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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0일 목요일

컨아밈의 세계

2024년 8월 25일 자 《퐁》의 익명게시판, 아고라에 피드가 올라왔다. “입시하면서부터 컨아밈을 보면서 자란 애들은 뭐가 될까.”1) 입시생과 컨템퍼러리 아트? 살면서 거의 생각해 본 적 없는 조합이라 흥미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한갓 어그로 끄는 인스타그램 계정 comtemporary_arts_meme(이하 컨아밈)이 끼치는 영향 때문에 미술 꿈나무를 걱정할 수도 있구나. 왜? 연이은 피드에서 슬쩍 대답이 나오는데, “냉소주의자”, 그리고 “냉소주”란 드립이었다.2) 며칠 뒤 컨아밈을 닉네임으로 쓰는 누군가는 “똥”이라고 했다. 《퐁》이 미술전문 비평 매체임을 감안하면, 이 모든 피드가 미술계 사람들로부터 나왔을 확률이 높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컨아밈이 대체 뭐길래 입시생도 보고 자라며, 대체 뭘 하고 있길래 미술계 사람들이 불편한 기색을 보일까? 그럼에도 팔로워 수 4만이면 동시대미술 계정 중에선 대기업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묻자면, 오늘날 컨아밈을 그렇게 색다르고 그렇게 매력적으로 만드는 건 무엇일까?

이게 바로 현실

컨아밈이 즐겨 다루는 소재를 하나만 꼽아 보자. 예술가. 이 방식은 매우 가혹하기 그지없다. 지피(GIPHY) 같은 해외 밈 사이트에서 퍼온 밈에다가 캡션을 붙이는 식으로 만드는 짤에서, 대다수 예술가는 자신의 현실적 무능은 부인하면서, 매우 높은 이상적 자아(ego-ideal)만을 추구하지만, 그럴수록 현실은 악화하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주제파악 못해서 자신과 주변을 모두 파괴시키는 안타까운 유형의 주체로 재현된다.3) 예를 들어 한 짤에서는 소녀가 귀엽게 표정으로 능수능란하게 정면을 보며 마치 파인다이닝의 서버처럼 한 손으로 주전자(“내가 한 작업”)를 높이 들어 다른 손으로 든 찻잔(“당대의 예술쟁점을 아우르며 숭고한 목표에 도달하기”)에 차를 붇지만 과녁이 빗나가서 땅으로 떨어진다(“사람들이 내 정신 건강을 걱정하게 만들기”).[도판1] 어느 골퍼가 물가에 잘못 떨어진 공(“당신의 작업”)을 구해내기 위해 스스로 물에 들어가 신중하게 샷을 날리지만 그 공은 휘어서 도리어 호수 한가운데에 빠진다(“당신의 삶”).[도판2] 예술가는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또한 작업과 별 상관없는 철학적 개념과 언어”를 스테이트먼트에 마구 때려 부어 라떼 잔을 넘치게 만들며, 두더지잡기 게임에서 짧은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소시지를 좀처럼 입에 물지 못해 안달 난 시바처럼 공립레지던시, 창작지원금, 예술인파견지원사업 선정에 실패하고 화를 내는 소인배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4) 어찌 보면 컨아밈은 마치 메시아나 선지자와 같은 위치에 선다. 설명하지 않고 그냥 그런 거라고 제시할 뿐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짤이 “Based on true story”라는 댓글로 자주 증명하듯, (그리고 때때로 “철저히 허구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같은 과장된 문구로 넌지시 시사하듯,) 누구나 알고 있다고 가정되는 현실,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기반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미술계 썰’인 것이다. 사람들은 왜 썰에 매혹될까? 사실 대부분의 썰은 서점의 어떤 소설을 하나 골라잡아 비교해 보더라도 탄탄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거나 생각하지 못한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썰에 솔깃하다면 그 이유는 철저히 사실 기반의 경험담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판춘문예 같은 말로 곧장 반증할 수 있다. 조회수를 노린 지어낸 이야기란 의미의 판춘문예는 그것이 소설로 밝혀질 경우 낚여서 실망했다는 반응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니까.5)

아무튼, 그럼에도, 컨아밈이 판춘문예에서 완전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여러 차용된 이미지와 알레고리, 이미지의 관계 속에서 사실은 열화되거나 부풀려지고 그 의미는 어떤 요소를 주목하느냐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 특유의 반의적 표현 때문에 어떤 피드가 누군가를 조롱할 때도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순수한 조롱인지 조롱의 스테레오타입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인지도 엄밀히 말하면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컨아밈의 썰은 미술계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직접 경험하고 수집한 일종의 에스노그래피(ethnography)이면서도 어떤 주관적이고 허구적인 성질을 띄는, 말 그대로 썰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과 허구의 결합은 자주 컨아밈을 모순적인 자리에 가져다 놓지만, W. G. 제발트의 『이민자들』 같은 에스노그라피적 문학에서 진지하게 실험된 적도 있다. 『이민자들』이 독특한 점은 소설 자체가 가지고 있는 허구적 특성을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역사에서 살아남은 개인의 디아스포라적 삶을 관찰하고 수집한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라는 점을 일인칭 화자와 각종 사진을 통해서 독자에게 끊임없이 소구하고 있다는 점이다.6) 허구든 사실이든 쨌든 모르겠고 ‘이게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Based on true story”와 “철저히 허구를 바탕으로 했습니다”가 겹쳐진다.

아트 스쿨 컨피덴셜

대체 원래도 매우 취약한 미술계의 좋지 않은 모습을 굳이, 심지어 양념을 쳐 부풀리는 식으로 ‘미술계 현실은 시궁창’을 소구할 긴급한 이유가 있을까? 거듭,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처음 《퐁》의 피드로 돌아가서, 컨아밈을 누가 보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컨아밈이 천기누설하는 미술계 현시창은 은폐된 비밀이 전혀 아니며, 사실은, 그럼에도 그것이 미술을 하거나 그만두는 이유가 아니기 때문에 존치되는 이상-지향 커뮤니티가 바로 미술계이기 때문이다. 미술계 안으로부터 나오는 반응이 “냉소주의”인 것은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7)

사실 컨아밈은 2022년 10월 16일 출발했지만 처음부터 4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계정은 아니었고 호응이 좋은 편도 아니었으며 자주 게시물을 올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대개 1에서 30개 사이를 오가던 좋아요 수가 급격하게 늘기 시작한 시점은 대략 2023년 5월. 예대 1학년 선호 예술가 3대장이란 제목의 밈은 황소윤, 자비에 돌란, 고 버질 아블로 같은 힙스터를 내세워 좋아요 385개를 기록한다. 다음 회화과와 디자인과를 비교하는 피드가 좋아요 94개 기록. 며칠 뒤 컨아밈은 인서울 주요 미술대학 짤을 올린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한예종은 술만 마시고 홍익대는 그 자체로 폐허이며 서울대의 급을 단과별로 나누면 미대는 꼬마 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홍대가 186개로 상대적으로 많은 좋아요 수치를 기록했다. 6월 1일, “미대를 졸업한 다음 주로 뭘 하나요?”라는 밈은 1932개, “예대입학 그리고 졸업”이란 제목의 원숭이가 졸업장 받은 사진과 5천만 원이란 캡션은 993개로 다른 피드 대비 압도적인 수치를 보였다. (이 모든 피드는 미술계 내 관계자라면 언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알려진’ 스테레오타입이다.)

물론 컨아밈의 전체 피드에서 미대생 컨텐츠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 할 순 없지만 미대생이란 지표를 의식하면서 피드 전체를 다시 살펴보면 대개 컨아밈은 예비작가나 젊은 예술가의 현실적인 상황을 자조 섞인 뉘앙스로 다루고 있으며, 2023년 8월쯤 시작한 컨아밈 상담소의 질문과 답을 보면 독자는 미술에 관심 있는 비전공자까지를 독자 범위로 쉬이 상정할 수 있다. 컨아밈의 독자는 어떠한 이유로든 미술 제도를 향한 접근성이 취약한 주체다. 이 독자를 편의상 지금부터 예붕이라고 부르자. 정리하자면 컨아밈은 예붕이에게 ‘이게 현시창이야, 도망치려면 지금’이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보면 《퐁》의 첫 번째 아고라 피드가 입시생을 거론한 건 매우 일리가 있다. 그래서, 컨아밈이 단순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마냥 미술계 뒷담을 잘 모르는 미술계 밖에다 대고 하고 있다고만은 볼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컨아밈이 하고 있는 일은, 다름 아닌 예비작가를 향한 조언, 멘토링이다.

참 스승을 기다리며

2023년 8월 31일 컨아밈은 “반응이 생각보다 좋아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상담소를 열어보겠습니다?”란 멘트와 함께 ‘컨아밈 상담소’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 후 가장 열의를 다해 하고 있는 것이 상담소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문답 대부분의 특징은 질문에 질문으로 맞대응하면서 실상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질문자 자신 안에 있는 문제로 가두는 데 주저함이 없다. 예컨대 “무슨 작업 하시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요..”란 질문에, 컨아밈은 “말만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면 우리는 대체 왜 작업을 해야 하죠?”라는 말로 맞받아친다. “사진 예술이 계속될 수 있을까요?” 지젝의 얼굴에 말풍선을 달고 “응 그건 자네 손에 달렸네”라고 한다. “항상 심오하고 깊은 주제를 생각하면서 작업해도 항상 엉성하고 조잡한 것 같아요”란 질문에 “미대생들은 기억하세요. 만듦새가 엉성하다고 해서 당신의 주제가 심오해지거나 당신을 지적으로 보이게 하지 않습니다”라고 반대로 답한다.[도판3]

이렇게 보면, 젊었을 때 고생하면 다 성공할 수 있다는 유명한 거짓말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부터, 2010년 1월 《퍼블릭아트》에 게재되어 (컨아밈을 포함해) 아직까지 영향력을 암암리에 끼치고 있는 임근준의 「대학졸업을 앞둔 예비작가에게」를 지나, 세상 탓하기 전에 방구석부터 치우라고 해 얼트 라이트의 열화같은 지지를 받았던 조던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멘토링 담론이 기반하는 자기의 테크놀로지를 컨아밈도 따르는 것 같다. 심지어 ”흙수저도 아닌 아예 수저가 없는 학생입니다. 저에게 미술의 꿈은 어렵겠죠? 진지하지만 조언 짤로 부탁드려요“란 무거운 질문에는 ”그만할라 했는데 이거만 대답해 줄게 친구야. 일단 생계부터 어떻게 해봐. 미술엔 은퇴가 없어 나도 마흔 살 넘어서 시작했어”라고 성심성의껏 답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개인의 현실적인 노력, 그러니까 ‘자기 생존’에 방점이 찍힌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로 이해된다.

다양한 멘토 담론이 비판받았던 지점은, ‘라떼는..’이란 꼰대의 습관적 훈계에 대한 조롱을 담은 말이 있듯이, 대략 출발선이 달랐던, 어찌 보면 운이 좋아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이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인 청년에게 일방적으로 하는 실효성 없는 조언이었기 때문이다. 살펴봤듯이, 컨아밈의 피드가 경험담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상 라떼는 담론으로부터 피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컨아밈은 전 세대 멘토에 비해서 위로나 희망을 논하지도 않는 대신, 악으로 깡으로 견디거나 그만두라고, 어쨌거나 현시창이란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놀리는 것 같다는 점에서 더욱 악질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컨아밈 스스로도 그것을 당당하게 숨기지 않는다. “컨아밈 상담소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무료입니다.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무료입니다.”[도판4] 왜 그런 컨아밈에게 예붕이들은 질문하려는 것일까?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지 뻔히 아는 데도? 

소결: 공허함이 말해주는 것

컨아밈이 기존의 멘토와 조금 다르다면, 관찰자의 자리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실로 컨아밈은 익명성 뒤에 숨어서 자신을 감추려는 노력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컨아밈 계정의 주인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검색하면 바로 알 수 있으며, 자신이 누구와 친한지, 어떤 사람과 결혼했는지, 얼마나 가난한지,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 안에 놓여 있는지, 얼마만큼 실패했는지에 관하여 겁도 없이 썰을 푼다. 그러니까 컨아밈은 자신이 봇이 아니라 현시창을 맛보고 있는 살아 있는 한 예술가이자 과도한 이상적 자아를 소유한 어쩔 수 없는 관종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컨아밈의 썰은 그래서 다른 게 아니라 컨아밈이란 계정을 쓰는 결함 있는 범박한 한 예술가가 살아온 방식이며, 그 예술가가 보는 미술계이며, 그 예술가 가지고 있는 예술관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정치적 미술이나 공공미술에 대한 편견을 근거 없이 드러낼 때도, 때때로 기금을 향한 무조건적인 적의를 보일 때도, 때때로 소수자 스테레오타입을 무성의하게 희화할 때에도, 철학자를 인용하는 예술가를 조롱하면서도 자신의 인용구가 틀렸음이 탄로 날 때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어떤 큰 진리를 여기서 얻을 수 있겠는가?

컨아밈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약속하면서도 질문하라고 하고, 예붕이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에 기뻐한다. 이들의 약속대련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익히 아는 멘토-멘티 담론의 파산을 나름대로 조롱하면서 도파민을 즐기는 커뮤니티 안의 오락인 것 같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먼저 태어난 사람, 선생이 살아오면서 얻은 지혜는 후대 세대에게 정말로 불필요한 것일까? 혹시 목욕물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린 것은 아닐까?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볼거리는 엄기호의 조금은 철 지난 『단속사회』에 잘 나온다. 그는 10여 년 전에 생존을 위해 각개전투하고 있는 청년을 걱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삶의 실제적 경험으로부터 조언과 충고가 나온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나와 다름 경험이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망이 필요하다. 우리보다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한 사람으로부터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 사회는 망한 사회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 사회가 ‘사회’일 수 있는 것은 연속성을 갖췄기 때문이다. 연속성을 지녔다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경험과 지혜가 끊임없이 갱신되면서 후대들에게 전승될 수 있음을 뜻한다.”8)


한편 내용 없는 형식의 공허한 반복은 멘토와 멘티가 동시에 사라졌다는 강력한 트라우마에 대한 병리학적 반응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컨아밈은 단순히 약속대련의 상대가 아니라 정말로 멘토의 자리를 대신 하는 대상으로 상상된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게 농담만은 아닌 게, 2024년 4월 10일 컨아밈은 건국대학교 현대미술과 학생을 위해 컨아밈 상담소를 열었다. 디지털워크숍1 수업에 대한 특강 요청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가장 보수적인 교육 개념을 가진 대학에서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소문난 컨아밈 상담소를 특강에 호출한 이런 기막힌 사연은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불길한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지점에서 컨아밈의 상담소는 멘토-멘티 담론을 조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공허는, 현시창을 살아가는 예붕이들을 위한 진정한 선생의 출현을 긴급히 요구하는 다잉 메시지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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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퐁》, 2024. 8. 25., https://pong.pub/agora/ (접근: 2024. 10. 5.)
2) 《퐁》의 아고라는 댓글이나 트위터의 리트윗 기능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이 반응이 정확히 #60에 대한 것인지는 엄밀히 말하자면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맥락상 댓글에 해당한다고 본다. 위의 페이지.
3) 컨아밈의 게시물은 엄밀히 말해서 밈이라고 할 수 없다. 박상권의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 밈이 하나의 집합이자 현상이라면, 짤은 밈이 되지 못한 하나의 단일 컨텐츠다. 컨아밈은 인터넷 밈을 개작한 단일한 온라인 시각물, 그러니까 짤이라고 파악하는 것이 온당하다. 박상권, 「밈, 바이럴, 패러디, 짤과의 비교를 통한 인터넷 밈의 개념적 고찰」, 『상품문화디자인학연구』, 72, 2023, p. 179.
4) 누가복음 23장 34절
5) 송혜진, 「오늘도 당신은 '판춘문예'에 낚이셨나요?」, 《조선일보》, 2017. 1. 14.,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13/2017011301535.html (접근: 2024. 10. 9.)
6) 이렇게 에스노그라피가 문학화하는 이유는 사회과학적 관찰자의 시각이 절대로 어떤 집단과 문화의 특징을 객관적으로 기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포스트모던 에스노그라피는 고전적 에스노그라피에서 전제하는 여러 불평등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윤희, 「에스노그래피로서의 문학의 가능성」, 『독일어문학』, 제88집, 2020, p. 144, 161를 볼 것.
7) 이 대목은 김영하와 조영일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이 논쟁은 문학 지망생을 향한 조언으로부터 시작해 예술가 주체에 대한 상반된 견해로 확장했는데, 요약하자면 김영하는 예술가를 자율적 주체로 본 반면, 조영일은 사회적 존재라고 했다. 본문에서 말하는 미술계 내부 커뮤니티, 즉 이상-지향 커뮤니티는 현시창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초월한 삶을 살기로 자기 결정했다는 의미에서 김영하의 예술가론과 가깝다. 곽영신, 「작가가 굶어죽는 사회의 작가론」, 《오마이뉴스》, 2011. 2. 16.,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24158 (접근: 2024. 10. 15.)
8) 엄기호, 『단속사회』, 창비, 2014, p. 20.

2024.10.10.
안대웅 
주부

2023년 11월 29일 수요일

전수현의 영계(靈界)(2021)에 대한 노트

<영계>는 10여 분 러닝타임동안 끊임없이 알쏭달쏭함을 밀어붙이는 듯하다. 시작 부분에 목소리로 중요한 것처럼 등장했다가 다시는 재등장하지 않는 일본인-통일교-병원 종사자의 기괴한 조합은 시작에 불과하다. 무언가 작은 구멍이 부풀었다 꺼졌다하는 찢어졌다 붙었다 장면은 대체 무얼 찍은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창문도 마찬가지다. 창문은 사실 찍기 힘든 대상도 아닌데 왜 곁눈질하면서 몰래 찍었달까? 시컴한 물 색 표면이 끈끈한 젤리처럼 흔들리며 빛의 하이라이트가 반짝인다. 한편 죽어가는 중환자를 보는 일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고전 중의 고전인 덩실덩실춤을 흥겹게 춘다. 폭죽이 터지고 레이저 몇 개가 하늘을 가르며 솟아오른다. 정좌한 참어머님은 마네킹 같다.

이 비디오는 청평수련원과 청심국제병원의 인상의 단편을 촬영한 것이지만 다큐멘터리라고 부를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큐멘터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주관적이다. 주관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쇼트의 나열이다. 무언가 심각하게 결여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게 뭔지 다시 보고 곰곰이 생각해 봐도 지금도 자신 있게 말하기 힘들다. 그래서 먼저 고백하건대 지금 적고 있는 이야기는 파편적인 생각의 노트에 불과하다

시간을 다루는 비디오 작업을 보고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영계>는 시간적인 작업이 아니라 공간적인 작업인 것 같다. 그래서 비디오가 끝났을 때, 러닝타임 전체가, 거기에 있는 모든 쇼트가 동시에 한꺼번에 제각각 쏟아지는 것 같았다. 쇼트 하나 하나가 모두 비정상적으로 자율적이다—말하자면, 객체적으로 작동한다. 비디오에는 소위 말하는 씬이나 시퀀스라고 부를 만한 것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쇼트는 주머니 속에서 뭔가 잘못 눌러서 찍힌 사진 같고 쇼트와 쇼트의 연결은 사다리 같은 랜덤 돌리기 게임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말하자면 인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무언가 불길한 느낌마저 든다. 제목도 <영계>다. 비디오 자체가 1990년대 <링>의 저주의 비디오 같은 정서를 풍긴다. 이걸 본 이상 너는 이미 감염되어 있다, 그게 뭔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같은.

파고 들지 못하겠으니 제목에라도 기대야 한다. 여기서 통일교의 교리에 진지하게 접근해 볼 생각은 전혀 없고, 다만 인터넷에서 찾아본 바로는, 영계는 사후세계에 해당하는, 통일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비디오는 영계를 다룰 수도 있고 비디오 자체가 영계일 수도 있다. 저주의 비디오와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비디오 자체가 영계일 수 있다는 설이 더 흥미로울 것 같지만 여기서 멈추도록 한다. 다만 이 비디오가 죽음에 대한 것은 분명해 보이며, 쇼트 하나 하나가 만약 죽음의 지문이라면, 오래된 필름과 대조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스탠 브래키지(Stan Brakgage)의 1959년작 <창문 물 아기 움직임(Window Water Baby Moving)>이다.

직관적으로 봤을 때 <영계>는 브래키지의 <창문>과 여러모로 비슷하면서도 많은 것이 뒤집어져 있다. 무엇보다 <창문>이 오래된 필름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면 <영계>는 디지털 파일로 된 비디오다. 그럼에도 <창문>이 컬러라면 <영계>는 흑백 처리 되었다. <창문>이 브래키지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담았다면 <영계>는 죽음의 문턱에 걸쳐 있는 사람을 담았다. 그런 의미에서 <창문>에서 물이 생명 탄생에 대한 여러 메타포를 제공한다면 <영계>의 물은 죽음과 불길함과 연결된다. <창문>이 탄생의 기쁨과 추악한 모습을 동시에 담았다면 <영계>에서는 죽음에 대한 종교적 기쁨과 인간적 두려움 같은 양가적 태도 같은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때때로 <창문>이 과도하게 섹슈얼하거나 폭력적인 장면을 신생아와 병치한다면, <영계>는 중환자와 영성에 몰두한 신명난 사람들을 가지고 그렇게 한다. <창문>이 탄생을 통해 예술을 고찰했다면, <영계>는 이단 종교의 장례를 통해 예술을 그렇게 한다. 이 경우 창문이 향하는 대상은 <창문>에선 필름, <영계>에선 비디오일 테다.

여기서 <영계>가 그 위대한 브래키지의 계보를 잇는 것 같다던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다만 <영계>에는 오래된 실험영화의 취미가 여럿 묻어나는데, 그건 국적불명의 레트로 취미이며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기보다 차라리 동시대적 현상에 훨씬 더 가깝다고 봐야 한다—그러니까 거칠게 던져놓자면, 오늘날 실험영화 스타일의 실험영화라고 불리는 비디오 작업이 진짜 실험영화와 별로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영계>가 공간적으로, 그러니까 무시간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오해의 소지를 줄이자면 그런 취미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레트로 취미는 서구 실험영화 스타일로 해소되지 않는 전혀 다른 요소까지 평면적으로 함께 끌어오는 것 같은데, 그것이 <영계>의 진짜 문제 같으며, 그게 무엇인지는 섬세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 같다. 다음 과제로 남겨 둔다.

<창문>과 <영계>가 모두 자전적인 이야기란 사실만큼은 적어 두고 가고 싶다. 1959년 미국의 젊은 브래키지는 결혼도 하고 분만실에서 아기도 낳고 영화도 찍고 창조가 무엇인지도 물었다. 2021년 한국의 전수현은 통일교 청심병원에서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비디오를 찍으면서 죽음이 무엇인지 물었다. <창문>이 창세기고 <영계>가 묵시록이라면 여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23. 11. 29. 

달성예술창작공간 리뷰로 쓰였음. 

* 작품정보: https://vimeo.com/698091025

2023년 7월 19일 수요일

빌딩 위의 소시민들


크고 작은 길쭉한 목각상이 한 데 여럿 모여 있다. 일군의 목각상에는 일관된 전시 제목이 붙었다. 빌딩 위의 시민들. 빌딩은 좁게 솟은 직육면체이며, 시민은 그 위에 올라가 있는 인물 형상일 텐데, 세부적인 사항이 모두 생략되어 네모로 환원된 빌딩은 차치하고서라도 인물은 실로 뭉툭하게 깎여, 추상화되어, 개별적인 특징을 알아보기 힘들다. 인물 위에 표현된 복식이나 좁은 지면 위에 구성된 상황으로부터 성별이 무엇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또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도만 가까스로 추측할 수 있다. 거기까지다. <개와 남자>, <담에 기댄 남자>, <숄더백 여자> 같은 제목이 그렇듯, 문자 그대로 딱 거기까지 구현되었다.

이런 압축과 생략이 강화하는 것은 일찍이 김지하가 「현실동인 제1선언」(1969)에서 미술에 소구했던 전형성이다.[1] 하지만 배병희의 전형은 현실동인의 유토피아니즘, 그러니까 오윤이 형상화하고 10여년 뒤 민중이란 이름으로 발견되는 저항적 판본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당연하게도 「제1선언」과 시간차를 두고 나타난 이 조각은 미래적이라기보다 회고적이고 또 다소 멜랑콜리한데, 호명된 시민이 특별한 것 없는 하루하루를 똑같이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인이란 점에서, 「제1선언」과 비슷한 시기, 1960년대 말 문학계에서, 참여 담론과 정면으로 맞서며 제출됐던 또 하나의 주체, 소시민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소시민 문학의 경우

「새시대 문학의 성립—인식의 출발로서 60년대」(1968)에서 문학평론가 김주연은 “새시대 문학의식의 기본심리”가 소시민 의식임을 천명하며 전후세대와 세대론적 단절을 시도했다.[2] 새 시대를 열었을 4.19 혁명 이후에도 강력하게 잔존하고 있던 전근대적 유산과 식민지 피해서사, 그것을 민족주의 담론을 통해 정치화하는 데 익숙한 참여진영. 이것들과 급진적으로 단절하기 위한 전략으로 김주연이 불러세운 것은 근대적 주체인데,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시민이 아니라 소시민이었다는 점이다.

곧이어 백낙청이 지적했듯, 적극적 자유를 구가하며 공화주의를 실현하는 시민과 달리, 자주 소시민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상황 논리에 쫓겨 당장 먹고사는 일에 매달리는 소극적 존재로 이해되었다. 반면, 김주연에게 소시민은 자기만의 의식으로 개별화한 개인의 내면을 포착하는 새로운 모델로서, 근대적 주체를 긴요하게 요청하던 시대에, 상황적으로 채택한 일종의 극약처방이었다. 소시민 문학은 거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대신, 사사롭게 의식에 포착된 외부 세계를 세부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소시민 문학의 대표격인 『무진기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된 대화를 나는 들었다.”

김주연은 이런 미적 의식을 트리비얼리즘(trivialism)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에 따르면, 트리비얼리즘은 사소한 것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오히려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의 확인”하면서 “사물에 대한 인식의 눈뜸”을 통해 “아름다운 개성”을 창조하는 것이다.[3] 사소함의 발견은 김승옥이 개인의 내면에 현전한 광경을 재잘재잘 묘사하고, 여학생, 산책자, 샐러리맨 등 배병희가 오며 가며 일상적으로 마주친 인물을 말 없는 조각으로 하나씩 하나씩 새겨나갈 때 비슷하게 발휘되는 감각이며, 이는 거듭, 민중미술에서 포착하고자 했던 ‘현실’이나 ‘주체’와는 매우 다른 현실 감각이다.

실로, 임화 같은 전세대의 비평가부터 백낙청을 거쳐 민중미술가에 이르기까지, 당파적 리얼리스트에게 트리비얼리즘은 총체성의 프로그램을 모자이크처럼 만들어버리는 매우 성가신 감각이었다. 그럼에도 트리비얼리즘은 어떤 면에서, 리얼리즘의 리얼리즘으로서, 리얼리즘이 구현하는 현실 그 이상의 초과-현실을 포착해냈다. 그렇지 않다면 「사실주의적 재인식」(1937)에서 임화는 왜 그렇게 트리비얼리즘으로부터 리얼리즘을 구별해내려고 했을까?[4] 한편, 그렇다고 해서 트리비얼리즘이 모더니즘에 아주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국문학자 황정아가 날카롭게 파악했듯이, 소시민 문학이 꾀한 ‘내면으로의 선회’는 절반의 모더니즘에 불과한데, 서구 모더니즘이 근대 비판의 틀을 가졌다면, 전자의 경우 소외 상태를 외려 ‘건강한 소시민 의식’으로 봤다는 점에서—그런 점에서 문학의 압축 근대화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그렇다.[5]


소시민 리얼리즘

트리비얼리즘은 그래서, 형식적으로, 개인의 내면과 외부적 현실 양극단 사이에 고속도로를 놓는다. 이것이 트리비얼리스트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사이에서 미운오리새끼 취급을 받는 이유처럼 보인다. 배병희의 경우 역시 그러한데, 리얼리스트적 관점에서, 소시민의 전형을 형상화한 《빌딩 위의 시민들》은 2000년대의 구본주가 <아빠의 청춘>(2001)이나 <선데이 서울>(2002) 같은 작업에서 형상화하려 했던 샐러리맨의 전형과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한편, 단순해서 둔탁해 보이기까지 하는 조각이 보여주는 적막한 심리적 상황은, 되다만 빌딩이 좌대로 보이는 순간,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브랑쿠지의 조각으로 유명하게 논증한, 모더니즘 조각의 탄생 설화와 가까워진다. 좌대를 얻은 순간부터 조각은 기념비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 어디로든 돌아다닐 수 있고 또 판매될 수도 있다. 하지만 《빌딩 위의 시민들》은 실로 그 어느 쪽에 가도 만족스럽지 않다.

거듭, 애초에 1960년대에 소시민 모델은 리얼리즘적 세계관이 집권하던 시기, 거기에 대항하는 상황적 대항논리로서 등장했다. 하지만 소시민의 모델은 마치 땔감 마냥 1970년대에 시민에 의해 반박된 후, 시민은 다시 재빠르게 민중으로 다시 만들어져 1980년대 민중미술에서 정점을 찍었다. 민주화 이후 재출현한 시민은 ‘깨어있는 시민’으로, 정치학자 최장집의 관점에 따르면, 진보운동의 계보 위에 있는, 소시민론이 절연하고자 했던 도덕주의의 한 형태로 다시 복귀했다.[6] 그래서 외부 세계에 차라리 냉소적인 주체에 긍정성을 부여한 경우는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난 야심 찬 예술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빌딩 위의 시민들》은 어떤 면에서 동시대 가속주의적 세계관에서부터 멀찌감치 벗어나 있다. 매우 느린 속도로 그것이 재현하고자 결심한 것은 차라리 50여년 전 제출되었다 폐기된 모더니즘의 낭만주의적 판본이다.

《빌딩 위의 시민들》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그래서 소시민의 꿈에 대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실로, 역사상 혁명 주체 모델은 모두 엘리트가 고안하고 피억압자에게 요구되었다. 여기서 소시민, ‘역사와 계급의식’보다는 생존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약삭빠른 인간은 어느 틈에도 낄 수 없었다. 속물로 매도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중간 계급을 긍정하고자 했던 소시민 모델은 《빌딩 위의 시민들》에 와서 민중처럼 재현될 권리를 다시 얻었다. 《빌딩 위의 시민들》이 재현하는, 그래서 기념하는 일상, 대부분 소시민 문학을 이끌어가는 힘은 사실 평범한 사람들이 꾸는 꿈이다. 이를테면 다 같이 적당히 건강하게 일하면서 오래 잘 사는 것. 이런 소박한 꿈이 만약 소시민 의식이라면, 《빌딩 위의 시민들》은 그런 소망 이미지를 아주 조금씩의 붉은 색과 함께 사물에 각인한다.[7] 그런 의미에서는 《빌딩 위의 시민들》을 소시민 리얼리즘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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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지하, 「현실동인 제1선언」 , 《현실동인》, 1969, (『시대정신 3』, 일과놀이, 1986, pp.78-102에 재수록).
2) 김주연, 「새시대 문학의 성립-인식의 출발로서 60년대」, 『아세아』, 창간호, 1969, p. 265.
3) 위의 글, pp. 255-257.
4) 임화, 「사실주의의 재인식—새로운 문학적 탐구에 기하여」, 《다빈치 원문/전문》(웹사이트), 1937,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4704 (접근: 2023. 7. 18.)
5) 황정아, 「소시민문학론과 ‘근대화’」, 『인문논총』, 74. 2017, p. 218.
6) 최장집,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법에 관한 하나의 논평」, 『경제와 사회』, 85, 2010, p. 103.
7) 발터 벤야민이 소망 이미지, 소망 상징 등으로 부르는 것은 집단 공동체의 꿈으로, 표면상 가장 자본주의적인 것이면서도 그 이면에는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를 내포하고 있다. 벤야민은 초현실주의를 분석하면서, 철지난 상품에서 그런 혁명의 에너지를 예술이 발견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발터 벤야민, 「초현실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08.


2023. 7. 18.

2018년 7월 12일 목요일

아오키지(옥승철)


이쁘긴 한데 말하자면 중국산 아이폰 짝퉁 같은 느낌이랄까...

2017년 7월 21일 금요일

장희진

http://www.heejinjang.com/index.php/project/video/2/

2016년 12월 11일 일요일

조형섭의 상회 시리즈에 관한 노트

2014년부터 세 차례 연 개인전 [부흥상회](2014), [만물상회](2014), [근대화 슈퍼](2016)에서 조형섭은 과거로의 충동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어딘가 기시감을 일으키는 제목의 상호는 오늘날 상품 유통망을 장악한 SSM과 대비돼 고졸한 멋까지 느껴진다. 부흥이나 상회, 근대화는 근대적 열망, 그러니까 70-80년대 성장과 번영에 대한 순진하고 낭만적인 열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언표다. 조형섭은 이런 구시대 상품 진열소를 전시로 전유하며 지금은 희미해져가는 그 시대상을 환기하려고 애쓴다.


간판

조형섭은 상기한 세 차례 전시에서 간판을 전유했다. 그 간판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간판의 모양을 모방하는 가운데, 네온이나 자개무늬 등으로 장식했다. 새롭게 작업한 간판은 옛 간판의 흔적을 기록한 사진과 함께 전시됐다. 간판에는 부흥이나 만물, 근대화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이 단어는 실로 근대적 시기의 열망을 압축적으로, 그리고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부흥은 지연된 근대에 대한 회복을 의미한다. 만물은 새로운 상품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의미는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가하던 최고의 가치이자, 미래 시점의 꿈 이야기다. 지독히도 배고프고 못사는 저개발 상태를 참아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집단 주문 같은 것이다. 상회도 마찬가지다. 문자 그대로는 상인의 조합이나 규모가 있는 회사를 뜻하지만, 대부분의 동네 구멍가게가 이런 과도한 명칭을 야심차게 달고 있었다. 무한한 번영의 꿈,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자명한 믿음을 안고서 말이다. 당시 세대가 모두 근대화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 것은 맹렬히 진보하는 근대적 시공간 속에서 용인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근대적 사관에 기초한 믿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허위로 드러난다.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계발되고 생산 유통 소비 관계가 재편되면서, 이 시기의 꿈은 곧 바로 철지난 것이 되어 버렸다. 호기로운 명칭을 단 구멍가게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채 수퍼마켓에 그 임무를 넘겨주고 쇠락하거나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간판은 개보수도 되지 않은 채 늙고 할퀴어진 얼굴이 되었다. 조형섭은 이렇게 썼다.

얼마 전 시골의 한 작은 상점에서 받침 몇 개가 떨어져 나간 부흥간판을 본적이 있다. 2013년 어느 날의 그때, 나는 오지 않을 손님과 부흥을 기다리는 텅 빈 상점에서 80년의 모호한 감수성을 느꼈다. 그 80년의 감성은 내게 부흥이란 단어처럼 과도한 욕망이 낳은 파괴와 개발이라는 이중의 이미지로 스쳐 지나지만, 아직도 재개발이 한창인 곳에는 현재 진행의 상태로 과거의 모습이 흔적처럼 남아있다. 그래서 부흥은 과거의 모습이면서 현재의 모습이기도 하다. . . . 잘 사는 것에 한 의미는 뒤로 하고 잘 살겠다는 의지만 앞세우던 칼날 위, 결코 부흥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지점에서 다양한 의미를 생산해내는 부흥의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작가노트 중)

조형섭은 오래된 간판에서 발견되는 진보 서사의 폭력적인 얼굴과 그 말로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부흥”의 시기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감추지 않는다. 발광하는 네온과 영롱하게 반짝이는 자개는 (발터 벤야민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미 폐허가 된 소망상징wish symbol을 아름답게 덧칠한다. 이것은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자개농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정서다.


자개농

오래되고 낡아빠져 버려진 가구를 주워 리폼한 <1+1>, 버려진 자개농을 주워 해체한 후 남은 재료로 낡은 의자를 복제한 <A.M.+P.M>, 폐쇄회로 카메라를 자개 무늬의 망원경으로 장식한 <망원경을 돌려줘>, 그리고 모든 간판 작업에서 조형섭은 반복적으로 자개농을 재료로 사용했다. 조형섭은 자개농에 관해 특별히 이렇게 적고 있다.

얼마 전 우리 집 안방을 차지하던 자개농을 지금 있는 경남의 한 창작센터로 운반해 왔다. 시간을 박제해 놓은 것 같은 그 자개농은 수 십 년을 같은 자리에서 우리 가족사를 목격 했을 것이다. 처음 그 자개농을 집에 들여 놓았을 때 어머니는, 한 겨울 밤의 눈 내리는 말 그대로의 눈부시게 하얗고 아름다운 광경을 상상하셨을 테지만. 이제 크고 무거울 뿐인 자개농은 애물단지가 되었고, 나는 그것을 처분하며 두 세대가 만들어간 시간의 겹과 과거와 미래로 대변되는 시간의 두 지점을 동시에 보고 싶었다.(작가노트 중)

근대 시공간에서 수공예로 만들어진 자개농은 사치품과도 같았다. 화려하게 조개로 장식된 식물과 동물이 가장 내밀한 안방으로부터 영롱한 빛을 발한다. 자개농은 가족의 귀족적 취향과 권위를 보여주는 일종의 징표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파괴와 구축으로 점철된 시기에, 취미의 문제에서는 다수의 민중이 외려 전통 한국 귀족의 이미지를 뒤쫓고 있었다는 건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만 말이다.

실로 박정희 시대의 조국 근대화 관념은 자유로운 개인을 발견해 나가는 서구 부르주아의 발전 서사와 상이하게 전개됐다. 전쟁의 경험은 국가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것에 합의하도록 했고, 지연된 근대화는 공동체의 희생과 노력으로 달성될 수 있었다. 자신들로 인해 후손 세대가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서. 어쩌면 자개농은 그 세대가 상상할 수 있었던 지고의 행복한 미래였다. 집 한 채 가격의 사치스러운 혼수품이지만, 그 미래적 상징 가치를 집 안쪽에 두는 일은 실로 가치가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유행은 변한다. 더 이상 귀족적 취미는 자개농 같은 전통적 미의식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목소리 곱고 아름답던 귀족의 얼굴이 급작스런 노화를 겪는다. 이때 드러난 몰골은 상대적으로 더욱 그로테스크할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과거의 영광을 처분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가족의 소중한 기억을 간직한 그것을 그냥 처분하지는 않는다. 자개농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본질인 자개 무늬만은 구출해 냈던 것이다.

자개 무늬는 그 시절 소구했던 가족의 유토피아를 그 속에 품고 있다. 그는 그런 자개 무늬를 반복적으로 새롭게 조형해 내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새로이 탄생한 자개-오브제는 구시대 유토피아의 어떤 측면을 복원하는가?


보수주의 충동

조형섭은 처음에 자개의 (혹은 그가 발견한 근대적 상징물의) 구슬픈 모습에 애잔함을 느끼다가, 이내 그것의 아름다움에 도취된다. 그리고 그것의 가치를 어떻게 해서든 복원시키고 싶어 한다. 자개는 그가 만들어내는 온갖 오브제의 표면에 장식으로 달라붙어 오색찬란한 빛깔을 발산한다. 이런 면모는 단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반동적인 스펙터클로 보인다. 더욱 마르크스주의적 표현으로 바꾸자면 조형섭이 재탄생시키는 오브제는 물신적 성격을 다분히 띠고 있다고 보인다. 사물의 본질(폐허)을 외양으로 감추고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제 스스로를 표명하며 인간을 미혹하는 그런 환영 말이다. 썼듯이, 자개농은 당시의 문화적 허위의식이었다. 몹시 고가의 혼수품을 하도록 신부측에 강요하는 문화였으며, 그 미감 또한 전통 부르주아의 미의식을 단순히 추종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것은 폐허가 될 운명이었고 폐허가 됨으로써 그 운명이 정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가? 조형섭은 굳이 자본주의의 사생아에게 심폐소생술을 행하고, 그것을 웰메이드 오브제로 재영속화한다. 재탄생한 자개농은 실로 상품의 신화를 다시 쓴다. 우리는 여전히 구식 자개농의 신화에 다시 종속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다른 것도 힘든 마당에?

거기다가 조형섭은 가족의 온정과 당시 조국 근대화에 반드시 필요했던, 가족부터 민족에 이르는 집단 의식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는 자개장에서 가족의 기억을 멜랑콜리하게 떠올리고 또 복원하고 싶어 하지만, 그 기억의 원형은 잘 봐줘야 집단적, 가족적 희생에서 오는 온정에 불과하다. 조형섭은 <삼선동행>에서 ‘함께’의 가치를 관객이 경험하도록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학생에게 슬리퍼 한짝을 나눠준 후, 다른 한 짝을 박스테이프로 만들어 짝꿍에게 선물하고 함께 걸어다녀 보기를 주문했던 이 작업에서, 하지만 도드라지게 보이는 것은 ‘함께 해야만 한다’는 작가의 교조주의적 명령이다. 이것이 과연 근대적 가족주의와 크게 다른 것일까?

물론 작가가 소구하는 것은 일종의 ‘육남매’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없이 살지만 나눠쓰고 아껴쓰면서 보다 인간 다운 미래를 꿈꾸며 사는 삶이다. 조형섭에게 근대란 시공간은 개발과 파괴로 점철된 폐허임과 동시에 그런 공동체적 정서를 아직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창고로 포착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유토피아적 원형상이 장식이라는 보수주의적 테크놀로지와 만나자마자 그것은 기만적 이미지로 변하며, 또한 인간의 물신화된 욕망을 자극한다. 그가 했어야 하는 일이 정말 이런 방식로 과거를 보수하는 일이었을까?


부기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여기서는 조형섭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재생 이미지의 보수적인 측면을 사회 저변으로 확장해보려고 한다. 이 절은 일종의 예비적 고찰의 성격을 띤다.

언젠가부터 과거나 전통에 대한 열광이 특정 문화 실천의 구호가 되었다. 문체부에서 연간 주최하고 있는 마을미술프로젝트부터 지자체 단위의 도심재생/재활성화 사업, 예술가나 건축가의 공공 디자인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이 다양한 문화 실천은 (철거를 핵심으로 하는 재개발이 아닌) 이른바 리모델링을 골자로 하는 재생에 역점을 두면서, 기존 낙후한 것을 복구, 보전하거나 재활용하려고 애쓴다. 이런 사업은 이젠 쇠락한 과거의 영광을 여전히 남겨둘 가치가 있는 ‘문화’로 인정한다. 그에 따라 달동네부터 전통시장, 전통마을, 심지어 국가 브랜드 아이덴티티에 이르는 (이미 경제적 가치를 상실한, 하지만) 문화적 가치를 띤다고 믿어지는 산물이 그럴싸한 모습으로 문자 그대로 ‘복원’된다. 각기 계층의 관여자는 ‘진정한’ 문화의 미덕을 강조하고 한편으로 그것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며 자신의 프로젝트를 옹호하기에 나선다. 재개발과 재생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일지 모르겠다. 재개발은 겉과 속이 같지만 재생은 겉과 속이 다르다. 이런 모순을 봉합하는 것으로 두 가지를 들고 싶다. 하나는 문화가 돈이 된다는 구호인데, 이는 한 때 나라 전체를 지배했던 창조경제와 문화콘텐츠진흥 사업 담론과 미래창조과학부 출범 배경이 여실히 증명하는 바다. (혹은 지역 곳곳에 있는 ‘음식문화거리’의 작명이 이런 욕망을 잘 반영한다.) 다른 하나는 전통 복원 그 자체가 입은 방탄 조끼에 기인한다. 이런 주장은 기존 재개발 담론의 안티 테제로 기능하는 것과 동시에, 문화의 역사적 의의를 비판적 관점에서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 재개발이 공간의 폭력적이고도 급격한 구조 재편과 전환을 일삼았다면 오늘날 문화재생은 은밀하게 마치 일종의 자연 현상처럼 치부,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공적 영역에서 시행하는 광범위한 전통 되살리기 프로젝트는 있지도 않은 과거에 환상을 부여하며 단일한 문화 정체성을 마치 원래 있었던 것처럼 만들어내는데, 이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장소에 부여하려는 데서 보장된다. 이런 정책이 노리는 효과는 거주자의 실제 삶에 부합하는 환경을 구축하고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화 자본의 생산과 유통, 소비의 순환 속에서 인구가 유입되고 지역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지 아닌지가 이들의 관심사다. 긍정적인 마음을 품고 문화 재생을 통해 지역 경제가 성장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런 현상의 주역은 누구일까? 수혜자는 누구일까? 물론 최하층 노동계급에 가까워질 수록 그것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 가능하다. 최고의 이익은 장소의 주인, 즉 지주에게 돌아간다. 공적 담론이 이렇게 문화 및 역사와 접목하며 재개발에 다른 이름, 재생을 도입한다면, 사적 영역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언젠가부터 문화계에서 거론되는 젠트리피케이션은 이런 현상의 대표적인 예다. 낙후한 지역을 문화적으로 개보수해서 쓰는 문화 생산자는 자신의 활동 때문에 치솟은 지대를 감당해야 하는 난국에 처하며 거주지 밖으로 추방 당한다. 이런 과정은 이윤의 추구와 사유 재산의 축적을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의사-자연사적인 것처럼 진행된다. 여기서 추방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난 (때로는 당사자가 자초한) 문제이거나 잘 봐줘야 개인간의 분란이다. 외려 계약을 위반한 임대인은 무법자란 칭호를 종종 달게 된다.

예술가는 문화의 자본화를 가속하는 대리인에 불과할까? 문화 활동은 결국엔 장소에 금박 장식을 덧입히는 결과일까? 급진적인 문화까지 제 양식으로 빠르게 삼아버리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문화란 종국의 실패와 보수화를 그 자체에 아로새긴 것에 불과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예술가는 지역 정책 결정에 제제를 가하고 추방자를 보호하자는 운동을 전개할 수도 있다. 자본가를 위협하는 집단 데모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제안하는 건 다른 쪽이다. 이 모든 활동이 문화화 과정과 자본화 과정에서 분리한다면 설령 의도치 않았다고 하더라도 문화의 자본화 과정에 ‘문화적으로’ 찬동하는 꼴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분명하다. 문화는 자본화 과정에 더욱 개입해야 한다. 그래서 자본화 과정 아래에 있는 문화의 양면성의 실체를 폭로해야 한다. 예술가들에게 이때 문화는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키는 젠트리파이어가 아니라, 오히려 그 미래를 앞 당겨 논쟁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나는 이쪽을 지지한다.

2016년 12월

안대웅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큐레이터 / 유능사 일원

오픈스페이스 배 개인전 <부흥상회> http://www.spacebae.com/w3c/board.php?board=Past&command=body&no=91
부산비엔날레 참가작 <근대화 슈퍼> http://www.busanbiennale.org/sub01/03_view_fix.php?no=351

경기문화재단 기성작가지원 비평가 매칭 프로그램에 기고함.

2015년 10월 26일 월요일

홍수연 작가 미팅 후 메모

홍수연 작가 미팅 후 까먹을까봐 살짝 기록.

묽은 아크릴릭을 흘리듯이 캔버스에 붓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해서 레이어를 쌓음. 형태가 완전히 우발적인 건 아니고 미리 설정된 형태나 경계, 색이 있음. 색깔과 질감, 물리적 두께가 레이어를 쌓음으로써 이미지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수행적인 측면도 있음. 그냥 고정된 것보다, 변화하는 그 순간, 시간을 화폭에 고정시키고자 했다고 함. 초기 작품 껍질 시리즈에선 조금 더 형상의 느낌이 있었음->점점 추상화.

2015년 3월 18일 수요일

Journey to the Moon (2003) by William Kentridge

William Kentridge, Journey to the Moon, 2003, 35mm and 16mm film transferred to video (black and white, sound), 7:10 min.

그 유명한 윌리엄 켄트리지의 달로의 여행(Journey to the Moon)이다. 초기 SF(?) 영화라고 할 수 있는 달나라로의 항해를 재방문 한 것처럼 보인다. 다만, 달나라로의 항해가 우주 낭만주의, 이국주의 혹은 제국주의적 시각을 어쩔 수 없이 포함하고 있다면, 켄트리지의 작업은 그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회고적이며 멜랑콜리하게 다룬다.

여성의 옆모습처럼 보이는 어떤 성좌를 보여주며 이 비디오는 시작한다. 주인공 할아버지(켄트리지 본인이자 상징적으론 예술가)은 이 여성을 무척이나 그리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달나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는 달나라로 떠나기 위해 사전을 뒤적거리며 조사를 시작한다. 여기서 여러가지 이미지들이 나오는데, 솔직히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대포도 나오는 것 같고, 지게꾼도 나오는 것 같고, 부르주아 여성도 나오는 것 같고. 기술 발전의 역사를 파노라마로 보여주는 듯 하다. 아무튼 주인공은 에스프레소 잔 모양을 한 망원경으로 이리저리 관측도 하고 연구도 열심히 한다. 그녀에게 닿기 위해. 그리고 커피포트 우주선을 타고 어찌어찌 달나라에 도착하는데...

우주선 안에서 에스프레소 잔 모양을 한 망원경을 들고 밖의 풍경을 보니, (사전에서 발견한 기술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그림자의 행렬이 쇠퇴한 듯한 모습으로 처량하게 지나간다. 하지만 달에 도착해서도 그 여성을 찾을 수 없었고, 주인공 할아버지는 크게 낙담한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그 여성을 생각한다. 아니, 마치 그 여성은 유령이 되어 할아버지의 어깨를 쓰다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혹은, 그러니까 이미 할아버지의 곁에 있었던 것처럼 제시되는데) 할아버지는 그 존재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다. 그녀는 곧 사라지고 만다.

비디오의 마지막에서 그 여성은 우주선 밖을 걸어 나가며 자신의 그림자를 할아버지에게 보여준다. 할아버지가 그녀 자신의 그림자를 볼 수 있게 말이다. 아마 이제 그 여성은 할아버지의 곁에 머무르는 유령이 아니라, 역사-그림자-머나먼 기억으로 남겨질 것이다. 할아버지는 쓴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켄트리지 치고는 굉장히 서정적인 작업이다. 다음은 켄트리지의 인터뷰 중:
“A bullet-shaped rocket crashes into the surface of the moon, a fat cigar plunged into a round face. When I watched the Méliès film for the first time at the start of this project, I realized that I knew this image from years before I had heard of Méliès. I was far advanced in the making of the fragments for Méliès. I had resisted any narrative pressure, making the premise of the series, what arrives when the artist wanders around his studio. What arrived was the need to do at least one film which surrendered to narrative push.” (source: http://artdaily.com/index.asp?int_sec=2&int_new=15156&b=contemporanea#.VQkgTRCsUug)

아래는 달나라로의 항해:


Georges Méliès, A Trip to the Moon, 1902.

A Trip to the Moon (colored)

하지만 이 대목에서 나는 에반게리온이 생각도 나고...다음은 그 유명한 노래, 에반게리온 두 번째 극장판 주제곡,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2015년 3월 14일 토요일

Doig's Painterly Painting

Peter Doig, The Architects Home In The Ravine, 1991, Oil on Canvas, 200x275cm.

Peter Doig, the Hitchhiker, 1989/90, Oil on sack cloth, 152x226cm.
Peter Doig, Ski Jacket, 1994, Oil paint on 2 Canvases, right 295x160cm left 295x190cm.

Peter Doig, Saint Anton (Flat Light), 1995-1996, Oil on canvas, 275x275cm.

오늘날 페인팅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냥 화가가 그렸고, 그것은 존재할 뿐이다. 아름다운 사물로서, 예술 작업으로서. 하지만 다른 미술과는 다르게, 페인팅은 사람들이 사고 즐기고 다시 판다. 그 만큼 사람들은 페인팅을 좋아한다. 페인팅이 보수적으로 생각되어지는 이유다. 그렇다고 페인팅 스스로가 그렇게 태어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도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듯이. 그냥 좀 부유하게 태어난 아이가 그 이유만으로 쭉 비난받는 인생을 산다면, 그것도 잘못된 일이지 않겠는가. 어쩌면 오늘날 페인팅은 많은 부분에서 스스로가 짊어지지 않아도 될 비난을 떠 안고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Painting should be accomplishing more"라는 말은 한 번쯤 다시 상기할 만 하다.

2015년 2월 22일 일요일

Vija Celmins의 밤하늘 그림들


Vija Celmins, Night Sky 3, 2002. Aquatint and drypoint on paper, 37.2 x 47.1 cm

Vija Celmins, Star Field III, 1982-3. Graphite on acrylic ground on paper, 53.3 x 68.6 cm.

SIMON GRANT: It's definitely a different feeling. You get a very good sense of intimacy with the desert and ocean works. The galaxy works are more intensely made.

VIJA CELMINS: The material, charcoal and pencil and paper are bigger players in the night sky pieces. The work is much more abstract, and even though your mind says this is a deeper space, I think the uniform nature of the graphite sitting on that surface keeps you engaged in the flat plane. There really is no depth to it.

SIMON GRANT: How are the pencil marks actually made?

VIJA CELMINS: The graphite is just laid on bit by bit, as dense as it can go. The white spaces - the stars -are patches of the paper that have been left blank; I have drawn around them.

SIMON GRANT: Some of the pencil marks are so thickly laid on, it almost looks like paint.

VIJA CELMINS: Yes. Star Field III (1983) took about a year to do. This is a terrific drawing, though I thought I would go crazy if I did another. I did do three, then I stopped drawing totally. As you can tell, even though I try to keep my brain out of things, I'm always beating up the work with a relentless criticising of it. I went back to painting, and did a series of paintings that looked very much like this drawing - dense, layered, very physical. I used to say they looked like a rubber tyre or Formica, they're so closed off and over-finished. I didn't get back to drawing for about ten years, until around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