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31일 화요일

안산으로 온 이유

최소한 내가 알기로, 미술에 관해서 서울은 망했다. 뭔가 새로운 걸 할 동력을 모두 상실했다. 불만만 많고 혐오가 판친다. 이 가운데 정치적 제스쳐만이 욕망의 주변을 감돈다.

2016년 5월 30일 월요일

Love will Conquer All - Lionel Richie

하이 - 등대가족

까먹기 전에

하나 기록. 저번주에 광주 내려갈 때. 용산역에 가서야 깨닫게 된 사실인데, 이 자리에 서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려가는 동안 내내 불편했고 그날 금요일을 곱씹었다. 광주는 정말 나랑 잘 안 맞다. 물론 광주는 꽤나 억울하겠지만.

언제부턴가

전시 포스터에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타이포그라피와 추상화된 도형으로 버무려진다. 그것을 모두가 세련된 것이라고 학습하고 있다. 퍽 징후적이다.

2016년 5월 29일 일요일

조영남 사건

아ㅏㅏ 내가 여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스크랩] 인터뷰의 기술

1) 인터뷰 성격

의례적 시간 : 영화관에 들어가서 영화가 시작되면 불이 꺼지고 영화에 몰입하다가 영화가 끝나 불이 켜지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인터뷰가 시작되면 과거로 돌아갔다가 인터뷰가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인공적인 구조물 : 일상적인 대화가 아니라 묻고 답하는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보니, 인공적인 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비구조화 된, 비지시적인 인터뷰는 좋게 이야기하면 유연하고 융통성이 넓다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삼천포로 빠질 수 있다는 것, 적게 질문하고 많이 이야기하도록 하는 게 잘하는 인터뷰다.




2) 인터뷰 전략

자연스럽게 행동하라:
인터뷰 시작하기 전 인터뷰이는 긴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편한 장소에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끔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메모를 할 때도 손에 꼭 들어가는 노트에 최소로 움직이며 적고, 이야기 흐름을 깨지 않아야 한다. 인터뷰는 기본적으로 흐름이고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인터뷰이의 눈을 맞추며 열심히 듣는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인터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진행해야하며, 인터뷰이의 모든 행위를 기록한다. 인터뷰이의 표정, 제스처, 목소리 등 모든 요소가 중요하다. 인터뷰 할 때 항상 ‘당신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고,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라는 태도로 눈을 맞추며, 상대가 존중받고 관심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야 더욱 진솔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구술자가 침묵을 채우게 하라 :
인터뷰하는 도중 인터뷰이가 말을 멈출 경우 대체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기 쉬운데, 상황을 잘 살펴야한다. 말을 잘하다가 갑자기 멈추면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순간이 되어 채 1~2분이 안 되는 순간이 30분처럼 길게 느껴질 수 있다. 그 어색한 순간을 모면하려고 보통 다음 질문을 바로 하게 되는데, 본인이 자발적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한다.


3) 녹음기 사용

“구술 그대로” 기록의 중요성 : 인터뷰이가 쓰는 단어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중요하고, 시대상을 보여줄 수도 있기 때문에 구어나 사투리를 살려서 그대로 기록되어야 한다.

녹음 실패에 언제나 대비 : 녹음을 했다고 했는데 끝나면 녹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보완용까지 두 대가 있어야 하며, 자료로써 활용하겠다면 녹음기 전용 보이스레코더로 녹음해야 한다.


4) 질문하기

광범위한 질문에서 구체적인 질문으로,

비지시적인 질문에서 지시적인 질문으로,

개방적인 질문에서 특정한 질문으로 진행한다.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지’에 주의하라 / 사실이 이야기되어지는 순서도 또한 사실이다 :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가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대기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 에피소드, 저 에피소드 연도를 왔다갔다 한다. 대체로 자신에게 중요하고 즐거운 일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야기되는 순서를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인터뷰의 흐름을 잡는다 : 1대 1 대면에서 기가 눌리지 않게 분위기를 이끌어 나갈 수 있어야 하고, 주제별 인터뷰나 인터뷰 시간이 한정되어 있을 때는 흐름을 조절해야 한다. 말이 많은 인터뷰이에게는 호응을 하며 다른 화제로 돌려주고, 종횡무진하는 이에게는 탁탁 쳐준다.

추후인터뷰를 하라 : 어떤 인터뷰도 한 번에 끝나는 건 불완전하므로 추후 인터뷰가 필요하며, 사진 자료 등이 필요할 경우 요청한다.

꼭 만나서 인터뷰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공개동의서 : 인터뷰 내용에 대한 공개동의서를 받을 때에는 처음부터 받는 게 아니라 인터뷰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을 때, 특히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인 다음에 받는 것이 좋다.


5) 인터뷰와 기억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좋은 것을 기억한다. 과거의 경험에 대한 지속적인 재평가 경험이 재현되는 형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진다.


구술자의 사회적 위치 변화 + 시간의 흐름 :
인터뷰할 때 정치적으로 미묘한 것들은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한편 사건을 겪었던 사람이 주로 사건을 기억한다고 알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이 더 잘 기억할 수도 있다. 어떤 사건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터뷰를 하려고 하지만, 사건을 더 잘 조망할 수 있는 지점도 있고 객관적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을 인터뷰하는 게 좋을 수도 있다.

망각의 바다에 조금씩 떠있는 섬들이 기억 :
자기가 경험한 것을 모두 기억하는 것이 아니며 기억하는 것이 있더라도 자신의 경험 중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어떤 인간도 자신의 완전한(full) 생애사를 가질 수 없다. 한편 간접경험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경험한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실은 잘못된 기억일 수 있다. 개인의 심정에 따라 왜곡되고 굴절되며 은폐되w는 경우가 있으므로 다른 교차자료를 통해 진실 여부를 파악해야 한다.

사회적 기억 상실증이 회상을 통해 상처 치유 가능 :
구술사 인터뷰는 심리 치유 역할도 한다. 역사적인 사건에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치유되는 경우도 있다.


6) 묻기에서 듣기로, 다시 묻기로

이야기꾼은 학력과 무관하며 타고난 재주가 있다. 인터뷰어가 열심히 듣고 있으면 상대는 더 열심히 이야기하게 된다.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것 자체가 이 사람이 내 이야기를 잘 듣고 있구나, 내 이야기가 이 사람에게 굉장히 중요하구나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약탈적 인터뷰의 가능성 :
묻기 중심의 인터뷰가 되면 소위 약탈적 인터뷰가 되기 쉽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 경우 내용을 치면서 질문하는 방식은 구술사 인터뷰에서는 좋지 않다. 구술사 인터뷰는 어떤 과거의 중요한 경험이라든지, 사건 자체, 그리고 어떤 식으로 기억이 되고 어떤 감정이나 당시의 상황에서의 가치관이 묻어나오는 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수집에서 상호작용 과정으로 :
예전에는 인터뷰가 정보수집이나 사회과학연구방법에서 오는 연구자의 가치중립을 고려하여 진행되었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인터뷰는 상호작용 속에서 나오는 것이고, 실제 인터뷰는 훨씬 더 감정이 이입되기 쉬우므로 많이 들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4. 인터뷰 정리

1) 인터뷰어의 자세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깔려 있어야 한다. 사람을 읽는 통찰력과 풍부한 교양 지식을 키워야 한다. 뉴스에서는 급하게 섭외되는 경우가 많아 악조건에서 기사를 만들어내는 순발력과 체력이 필수 조건이다.

2) 기록

인터뷰 후 즉시 기록:
취재 내용을 압축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그 사람의 삶이 가진 메시지를 포착하고 이를 독자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포스팅전 내용 확인 요청:
인터뷰이를 부각시키는 목적이 아니라 읽는 독자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면담일지와 녹취록 작성:
인터뷰를 정리하는데 있어 녹취록과 아카이브를 만드는 매뉴얼이 있어야 한다. 면담일지나 녹취록을 작성하면 나중에 사료로 활용하기 편하다. 인터뷰 당시에는 계획에 없었더라도 나중에 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면담 일시, 녹취록 일지, 인터뷰이, 최소한의 요약문과 색인 등을 기록하는 것이 좋다.

윤택림 - '현장조사 및 인터뷰 기술' 서울시 강의록 참조

큐레이터 토크

창동 레지던시에 다녀왔다. 송고은씨가 큐레이터 토크 한다고 초대를 했는데, 뭔가 김다움이란 작가가 전시 도면을 수집하는 프로젝트와 엮여 있어서 갈까말까 하다가 늦게라도 가보자, 해서 갔다.

토크 중 가장 쓰잘데기 없는 토크가 공공미술 토크와 큐레이터 토크인 것 같다. 어떤 흥미로운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원랜 흥미로운 이야기가 몹시 많이 나와야 정상인데...오티엘) 앞으론 큐레이터 토크는 웬만하면 나가지 말아야 겠단 생각이 든다.

그 floor plan archive라는 프로젝트는 좀 황당하달까. 그 엔트로피 낮은 종이 쪼가리로 큐레이터를 모아 놓고 무슨 이야길 하려는지 모르겠다. 아마 전시 도면 자체에 대한 페티시 같은 거겠지. 큐레이팅 프로세스가 무슨 건축 설계하듯 진행되는 줄 아는 건지. 뭔가 메타분석을 하려고 한듯하지만 분석 대상이 정보가 너무 없었다는 점에서 그냥 도면 디자인 비교에 머물렀달까. 그 작가들, 뭔가 전투력은 있는 것 같은데...

여튼 프로젝트는 큐레이토리얼 프랙티스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다는 사실 하나를 알려주긴 한다. 일종의 야심과 판타지를 겸비한.

2016년 5월 24일 화요일

미술사 정리

대바크

예술 / 노동

크티틱칼의 홍태림씨 글을 읽다가.

노동은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가? 여기엔 노동과 예술을 분리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마치 '돈이 있어야 연애'를 하지 같은 말처럼 들린다. 실제로 요즘 돈이 없어서 연애를 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같은 논리로 노동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예술을 하지 않겠다는 논조로 들리기도 한다.

노동 조건이 만약 해소가 된다면 예술과 예술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여가활동이 되는 건가? 아니, 프롤레타리아트의 미감에 부합하는 예술만이 권장될 것인가? 아니면 노동 문제가 해결된 예술가는 "자유"롭게 어떤 예술, 이를테면 초 엘리티시즘 미술을 해도 된다는 걸까? 그렇다면 여전히 프롤레타리아트는 예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인가? 그건 노동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에 그것대로 괜찮은 건가? 문화적 계급의 격차는 불평등과 아무런 관련성이 없을까? 문화는 자본이 아닌가? 등등 이런 질문은 노동에서 해방된 예술가에게도 고스란히 남는다. 현재까지 노동에서 해방된 예술가, 예컨대 교수 작가의 행보를 보면 대체로 졸라 비관적이지만, 그렇다면 이런 글을 쓰는 자는 그런 위치의 예술가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교수 신분의 작가는 당연히 더 좋은 작업을 해야 하는 데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는 걸까? 그런데 그런 것이 지금 우리가 하려는 예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소한 구축주의자들로부터 배우자. 그들은 현재 자신의 예술을 노동화하려고 했다. 역사화하려고 했다. 변화하고 생성하는 장으로 만들려고 했다. 예술이 빠진, 예술과 노동의 개념 논쟁, 그러니까 (예술) 제도는 이러이러해야 한다 같은 제도비판은 너무너무 지겹다. 호두는 안에서 썩고 있는데, 호두 껍데기를 어떻게 까는 것이 올바른지 고민하고 있는 바보 천치다.

2016년 5월 23일 월요일

미안

http://ewsngod.nayana.kr/zexe/frecri/13633

아앜ㅋ 이렇게 재능있는 분이 얼른 이런 잡다한 걸 대상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작업에 매진하고 좋은 작업 봐서 씬나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좋은 사회를 내가 만들어야 할 텐데 암쏘쏘리벗알럽유

여튼 요새 크리티칼 선방하네! 정강산씨는 글이 폭풍 느시고 레알 맑시스트로 진화중...
http://ewsngod.nayana.kr/zexe/mainissue/13617

David Joselit, Near Contact (2016)

펠로우쉽에서 커먼프랙티스라는 팀을 알게 됐고(사실 예전에 듣긴 했는데 듣고 바로 까먹었다) 검색해보니 최근 이런 세미나를 개최한 것 같다. 조슬릿이 글을 썼네! 보기가 불편해서 조슬릿 글을 발췌해 블로그로 옮긴다. 오..주옥같다.

Following the 2008 financial crisis, the slogan “Too big to fail” gained wide currency in the United States. Despite its urgency, this phrase was nothing new. It was merely the latest iteration of a principle as old as capitalism itself: “Grow or die.” Nonetheless, “Too big to fail” neatly summarized a set of values that often go unchallenged in the context of art. It contended that a bank (or any other kind of corporation of comparable magnitude) is so fully integrated in the national economy that its collapse will lead to systemic crisis. More insidiously, “Too big to fail” implicitly asserted the public good of capitalism, which when having attained a scale at which it is “too big to fail,” must receive public funds. A certain equation is at work here: BIG=PUBLIC.

The risks of bigness in finance, as when ordinary home mortgages are packaged and repackaged so many times that their potential “toxicity” is buried within countless layers of securitization, is occluded by a fuzzy sense of public good (i.e., making mortgages more widely available; stimulating the economy) without acknowledging wildly disproportionate benefits to the 1%. With the exception of Occupy, there has been little serious acknowledgement that, in fact, BIG=PRIVATE when it comes to the profits reaped from businesses that are “too big to fail.” On the contrary, as demonstrated by the bailout of General Motors, our leaders act on the possibly cynical presumption that BIG=PUBLIC.

There is a converse dynamic when it comes to small institutions. If some enterprises are “too big to fail,” others are presumably “too small to survive.” Why do they refuse to grow? If growth is necessary for success, staying the same size means you are destined to disappear.

When it comes to art institutions, “bigness” is measured not simply by dollars but also by collection, and attendanc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and the Museum of Modern Art ranked third and thirteenth respectively on the Art Newspaper’s 2013 global survey of museum attendance—their contribution to New York’s tourist revenue is significant, but does this enhance or detract from their status as public institutions? They seem to conform to the equation, BIG=PUBLIC, since a large number of people visit their galleries. But if “public” describes access rather than gross audience numbers then these large museums have failed us on two grounds. First, there is shockingly limited access to the collections that our tax dollars directly or indirectly help to acquire. Based on information on their website, it seems that MoMA exhibits something like 1% of their collection at any one time.1 And yet, unlike the New York Public Library, where patrons may request virtually anything in the stacks, the right to view this 99% of our “public” artistic heritage is extremely difficult to obtain, even for scholars.2 There are certainly legitimate practical concerns and expenses in moving art out of storage and into public view, and yet, how can an institution that functions like a bank, hoarding its assets, be credited as genuinely public—like a library? Shouldn’t there be more serious innovation around genuinely accessible “open storage” that would allow for wider enjoyment and study of what is held in New York’s great museum collections? And second, with the exception of the Metropolitan Museum, which requests a recommended donation, our big museums are so prohibitively expensive as to prevent many citizens from entering (outside of the short and oppressively crowded weekly free hours). The newly reopened Whitney Museum charges $22 admission, which is over two times minimum wage in New York. Do we really believe that a “diverse” audience is desired when admission is a quarter day’s pay for many New Yorkers (including presumably many artists and art handlers), and when the target audience is visitors to the Highline (which is free), many if not most of whom are presumably tourists? In explaining the Whitney’s decision to raise its admission price from $20 to $22, Director Adam D. Weinberg (inadvertently) gave a brilliantly concise definition of how his institution defines the public, in a comment to the New York Times: “There was some debate internally, he said, about raising the price to $25, the cost of the Guggenheim and the Museum of Modern Art. But he argued for $22, partly in recognition of the public spirit that fueled the city’s $57 million contribution to the project.”3 In other words, the Whitney’s obligation to the public vis-à-vis its cost of entry is to provide middle class visitors the extra cash to buy a Starbucks coffee.

On the other hand, the institutions included in Common Practice New York (and all the other small arts organizations in this city and cities around the world) are often considered elitist, and therefore not deserving of significant public funding—or even the insignificant public funds that remains for the arts.

Here then are the official assumptions with regard to the question of scale and the public good: BIG (capitalization of finance or audience)=PUBLIC. SMALL (capitalization of finance or audience)=ELITIST.

But in fact this equation inverts the actual situation. It is the “public” (too big to fail) that disproportionately benefits elites, whereas it is the “elitist” (too small to survive) that serves communities in ways that other, larger organizations cannot. Might this ideological inversion be just as insidious and frightening as it sounds? Is it possible that artists in New York City are not only supposed to decorate the salons of hedge fund managers—and thus be implicated in financial elitism—while also taking the rap for intellectual elitism through their lively participation in specialized art discourse?

The term critique is tossed around as though it were a grenade with its needle pulled. But where does “critique” inhere? In my view, it is generally ineffectual in individual works of art, whose transgression can be easily neutralized in the halls of BIG. No, our political challenge is to maintain alternate forms of public space for exhibition and debate. To do so, we must exit the ethos of “Too big to fail.” What follows is a seven-point litany “in praise of small.”

ONE The Institution Is a Proposition

One of the great inventions of conceptual art was its redefinition of the artwork as a proposition. This meant, as Lawrence Weiner famously declared, that whether or not a work of art were physically produced, and in what form, does not matter at all. On the contrary, what does matter is the capacity of the proposition, as a kind of “germinal force,” to generate many possible forms. It is no coincidence that the rise of “alternative spaces” corresponds historically to that of conceptual art, since such institutions are themselves propositions. A.I.R. gallery, for example, was founded in 1972 in response to a proposition that might be phrased something like this: “There are important women artists working in New York City and beyond, but there is no space for them to exhibit and develop a common conversation in the art world as it is currently organized, a space that A.I.R. plans on providing.”

These propositions should be a strong and precise version of the conventional mission statement (which too often pertains to programmatic content but not the institution’s form itself). The exigencies of survival can make it very difficult to maintain an institutional proposition. For that reason, proposition-based institutions (which are typically but not always on the smaller side) must continually evaluate both the validity of their proposition and the degree to which it is realized effectively. Importantly, it should be recognized that sometimes the usefulness and energy of a proposition may wane. In such cases, a perfectly legitimate solution would be terminating the institution.

TWO Produce Networks, Not Audiences

The term community is habitually misused. Too often it designates little more than a market niche based on shared identity markers, such as the “gay community,” the “black community,” or the “Jewish community.” When institutions say they serve “communities,” what they wish to prove is that their audience possesses a demographic diversity that warrants public approbation. There’s nothing wrong with this, of course—even much that is right. But such communities act like an audience (composed of isolated witness-consumers) as opposed to a public, which is united around a shared set of concerns.4

If an institution succeeds as a proposition, the public (as opposed to community) it constitutes will include those that hold the value of that proposition in common. This commonness of purpose is premised on a dynamic set of relationships rather than a supposedly stable shared identity. For this reason, propositions may generate networks—defined as a constellation of relationships—which need not be geographically restricted to the physical location of the institution.

I would argue that such networks are the most important product of many small institutions. As a market, the art world is thriving, but the entire world of artists who may or may not make commercially viable art is under threat in New York City and elsewhere, precisely through forms of gentrification that make it difficult for them to live and find workspace affordably. Now it is collectors, not artists, who tend to live in lofts, and those arts institutions that cannot afford big new buildings like the Whitney’s Renzo Piano-designed headquarters at the end of the Highline (funded, of course, by collector-trustees who expect their tastes to be exhibited) must struggle to find spaces close to public transportation anywhere in the five boroughs. What is needed is not merely the ostensible product of art spaces and museums—more exhibitions and performances to bring in the crowds—but rather more publics, more networks. This is what small arts organizations focused around a proposition can produce—in part because instead of trying to attract a mosaic of communities, they wish to constitute a dedicated public. Without such organizations New York’s art world will cease to be dynamic and alive—it will become just another distracting circus, another sanitized spectacular Broadway drawing in tourists at exorbitant prices.

THREE Size Matters

I have already claimed that capitalist values insist that “bigger is better,” making it very difficult to justify an institution’s choice to stay small. One of the greatest dangers of “Bigger is better” is that an institution may be overcome by the exigencies of survival: of keeping the lights on and the program going in a “bigger and better” space. Suddenly the need might be felt to attract a broader audience, and in so doing the values of programming must be “adjusted” in order to appeal to such an audience. Before you know it, the proposition that generated the institution is secondary to the pressure to fill space and to meet expanded budgets.

For this reason, the question of infrastructure should be pursued creatively. What kinds of facilities are necessary, and afford maximum freedom? How can they be shared with other institutions? How can they be seized upon opportunistically, either in public or through other means? Is it necessary to have a permanent site, or to own one? What is the optimal ratio between virtual and physical space? Thinking about infrastructure creatively also allows for thinking about “crossprogramming”: for instance, can or should an exhibition space also have a bar where people can meet informally and socialize? Must white boxes be separated from “black boxes,” resulting in media as isolated from one another as different demographic groups have become in the city? The point is: infrastructure has a more determining role on an institution than is often assumed. Infrastructure is not passive: it is a physical proposition. Its design and assessment should be taken as part of the creative work of the institution.

FOUR Resignify Art

Regardless of all else it is, art is a tool of gentrification. In New York City it is painfully clear that the widening gap between rich and poor is beautified by the art world’s glamour and its paradoxical whiff of populism—a sense of public-ness, which, as I’ve argued, is very difficult to sustain in actuality. What should the responsibility of art institutions be at a time when the verb to curate has migrated from the context of museums to describe, for instance, the choice of amenities in a luxury real estate development, or the selection of artisanal cheeses? In this context to curate belongs to a long line of ideological practices for producing distinction. Do those of us involved in “curating” (artists, critics, art historians, institutional curators, engaged patrons) need to assume responsibility for this massive appropriation of “art” as a tool for prettifying the dominance of the 1%?

Yes, I think so, but the problem is complex. What goes for politics in art is often little more than a good faith effort at preaching to the converted—and indeed in recent years it has typically soft-pedaled any direct critique of the patron class. Conversely, the small proportion of artists who do manage to earn a living from their work, whether politicized or otherwise, risk being considered sell-outs. There are no simple answers in response to these conditions, and this is why we need proposition-based institutions where debates around them can develop with nuance and over time. Here, different models may be tested and evaluated. Indeed, like conceptual artists, such conceptual institutions redefine what art practice can be: they participate in the resignification of art by confronting its discursive corruption through gentrification and huge wealth disequilibrium. The bigger an institution in the United States becomes, the more it is imbricated in the values and objectives of its patrons—just as in politics, where out-of-control super PACs have outsize influence in American elections. Needless to say, smaller arts organizations cannot solve these problems, but they can keep them on the agenda. It is an endless process, an endless discussion. But a sure way to kill this debate is allowing the disappearance of public spaces in which it may flourish.

FIVE Speculate

In its colloquial sense, speculation is a future oriented method of extracting profit from volatile markets. It is also a term with rich philosophical overtones, whose Latin roots encompass the meanings, “to spy out, watch, examine, observe.” In other words, speculation is an optical model as well as an economic and philosophical one. What distinguishes speculation is its futurity; in art’s context, it is a type of vision that aims to foresee, even to regulate how an artwork will behave once it enters the world.

A proposition is also a speculation on its own future. As its prefix suggests, the proposition takes a position forward into the future, opening onto various formats, actual and virtual. It is worth remembering that art’s time signature is distinctive, and largely unsuited to direct engagement in political and economic events in real time. The artwork’s temporality enfolds a long succession of pasts into its speculations in the present, which, in turn, are directed toward possible futures. The artwork is a temporal knot. Its deregulation of commodified time (measured in hours in the factory; in micro- or even milli-seconds in high-frequency trading) is precisely its philosophical and affective value.

Speculation refuses the false dichotomy established by some historians and critics between a withdrawal and surrender to capitalism—or, in other words, between resistance and selling out. This is because, while speculation is based on engagement, it refuses to engage with the conditions of the present as they are, but rather projects an array of possible futures. In other words, the speculative object (or institution) extracts itself from political exigencies by extending them backwards and forwards in time, and outward in space. Speculation makes an object out of time.

SIX Document

Conceptual art demonstrates the plasticity of information. The term plastic encompasses three registers: a now obsolete designation of sculpture, for instance, as a “plastic” art; the malleability and mold-ability of plastic as a material, including its capacity to be recycled; and the biological meaning of plasticity as a capacity for adaptation. Conceptual art demonstrates how new types of value may be produced by configuring and reconfiguring information. Art is one realm in which information is theorized, but unlike in advertising, or even in science, art’s attention to informational plasticity is seldom primarily geared to practical ends.

The legacy of proposition-based institutions is in their history—in the succession of different realizations of their proposition. Because such results are ephemeral, and rarely reside in any stable way in single objects that may be collected and maintained, documentation is essential. One might say that documentation is the collection of such organizations. Think of the Judson Church for instance. The events that took place there during the 1960s and 1970s have come to occupy a central position in twentieth-century art history, and yet they are known only very partially, largely through a limited number of documentary photographs.

Documentation should not be an afterthought, but rather an essential component of the proposition itself. If there is any truth to the assertion that art, since Conceptualism, has largely dedicated itself to the plasticity of information, then there is little reason to treat “documentation” any differently from other forms of creative expression. Indeed, documentation is one of very few products that may outlive a non-collecting institution’s program of events and exhibitions. It should be devised creatively, and remain at the center of its propositionally based mission. Documentation is and can be more than installation photos or a video recording. The question What is a document is one that many artists have explored, in order to test the limits and contours of “truth effects.” It is through documentation that institutions can speculate on history.

SEVEN Politicize

Information The struggle over information as property, and the corresponding struggle over information as a commons where individuals and groups have overlapping rights of access, as opposed to exclusive rights of ownership, are among the central political questions of our time.5 The list of examples of such conflict is long, and ranges from questions of international policy such as Edward Snowden’s disclosures regarding the NSA, to the very intimate and personal threat of identity theft. What rights do we have to prevent the “harvesting” and subsequent monetization of “our” information every time we use a credit card or turn on our cell phones—or enter a hospital for treatment? Information radiates out from our bodies, as it invades their interiors: our “selves” are the provisional and artificial construction of a contingent ratio between the alienable and the inalienable—or in other words between the information drawn from us that may be bought and sold (i.e., alienable), versus that which cannot circulate separately from us without destroying our personhood (the inalienable). Art, in its capacity to explore and express the plasticity of information, and in its ability to speculate on new forms of information, can probe this shifting terrain. While large institutions canonize—i.e., turn information into history—small arts organizations may pluralize its shapes (as in all species of conceptual art), as well as the stories it can tell. To make information malleable and mobile again in unexpected ways, and to resist its enclosure by elites and its reification into dominant narratives is to make art political.

Endnotes

1 My research assistant Joseph Henry made this rough calculation based on comparing the number of works stated as on view on MoMA’s website with their stated number of objects in the collection (excluding films and film stills). At the time of his calculation the percentage on view was less than 0.68%–1%. Of course, I acknowledge that the number can’t be absolutely verified without more careful research (though Henry sought confirmation), but it gives an accurate sense of the magni - tudes involved. Interestingly it is not only the 1% who funds museums; MoMA also shows 1% of their art.

2 Incidentally, it is impossible to bring a group of students to MoMA (who have paid admission) and speak to them in the galleries without getting a special permit.

3 Robin Pogrebin, “Whitney Museum Contemplates a Bigger Future, With Bigger Expenses,” New York Times, April 1, 2015; accessed online http://www.nytimes. com/2015/04/02/arts/design/ whitney-museum-contem - plates-a-bigger-future-witha-higher-admission-fee.html, 6/28/15

4 See Martha Rosler, “The Birth and Death of the Viewer: On the Public Function of Art,” in Hal Foster, ed., Discussions in Contemporary Culture #1 (Seattle: Bay Press, 1987)

5 For a definition of the commons in light of rights to use see Lewis Hyde, Common as Air: Revolution, Art, and Ownership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10)

source: http://commonpracticeny.org/assets/CPNY_NearContact_2016.pdf

젠트리피케이션2

펠로우쉽에서 한참동안 나온 젠트리피케이션 화두. 그때 떠들었던 걸 두서없이 복기한다. 예술이 뭔가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데 합의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변화는 기존의 것이 더이상 그것이 아니게끔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는 기존의 틀에서 항상 폭력적이다. 예술적 폭력이 가장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으로 드러난 것이 아방가르드라고 한다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물론 미래주의가 걸었던 길처럼, 항상 긍정적이지는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뒤샹 등이 한편으로 증명하듯이, 아방가르드 전체가 전체주의적 이념에 의해 추동됐냐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뒤샹조차 기존 미술계에선 꽤 오랫동안 불편한 자로 생각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럼에도 생각하는 것은 예술은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변화시키는 자는 항상 기존 질서와 그에 속해 있는 자들에게 불편함을 준다. 심지어 예술가가 들어와서 (예컨대) 마을 경제 수준이 높아져 잘 살게 됐더라 하더라도 기존의 마을을 좋아하던 사람에게는 폭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혹은 시대에 맞게 변화하고 있는 마을과 그런 변화(그것이 자본주의적 기업화든 뭐든)에 동의를 표하는 사람들에게 전통의 고수, 역사의 복원의 제스쳐는 어쩌면 척화비를 세우는 흥선대원군 못지 않은 폭력적인 역변화/(폭력으)로 보일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술가라는 행위자가 어떤 장소에서 활동을 했을 때 뭔가가 변화한다는 건 당연하다. 여기엔 분명히 어떠한 폭력성이 동반된다. 어찌보면 예술가는 불화를 일으키는 행위자, 폭력 인자에 가깝다고 말해볼 수도 있다. 기존 지역의 관습적 커뮤니티를 고수, 보전하려는 입장에서 예술가는 그런 것이다.

예술가 주도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에서 예술가는 이중의 위치를 점한다. 젠트리 아닌 젠트리파이어로서, 오로지 변화를 시키는 자의 위치에만 기입되어 있다. 그래서 장소에서 최초의 예술가는 젠트리에 가까운 젠트리파이어로 지역에선 굉장히 불편한 존재다. 폭력적인 존재다. 조금 관심있는 거주민은 지나다닐 때마다 예술가 작업실을 의구심의 눈초리로 볼 것이며, 조금 더 관심있는 거주민은 꼬치꼬치 캐묻고 제제를 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가가 장소를 점점 변화시키고 그것이 관습화 된다면, 그러니까 어느정도 안정화 단계에 오면 예술가는 거주민이 된다. 더 이상 젠트리파이어가 아닌 것이다. 바로 그때 진짜 젠트리가 등장한다.

이런 방식의 변화는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의 이해 없이 예술 작업 활동 지속과 장소 장기거주가 가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기본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조건이 흔들리는 것이다. 여기선 사회운동을 하든 지자체에 지원금을 요구하든 인프라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운동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예술과 젠트리피케이션의 관계를 함께 고찰한다기보단 젠트리피케이션을 지자체 등에게 해결하도록 맡기고/요구하고 그게 해결됐을 때 예술을 마음 편하게 해보겠다는 이분법적 사고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판적인 예술가는 있지만 비판적인 예술은 없다. 안 좋게 말하자면 미적 자폐주의.

다른 하나의 주장은 이런 것일 수 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예술과 예술가는 젠트리파이어와 같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때 젠트리파이어는 단순히 지대를 올려주는 행위자라기 보다 '변화'와 관련된 다양한 레이어와 관련되는 행위자라고 봐야한다. 예술과 사회를 연결지어 생각하고 싶다면 나는 이런 방식이 좀 더 이득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의 변화 능력을 아방가르드적 실천으로 다시 생각하기 위함이다. 그랬을 때 아방가르드 예술이 폭력을 행사해야 하는 대상은 분명하다. 참을 수 없이 자본화된 삶 과정 그 자체다. (나중에 다시 정리하겠음.)

광주 펠로우쉽 짧막 후기

를 주르륵 썼다가 구정연씨 발언이 경험을 바탕으로 진솔한 이야길 해줘서 좋았다고 아름답게 축약. 근데 정말 이 구성이 최선이었을까...? ㅎ 라고 사족.

2016년 5월 22일 일요일

여혐 남혐 패턴

1. K 남성에 의한 여혐 사건으로 무고한 여성 피해자가 발생한다

2. K 남성 일반을 가해자로 몰아가는 K 남혐 여론이 만들어진다. / (심리적으로 무고하고 싶은) 남성이 기득권적 가해자로서 K 남성 일반의 자기 반성을 요구한다.

3. 그 여론으로 K 남성 중 무고한 남성 피해자가 발생한다. / 그 여론에 (사상적으로) 유고한 K 남성 중 불편함을 느끼는 자가 발생한다.

4. 무고한 피해자 남성은 일반화의 오류를 들며 남혐 여론을 비판한다. / 유고한 K 남성은 여혐 여론을 만든다.

5. 남혐 여론이 증폭된다. / 여혐 여론이 증폭된다.

6. 헬조선.

국내 텔리비전 처음

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50509040200004&mobile

진공관 TV의 발명

http://m.zdnet.co.kr/column_view.asp?artice_id=20140520090717

2016년 5월 20일 금요일

젠트리피케이션

젠트리피케이션에 관해 혜민과 떠들다가...

젠트리피케이션의 고전적 정의는 노동계급이 사는 (후진) 동네에 중간계급이 들어와서 그들이 사는 환경을 상향시키는 상황을 말한다. 핵심 원인은 주거의 이동이며, 그 결과는 어떤 '변화'다. 주체는 젠트리, 즉 중간계급이며, 행위자도 젠트리다. 거주민이 바뀌면서 복합적인 삶의 조건, 그러니까 장소가 변화한다. 어느정도는 중성적인 정의일 테다. (물론 여전히 거주민이 전치되며 원주민이 쫒겨나는 현실은 부정적이다.)

오늘날 젠트리피케이션을 한국에서 쓰는 용례는 부동산 투기와 맞물려 있다. 재개발 지역의 지주는 이미 젠트리 계급이며 이들은 그런 저평가되거나 잠재적 고부가가치 부동산을 이미 다량 확보하고 있는 자다. 언젠간 오를 수밖에 없는 땅을 싼 값에 매수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는 자다. 이것이 고전적 젠트리와 다른 점이다. 고전적 젠트리는 스스로가 젠트리이자 젠트리파이어이지만 오늘날의 젠트리는 대리 젠트리파이어를 내세운다.

때로는 맛집일 수도, 때론 예술가일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비싼 도심을 피해 도심과 가깝지만 상대적으로 지대가 싼 곳에 모여든다. (이것은 지대가 쉽게 상승할 수 있는 가능한 조건이면서도 젠트리파이어에게 필요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리고선 이들은 유사 젠트리(파이어) 역할을 하며 지역을 활성화한다. 이들이 성공적으로 행위할 수록 지대는 상승하고 젠트리는 반사이익을 챙긴다. 그 이익이 상종가를 쳤을 때, 원주민과 젠트리파이어는 퇴출된다.

여기서 대리 젠트리파이어(예술가 등)는 이중적인 위치에서 움직이는 것 같다. 시작 단계에서 이들은 원주민보다 젠트리에 가깝다. 지역의 문화적 환경을 좋게 말해 개선, 변화, 나쁘게 말해 퇴출시키는 자들이다. 하지만 마지막엔 젠트리보다 원주민에 가깝다. 젠트리에 의해 원주민과 함께 쫒겨난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용어는 꼭 재개발로 인해 원주민이 퇴출되는 부정적인 현상'만'을 일컫지 않는다. 젠트리파이어가 가져오는 모든 '변화'가 젠트리피케이션이다. 여기엔 어떤 긍정적인 역동성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판 이론의 관심은 소외된 것이다. 따라서 99가 좋아도 1이 안 좋다면 그 1때문에 비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강남역 살인 사건

말을 잘 써야 하는 문제다. 페미니즘을 말하고 싶다면 가부장제 윤리가 현재 집단 의식 안에, 그리고 살인자의 의식 안에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는지 살피고 비판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그리고 살해자 자신의 진술 "한국 여자가 싫었어요" 같은 직접적이고 단순한 진술에 기대어 살인 동기를 단순히 "여성혐오"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살해 동기를 심층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여성혐오는 드러난, 즉 현상이다. 분명히 심급에서 중층적인 레이어가 있을 터, 살해자의 입이 아니라 정치학자 사회학자 미학자 심리학자 등등 각개각층의 전문가들이 한 번 심각하게 달려들어서 이 문제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빠지고서 서로 다른 성을 공격하는 양상은 공해에 가깝다.

2016년 5월 19일 목요일

Claire Bishop, Zones of Indistinguishability: Collective Actions Group and Participatory Art (2011)

http://www.e-flux.com/journal/zones-of-indistinguishability-collective-actions-group-and-participatory-art/

K-혐오 발언

K-혐오 발언 지겹다. 그냥 떠벌이지 말고 제발 좀 떠나라. 떠날 수 있다면, 떠날 수 있을 때. 안 잡는다. 종종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애정없는 비난을 공공연하게 퍼붓는 (영웅 심리를 가진) 사람을 보면, 무슨 정신병이라도 걸린 게 아닌가 싶다. 무리 안에서 사는 자신으로부터 유체이탈을 감행해 무리 밖으로 빠져 나와서 무리 안의 자신을 못본 척하면서 그 밖의 사람들에게 악질 비난을 퍼붓는다. 이정도면 악질 분열증 맞지?

2016년 5월 18일 수요일

10만원

아무리 생각해도 10만원에 합의한 건 서로 이상한 거 같아서 소설을 써 보면 이 사람은 월급을 받고 그 대신 무제한으로 그림을 그려준 게 아닌가 싶다. 개인전이 잡혔고 급하게 개인전용 그림을 그려 내야했다고 정황을 추정해 보면 먼가 이해가 가기도 한다. 나중에 계산해 보니 점당 10이었다는. 그런 소설. 

2016년 5월 17일 화요일

최선

최선 작가의 포스트 단색 회화를 주목해볼만 하다. 단색화의 앱잭션이라니.

문화정치

반쯤은 자조 섞인 말이지만 한국에서 문화적 저항이란 말은 앞으로 쓸 수 없겠다. 정치적 문화, 급진적 문화라는 말 자체가 문화 먹물의 사치스런 상상계 속 무엇 아닌가 한다. 아무리 저항적 문화 형식을 실천한답시고 현장에서 나뒹굴어봤자 문화에 대한 인식 일반이 너무나 저급해서 무용하다. 최소한 문화 독해력이 일정 수준 이상은 되어야 문화로 저항하기니 뭐니도 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은 한 아무리, 심지어 급진적 현장에 놓여진 급진적 예술일지언정 꽃병풍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쩌면 문화의 급진성이 현장, 혹은 사회적 문맥과 함께 가야한다면, 분리될 수가 없는 거라면, 그렇다면 먹물이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있는 급진적 문화의 실제 버전은 그 먹물이 하급으로 치는 어떤 문화 형식일지도 모른다. 또 반쯤은 자조 섞인 토로이지만, 내 생각으론 한국에선 1차원적 "리얼리즘"이 가장 정치적 힘을 가진다. 보고 바로 이해되는 직독직해가 가능한 어떤 상징, 이미지와 기호가 명실공히 본드처럼 달라 붙어 있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다. 이런 방식의 정치성, 혹은 영향력은 다름 아닌 '소통의 힘'정도 될 것이다. 아니면 공감이란 말로 바꿔도 될 것이다.

반면 그런 관례화된 커뮤니케이션을 깨는 문화형식은 대국민적 반감을 사게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실로 진정한 문화의 힘, 다른 말로 정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몹시 피곤해질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반감도 반감 나름이지 90퍼센트 이상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과연 그걸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좀 슬프지만 말이다.

I believe - 신승훈

2016년 5월 16일 월요일

신은 어떤 것도 해서는 안된다. 어떤 것을 하는 순간 어떤 관계가 생기고 그 존재 자체에 모순이 생겨버린다. 유일자란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그야말로 독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은 그냥 그 자체로 신은 신이어야 한다.

아이돌이란 만들어진 신일지언정 그런 존재가 아닌가 한다. 입이라도 뻥끗하는 순간 인간임이 탄로난다는 것. 꽃병풍이란 소리가 괜히 생긴 말이 아니라는 것.

알음알음

친한사람끼리 모여서 세를 이루는 게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친하다는 것이 심지어 완전히 사적인 인간관계로서만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끼리끼리 모이는 데는 어떤 정치적 지향점이 같은 점이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본딩은 혼자가 할 수 없는 일을 때때로 해낼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위험성도 물론 존재하는데, 다 같이 폭망할 수도 있는 거다. 집단 중 하나 둘이 이상하면 전체가 다 구려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가치관을 똑같이 공유하는 집단이란 개념이 전제되어 있다면 합당한 평가일 터이다. 그러니까 끼리끼리 알음알음 세를 운영하는 집단 중 어느 누군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가지가 세고 있다는 걸 폭망한 다음, 나중에 아..그랬었구나 깨달을지도 모른다.

2016년 5월 14일 토요일

아이돌 소양

설현과 한 아이돌이 퀴즈 프로그램에서 안중근 의사를 몰라본 탓에 도마 위에 올랐다. 공인이 한국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인물 하나를 몰라서 어떻게 하냐는 식의 한탄 및 비난이었다. 얼굴만 가꾸지말고 내면을 가꾸란 소리였다. 다른 한편에선 설현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이들은 대체로 다원주의자들인데, 개인이 역사의식을 가질지 말지는 개인의 선택 문제라고 하며, 역사의식을 강요하는 국뽕/꼰대 의식을 비판한다.

신=이미지를 돈으로 주고 사는 이 시스템에서, 아이돌이 인간이기 때문에 생기는 빈틈과 그로 인해 생기는 소비자 불만 신고 같은 거 아닐까. 그러니까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신=이미지를 소비했더니 불량품이었네! (결함이 있었네!) 리콜해주세요, 같은. 내가 사랑했던 설현은 그렇지 않아! (새로운 대리 설현이 필요해!) 같은.

음악과 뮤직비디오

음악에 뮤직비디오가 부수적인 것, 그러니까 플러스 알파인 시절이 있었다. 그때 뮤직비디오는 만들면 좋은 거고 안 만들어도 좋은 거고...음악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런 인식 일반 때문에 잘 만들어진 뮤직비디오를 볼 때 느끼는 시청각적 충격이란 무지하게 큰 것이었다. 뮤직비디오가 이땐, 영향이 없었던 만큼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다.

음악을 들을 뿐만 아니라 보는 세대에게 뮤직비디오는 음악의 필수조건이다. 이 음악이 어떤 상황을 묘사하는 것인지 충분하게 시각화시켜주지 않는다면 음악에 어떤 결핍의 감각을 느끼게 될 것이다. 혹은 어떻게 느껴야할 지 감을 못잡을지도 모른다. 듣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뮤직비디오를 음악에 만드는 일 따위에서 큰 영향을 기대할 수 없다. 모두가 다 하는 일이기에. 오히려 이 시대에는 뮤직비디오를 빼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된단 말이다. 다소 네거티브한 방법으로.

감각에 충격은 두 가지 채널로 온다. 임계치보다 높은 자극신호를 주는 방법과 임계치보다 한참 떨어진 자극신호를 주는 방법이다. 하나는 과잉의 방법이고 하나는 결핍의 방법이다. 마약중독자는 전자를 택한다. 치료사는 후자를 택해야 한다.

관계미학이

한때 휩쓸 때 경기도권에서 시행되던 '커뮤니티아트'가 비슷한 맥락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16년 5월 13일 금요일

인도네시아 역사와 벤 엔더슨 (박소현 선생 페북에서 불펌)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 5장에는 로저 케이스먼트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제국의 시대에 백인이면서도 콩고의 흑인들을 연민하고 벨기에의 범죄를 고발하려고 애썼던 그 사람 말이다. 그 장의 말미에 제발트는 케이스먼트가 그토록 타자를 연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아일랜드인이자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라고 썼다. 나는 그 대목을 읽으면서 또 다른 아일랜드인이자 동성애자, 평생 타자를 연민하고 사랑했던 어떤 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오늘 세상을 떠난 베네딕트 앤더슨이다.

그는 1950~60년대 인도네시아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며 민족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인도네시아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언젠가 읽었던 글에는 동생인 페리 앤더슨이 형에게 인도네시아의 특수성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좀 더 포괄적인 작업을 해보라고 충고한 일화가 소개된다. 그런데 벤 앤더슨은 “나의" 인도네시아는 너무나 특별해서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우리 세대의 인도네시아 연구자들이 그처럼 인도네시아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결론내린 적이 있다. 그가 인도네시아가 제3세계의 맹주로 새로운 민족국가를 세우던 그 찬란하던 시기를 목격했다면 우리는 그 모두가 무너지고 남은 기이하게 아름답지만 뒤틀린 잔해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괴물이 되어버린 인도네시아마저 차마 사랑했다면 우리는 그 기이함을 기꺼이 끌어안을 수 없었다(사랑이란 언제나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가 아니었던가).

어쨌거나 동남아시아를 특히 인도네시아를 공부한다는 것은 어쩌면 베네딕트 앤더슨의 자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주제에 관해 공부하더라도 그를 피해갈 수 없다. 내가 인도네시아 역사를 배운 선생은 그의 제자였고, 지금 번역하고 있는 에카 쿠르니아완의 장편소설 두 편을 처음 알게 된 것도 그의 글을 통해서였다. 그 두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고 한국어로도 번역될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덕일 것이다. 에카의 열렬한 팬이었던 벤 앤더슨이 소설의 서문을 써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상상의 공동체]를 쓴 저자로만 알려졌지만 그의 관심사는 그보다 훨씬 넓고도 깊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작업을 정치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쓰기도 했고 동남아시아의 실험영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언어의 힘에 주목했던 그는 호세 리살의 [나를 만지지 마라]를 다시 읽는 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 글들은 비평과 학술논문 사이를 오가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종류의 독특한 글들이 되었다. 종종 그가 정치학자가 되기에는 너무 문학적이고 소설가가 되기에는 너무 과학적(!)이라서 그런 글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게 아닐까라고 생각해보았다.

실제로 그를 본 건 딱 한번뿐이다. 몇년 전 방콕의 한 영화제 상영장. 그는 ‘마우이’ 티셔츠를 걸치고 나타났는데 그냥 보기에는 방콕의 바에 차고 넘치는 여느 백인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 할아버지를 ‘벤’이라고 부르는 걸 보고서야 그가 바로 그인 것을 알아차렸다. 다음 날은 강연이 있었는데 그는 바띡 셔츠를 걸치고 나타났다(확실히 이번엔 좀 달라보였다.) 당연히 영어로 진행될 줄 알고 간 것이었는데, 그는 대뜸 태국어로 말문을 열었다. 그냥 인사말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강연 전체가 태국어였다. 그래서 내용은 좀체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그냥 감탄만 하며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지역학 연구자의 모범 같은 게 있다면 바로 그가 바로 그 화신이 아닐까.

그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떠오른 수많은 생각들을 조금이라도 정리해봐야겠다고 메모장을 열었는데 쓰면 쓸수록 더 많은 기억들이 파편처럼 떠올라서 어떻게 마무리해야할지 모르겠다. 동남아시아를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모범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던 빡 벤, 편히 쉬시길. 아 그리고 새로 번역 중이라는 Imagined Communites가 빨리 나와서 그 책에 대해 다시 논의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하는 바램.

로저 케이스먼트는 반역죄로 사형당하고 말았지만, 벤 앤더슨의 죽음은 축복에 가까운 죽음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추억이 깃든 자바의 장소들을 돌아보다가 잠든 사이에 찾아온 죽음. 화장된 재는 자바해에 뿌려진다고 한다. 평생 인도네시아를 사랑했던 이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장례가 아닌가.

십년이 지나도 - 박진영

아트스펙트럼의 모 콜렉티브

옥인동(?)의 모 콜렉티브의 행보는 정말 석연찮다.

1) 이젠 콜렉티브란 이름표부터 좀 뗐으면 좋겠다. 이들이 래디컬한 집단행동을 한적이 대체 언제적인가? 필요에 따라 이항집산한다고 했을 때 그 '필요'란 저항이라기보단 어딘가 그럴싸한 '자리(혹은 그들이 종종 이야기하는 명분)'에서 불러줄 때 아닌가? 맑시스트의 ㄴ도 아닌 자들이 콜.렉.티.브.라니...

2) 유령은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현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묘사적' 작업은 정치'풍', 개념'풍' 작업이라고해야 하나...아무튼 찻잔 속의 태풍도 못만들어 낸다. 아무것도 안하기가 정말 아무것도 안하는 st.가 될 때를 목격한다. 정치(성)란 말 좀 더 이상 오염시키지 말았으면..중요한 말이잖아. 이런 미세먼지 때문에 공기청정기가 필요해.

3) 비교했을 때 리슨투더시티를 내가 맨날 (인간적으로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미학적으로 동의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욕하지만, 차라리 이 콜렉티브가 나왔어야 한다면 리슨투더시티가 수천만억배 낫다고 본다. 이력을 놓고 비교해 보면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들 조차도 삼성 스펙트럼에 나오는 순간 그냥 모순적 위치에 서게 되겠지. 리슨투더시티는 삼성 스펙트럼에 초청되면 출연할까? 그 사람은 눈치백단이니 보이콧할 거 같긴 하다.

4) 몹시도 단순한 논리에서, 도움 받는 처지의 자라면 도움 준 자를 위해할 수 없다. 은근한 개입이니 부드러운 교란이라느니 지랄병 개소리하지 말고. 제발 좀. 정신 차리시지. 삼성과 에르메스에서 커팅 엣지하는 미술에게 선사하는 전시기회와 상이라니! 하-! 초등학생한테 물어봐라. 이 단순한 논리에 정신승리하는 "정치적 미술." 앉을 자리도 구분 못하는 주변머리도 없는.

5) 제도비평 미술을 한국 대학은 제발 제대로 교육하라. 교육하라.

2016년 5월 12일 목요일

루프 프로세스

1. 야 안 되는 게 어딨어. 하면 된다. (안 되는 걸 되게 하라. 대의를 위해서. 대의는 미술계 차원에서도 사회적 차원에서도 발생.)
2. 편법 동원. (안되는 걸 되게 하기 위해서 각종 편법이 관행처럼 자행됨.)
3. 시간이 지난다. 불만 많은 신세대 등장.
4. 과거의 편법을 색출 및 비판. 현재 관점에서 악행과 탈법행위로 보임. 지금 좆같은게 다 너 때문이다.
5. 여론에서 마녀사냥.
6. 한편으론 아 시발 재수없게 잘못걸렸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닌데...내가 그러고 싶었냐...

바스켓볼 다이어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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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1일 수요일

participatory

비숍에게 참여미술은 아방가르드의 복권이란 노림수 그 자체. 대단하고 야심찬 돌직구 기획이랄까!

quotes from Hal foster, Arty Party (2003)

"Apparently, if one model of the old avant-garde was the Party à la Lenin, today the equivalent is a party à la Lennon."

2016년 5월 10일 화요일

2016년 5월 8일 일요일

"어 먼저 결혼해 있어."

2016년 5월 7일 토요일

미술 컨텐츠 시장

미술 컨텐츠 시장으로 보자면 웹진 시장이 있고 번역 시장이 있다. 인쇄매체의 시대는 확실히 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컨텐츠로의 욕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용의 생산과 유통 두 가지 모두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고 필요한 시기다. SNS를 활용하는 온라인 기반 매체가 주효한 이니셔티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돈은 어떻게 벌까. 돈을 벌어야 유지 관리가 될 것이 아닌가. 전통적인 매체가 그러하듯 광고로 벌겠지. 광고 수익을 위해선 구독자 수가 중요하다. 구독자 수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국내 미술 컨텐츠 플랫폼 계에선 아무도 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영문 컨텐츠 생산 및 유통이 그렇다. 인쇄에서 굳은 비용에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마 번역에 돌려야 할 것이다. 무조건 한/영으로 컨텐츠를 다루고 유통하고 웹사이트에 아카이브해야한다. 그렇게 되면 구독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 것이다. 아마 광고주 입장에서도 글로벌한 홍보력을 갖춘 곳이라면 돈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한 2년정도 하면 돈이 되는 플랫폼이 될 거다.

국내 미술계 컨텐츠에서 몹시 취약한 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심각한 것은 한->영 번역이다. 미술은 충분히 글로벌화되고 있는데 미술담론은 여전히 국내용이다. 앞으로 미술계가 더욱 발전하면 어쩔 수 없이 이런 요구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전시에 서문 글을 받는 걸 관례처럼 생각하듯, 모두가 영문 번역을 거의 필수 요소처럼 생각하게 됐을 때, 여기에 돈을 들이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됐을 때, 그때 미술 컨텐츠 전문 번역 회사는 대박을 칠 거다.

2016년 5월 6일 금요일

인문서적

진지한 인문서적을 사보는 이는 필경 대다수가 인문학도일 터인데 책 값은 계속 비싸지는 반면 인문학도의 지갑 사정은 더욱 안 좋아진다. 책 값이 비싸지면 책을 살 수 없고 책이 안 팔리면 안 팔릴 수록 출판사가 (유지를 위해) 책 값을 보다 더 높히게 되는 것은 논리적이다. 종이책은 있는 자가 장서에 비치하는 인테리어 장식으로서 일종의 '명품'이 될 것이고 나머지 떨거지는 전자책에 안착할 것.ㅠㅠ

글쓰기

언젠간 글을 막 쓰고 싶을 때가 있었다. 써야만 한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쓰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적자면 지금은 쓰면 안 되거나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뭔가 조금만, 뭔가가 채워지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 전까진 이런 공간을 일기로 채우는 것도 괜찮겠다.

역전재판 (2016)

올드 게이머의 노스텔지어.

2016년 5월 4일 수요일

무의식의 표면화

싸이월드부터...SNS가 대중화되면서 점점 더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무의식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겉으로 드러난달까? 싸이월드의 diary라는 란을 기억할 것이다. 말하자면 공개 일기장, 독백을 가정한 무대였다. 내면의 이야기를 암묵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쏟아내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조소하면서도 그 플랫폼을 사용하는 이상, 자신 또한 도찐개찐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공개 일기장, 광야를 가정한 (사실상 무대에서의) 독백은 이제 SNS라는 검은 구름...으로 일반화되었다. 나의 정보, 나는 어떤 사람인지가 온라인 상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전시 된다. 어떤 사람을 파악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그 사람의 SNS를 들여다 보는 것이 되었다. 일기를 쓰던 안 쓰던, SNS 타임라인에 나열된 컨텐츠를 주르륵 일람하면 그 사람의 깊은 내면까지 어느정도 추측 가능하게 된다. 아니, 전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 시스템은 나의 비밀스러운 면을 포르노처럼 노출시킨다.

여기서 게임은 이런 것이다. 누가누가 더 좋은 무의식을 가졌을까, 역설적이게도 진짜가 없다는 걸 합의해 버린듯한 이 시대에서,  누가 더 "진짜" 좋은 품종의 인간일까 경쟁한다. 혹은 싸이월드 다이어리로 치면 죄다 진정한 나를 이해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신파적인 상황. 꽤나 강제적으로 그렇게 되지만 다들 그렇지 않을 거라고 가정하거나 그렇지 않은 척하는 쿨-스타일-베일로 포장될 뿐이다.

오늘날 우리의 무의식은 인간 내면으로부터 뽑아져 나와서 타임라인에서 한 데 뒤엉켜 흐른다. 이걸 융 같은 사람이 봤으면 집단 무의식의 외연이라고 했을 법하다.

2016년 5월 2일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