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8일 목요일

구직

얼떨 결에 추천을 받고 난지스튜디오 면접을 봤는데 결국 불합격했다. 면접 보기 전부터 희한하고 흉한 소문이 돌았고, 결국 그것이 결과에 안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물론 내가 면접에서 엄청나게 잘했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내 첫 인상은 보통 절반만 가도 성공인 것이다. 지원했어도 지원하지 않았어도 아마 씁쓸한 뒷맛만이 남았을 것이다. 미세먼지가 최악을 달린다. 내 악명도 미세먼지처럼 느껴진다.

2019년 2월 26일 화요일

좌파 포률리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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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야 지금 나에게 꼭 필요했던.

무정

경성콤 스터디에서 이광수 평전을 읽었다. 곁다리로 <무정>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다시 본 <무정>은 뭐랄까. 이택광 선생의 말에 따르면 막장드라마인데, 내가 봤을 땐 병맛서사도 추가되어 있다. 해결 안 될 만큼의 자극적이고 파국적인 상황을 만들어 놓은 다음에 서둘러 해결해 버리는 것이다. 병맛의 경우에는 보통 '그리고 세상이 멸망했다'라고 표현되는데, <무정>의 경우는 세상은 이미 멸망해있으므로, '세상(민족)을 구하자'가 된다. 하지만 장치적 기능은 대략 비슷한 것이다. 두 여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한 남자의 내적 갈등은 세계의 존망에 대한 의식과 더불어 화해(사실은 봉합)된다. 어떤 면에선 세카이물과 비슷한듯도 하다.

2019년 2월 25일 월요일

바보된다

'00하면 바보된다'라는 기사를 종종 접한다. 양상은 다양하다. 게임하면 바보된다. 티비 보면 바보된다. 핸드폰 많이 하면 바보된다. 안 놀면 바보된다 . . . 아마 바보된다 다음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클났다 같은 말일 것이다. 기존의 상식과 다른 현상이 대두될 때의 위기감이 바보된다에 그대로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왜 유독 "바보된다"일까? 여하튼 웃기기도 하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2887027?lfrom=facebook

2019년 2월 22일 금요일

아무말 대잔치.

권명아가 민경숙씨를 전면 부정하는 페이스북 발언 같은 것을 보면 페미니즘이 얼마만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그것의 달큰한 효과가 얼마만큼 지식인을  취하게 만드는지 알 수 있다.
100분토론에서 어떤 여성 변호사는 고위직 여성의 유리천장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라고 주장하면서, 고위직인 아닌 그분들은 지금 그대로 알아서 하시구요..라고 했다. ㅎ 천박하게 극단화되어 있지만 여성을 위하는 여성은 없다는 것이다. 일반명사는 여기서 모두 한정사로 특정되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권명아가 생각하는 여성은 자기 머릿속에서 상상해낸 페미니스트로서의 김지은의 위치와 거의 일치하는 것 같다는. 그러니까 페미니스트는 지켜야 한다라는. 인권은 사라지는 가운데 여성은 당파가 되고 페미니즘은 이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 느낌이 나만의 것이 아니길 바라면서.

2019년 2월 19일 화요일

땡땡주의란

어제 경성콤이라는 스터디 모임에 가서 무슨무슨 '주의'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비평 영역에서 주의라는 말을 온갖 형용사 명사 뒤에 붙이는 습관은 그것을 적어도 매우 일관된 이데올로기로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 뒤의 썰이 풀어지니까.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너는 무슨 무슨 주의(자)야, 이런 현상은 무슨 무슨 주의야라고 낙인 찍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예컨대 이택광의 글의 대부분이 그렇다. 뭐 그렇다고.

제리 살츠, 어떻게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

https://www.vulture.com/2018/11/jerry-saltz-how-to-be-an-artist.html?_ga=2.141337714.1942415931.1543853444-247830370.1542822034

김웅기 선생 때문에 알게된 글. 학생들에겐 도움이 많이 될 수도 있을.

2019년 2월 11일 월요일

역량평가?

절차적 공정성 같은 개소리를 지껄이는 (우파는 차치하고서라도) 미술계 좌파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터져 나온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정녕 미술계의 대통령으로 보고 싶다면, 그냥 국민투표에 부치자고 이야기하는 편이 나아보인다. 미술계 사람들이 그것을 환영할까? 미술의 미자도 모르는 일반 시민이 그것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2019년 2월 1일 금요일

보기 싫어하는 것

나는 아직도 홍성담과 이구영의 그림이 흥미롭다. 왜냐하면 이 그림을 좌파와 우파 모두가 보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거칠게 정치 전반이 이 그림을 싫어했다고 말해야할지도 모른다. 정치는 왜 특히 이들의 그림을 그렇게 느꼈던 것일까?

하나. 세련된 신좌파가 보고 싶어하지 않는 어떤 이미지. 이것은 운동적인 경향을 담고 있는, 어딘가 낡고 무식해보이며, 단도직입적이고, 무례한, 그래서 감각적인.

둘. 우익이 보고 싶어하지 않는 이미지.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본 모습.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것이 출현하면 단박에 자신의 거울상이 되어버리는 민중(미술)적인 무엇, 그래서 쉽게 독해 가능한, 감각에 호소하는.

"안 본 눈 삽니다"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보기 싫거나 끔직하거나 혐오스러운 걸 보면 눈이 멀 것 같다는 말도 한다. 상상이나 가능한가? 스펙터클이란 말이 거의 아무대서나 쓰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어떤 이미지가 이렇게까지 위협적이라니? 정말로 이미지에 우리는 무뎌진 것일까? 민감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홍수라는 말은 오히려 어떤 불길한 이미지의 철저한 억압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언가를 본 것 만으로(사실은 보여진 것에 가깝지만) 부정탄다고 믿어버리는 미신은 일찍이 S. 프로이트가 지적한 언캐니한 감정으로, 그 기원은 고대 사회의 애니미즘까지 올라간다. 

한국사람은 아직까지 추상적인 것을 독해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 추상적인 단어가, 특히 근대 이후에 태동한 사고방식을 규정하는 그런 단어가 한국어에 많이 없기 때문일까?

한국미술계에서 좋은 작품이란 어떻게 보면 추상화의 성공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꼬아져있어야 한다. 반대로 해석이 가능해야지만 좋은 작품이라는. 그런데 이때 좋은 작품이라고 만족감을 느끼는 주체는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