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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7일 화요일

마르셀 뒤샹+도스토예프스키=쿠르트 슈비터즈

마르셀 뒤샹의 반예술

도스토예프스키 <백치>에 나오는 간질병, 진리를 통찰하는 엑스터시
"도스토예프스키가 18세 되던 해, 1839년 그의 아버지는 실제로 영지 농노들의 원한을 사 살해를 당하는데, 한 도스토예프스키 전기 작가에 따르면, 당시 그는 맞아 죽었을 뿐만 아니라, 성기도 잘려 있었다고 한다. 어떠한 이유로 농노들의 원한을 샀는지 그 이유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최초의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의 첫 발작 시기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이견이 있지만, 어쩄거나 중요한 점은 그 후로 평생동안 이 병은 도스토예프스키를 떠나지 않았으며, 그의 많은 주인공들이 이 병을 나누어 가진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인 <<백치>>의 미시킨 공작도, <<악령>>의 키릴로프도, 마지막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부친 살해자 스멜댜코프도 다 간질병을 갖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 간질 발작은 우리가 갖고 있는 부정적인 질병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간질 발작의 순간은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 신의 세계를 넘볼 수 있는 경계 이월이 가능한 절대 황홀경의 순간이었고, 유한한 존재가 무한의 세계를 일순이나마 맛볼 수 있는 신비한 순간이었으며, 세계의 모든 비밀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의 순간이었다. 간질 발작이 일어나는 불꽃같은 찰나의 순간이 갖는 이러한 미학적, 철학적 의미들은 그의 작품 세계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진다." <백치 천줄 읽기> 중에서

쿠르트 슈비터즈의 메르츠. 슈비터즈는 베를린 다다이스트의 정치적 성향을 배격했다. 다다이스트가 쓰레기를 쓰레기로 제시한 반면 슈비터즈는 쓰레기를 예술로 승화.
“나는 다다이즘 미술을 그 가장 고상한 형태에 있어서 메르츠와 비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다다이즘은 오로지 반대를 위한 시도이나, 메르츠는 이 반대항들을 예술작품에서 일상의 요소들에 상대적인 가치들을 부여함을 통해 화해시킨다. 순수한 메르츠는 순 수한 예술이고 순수한 다다이즘은 비예술이다.”  Kurt Schwitters, “Banalität,” 1923, (in Kurt Schwitters, Das literarisches Werk, 1973-81, Bd. 5), p. 148.    

백남준은 <실험티비의 후주곡>에서 영원을 포착하는 2가지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나는 "정점이나 불모의 영점에서 정지하는 것." 이는 의식의 비정상적 상태이며,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의 경험이다. 의식의 이중성의 종합.

다음은 "독립적인 다수의 평행적인 움직임을 동시에 감지하는 것." 의식을 끊임 없이 지속하는 것. 사르트르적인 의미(인간의 의식은 언제나 대자적 자아)에서의 황홀. 의식의 통상적인 상태. 의식의 이중성(정신의 변증법적 진화)이 자유의 증거로서 보존된다. -> 12대의 실험티비를 동시에 감지하는 것은 신비주의자의 오랜 소원을 실현해줄지도 모른다는 것.

2017년 12월 28일 목요일

시간의 전시

백남준에게 불확정적인 음악은 불충분한 음악이다. 불확정적 음악에서 불확정성에 호소할 자유를 가진 자는 오로지 연주자다. 관객은 음악을 듣거나 듣지 않거나 하는 자유밖에 없다. 이는 고전 음악에서 관객이 누리던? 자유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런 음악은 선형적인 시간을 가진다. 그러니까 관객은 연주자와 같은 참여를 음악에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1961년에 나는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의 초안을 완성했다. 여기에서 관객은 마음대로 방을 옮겨 다니며 적어도 20개의 다른 소리를 선택할 수 있었다. 자유로운 시간은 필연적으로 음악-공간(음악-홀)으로 귀착되는데, 그 이유는 자유로운 시간에는 두 개 이상의 매체(방향)이 필요하고, 두 매체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공간(홀)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홀(공간)은 단지 소리의 풍요로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에 필수불가결한 '더 나은 절반'이 된다. (이것은 예를 들어 귀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는 식의 현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좀 더 강한 불확정성으로 향하는 다음 단계로서 나는 관객이 (혹은 이 경우에는 대중이) 자유롭게 행동하고 즐기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곡의 연주를 포기했다. 나는 음악을 전시한다. 나는 방에 각종 악기와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물을 전시해서 관객이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게 한다. 나는 이제 요리사(작곡가)가 아니라 'feinkosthandler'(세련된 식품가게 주인)일뿐이다." <음악전시회>, <<말에서 크리스토>>, pp. 369-70.

이 인용에서 백남준은 자유로운 시간을 관객에게 선사하기 위해서 두 가지 매체가 필요하다고 했다. 백남준의 의도는 한 매체가 하나의 방향을 가지며,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 이상의 매체를 통해 선형적 시간을 뒤섞는 것이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공간"으로 귀착된다. 이 공간은 소리의 절반으로, 백남준이 쓰기론 현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차원에서 그렇다.

시간을 공간화하려는 실험은 1960년대와 70년대 미디어 인스톨레이션 예술에서 활발하게 이뤄졌다. 또한 60년대에는 미니멀리즘에 의해 모더니즘 조각의 초월론적 시공간이 질문에 붙여지고 있었다. 미니멀리즘은 후기(성기) 모더니즘과의 단절인과 동시에 위반적 아방가르드, 그 중에서도 뒤샹식의 다다와 구축주의의 복귀를 동시에 시작했다.

"미니멀리즘이 특수하게는 레디메이드 패러다임의 복귀이며 일반적으로는 미술제도에 대한 아방가르드적 공격이라는 인식은 미니멀리즘의 옹호자와 반대자를 막론하고 공히 직관되었는데, 내가 여기서 발전시키고자 하는 요지도 바로 이것이다." 할 포스터, <<실재의 귀환>>,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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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로스Christine Ross는 초기 비디오아트가 시간 만들기making time의 양식을 실험하는 데 가장 이해도가 높았다고 썼다. 그에 따르면 비디오라는 미디엄은 비쥬얼 아트에서 선형적 시간성과 그 시간의 지배적 관습성을 교란하기 위한 좋은 수단이었다. 백남준은 시간의 전시, 다음 단계로 관객에 관심을 가졌다. 연주를 포기하고 관객이 자유롭게 행동하길 바랐다. 이런 의식적인 시간의 전시에 대한 실험은 구조주의 영화 제작자에게서도 뚜렷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