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케이지가 재능 있는 수많은 음악가에게 영향을 준 훌륭한 음악 철학자이지만, 그 자신은 훌륭한 작곡가가 아니었다고들 말한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끌렸던 것은 그의 음악이지, 그의 이론이 아니다. 1958년, 독일의 다름슈타트에서 ... [그는] 흔히 볼 수 있었던 미국 출신의 현대 선사상가였다. 내가 케이지의 열성분자로 돌변한 것은 바로 그가 데이비드 튜더와 함께 개최했던 음악회 때문이다. ... 그의 수많은 제자와 젊은 친구들은 케이지의 세례를 받고 나서 더 선별적이며 미학적으로 변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유독 케이지만이 너절한 것들을 맽어낼 용기와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42-43쪽)
이 부분은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의 입장을 상기시킨다. 손택은 이 책에서 예술 그 자체를 해석학적 비평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재현의 문제를 끌고 들어온다. 손택은 여기서 '예술이 재현이 아니다'의 손을 들어주면서, 만약 재현일 경우 형식과 내용이 분리되어버리는 괴상한 시각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의 예술 작품은 그것의 내용"이고, "해석은 예술에 대한 지성의 복수"며, "비평은 예술작품에 봉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혹은 열렬히 사랑하거나.
백남준이 케이지의 이론보다 음악에 끌렸다는 말은, 케이지의 이론보다 음악 그 자체가 진짜라는 말로 풀이된다. 그것은 손택이 옹호하고자 했던 (더 이상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존재하는 그대로인 것'으로서의 예술, 재현하지 않는 즉 그린버그 같은 사람의 모더니즘에 의해 정식화된 '진정한' 존재, 천재로서의 예술가의 분신으로서의 예술, 매개 없이 그 자체로서 말을 걸어오는 무엇이다.
형식파괴자 백남준이 은밀하게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결국 미술은 미술이며, 어떠한 좋은 미술(예컨대 너절한 미술)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어떤 믿음 같은 것을 반증한다. 혹은 미술을 극단적으로 비미술화해버린 결과 미술이란 개념이 사라졌을 때의 어떤 무의미가 "텅빈 캔버스" 이상으로 공포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혹은 완벽히 비미술화된 어떤 것은 그 무엇도 아니라는 커먼센스에 기반된 관념일지도 모른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진정한'이란 수사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다만 진정한 것이 다른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예컨대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단수가 아닌 복수, 고정성이 아닌 유동성, 확실함이 아닌 불확실성이야말로 '진정한' 무엇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때 그 진정한 '무엇'은, 결국 똑같은 진정한 어떤 모습의 예술과도 같다.
왜 이렇게 무리하게 과대?해석을 시도하냐. 이유는 나는 백남준이 단순히 반미학을 추구한 예술 파괴자, 앙팡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어쨋거나 저쨌거나 '예술'을 사유하고 창작한 작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뉘앙스를 그의 글에서 발견한다면 기록해두고 싶었다.
한편 흥미로웠던 점은 하나 더 있다. 존 케이지의 음악이 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양이 많아서 좋았다는 백남준의 평.
"1968년 경, 전자 서커스에서 열린 체스 음악회가 생각난다. 그는 체스를 두었는데, 체스판이 튜더가 조정하는 기계에 연결되어 있었다. 3년에 걸쳐 작곡하고, 반복적으로 연습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3시간 동안이나 그렇게 '훌륭한' 곡을 연주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것이 즉흥적으로 진행되었다. . . . 4시간 동안 음악의 양탄자가 깔렸다. . . . 나는 사람들이 자연이나 우주를 받아들이듯 '나는 케이지를 받아들인다'라고 말했다. 엄청난 양이 우리가 '질'이라고 부르는 측정의 단위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있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우리는 '질'이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1. 훌륭하거나 혹은 형편 없거나: 비교급 형용사
2. 다르다는 의미... 예를 들어 뮌스터의 치즈는 카망베르보다 더 좋거나 나쁠 수 있지만, A는 분명히 B와 다른 것이다.
케이지의 음악에서 양의 중요성이 이러한 구분을 마비시킨다. 모래를 씹는 기분이라고 할까...케이지 이전이나 이후 그 어떤 예술가도 그렇게 완벽하게 장식지상주의, 출세지상주의, 최상주의를 넘어선 사람은 없었다. 케이지는 '질'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얼마든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작곡할 수 있었다."(42-43쪽)
이 '양'에 대한 개념적 설명은 맥루언의 비율(ratio) 개념(혹은 부리요의 근접성 개념까지) 닮았다. '양'이란 것은 단지 비슷비슷한 단위들이 많고 적어짐에 따라 뭔가가 바뀌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뭐가 달라서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방식의 인식론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를 '질'적으로 가리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는 양적인 분류 체계 속에서 그라데이션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