은 현재 <세마코랄>이 그렇듯 마지널한 영역에 있지 않았을 것 같은데? 혹여나 그런 비슷한 게 있다면 정말로, 그건 주류가 다수이면 주류일 수 없다(의대 정원수 제한 류의 담론)는 의미에서 '소수'이지 않을까?

아방가르드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 사이에서 정녕 <스파크>가 더욱 해악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혹은 <스파크>가 해악이라고 해서 <연극인>이 과연 '실재'로 상정될 수 있는가? ㅋㅋ <연극인>과 <스파크> 양자택일에서 <스파크>를 선택할 수 없고 <연극인>은 이제 사라졌으니 성급하게 '이제 실재의 자리에 등극했다'고 선언하고 수긍하는 자의 이분화된 세계에서 그야말로 '소수성'이 끼어들 자리가 있는가? 

TBS 시절 <뉴스공장>의 예를 떠올려 본다. TBS 공영방송의 프로그램이 갑자기 유튜버가 되었다. 그래도 문제의식이 있는 사람이 문제를 풀 수밖에 없다. 

2025년 8월 6일 수요일

지원을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내란의 시대에 되돌아 보는 DJ의 문화민주주의 < 문화 모꼬지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팔길이 원칙이니 하면서 문화예술 정책의 고질적인 문제를 지적할 때 항상 나오는 말이다. 물론 고마운?말이지만 한없이 권력의 입장에서만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이기도 하다. 약자를 돕자라는 말이 전제하는 건 (선한) 강자와 (순진무구한) 약자다. 

언제부턴가 문화정책 담론에 시큰둥해진다. 나와 전혀 다른 계통의 일인 것 같기 때문이다. 문화정책이 상상하는 문화구조란 대통령-문체부-산하기관-지원사업의 관료적 체계 안에서 벌어지는 소요일 뿐이다. 만약 문화정책이 예술생산에 무언가 기반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그건 예술에 맹독을 타서 조금씩 들이키는 것과 같다. 

<간섭을 하든 말든 작업을 하자> 같은 슬로건은 어떨까? 이게 정신승리일지라도, 최소한 방법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2025년 8월 3일 일요일

만들기/말하기

한국은 미술을 작품제작의 영역에 국한해서 생각한다. 미술비평, 미술사와 이론, 큐레이팅, 토크, 교육 프로젝트 등등은 미술이라기보다 미술을 지원해주는 무엇이다. 한국에서 성공적인 미술 정책의 핵심은 제작된 작품을 관객에게 잇는 것에 있다. 이 말이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미술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 이 아이디어는 1800년대 후반 일본의 식산흥업 정책. 공예품을 만국박람회에 가져나가서 파는 것을 어마어마한 국제 무역 활동이라고 생각했던 그 아이디어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미술은 산업이고 미술작품은 산업생산품이다. 왜 이렇게 한국에선 작품과 관람객이 중요할까? 사실 관람객은 소비자이고 소비자를 유인하기 위한 상품/작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게 중요하니까. 사토 도신이 말하길, 미술은 제작과 연구, 만들기와 말하기로 구성된다고 한다. 만들기와 말하기는 다르다. 제작과 연구는 그냥 다른 활동이다. 지원하고 말고의 그런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연구는 지원하는 활동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결론은 좋은 상품과 좋은 소비자를 만들자는 구호에서 주저 앉는다.

2025년 8월 1일 금요일

안치운, 질문을 잃어 버린 한국연극

https://www.arko.or.kr/zine/artspaper2000_02/46.htm

제작극장이 뭔가 싶어서 찾아보다가 도달한 글이다. 
보아하니 링크가 불안해서, 나중에 다시 읽고 싶어서 박제.


질문을 잃어 버린 한국연극

안치운(연극평론가)

텅빈 손

그동안 연극에 대한 전반적인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기껏해야 짧은 공연평을 쓰는 것이 연극비평(가)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터에, 연극의 안팎에 접근하는 글은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연극제작과 공연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한국연극은 오랫동안 연극환경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포기하고 있다. 다양한 논의와 깊은 사유가 없는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겪고 있는 허장성세와 만연된 부실공사에 비유하면 좋을 것이다. 자연과학에 대한 지원과 기대는 많지만 예술이 지닌 사회적 역할은 점점 무시된다. 국가경쟁력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문화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 실제는 위축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연극의 위기이기도 하다.

필자의 이 글은 연극 분야에 대한 지원이 쓸모없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고, 지원금이 부족해서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지원에 앞서, 지원에 의지한 채 연극하는 이들이 잊고 있는 것을 지적해 보려고 한다. 그 이유는 지난 몇 년간 좋은 연극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아 제작된 공연들 가운데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들이 드물다. 몇 년 전, 프랑스 아비뇽 연극제 책임자가 초청할 작품을 고르기 위하여 우리나라 공연들을 보고 난 후, “빨리 가는 미국식 쇼, 관광객들을 위한 밤무대 쇼같다”고 말한 것은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최근의 한국연극은 그 때와 비교해서 별 차이가 없다. 공연들은 애매모호하고, 각색이니, 해체니 하면서 이상한 탈을 쓴 공연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창작도 예외가 아니다. 삶에 지침을 주는 존재가 없을 때 삶은 거칠어진다. 오늘날 한국연극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교과서에 씌어있는 것처럼, 극장에 가면 연극적 경험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하기 어렵다. 그것은 전적으로 좋은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감히 말하건대 연극의 불황은 관객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작가의 역량이 부족하고 공연의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제작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성이 아니라 불평일 뿐이다. 우리는 이 점을 너무 잊고 있다.

필자는 다른 글 「풍경에 매혹된 기쁨-연극과 삶의 환경」에서, 오늘날 한국연극에는 “단계적 실험과정을 통해 장르 해체 이전의 원시적 공연 형태를 복원하고, 현대적 제의성의 재창출이라는 어마어마한 말들이 난무한다. (그러나 공연을 보면) 작가가 쓴 텍스트와 번역된 공연 대본은 다르다. 순서와 내용의 차이가 너무 크다.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다. 어디에도 연극의 온전함이 없다. 한국연극은 연극에 대한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가 따로 논다. 연극에 대한 언어가 연극하는 이들의 의식만 팽창시키고 확대시켰을 뿐이다. 그 끝은 분명한 자기소멸이 아닌가. 언어가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올 때 기표가 완전히 기의와 결별하는 것처럼, 연극과 연극하는 이들의 실제적 삶 사이에는 근본적인 균열이 생긴다. 떠올리기 싫지만 그 끝은 무섭다. 공연된 연극들은 무너진 기표가 되고, 연극하는 이들은 맹목적으로 연극을 일삼는 자동기계 장치로 전락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쓴 적이 있다.

2000년 새해 들어 한국연극계는 다시금 경제적인 문제들을 내세워 연극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연극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고, 연극에 관한 정부의 지원이 많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과연 그러한가? 서구의 연극 역시 예전에 비하면 턱없는 몰락의 상황을 경험하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많다. 첫째는 경제적 위기를 꼽을 수 있다. 경제적 위기는 모든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를 가져온다. 아주 갑자기.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연극은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함께,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해왔다. 연극은 이름하여 사람과 말을 함께, 하나로 모으는 장소요 역할이었다. 연극을 만남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름답고 옳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고, 사람과 장소의 만남이고, 사람과 이야기의 만남이고, 몸과 몸의 만남이고, 몸과 말의 만남이고, 몸의 울림과 말의 들림의 만남이다.

연극의 위기란 이러한 만남이 불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지난 20년동안 동서양을 막론하고 연극에 대한 전망은 어두었다.

연극예술은 사회적 위기의 한복판에 있고 분명하게도 그것으로부터 예외가 아니다. 이제 연극은 소수집단의 예술로서의 위치마저 포기할 위기에 빠져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이 지배하는 지금, 연극예술의 몫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은 더 많아졌다. 세상의 거울로서, 이 세상에 대하여 말하는 연극을, 우리의 불안과 세상의 혼란을 무엇보다도 연극이라는 고유한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유럽의 대표적인 연출가였던 조르지오 스트렐러(G Strehler)의 좬삶을 위한 연극Th즺^tre pour la vie좭, 안트완느 비트즈(A. Vitez)의 좬이념들의 연극Th즺^tre des즜d es좭, 의제니오 바르바E.Barba의 좬연극, 고독하지만 혁명적인 직업Th즺^tre, Solitude m즨ier r즪olt좭등과 같은 책들을 보라. 고통스럽지만 다시 묻자. 연극이란 무엇인가를. 연극은 본질적으로 현실의 부재이다. 이 말은 연극과 현실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인데, 현실의 결핍 때문에 연극을 한다고 해석해도 된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이란 연극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보장하는 현실이 아니다. 이 말은 연극은 현실과 늘 길항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늘려 놓을 수 있다. 부재는 힘인가? 나약함인가? 현실과 현실부재의 사이를 메꾸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연극적 상상력과 우리 연극이 어떠한 모습으로 21세기의 연극에 입문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돈이 없어 연극을 못하겠다고 할 때, 서양연극은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 다각적으로 질문했다. 그것은 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e)의 연극으로 좁혀지고, 국가라는 거대한 담론이 서서히 해체되는 것, 각자가 사회적 책임을 자신의 몫으로 인수하는 것, 국가라는 편리한 허울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뜻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처럼 주인공들이 서서히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떠나면서 시작되는 일종의 여행의 연극이 되었다. 여행은 내게 아무도 아닌 자의 철학을 배우게 한다. 나라와 나라의 경계를 넘을 때마다 영원한 여행 속에 편히 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길 위에 있기를 좋아한다. 주목하라. 기차 역 앞에, 버스정거장 앞에는 항상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즐비하게 길 위에 누워있는 모습을. 그들은 떠나지 못하는 절망과 떠나지 못하게 하는 억압의 상징이다. 이들은 이 억압의 주체인 국가에 대항하기 위하여 길 위에 나뒹군다. 그들은 길 앞에 무력하게 내버려진 이들이다. 그들 뒤에 그들을 무기력, 무능력하게 만드는 합법이 있다. 그리고 그들 앞에 구걸하는 불법이 있다. 길의 무화는 곧 자신의 무화를 뜻한다. 길이 막혀있다. 길이 없을 때 등장하는 인물들의 부재가 확인된다. 길이 없을 때 인물들은 분열된다. 절망한다. 무화된다. 아무 것도 아닌 나가 된다. 그러나 한국연극은 지금 텅 빈 객석을 바라볼 뿐 지금, 여기에서의 연극행위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을 잃어 버렸다.



역설의 가치

좀 더 구체적으로 한국연극이 불황이라는 말들을 곱새겨 보자.

텅 빈 객석이, 취소되는 공연? 말을 바로 하면, 한국연극은 언제나 힘들게 이어졌다. 극장이 텅 비는 것은 공연작품이 형편없기 때문이고, 공연이 취소되는 것은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기 때문에 생긴 사태가 아닌가. 작가가 글을 쓸 수 없을 때는 잠시 쉴 수 있는 것이고, 극단은 돈이 모자라면 공연의 예산과 규모를 축소하면 될 일이다.

연극의 ‘모양’ 혹은 모양새란 무엇일까?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를 포함해서 연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닌 역설과 같은 것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다들 돈놓고 돈먹기 식으로 삶을 저울질 할 때, 삶 속에는 그렇지 않은 것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역설이다. 그것은 땅 한뼘크기로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유전자조작을 통한 대량생산과 유통구조를 지배하고 있는 큰 나라에 저항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해도 좋다.

한국연극은 90년대를 지나면서 역설의 가치를 거의 잃어버렸다.

연극하는 이들이 지닌 경향은 승자독식으로 바뀌었고, 흥행의 성공이 공연에 관한 모든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연극하는 이들을 만나서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돈이다. 많은 극단, 희곡작가, 연출가들은 문예진흥기금, 특수 지원금 등을 타서 활동하고 있다. 그 수혜자와 몇 천만원 혹은 일억이 넘는 기금들의 액수는 적지 않다.(좬문화예술좭 2000년 1월호 참조) 하여 많은 이들이 이 기금을 타려고 애를 쓰고 있다.

한 극단의 예산계획서를 살펴보면, 가장 많은 부분이 무대제작비이고, 배우의 몫은 참으로 적다. 이런 예산편성은 한국연극이 지닌 정신적, 물질적 결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사람과 공부에 대한 배려보다 무대셋트 제작, 프로그램, 포스터 제작, 극장 임대료와 같은 물리적 소비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대로 분배되어 연극을 생산하는 이들의 역량이 향상되지 않는 한, 그 많은 지원사업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일 뿐이다. 작년과 올해 지원금을 받고 공연된 작품들 대부분이 졸속이었고, 나눠먹기식이었다는 연극인들의 자조적 표현이 무엇보다도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다시 묻자. 돈이 있어야만 연극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가? 이는 사실이지만, 돈의 지위를 강조할수록 연극이 존재했고, 존재해야한다는 가치는 추락한다. 생활이 안되는데 연극은 무슨 극이야라고 말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 말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는 것은, 연극과 연극하는 이들이 스스로 진정한 가치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방해하는 격이 되어 버린다. 연극하는 이들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생활이되, 생산해서 이윤을 붙여 파는 유통구조 속의 생활이 아니라 자신과 연극의 존재를 되묻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가난하고 쓸쓸하지만 자유로운 생활이다. 이것이 연극과 연극하는 이들이 역사적으로 지녀왔던 역설의 가치이다. 강제로 연극하는 것이 아니라면, 연극하는 것이 자발적인 선택이라면 표현과 자유의 가치를 옹호해야 하는 것도 연극하는 이들의 몫이 아닐 수 없다.

잘라 말해, 오늘날 한국연극에는 깊은 세계를 지닌 작가들이 많지 않고, 감동을 주는 작품들이 거의 없다.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들 대부분이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이들이다. 연극은 연극 바깥의 기준에 주눅이 들어 버렸다. 그런 모습들은 성공을 돈과 인기와 비례하는 것으로 본 나머지 주변 장르와 구별되는 연극만의 독자성을 유지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뿐이다. 배우, 연출가, 희곡작가들은 새로운 연극을 창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극장을 삶 속에 내세울 시도를 하지 못했고, 고전 희곡을 줄줄 외울 수 있는 배우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죽었다 깨어나도 연출을 고수하겠다는 연출가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영세한 연극동네는 아직도 아마츄어들이 엉거주춤한 삶을 살다 떠나가는 간이역과 같다. 연극은 사람이 사람을 말하는 예술인데, 앞 사람이 허하고 가벼우니 뒷사람이 허깨비들이고 가짜일 수밖에 없는 노릇아닌가. 차라리 집에서 희곡 한편을 소리내 읽느니, 세익스피어 희곡을 영화로 만든 비디오를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연극을 하고자 한다면 다시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머리에 끈을 동여매고 책을 읽고 사유하면서 구두 밑창이 다 닳도록 걸어다니면서 너른 세상의 삶에 조응하는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연극을 꿈꾸는 수 밖에 없다.



공연의 끝에서 다시

텅 빈 객석, 늘 그렇고 그런 공연을 보는 비평(가)도 연극을 생산하는 작가들처럼 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연극비평도 가난하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연극비평(가)을 위한 지원은 거의 없다. 한국연극에서 연극에 관한 글쓰기로서 비평은 문학도 아니고, 연극의 생산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공연프로그램에 들어있는 주례사와 같은 비평은 비평이 아니다.

한국연극의 불황은 공연이전과 아울러 공연 이후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공연이전이 극단과 연출가와 배우의 몫이라면, 공연 이후는 비평가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연극비평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사실 상투적이기도 하다. 늘 그렇게 물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연극이 이렇게 초라해진 지금 이 질문은 유효하다. 작가가 공연의 생산에 대해서 책임을 지니고 있다면, 비평은 생산 이후에 대해서 질문하고 평가할 의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형편없는 공연 앞에서 어찌할 수 없어 망설이거나 부르르 떠는 것은 비평가의 글이 아니라 비평(가) 그 자체이다. 브레히트도 좋은 작품에 좋은 비평이 깃든다고 말했다.

연극비평(가) 앞에는 두 개 큰 항이 놓여 있다. 그것은 연극의 문제와 문제의 연극이다. 이 땅의 평론가들은 대부분 문제의 연극에 대해서만 말한다. 좋은 연극과 나쁜 연극을 가늠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하나의 작품에 대해서 긍정적인 면을 찾고, 보다 나은 점을 기대한다고 덧붙이는 것도 문제의 연극에 매달리는 비평의 상투성이다. 연극비평(가)이 이 문제의 연극에만 관심을 갖는 동안 연극의 문제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다시 말해 연극의 근원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듯 되묻지 않게 된다.

연극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문제의 연극에 대하여 연구하는 일보다 훨씬 심각한 일에 속한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연극의 정황을 사회, 미학적 문제로 읽어내는 일, 그것을 연극에 관한 글쓰기로 이어지게 하는 일이다. 여기에 연극은 미적 생산물인가, 경제적 생산물인가를 묻는 일도 포함된다. 필자의 견해로는 오늘날 문제의 연극에 관한 시선을 지닌 우리 연극(인)과 평론가들은 당연히 후자에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비평은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이 되고 만다. 그런 현상의 피폐는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평(가)은 희곡작가, 연출가, 배우의 결핍이 인정되고, 그것을 확인할 때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비평(가)의 글은 그들의 불만과 결핍을 향하여 달려간다. 그것들을 애무하러 땀을 흘리며 가까이 다가서려 한다. 글쓰기로서의 비평은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남김없이 벗기는 행위에 가깝다. 그 글은 작가들의 이중과 속을 벗기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비평과 비평가는 작가들의 가정부가 아닐 뿐만 아니라 작가들의 식구로서 가정을 꾸미는 이도 아니다. 비평(가)은 그들 밖에서 그들과 함께 존재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언어와 세계에서 결핍을 메타화하면 비평(가)은 그것들을 현실적 불만과 결핍의 언어로 바꾸어 놓는다. 사물을 메타화하면 언어는 반복된다. 그러나 언어를 반복하면 사물은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작가는 여기서 사물을 차별시키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차별시키게 된다. 작가는, 연출가들은 반복의 위험과 상실의 함정을 비켜가며 사물을 드러낸다. 좋은 작가와 연출가는 반복의 위험과 상실의 함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반면에 설익은 작가와 연출가는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빠져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곳은 함정이 아니고 보지 못하는 행위가 위험이 될 수가 없다. 그들은 한마디로 눈뜬 장님과 같다. 언어가 가끔씩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길을 잘못 안내하는 안내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그런 탓이다. 언어는 길을, 사고를 다른 방향으로 안내한다. 그것이 심해지면 언어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모든 연극은 주제를 지니고 있다. 그 주제는 연극하는 이들이 연극으로 만드는 형상이다. 연극으로 주장하고 요구하고 연극으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책임감과도 같은 것이다. 모든 연극은 그것으로부터 시작하고 동시에 그것을 이행함으로써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차지한다. 연극과 연극인의 영광은 순간에 빛나고 동시에 순간에 소멸한다. 연극의 미덕은 바로 순간과 그 영광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아비뇽 연극제의 주제는 연극으로 돈을 버는 일이며(이것에 결코 머물지 않으면서), 연극과 연극인들이 당당하게 산업사회에서 자신들의 몫을 주장하는 일이며, 무대가 차지하는 사회적, 문화적 역할을 극대화하는 일로 귀결된다.



말의 절대성

연극은 관객들에게 어떤 것을 줄 것인가? 실망, 아니면 기대. 어떻게 연극이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묻자. 오늘의 연극은 관객들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연출가들은, 극단의 책임자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앞으로 그들의 계획은, 밝은 미래 아니면 희망의 무게에 짓눌리는 어려움? 연극이라는 역사와는 어떤 관계를, 어떤 연극의 역사를 남길 것인가?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이 말한대로 연극은 말들의 무덤처럼, 말들의 최후의 무대(l’ultime sc즢e du dialoque)가 될 것인가? 연극은 볼거리를 보여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어떻게 연극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가? 아니면 확인시켜야 하는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벌써부터 텔레비젼과 영화같은 것이 독점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필자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 아니라고. 그것은 연극은 살아있는 말들이 모여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연극의 말이란 살아있고, 유일하고, 모방할 수 없는 말이다. 사회와 그 비극적 정황들과 사람들의 고통과 원한, 사랑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결핍의 시대가 요구하는 아주 귀중한 연극의 반성이 아니겠는가? 경제적 위기라고 해서 연극 고유의 원초적 반성마저 아껴야 하겠는가? 연극은 원초적 역할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제의, 신비, 텍스트의 아름다움으로. 관객이 한번 연극배우가 희곡 안에 쓰여있는 대사를 발음하는 연습장을 보았다면 놀라고 말 것이다. 관객들이여 보라. 무수하게 반복되는 똑같은 대사들 앞에 경건하게 몸을 세우고 배우는 말한다.

배우의 몸으로부터 울리는 말들은 나갈 뿐 되돌아오지 않고 계속해서 달리 울린다. 되돌아 오지 않는 말들의 뒤에 항상 배우의 몸이 있다. 배우의 몸에서 나와 울리는 말들은 메아리가 없다. 저멀리 사라질 뿐이다. 그 사라질 뿐인 말들을 위하여 배우는 온 몸을, 온 정성을 다하여 소리내고, 몸을 움직인다. 조용하고 나직하게 그리고 사납게 소리지르기도 하며. 사라지는 말들은 배우의 몸의 고통과 환희를 담는다. 사라지는 것만이 울린다. 많은 연출가들은 배우들에게 사라지는 말의 울림이 배우 자신의 몸을 울리는 경험을 하라고 요구한다. 어려운 주문이다. 말이 울림이 배우의 몸을 울리는 것 그것이 자연스러운 연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포샤의 대사 하나 “내게 빛을 주시되 가볍게는 하지 마세요”.(5:1:129) 배우가 말을 반복할수록 말들은 더욱 견고해지고 결국에는 절대성을 지니게 된다. 연극이야말로 말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요구하는 곳이 아닌가. 그런 맥락에서 배우는 가장 정확하고 바른 말을 하는 이라고 한다.

연극하기 어려운 지금, 연극인들은 단결해야 한다. 연극이라는 커다란 주제의 탑에 모여야 한다고. 아주 원초적 질문을 하기 위하여, 짧은 이익을 눈앞에 두고 헛갈리지 말고, 너무 일상적인 질문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회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연극으로서 경제적 이익보다는 다른 이익을 추구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다. 그것은 연극에 대한 반성을 필요로 한다. 반성은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이면서 자신의 연극적 행위의 정당성을 묻는 일이며 동시에 경제적 위기와 이어지는 연극의 위기가 주는 불안을 진정시키고 연극행위를 계속할 것인가에 대한 주저를 과감하게 벗어나는 길이다. 최종적으로 연극이야말로 문화적 소산임을 확신하고, 자신이 그 행동의 전위에 몸담고 있다는 자신감을 더욱 굳게 다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