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압축과 생략이 강화하는 것은 일찍이 김지하가 「현실동인 제1선언」(1969)에서 미술에 소구했던 전형성이다.[1] 하지만 배병희의 전형은 현실동인의 유토피아니즘, 그러니까 오윤이 형상화하고 10여년 뒤 민중이란 이름으로 발견되는 저항적 판본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당연하게도 「제1선언」과 시간차를 두고 나타난 이 조각은 미래적이라기보다 회고적이고 또 다소 멜랑콜리한데, 호명된 시민이 특별한 것 없는 하루하루를 똑같이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인이란 점에서, 「제1선언」과 비슷한 시기, 1960년대 말 문학계에서, 참여 담론과 정면으로 맞서며 제출됐던 또 하나의 주체, 소시민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소시민 문학의 경우
「새시대 문학의 성립—인식의 출발로서 60년대」(1968)에서 문학평론가 김주연은 “새시대 문학의식의 기본심리”가 소시민 의식임을 천명하며 전후세대와 세대론적 단절을 시도했다.[2] 새 시대를 열었을 4.19 혁명 이후에도 강력하게 잔존하고 있던 전근대적 유산과 식민지 피해서사, 그것을 민족주의 담론을 통해 정치화하는 데 익숙한 참여진영. 이것들과 급진적으로 단절하기 위한 전략으로 김주연이 불러세운 것은 근대적 주체인데,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시민이 아니라 소시민이었다는 점이다.
곧이어 백낙청이 지적했듯, 적극적 자유를 구가하며 공화주의를 실현하는 시민과 달리, 자주 소시민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상황 논리에 쫓겨 당장 먹고사는 일에 매달리는 소극적 존재로 이해되었다. 반면, 김주연에게 소시민은 자기만의 의식으로 개별화한 개인의 내면을 포착하는 새로운 모델로서, 근대적 주체를 긴요하게 요청하던 시대에, 상황적으로 채택한 일종의 극약처방이었다. 소시민 문학은 거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대신, 사사롭게 의식에 포착된 외부 세계를 세부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소시민 문학의 대표격인 『무진기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된 대화를 나는 들었다.”
김주연은 이런 미적 의식을 트리비얼리즘(trivialism)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에 따르면, 트리비얼리즘은 사소한 것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오히려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의 확인”하면서 “사물에 대한 인식의 눈뜸”을 통해 “아름다운 개성”을 창조하는 것이다.[3] 사소함의 발견은 김승옥이 개인의 내면에 현전한 광경을 재잘재잘 묘사하고, 여학생, 산책자, 샐러리맨 등 배병희가 오며 가며 일상적으로 마주친 인물을 말 없는 조각으로 하나씩 하나씩 새겨나갈 때 비슷하게 발휘되는 감각이며, 이는 거듭, 민중미술에서 포착하고자 했던 ‘현실’이나 ‘주체’와는 매우 다른 현실 감각이다.
실로, 임화 같은 전세대의 비평가부터 백낙청을 거쳐 민중미술가에 이르기까지, 당파적 리얼리스트에게 트리비얼리즘은 총체성의 프로그램을 모자이크처럼 만들어버리는 매우 성가신 감각이었다. 그럼에도 트리비얼리즘은 어떤 면에서, 리얼리즘의 리얼리즘으로서, 리얼리즘이 구현하는 현실 그 이상의 초과-현실을 포착해냈다. 그렇지 않다면 「사실주의적 재인식」(1937)에서 임화는 왜 그렇게 트리비얼리즘으로부터 리얼리즘을 구별해내려고 했을까?[4] 한편, 그렇다고 해서 트리비얼리즘이 모더니즘에 아주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국문학자 황정아가 날카롭게 파악했듯이, 소시민 문학이 꾀한 ‘내면으로의 선회’는 절반의 모더니즘에 불과한데, 서구 모더니즘이 근대 비판의 틀을 가졌다면, 전자의 경우 소외 상태를 외려 ‘건강한 소시민 의식’으로 봤다는 점에서—그런 점에서 문학의 압축 근대화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그렇다.[5]
소시민 리얼리즘
트리비얼리즘은 그래서, 형식적으로, 개인의 내면과 외부적 현실 양극단 사이에 고속도로를 놓는다. 이것이 트리비얼리스트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사이에서 미운오리새끼 취급을 받는 이유처럼 보인다. 배병희의 경우 역시 그러한데, 리얼리스트적 관점에서, 소시민의 전형을 형상화한 《빌딩 위의 시민들》은 2000년대의 구본주가 <아빠의 청춘>(2001)이나 <선데이 서울>(2002) 같은 작업에서 형상화하려 했던 샐러리맨의 전형과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한편, 단순해서 둔탁해 보이기까지 하는 조각이 보여주는 적막한 심리적 상황은, 되다만 빌딩이 좌대로 보이는 순간,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브랑쿠지의 조각으로 유명하게 논증한, 모더니즘 조각의 탄생 설화와 가까워진다. 좌대를 얻은 순간부터 조각은 기념비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 어디로든 돌아다닐 수 있고 또 판매될 수도 있다. 하지만 《빌딩 위의 시민들》은 실로 그 어느 쪽에 가도 만족스럽지 않다.
거듭, 애초에 1960년대에 소시민 모델은 리얼리즘적 세계관이 집권하던 시기, 거기에 대항하는 상황적 대항논리로서 등장했다. 하지만 소시민의 모델은 마치 땔감 마냥 1970년대에 시민에 의해 반박된 후, 시민은 다시 재빠르게 민중으로 다시 만들어져 1980년대 민중미술에서 정점을 찍었다. 민주화 이후 재출현한 시민은 ‘깨어있는 시민’으로, 정치학자 최장집의 관점에 따르면, 진보운동의 계보 위에 있는, 소시민론이 절연하고자 했던 도덕주의의 한 형태로 다시 복귀했다.[6] 그래서 외부 세계에 차라리 냉소적인 주체에 긍정성을 부여한 경우는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난 야심 찬 예술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빌딩 위의 시민들》은 어떤 면에서 동시대 가속주의적 세계관에서부터 멀찌감치 벗어나 있다. 매우 느린 속도로 그것이 재현하고자 결심한 것은 차라리 50여년 전 제출되었다 폐기된 모더니즘의 낭만주의적 판본이다.
《빌딩 위의 시민들》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그래서 소시민의 꿈에 대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실로, 역사상 혁명 주체 모델은 모두 엘리트가 고안하고 피억압자에게 요구되었다. 여기서 소시민, ‘역사와 계급의식’보다는 생존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약삭빠른 인간은 어느 틈에도 낄 수 없었다. 속물로 매도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중간 계급을 긍정하고자 했던 소시민 모델은 《빌딩 위의 시민들》에 와서 민중처럼 재현될 권리를 다시 얻었다. 《빌딩 위의 시민들》이 재현하는, 그래서 기념하는 일상, 대부분 소시민 문학을 이끌어가는 힘은 사실 평범한 사람들이 꾸는 꿈이다. 이를테면 다 같이 적당히 건강하게 일하면서 오래 잘 사는 것. 이런 소박한 꿈이 만약 소시민 의식이라면, 《빌딩 위의 시민들》은 그런 소망 이미지를 아주 조금씩의 붉은 색과 함께 사물에 각인한다.[7] 그런 의미에서는 《빌딩 위의 시민들》을 소시민 리얼리즘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듯싶다.
김주연은 이런 미적 의식을 트리비얼리즘(trivialism)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에 따르면, 트리비얼리즘은 사소한 것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오히려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의 확인”하면서 “사물에 대한 인식의 눈뜸”을 통해 “아름다운 개성”을 창조하는 것이다.[3] 사소함의 발견은 김승옥이 개인의 내면에 현전한 광경을 재잘재잘 묘사하고, 여학생, 산책자, 샐러리맨 등 배병희가 오며 가며 일상적으로 마주친 인물을 말 없는 조각으로 하나씩 하나씩 새겨나갈 때 비슷하게 발휘되는 감각이며, 이는 거듭, 민중미술에서 포착하고자 했던 ‘현실’이나 ‘주체’와는 매우 다른 현실 감각이다.
실로, 임화 같은 전세대의 비평가부터 백낙청을 거쳐 민중미술가에 이르기까지, 당파적 리얼리스트에게 트리비얼리즘은 총체성의 프로그램을 모자이크처럼 만들어버리는 매우 성가신 감각이었다. 그럼에도 트리비얼리즘은 어떤 면에서, 리얼리즘의 리얼리즘으로서, 리얼리즘이 구현하는 현실 그 이상의 초과-현실을 포착해냈다. 그렇지 않다면 「사실주의적 재인식」(1937)에서 임화는 왜 그렇게 트리비얼리즘으로부터 리얼리즘을 구별해내려고 했을까?[4] 한편, 그렇다고 해서 트리비얼리즘이 모더니즘에 아주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국문학자 황정아가 날카롭게 파악했듯이, 소시민 문학이 꾀한 ‘내면으로의 선회’는 절반의 모더니즘에 불과한데, 서구 모더니즘이 근대 비판의 틀을 가졌다면, 전자의 경우 소외 상태를 외려 ‘건강한 소시민 의식’으로 봤다는 점에서—그런 점에서 문학의 압축 근대화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그렇다.[5]
소시민 리얼리즘
트리비얼리즘은 그래서, 형식적으로, 개인의 내면과 외부적 현실 양극단 사이에 고속도로를 놓는다. 이것이 트리비얼리스트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사이에서 미운오리새끼 취급을 받는 이유처럼 보인다. 배병희의 경우 역시 그러한데, 리얼리스트적 관점에서, 소시민의 전형을 형상화한 《빌딩 위의 시민들》은 2000년대의 구본주가 <아빠의 청춘>(2001)이나 <선데이 서울>(2002) 같은 작업에서 형상화하려 했던 샐러리맨의 전형과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한편, 단순해서 둔탁해 보이기까지 하는 조각이 보여주는 적막한 심리적 상황은, 되다만 빌딩이 좌대로 보이는 순간,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브랑쿠지의 조각으로 유명하게 논증한, 모더니즘 조각의 탄생 설화와 가까워진다. 좌대를 얻은 순간부터 조각은 기념비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 어디로든 돌아다닐 수 있고 또 판매될 수도 있다. 하지만 《빌딩 위의 시민들》은 실로 그 어느 쪽에 가도 만족스럽지 않다.
거듭, 애초에 1960년대에 소시민 모델은 리얼리즘적 세계관이 집권하던 시기, 거기에 대항하는 상황적 대항논리로서 등장했다. 하지만 소시민의 모델은 마치 땔감 마냥 1970년대에 시민에 의해 반박된 후, 시민은 다시 재빠르게 민중으로 다시 만들어져 1980년대 민중미술에서 정점을 찍었다. 민주화 이후 재출현한 시민은 ‘깨어있는 시민’으로, 정치학자 최장집의 관점에 따르면, 진보운동의 계보 위에 있는, 소시민론이 절연하고자 했던 도덕주의의 한 형태로 다시 복귀했다.[6] 그래서 외부 세계에 차라리 냉소적인 주체에 긍정성을 부여한 경우는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난 야심 찬 예술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빌딩 위의 시민들》은 어떤 면에서 동시대 가속주의적 세계관에서부터 멀찌감치 벗어나 있다. 매우 느린 속도로 그것이 재현하고자 결심한 것은 차라리 50여년 전 제출되었다 폐기된 모더니즘의 낭만주의적 판본이다.
《빌딩 위의 시민들》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그래서 소시민의 꿈에 대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실로, 역사상 혁명 주체 모델은 모두 엘리트가 고안하고 피억압자에게 요구되었다. 여기서 소시민, ‘역사와 계급의식’보다는 생존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약삭빠른 인간은 어느 틈에도 낄 수 없었다. 속물로 매도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중간 계급을 긍정하고자 했던 소시민 모델은 《빌딩 위의 시민들》에 와서 민중처럼 재현될 권리를 다시 얻었다. 《빌딩 위의 시민들》이 재현하는, 그래서 기념하는 일상, 대부분 소시민 문학을 이끌어가는 힘은 사실 평범한 사람들이 꾸는 꿈이다. 이를테면 다 같이 적당히 건강하게 일하면서 오래 잘 사는 것. 이런 소박한 꿈이 만약 소시민 의식이라면, 《빌딩 위의 시민들》은 그런 소망 이미지를 아주 조금씩의 붉은 색과 함께 사물에 각인한다.[7] 그런 의미에서는 《빌딩 위의 시민들》을 소시민 리얼리즘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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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지하, 「현실동인 제1선언」 , 《현실동인》, 1969, (『시대정신 3』, 일과놀이, 1986, pp.78-102에 재수록).
2) 김주연, 「새시대 문학의 성립-인식의 출발로서 60년대」, 『아세아』, 창간호, 1969, p. 265.
3) 위의 글, pp. 255-257.
4) 임화, 「사실주의의 재인식—새로운 문학적 탐구에 기하여」, 《다빈치 원문/전문》(웹사이트), 1937,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4704 (접근: 2023. 7. 18.)
5) 황정아, 「소시민문학론과 ‘근대화’」, 『인문논총』, 74. 2017, p. 218.
6) 최장집,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법에 관한 하나의 논평」, 『경제와 사회』, 85, 2010, p. 103.
7) 발터 벤야민이 소망 이미지, 소망 상징 등으로 부르는 것은 집단 공동체의 꿈으로, 표면상 가장 자본주의적인 것이면서도 그 이면에는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를 내포하고 있다. 벤야민은 초현실주의를 분석하면서, 철지난 상품에서 그런 혁명의 에너지를 예술이 발견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발터 벤야민, 「초현실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08.
2023.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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