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서 비디오아트를 전공한 전수현은 누구나 영상을 만들던 시기 영상을 열심히 찍다가 최근 조각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했다. 비미술적 재료를 가지고 여성의 신체를 절단하거나 과장하거나 서로 붙인, 신체라기보다 사물에 가까운 형상의 비정형 오브제를 만들고 약간의 움직임을 가미하는 데 골몰했다. 이런 비체(abject)적 형태에 붙일 수 있는 그럴싸해 보이는 해설은 사실 리타가 이미래의 《캐리어즈(Carriers)》(2020)전을 가지고 이미 몇 년 전에 했다.1) 이 글에서 이미래를 전수현으로 바꿔 읽어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여기서는 짧은 생각 하나만을 덧붙이고 싶다. 어떤 반복에 관한 것이다.
대략 2017년 두산갤러리 《사물들: 조각적 시도》를 기점으로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에서는 조각이 새삼스럽게 주목 받는다. 조각가 같은, 옛날 같았으면 몹시 촌스러워 아무도 쓰지 않았을 것 같은 그 칭호를 너도 나도 쓰기 시작했다. (이건 ‘화가’도 마찬가지다.) ‘물(物)’이란 낱말이 심심찮게 끼어들었다. 항상 동시대미술의 최전선을 토큰으로 사용하고 싶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는 재빨리 《조각충동》(2022)으로 그 현상을 빨아들였다. 전수현이 조각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때쯤이다. 전수현은 조소를 전공하지 않았고, 《조각충동》에서 작가도 상당수가 그랬다. 그러니까 전공을 가리지 않고 젊은 작가에게서 포착되는 조각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것을 ‘조각적’이라고 칭하는 분위기는 어떤 면에서 신선하고 다른 면에서 이상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북서울시립미술관에서 조각충동에 관한 포럼을 열었을 때, 거기서 우리가 확인했던 충격적인 사실은, 사실은 젊은 작가가 아무도 “조각”을 의식하지 않고 작업한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 아무도 조각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미술 쫌 한다는 젊은이들의 온 관심을 다 쏠리게 했던 전시 토론회는 아... 이것 밖에 안 되나 하며 누군가에게 분명 실망을 안겼을 것이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대체 여기 펼쳐진 일련의 흐름은 무엇일까?
권시우의 「회화의 “조각 충동”을 기념하며」(2022)는 여러모로 참고되는 글이다.2) 권시우는 조각충동이 좀비 형식주의 회화로부터 그렇게 됐다고 본다.3) 좀비 형식주의란 무엇인가? 제리 살츠(Jerry Saltz)가 비판했듯이, 어떤 형식을 본래 시공간적 맥락과 상관없이 무절제하게 아름다운 이미지로 소비하는 레트로매니악한 형식이다.4) 권시우가 염두에 두는 좀비 형식주의는 물론 2000년대를 풍미했던 북미, 그리고 2010년대 중후반 한국에 출몰했던 젊은 작가의 회화적 경향을 지칭하는 것일 테다. 한국의 젊은 화가가 과거의 회화, 특히 추상회화를 참조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한국의 근대기 회화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만약 영미권과 한국에서 똑같이 좀비 형식주의가 있다고 했을 때, 문제의 기원은 똑같이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urg)로 수렴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새로운 조각, 혹은 좀비 형식주의는 한국을 건너 뛰고 뉴욕의 모더니즘, 그러니까 추상미술의 전통을 참조할 수 있을까?
한국 좀비의 기원이 미국의 그린버그라는 사실이 가능할까? 여기서 우리가 영미권의 좀비 형식주의가 가진 최소한의 좀비적 기원에서조차 사실은 탈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은 ‘술식확장’이다. 가령, 한국미술 전체가 항상 좀비 형식주의였다는 것은 어떨까?―한국의 피카소, 한국의 헨리 무어, 한국의 루오, 한국의 고갱, 한국적 모더니즘, 한국적 미니멀리즘 등등에 붙는 '한국적'이란 관형사를 떠올려 보라. 과거에 어디선가 작가 박찬경은 한국엔 애초에 전통이 없거나 심하게 굴절되어 있으니 사실은 어떤 전통이든 가능하단 말을 한 적 있다. 이처럼, 만약 한국의 좀비 형식주의에서 전통의 문제가 사실은 ‘전통 없음’으로부터 비롯된 아이러니한 자유의 문제라면, 애초에 현재 한국의 작가들이 골몰하고 있는 조각이란 어젠더의 출처를 추궁하는 것은 그리 실효성이 없는 짓일 것이다.
이는 과격하게 말하자면 시체의 정치학을 상상하게 한다. 합리적 이성을 박탈당한 이들은, 그러니까 좀비는 생각하지 않는 대신 살아 있는 것을 물어뜯고 전염시킨다. 살아 있던 것은 죽는다. 죽은 상태로 다시 움직인다. 움직이면서 살아 있는 것을 찾아서 물어뜯고 다시 전염시킨다. 이런 담론에서 살아 있는 것을 절멸한다는 지상명령 말고는 중요한 것이 없다. ‘살아 있는 것’이란 메타포는 여기서 ‘인간’으로 형상화되는 주변적인 것을 억압하고 무효화하는 것 모두를 지칭할 수 있다. 그래서 전수현은 이미래에게 전염될 수 있고, 이미래는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에 마찬가지로 그렇게 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이들은 서로 뜯고 전염시키면서 그렇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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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비평은 ‘물’에 관한 신유물론-페미니즘 비평의 전형을 제공했고, 포괄적인 ‘조각’을 향한 관심에도 기여했다고 본다. 이연숙, 「‘비체적’ 정서의 내장 만지기: 이미래의 《캐리어즈(Carriers)》」, 《세마 코랄》 웹사이트, 2022. 1. 29., (접근: 2023. 12. 8.), http://semacoral.org/features/yeonsooklee-2021-semahana-criticism-award-carriers-abject-mirelee
2) 권시우, 「회화의 “조각 충동”을 기념하며」, 《라라앤》 웹사이트, 2022. 6. 7., (접근: 2023. 12. 7.), https://lalan.art/journal/?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1782627&t=board
3) 권시우가 조각의 출처를 회화에서 찾는 방식은, 긍정적으로 봤을 때, 루시 리파드가 포스트-미니멀리즘을 보는 관점과도 닮았다. 리파드는 1960년대의 비정형적이고 기괴한 오브제, 설치 작업을 '괴상한 추상'으로 정의하면서, 특유의 잡스러움이 전통 주류 조각이나 그것을 비판하고 나온 (남성적) 미니멀리즘으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 아니라 추상회화나 팝아트, 역사적으로는 초현실주의와 훨씬 많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괴상한 추상이 미국-백인-남성-조각과 겨루고자 했다면 한국에서 새로운 조각은 무엇에 대항하는지 파악하기 힘들며, 한편 주류 미술관이 당시 언명되고 있는 (어떤 면에서 매우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는, 즉 미술관과 친연성이 있는 분야인) "조각"이란 현상에 다급하게 영합했다는 점은 특기할만 하다. Lucy Lippard, “Eccentric Abstraction,” Changing: Essays in Art Criticism, (New York: Dutton, 1971), pp. 98-100.
4) Jerry Saltz, “Zombies on the Walls: Why Does So Much New Abstraction Look the Same?”, Vurture, June 17, 2014, (accessed: 2023. 12.8.), https://www.vulture.com/2014/06/why-new-abstract-paintings-look-the-same.html
청탁 내용과 맞지 않다고 해서 달성예술창작공간을 위해 대충 다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