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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4일 목요일
2013년 10월 21일 월요일
2013년 10월 19일 토요일
조각의 순간들: 정서영,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마치 물리 공식을 참조한 것처럼 보이는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란 알쏭달쏭한 전시 제목이었다.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은 모두 사물의 부피, 그러니까 공간적인 것을 지시하는 반면, 속도는 변화, 곧 시간적인 것을 의미한다. 제목을 조금, 물리학적인 느낌(?)으로 다시 쓰면 '사물의 운동'이 되며, '공간적인 것의 시간'으로 말 바꾸면 철학적인 느낌(?)이 되겠다. 그러니까 전시 제목은 어쩌면 ‘시-공간’이라는 순수학문의 본질적인 문제를 시적으로 나열한 셈이다. 왜?
먼저 작품을 살펴보자. 출품작 중 하나인 <흙탑>(2013)은 의자에 앉은 사람의 무릎 위에 즉흥적으로 만든 탑을 올려 놓고, 쓰러지지 않게 균형을 잡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 시리즈다. 엉성하게 만든 탑을 무릎 위에 올려 놨으니 쓰러지는 것은 당연지사. 흥미로운 점은 중력이라는 물리법칙과 신체 감각의 불항상성 사이에서 ‘어영부영’ 절묘하게 균형을 맞추려는 그 ‘조각적 상황’이다. (여기서 나는 조각적이라는 형용사적 용법을 썼는데, <흙탑>은 역사적 관습으로서의 ‘조각’이라기 보다 퍼포머와 조각이 갖는 관계, 조각의 가능태에 가깝기 때문이다.) 짧게 하나 더 살펴본다면 <운동>(2013)이다.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곧 무너질 것 같이 위태롭게 서로 기대어진 나무 책장과 각목은 중력과 인력 그리고 척력 사이의 긴장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드러나는 것은 이들이 관계 맺는 '찰나'적 방식이다. 전통적 조각이 가지는 초시간성을 염두에 둔다면, 인식론적 전환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까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는 조각을 넘어 조각을 지배하는, 이른바 메타-조각적 현실 원칙을 은유하기 위해 고안된 말인 듯하다. 미술관 벽을 상징하는 듯 해보이는 작은 하얀 판을 가로로 눕힌 후 바퀴를 단 <직전과 직후>에서는 미술계(제도) 같은 사회 문화적 문맥과 관련이 있는 듯 하고, 실제 그것과 상관 없이 본 것을 그대로 조각으로 만들어버린 듯해 보이는 <멀리서 본 것>은 어떤 인식론적 경험성을 더욱 부각시켜 객관적 실재의 부재를 시각화 한 것으로 보인다. 공간예술이라는 조각의 제 전통을 초과하는 듯 해 보이는 이 조각들은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조각의 내적 진리에 대한 순진한 믿음보다, '조각은 언제 조각이 되는가'라는 시간적이고 경험적인 우회로를 택한다.
한편 정서영은 조각적 진리의 확신을 유보한 채, 모든 상황을 통해 의심하길 원한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떠올리게 하는, 조각에 대한 궁극적 질문의 한 뭉치다. 또 그런 의미에서 의자의 사전적 정의, 실제 의자 그리고 의자 사진을 병치해 분석철학적으로 예술 개념을 도해했던 조세프 코수스의 개념주의 작업과 어느 정도 맥이 상통해 있다. 하지만 이 조각이 동어반복적 예술 명제로 순환하는 것에서 끝나지는 않는 듯 하다. 속도, 즉 공간으로부터 시간으로 관심의 돛을 돌린 바, 반복해서 말하지만 경험성,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험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관객'이 조각에 실재성을 부여하며 그 틈을 벌린다. 특히 벽으로부터 나뭇가지 모양으로 뻗어 나온 철제 펜스와 지시문이 적힌 나무 판넬의 연결로 구성된 작품, <무릎>(2013)이 그러한데, “벽과 가장 가까운 바닥에 자리를 잡고 멀리서 다가오는 그것이 둘로 나뉘는 것을 응시하라” 같은 알쏭달쏭한 지시문은 의미를 차치하고서라도, 관객이 조각을 지각하고 반응하길 요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퐁티적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작가의 조각적 회의는 조각 내부에 새겨진 진리의 탐구라기보다, 역설적으로 그것의 부재의 혐의를 도출해 낸다. 내부의 관념성에서 현실로 빠져나온 조각은 경험적 탐색의 장이 되며, 여기서 관객은 탐험가로서 '실재와의 접촉'이라는 조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어내는 핵심적 위치에 지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관념에서 현실로, 내부에서 외부로, 결과에서 과정으로, 작품에서 관객으로 향하는 서구 현대 조각의 지난 한 경향을 정서영의 조각을 통해 충실히 보게 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사실, 관객이 어떤 구체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지에 이 조각은 여전히 관심 없어 보인다. 불충분한 레퍼런스의 제시, 고강도의 암호 같은 제목, 그럼에도 불구한 지속적인 자기 참조의 제스쳐에서 분명 모더니스트의 한 면모가 강력하게 드러난다. 나는 앞서, 요소로서의 관객의 역할을 언급하며, 작가의 예술적 기획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했다. 굳이 '기능'이라는 다소 기계적인 뉘앙스의 단어를 고른 이유는, 어디까지나 계산된 기획에 따라 부여된, 관객 역할의 형식적 한계 때문이었다. 관객 경험성은 분명히 동어반복을 넘어서기 위한 키워드지만 딜레마적 상황에 빠진다. 경험하는 순간 형식적 경험으로 전락하고, 생각하는 순간 동어반복에 빠지는, 매우 고약한 상황이다.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그래, 현대 조각이란 바로 이런 거야!"
* 퍼블릭아트 게재 원고
먼저 작품을 살펴보자. 출품작 중 하나인 <흙탑>(2013)은 의자에 앉은 사람의 무릎 위에 즉흥적으로 만든 탑을 올려 놓고, 쓰러지지 않게 균형을 잡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 시리즈다. 엉성하게 만든 탑을 무릎 위에 올려 놨으니 쓰러지는 것은 당연지사. 흥미로운 점은 중력이라는 물리법칙과 신체 감각의 불항상성 사이에서 ‘어영부영’ 절묘하게 균형을 맞추려는 그 ‘조각적 상황’이다. (여기서 나는 조각적이라는 형용사적 용법을 썼는데, <흙탑>은 역사적 관습으로서의 ‘조각’이라기 보다 퍼포머와 조각이 갖는 관계, 조각의 가능태에 가깝기 때문이다.) 짧게 하나 더 살펴본다면 <운동>(2013)이다.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곧 무너질 것 같이 위태롭게 서로 기대어진 나무 책장과 각목은 중력과 인력 그리고 척력 사이의 긴장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드러나는 것은 이들이 관계 맺는 '찰나'적 방식이다. 전통적 조각이 가지는 초시간성을 염두에 둔다면, 인식론적 전환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까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는 조각을 넘어 조각을 지배하는, 이른바 메타-조각적 현실 원칙을 은유하기 위해 고안된 말인 듯하다. 미술관 벽을 상징하는 듯 해보이는 작은 하얀 판을 가로로 눕힌 후 바퀴를 단 <직전과 직후>에서는 미술계(제도) 같은 사회 문화적 문맥과 관련이 있는 듯 하고, 실제 그것과 상관 없이 본 것을 그대로 조각으로 만들어버린 듯해 보이는 <멀리서 본 것>은 어떤 인식론적 경험성을 더욱 부각시켜 객관적 실재의 부재를 시각화 한 것으로 보인다. 공간예술이라는 조각의 제 전통을 초과하는 듯 해 보이는 이 조각들은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조각의 내적 진리에 대한 순진한 믿음보다, '조각은 언제 조각이 되는가'라는 시간적이고 경험적인 우회로를 택한다.
한편 정서영은 조각적 진리의 확신을 유보한 채, 모든 상황을 통해 의심하길 원한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떠올리게 하는, 조각에 대한 궁극적 질문의 한 뭉치다. 또 그런 의미에서 의자의 사전적 정의, 실제 의자 그리고 의자 사진을 병치해 분석철학적으로 예술 개념을 도해했던 조세프 코수스의 개념주의 작업과 어느 정도 맥이 상통해 있다. 하지만 이 조각이 동어반복적 예술 명제로 순환하는 것에서 끝나지는 않는 듯 하다. 속도, 즉 공간으로부터 시간으로 관심의 돛을 돌린 바, 반복해서 말하지만 경험성,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험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관객'이 조각에 실재성을 부여하며 그 틈을 벌린다. 특히 벽으로부터 나뭇가지 모양으로 뻗어 나온 철제 펜스와 지시문이 적힌 나무 판넬의 연결로 구성된 작품, <무릎>(2013)이 그러한데, “벽과 가장 가까운 바닥에 자리를 잡고 멀리서 다가오는 그것이 둘로 나뉘는 것을 응시하라” 같은 알쏭달쏭한 지시문은 의미를 차치하고서라도, 관객이 조각을 지각하고 반응하길 요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퐁티적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작가의 조각적 회의는 조각 내부에 새겨진 진리의 탐구라기보다, 역설적으로 그것의 부재의 혐의를 도출해 낸다. 내부의 관념성에서 현실로 빠져나온 조각은 경험적 탐색의 장이 되며, 여기서 관객은 탐험가로서 '실재와의 접촉'이라는 조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어내는 핵심적 위치에 지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관념에서 현실로, 내부에서 외부로, 결과에서 과정으로, 작품에서 관객으로 향하는 서구 현대 조각의 지난 한 경향을 정서영의 조각을 통해 충실히 보게 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사실, 관객이 어떤 구체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지에 이 조각은 여전히 관심 없어 보인다. 불충분한 레퍼런스의 제시, 고강도의 암호 같은 제목, 그럼에도 불구한 지속적인 자기 참조의 제스쳐에서 분명 모더니스트의 한 면모가 강력하게 드러난다. 나는 앞서, 요소로서의 관객의 역할을 언급하며, 작가의 예술적 기획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했다. 굳이 '기능'이라는 다소 기계적인 뉘앙스의 단어를 고른 이유는, 어디까지나 계산된 기획에 따라 부여된, 관객 역할의 형식적 한계 때문이었다. 관객 경험성은 분명히 동어반복을 넘어서기 위한 키워드지만 딜레마적 상황에 빠진다. 경험하는 순간 형식적 경험으로 전락하고, 생각하는 순간 동어반복에 빠지는, 매우 고약한 상황이다.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그래, 현대 조각이란 바로 이런 거야!"
* 퍼블릭아트 게재 원고
2013년 10월 17일 목요일
예술인복지법, 중첩된 냉소주의를 넘어서야 할 때
지난해 11월 많은 논란 속에서 예술인복지법이 시행된 후 5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출범전 범람했던 ‘썰전’과는 달리, 현재 예술계, 특히 미술계의 반응은 ‘썰렁’하다. 특히 실질적 수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미술창작인의 경우, 무관심과 냉소로 일관하고 있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하 재단)이 밝힌 예술활동증명을 신청한 예술인은 4월 11일 기준 1,300여명. 이 중 산재보험에 가입한 예술인은 4월 12일 기준으로 총 120명, 세부적으로는 문학1 미술2 사진0 건축0 음악1 국악4 무용19 연극7 영화20 연예66으로 집계됐다. 미술인 2명은 모두 공예분야(도자, 석공예)다.
미술계의 이런 냉소의 이유를 거칠게 다음의 두 가지 층위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법안의 근본적 문제점’, 둘째 ‘실질적인 혜택의 부재’다. 전자는 예술가를 일반 근로자와 동일하게 볼 것이냐, 아니면 특수한 근로자로 볼 것이냐의 문제로, 결국 ‘예술인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가 핵심 쟁점이다. 예술가의 근로자성과 특수함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의 입장은 동일하다. 다만 특별법의 제정을 통해 예술가라는 특수한 직업을 근로자, 그러니까 보편적 직업 중 하나로 규정해 노동법 전반에 걸쳐 동일하게 보장 받게 하자는 주장과 예술가의 근로자성은 인정하되, 특별법을 제정할 경우 현행법과 사회적 인식에 상충되는 지점이 많으므로 큰 틀을 깨지 않고 보완하자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여기서 예술인복지법은 후자의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 예술인, 특히 순수 창작인은 적잖은 실망을 느끼고 있다.
한편 다른 냉소는 실질적 혜택이 전무하다는 점에 기인한다. 기존에 계속해서 제기되었던 4대보험 보장 문제는 결론적으로 ‘차’떼고 ‘포’뗀 오직 산재보험만 남았으며, 그 마저도 보수를 받는 예술인에 한해, 보험료 전액을 스스로 부담하게 되어 있어 계약사항이 없거나, 궁핍한 예술인의 경우, 해당되는 사항이라 볼 수 없다(일반 근로자의 경우 산재는 사측에서 전액 부담). 또한 예술인복지법과 함께 출범해 복지업무 실무를 전담하게 된 예술인복지재단의 경우 예산의 대다수가 삭감되었고, 그나마 남은 예산이 순수 창작인에게 거의 필요가 없는 취업 교육에 초점이 맞춰져 실효성이 없게 됐다. 한마디로 예술인복지법은 재단이라는 ‘빛 좋은 개살구’를 앞에 세워두고 정작 혜택을 받아야 할 예술인을 비껴나간 구색 맞추기 정책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두 가지 냉소의 기저에는 故최고은으로 대표 되듯이, ‘예술인도 보통의 근로자, 근로자 이전에 인간이기 때문에 보통 인간처럼 살기 위해 예술인복지법으로 특별하게 보장해야 한다’는 보편적 인권 보장의 문제와 ‘예술인의 문화예술활동은 궁극적으로 공익적 활동이기 때문에 국가가 특별하게 관리/보호해야 한다’는 어떠한 특권 심리가 꽃놀이패처럼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전자를 반론하면 후자의 이유로 다시 반박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식이다. 여기에 ‘복지'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더해진다. 한 일화로, 재단에 따르면 예술인복지법이 예술인의 손에 당장 돈을 쥐어주는 제도라고 오해해 예술인들이 적잖게 실망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한다. 각종 문예지원 정책에 길들여진 예술계의 경우, 복지제도와 예술지원제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위화감과 실망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냉소를 더할 수도 있다. 보편적 인권의 경우 「국민기초생활보장법」과 같은 보편적 사회보장제도의 틀을 개선/확충하는 것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예술 지원의 경우 여타 다른 문예진흥정책을 통해 ‘특별히’ 관리되고 있으며 앞으로 정책 개선을 통해 충분히 해결이 가능하다. 예술인복지법은 사실 없어도 되는 법 아니었겠는가? 이것이 차라리 진정 순수 창작인이 바라는 예술 복지 정책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복지 자체에 대한 궁극적인 냉소인 걸까?
물론 예술인복지법은 불충분한 법이다. 그런 점에서 마땅히 예술인복지법은 추후 계속 개정/보완 되어야 하며, 끊임없이 주장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리고 법을 사람이 만드는 이상, 개정의 기회는 분명히 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까지 이 법은 전적으로 무효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법 자체는 중립적이다. 그 가치는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나중에 판단될 일이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바뀐 시대에 확장되는 직업군에 따라 각종 복지제도는 해마다 개정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산재보험 등의 보장의 길이 열린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법안 활용을 통해 사례들을 많이 남기는 것이 급선무일 테다. 헌데, 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데에는 예술인도 일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예술인복지법은 화용론적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필자는 미술인이 예술인 복지재단이 실시하는 사업을 살펴 활용하고, 최대한 보장을 받길 바란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문제점 또한 적극 드러내 줬으면 한다.
이어서 예술인 복지재단이 시행하고 있는 사업의 요체를 알아보자. 주지하다시피 예술인복지법에 관한 실무는 재단에서 전담하고 있다. 재단이 하는 사업은 크게 1)예술활동증명 2)산재보험 대행업무 3)표준계약서 보급 4)예술인취업지원교육사업 5)예술창작디딤돌(시범)사업이다. 먼저 순수 창작인의 경우 취업이 원칙적으로 불가하다는 점에서 4)예술인취업지원교육사업은 실효성이 없다. 만약 작업을 포기하고 취업을 목적으로 교육을 받는다고 해도 제공되는 교육이 과연 얼마만큼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5)예술창작디딤돌 사업은 대학시절 ‘근로장학생'정도를 떠올리면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어려운 삶을 서류로 증명하고, 공익사업에 일정 부분 동참하는 대가로 보수성 지원을 받게 된다. 예술 창작 활동에 관련해 지원을 받고 싶은 예술가는 이 사업에 해당되지 않는다. 차라리 문예진흥기금을 노리는 것이 맞다. 아직은 시범 사업이니, 앞으로 문예지원정책을 적절히 보완하는 사업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2)산재보험 대행 업무는 근로복지공단에 직접 산재보험에 가입할 때 거쳐야 할 복잡한 절차를 대행한다. 예술활동증명을 마친 예술인은 1등급부터 10등급까지 선택해서 가입할 수 있다(1등급은 11,600원이고 3개월 이상 납부 시, 재단에서 30%를 지원한다). 하지만 아직 보상 규정이 미비한 탓에, 보장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예술계 전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재단의 업무 3)표준계약서의 보급과 맞물려 있다. 순수 창작인들은 무목적적으로 창작활동을 하기도 하지만 또 종종 전시를 위해, 전시 주체(미술관/갤러리 등)와의 계약을 통하기도 한다. 현재까지는 대부분 구두로 전시계약이 이뤄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경우 구체적으로 전시기간과 전시준비기간, 예상 출품작 수 등이 기재된 계약서가 있다면 거기에 준해서 산재보장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따라서 재단이 표준계약서 개발과 보급을 하루 빨리 하는 것이 중요하며, 법률상으로 이것을 강제하는 수단을 만들어야 한다.(민주당 최민희 의원이 제출한 예술인복지법 개정안에 이 사항이 포함되어 있으나 현재 계류 상태다.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은 재단 홈페이지 참고) 한편, 재단은 예술인 복지금고를 운영할 계획 중에 있다. 이 사업은 예술인들의 창작여건 개선 및 경제적 보조 혜택을 주기 위해 소정의 금액을 저금리로 대출해주는 금융서비스다. 최초에 정부 출연금을 통해 운영할 계획이었으나 예산이 삭감되어 이루어지지 않았다. 향후 지속적으로 각종 기부와 후원를 통해 재원을 확충할 계획이다.(새누리당 박창식 의원이 재단의 예산 확충을 골자로 하는 예술인복지법 개정안을 내어 올해 4월 10일 소관위 검토 된 바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1)예술활동증명이다. 예술인복지법에 준해서 보장을 받으려면, 예술활동증명 절차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멤버쉽 가입’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알아본 바, 현행 제도 안에서 예술인, 특히 문학, 미술인이 보장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대단히 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해당 사항이 있는 예술인에 한해 적극적으로 이 법을 활용해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재단은 내년부터 정책 결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이때, 사례는 많을수록 도움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예술인과 재단 둘 다 각자의 역할에 힘을 써야 한다. 예술인복지법은 이제 갓 태어났다. 자식이 잘 크는 데는 엄마, 아빠의 역할이 중요한 법이다.
퍼블릭아트 2013년 5월호 기자칼럼에 쓰였음.
미교열
<지젝: 비판적 입문>의 저자(Ian Parker)서문 - 이안 파커(Ian Parker)
이 책을 위한 영어 원고를 출판을 위해 보낸 것은 2003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의 주인공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가 반동 세력들로부터 근거를 탈취하고 있는,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지형이 변동했다. 민족주의, 종교적 원리주의, 치료적 정서, 신자유주의, 지성적 회복 등의 새로운 형태들이 근본적 관념들을 외치는, 근본적 관념들을 철저작업하고 실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긍정적으로 사고하라는 요청을 듣는 시대인 오늘날 더더욱 그러하 며, 따라서 다시금, 언제나 다시금 열어놓을 수 있는 부정성의 공간들 내부로부터 작업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리는 오류를 통해 나타난다는 언명―슬라보예 지젝이 가장 숨막히는 이데올로기적 사고 체계들의 심장부로부터 만회하는 부정성의 교훈―을 예시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바 로 이 책이다. 5년 전, 지젝의 저술에 대한 건설적 “소개”와 “비판”을 제공한다고 자처한 정식화들 속에서 이 책이 취한 잘못된 첫 걸음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진리 자체는 아니더 라도, 진리의 정치에 더 근접한 무언가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진화하고 있는 작업물에 대한 제한되고 편향적인 오재현으로 취급해야만, 무엇이 실제로 의도된 것인지를 똑똑히 밝히겠다고 공허하게 약속하는 스냅사진으로 취급해야만, 무엇이 그 책에서 진정으 로 기만적인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어떤 테제를 향해 애써 나아간다. 지젝이 이 책이 다루는 세 개의 주요한 개념틀 의 어느 하나를 가지고서 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어떤 것을 불신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나면, 이 테제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 테제는 이렇다: 지젝은 실제로 라캉을 통해 헤겔을 읽으면서 라캉 독서를 통해 굴절된 헤겔 판본을 산출하고 있으며, 또한 그런 연후에 이러한 독서를 맑스주의에 의해 구조화된 것으로 그가 가정하는 일련의 문화 형태들에―즉 세계관으로서의 맑스주의가 기저에 놓인 당연하게 간주되는 좌표들을 제공하 고 있는 방식으로 이미 조직화되어 있는 어떤 현실에―적용한다. 그래서 이 테제의 저자인 이안 파커 자신은 이와 같은 비판을 산출하기 위해서 무엇을 가정하는가? 적어도 다음을 가 정한다. 즉 그의 표적에 의해 제시된 헤겔 그림이 부분적이라는 것을, 선택된 라캉의 측면 들이 오도적이라는 것을, 맑스주의가 부당하게 물화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지젝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실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설상가상으로 이 저자는 이론적 체계들의 본성과 상호연관에 관한 일련의 그럴 듯한 가정 들을 밀수입한다. 자신이 발견하여 밝혀주는 관념들에 명확한 기원들이 있다는 가정, 무엇 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파내야 하는 숨겨진 심층이 있다는 가정, 그리고 부 정확하다고 간주되는 것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어떤 정확한 독해를 산출할 필요가 있 다는 가정. 기원과 심층과 독해에 대한 이러한 가정들은 이 책을 조직하는 원리로서 우리를 끌어당긴 그 특정한 테제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또한 이 책에서 우리가 시종일 관 조심할 필요가 있는 잘못된 가정들이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오류들을 추적하면서 우리 는 그것들 각각의 단순한 대립물을 찾는 데 만족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이 책의 출간 이후로 그 오류들이 지젝의 그의 저술에 격자로서 부과하는 좌표들을 거부할 필요가 있다. 이를 기회로 삼아서 우리는, 이 책을 넘어서서, 앞으로는 지젝이 이 책의 출간 이후 해왔던 일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뒤로는 확정적 판결이라는 가면을 쓴 편파적 판단임 이 이제 더욱 분명해진 무엇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저술의 가정된 “기원들”과 관련하여, 우리는 저 모티브가 다섯 장 각각에서 상이한 형 태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다. 바로 그 처음부터, 어떤 이론적 체계의 외견상의 발전은 슬 로베니아에서,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국가에 도전했던 시민사회, 이견[불찬성] 운동, 평크 사 이의 모순적인 관계에서 무대화된다. 그것이 이론적 체계가 결코 아니라고 하는 한 마디는 지젝을 저주하는 것으로 가정된다. 문제의 정치적 체계들―“스탈린주의”―은 이미 망가져 있 었고 붕괴할 운명이었다는 근거에서 말이다. 이 책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은―이 장의 깔개 역할을 하는 “가능성의 조건”과 “불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일체의 이야기에도 불 구하고―지성적 기원들의 이야기를 맥락화하고 이러한 맥락을 배경으로 해서 그러한 이야기 를 늘어놓는 덫에 걸려드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파열시키고 이 민족적 맥락의 역사 에 대한 항구적인 사후적 재구성을 주장하는 대립적 실천들에 대한 힌트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러한 힌트들은 대부분의 경우 구 사회주의의 붕괴 및 구 사회주의에 대한 싹트는 향수에 관한 내러티브 속으로 잠기고 만다.
지젝이 “새로운 슬로베니아 예술”(NSK) 그룹의 과잉동일시 전략에 미친 세간에 알려진 영향력을 놓고, 그리고 지젝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그들의 실천으로부터 그 전략을 채택하 여 이론적으로 세공한 것을 놓고 벌어진 논쟁에 대한 짤막한 논의가 있다. 하지만 이데올 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계속 나오며 또한 예컨대 “라이바흐에서의 계몽”에 대한 다른 많은 공개적 텍스트들에도 나오는 이 그룹에 대한 지젝의 옹호에 대해서는 아무런 상세한 논의도 없다. (포스트-펑크 밴드 라이바흐는 또한, “시간 속의 NSK 국가(NSK State in Time)”라는 역설적인 반-민족주의를 비틀면서, 2006년 찬가(ahthem) 앨범 “Volk”와 더불 어 모든 선량한 애국자들의 가슴 속으로 들어갔다. 이 앨범의 비디오들은 이제 유투브를 통 해 세계 전역에서 확산되고 있다.) 2005년에 지젝은 MIT 출판사의 “단락(Short Circuits)” 시리즈로 알렉사이 몬로의 빈틈없는 설명(심문 기계: 라이바흐와 NSK)을 출간하면서 이 책에 대한 서문을 썼는데, 이 서문에서 그는 어떻게 NSK-국가 실천들에서 이데올로기의 비가시적인 외설적 선율이 물질화되고 제시될 수 있는지를 다시금 보여준다.
진정한 슬로베니아 예술과 이를 위한 정초작업과 여하한 독립적 민족이, 외부에서 빌려와 짜맞추어진 외적 자원들을 통해 결합되어지는 과정은 그의 저술에서 주요 동기였다. 그것은 “맥락”에 대한 이야기들로부터도 단절하며, 또한 과거에서 온 개념들이 현재의 저 똑같은 개념들의 재출현을 설명해주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기원적인 자기동일적 내용들의 논리로부 터도 단절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헤겔을 다룬 2장에서는, 지젝이 이용하는 실제적인 하이 데거적 틀을 추적하려는 노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러한 틀은 어떤 이유 때문에 기독교 가 개념적 자원으로서 특권화되게 되었을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다. 지젝의 작업에 대한 허위적인 틀짓기에서 저자가 이미 동원했던 기원의 이야기는 이른바 낭만적이고 회향 적인 추동을 간파하고 폭로하기 위해 지젝의 작업 속으로 투사된다.
지젝이 전술적으로 기교독와 관계하는 방식은―그런데 이를 통해서 초재적 자기-분열과 구원이라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물질적인 그것의 실천이 재절합될 수 있는 것인데―고의로 오 독되어진다. 일련의 텍스트들―2003년의 꼭두각시와 난쟁이(이 책의 부제인 “기독교의 도 착적 중핵”을 통해 우리는 이 책의 비판적 칼날에 대한 단서 정도는 찾았어야 한다), 2005년의 이웃: 정치적 신학의 세 가지 탐구와 신학과 정치적인 것: 새로운 논쟁에 실린 글 들, 2008년의 포스트모던 철학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훈은 더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논쟁을 싫어하고 신학자들이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면서 그러한 논쟁을 피해가는 오늘날의 역겨운 자유주의적 이견자들과는 달리, 이데올로기의 가장 강력한 형태들이야말로 그것들의 현실적 기능의 모순성, 자기동일성의 결여, 불가능성이 파열의 지점까지 이를 수 있도록 껴안아야 하는 것이다.
임상적 실천에서의 정신분석의 기원은 3장에서 다시금 지젝을 오도적으로 특성화하는 데 동원되며, 그가 아무런 특별한 개인적 충성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가 우리에게 이 이론 적 실천의 “기원적” 현장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여러 번 보여주었던, 어떤 기원적인 탐구 현장에 그가 충실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데 동원된다. 또한 유사-스탈린주의적 밀레적 인터 네셔널의 유령이 소환된다. 이 전통에 대한 지젝의 충성은 그가 자크-알랭 밀레의 개입을 치료적 기획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기획으로 보기 때문에 더더욱 의심스러운 것인 양 말이다. 그의 저술에 정신분석적 “행위”의 충격에 대한 과장이 있다는 비판에는 나의 책에서 수사학 적 힘이 부여되고 있다. 이는 바로 그와 같은 과장이 그것의 척도가 되어야 할 진정한 현장 은 임상적 현장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확언적인 원환고리에는―정신분석이 어떤 지식 체계로 전환되고, 그런 연후 에 이 지식 체계는 특정한 비분석가들을 평가하기 위해 이용되는바―명시적으로 비선형적이 고 반-발전적인 임상외적 정신분석과의 그 어떤 실재적 맞물림도 체계적으로 회피해야만 하는 일련의 가정들이 있다. 이러한 종류의 정신분석은 이미 지젝의 초기 저작을 통해서 가 공되었으며 나중에 2006년 라캉: 무언의 파트너들 같은 편집서들에서 세공되는 어떤 것 이다. 그리하여, 라캉적 정신분석의 정치적 역할과, 라캉주의 논쟁들에서의 정치적 개입들과 정신분석을 맑스주의 이론 및 실천과 절합하는 작업은 배반을 당한다.
노동자 국가들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로서의 맑스주의 역사에서 어떤 특정한 노선이, 지젝 을 특정한 유형의 (비)맑스주의자로 국부화하기 위해서, 끝도 없는 하위-트로츠키주의 분파 적인 세밀함으로 장황하게 이야기된다. 언표행위의 정치적 기능들―이 비판적 입문서의 저자 가 라캉에게서 배웠어야 했던 교훈―은 지젝이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놓고 했던 진술들 로 환원되며, 그런 연후에 이러한 진술들은 진짜 돈으로 취해져 현금으로 교환되어 지젝이 정확히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데 이용된다. 마치 그가 스탈린주의적인 국가주도의 관료제 가 짜 사회주의의 붕괴에서 자신의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인 양, 마치 때때로 그가 스스로를 스탈린주의자라고 선언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실제로 스탈린주의자라는 끔찍한 결론을 이 끌어내야 하는 것인 양 말이다.
2007년에 혁명적 텍스트들을 그가 주해와 더불어 재출간한 것은 그 증거로 불릴 수도 있 을 것이다. 하지만 시리즈물―마오의 실천과 모순에 대하여, 로베스피에르의 덕과 공포― 로서 그것들은 그의 정치적 저작의 실제적인 출발점과 궤적이 무엇인지를 간파하려는 그 어 떤 시도도 사실상 가로막는다. 기독교의 중핵에 있는 “도착”이라는 어구와 마찬가지로, 20 세기 맑스주의 전통의 현실적 국가통치에 붙어다니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어떤 다른 종류의 정치적 개입들의 반복을 도발하기 위한 것이다. 지젝에 대한 이 “입문서”는 그 것이 21세기의 정치경제적 조건들 속에서 새롭게 착수되어야 하는 반복이라는 것을 포착하 는 데 실패하며, 그 대신 우리의 저자는 반복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이 지젝에 의해 배치되 는 방식 사이의 비일관성을 찾아내는 일을 고집하고 있다. 예컨대, 2001년 독일의 에센에서 열린 한 심포지움에서 레닌의 만회―결코 복귀로 의도되지 않았던 반복―는 위태로운 모험이었고, 지젝이 필연적으로 그리고 영웅적으로 그 대가를 치른 행위였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비-이상화된 하지만 정치적으로-유효한 레닌이야말로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적어도 2007년 재장전된 레닌: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의 출간까지는 계속해서 나침반을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지젝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가로막는 오해의 장막들을 것 어내려는 이러한 시도의 목적은 결국에 가서는, 마지막 장에서 그렇게 보이는바, 이 책의 개별적 주체인 이 특정한 인물의 결점들을 붙잡는 것이다. 슬로베니아의 폭넓은 이론가 집 단―지젝이 계속해서 함께 집필을 해왔으며 최근에 지젝이 영어 출간의 출구를 제공해주고 있는 이론가들―에 대한 발빠른 참조에도 불구하고, 이 “비판적” 설명을 중심으로 마침내 기 원의 덫에 걸려들게 된다. 그 설명이 한 특정한 이름의 저자에대한 비판으로 환원될 때 말이다.
여기서, 상품형태 및 그것과 증상의 상동 관계를 다룬 영어로 출간된 지젝의 첫 책에서 시작해서 지젝 자신의 저술에 담긴 모든 교훈들은 흐려지며, 지성적 상품 체계의 이 단일 생산물―지젝 그 자신의 형상―은 추상화되고 물신화된다. 그리고 이 한 명의 동유럽 미개인 에 대한 “서구의 응시”의 역할은 이 책의 저자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용되며, 서 구 청중을 위한 히스테리적 “행동화”로 비난당하는 한 이론가에 대해서 자신만의 아무런 특 정한 가치판단도 내리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 이용된다. (지젝의 모든 의심스 러운 움직임에 대한 저자 자신의 강박적인 일람표작성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 다.) 하지만 술수는 이런 것이다. 즉 이 응시 자체는, 이 책의 그 장에서의 서술을 통해, 응 시의 대상 안으로 배가되며, 그리하여 우리는 끝에 가서는 우리가 우리의 탐구 대상에 대해 서, 이 주체에 대해서 이제 더 많은 것을 실로 이해한다는 잘못된 인상을 갖게 된다.
기원들에 대한 관심―이는 그 자체로 이 책의 의식되지 않은 그리고 종종 부인된 측면이 다―이 지젝의 저술 안에서―혹은 심지어, 때로 그렇게 보이는바, 그 사람 자체 안에서―깊은 곳에 대한 탐색으로 우리를 유인하는 데 봉사함에 따라서, 문제들은 축적된다. 예컨대, 어떻 게 특정한 사건들이 유고슬라비아의 붕괴 내러티브 안에서 짜맞추어지는지에 주목하자. 그 리고는 한 명의 핵심적 인물이 무대에 등장하며, 이론가로서, 그리고는 정치꾼으로서, 그리 고는 세르비아 폭격을 열광적으로 지지하는―상이한 청중들에게 자신의 분석의 상이한 판본 을 유포함으로써 술수를 감추는―유사-민족주의자로서 무대 중앙에 나타난다. 이 책에서 드 러나는 그와 같은 궤변―이 책의 희생양-주체를 악의적 행위자로 뒤바꾸는 것―이야말로 심 문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러티브의 개인화는 이론적 논쟁들의 집합물이 일련의 이름이 명기된 개인들로부터 아이 디어를 선택하거나 배제하기 위해 지젝이 했다고 가정되는 선택들로 환원될 수 있도록 배치 되게 된다. 그리고 나면, 철학사와 정치이론사에 등장하는 일련의 저자들이 그들에 대한 지 젝의 충실성이 평가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그들에 반하여 규정한 한 명의 개인 으로 두드러지게 될 수 있도록 논평되는 것은 전적으로 말이 되는 것이 된다. 이 내러티브 는 또한 지제과 동시에 이론가들 사이의 비교들을 말끔하게 둘러싸며 승인한다(알랭 바디우 와의 동맹과 논의들은 지난 5년간 더욱 중요해진 하나의 사례로서 두드러진다). 그리하여 개개인의 특정한 별도의 공헌들은 나머지에 대항하여 맞세워질 수가 있다.
이러한 종류의 개인화된 독서는 헤겔에 대한 논의를 전염시키고 있다. 그리고 철학적 선 택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줄 어떤 숨겨진 의도들을 알아내려는 시도는 심지어 유대 교와 기독교에서 나오는 아직도 문화적으로 유력한 신학적 전통들의 관계에 대한 지젝의 특성화의 배경 속에 반유대주의의 어떤 형태가 잠복해 있다는 함축을 낳기도 한다. 서구 사상 의 인류학적-역사적 국면들에 대한 유사-헤겔적인 조작, 지젝이 상당히 명시적으로 반대하 는 선형적인 역사 개념 등이 지젝이 기독교를 우선시한다는 비판에 도달하기 위해서 반복되 고 있다.
지젝의 진정한 의도에 대한 이러한 환원적 접근은, 그리고 아마도 더 나아가, 그 자신이 모종의 은밀한 반유대주의자라는 암시는 문제적인 것이며, 이제 2008년의 폭력에 비추어 볼 때 한층 더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폭력이라는 책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를 뒤 집어놓으며, 이제 유대교에 주어질 수 있을 우선권에 관하여 혼란스러운 주장을 한다. 이는 자신들이 지젝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혹은 지젝이 실 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풀어내는 것이 그의 작업이 유용한지 아닌지를 식별하는 데 도 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혼란스러운 것이다. 다시금, 폭력에 대한 “여섯 개의 곁눈질”로 이루어진 이 최근 텍스트의 틀은 우리가 여하한 종류의 이론적 선택 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그 무엇에 일치할 저자의 의도에 도달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우리가 유념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인권의 이데올로기적인 틀에 대항하여, 우리가 자선의 마음에서 후진적 전통에서 구해내 려고 하는 사람들이 해내야 한다고 요구하는 “선택들”이라는 서구적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틀에 대항하여, 지젝은 폭력에서 서구인들이 이슬람 원리주의로부터 히잡을 두른 불쌍한 여자를 구해내고자 할 때 그 여자를 자유롭게 해줄 것은 그 여자가 하는 “선택”이라고 하는 숨겨진 이데올로기적인 가정이 있다는 지적을 한다. 이 “선택”은, 그녀가 히잡을 두르기로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녀를 개인주의적인 인간의 “권리”라는 서구적 틀 속으로 기입 한다. 그리고 아마도 지젝에 대한 독해들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 한 독해들은 우리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를 우리 가운데 한 명으 로 취급할 수 있도록 그가 자신이 한 개념적 “선택들”에 대해서 분명히 하는 한 명의 개인 적 주체로서 우리에게 읽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심층의 모티브와 결합된 기원의 모티브는 지젝을 가치를 가진 상품으로 바꾸어놓으며, 그 가치는 그 상품 안에, 지젝 안에 내속하는 것으로 가정된다. 마치 추출하여 즐겨야 할 어떤 숨겨진 사용가치가 있는 양 말이다. 그와 같은 가정을 막으려는 지젝 자신의 시도들―가장 초기 저자들에 나오는 상품형태에 대한 연구들 속에서,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로 그리고 이제 점점 더 변증법적 유물론자로 위치지으면서 스스로 명시적으로 쓰고 서명하는 일련의 정치적 논평들 속에서 이론적으로 세공된 시도들―은 그를 조롱하기 위해 이용된다.
지난 5년간의 강렬한 이론적 활동은 관념들보다는 사상가에 초점을 맞추는 학계와 미디 어 기구에 대한 과잉동일시와 결합되어 있었다. 지젝은 종종 이에 대해서 논평을 했으며, 개인으로서의 그에 대한 초점맞춤이 그의 논변에 대한 관심을 돌려놓으려는 의도라고 지적 했다.
그러므로 (2005년의 현실의 제조: 슬라보예 지젝과 가상적인 것의 현실과 지젝! 같 은) 다큐멘터리들은 이중적 효과를 낳는다. 한 가지 계기에서 그는 다큐멘타리의 주체로 참 여하면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연후에 그 다음 계기에서는, 그가 공연 배후에서 영화제작자와 청중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장면들의 우스꽝스러운 병치는 NSK-국가 정치가들인 라이바흐에 의해 교묘하게 꾸며진 것만큼이나 놀라운 효과를 산출한 다. 결론적으로, 아마도, 이것이 관객들만큼이나 합리적인 어떤 지성에 의해 무대화된 것일 뿐이라고 관객들을 안심시켜줄 그 어떤 다른 숨겨진 심층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이 모든 모순적인 자료들을 휘저으면서 그는 실제로도 그런 것을 의도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비판적 입문서”의 이 저자가 공연 배후에 있는 요점에 이르고자 노력할 때, 그는 이점을 놓치고 있을 것이다.
저자가 어떻게 지젝을 읽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어떻게 읽지 말아야 하는지를 경고하는 약속된 과제에 열을 올릴 때 이 책에서 우리가 추적한 오류들 각각은 혼합된다. 그래서, 초 기 텍스트 중 하나인 삐딱하게 보기의 교훈은 주목되고 나서 신속하게 잊혀진다. 이론적 인 텍스트들의 내적으로 모순적인 성격을 다루는 대신에, 상이한 청중의 입장들의 기능으로 서 세공될 수 있는 상호 양립불가능한 해석들의 범위를 다루는 대신에, 지젝의 저술의 현실 적으로 존재하는 고정점을 결정하려는, 그것의 의미가 수정처럼 투명해지도록 그것을 해명 하려는 시도가 있다. 지젝의 실제로 의미하는 것을 분명하게 본다는 환상은 독자들이 어떻 게 그를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도덕적 평가로 연결된다. 이 책은 독자들을 보호하려고, 무엇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독자들에게 말해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제 독자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이 책의 노선 그 자체가 의문시되어야 한다.
지젝이 초기 텍스트들에서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는 내용은 2006년의 시차적 관점에서 취해져 일련의 이론적 물음들과 정치적 현상들을 통해 다시금 읽혀진다. 그리고 여기서 어 떤 새로운 개념적 자원들이 여하한 텍스트에 대한 하나의 정확한 독해를 찾는 것의 불가능 성에 대한 오랜 관심사와 절합된다. 여기서 지젝은 우리가 빠딱하게 보아야만 한다는, 우리 의 탐구 대상을 옆쪽에서 일별하면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층 더 명시적으로 표명한 다. 레비-스트로스에게서 가져와 종종 인용되는 사례―위네바고 마을의 구조에 대한 그 마 을의 상이한 부족들이 제공하는 분열된 설명―는 “시차” 개념과 더불어 제시된다. 여기서, 일본의 맑스주의자 가라타니(그의 칸트 독해는 정치와 경제의 이율배반적 관계를 포착하기 위해 “시차”라는 개념적 장치를 이용한다)의 저작에 대한 검토는 사물들이 결코 단지 있는 그대로 읽혀질 수 없다는 지젝의 주장을 재가공할 기회이다. 한 현상에 대한 우리의 독해는 언제나 이미 분열된 적대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입장에 의해 매개된다.
이 독해의 문제―하나의 “정확한” 독해에 대한한 논변―는 지젝의 2006년 How to Read 라캉 같은 텍스트나 이제는 고전이 된 영화에 대한 책들의 새 판본에서 반복해서 다루어져 왔다. 영화에 대한 작업은 또한 2006년 다큐멘터리 The Pervert’s Guide to Cinema로도 나온 바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이미 텔레비전으로 세계 전역에 방영되었고 이제 DVD로 구 해볼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시차”라는 개념이, 현실에 대한 적대적인 경쟁하는 파악들이라는 개념이 지 젝에 의해 정치적 영역에서 적용되며, 또한 기독교―도덕적으로 규범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 현상임을 기억하자―에 대한 그의 논의를 미국에서 점차 유력해진 이스라엘 에 대한 기독교적인 원리주의적 환상들과 연계시키는 개입들에서 적용된다. 이러한 정치적 개입들 속에서 지젝은 우리가 동시대적 사건들을 [그것을 통해서]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좌 표들을 교란하며, 우리에게 위안을 주기를 거부하며, 신앙고백적 갈등에 대한 손쉬운 상식 적 해답이 있다는 보증을 주지 않는다.
학술적이고 문화적인 이스라엘 보이콧을 위한 팔레스타인 운동이 지젝에게 2006년 7월 예루살렘 국제 양화 페스티벌에 참여하지 말 것을 요구했을 때, 지젝은 그의 표현대로 “유 대인 보이콧”이라는 낡은 반유대주의 노선을 따르지 않겠다는 그의 거부에서 확고부동했다. 그 대신 그는 페스티발 그 자체의 게스트가 아닌 감독 우디 알로니의 게스트로 참석할 것이 라고 선언함으로써 이에 응답했다. 그래서 그는 알로니의 2002년 영화 <로컬 엔젤: 신학적 정치적 단편들>에 대한 이후의 논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리고 DVD에는 이 영화에 대한 지젝, 바디우와의 대담이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와 페스티발에서의 상영을 둘러싼 대한 논 쟁에서 지젝의 실천적인 정치적 제안은 예루살렘을 포기해야 한다는, 아랍인들과 유대인들 이(그리고 또한 그 문제라면, 기독교인들도) 예루살렘을 포기해야 한다는, 그리고 예루살렘 을 비-참회의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젝에 대한 이 책에서, 애매하고 쾌활하고 사고를 자극하는 개입들은 너무나도 자주 도 덕적 평가들로, 어떻게 그가 읽혀야 하는가에 대한 지시들로 환원된다. 지젝의 저술에 대해 독자들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된 해석과 관련해 독자들에게 경고를 하려는 점증하는 필사적 인 시도는 마지막 장에서 절정에 달한다. 거기에는 텍스트의―실로, 겉보기에 내적으로 일관 된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로서 기만적으로 취급된, 지젝이 쓴 모든 상이한 텍스트들의―핵심 으로서 제시되는 어떤 것에 대한 기술이 있는데, 이는 지젝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으로서 기능한다. 바로 이러한 것을 배경으로 지젝은 물신화되며, 여하한 다른 상품처 럼 취급된다. 아무런 내재적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지만 무언가 비밀을 내포하는 양 우리가 다른 상품들과 계속해서 교환하는 상품으로서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정확한 독해를 제공하는 것의 불가능성이 가장 명시적으로, 생산적으로, 전 복적으로 전개된 것은 지젝에 대한 겉보기에 가장 물신화된 재현들 속에서였다. 2007년 온 라인 공개 잡지 지젝 연구 국제 저널의 창간은 그 자신의 게임에서 여러분의 사람이 참여 하게 한다. 상세한 학술적인 개념 해석들과 그의 작업의 적용들이 Ž-상표 의류와 도자기 판매와 함께 있다. 그는 그 웹사이트를 결코 보지 않았다고, 그것이 그에게는 다소 외상적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실로 이데올로기적 기입의 표면들과 그것들의 비인간적 향유의 환상적 하면에 관해 그가 우리에게 말하려고 노력해온 바로 그것을 응축하고 실연한다. 그 를 셀리브리티 상품 교환 시스템 속으로 용해시킴으로써만 그는 자신의 모습대로 그리고 그 가 아닌 모습으로 동시에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그의 저술에 바쳐진 저널은 그것의 대상의 모순성과 복사服事들의 익살맞은 행동들을 한껏 즐긴다. 이는 그가 무엇을 말하며, 그가 왜 그것을 말하며, 그가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한 판옵티콘적인 “비판적 입문”의 정반 대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이론적인 기원들, 심층, 정확한 독해를 포착하고 규정 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며, 또한 지젝을 이해하는 데 더 가까이 이르기 위해서라면 실패해야 만 하는 것이다.
이안 파커, 2008년 3월 이성민 번역
영화 <위기의 예감>, 키노 1997년 4월호 p.141
예술은 정치경제적 구조의 변혁을 반영하고, 때로는 예언한다. 전쟁과 학살의 출발점에는 뿌리 깊은 역사가 가로놓여 있고, 예술은 암울한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 사이를 방황하며 동시에 예감한다. 티토가 사망하기 1년 전인 80년대 초반, 탄광 지역을 기반으로 출현한 인더스트리얼 록 그룹 라이바하(Laibach)는 예술과 정치 간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의 한 가운데 서있다.파시스트의 이미지들을 차용하면서 파문을 일으킨 이 그룹의 뒤를 이어 회화 그룹 어윈(Ir-win), 연극 그룹 적색 파일럿(Red Pilot) 등이 전격적인 합류를 선언하면서 가장 야심적이고 파격적인 예술 집단 NSK(Neue Slowenische Kunst, 새로운 슬로베니아 예술)가 결성된다. NSK는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내에서 또 다른 형태의 독립을 선언한다. NSK는 스스로를, 영토를 보유하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국가로 정립하고, 모스크바, 베를린, 플로렌스, 겐트 등에 대사관과 영사관을 설립하고 여권을 발행하기까지 한다.
<위기의 예감>은 이 그룹의 활동과 그 활동이 촉발한 논쟁의 중심으로 진입해서, 분할된 유고 사회를 앞서간 문화적 징후를 새롭게 포착하려 한다. 미국 대사관 소속 외교관의 아들로 모스크바, 베오그 라드등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감독 마이클 벤슨에게 있어서 전체주의적인 공산 정권 하에 성장한 동유럽 세대들이 겪는 외상과 갈등은 애당초 원죄와도 같은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뉴욕 영화학교(NYU)에서 석사과정을 밟은 그에게 영화 매체는 바로 그러한 현상을 예술과 이데올로기의 상호 관계에서 포착해내는 데 가장 적절한 도구였다.
“영화의 역할이 복합적인 이슈를 단순화시키는 역할에 한정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섬세하게 주의를 환기시 키며 심오한 접근을 하는 언어로서 결코 문 학에 뒤처져 있을 필요가 없다.”
그가 동원한 영화적 방법론은 인터뷰, 재연, 자료화면, 애니메이션, 미니어처 등 혼돈의 시대만큼 복합적인 기법의 재조직이 다. 슬로베니아의 근현대사를 복원해냄과 동시에, 모스크바, 뉴욕, 베오그라드, 아테 네 등을 순회하는 NSK의 콘서트, 인터뷰,퍼포먼스, 전시회 등이 조명되고, 지극히 단조로운 드럼, 불타는 십자가, 종교적이고 국수주의적인 표상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라이바하는 그러한 상징들을 아방가르드(전위)와 결합시키고, 스스로를 레트로가드(retro-garde, 후위)로 지칭하며 과거의 공포는 단순히 씻겨질 수 없는 것이며, 그것과 대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의 붕괴는 더 이상 고전적 자본 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비판적인 주장과는 또 다르게, 이 모든 것은 한편으로는 전체주의적이고 남성 우월적인 의식이 포스트모더니즘과 조우한 의도적인 결과물들로도 평가된다. 그 어떤 경우이든 그들에게는 해답이 없다. 다만 발칸의 상황을 먼 나라의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발상에 대한 마지막 경고가 있을 뿐이다.“파시즘은 언제라도 발화할 수 있다.”(라이바하)
지극히 철학적인 나레이션과 다양한 형식의 시도로 자기 모순적인 활동을 담아낸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날카롭게 대립 된다.
“정치가 모든 예술적 창조에 개입해오는 과정을 포스트 모던하면서, 의사(quasi) 고다르적인 감수성으로 접근한다.... 역사적 사건과 그것의 신화적 의미를 결합시킨 수작”「( 버라이 어티」, 1996.10.8)
“질문이 있기 전에 답변이 앞서 나오고, 이미 던져진 질문은 답변을 얻지 못한다.... 작품의 급진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로서는 단조롭다. 작가는 주인공들의 양면적인 매력을 불신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표현 기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독스」, 1996.1)
논란을 통해서 이미 예측할 수 있듯이, 역사 다큐멘터리와 예술적 에세이의 절충을 통한 결과물인 <위기의 예감>은 광범 위한 맥락을 짚어내는 과정에서 때때로 경로를 이탈한다. 그러나 이것은 작품의 한계라기 보다는 새로운 증후군을 해석해 낼 수 없는 시대정신의 한계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슬로베니아의 백과사전적 지식인이자 포스트 라캉주의자인 슬라보치 지젝의 언급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라이바하의 독창성은 체제가 스스로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시스템을 성찰하기를 제안한 것일 뿐이다.”
라이바하에 대한 마이클 벤슨의 최종적인 결론은 없다. 다만 세기말 의 참극을 낳은 발칸의 사회심리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만큼은 일관되게 혼돈의 이미지 사이를 관통한다.
<위기의 예감>은 이 그룹의 활동과 그 활동이 촉발한 논쟁의 중심으로 진입해서, 분할된 유고 사회를 앞서간 문화적 징후를 새롭게 포착하려 한다. 미국 대사관 소속 외교관의 아들로 모스크바, 베오그 라드등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감독 마이클 벤슨에게 있어서 전체주의적인 공산 정권 하에 성장한 동유럽 세대들이 겪는 외상과 갈등은 애당초 원죄와도 같은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뉴욕 영화학교(NYU)에서 석사과정을 밟은 그에게 영화 매체는 바로 그러한 현상을 예술과 이데올로기의 상호 관계에서 포착해내는 데 가장 적절한 도구였다.
“영화의 역할이 복합적인 이슈를 단순화시키는 역할에 한정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섬세하게 주의를 환기시 키며 심오한 접근을 하는 언어로서 결코 문 학에 뒤처져 있을 필요가 없다.”
그가 동원한 영화적 방법론은 인터뷰, 재연, 자료화면, 애니메이션, 미니어처 등 혼돈의 시대만큼 복합적인 기법의 재조직이 다. 슬로베니아의 근현대사를 복원해냄과 동시에, 모스크바, 뉴욕, 베오그라드, 아테 네 등을 순회하는 NSK의 콘서트, 인터뷰,퍼포먼스, 전시회 등이 조명되고, 지극히 단조로운 드럼, 불타는 십자가, 종교적이고 국수주의적인 표상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라이바하는 그러한 상징들을 아방가르드(전위)와 결합시키고, 스스로를 레트로가드(retro-garde, 후위)로 지칭하며 과거의 공포는 단순히 씻겨질 수 없는 것이며, 그것과 대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의 붕괴는 더 이상 고전적 자본 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비판적인 주장과는 또 다르게, 이 모든 것은 한편으로는 전체주의적이고 남성 우월적인 의식이 포스트모더니즘과 조우한 의도적인 결과물들로도 평가된다. 그 어떤 경우이든 그들에게는 해답이 없다. 다만 발칸의 상황을 먼 나라의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발상에 대한 마지막 경고가 있을 뿐이다.“파시즘은 언제라도 발화할 수 있다.”(라이바하)
지극히 철학적인 나레이션과 다양한 형식의 시도로 자기 모순적인 활동을 담아낸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날카롭게 대립 된다.
“정치가 모든 예술적 창조에 개입해오는 과정을 포스트 모던하면서, 의사(quasi) 고다르적인 감수성으로 접근한다.... 역사적 사건과 그것의 신화적 의미를 결합시킨 수작”「( 버라이 어티」, 1996.10.8)
“질문이 있기 전에 답변이 앞서 나오고, 이미 던져진 질문은 답변을 얻지 못한다.... 작품의 급진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로서는 단조롭다. 작가는 주인공들의 양면적인 매력을 불신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표현 기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독스」, 1996.1)
논란을 통해서 이미 예측할 수 있듯이, 역사 다큐멘터리와 예술적 에세이의 절충을 통한 결과물인 <위기의 예감>은 광범 위한 맥락을 짚어내는 과정에서 때때로 경로를 이탈한다. 그러나 이것은 작품의 한계라기 보다는 새로운 증후군을 해석해 낼 수 없는 시대정신의 한계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슬로베니아의 백과사전적 지식인이자 포스트 라캉주의자인 슬라보치 지젝의 언급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라이바하의 독창성은 체제가 스스로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시스템을 성찰하기를 제안한 것일 뿐이다.”
라이바하에 대한 마이클 벤슨의 최종적인 결론은 없다. 다만 세기말 의 참극을 낳은 발칸의 사회심리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만큼은 일관되게 혼돈의 이미지 사이를 관통한다.
<트랜스 아시아 영상 문화> 중에서
<트랜스 아시아 영상 문화> 중에서
...에 문자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과잉 동일시)으로 볼 것이다. 과잉 동일시를 통해 상징적 질서의 중핵에 맴돌고 있는 잉여- 향유를 폭로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상징적 질서를 요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지젝이 강조하는 전략이 아닌가? 그러나 가장에 둘러싸여 있는 대상 a와 관찰자 사이의거리가 이데올로기적이라면, 관람성의 차원에서 이미지를 전복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리얼(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실재가 아니다)이 물질적인 것에 관련된 것이라면, ‘힘’을 뜻하는 라틴어 virtus에서 비롯된 버추얼은 정신적인 것에 관련된 것으로 이미 현실적으로 특정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잠재력이다. 그러므로 버추얼은 가상(假想)이 아닌 실상(實相) 이며, 버추얼 리얼리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버추얼 액추얼리티와 리얼 액추얼리티 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터넷 접속을 끊음으로써 대상 a와의 조우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a와 만나는 순간 혹은 만나지 않는 순간 모두 삶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구체적인 장소에서 지배와 종속의 권력관계가 행사되는 훈육사회에서 권력이 삶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는 ‘통제사회’(Deleuze, 1995: 177~ 182)로의 이행을 목격하고 있다(그것은 물론 훈육사회를 포함한 통제사회로의 이행이다). (p.147)
...지젝은 < 사이버스페이스에서 판타지의 횡단은 가능한가>의 마지막 부분에서, 판타지의 횡단을 과잉 동일시(over-identification) 의 전략과 연결시킨다. 그것은 주체가 사물의 실제 상태를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도 아니며, 자신의 근본적 판타지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는 것도 아니다. 과잉 동일시한다는 것은 근본적 판타지의 상상적 요소들에 문자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을 가리킨다. 과잉 동일시를 끝까지 밀어붙여, 경험의 일관성을 보증하는 판타지 프레임을 극복하는 것,그럼으로써 존재의 비일관성과 마주하기, 바로 그것이 판타지 횡단의 주된 내용이다. 그러나 이후에 지젝은 《믿음에 대하여(On Belief)》 (2002b)와 《실재 사막으로의 초대》 (2002a) 에서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그노시스주의의 현대판 판본인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포르노(특히 미트샷)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신체없는 기관’의 콜라주다. 우리는‘신체 없는 기관’들의 가벼운 경련, 근육의 수축과 이완 운동들 속에서 어떠한 메시지도 해석할 수 없다. (p.168)
...에 문자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과잉 동일시)으로 볼 것이다. 과잉 동일시를 통해 상징적 질서의 중핵에 맴돌고 있는 잉여- 향유를 폭로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상징적 질서를 요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지젝이 강조하는 전략이 아닌가? 그러나 가장에 둘러싸여 있는 대상 a와 관찰자 사이의거리가 이데올로기적이라면, 관람성의 차원에서 이미지를 전복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리얼(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실재가 아니다)이 물질적인 것에 관련된 것이라면, ‘힘’을 뜻하는 라틴어 virtus에서 비롯된 버추얼은 정신적인 것에 관련된 것으로 이미 현실적으로 특정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잠재력이다. 그러므로 버추얼은 가상(假想)이 아닌 실상(實相) 이며, 버추얼 리얼리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버추얼 액추얼리티와 리얼 액추얼리티 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터넷 접속을 끊음으로써 대상 a와의 조우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a와 만나는 순간 혹은 만나지 않는 순간 모두 삶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구체적인 장소에서 지배와 종속의 권력관계가 행사되는 훈육사회에서 권력이 삶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는 ‘통제사회’(Deleuze, 1995: 177~ 182)로의 이행을 목격하고 있다(그것은 물론 훈육사회를 포함한 통제사회로의 이행이다). (p.147)
...지젝은 < 사이버스페이스에서 판타지의 횡단은 가능한가>의 마지막 부분에서, 판타지의 횡단을 과잉 동일시(over-identification) 의 전략과 연결시킨다. 그것은 주체가 사물의 실제 상태를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도 아니며, 자신의 근본적 판타지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는 것도 아니다. 과잉 동일시한다는 것은 근본적 판타지의 상상적 요소들에 문자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을 가리킨다. 과잉 동일시를 끝까지 밀어붙여, 경험의 일관성을 보증하는 판타지 프레임을 극복하는 것,그럼으로써 존재의 비일관성과 마주하기, 바로 그것이 판타지 횡단의 주된 내용이다. 그러나 이후에 지젝은 《믿음에 대하여(On Belief)》 (2002b)와 《실재 사막으로의 초대》 (2002a) 에서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그노시스주의의 현대판 판본인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포르노(특히 미트샷)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신체없는 기관’의 콜라주다. 우리는‘신체 없는 기관’들의 가벼운 경련, 근육의 수축과 이완 운동들 속에서 어떠한 메시지도 해석할 수 없다. (p.168)
2013년 10월 10일 목요일
칸트 취미판단에서의 미적 이념
칸트에게 취미판단은 인식과 관계없는 판단이며 오히려 상상력과 오성에 의한 주관의 쾌/불쾌의 감정에서 기인한다. 여기서 취미판단을 불러일으키는 계기: 즉 쾌/불쾌의 감정은 몇 가지로 세분화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쾌/불쾌의 감정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한 경우만 취미판단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칸트에 의하면 쾌, 그러니까 즐거움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쾌적의 즐거움이다. 이것은 마치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면 해소가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욕구가 있고 욕구의 대상이 있으며, 그것이 해소되었을 때의 만족감=즐거움이다. 철저하게 주관적인 입장의 즐거움이다. 둘째, 선한 것을 볼 때의 즐거움이다. 선한 것은 칸트의 입장에서 볼 때, 실천적인 것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를 요청받는다. 존재하기를 바라지 않는 다면 칸트의 입장에서 선한 것이 아니다. 셋째, 샤프츠베리부터 내려온 무관심적 즐거움이다. 이 미적 즐거움은 우리를 모든 관심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유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우리를 즐겁게 한다. 여기서 목적없는 합목적성이 나온다. 외적 목적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얻어지는 만족감은 곧 내적 목적, 내적 완벽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미적 즐거움은 주관적이지만 보편 타당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미적 이념
칸트에 의하면 쾌, 그러니까 즐거움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쾌적의 즐거움이다. 이것은 마치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면 해소가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욕구가 있고 욕구의 대상이 있으며, 그것이 해소되었을 때의 만족감=즐거움이다. 철저하게 주관적인 입장의 즐거움이다. 둘째, 선한 것을 볼 때의 즐거움이다. 선한 것은 칸트의 입장에서 볼 때, 실천적인 것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를 요청받는다. 존재하기를 바라지 않는 다면 칸트의 입장에서 선한 것이 아니다. 셋째, 샤프츠베리부터 내려온 무관심적 즐거움이다. 이 미적 즐거움은 우리를 모든 관심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유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우리를 즐겁게 한다. 여기서 목적없는 합목적성이 나온다. 외적 목적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얻어지는 만족감은 곧 내적 목적, 내적 완벽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미적 즐거움은 주관적이지만 보편 타당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미적 이념
2013년 10월 3일 목요일
‘Cultural Activism Today: The Art of Over-Identification’ BAVO
Santiago Sierra – ‘works are exemplary of a certain tendency in contemporary art, in which artists, faced by a world which is more than ever ruled by a calculating cynicism, strategically give up their will to resist, capitulate on the status-quo and apply the latter’s rules even more consistently and scrupulously than the rest of society.’
‘Sierra provokes by asking why should art be an exception when it comes to ruthlessly exploiting cheap labour for self-enrichment and ask why art cannot be as nakedly self-interested and capitalist as everything else in the ‘real’ world’.
‘Art of over-identification asks of artists to ignore society’s pathetic demand for small creative acts and, inversely, to uncompromisingly identify with the ruling order itself and to get to act out its logic in its most extreme, dystopian form’
Sabotages ‘society’s tendency to delegate its task of resistance to the safe haven of art’
NGO artists – no call for hight art statements, big political manifestos or sublime expressions of moral indignation, instead these artists use direct, concrete, community based interventions – concern for social empowerment.
This type of art is seen as a valued ally of the current capitalist system – art as social work. ‘The crucial question is whether NGO artists, with their micro-interventions, also politicise the larger injustices and skewed power relations that are at play in the context in which they operate – do they also problematise the mechanisms responsible?
‘Sierra provokes by asking why should art be an exception when it comes to ruthlessly exploiting cheap labour for self-enrichment and ask why art cannot be as nakedly self-interested and capitalist as everything else in the ‘real’ world’.
‘Art of over-identification asks of artists to ignore society’s pathetic demand for small creative acts and, inversely, to uncompromisingly identify with the ruling order itself and to get to act out its logic in its most extreme, dystopian form’
Sabotages ‘society’s tendency to delegate its task of resistance to the safe haven of art’
NGO artists – no call for hight art statements, big political manifestos or sublime expressions of moral indignation, instead these artists use direct, concrete, community based interventions – concern for social empowerment.
This type of art is seen as a valued ally of the current capitalist system – art as social work. ‘The crucial question is whether NGO artists, with their micro-interventions, also politicise the larger injustices and skewed power relations that are at play in the context in which they operate – do they also problematise the mechanisms responsi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