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31일 일요일
아르코 <미디어 아카이브> 관람
기획의도는 별 다르게 없는 것 같고. 띄엄띄엄 메모.
카메라의 위치나 존재가 생략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권혜원과 무진형제, 박준범이 그렇다. 미디어 자체를 고찰하지 않는다는 건데 그렇다면, 단어 의미 가지고 딴지 걸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서도, 여기에 굳이 미디어(아트)란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나라면 권혜원과 무진형제는 짧은 필름, 박준범은 퍼포먼스 다큐멘터리라고 하겠다.
그것과 논외로 권혜원은 엽서란 미디엄의 "사회적 삶"을 탐구한다. 동시대 담론과 좀 부합되는 측면이 있달까. 어떤 면에서 트랜디하단 생각.
무진형제는 뭔가 강렬하긴 한데 내러티브 구조가 (없거나 해체된다기보단) 단순하달까 그래서 그저그랬다.
박준범은 대표작을 전시했는데, 10년전 거라서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준범은 (미디어 아티스트라기 보다) 좋은 개념미술 작가다.
그 외 태싯그룹은 실로 미디어아트의 스테레오타입, 즉 상호작용성 그 자체에 함몰된 경우. 내 기준에선 좀 편파적이긴 하지만서도, 이건 미술이 아니다.
조현아 작업은 잘 이해가 안 된다. 빌비올라 같은 옛날 비디오아트가 상기되기도 하는데, 어렵다. 영상에선 수화, 4개의 스피커에서는 각기 다른 소리가 나온다. 언어와 목소리(플라톤식의 의미에서?)에 관한 내용인 건 맞는 거 같은데 뭔가 형이상학적이랄까.
모아 놓고 보니 되게 혹평인 것 같네. 끝.
카메라의 위치나 존재가 생략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권혜원과 무진형제, 박준범이 그렇다. 미디어 자체를 고찰하지 않는다는 건데 그렇다면, 단어 의미 가지고 딴지 걸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서도, 여기에 굳이 미디어(아트)란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나라면 권혜원과 무진형제는 짧은 필름, 박준범은 퍼포먼스 다큐멘터리라고 하겠다.
그것과 논외로 권혜원은 엽서란 미디엄의 "사회적 삶"을 탐구한다. 동시대 담론과 좀 부합되는 측면이 있달까. 어떤 면에서 트랜디하단 생각.
무진형제는 뭔가 강렬하긴 한데 내러티브 구조가 (없거나 해체된다기보단) 단순하달까 그래서 그저그랬다.
박준범은 대표작을 전시했는데, 10년전 거라서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준범은 (미디어 아티스트라기 보다) 좋은 개념미술 작가다.
그 외 태싯그룹은 실로 미디어아트의 스테레오타입, 즉 상호작용성 그 자체에 함몰된 경우. 내 기준에선 좀 편파적이긴 하지만서도, 이건 미술이 아니다.
조현아 작업은 잘 이해가 안 된다. 빌비올라 같은 옛날 비디오아트가 상기되기도 하는데, 어렵다. 영상에선 수화, 4개의 스피커에서는 각기 다른 소리가 나온다. 언어와 목소리(플라톤식의 의미에서?)에 관한 내용인 건 맞는 거 같은데 뭔가 형이상학적이랄까.
모아 놓고 보니 되게 혹평인 것 같네. 끝.
비평 하나
다만 이 글에서 아카이브란 용어가 이론에서 쓰이는 방식과 다른데, 여타 전시에 무분별하게 적용되면서 혼란을 낳는다.
"이러한 전시들은 기본적으로 ‘조사-수집-기록-전시(전달/열람)’이라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아카이브 전시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글쓴이가 할 포스터를 거론하기도 했지만, 포스터가 말하는 아카이브 충동은 이런 의미가 전혀 아니다. 끊임없이 체계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충동과, 거기에 다다를 시점 발견되는 구멍, 그것의 반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충동인 거다. 벤야민이 이건 수집가와 알레고리가를 비교하면서 충분히 설명한 바.
글쓴이가 지적하는 다다수 아카이브는 머랄까. 이데올로기적 형식에 가깝달까...굳이 아카이브 전시를 대체할 말을 찾자면 박물관 전시?
2016년 1월 30일 토요일
글과 포스터
작은 성명과 포스터를 함께 배치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바바라 크루거 같은 사람이 오래전에 시도했던 굉장히 급진적이고 효과적인 작법이다.
그런데 이 페북 형식에서는 글과 포스터 이미지가 콜라주라기보다 몹시 따로국밥이랄까. 이런 점은 좀 아쉽다. 대다수 이미지가 굉장히 추상적이고 상징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미지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니까 메시지를 이미지-베일이 가린달까.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좀 더 잘 콜라보가 되면 어떨까?
조너선 크래리, 24/7 잠의 종말, 김성호 역 (문학동네, 2014)
와...명불허전. 절대 비타협. 돌직구. 그만큼 파워풀. 요새 잠시 절충주의 쪽으로 샜던 걸 반성하게 된달까.
IDEOLOGY = FORM
제목도 쎄고 시작부터 쎄게 들어가서 뭔가 해서 봤더니.
국가 없는 민주주의, 자기 통치...다 좋은데, 너무 낭만주의적인 거 아닌가??ㅎ 특히 "Ideology Materialized" 부분...무슨 희안한 건물 하나 만들면서 아치에 3개 국어를 넣었다느니 아고라라느니 뭐니.. 좀 황당하다. 결국 다시 공구리로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거니...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form이라는 말이 정말 많이 나오는데(transform이나 perform 등까지 합해서) 역시 서양은 form이 너무너무 중요한듯...
Visual literary means our capacity to “read” form, but also to create form. For example, one can look at the depiction in a painting (it shows Marat in a bath after having been stabbed by a political opponent), but one can also read its construction, the anatomy of its form: its materiality, its accumulated layers of paint resulting from a series of performative acts—brushstrokes. The morphology of art contains at least as much information as a description of the image that a given artwork depicts.15
But this analysis and understanding of morphology is not limited to the confines of a painting or museum; one could, for example, engage in a morphological analysis of a parliament. If we would limit ourselves to a descriptive understanding of what a parliament depicts, we learn that it is a place where politicians and the government assemble. A morphological reading of a parliament, on the other hand, will tell us more: it shows us the parliament as an arena, as a theatrical space, where power is performed both through a specific spatial configuration, a specific number of actors, a composition of symbols, as well as an overall choreography. From a descriptive perspective, it is only of relative importance whether the parliament is circular, square, or triangular—the only thing that is important is that it’s a parliament, and functions as such: people assemble, debate, vote, and this has a certain impact on the external world. From a morphological perspective—from a perspective that reads into the form of the parliament—we understand that a square parliament creates a different spatial and social dynamic than a circle, to the point that the form and choreography of the assembly affect the outcome: an open-air parliament might produce a radically different outcome than a covered one; a parliament with benches might produce a radically different outcome than a parliament with chairs.16 Each spatial configuration, each object, each choreography inscribes a set of ideas into the performance of its actors. So while the nation-state is a construct that demands a specific performance, so do the shapes and forms through which its power is articulated and inscribed upon those speaking in its name. Ideology, in other words, has a material reality, which one can understand through morphology: through art.17 The discipline of the revolutionary practice of stateless democracy thus also affects the possibilities of the discipline of art to engage new, yet unscripted morphologies.
perform
Word Origin
C14: from Anglo-Norman perfourmer (influenced by formeform), from Old French parfournir, from par-per- + fournir to provide; see furnish
Collins English Dictionary - Complete & Unabridged 2012 Digital Edition
© William Collins Sons & Co. Ltd. 1979, 1986 © HarperCollins
Publishers 1998, 2000, 2003, 2005, 2006, 2007, 200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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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lliam Collins Sons & Co. Ltd. 1979, 1986 © HarperCollins
Publishers 1998, 2000, 2003, 2005, 2006, 2007, 200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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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 Origin and History for perform
v.
c.1300, "carry into effect, fulfill, discharge," via Anglo-French performer, altered (by influence of Old French forme "form") from Old French parfornir "to do, carry out, finish, accomplish," from par- "completely" (seeper-) + fornir "to provide" (see furnish).
Theatrical/musical sense is from c.1600. The verb was used with wider senses in Middle English than now, including "to make, construct; produce, bring about;" also "come true" (of dreams), and to performen muche timewas "to live long." Related: Performed; performing.
Theatrical/musical sense is from c.1600. The verb was used with wider senses in Middle English than now, including "to make, construct; produce, bring about;" also "come true" (of dreams), and to performen muche timewas "to live long." Related: Performed; performing.
Online Etymology Dictionary, © 2010 Douglas Har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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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rnir
Contents
[hide]French[edit]
Etymology[edit]
From Old French furnir, fornir (whence also English furnish), of Germanic origin, from Frankish *frumjan (“to complete, execute”), from Proto-Germanic*frumjaną (“to further, promote”), from Proto-Indo-European *promo- (“front, forward”). Cf. Old High German frumjan (“to perform, provide”), from fruma(“utility, gain”), akin to Old English fremu (“profit, advantage”), fremian (“to promote, perform”). Compare Catalan fornir, Italian fornire.
Pronunciation[edit]
Verb[edit]
fournir
- to supply, to provide
- La boulangerie fournit mon restaurant en pain.
- The bakery supplies my restaurant with bread.
- La boulangerie fournit mon restaurant en pain.
- to put in
- Fournir de l'effort.
- Put in some effort.
- Fournir de l'effort.
- (card games) To follow suit
- (slang) To poke, to shaft, to hump; to have sex
- J'ai fourni ta mère.
- I shafted your mother.
- J'ai fourni ta mère.
교역소 <헤드론 저장소> 관람
봐야되는데...하다가 이현씨랑 이야기가 되어서 함께 관람. 교역소의 마지막 전시라고. 짧은 메모.
무엇보다 놀라운 점. 전시 서문이 없다. 리플렛도 없다. 도록은 만들 예정인지 모르겠는데 여튼 현재 스코어 그렇다. 포스터를 판다. 스티커를 판다. 이게 맞다 그르다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되게 다른 문법임엔 분명하다.
판단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는 사이에 교역소는 사라진다. 지금까지 전시들이 그랬다. 치고 빠지는 식이랄까. 속도전.
이런 경황이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문법, 이 작업이 무엇을 의미하고 전시 기획의도가 무엇이며 등등을 말하기가 무색해진다. 개별 작품의 의미가 크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 기획자의 취향 컬렉션에 가깝다. 이유는 없다. 그냥 취향이다로 끝나버리는 것 같다.
전시작들도 거개 그런식이다. 인스타그램 사진이나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 같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가 익히 미디어에서 봐오던 이미지나 내러티브를 따른다. 물론 그것의 최신버전에 가깝다.
그러고보면 교역소 자체가 일종의 미적 액티비즘 블럭에 가깝다. 신생공간이라고 불리는 대다수가 그렇다. 작업 자체가 중요하기 보다는 공간-아이덴티티를 계속 움직이기 위해 작업을 땔감 삼는다. 이것은 큐레이팅이란 요소가 작업화되는 경향이고, 더불어 그것이 일종의 액티비즘 요소로 적극 도입된다는 말이다. 어떤 액티비즘이냐고 하면 일단은 거칠게 세대 전복이라고 밖에 말을 못 하겠다. 다른, 새로운 세대적 미적 감수성을 기존 생태계에 끼얹는 일이랄까.
2016년 1월 29일 금요일
두 명의 페미니스트
예전에 말로만 슬쩍 했던 아이디어인데 까먹을까봐 기록. 그건 뭐냐면 정두리와 송아영 전격 비교 글이다.
둘 다 페미니스트의 공공적 화신(?)이고 서로도 살짝 까면서도 친한 것 같고, 활동 방법론도 비스무레하면서도 극명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이 코드가 무척이나 민감해서 괜히 흥미로 썼다 불쏘시개를 건드린 결과가 나올까봐 말았다.
정두리가 워홀이라면 송아영은 카스트로다. 물론 송아영이 진정으로 카스트로는 아니고 사실 분류하자면 둘 다 워홀에 가깝지만 코드 면에서 송아영은 카스트로의 느낌 또한 강하게 품고 있다. 굳이 비유하자면 흑화된 워홀...?
만약 할 포스터라면 정두리를 포르노, 송아영을 외설이라고 했을 것이다. 정두리가 아이돌이라면 송아영은 영락물(아영씨 미안)이다. 그리고 송아영 승! 했겠지. 이 시각도 맞다. 하지만 오늘날 그 외설적 이미지를 통해 통렬하게 비판적 감수성(혹은 두려움!)을 느끼는 남성 지성도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포스터정도 되어야...흐), 오히려 포르노의 가능성에 차라리 무게를 실어주고 싶다. 그러니까 포스터가 이미지 자체의 윤리적 문제에 매달리고 있다면, 뭐 이미지 액티비즘 차원에선 다른 각도로 보이기도 한다는 뜻. 이때 두 명의 페미니스트는 다들 나름의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둘 다 페미니스트의 공공적 화신(?)이고 서로도 살짝 까면서도 친한 것 같고, 활동 방법론도 비스무레하면서도 극명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이 코드가 무척이나 민감해서 괜히 흥미로 썼다 불쏘시개를 건드린 결과가 나올까봐 말았다.
정두리가 워홀이라면 송아영은 카스트로다. 물론 송아영이 진정으로 카스트로는 아니고 사실 분류하자면 둘 다 워홀에 가깝지만 코드 면에서 송아영은 카스트로의 느낌 또한 강하게 품고 있다. 굳이 비유하자면 흑화된 워홀...?
만약 할 포스터라면 정두리를 포르노, 송아영을 외설이라고 했을 것이다. 정두리가 아이돌이라면 송아영은 영락물(아영씨 미안)이다. 그리고 송아영 승! 했겠지. 이 시각도 맞다. 하지만 오늘날 그 외설적 이미지를 통해 통렬하게 비판적 감수성(혹은 두려움!)을 느끼는 남성 지성도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포스터정도 되어야...흐), 오히려 포르노의 가능성에 차라리 무게를 실어주고 싶다. 그러니까 포스터가 이미지 자체의 윤리적 문제에 매달리고 있다면, 뭐 이미지 액티비즘 차원에선 다른 각도로 보이기도 한다는 뜻. 이때 두 명의 페미니스트는 다들 나름의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시크릿 가든
시크릿 가든, 비밀의 정원이라는 색칠 공부 책이 화제란다. 들은지는 꽤 됐는데 까먹고 있다가 서점 매대에서 발견하고선 다시 기억해 냈다. 정말 현대인의 특이한 행동 중 하나라..
안티 스트레스 활동이라고 광고가 되고 있으며, 실제 삽화에 색칠을 끝낸 후 밀려 들어오는 성취감이 장난이 아니란다. 거의 예술작품 취급하는 듯하며, 색 잘 칠하기 방법이나 강의같은 것도 있단다. 이정도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거다.
자연스럽게 박미나의 드로잉 작업이 떠오르게 되는데,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왜 시크릿가든과 박미나 드로잉을 아무도 비교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내가 모르는 건가?
여튼 박미나를 도식화하면 레디메이드 -> 재기입이다. 이걸 보고 현시원처럼 교란 등의 말을 붙여서 시크릿가든과 박 드로잉이 반대라고 말하는 건 쉬울 텐데, 나에겐 오히려 박 드로잉이 시크릿가든의 모범 샘플 중 하나로 보인다. 시크릿가든 콜라보레이션 아티스트 에디션이라고 해도 뭐, 위화감이 없을 테다. 실로 시크릿가든 샘플 보다 더욱 완벽한 시크릿가든 샘플이 박 드로잉이 아니겠는가. (자유롭게 표현해 보세요!) 레디메이드보다 더욱 진정성 있는 레디메이드, 그야말로 신자유주의적인 오브제가 아닌가.
안티 스트레스 활동이라고 광고가 되고 있으며, 실제 삽화에 색칠을 끝낸 후 밀려 들어오는 성취감이 장난이 아니란다. 거의 예술작품 취급하는 듯하며, 색 잘 칠하기 방법이나 강의같은 것도 있단다. 이정도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거다.
자연스럽게 박미나의 드로잉 작업이 떠오르게 되는데,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왜 시크릿가든과 박미나 드로잉을 아무도 비교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내가 모르는 건가?
여튼 박미나를 도식화하면 레디메이드 -> 재기입이다. 이걸 보고 현시원처럼 교란 등의 말을 붙여서 시크릿가든과 박 드로잉이 반대라고 말하는 건 쉬울 텐데, 나에겐 오히려 박 드로잉이 시크릿가든의 모범 샘플 중 하나로 보인다. 시크릿가든 콜라보레이션 아티스트 에디션이라고 해도 뭐, 위화감이 없을 테다. 실로 시크릿가든 샘플 보다 더욱 완벽한 시크릿가든 샘플이 박 드로잉이 아니겠는가. (자유롭게 표현해 보세요!) 레디메이드보다 더욱 진정성 있는 레디메이드, 그야말로 신자유주의적인 오브제가 아닌가.
멘탈
1. 세월호 관련 사진을 보다가 한편으로 인스타그램 사진, 예컨대 볼에 바람 뿌 넣거나 하는 필터 낀 예쁜척 사진을 보면 순간 멘탈을 잃게 된다. 저런 멍청한 엑스..가 바로 상기된다. 아이들도 과거에 분명히 비슷한 사진을 찍고 놀았을 거란 생각도 물론 든다. 그럼에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2. 이런 분노감이 멘탈을 나가게 하며 사람을 삐딱이로 만든다. 인스타그램 사진은 모두 거짓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생각하면, 젊은 세대는 ㅅㅂ 모두 글러 먹었어, 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진 않다. 그런 이미지엔 선의도 악의도 없다. 일상적인 자신의 분신이다. 그런 원초적인 이미지다.
3. 이미지는 흘러 들어오는 것만 해도 폭력적이다. 그럴 때가 있다.
4. 이미지도 위 아래가 있는 것 같다. 위에서 아래로만 흐른다.
5. 짝사랑하는 이성을 쟁취하는 데 근본 조건이 뭘까. 편지? 이벤트? 매너? 더욱 근본적인 건 그 이성의 이상형이 되는 거다. 그 이성 눈에 멋있어 보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이런 분노감이 멘탈을 나가게 하며 사람을 삐딱이로 만든다. 인스타그램 사진은 모두 거짓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생각하면, 젊은 세대는 ㅅㅂ 모두 글러 먹었어, 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진 않다. 그런 이미지엔 선의도 악의도 없다. 일상적인 자신의 분신이다. 그런 원초적인 이미지다.
3. 이미지는 흘러 들어오는 것만 해도 폭력적이다. 그럴 때가 있다.
4. 이미지도 위 아래가 있는 것 같다. 위에서 아래로만 흐른다.
5. 짝사랑하는 이성을 쟁취하는 데 근본 조건이 뭘까. 편지? 이벤트? 매너? 더욱 근본적인 건 그 이성의 이상형이 되는 거다. 그 이성 눈에 멋있어 보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016년 1월 26일 화요일
현실 감각
직장을 가지지 않아서 잃는 것은 현실감각이다. 그렇다고 밖에 쏘다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아는 사람 마저도 잃는 판이니 반복의 반복이거나 점증적인 감쇠다. 접하는 것들은 신체적이라기보단 대개 관념적이다. 생각이 찐득하게 달라 붙는 것 없이 점점 더 추상적으로 변한다. 그럴 수록 세상을 다 알 것 같단 생각이 마구 드는데 이건 아마 내가 전오이디푸스로 퇴행하고 있단 증거일지도 모른다.
얼떨결에 맡은 전시를 놓고 홍관샘하고 이런저런 이야길 나눴다. 첨부터 너무 엄살을 떨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대충 내 상태를 파악하시더니 그렇게 할 거면 하지 말라고 하셨다. 여튼 공감과 진정성의 문제였는데, 내가 그걸 감당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이 선생님의 지적이었다. 원래 좀 독선적으로 말씀하시는 것도 있긴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 말도 맞았다. 이 주제를 너무 쉽게 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하나의 문제가 있고 그걸 해결하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을 했을지도 모른다. 기계적으로 말이다. 어떤 사람은 내 이런 냉랭함이 필요하다고도 말했다. 나 스스로도 어떤 일을 하는 데 정의나 진정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은지는 꽤 오래됐다. 효율적이지 않다.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 꼴을 보고 진정한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은 병든 정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떤 부분이 빠졌다. 정말 삶에 필요한 어떤 부분이 빠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네가 진짜 이걸 하고 싶은 것이 맞느냐. 맞느냐. 자문을 해보면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결정을 내렸고 뭔가를 어쨌든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냥 내 결정 자체가 진정성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지금은. 적어도. 그리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선 잘 되든 못 되든 내가 책임을 지겠다. 지금은 그 정도의 결심만 하려고 한다.
2016년 1월 25일 월요일
포스팅
1.
2000년대 중반 이후, 아마도 어떤 포스트모던한 것들이 시장에서 극점을 찍고 폭락한 이후, 한국 미술계는 기묘한 가치 체계의 붕괴를 함께 겪는다. 몇몇 야심찼던 갤러리는 몸값을 키워놓은 작가를 감당하지 못해 사실상 개점휴업을 준비해야 했고, 맞춤형 생산 그림으로 재미를 봤던 유사를 포함, 작가들은 하나 같이 급작스런 변동, 외면에 적응하지 못하고 슬럼프를 겪어야만 했다. 미술 시장을 비판했던 평론계는 돌연, 시장의 안위를 한국 미술계의 잠재성 및 미래와 겹쳐놓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동안 시장에서 빛을 보지 못했던 일군의 포스트모던한 “정치적 미술”은 일련의 비엔날레에 단골 손님으로 초대되다가 하나 둘씩 유수의 제도에서 제정한 미술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들의 마이너리티 감수성과 어떤 이데올로기 비판의 성격은 무효하거나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으니, 이것은 일종의 보상성 전시, <민중미술 15년>전의 기시감을 불러 일으키기 충분한 것이었다. 민중미술의 트랙 중 하나였던 공공미술 또한 이따금씩 지자체와 영합하는 가운데 심리적, 물리적 폐허를 무차별적으로 만들어 내며 한계 상황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경제적, 담론적 공황 상태에서 남은 것은 폭발적으로 설립된 제도 인프라뿐이었다. 그러니까 미술상을 포함, 미술 대학과 다양한 신진작가 지원 제도, 각종 국공립 문화재단과 미술 기관, 혹은 심지어 지자체의 직접 기획 문화사업 등이야말로 미술계의 등뼈가 되었다. 기계를 한 번 켜면 최소한 연료가 다할 때까지는 돌아 가듯이, 이런 인프라는 어떤 관성력으로 미술계의 양적인 부분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동시에 예술가와 큐레이터, 대안공간, 심지어 행동가를 자처하는 자 모두가 준행정가, 즉 지원서 전문가로 분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분석은 도식적이고 단정적이며, 심지어 거칠다. 하지만 최소한 이 시점 이후, 미술(혹은 시장)과 제도 사이의 관계에서 분명한 전도가 일어났다고는 확실히 말해볼만 하다. 지원 제도는 필요가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연초가 되면 미술계의 거의 모두가 모니터에 워드프로세서와 엔카스를 띄우고 뭔가를 쥐어 짠다. 지원 기관의 로고를 도록에 박아 넣는 일이 일종의 훈장처럼 보이던 시대도 지나, 이제 너무나 흔한 엠블렘이 되었다. 오늘날 미술계의 어떤 누구도 ‘헝그리 정신’을 말하는 자가 없으며, 비슷한 의미로 컨템포러리 예술을 한다고 하는 작자가 자비로 일반 갤러리를 대관하는 일이야 말로 일종의 불가해한 일이 된다. (제대로 된 갤러리는 일반적인 대관업무를 거의 하지도 않지만.) 지원금을 업은 대다수 야심찬 작가는 따라서 새로운 미술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대안적인 공간의 문을 두드리게 되며, 이로서 대안 공간은 지원금이 흘러 교집하는 저수지가 된다. 오늘날의 대안 공간 거개는 한편으로 공간 지원금, 다른 한편으로 예술가 개인이 획득한 지원금의 대관비 예산 없이는 유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지원 제도만이 일종의 중성 지대이며 진정한 어떤 실험의 장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고 말해 볼 수 있다. 상황이 이렇기에, 과장하면 미술계의 과반수 이상의 비율을 기획하고 심사하고 선택하는 ‘큐레이터’가 이런 지원 시스템과 거기에 연루된 소위 전문가들이 아닐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분명한 것은, 이런 시스템 안에서 미술은 근본적으로 제도에 반하지 못하는 위치에 기입되어 있다. 미술은 심지어 정치적일 수도 있지만, 제도에 치명적이지 않을 만큼만 정치적이어야 하며, 그런 한 제도의 어떤 정치적 개입 하에 (정치적인) 미술은 승인되어야 할 것으로 대기열 옆에 선다. 이것을 기반으로 미술계가 돌아간다. 다시 말해 미학은 정치화될 수 없으며 되려 그 역전, 정치가 미학화 한다.
2.
조금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 보더라도 여기, 혹은 최소한 서울의 시공간은 몹시 미학적이라고 봐야 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유명한 도식처럼 포스트모던 조각의 특성을 (비)풍경과 (비)건축의 혼합체로 간주할 수 있다면, 오늘날 서울이야말로 풍경이자 건축이자 비풍경이자 비건축이다. 더 이상 자연적인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서울은 실로 건축적 장소이지만 그것이 곧 제2의 자연이 됐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거대한 대지미술과도 같다. 또한 인위적으로 설계된 잡다한 시스템이 어떤 패턴을 구조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건축이자 건축이며, 위성으로부터 매핑되어 스마트폰으로 들어온 서울은 풍경이자 비풍경 그 자체다. 그러니까 포스트모던 조각, 좀더 풀어서 예술의 논리적 그리드를 그대로 실생활에 그대로 깔아놓은 장소가 바로 서울인 것이다. 이런 논리가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인간을 그물처럼 둘러 싼다.
첨병은 역시 디자인이다. 오늘날 제품뿐만 아니라, 미술 전시부터 건축, 프로그래밍, 산업 전략, 다양한 분야의 시스템 설계, 심지어 라이프스타일과 업무 프로세스까지 모두 디자인의 대상으로 사려된다. 그러니까 현대 디자인은 단지 산업 시대의 제품을 만드는 차원에서 훨씬 벗어나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과 합체하는 접속 기계다. 아르누보와 바우하우스를 거친 오늘날의 토탈 디자인의 세계는 할 포스터의 지적처럼 산업시대의 제품의 정치경제학을 기호의 정치경제학으로 개편했다. 여기서 상품은 자신의 다른 인격, 이미지로 화하며, 다시 이미지는 인간 욕망의 화신, 자아의 미니미 mini-me가 된다. 더욱이 이런 물질의 기호화, 나아가 미학화는 컴퓨팅과 데이터베이스 시스템,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전과 함께 가상과 현실을 글로벌한 차원에서 통폐합시키며 유비쿼터스적으로 풀가동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세훈 전 서울 시장은 디자인의 중요성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시 행정 시스템을 디자인 중심으로 개편하는 가운데 디자인을 통한 “르네상스”를 일으키고자 애썼다. 이때 뜬금없는 “르네상스”란 말이 주는 기묘한 키치적 감정은 중세를 혁신했던 조르주 바자리의 개념, 디자인의 어원이기도 한, 디세뇨 disegno를 이끈다. 디세뇨는 건축과 회화, 조각 등 아름다움의 이념을 (일종의 과학적으로) 모방하는 인간 활동을 묶어 지칭하는 말로, 인간적으로 신을 표현했던 고전주의적 이상을 함축한다. 마찬가지로 디세뇨의 현대적 귀환은 신을 인간화(현실화) 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때의 신은 포스터의 주장처럼 물신화한 상품-이미지도 되지만, 더욱 고전주의적 감각에서 육화한 신, 기념비/아이콘일 법도 하다.
이런 감각에서 크라우스가 모더니즘을 탈신성화함으로써 도출했던 논리적으로 확장된 조각의 장, 현재 구체적인 생활에 펼쳐진 그것이 디세뇨의 이념으로 다시 한 번 신화 시대로 돌아간다. 더불어 크라우스가 모더니즘의 본질로 규정하고 비판했던 그리드의 신화가 이 땅 위에서 다시 펼쳐진다. 추상 회화의 표면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모순을 마술처럼 화합시키는 베일인 그리드는, 크라우스의 확장된 장의 논리에 의해 삶을 더욱 철저하게 이중구조화한다. 이때의 그리드는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 시스템이나, 혹은 그것을 내면화한 일종의 인간 그리드로 부상하지만, 결국 현실을 가리는 신화이거나 신화를 보존하기 위한 현실의 가림막으로서, 자율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물론 이것은 신자유주의 판본이긴 하지만) 언제나 영원하고 어디서나 편재하는 것처럼 발견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그것과 동일하다. 모더니즘 시기 회화와 조각의 끝이 그리드라면, 오늘날 현실의 시작은 바로 이 그리드로부터다. 바야흐로 미적 도시, 기업, 인간이 표면으로부터 탄생한다. 창조도시, 문화기업, 힙스터 등 삶 속에 구현된 이들은 이런 의미에서, 어쩌면 쉽게도 예술과 예술가 자신의 거울상일지도 모른다.
3.
그러니까 나는 지금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미학화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하기 위해, 미술계의 간략한 조건을 짚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삶을 둘러싼 구조적 환경 전체를 크라우스와 포스터를 경유해 논의했다. 이때 현재의 삶의 구조가 일종의 논리적 혹은 기호학적 그리드라고 주장했으며, 그것이 결국 동시에 감추고/드러내는 이진법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그리드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식으로 다소 단순하게 도식화했다. 비약을 감수하면서도 나는 이런 방식을 선호하는데, 이미지로 생각하는 데 보다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오늘날 세계가 모더니즘 추상 회화나 조각과 다를 것이 없이 그리드로 덮여 있다는 이미지를 가정해볼 수 있다. 일례로 예술가의 신체 자체도 그리드의 산물이다. 예술가 그리드는 모더니즘 조각처럼 예술 그 자체를 몸 안으로 빨아 들임으로써 어떤 자율적 신체(한편으로 신자유주의적 신체)를 선언적으로 시연하면서도, 한편으로 제도에 무의식적으로 끌려가며 (전형화된 포트폴리오와 작업 노트, 프레젠테이션 등이 그렇듯) 어떤 반복적 스테레오타입, 즉 이 시대의 유일한 양식을 현시한다.
이런 자율성과 유일성(편재성)을 형태학적으로 이미지화한 것이 크라우스의 유명한 원심력과 구심력의 비유인데, 몇몇의 예술가는 그 테마를 다시 한 번 현재화하려고 애쓴다. 예컨대 이슬기의 퍼포먼스 비디오에서, 기둥에 묶인 퍼포머가 움직이며 그려내는 궤적은 명백하게 그리드의 메타포인데, 그가 기둥과 반대로 달리며 만들어진 팽팽한 긴장, 하지만 평형 상태가 구심력과 원심력 자체를 시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드는 이 두 가지 힘을 통해 궤적의 안정 상태, 그러니까 자율성과 반복의 평형상태를 유지하려 하지만, 퍼포머가 반복해서 같은 궤적을 빗나간 궤적으로 덧쓰는 가운데 그 장소는 거듭 쓴 양피지, 팰럼세스트로 변한다. 이런 방식으로 원심력과 구심력 사이에서, 예컨대 퍼포머의 반구심력은 당기는 힘을 반원심력으로 변화시키며 일종의 힘의 잡종적 생태계를 만든다. 이렇게 그리드를 중층화 한다. 시대의 단 하나의 (삶의) 양식을 거부하면서 말이다.
확산과 응축의 긴장, 혹은 평형 상태라는 그리드의 조건은 남민지의 인스톨레이션에서 더욱 복잡성을 더한다. 추상 회화의 3차원 판본으로 보이는 사각형의 큰 방은 다시 직각으로 구획된 같은 크기의 작은 방으로 나뉘어지며, 정확히 그리드의 반복성을 표현한다. 이때 수직과 수평의 교차점, 정중심에 배치된 구 모양의 오브제는 각각의 구획된 방과 같은 색깔로 정확히 네 등분으로 칠해져 각 방과 함께 그야말로 전일성을 이룬다. 구는 그리드의 본질, 조화로움을 표상하는 쐐기돌이다. 하지만 남민지는 구에 움직임을 조심스레 더했다. 구가 회전함에 따라 본래 각 방과 조화를 이뤘을, 그 핵심일 중심점 자신이 그리드를 교란하기 시작한다. 단단하게 구획된 방의 안정성은 구의 회전으로 액체화되며 각 방은 서로 섞인다. 이런 작동은 방의 전일성을 깨뜨리며 그리드에 일종의 구멍을 뚫는다.
이슬기와 남민지가 작업에서 탐구했던 그리드의 이중적 힘은 임유정의 작업에서 스카이콩콩의 비유로 고스란히 시연된다. 스카이콩콩은 지구의 구심력, 즉 중력을 이겨내는 힘의 작용 속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의 긴장/평형 상태를 만들어내는 장치다. 스카이콩콩의 시스템은 이런 점에서 그리드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데, 비디오에서는 반복적으로 행위를 수행하는 가운데, 스카이콩콩이 되려 땅을 파고 들어가면서, 두 힘의 평형 상태가 깨지는 상황을 희극적이면서도 다소 멜랑콜리하게 보여준다. 임유정(그리고 이슬기와 남민지, 앞으로 보겠지만 허연화까지)에게 그리드의 반복성, 그리고 그로 인한 효과인 유일성을 해체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상승과 하강의 반복 가운데 평형 상태로부터의 이탈을 모색했던 테마는 ‘파도타기’와 ‘피에로 피리’에서 표현되는 어떤 엇박자를 통해 계속 반복되는 가운데, 또 변조된다. 특히 임유정의 경우 디지털 이미지 조작을 통해 그렇게 하는데, 실재와 가상이 모두 이미지로 화한 오늘날, 이미지를 통해 이미지를 교란시키기 위해 그렇게 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펴 본 작가들은 모두 이미지를 다루고 형상화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존재론적 양식이 오직 이미지라는 점에서, 그리고 작가 모두가 그것의 양태를 신중히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것을 일단의 유물론적 탐구라고 말해두고 싶다. 그리드는 이미지의 유물론적 탐구를 가리는 동시에 그 표면-이미지를 신화화한다. 예술가는 (이미 삶이 되어버린) 그 표면 위에서, 그것의 구조를 다시 쓰거나, 흔들거나, 폭로하며 맞선다.
그런 점에서 허연화의 조각과 인스톨레이션은 감추면서/드러내는 그리드의 이진법을 구조적인 감각으로 무대화한다. 쓰리디 모델링으로 만들어진 가상적인 이미지의 이종적 혼합체는 때로는 조각으로, 평편한 이미지로 만들어지는데, 이 모든 것들은 다시 종합적으로 구조도 안에서 매핑된다. 구조도가 이것들을 매끈하게 정련하려고 하는 그리드의 신화적 측면이라면, 병치된 이미지 콜라주들은 그것이 그 시작부터 매끈한 표면이 아니었음을 상기시킨다. 일련의 작업과 설치가 만들어내는 인터페이스는 그리드의 관념론과 유물론이 변증법적으로 충돌하는 자리라고 하겠다. (16.1.24)
2000년대 중반 이후, 아마도 어떤 포스트모던한 것들이 시장에서 극점을 찍고 폭락한 이후, 한국 미술계는 기묘한 가치 체계의 붕괴를 함께 겪는다. 몇몇 야심찼던 갤러리는 몸값을 키워놓은 작가를 감당하지 못해 사실상 개점휴업을 준비해야 했고, 맞춤형 생산 그림으로 재미를 봤던 유사를 포함, 작가들은 하나 같이 급작스런 변동, 외면에 적응하지 못하고 슬럼프를 겪어야만 했다. 미술 시장을 비판했던 평론계는 돌연, 시장의 안위를 한국 미술계의 잠재성 및 미래와 겹쳐놓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동안 시장에서 빛을 보지 못했던 일군의 포스트모던한 “정치적 미술”은 일련의 비엔날레에 단골 손님으로 초대되다가 하나 둘씩 유수의 제도에서 제정한 미술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들의 마이너리티 감수성과 어떤 이데올로기 비판의 성격은 무효하거나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으니, 이것은 일종의 보상성 전시, <민중미술 15년>전의 기시감을 불러 일으키기 충분한 것이었다. 민중미술의 트랙 중 하나였던 공공미술 또한 이따금씩 지자체와 영합하는 가운데 심리적, 물리적 폐허를 무차별적으로 만들어 내며 한계 상황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경제적, 담론적 공황 상태에서 남은 것은 폭발적으로 설립된 제도 인프라뿐이었다. 그러니까 미술상을 포함, 미술 대학과 다양한 신진작가 지원 제도, 각종 국공립 문화재단과 미술 기관, 혹은 심지어 지자체의 직접 기획 문화사업 등이야말로 미술계의 등뼈가 되었다. 기계를 한 번 켜면 최소한 연료가 다할 때까지는 돌아 가듯이, 이런 인프라는 어떤 관성력으로 미술계의 양적인 부분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동시에 예술가와 큐레이터, 대안공간, 심지어 행동가를 자처하는 자 모두가 준행정가, 즉 지원서 전문가로 분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분석은 도식적이고 단정적이며, 심지어 거칠다. 하지만 최소한 이 시점 이후, 미술(혹은 시장)과 제도 사이의 관계에서 분명한 전도가 일어났다고는 확실히 말해볼만 하다. 지원 제도는 필요가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연초가 되면 미술계의 거의 모두가 모니터에 워드프로세서와 엔카스를 띄우고 뭔가를 쥐어 짠다. 지원 기관의 로고를 도록에 박아 넣는 일이 일종의 훈장처럼 보이던 시대도 지나, 이제 너무나 흔한 엠블렘이 되었다. 오늘날 미술계의 어떤 누구도 ‘헝그리 정신’을 말하는 자가 없으며, 비슷한 의미로 컨템포러리 예술을 한다고 하는 작자가 자비로 일반 갤러리를 대관하는 일이야 말로 일종의 불가해한 일이 된다. (제대로 된 갤러리는 일반적인 대관업무를 거의 하지도 않지만.) 지원금을 업은 대다수 야심찬 작가는 따라서 새로운 미술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대안적인 공간의 문을 두드리게 되며, 이로서 대안 공간은 지원금이 흘러 교집하는 저수지가 된다. 오늘날의 대안 공간 거개는 한편으로 공간 지원금, 다른 한편으로 예술가 개인이 획득한 지원금의 대관비 예산 없이는 유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지원 제도만이 일종의 중성 지대이며 진정한 어떤 실험의 장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고 말해 볼 수 있다. 상황이 이렇기에, 과장하면 미술계의 과반수 이상의 비율을 기획하고 심사하고 선택하는 ‘큐레이터’가 이런 지원 시스템과 거기에 연루된 소위 전문가들이 아닐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분명한 것은, 이런 시스템 안에서 미술은 근본적으로 제도에 반하지 못하는 위치에 기입되어 있다. 미술은 심지어 정치적일 수도 있지만, 제도에 치명적이지 않을 만큼만 정치적이어야 하며, 그런 한 제도의 어떤 정치적 개입 하에 (정치적인) 미술은 승인되어야 할 것으로 대기열 옆에 선다. 이것을 기반으로 미술계가 돌아간다. 다시 말해 미학은 정치화될 수 없으며 되려 그 역전, 정치가 미학화 한다.
2.
조금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 보더라도 여기, 혹은 최소한 서울의 시공간은 몹시 미학적이라고 봐야 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유명한 도식처럼 포스트모던 조각의 특성을 (비)풍경과 (비)건축의 혼합체로 간주할 수 있다면, 오늘날 서울이야말로 풍경이자 건축이자 비풍경이자 비건축이다. 더 이상 자연적인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서울은 실로 건축적 장소이지만 그것이 곧 제2의 자연이 됐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거대한 대지미술과도 같다. 또한 인위적으로 설계된 잡다한 시스템이 어떤 패턴을 구조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건축이자 건축이며, 위성으로부터 매핑되어 스마트폰으로 들어온 서울은 풍경이자 비풍경 그 자체다. 그러니까 포스트모던 조각, 좀더 풀어서 예술의 논리적 그리드를 그대로 실생활에 그대로 깔아놓은 장소가 바로 서울인 것이다. 이런 논리가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인간을 그물처럼 둘러 싼다.
첨병은 역시 디자인이다. 오늘날 제품뿐만 아니라, 미술 전시부터 건축, 프로그래밍, 산업 전략, 다양한 분야의 시스템 설계, 심지어 라이프스타일과 업무 프로세스까지 모두 디자인의 대상으로 사려된다. 그러니까 현대 디자인은 단지 산업 시대의 제품을 만드는 차원에서 훨씬 벗어나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과 합체하는 접속 기계다. 아르누보와 바우하우스를 거친 오늘날의 토탈 디자인의 세계는 할 포스터의 지적처럼 산업시대의 제품의 정치경제학을 기호의 정치경제학으로 개편했다. 여기서 상품은 자신의 다른 인격, 이미지로 화하며, 다시 이미지는 인간 욕망의 화신, 자아의 미니미 mini-me가 된다. 더욱이 이런 물질의 기호화, 나아가 미학화는 컴퓨팅과 데이터베이스 시스템,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전과 함께 가상과 현실을 글로벌한 차원에서 통폐합시키며 유비쿼터스적으로 풀가동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세훈 전 서울 시장은 디자인의 중요성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시 행정 시스템을 디자인 중심으로 개편하는 가운데 디자인을 통한 “르네상스”를 일으키고자 애썼다. 이때 뜬금없는 “르네상스”란 말이 주는 기묘한 키치적 감정은 중세를 혁신했던 조르주 바자리의 개념, 디자인의 어원이기도 한, 디세뇨 disegno를 이끈다. 디세뇨는 건축과 회화, 조각 등 아름다움의 이념을 (일종의 과학적으로) 모방하는 인간 활동을 묶어 지칭하는 말로, 인간적으로 신을 표현했던 고전주의적 이상을 함축한다. 마찬가지로 디세뇨의 현대적 귀환은 신을 인간화(현실화) 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때의 신은 포스터의 주장처럼 물신화한 상품-이미지도 되지만, 더욱 고전주의적 감각에서 육화한 신, 기념비/아이콘일 법도 하다.
이런 감각에서 크라우스가 모더니즘을 탈신성화함으로써 도출했던 논리적으로 확장된 조각의 장, 현재 구체적인 생활에 펼쳐진 그것이 디세뇨의 이념으로 다시 한 번 신화 시대로 돌아간다. 더불어 크라우스가 모더니즘의 본질로 규정하고 비판했던 그리드의 신화가 이 땅 위에서 다시 펼쳐진다. 추상 회화의 표면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모순을 마술처럼 화합시키는 베일인 그리드는, 크라우스의 확장된 장의 논리에 의해 삶을 더욱 철저하게 이중구조화한다. 이때의 그리드는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 시스템이나, 혹은 그것을 내면화한 일종의 인간 그리드로 부상하지만, 결국 현실을 가리는 신화이거나 신화를 보존하기 위한 현실의 가림막으로서, 자율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물론 이것은 신자유주의 판본이긴 하지만) 언제나 영원하고 어디서나 편재하는 것처럼 발견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그것과 동일하다. 모더니즘 시기 회화와 조각의 끝이 그리드라면, 오늘날 현실의 시작은 바로 이 그리드로부터다. 바야흐로 미적 도시, 기업, 인간이 표면으로부터 탄생한다. 창조도시, 문화기업, 힙스터 등 삶 속에 구현된 이들은 이런 의미에서, 어쩌면 쉽게도 예술과 예술가 자신의 거울상일지도 모른다.
3.
그러니까 나는 지금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미학화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하기 위해, 미술계의 간략한 조건을 짚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삶을 둘러싼 구조적 환경 전체를 크라우스와 포스터를 경유해 논의했다. 이때 현재의 삶의 구조가 일종의 논리적 혹은 기호학적 그리드라고 주장했으며, 그것이 결국 동시에 감추고/드러내는 이진법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그리드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식으로 다소 단순하게 도식화했다. 비약을 감수하면서도 나는 이런 방식을 선호하는데, 이미지로 생각하는 데 보다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오늘날 세계가 모더니즘 추상 회화나 조각과 다를 것이 없이 그리드로 덮여 있다는 이미지를 가정해볼 수 있다. 일례로 예술가의 신체 자체도 그리드의 산물이다. 예술가 그리드는 모더니즘 조각처럼 예술 그 자체를 몸 안으로 빨아 들임으로써 어떤 자율적 신체(한편으로 신자유주의적 신체)를 선언적으로 시연하면서도, 한편으로 제도에 무의식적으로 끌려가며 (전형화된 포트폴리오와 작업 노트, 프레젠테이션 등이 그렇듯) 어떤 반복적 스테레오타입, 즉 이 시대의 유일한 양식을 현시한다.
이런 자율성과 유일성(편재성)을 형태학적으로 이미지화한 것이 크라우스의 유명한 원심력과 구심력의 비유인데, 몇몇의 예술가는 그 테마를 다시 한 번 현재화하려고 애쓴다. 예컨대 이슬기의 퍼포먼스 비디오에서, 기둥에 묶인 퍼포머가 움직이며 그려내는 궤적은 명백하게 그리드의 메타포인데, 그가 기둥과 반대로 달리며 만들어진 팽팽한 긴장, 하지만 평형 상태가 구심력과 원심력 자체를 시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드는 이 두 가지 힘을 통해 궤적의 안정 상태, 그러니까 자율성과 반복의 평형상태를 유지하려 하지만, 퍼포머가 반복해서 같은 궤적을 빗나간 궤적으로 덧쓰는 가운데 그 장소는 거듭 쓴 양피지, 팰럼세스트로 변한다. 이런 방식으로 원심력과 구심력 사이에서, 예컨대 퍼포머의 반구심력은 당기는 힘을 반원심력으로 변화시키며 일종의 힘의 잡종적 생태계를 만든다. 이렇게 그리드를 중층화 한다. 시대의 단 하나의 (삶의) 양식을 거부하면서 말이다.
확산과 응축의 긴장, 혹은 평형 상태라는 그리드의 조건은 남민지의 인스톨레이션에서 더욱 복잡성을 더한다. 추상 회화의 3차원 판본으로 보이는 사각형의 큰 방은 다시 직각으로 구획된 같은 크기의 작은 방으로 나뉘어지며, 정확히 그리드의 반복성을 표현한다. 이때 수직과 수평의 교차점, 정중심에 배치된 구 모양의 오브제는 각각의 구획된 방과 같은 색깔로 정확히 네 등분으로 칠해져 각 방과 함께 그야말로 전일성을 이룬다. 구는 그리드의 본질, 조화로움을 표상하는 쐐기돌이다. 하지만 남민지는 구에 움직임을 조심스레 더했다. 구가 회전함에 따라 본래 각 방과 조화를 이뤘을, 그 핵심일 중심점 자신이 그리드를 교란하기 시작한다. 단단하게 구획된 방의 안정성은 구의 회전으로 액체화되며 각 방은 서로 섞인다. 이런 작동은 방의 전일성을 깨뜨리며 그리드에 일종의 구멍을 뚫는다.
이슬기와 남민지가 작업에서 탐구했던 그리드의 이중적 힘은 임유정의 작업에서 스카이콩콩의 비유로 고스란히 시연된다. 스카이콩콩은 지구의 구심력, 즉 중력을 이겨내는 힘의 작용 속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의 긴장/평형 상태를 만들어내는 장치다. 스카이콩콩의 시스템은 이런 점에서 그리드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데, 비디오에서는 반복적으로 행위를 수행하는 가운데, 스카이콩콩이 되려 땅을 파고 들어가면서, 두 힘의 평형 상태가 깨지는 상황을 희극적이면서도 다소 멜랑콜리하게 보여준다. 임유정(그리고 이슬기와 남민지, 앞으로 보겠지만 허연화까지)에게 그리드의 반복성, 그리고 그로 인한 효과인 유일성을 해체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상승과 하강의 반복 가운데 평형 상태로부터의 이탈을 모색했던 테마는 ‘파도타기’와 ‘피에로 피리’에서 표현되는 어떤 엇박자를 통해 계속 반복되는 가운데, 또 변조된다. 특히 임유정의 경우 디지털 이미지 조작을 통해 그렇게 하는데, 실재와 가상이 모두 이미지로 화한 오늘날, 이미지를 통해 이미지를 교란시키기 위해 그렇게 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펴 본 작가들은 모두 이미지를 다루고 형상화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존재론적 양식이 오직 이미지라는 점에서, 그리고 작가 모두가 그것의 양태를 신중히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것을 일단의 유물론적 탐구라고 말해두고 싶다. 그리드는 이미지의 유물론적 탐구를 가리는 동시에 그 표면-이미지를 신화화한다. 예술가는 (이미 삶이 되어버린) 그 표면 위에서, 그것의 구조를 다시 쓰거나, 흔들거나, 폭로하며 맞선다.
그런 점에서 허연화의 조각과 인스톨레이션은 감추면서/드러내는 그리드의 이진법을 구조적인 감각으로 무대화한다. 쓰리디 모델링으로 만들어진 가상적인 이미지의 이종적 혼합체는 때로는 조각으로, 평편한 이미지로 만들어지는데, 이 모든 것들은 다시 종합적으로 구조도 안에서 매핑된다. 구조도가 이것들을 매끈하게 정련하려고 하는 그리드의 신화적 측면이라면, 병치된 이미지 콜라주들은 그것이 그 시작부터 매끈한 표면이 아니었음을 상기시킨다. 일련의 작업과 설치가 만들어내는 인터페이스는 그리드의 관념론과 유물론이 변증법적으로 충돌하는 자리라고 하겠다. (16.1.24)
<수평이동>(우정국, 2016)의 전시 서문으로 쓰였음. 보안여관에 보낸 원고를 약간 변형시켰다. 보안여관 원고는 아직 시간이 있다고 하니 다시 써야 할 듯하네.
2016년 1월 23일 토요일
2016년 1월 20일 수요일
백남준 <흥> 관람
교보에 갔다가 백남준 전시를 세종문화회관에서 봤다. 전시 제목이 <흥>인데 분명히 김남수 선생의 감각이 확실해서 갸웃했달까. 왜냐면 세종문화회관이고 김노암 선생이 큐레이터한 소릴 어디서 들어서. 근데 가이드북 보니까 공동 기획으로 나와 있다.
여튼. 전시는 거의 남수샘 독무대다. 시작부터 백남준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이 월텍스트로 펼쳐지고 마지막까지 피피티 프린트 해 놓은 것들이 향연을 벌인다. 디자인이 그걸 재빠르게 따라가지 못한 느낌이라 좀 아쉽다만.
백남준이 60-80년대 전성기였다고 하면, 그가 사용한 푸티지 필름은 다 그때 거니까, 그걸 보는 것도 그거 대로 되게 재밌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굉장히 멋쟁이였고 멋을 부리려고 많이 노력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게 정말 멋있다고 생각해서 심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보면 좀 웃기기도 하고 순진하고 풋풋해 보이기도 좀 병맛도 느껴지고 그렇다. 그런데 정말 진지해서 무시할 수도 없고 그때 당시엔 정말로 그게 힙했을 것이기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은밀히 재밌다고 그렇게 느꼈다. 오늘날의 멋쟁이는 어떨까? 타인의 눈을 더욱 의식하는 건 아닐까? 몰겠다.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비슷할지도 모른다.
나로선 무엇보다 위성 3부작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머스 커닝햄 춤의 발견. 내가 예전에 본 것은 대부분 머랄까 정말 현대무용스러운 것들이어서 좀 재미없었는데. 남준파이크와 함께 작업한 비디오에선 먼가 병신미가 철철 흘러 넘친달까 그래서 넘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샬럿 무어만 관련 비디오도 좋았다. 무어만도 백남준 못지 않게 또라이더라.
친절한 월텍스트와 설명 때문에 꼼꼼하게 본다면 그리 어렵지 않은 전시다. 하지만 전시 인터페이스의 문제는 좀 아쉽다. 마치 광케이블 시대에 90년대 피씨통신의 인터페이스와 마주한 느낌이다. 나는 싫어하진 않지만, 여튼 그것만큼은 좀 백남준스럽지 않았달까. 몰겠다. 어땠을까?
하나 더. 도록 대신 만든 가이드북은 무성의하다. 거의 김남수 선생 혼자서 다 한 것 같은데 <백남준의 귀환>을 떠올려 본다면 여러모로 아쉽다. 김남수 선생이 아쉽다는 게 아니라 그 반대다. 김남수만 빼놓고 모든 것이 이상하다.
2016년 1월 18일 월요일
플럭스 박스와 레디메이드
Dick Higgins has stated:
Fluxus started with the work, and then came together, applying the name Fluxus to work which already existed. It was as if it started in the middle of the situation, rather than at the beginning.라몬테 영이 선을 그어라고 쓰면 백남준이 머리에 먹을 묻혀서 종이에 선을 긋고 뭐 그런식으로. 플럭서스의 익명적이고 아나키스트적 면모다. 플럭서스의 이런 작법은 뒤샹이 자신의 레디메이드를 계속해서 재구현화했던 것과 꼭 같다. 뒤샹은 평생에 걸쳐 자신의 레디메이드를 계속 재활용하며 다른 작업으로 만드는 일을 했다. 작품이 유명해지면 분명히 그건 코드화될 운명에 처한다. 아무리 그 작업이 급진적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널리 알려지고 인정받는 순간 그 급진성이 클래식이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다 정말.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것을 계속해서 변화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시선에 포착되지 않도록, 그래서 얼어붙지 않도록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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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ux Year Box 2, c.1967, a Flux box edited and produced by George Maciunas, containing works by many early Fluxus artists. source: wikiped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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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cel Duchamp, Box in a Suitcase, 1941 |
[스크랩] 전 지구에 공명하는 고래의 노래 / 김남수
6500만 년 전, 혜성 충돌과 함께 중생대 공룡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신생대 포유류의 시대가 열린다. 이러한 종의 교체는지구사의 중요한 모멘텀이긴 하지만, 여기서 더욱 더 극적인 것은 고래의 출현이었다. 본래 포유류란 바다에서 시작된생명이 시간의 화살이 가는 방향을 따라 육지로 상륙하면서 탄생한, 진화의 결정체이다. 그런데 고래는 육지에서 다시바다로 되돌아가는 역행을 택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퇴화가 아닌가 싶지만, 학계의 일치된 견해는 진화가선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시간 역행’의 결과로 고래는 바다로 돌아가 깊이 잠수하는 동물이 되었다.
“나는 잠수하는 모든 이들을 사랑한다. 수면 가까이에서는 어떤 물고기든 헤엄칠 수 있지만 5마일 이상을 내려갈 수있는 것은 큰 고래뿐이다. 태초부터 사유의 잠수자들은 충혈된 눈을 하고 수면으로 돌아왔다.” — 허먼 멜빌, ‹서신› 중에서
고래는 무려 8킬로미터 심해로 잠수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고래는 그런 상태에서 노래를 한다. 고래가 부르는 20hz의 노래는 이론상 전 지구의 모든 바다에 있는 고래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한다. 가령, 남극에서 부른 노래가 알류산열도나 그린란드의 고래에게도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고래의 노래는 6개월 후에 다시 재회했을 때, 그대로 재현될수 있을 만큼 지능체의 유목민적 예술 형태를 띠고 있다. 이렇게 고래의 노래, 혹은 심해의 사유는 6500만 년 전의 ‘시간역행’의 산물로서 인류가 지구촌을 꿈꾸기 훨씬 이전에 이미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성했던 것이다. 역사의 시간을 지구가탄생한 시점부터 확장한다면,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고래일지도 모른다.
근대의 리콜
세상이 바뀌었다. 세상이 평평해졌다. 평평해졌다는 것은 유럽과 아시아의 저울추가 평행선을 이룬다는 것이다.1750년대 이후 줄곧 ‘근대’라는 개념은 아시아의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서구와 비서구(혹은 유럽과 나머지 세계)라는구도는 그 트라우마의 표현으로서 아무리 비서구가 열심히 ‘근대화’를 진행해도 서구가 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의 뉘앙스가깃들어 있다. 기계를 깎는 기계로서 공작기계의 발명, 모든 지식의 결집으로서 백과전서 35권 출간, 마네의 모더니즘 회화,밤의 정복으로서 전구의 발명, 증기선과 대포의 결합으로 진전된 군사력 등등으로 표상되는 서구 근대에, 비서구는점근선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비서구에게 근대의 위력은 그렇게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그런데 ‘근대’는 과대평가된 개념이라는 사실이 폭로되고 있다. 급기야 서구 내부에서도 ‘근대’의 특권화가 잘못된 것임을증명하는 사상가들이 출현하기에 이른다. 가령, 21세기의 가장 핫한 사상가 브뤼노 라투르는 ‘정화 과정’으로서 근대의기획을 설명하는 방식이 은밀하게도 ‘번역 과정’이라는 혼합적 하이브리드적 실천을 통해 수행되었음을 증명하고,실제로는 “근대는 없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의 논지는 ‘근대’라는 주술이 사실은 서구와 비서구로 구분한 권력관계로부터 움튼 것이었음을 방증한다.
현재의 지적 동향은 분명히 이렇게 의미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초의 세계는 여전히 ‘근대’의재구축 작업으로 가득하다. 최근의 ‹애니미즘› 전시나 집단무의식의 사용 역시 ‘근대’라는 기원 신화를 새롭게 바라보는정도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여전히 세계가 유럽중심주의의 자장 안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문명과 야만, 근대와전근대, 이성과 비이성, 역사와 역사 부재라는 이분법의 스키마로 가득한 세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예술극장은 이렇게 ‘근대라는 환영’이 자욱한 철로 위를 지나가고 있다. 그 위에서 아시아는 물론 유럽의 다양한문화들이 반대편에서 함께 달리고 있음을 바라본다. 수많은 문화적 다양성이 존재하는 세계의 여러 마음들이 하나로모아지려면 ‘서로가 함께 달리고 있음’을 깨닫는 상대론적 관점이 필요하다. 아울러 권력과 지배로 점철된 근대의패러다임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아시아예술극장의 위상은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움튼 것이다.
아시아예술극장의 위상
아시아예술극장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주축 기관으로서 아시아의 동시대 공연예술을 창제작하고 유통시키는 역할을맡는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 문화의 특이성을 통해 담론과 이론을 생산하여 아시아가 세계 공연예술의 새로운 흐름을형성해나가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아시아예술극장은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서구와 비서구의 도식 대신에 유럽과 아시아가 대칭적 관점에서마주보는 형상을 새롭게 수용하여 ‘유라시아’라는 개념의 재발명을 꾀할 것이다. 단지 아시아만의 내부적 나르시시즘에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유럽과의 긴밀한 교섭과 반영상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려면 이러한 개념이 긴요하다는판단에서이다. 우리는 아시아와 유럽의 공연예술계와 지성이 이러한 ‘유라시아’라는 구도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함께’만들어나가는 세계를 지향한다.
아시아예술극장은 공연예술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예술계가 즐거운 소문으로 들썩거리는, 그래서 소문의 붐이 돌림병처럼전파되고 피드백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아연한 활기, 예측불허의 흥분감과 현장의 들끓는 정동(情動), 그러나 그럼에도불구하고 한편에는 예술 실행의 과정과 개념을 십분 보고하고 생산할 수 있는 냉철한 지성의 작용… 지금까지 유럽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이 모든 과정이 아시아라는 범주, 나아가 유라시아라는 범주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것이 아시아예술극장의 역할인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에서 진행되어온 대부분의 국가 주도의 예술 프로젝트들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측면이 강했던 반면, 이사업은 그 지향점을 국제적인 측면에 맞추고 있다. 한국과 아시아, 아시아와 아시아, 그리고 아시아와 유럽이라는 여러층위를 복합적으로 다루는 예술 실행에 중점을 두고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사업은 국가가 주도하는 것이긴하지만, 근대적 관점으로서의 국가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성격도 아울러 갖고 있다. 아시아예술극장이 국가의수도가 아닌, 광주라고 하는 지방도시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과 맞닿아 있다. 국가적 개념으로서 다른아시아와 수직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영토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닌, 관계망을 중요시하는 국가 주도의 예술 프로젝트는 이제까지는 없었다.따라서 그 비전을 설계하고 동시대의 모든 공연예술계와 지성에 전파하는 일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했다.
지구사로의 ‘관점 이동’: 유라시아의 재발명
아시아예술극장은 전혀 낯선 영역으로 가기 위한 ‘관점의 이동’이 필요한데. 우리가 선택한 것은 지구사라는 새로운역사적 패러다임이다. 지구사라는 관점은 글로벌화 이후의 평평한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서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관계를대칭적인 구도로 바라보는 대안적인 역사관을 열어준다.
20세기의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그리고 21세기의 9.11 사태 등은 직접적으로 역사를 보는 관점을새로운 흐름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헤게모니 국가로서 미국의 하향곡선은 눈에 띄게 진전되기 시작했고, 블록화된유럽연합의 새로운 부활은 중국이나 일본 같은 일국의 국가에 대응하는 성격이 강했다. 무엇보다 개발도상국에서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시작한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약진은 기존의 완강했던 서구 중심의 세계 질서를 요동치게 했다.1980년대 이후, 세계의 하부구조는 완연히 변동기로 접어들었다. 이렇게 되자, 역사를 보는 눈 역시 이전과는 다르게새로운 구도로 재편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시대적 요청이 일어났다.
지구사는 바로 이러한 세계사적 신질서를 반영하고, 기존의 탈식민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다루는 길을 제시하면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유럽 중심의 지배적 문화라는 소위 ‘근대’를 해체하고자 했던탈식민주의는 20세기 중후반부터 각광을 받아오고 있으나, 결국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근대’를 지나치게결정론적으로 전제하고, 그 우월성의 식민화 전략에 대해서 탈주하려는 태도가 항상 ‘근대’의 재환기로 귀결되기 때문에그러하다. 결국 ‘탈근대’라는 도돌이표를 찍으면서 공회전을 거듭하는 시지푸스의 운명인 것이다.
지구사는 “시간의 규모에 걸맞게 역사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시도”(데이비드 크리스천)로서 이러한 문제를 돌파하고자한다. “거대하지만 일관성 있는 패턴들에 초점을 맞춰서 역사에 접근”(브루스 매즐리시)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으로역사를 다시 바라보게 되자, 지금까지의 세계사는 ‘서구 근대’라는 특정 시기에 초점을 맞춰 기술된 ‘지역사’에 불과했다고성찰하기 시작했다. 또한 서구 근대의 산물인 ‘과학적 합리성’에 의해 배제되었던 시간과 공간들도 역사 연구의 영역으로새롭게 들어오게 되었다.
역사 기술의 범위는 시공간적으로 ‘지구적 층위’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럼으로써 자연과 인간이 상호 교류한 흔적들이역사의 표층으로 부상했으며, 민족국가의 지리적 영역에 의해 인위적으로 갇혀 있었던 관점 역시 개방되었다.인간중심주의와 근대 사회의 총체적 위기에 대한 성찰적 인식으로서 생태사(ecological history)가 출현했으며,민족국가를 넘어서 상호 연결성을 갖는 포괄적이고도 상호 대칭적인 지역 단위(예를 들어, 아프로-유라시아)로서 역사를사고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구사는 교류와 수렴(convergence) 그리고 분기(divergence)의 메커니즘에 그 방법론을세우는데, 이는 문명 교류의 쌍방향적인 역동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지구사가들은 최근 몇 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왜곡을 넘어서서, 제국들과 헤게모니들이 남긴 피상적 구성물들을꿰뚫어보면서, 인류 조건들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 과거에 인류의 운명을 만들었고, 미래 인류의 운명을좌우할 동력에 대한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 ‹글로벌히스토리란 무엇인가› 중에서
아시아예술극장은 지구사의 패러다임에 의한 ‘관점 이동’의 실행으로서 ‘유라시아’라는 개념을 설정했다. 이는 유럽과아시아의 대칭적 관계를 표상한다. 우리는 그 지리적 개념 위에서 유럽과 아시아가 ‘자기성과 대타성의키아즘(chiasme)적 교잡’을 일으키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꿈꾼다.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키아즘은 몸과 몸이 만나 상호 체감하는 어떤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느낀다’는 것은 보통‘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성이라는 부분과 대타성―내가 아닌 상대하고 마주봤을 때의 반향—이라는 부분이접촉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일 때, 타자에 대한 감각은 엑스터시에 가깝다. 바깥에 있는 것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일찍이 고대의 유라시아 기마 유목민은 인간과 말을 일체화시킬 수 있는 ‘등자’를 발명했다.(이것은 앞서 기술한 바대로,지구사가 주목하는 교류와 수렴 그리고 분기의 메커니즘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말 잔등 위에 올라탄 기마 유목민은그 최첨단의 테크놀로지에 의해 말과 인간 그 어느 종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제3의 종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13세기에 칭기즈칸을 만나 인류 최초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말에서 내리지 않고 끊임없이 속도감을 체감하면서 달려가는 몽골의 기마 궁수는 움직이는 표적을 향해 활을 당긴다.달리고 있는 말 위에서의 관점과 움직이는 표적의 관점이 순간적으로 교차하면서 만들어지는 제3의 관점, 즉 그 관점들의키아즘으로 발생하는 간극에서 행위가 이뤄지는 것이다. 기마 궁수는 두 개의 속도를 가늠하여 시각적인 것을 넘어선미래의 공간으로 화살을 보내는데, 이것이 칭기즈칸의 몽골세계제국을 가능케 한 장면이다. 한때 서구에겐 공포와 경악의대상이었던 칭기즈칸이 공교롭게도 유라시아라는 공간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를 포괄하는 연결망을탄생시킨 것이다.
아시아예술극장이 설정한 ‘유라시아’라는 개념은 그러한 모티프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순히 아시아 지역에만 국한하고있는 것이 아닌, 서구 유럽까지 포괄하는 것으로서 유라시아인 것이다. 오늘날의 공연예술은 이 대지 위애서 각각의문화적 특이성이 상호 존중받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문화 간의 연결을 이뤄내는 중요한 매개로서작용하고 있다. 이제 아시아예술극장은 21세기의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공연예술로써 유라시아를 횡단하여 아시아와아시아가, 아시아와 유럽이 공존하고 연대하는 장을 열고자 한다. 이는 하늘 아래 다문화, 다종교, 다인종이 어우러져,헝가리 평원에서부터 중앙유라시아를 거쳐 인도양과 동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에 평화가 깃들었던 시대의 재요청이기도하다. 그리고 그것은 아시아인으로서 우리 내부에 잠재된 무엇, 즉 아시아 정신의 요체이기도 하다.
진정한 생각(혹은 도래할 예술)은 ‘시간의 잠수’를 통한 지구사적인 시도를 할 때 출현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주어진전제로부터 이탈하고자 하는 행위가 선행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시간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지 못한다는 믿음이우리에겐 있다. 20세기의 많은 철학자들이 신세를 졌던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한 구절처럼 지금은 “시간의 지도리가어긋나 있는(The time is out of joint)” 상태이다.
한 무리의 포유류가 바다로 뛰어들어 다시 수생동물인 고래로 역행하는 것처럼, 이 벗겨져버린 시간의 지도리가 과거와미래를 개방하기 시작했음을 우리는 감지하고 있다.
2016년 1월 17일 일요일
취권
밥하기 귀찮을 땐 밖에서 밥을 사먹는 편인데, 어저께인가? 앉아서 해장국을 사먹다가 시야에 놓인 텔레비전을 정신 없이 쳐다보았다. 무슨 형민인가, 주잡스러운 역할을 자주 연기하는 배우가 소림사에가서 무술을 배워 마지막 테스트를 받는 장면이었다. 원숭이 봉술, 취권 등 여러가지를 연습한 모양인데, 내가 봤을 땐 취권 심사 날이었나보다. 근데 그 배우가 너무 잘하고 또 표정 같은 거가 취권이랑 너무 잘 어울려서, 푹 빠져서 봤다. 재밌더라.
한편으로 들었던 생각은 무술이란게 결국 싸워서 이기기 위한 방법일 텐데, 저런 허례허식 동작이 불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뭔가 '취'권이기 때문에 취한 척을 하고 있달까? 취한 제스쳐 한 번 해보려다가 얻어 맞는 거는 아닌가? 싶기도 했다. 취한 척한다고 진짜 취한 것도 아니고... 잘은 모르지만 이소룡의 절권도가 그런 불필요한 동작을 최소화한 무술이라고 들었다. 그런 점에서.
또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취권이든 원숭이권이든 그런 흉내를 낸다고 해서 취하거나 원숭이가 되는 것도 아니지만서도, 행동을 흉내내려고 하면서 자신이 실제 그것이 된 것처럼 몰입하고, 착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그것이 정말 되어버릴 수 있다는 가설. 만약 그렇다면 여타 공격기술보다도, 취한 흉내를 내는 동작이야말로 취권의 백미가 아니겠는가. 리터럴하게도 취해야 진짜 취권이지!
두 경우의 합에서 마지막 가설이 나온다. 가장 취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취'권'이다. 하지만 정말로 취한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또 취한 것이기도 하다. 허허실실. 술을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은 경우랄까? 정말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취권이라 불러 볼만하다는 것. 그러니까 '양가성'이라는 것.
두 경우의 합에서 마지막 가설이 나온다. 가장 취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취'권'이다. 하지만 정말로 취한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또 취한 것이기도 하다. 허허실실. 술을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은 경우랄까? 정말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취권이라 불러 볼만하다는 것. 그러니까 '양가성'이라는 것.
취권은 사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권법(?)이다. 김동률의 <취중진담>이란 노래는 취권이다. 술에 취했을 때야말로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잘못됐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생기니 궁극의 필살기인 셈다. 그리고 뭔가를 결정하거나 실행하기 힘들 때, 스트레스가 쌓여 괴로울 때 술을 마시고 나면 좀 편해진달까, 그런 점에서도 우리는 이미 취권의 도사일지도 모른다.
한편 취권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 종종 새누리당 정치인들이 그런데, 술먹고 아나운서나 기자 허벅지를 쓰다듬었다느니, 기억이 안 난다느니 하며 스리슬쩍 넘어가는 취권을 쓰기도 한다.
올빼미 생활
이것저것 일이 많이 밀려서 번역 마감을 놓쳤다. 그 와중에 잘 못마시는 술도 몇 번 진탕 마셨다. 무책임하다는 걸 알고 있는데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밤을 새서 가까스로 2교를 끝낸 후 송고했다. 자려고 누웠는데, 항상 그렇듯 뭔가를 끝내놓고 나면 후련하다기보단 텅빈 느낌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뭔가 끄적끄적 거리게 되네. 그러고 보면 글쓰기의 즐거움이야 말로 다른 말로 백색공포증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무한히 이어지는 문장. 빈 곳을 메우기 위한 단어의 나열. 하지만 절대로 전일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들. 이렇게 생각하면 좀 애처롭기도 하다.
보안여관에 넘길 글을 자고 일어나서 써야한다. 박찬경 선생님 메일은 답신도 아직 못했다. 아 뭔가 뒤죽박죽! 책상머리에 그만 앉아있었으면 좋겠다. 밥먹는 것도 까먹고 심지어 지겨워서 담배만 피우게 된다. 담배는 끊고 싶다. 이젠 피고 나면 기분이 별로다. 뭔가 액티브한 일을 하고 싶다. 운동도 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집앞 헬스라도 생각만 하지말고 등록해야 겠다. 자전거도 타고 싶다. 옛날엔 곧 잘 타고 다녔는데 안 탄지도 오래됐다.
2016년 1월 14일 목요일
메모
몇몇 작가를 만났다. 어떤 전시를 위한 모임이었고 나는 여기에 부쳐 글을 한 편 쓰기로 했다. 처음 보는 작가들이어서 한 명 한 명 앞에 놓고 작업을 봐야했다. 나는 집중도 면에서 일 대 일 인터뷰를 여러모로 선호하는 편이지만, 뭔가 그런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 했던 것 같다. 여튼 본의 아니게 네 명 앞에서 면접보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서 좀 진이 빠졌다.
모두가 머랄까 매우 현실적인 문제를 작업에 풀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여러가지 다양한 차원으로 이야기 되고 있었지만 거칠게 말해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불평등, 권력에 대한 비판 의식이 이들에게 큰 이슈였다. 젊은 작가들 중 많은 이들이 그런 작업을 할 것이다. 시대가 시대다 보니. 컨셉츄얼이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예술가는 경험을 표현하는 사람이란 생각을 잠깐 했다. 아니,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여하튼 이런 이슈를 예술가가 다룬다고 했을 때 모범사례처럼 떠오르는 작업들이 있다. '급진적'이고 '비판적'이고 '저항적'이고 '전복적'이고 '혁명적'이어야 한다. '현장성'이 중요하고 '효과'가 중요하다. 예술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런 작업들은 분명히 있다. 나는 이런 작업에 대해 망설임 없이 경의를 표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 만난 네 명의 작가들이 가지는 현실에 대한 태도, 그것을 비판적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면 그런 비판적 태도는 몹시 기묘한 것이었다. 이들은 현실에 대한 저항을 비교적 안온한 작업에서 할 뿐이다. 그것도 굉장히 감성적이고 이미저리하며, 한편으로 상징적이다. 추상 조각-설치부터 내러티브 비디오까지, 모든 것이 그랬다. 소위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일 수 있는 가상적 부유물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들의 작업은 싫든 좋든 삶 속에서 분리된 어떤 예술처럼 보인다. 혹은 일종의 시간차와 거리를 둔다. (이것을 상징주의라고 한다면 이 문제는 재현의 문제와 조금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참고할 것.)
이 부유물들을 두고 작가들이 현실 비평적이라고 생각했다면, 나는 그런 이유가 몹시 궁금하다. 그걸 부정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예술가들이 느낀다면 그런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현대적 삶을 산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모아 작업을 제작한다. 그래서 작가가 만약 이런 이미저리한 것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면, 만약 그렇다면 이런 이미저리한 것들만이 정말로 현대적이고, 현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또한 생각해봐야 한다. 때문에 진정으로 '비판'의 모드를 전환할 필요를 느낀다.
모두가 머랄까 매우 현실적인 문제를 작업에 풀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여러가지 다양한 차원으로 이야기 되고 있었지만 거칠게 말해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불평등, 권력에 대한 비판 의식이 이들에게 큰 이슈였다. 젊은 작가들 중 많은 이들이 그런 작업을 할 것이다. 시대가 시대다 보니. 컨셉츄얼이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예술가는 경험을 표현하는 사람이란 생각을 잠깐 했다. 아니,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여하튼 이런 이슈를 예술가가 다룬다고 했을 때 모범사례처럼 떠오르는 작업들이 있다. '급진적'이고 '비판적'이고 '저항적'이고 '전복적'이고 '혁명적'이어야 한다. '현장성'이 중요하고 '효과'가 중요하다. 예술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런 작업들은 분명히 있다. 나는 이런 작업에 대해 망설임 없이 경의를 표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 만난 네 명의 작가들이 가지는 현실에 대한 태도, 그것을 비판적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면 그런 비판적 태도는 몹시 기묘한 것이었다. 이들은 현실에 대한 저항을 비교적 안온한 작업에서 할 뿐이다. 그것도 굉장히 감성적이고 이미저리하며, 한편으로 상징적이다. 추상 조각-설치부터 내러티브 비디오까지, 모든 것이 그랬다. 소위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일 수 있는 가상적 부유물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들의 작업은 싫든 좋든 삶 속에서 분리된 어떤 예술처럼 보인다. 혹은 일종의 시간차와 거리를 둔다. (이것을 상징주의라고 한다면 이 문제는 재현의 문제와 조금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참고할 것.)
이 부유물들을 두고 작가들이 현실 비평적이라고 생각했다면, 나는 그런 이유가 몹시 궁금하다. 그걸 부정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예술가들이 느낀다면 그런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현대적 삶을 산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모아 작업을 제작한다. 그래서 작가가 만약 이런 이미저리한 것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면, 만약 그렇다면 이런 이미저리한 것들만이 정말로 현대적이고, 현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또한 생각해봐야 한다. 때문에 진정으로 '비판'의 모드를 전환할 필요를 느낀다.
디자인 변동
전시, 그러니까 예술가의 창작물을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생각해봤을 때, 대단하지 않지만서도 다소 흥미로운 변동이 일어났다. 옛날이라고 표현하면 한국에선 10년 좀 넘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라고 하겠지만, 여하튼, 언젠가부터 예술가들이 전시 홍보 포스터에 작품 사진이 아니라 전시 제목 그 자체를 그래픽적으로 디자인해 박아 넣는 것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디자인 그 자체가 전시의 아이덴티티를 상당 부분 결정하게 되었으며, 또 언젠가부터 그것을 누가 디자인했느냐가 중요한 이슈 중 하나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덩달아 전시 설계자 designer인 큐레이터가 등장해 예술 작품과 예술가를 포함, 예술계를 쥐락펴락하기 시작했으며, 패션 문화와 유사하게, 전시 공간은 기획한 전시만큼이나 브랜드 로고로 아이덴티티 구축에 힘쓰기 시작했다. 나아가 그런 아이덴티티는 (마치 브랜드 상품을 사용하거나 입는 것처럼) 거기서 열리는 전시의 성격을 강력하게 규정하게 됐다.
2016년 1월 13일 수요일
한국의 극사실주의 회화
조금 더 정리해봐야 겠지만 한국의 극사실주의 회화는 보들레르의 "현대적 삶의 화가"로부터 시작해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과 데리다의 "회화 속의 진리"를 지나 T.J. 클라크의 "현대적 삶의 회화"을 경유해 엘레자베스 수스먼의 "라스트 픽쳐 쇼"나 데이비드 조셀릿의 "모던 레저"로 간다. 조금 이상한 연결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생각한다.
2016년 1월 8일 금요일
2016년 1월 7일 목요일
옥토버 100호 라운드테이블
2002년 옥토버 100호 발간 기념 '라운드 테이블'을 보면 비평의 위기가 역시 주제인데, 이때 비평이라 하면 특히 70-80년대 옥토버 비평을 의미할 것이다. 애꿎은 아트포럼을 대부분 욕하긴 하지만...
조슬릿: 부클로 등 옥토버가 아카데미화되기 시작했을 때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카데미화 되는 것이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얼마간 결론을 내렸다. 이론에 종사한 많은 엄격한 비평가는 아카데미로 이동했다. 옥토버 모든 사람이 아카데미 밖에서부터 시자했지만 말이다. 맞나?
베이커: 전혀. 로잘린드는 아니다.
조슬릿: 근데 얼마간 그건 말이지, 로잘린드 케이스는 저널리스틱 비평과 아카데믹한 것을 병행했던 거지.
몰스워스: 그래서, 비평을 읽는 관객이 줄어든 것이 비평의 아카데미화에 관련있다고? 그래서 지금은 대학생만 읽는다고?
조슬릿: 음, <옥토버> 에디터의 원년 세대에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왜냐면 당신 모두는 비평가에서 아카데미로 넘어갔잖아.
스토어: 전부 그렇진 않다. 몇몇은 여전히 프리랜서 필자나 에디터에서 일하고 미술관, 제도에서 일하기도 한다. 비영리 공간이다. 모든 길이 대학으로 통한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넌 정말 특정한 타입의 비평담론만을 이야기하고 있구나.
조슬릿: 응, 랍. 난 그래.
...
조슬릿: 다른 방법으로 글을 써서 다른 독자에게 설명하는 방법도 있지. 예를 들어 일반 독자를 위해 책을 쓰는 건 아카데믹 커리어에겐 최상의 선택은 아니야. 그래도 전후 시기 새로운 독서를 제한하는 건 중요하지. 비전문가나 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말이야. 아카데미가 일반 수용자를 멸시하는 건 심각해. ... 그 결과 독자쉽이 협소해지지. 어떤 수준에서 우린 어디에 투자해야하고 집중해야하는지 반드시 생각야해. 이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포스터: 옥토버는 더욱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으로 변했다. 큐레이터의 등장과 포스터모더니즘의 쇄락과 함께. ... 우리가 옥토버의 비평적 기능을 재요청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우리가 할 수 있을진 나는 모르겠지만...
메이어: 수용자 입장에서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실천의 입장에서 할 수 있겠지. 근데 그럴려면 말이야 니가 신봉하는 실천이나 80년대 초반 실천을 먼저 해결해야하지 않을까...
여기서도 신세대 구세대가 좀 나뉘는데 데이빗 조슬릿 같은 경우 신세대 축에 속한다. 구세대의 발언들을 보면 아직까지 제도비판에서 못헤어나오고 있다는 게 명확하달까. 여기서 벤자민 부클로나 할 포스터의 경우 여전히 했던 이야기 또 하면서 포스트 모던 제도비판이 실효성이 없어진 것 맞지만 그대신, 고고학적 발굴의 장소가 되었고, 페러다임 마킹 기능이 있고, 기억술의 기능이 있다는 식으로 실드를 친다. 이건 새로운 세대의 방법이나 다르지 않다고. 애꿎은 큐레이터를 원망한다. 큐레이터 땜에 옥토버가 망하고 있다고 비평이 망하고 있다고...비평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고... 그랬더니 메이어가 80년대 방법론이나 좀 집어 치우라고 그러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받아친다.
포스트모던 비평에서 미술관은 부르주아의 공론의 장이었다. 그러니까 부르주아라는 미술의 관객이 엄연히 있었다. 지금은 그런 미술의 관객이 사라졌다. 어쩌면 하향평준화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지만...여튼 문자의 독해력 자체가 의미없어지고 있다. 따라서 비평은 힘을 잃고 미술도 힘을 잃는다. 조슬릿의 경우 일반 관객을 개발해야 한다는 쪽에 가깝다. 좀더 대중적인 글쓰기를 해야한단다. 부클로 같은 사람이 학자연 하는 것에 좀 심기 불편해 하는 눈치다.
조슬릿: 부클로 등 옥토버가 아카데미화되기 시작했을 때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카데미화 되는 것이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얼마간 결론을 내렸다. 이론에 종사한 많은 엄격한 비평가는 아카데미로 이동했다. 옥토버 모든 사람이 아카데미 밖에서부터 시자했지만 말이다. 맞나?
베이커: 전혀. 로잘린드는 아니다.
조슬릿: 근데 얼마간 그건 말이지, 로잘린드 케이스는 저널리스틱 비평과 아카데믹한 것을 병행했던 거지.
몰스워스: 그래서, 비평을 읽는 관객이 줄어든 것이 비평의 아카데미화에 관련있다고? 그래서 지금은 대학생만 읽는다고?
조슬릿: 음, <옥토버> 에디터의 원년 세대에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왜냐면 당신 모두는 비평가에서 아카데미로 넘어갔잖아.
스토어: 전부 그렇진 않다. 몇몇은 여전히 프리랜서 필자나 에디터에서 일하고 미술관, 제도에서 일하기도 한다. 비영리 공간이다. 모든 길이 대학으로 통한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넌 정말 특정한 타입의 비평담론만을 이야기하고 있구나.
조슬릿: 응, 랍. 난 그래.
...
조슬릿: 다른 방법으로 글을 써서 다른 독자에게 설명하는 방법도 있지. 예를 들어 일반 독자를 위해 책을 쓰는 건 아카데믹 커리어에겐 최상의 선택은 아니야. 그래도 전후 시기 새로운 독서를 제한하는 건 중요하지. 비전문가나 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말이야. 아카데미가 일반 수용자를 멸시하는 건 심각해. ... 그 결과 독자쉽이 협소해지지. 어떤 수준에서 우린 어디에 투자해야하고 집중해야하는지 반드시 생각야해. 이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포스터: 옥토버는 더욱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으로 변했다. 큐레이터의 등장과 포스터모더니즘의 쇄락과 함께. ... 우리가 옥토버의 비평적 기능을 재요청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우리가 할 수 있을진 나는 모르겠지만...
메이어: 수용자 입장에서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실천의 입장에서 할 수 있겠지. 근데 그럴려면 말이야 니가 신봉하는 실천이나 80년대 초반 실천을 먼저 해결해야하지 않을까...
2016년 1월 6일 수요일
몇가지 링크
http://viumgraphy.tistory.com/3
http://soobu.tistory.com/ entry/%ED%9A%8C%ED%99%94-%ED% 94%84%EB%9E%91%EC%8A%A4-%ED% 9A%8C%ED%99%94%EC%9D%98-%EC% 9C%A0%EC%82%AC%EC%84%B1-%EC% 9D%B8%ED%84%B0%EB%B7%B0-%EC% A1%B0-%ED%94%BC%ED%94%84-%EC% 99%80-%EA%B7%B8%EC%9B%A8%EB% 82%98%EC%97%98-%EC%BC%88%EB% A6%AC%EB%91%90#recentComments
http://soobu.tistory.com/
2016년 1월 4일 월요일
quotes from the Job.
The Dreammachine . . . is a pierced cylinder, which whirls around a light source to produce stroboscopic “flicker” over the closed eyelids of the viewer. “Flicker” at precise rates per second produces radical change in the “alpha” or scanning rhythms of the brain as shown by electroencephalographic research. Subjects report dazzling lights of unearthly brilliance and color, developing in magnitude and complexity of pattern as long as the stimulation lasts. When the flicker is in phase with the subject’s alpha rhythms he sees extending areas of colored pattern which develop throughout the entire visual field, 360 degrees of hallucinatory vision in which constellations of images appear. Elaborate geometric constructions of incredible intricacy build up from multidimensional mosaic into living fireballs like the mandalas of Eastern mysticism or resolve momentarily into apparently individual images and powerfully dramatic scenes like brightly colored dreams. . . . “Flicker” is a threshold experience of induced experience produced by altering the speed of light to accommodate the maximum range of our alpha rhythms. “Flicker” creates a dazzling multiplicity of images in constantly altering relationships which makes the “collages” and “assemblages” of so-called “modern” art appear utterly ineffectual and slow. Art history is no longer being created. Art history as the enumeration of individual images ended with the direct introduction of light as the principal agents in the creation of images which have become infinitely multiple, complex and all-pervading. The comet is Light.
- Burroughs, William S. The Job. New York: Grove, 1974.
드림머신 ... 은 꿰뚫린 실린더다. 실린더는 빛의 소스를 돌며 보는자의 감긴 눈꺼풀 위로 발광하는 “깜빡임”을 생산한다. 정밀한 초단위의 “깜빡임”은 “알파”의 급진적인 변화나 뇌파기록장치 연구에서 볼 수 있듯이 뇌의 스캐닝 리듬을 생산한다. 주체는 비현실적인 광휘와 색깔의 현기증나는 빛을 리포트한다. 자극이 계속되는 한 거대하고 복잡한 패턴을 디벨로핑하면서 말이다. 주체의 알파리듬의 프레이즈에 깜빡임이 존재할 때, 주체는 확장된 컬러 패턴의 영역을 본다. 그 컬러 패턴은 시각적 장 전반, 360도의 현기증나는 시각에서 이미지의 성좌가 돌출됨을 통해 계발된다. ... “깜빡임”은 우리의 알파 리듬을 최대치로 수용하기 위해 빛의 스피드를 바꿈으로써 생산된, 경험의 문지방 경험이다. “깜빡임”은 관계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면서 현기증 나는 이미지의 다양성을 창조했다. 그것은 소위 “모던” 예술이 강조했던 “콜라주”와 “아상블라주”를 완전히 효과적이지 않을뿐더러 느리게 만들었다. 개별 이미지를 나열해 놓은 목록인 미술사는 끝나버렸다. 무한히 복잡 다양하고 만연해진 이미지 창조에 있어 빛을 가장 중요한 행위자agent로 직접 도입하게 되면서 말이다. 혜성은 빛이다.
드림머신 ... 은 꿰뚫린 실린더다. 실린더는 빛의 소스를 돌며 보는자의 감긴 눈꺼풀 위로 발광하는 “깜빡임”을 생산한다. 정밀한 초단위의 “깜빡임”은 “알파”의 급진적인 변화나 뇌파기록장치 연구에서 볼 수 있듯이 뇌의 스캐닝 리듬을 생산한다. 주체는 비현실적인 광휘와 색깔의 현기증나는 빛을 리포트한다. 자극이 계속되는 한 거대하고 복잡한 패턴을 디벨로핑하면서 말이다. 주체의 알파리듬의 프레이즈에 깜빡임이 존재할 때, 주체는 확장된 컬러 패턴의 영역을 본다. 그 컬러 패턴은 시각적 장 전반, 360도의 현기증나는 시각에서 이미지의 성좌가 돌출됨을 통해 계발된다. ... “깜빡임”은 우리의 알파 리듬을 최대치로 수용하기 위해 빛의 스피드를 바꿈으로써 생산된, 경험의 문지방 경험이다. “깜빡임”은 관계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면서 현기증 나는 이미지의 다양성을 창조했다. 그것은 소위 “모던” 예술이 강조했던 “콜라주”와 “아상블라주”를 완전히 효과적이지 않을뿐더러 느리게 만들었다. 개별 이미지를 나열해 놓은 목록인 미술사는 끝나버렸다. 무한히 복잡 다양하고 만연해진 이미지 창조에 있어 빛을 가장 중요한 행위자agent로 직접 도입하게 되면서 말이다. 혜성은 빛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