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27일 일요일
[위시리스트] 하프리얼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7716409
http://taeppo.egloos.com/6193015
비디오게임이란 무엇이고 비디오게임이 어떻게 플레이되는지를 살펴보고, 비디오 게임의 발달 과정을 분석해 비디오게임이 재미를 주는 이유를 문학, 영화, 컴퓨터 공학, 심리학, 경제 게임이론 등을 통해 답하였다. 또 게임이 전통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게임 규칙이 플레이어에게 도전과 학습의 기회 그리고 즐거움을 어떻게 선사하는지를 상세히 다루었다.
이 책에서, 제스퍼 주울은 게임 규칙과 가상 세계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을 깊이 있게 다룬다. <퐁> 게임에서부터 <젤다의 전설>까지, 체스 게임에서 <그랜트 테프트 오토 3>까지, 주울은 비디오게임이 전원을 사용하지 않는 전통 게임으로부터 어떻게 파생되었는지, 그리고 전통 게임을 어떻게 넘어섰는지에 관해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이 책은 비디오게임이란 무엇인지, 비디오게임은 어떻게 플레이 되는지, 비디오게임은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걸쳐 발달하여왔는지, 그리고 비디오게임은 왜 재미있는지와 같은 매우 깊이 있는 질문을 문학, 영화 이론, 컴퓨터 공학, 심리학, 경제 게임 이론, 비디오게임 연구를 통해서 답하고 있다.

서문
1. 들어가며 11
2. 비디오게임과 고전 게임 모델 39
3. 규칙 81
4. 가상 세계 157
5. 규칙과 가상 세계 205
6. 맺음말 243
주(註) 251
역자 후기 261

에릭 짐머만 (게임랩(gameLab)의 공동창시자이자 최고 경영자)
: "게임의 규칙과 구조, 게임의 미학적인 측면, 그리고 게임의 가상 세계와 플레이어의 경험이라는 복잡성까지 다룬 책. 이 책은 게임에 대한 즐거운 탐험일 뿐만 아니라, 이제 막 학계의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게임 연구와 게임 디자인 이론을 축하하는 책이다."
어니스트 W. 아담스 (게임 디자이너 프리랜서)
: "제스퍼 주울은 게임 규칙과 가상 세계와의 상호작용에 관해 아주 통찰력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딱딱하고 학구적인 게임 글과는 달리, 이 책은 아주 명확하고 읽기 쉽다. 게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저자 : 제스퍼 주울 (Jesper Juul)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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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하프 리얼>
SNS : http://www.jesperjuul.net/
소개 : 뉴욕대학교 게임 센터의 초빙교수. 지은 책으로 <일상의 혁명: 비디오게임과 플레이어에 대한 재발견 A casual Revolution: Reinventing Video Games and Their Players>이 있다. http://www.jesperjuul.net/
역자 : 장성진
최근작 : <낙동강과 경남> … 총 2종 (모두보기)
소개 : 중앙대학교 영문학과 학부와 석사 취득. 미국 The University of North Texas에서 영문학 석사 취득.
현재 The University of Tulsa에서 제임스 조이스에 관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비디오게임은 하프리얼이다
이 책은 비디오게임이란 무엇이고 비디오게임이 어떻게 플레이되는지를 살펴보고, 비디오 게임의 발달 과정을 분석해 비디오게임이 재미를 주는 이유를 문학, 영화, 컴퓨터 공학, 심리학, 경제 게임이론 등을 통해 답하였다. 또 게임이 전통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게임 규칙이 플레이어에게 도전과 학습의 기회 그리고 즐거움을 어떻게 선사하는지를 상세히 다루었다.
비디오게임은 하프 리얼이다. 우리는 게임의 가상 세계를 상상하는 반면에 실제 규칙을 가지고 비디오게임을 플레이한다. 우리는 실제 세계에서, 게임에서 지거나 승리한다. 우리는 가상 세계 속에서 드래곤을 격퇴한다. 이 책에서, 제스퍼 주울은 게임 규칙과 가상 세계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을 깊이 있게 다룬다. <퐁> 게임에서부터 <젤다의 전설>까지, 체스 게임에서 <그랜트 테프트 오토 3>까지, 주울은 비디오게임이 전원을 사용하지 않는 전통 게임으로부터 어떻게 파생되었는지, 그리고 전통 게임을 어떻게 넘어섰는지에 관해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이 책은 비디오게임이란 무엇인지, 비디오게임은 어떻게 플레이 되는지, 비디오게임은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걸쳐 발달하여왔는지, 그리고 비디오게임은 왜 재미있는지와 같은 매우 깊이 있는 질문을 문학, 영화 이론, 컴퓨터 공학, 심리학, 경제 게임 이론, 비디오게임 연구를 통해서 답하고 있다.
주울은 게임이 전통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미래에는 어떠한 게임이 만들어질지를 예측하게 해주는 고전 게임 모델을 제시한다. 그는 어떻게 게임 규칙이 플레이어에게 첼린지, 학습의 기회, 그리고 즐거움을 선사하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또한, 주울은 어떤 방식으로 게임이 플레이어로 하여금 가상 세계를 상상하도록 도움을 주는지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주울의 생생한 문체와 그의 논의에 사용된 다양한 많은 자료는 게임 관련자, 게이머뿐만이 아니라 미디어, 문학, 그리고 게임을 연구하는 학자에게 상당히 유용할 것이다.
http://taeppo.egloos.com/6193015
비디오게임이란 무엇이고 비디오게임이 어떻게 플레이되는지를 살펴보고, 비디오 게임의 발달 과정을 분석해 비디오게임이 재미를 주는 이유를 문학, 영화, 컴퓨터 공학, 심리학, 경제 게임이론 등을 통해 답하였다. 또 게임이 전통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게임 규칙이 플레이어에게 도전과 학습의 기회 그리고 즐거움을 어떻게 선사하는지를 상세히 다루었다.
이 책에서, 제스퍼 주울은 게임 규칙과 가상 세계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을 깊이 있게 다룬다. <퐁> 게임에서부터 <젤다의 전설>까지, 체스 게임에서 <그랜트 테프트 오토 3>까지, 주울은 비디오게임이 전원을 사용하지 않는 전통 게임으로부터 어떻게 파생되었는지, 그리고 전통 게임을 어떻게 넘어섰는지에 관해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이 책은 비디오게임이란 무엇인지, 비디오게임은 어떻게 플레이 되는지, 비디오게임은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걸쳐 발달하여왔는지, 그리고 비디오게임은 왜 재미있는지와 같은 매우 깊이 있는 질문을 문학, 영화 이론, 컴퓨터 공학, 심리학, 경제 게임 이론, 비디오게임 연구를 통해서 답하고 있다.
서문
1. 들어가며 11
2. 비디오게임과 고전 게임 모델 39
3. 규칙 81
4. 가상 세계 157
5. 규칙과 가상 세계 205
6. 맺음말 243
주(註) 251
역자 후기 261
에릭 짐머만 (게임랩(gameLab)의 공동창시자이자 최고 경영자)
: "게임의 규칙과 구조, 게임의 미학적인 측면, 그리고 게임의 가상 세계와 플레이어의 경험이라는 복잡성까지 다룬 책. 이 책은 게임에 대한 즐거운 탐험일 뿐만 아니라, 이제 막 학계의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게임 연구와 게임 디자인 이론을 축하하는 책이다."
어니스트 W. 아담스 (게임 디자이너 프리랜서)
: "제스퍼 주울은 게임 규칙과 가상 세계와의 상호작용에 관해 아주 통찰력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딱딱하고 학구적인 게임 글과는 달리, 이 책은 아주 명확하고 읽기 쉽다. 게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저자 : 제스퍼 주울 (Jesper Juul)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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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 장성진
현재 The University of Tulsa에서 제임스 조이스에 관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비디오게임은 하프리얼이다
이 책은 비디오게임이란 무엇이고 비디오게임이 어떻게 플레이되는지를 살펴보고, 비디오 게임의 발달 과정을 분석해 비디오게임이 재미를 주는 이유를 문학, 영화, 컴퓨터 공학, 심리학, 경제 게임이론 등을 통해 답하였다. 또 게임이 전통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게임 규칙이 플레이어에게 도전과 학습의 기회 그리고 즐거움을 어떻게 선사하는지를 상세히 다루었다.
비디오게임은 하프 리얼이다. 우리는 게임의 가상 세계를 상상하는 반면에 실제 규칙을 가지고 비디오게임을 플레이한다. 우리는 실제 세계에서, 게임에서 지거나 승리한다. 우리는 가상 세계 속에서 드래곤을 격퇴한다. 이 책에서, 제스퍼 주울은 게임 규칙과 가상 세계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을 깊이 있게 다룬다. <퐁> 게임에서부터 <젤다의 전설>까지, 체스 게임에서 <그랜트 테프트 오토 3>까지, 주울은 비디오게임이 전원을 사용하지 않는 전통 게임으로부터 어떻게 파생되었는지, 그리고 전통 게임을 어떻게 넘어섰는지에 관해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이 책은 비디오게임이란 무엇인지, 비디오게임은 어떻게 플레이 되는지, 비디오게임은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걸쳐 발달하여왔는지, 그리고 비디오게임은 왜 재미있는지와 같은 매우 깊이 있는 질문을 문학, 영화 이론, 컴퓨터 공학, 심리학, 경제 게임 이론, 비디오게임 연구를 통해서 답하고 있다.
주울은 게임이 전통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미래에는 어떠한 게임이 만들어질지를 예측하게 해주는 고전 게임 모델을 제시한다. 그는 어떻게 게임 규칙이 플레이어에게 첼린지, 학습의 기회, 그리고 즐거움을 선사하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또한, 주울은 어떤 방식으로 게임이 플레이어로 하여금 가상 세계를 상상하도록 도움을 주는지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주울의 생생한 문체와 그의 논의에 사용된 다양한 많은 자료는 게임 관련자, 게이머뿐만이 아니라 미디어, 문학, 그리고 게임을 연구하는 학자에게 상당히 유용할 것이다.
[스크랩] 2차 창작에 관해 흥미로운 일본 상황
(source: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news/521/read?bbsId=G003&itemId=15&articleId=1640073)
일본이 지금껏 TPP 협의에서 난색을 표해왔던것은 미국이 저작권법의 일괄적인 비친고죄 전환을 요구해왔기 때문입니다.
즉, 영리던 비영리던 관계 없이 저작권 위반은 무조건 비친고죄로 전환하라고 요구했고 이것에 일본이 난색을 표했던거죠.
현재 미국이 양보해서 각국이 알아서 비친고죄의 범주를 정하라고 한건 이 비영리 목적의 저작권 위반만 해당되는 이야깁니다.
영리적 목적의 침해는 비친고죄화 하는것은 일본도 동의할 가능성이 커요.
결국 비친고죄화를 자율적으로 정한다고 한들 영리 목적의 침해는 여기서 벗어날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동인지는 얄짤없이 영리 목적에 해당되죠.
비친고죄를 피할수 있는건 픽시브와 같은 넷상에서의 무료 창작활동이나 해당되지 코미케에서 동인지 파는건 해당 안됩니다.
그럼 이제 동인지 시장은 붕괴할 것이냐? 그렇지는 않겠죠.
현재 일본 판권사들은 커져버린 2차창작 시장을 자신들이 컨트롤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오오츠카 에이지의 저서 [미디어믹스화 하는 일본]에 따르면 카도가와는 이번 비친고죄화 사건을 통해 2차창작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만들어지는 2차창작물들에서 일정한 수익을 거두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죠.
즉, 비친고죄로 전환이 된다면 2차창작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원 판권사(원저작자에게 직접 접촉하기엔 저작자도 바쁘니 판권사가 일임하게 될것입니다.)에게 신청을 해서 허가를 받고 이후 원 판권사가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동인지를 만들어 판 뒤 거기서 나온 수익의 일부를 원 판권사에 지불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될 경우 지금까지 거의 무제한에 가까웠던 동인지의 표현범위는 원 판권사의 입맛에 따라 좌지우지될수 있습니다.
아사나기 같은 클럽의 경우는 지나친 원작 이미지 훼손이라는 미명하에 허가가 나오지 않을수도 있고, 어쩌면 특정 작품을 일부러 푸시해주기 위해 일정기간동안 특정 작품의 2차창작만을 허가한다거나 할수도 있죠.
그럼 만약 이런 방침에 거부해서 허가받지 않고 동인지를 제작하게 될 경우엔?
우리나라의 형법에는 반의사불벌죄라는 것이 존재합니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2548&cid=46625&categoryId=46625)
이것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형사소추를 진행할수 없게 만드는 법인데 쉽게 말해 검사측에서 한놈을 조지겠다고 형사고소해서 물고 늘어져도
피해당사자가 원치 않는다면 재판을 할수 없게 만드는 법입니다.
헌데 일본에는 이 법이 존재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 저작권법 개정으로 비친고죄로 전환된다면 최악의 경우
제 3자가 악의적으로 신고해서 고소당하면 원작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형사처벌될수 있습니다.
물론 꼭 형사처벌을 받는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법원에서 이것이 저작권 침해라고 판단하면 그때서야 처벌을 받는거죠.
그런데 재밌는건, 오히려 표절보다 2차창작이 훨씬 더 저작권 침해라고 판단할 확률이 높다는겁니다.
원래 표절이란건 사회의 도덕개념이지 법리적 개념이 아니거든요. 법에서는 도용이나 표절을 구분하지 않아요.
도용도 표절도 2차창작도 오마쥬도 패러디도 타 작품에서 원작자의 허가 없이 가져왔다면 무조건 저작권 침해에 해당합니다.
많은분들이 착각을 하시지만 오마쥬나 패러디같은 것들은 순전히 저작권법이 친고죄이기 때문에 원작자들 스스로도 즐기는 경우가 많아서 놔두고 있는것일뿐 법적으로 허가가 되서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게 아닙니다. 이런것들도 작정하고 걸면 걸릴수 있습니다.
차라리 표절은 최대한 원작과의 관계를 숨기려고 들기 때문에 안걸릴 가능성도 많아요. 실제 많은 표절작들이 소송에서 이겼었고요.
뭐 흔한 소재다 우연이다 봐라 여기 여기는 다르지 않느냐 이런걸로 피해갈수도 있는데 2차창작은 그게 안됩니다.
왜냐면 2차창작은 대놓고 원작의 캐릭터를 사용하고 있고, 그걸 공시하고 있거든요.
이 시점에서 저작권 침해라는 판단은 피해갈수가 없어요. 뭐 바로 감방에 넣어버리진 않겠지만 최소 기소유예는 나온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원판권사들이 원하면 얼마든지 조질수 있었음에도 가만 놔뒀는데 비친고죄화 된다고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변하겠느냐 라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판권사들도 이미 거대해진 동인시장을 어떻게든 컨트롤 하면서
수익을 뽑아먹고 싶어한지 오래입니다. 단지 대놓고 그런 면모를 보이면 자기들에게 손해니까 놔둔거죠.
예를 들어 카도가와가 "우리작품 2차창작은 허락받고 해라! 가이드라인 따라라!"이러면서 치고 나왔는데
고단샤에선 "우린 규제 없음, 맘껏 만드셈"하고 2차창작 프렌들리하게 나올 경우 동인들이 어느쪽 2차창작을 더 해줄까요?
이래서 긁어부스럼 만들기 싫으니까 다들 나서지 않았던 거죠.
근데 저작권법이 개정되면 이젠 굳이 자기들 스스로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손 더럽힐 일도 없죠. 서로 반목하는 서클간에서
지들끼리 신고질 할수도 있습니다. 안그래도 앙숙인 PTA쪽에서 광역 신고를 날릴수도 있죠. 익명으로 자사에서 신고 걸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신고 걸리고 나면 끝이거든요.
눈물 질질 짜면서 "우리는 처벌을 원치 않았지만 법적으로 어쩔수 없답니다ㅠㅠ"이래주면 이미지 나빠질 일도 없습니다.
실제로도 신고 걸린 시점에서 원 판권자가 할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2차 창작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가이드라인을 정한다"라고 하면 이제 게임 셋.
원 판권사들은 이제 마음껏 2차창작 시장을 주무를 수 있게 됩니다. 거대해진 2차 시장에서의 수익은 덤이구요.
즉 결론적으로 비친고죄로 전환된다고 동인시장이 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동인시장의 표현의 자유에 제약이 가해질것이며, 원 판권자들의 입김이 매우 세질것으로 예상됩니다.
일본이 지금껏 TPP 협의에서 난색을 표해왔던것은 미국이 저작권법의 일괄적인 비친고죄 전환을 요구해왔기 때문입니다.
즉, 영리던 비영리던 관계 없이 저작권 위반은 무조건 비친고죄로 전환하라고 요구했고 이것에 일본이 난색을 표했던거죠.
현재 미국이 양보해서 각국이 알아서 비친고죄의 범주를 정하라고 한건 이 비영리 목적의 저작권 위반만 해당되는 이야깁니다.
영리적 목적의 침해는 비친고죄화 하는것은 일본도 동의할 가능성이 커요.
関係者によりますと、これまでの交渉で各国は営利目的などの場合の著作権侵害を原則、「非親告罪」とする方向で調整を進めていることが分かりました。
관계자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협상에서 각국은 영리 목적 등의 저작권 침해를 "비 친고죄 '하는 방향으로 조정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http://www3.nhk.or.jp/news/html/20150211/k10015379371000.html
결국 비친고죄화를 자율적으로 정한다고 한들 영리 목적의 침해는 여기서 벗어날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동인지는 얄짤없이 영리 목적에 해당되죠.
비친고죄를 피할수 있는건 픽시브와 같은 넷상에서의 무료 창작활동이나 해당되지 코미케에서 동인지 파는건 해당 안됩니다.
그럼 이제 동인지 시장은 붕괴할 것이냐? 그렇지는 않겠죠.
현재 일본 판권사들은 커져버린 2차창작 시장을 자신들이 컨트롤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오오츠카 에이지의 저서 [미디어믹스화 하는 일본]에 따르면 카도가와는 이번 비친고죄화 사건을 통해 2차창작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만들어지는 2차창작물들에서 일정한 수익을 거두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죠.
즉, 비친고죄로 전환이 된다면 2차창작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원 판권사(원저작자에게 직접 접촉하기엔 저작자도 바쁘니 판권사가 일임하게 될것입니다.)에게 신청을 해서 허가를 받고 이후 원 판권사가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동인지를 만들어 판 뒤 거기서 나온 수익의 일부를 원 판권사에 지불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될 경우 지금까지 거의 무제한에 가까웠던 동인지의 표현범위는 원 판권사의 입맛에 따라 좌지우지될수 있습니다.
아사나기 같은 클럽의 경우는 지나친 원작 이미지 훼손이라는 미명하에 허가가 나오지 않을수도 있고, 어쩌면 특정 작품을 일부러 푸시해주기 위해 일정기간동안 특정 작품의 2차창작만을 허가한다거나 할수도 있죠.
그럼 만약 이런 방침에 거부해서 허가받지 않고 동인지를 제작하게 될 경우엔?
우리나라의 형법에는 반의사불벌죄라는 것이 존재합니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2548&cid=46625&categoryId=46625)
이것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형사소추를 진행할수 없게 만드는 법인데 쉽게 말해 검사측에서 한놈을 조지겠다고 형사고소해서 물고 늘어져도
피해당사자가 원치 않는다면 재판을 할수 없게 만드는 법입니다.
헌데 일본에는 이 법이 존재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 저작권법 개정으로 비친고죄로 전환된다면 최악의 경우
제 3자가 악의적으로 신고해서 고소당하면 원작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형사처벌될수 있습니다.
물론 꼭 형사처벌을 받는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법원에서 이것이 저작권 침해라고 판단하면 그때서야 처벌을 받는거죠.
그런데 재밌는건, 오히려 표절보다 2차창작이 훨씬 더 저작권 침해라고 판단할 확률이 높다는겁니다.
원래 표절이란건 사회의 도덕개념이지 법리적 개념이 아니거든요. 법에서는 도용이나 표절을 구분하지 않아요.
도용도 표절도 2차창작도 오마쥬도 패러디도 타 작품에서 원작자의 허가 없이 가져왔다면 무조건 저작권 침해에 해당합니다.
많은분들이 착각을 하시지만 오마쥬나 패러디같은 것들은 순전히 저작권법이 친고죄이기 때문에 원작자들 스스로도 즐기는 경우가 많아서 놔두고 있는것일뿐 법적으로 허가가 되서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게 아닙니다. 이런것들도 작정하고 걸면 걸릴수 있습니다.
차라리 표절은 최대한 원작과의 관계를 숨기려고 들기 때문에 안걸릴 가능성도 많아요. 실제 많은 표절작들이 소송에서 이겼었고요.
뭐 흔한 소재다 우연이다 봐라 여기 여기는 다르지 않느냐 이런걸로 피해갈수도 있는데 2차창작은 그게 안됩니다.
왜냐면 2차창작은 대놓고 원작의 캐릭터를 사용하고 있고, 그걸 공시하고 있거든요.
이 시점에서 저작권 침해라는 판단은 피해갈수가 없어요. 뭐 바로 감방에 넣어버리진 않겠지만 최소 기소유예는 나온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원판권사들이 원하면 얼마든지 조질수 있었음에도 가만 놔뒀는데 비친고죄화 된다고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변하겠느냐 라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판권사들도 이미 거대해진 동인시장을 어떻게든 컨트롤 하면서
수익을 뽑아먹고 싶어한지 오래입니다. 단지 대놓고 그런 면모를 보이면 자기들에게 손해니까 놔둔거죠.
예를 들어 카도가와가 "우리작품 2차창작은 허락받고 해라! 가이드라인 따라라!"이러면서 치고 나왔는데
고단샤에선 "우린 규제 없음, 맘껏 만드셈"하고 2차창작 프렌들리하게 나올 경우 동인들이 어느쪽 2차창작을 더 해줄까요?
이래서 긁어부스럼 만들기 싫으니까 다들 나서지 않았던 거죠.
근데 저작권법이 개정되면 이젠 굳이 자기들 스스로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손 더럽힐 일도 없죠. 서로 반목하는 서클간에서
지들끼리 신고질 할수도 있습니다. 안그래도 앙숙인 PTA쪽에서 광역 신고를 날릴수도 있죠. 익명으로 자사에서 신고 걸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신고 걸리고 나면 끝이거든요.
눈물 질질 짜면서 "우리는 처벌을 원치 않았지만 법적으로 어쩔수 없답니다ㅠㅠ"이래주면 이미지 나빠질 일도 없습니다.
실제로도 신고 걸린 시점에서 원 판권자가 할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2차 창작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가이드라인을 정한다"라고 하면 이제 게임 셋.
원 판권사들은 이제 마음껏 2차창작 시장을 주무를 수 있게 됩니다. 거대해진 2차 시장에서의 수익은 덤이구요.
즉 결론적으로 비친고죄로 전환된다고 동인시장이 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동인시장의 표현의 자유에 제약이 가해질것이며, 원 판권자들의 입김이 매우 세질것으로 예상됩니다.
[위시리스트]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 / 사이토 다마키
한글로 이뤄진 웹에서도 영미권에서도 도저히 미소녀 일러스트레이터의 계보가 나오지 않아서 구글 일본어 번역의 힘을 빌어 찾아나서기 시작함... -_-; 비슷해 보이는 책이 발견 됐는데 찾아보니 한글로도 번역이 되어 있다. 절판됐지만. 잘 몰랐는데, 사이도 다마키라는 분은 히키코모리 분석의 대가인가보다.
일판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 http://www.amazon.co.jp/%E6%88%A6%E9%97%98%E7%BE%8E%E5%B0%91%E5%A5%B3%E3%81%AE%E7%B2%BE%E7%A5%9E%E5%88%86%E6%9E%90-%E3%81%A1%E3%81%8F%E3%81%BE%E6%96%87%E5%BA%AB-%E6%96%8E%E8%97%A4-%E7%92%B0/dp/4480422161
한글판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분석> http://used.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6085036
일판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 http://www.amazon.co.jp/%E6%88%A6%E9%97%98%E7%BE%8E%E5%B0%91%E5%A5%B3%E3%81%AE%E7%B2%BE%E7%A5%9E%E5%88%86%E6%9E%90-%E3%81%A1%E3%81%8F%E3%81%BE%E6%96%87%E5%BA%AB-%E6%96%8E%E8%97%A4-%E7%92%B0/dp/4480422161
한글판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분석> http://used.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6085036
화두랄까?
이슈없는 미술계에 화두라면 어떤 디스토피아적 전망과 결부된 예술가의 생존문제다. 이런 생존문제--비정규직 문제, 무급인턴 문제, 청년실업 문제 등--는 사실 이미 알려진 사회적 문제로, 처음에 어르신들이 문제 제기했으며 청년 논객들이 가담해 비판했으며 지금은 심심하면 한 번씩 뉴스에 나오지만 별 감흥없는 상태랄까, 그렇다.
미술계에서도 이런 담론은 청년 세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아직도 유효하다--정도가 아니라 지금에서야 핫다달까. 결국엔 지겹게도 세대교체란 말로 귀결되는 듯하지만. 하지만 역시 이건 별로 새로운 건 아니다. 세대교체는 전사 이래 항상 있어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적인 것이다. (일부러 하는 세대교체는 있을 수가 없다. 무슨 인류보완계획도 아니고...) 세대갈등은 항상 있어왔고 문제적이지만 해결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는 항상 그런 것이었다. 세대갈등은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기 때문이다. 원인이 사라져야 증상이 사라진다. 이걸 이슈화하는 사람은 대개 세대 갈등을 조장해 반사이익을 얻길 원한다.
세대 갈등의 문제의 원인은 워낙 중층적이라 쉽게 말하기 힘들다. 거의 사회 문제의 모든 것이 이유와 결부되어 있다. 이걸 모두 고쳐나갈 수는 없다. 당연히. 하지만 그걸 끊임없이 추구해야만 한다. 그것 없이 구세대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고 세대 전복을 주장한다면 그건 세대 간 땅따먹기 경쟁과 다름 아니다. 그렇지 않을까?
아무튼 요즘은 생존에 대한 인식과 준거집단으로서의 세대의 어떤 애티튜드가 일종의 젊은 작가의 스펙처럼 보인다. 예컨대 젠트리피케이션에 관해 공유된 인식, 전세대 작가와 큐레이터에 대한 반감, 신생을 표방하는 공간에 연루된 연대의식, 모바일과 소셜미디어에 관한 강박적 자의식, (어떤 형태로든) 아트페어와 시장에 관한 관심 등.
어쨌든 좋다만, 이런 애티튜드가 미술을 구제하진 않는다는 사실만은 적고 가자. 많은 이들은 이런 공유된 인식, 공유된 애티튜드가 작업 자체를 보증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비판적 태도를 작가 스스로가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작업이 비판적인 것은 아니다. 기존 제도화된 공간의 안티테제로서 신생공간을 만든들, 거기서 일어나는 전시와 작업이 비판적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설령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작업 형식 등장했다고 해서 모두가 지지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가장 보수적인 문화형식으로 드러난다면 말이다.
나는 여전히 미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배웠고,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미술이 테러를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 없고,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을 수 없으며, 난민들을 구제할 수도 없다. 돈을 만들어주지는 더더욱 않는다. 미술이 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있다. 문화의 한 체제로서, 지금의 훈육된 인식 체계, 소위 문화적 지배 이데올로기, 시각 체제를 반성하고 비판할 수 있다. 이 지점을 모색하는 일은 미술이 할 수 있고 여전히 나에게 중요해 보인다.
미술계에서도 이런 담론은 청년 세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아직도 유효하다--정도가 아니라 지금에서야 핫다달까. 결국엔 지겹게도 세대교체란 말로 귀결되는 듯하지만. 하지만 역시 이건 별로 새로운 건 아니다. 세대교체는 전사 이래 항상 있어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적인 것이다. (일부러 하는 세대교체는 있을 수가 없다. 무슨 인류보완계획도 아니고...) 세대갈등은 항상 있어왔고 문제적이지만 해결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는 항상 그런 것이었다. 세대갈등은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기 때문이다. 원인이 사라져야 증상이 사라진다. 이걸 이슈화하는 사람은 대개 세대 갈등을 조장해 반사이익을 얻길 원한다.
세대 갈등의 문제의 원인은 워낙 중층적이라 쉽게 말하기 힘들다. 거의 사회 문제의 모든 것이 이유와 결부되어 있다. 이걸 모두 고쳐나갈 수는 없다. 당연히. 하지만 그걸 끊임없이 추구해야만 한다. 그것 없이 구세대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고 세대 전복을 주장한다면 그건 세대 간 땅따먹기 경쟁과 다름 아니다. 그렇지 않을까?
아무튼 요즘은 생존에 대한 인식과 준거집단으로서의 세대의 어떤 애티튜드가 일종의 젊은 작가의 스펙처럼 보인다. 예컨대 젠트리피케이션에 관해 공유된 인식, 전세대 작가와 큐레이터에 대한 반감, 신생을 표방하는 공간에 연루된 연대의식, 모바일과 소셜미디어에 관한 강박적 자의식, (어떤 형태로든) 아트페어와 시장에 관한 관심 등.
어쨌든 좋다만, 이런 애티튜드가 미술을 구제하진 않는다는 사실만은 적고 가자. 많은 이들은 이런 공유된 인식, 공유된 애티튜드가 작업 자체를 보증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비판적 태도를 작가 스스로가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작업이 비판적인 것은 아니다. 기존 제도화된 공간의 안티테제로서 신생공간을 만든들, 거기서 일어나는 전시와 작업이 비판적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설령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작업 형식 등장했다고 해서 모두가 지지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가장 보수적인 문화형식으로 드러난다면 말이다.
나는 여전히 미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배웠고,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미술이 테러를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 없고,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을 수 없으며, 난민들을 구제할 수도 없다. 돈을 만들어주지는 더더욱 않는다. 미술이 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있다. 문화의 한 체제로서, 지금의 훈육된 인식 체계, 소위 문화적 지배 이데올로기, 시각 체제를 반성하고 비판할 수 있다. 이 지점을 모색하는 일은 미술이 할 수 있고 여전히 나에게 중요해 보인다.
Most Powerless
http://hyperallergic.com/?s=Most+Powerless+People+in+the+Art+World
ㅋㅋㅋㅋㅋㅋㅋㅋㅋ Most Powerless....2014년 버전부터 차례차례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가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인턴 등...이고, 비평가 또한 그 힘없음이 조롱조로 설명된다. 2014년엔 특이하게 Artist fighting gentrification이 등재되어 있는데, 미국도 상황은 마찬가지인가 보다. 파워리스 리스트는 일종의 풍자적인 비평이다. 국내 미술지에서도 이런 순위를 매겨도 좋을듯. 조롱하는 것 같지만 사실 관심이 필요하다는 주장.
2009년 순위엔 놀랍게도 19위에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안습...
ㅋㅋㅋㅋㅋㅋㅋㅋㅋ Most Powerless....2014년 버전부터 차례차례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가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인턴 등...이고, 비평가 또한 그 힘없음이 조롱조로 설명된다. 2014년엔 특이하게 Artist fighting gentrification이 등재되어 있는데, 미국도 상황은 마찬가지인가 보다. 파워리스 리스트는 일종의 풍자적인 비평이다. 국내 미술지에서도 이런 순위를 매겨도 좋을듯. 조롱하는 것 같지만 사실 관심이 필요하다는 주장.
2009년 순위엔 놀랍게도 19위에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19 – Rosalind Krauss – we included her on this list because we couldn’t remember who she was and we were too lazy to Google her.(링크: http://hyperallergic.com/711/powerless-20/)
안습...
[스크랩] 박유하 선생의 페북 메모
박유하 선생의 페북 메모를 허락없이 스크랩했다. 모든 크리틱이 염두에 두어야 할 스스로의 자리에 관한 지침이란 점에서 두고두고 참고할만 하단 점에서 퍼왔다. 여기에 노정태씨가 답변할 수 있을까? 만약 한다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이 사람에 관해 일말의 존경심을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박유하
1. 발화위치의 권력화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은 한국 여성'과 '백인 중산층 여성'의 격차에 대해 온전히 경험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사자로서 그 삶을 살아본 한국 여성뿐입니다."
<당사자주의>는 반만 올바르다. 당사자로서 볼 수 있는 (말할 수 있는)것이 있고, 거리(공간/시간/지식/사고력)를 동원해야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비당사자의 역할에는 구조를 파악하는 일도 있고 어느 한쪽이 특권화되면 권력이 된다.
2.발화되지 않는 발화의 간과
"앞서 제가 '지금까지의 맥락을 놓고 볼 때 HeForShe는 굉장히 이상한 프로젝트'라고 말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차이, 횡단, 교차, 가로지르기 등 9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페미니즘 혹은 젠더 연구 담론을 지배해온 용어들을 전혀 거론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젠더 범주들을 호명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일종의 금기어처럼 되어버렸던 '여성'이 복귀합니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꼭 정황이 고려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해나 곡해가 앞서는 경우 흔한)성급한 비판.
말하자면 여기에는 논의 "차원"의 차이의 문제가 있다. 한편에선 여성할례마저 존재하는 곳에서의 담론과 한국처럼 보기에 따라서는 여성상위처럼보이는 (그래서 역차별이라는 피해의식과 혐오마저 존재하는)공간에서의 담론은 다르거나 달라야 한다. 1이 아직 필요한 공간에서 3이 필요하다, 3도 모르냐고 비난하는 격.
3. 비판과 부정 사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남자 지식인들의 버릇이 잘못 들어 있습니다. 맥락에 따라서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성차별을 당할 수 있다는 식의 상대주의적 논변이 득세한 탓에, 정작 남자 지식인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지식을 달달 외울지언정 그것이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해버린 것 같습니다."
대상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대목. 경멸은 패기와 다르고 비난은 비판과 다르다. 노정태씨가 고정석선생의 "대머리"를 문제삼은 건 필연으로 보인다.
4. <선명성>에의 욕망
"3세대 페미니스트 중에서도 고종석 선생님의 이런 물타기성 발언에 대해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젠더 개념을 다각화하자는 것이지, 젠더가 폭력과 차별을 낳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 자체를 없는 셈 치자는 것이 아니니까요."
<물타기>라는 비난은 선명성에 대한 욕망이 때로 숙청, 혹은 그에 따른 권력의 선점을 욕망하기도 한다는 것을 잊게 만든다.
5."피해자간 차이"의 망각
"엠마 왓슨더러 '백인 중산층 여성'이라고 비난해봐야, 대한민국에서 여성은 남자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회적 차별을 감내하고 살아가기에, 많은 여성들은 선생님이나 저 같은 한국인 남자보다는 백인 중산층 여성에게 동질감을 느낄 가능성이 큽니다. "
그렇지 않은 여성들도 얼마든지 있다. 차별을 느끼지 않는 여성도 있고(존재여부와 상관없이) 반대로 가부장적 억압에 따르는 일로 남녀차이를 조장하는 "지적"여성들도 있다. 특히 후자는 민족적 결속을 더 중요시한다.
2015년 9월 25일 금요일
from the chapter 'of effects'
Tim Griffin has described Price’s effects in the following terms:
as a simulation device, the “effect” posits a kind of chronology where there is none— suggesting some precipitant action responsible for the visual and aural phenomena taking place before the eye and ear. The “effect” creates nothing so much as a rhetorical hole in time, but only in order to fill that hole in advance with some false history or phantom memory for the individualviewer...
Griffin’s association of effects with an absent or invisible agency—a hole in time—is not only essential for understanding Price’s work, it also points to a broader tendency in contemporary sculpture. In the open “scenarios” of artists such as Liam Gillick, Pierre Huyghe, and Rirkrit Tiravanija, who design environments that may or may not be activated through the presence of scripted or unscripted events, spatial structures are consecrated to hosting social effects. Such principles are also present in the new modes of sculptural composition exemplified by Isa Genzken and Rachel Harrison, where tangential connections between things reverse the centripetal effect of earlier twentieth-century montage and assemblage (to use terms I have applied already to Price), in favor of centrifugal tornadoes of divergent associations.
...
...
I wish to supplement Griffin’s definition with two additional valences of effect. First, “special effects,” as practiced by Hollywood cinema, render narrative as pure motion—often a virtually unbroken trajectory initiated in the opening scenes of a film and coming to rest only with the last credit. Blockbuster plots are no more than conventional grids: what matters are the texture, velocity, and point of view with which spectators are carried through a standardized sequence of events. Such movies are not so much watched as navigated—like computer games where motion is frictionless, continuous, and defiant of gravity. The “effect,” as Hollywood renders it, is almost pure transitivity in the absence of a direct object (unless that object is the spectator herself). Second, effects are literally a posteriori. They are, to put it plainly, consequences that cannot be fully anticipated during the phase of aesthetic production. And here, too, we may note a wider aesthetic shift. Artists like Price are primarily interested not in producing new content but in submitting existing pictures (moving and still) to various “ecological” conditions in order to see how they behave. This is why he can call Redistribution (2007–), a videotaped version of the kind of artist’s talk given at art schools or museums, a work: in his practice, works are inextricable from their dissemination. It is also why he habitually reframes and remixes his texts, music, and images, as well as making many of them available online on his website. A contemporary art devoted to circulation, is, of course, a creature of a specific ecology: the market. But instead of either giving up or selling out, Price, like more and more artists, games the market by surfing it. This leads to all kinds of effects: variable velocities, catastrophic jamming, viral proliferation, etc., etc. (pp. 90-93.)
Seth Price says
“Slowness works against all of our prevailing urges and requirements: it is a resistance to the contemporary mandate of speed. Moving with the times places you in a blind spot: if you’re part of the general tenor, it’s difficult to add a dissonant note.” (http://www.distributedhistory.com/Disperzone.html)
국립현대미술관장 선임 건
국립현대미술관장 후보에 보아하니 외국인 2명이 물망에 오른 듯하다. 국내 인력풀의 불모에 소름이 돋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난 일단은 지지한다. 어짜피 국내엔 능력있는 인물이 없고, 당선 됐을 때의 상황이 크게 전임자의 행보와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 그런적이 있었나. (난 국립 공립에 기대를 안 한지 오래 됐다.) 외국인 관장이 한국미술의 연구에 뭔가 이바지 할 능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고, 지금 썩은 구조를 바꾸는 건 더욱 무리라고 생각하지만, 어짜피 무능력하고 일도 안하는 노답인 국립현대라면 이 기회를 국제 토큰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겠나. 암담하긴 하지만 그게 현실이고 기대할만한 건 그거 밖에 없다. 그 대신 기왕 '국력'으로 세계화시키려는 거니 확실한 거물을 데려와서 "세계화"시켰으면 좋겠다. 일단 소박하게 생각해보자면 도록에서 영문 부분이 좋아지겠네? ㅎ
2015년 9월 24일 목요일
고종석 선생 Vs. 노정태씨
고종석 선생과 노정태씨 둘 사이 세계관의 차이가 얼마나 다른지 확인 가능한 두 칼럼이다. 고종석 선생은 에마 왓슨이 기본적으로 백인 중산층 여성-권력자이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유엔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꽤나 심드렁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노정태씨는 에마 왓슨은 여전히 가부장제에서 피해를 받고 있는 '여성' 일반 중 한 명의 대표자이며 유엔이 지지하는 페미니즘 운동 또한 세상을 바꾸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고종석 선생이 한 마디 하고자 했던 대상은 그래서, 쓰여진 그대로 (그의 생각에) 제3세계와 무관하게 진행될 우려를 가지고 있는 국제(?) 페미니즘 운동의 실상이지만, 노정태씨는 결국 한국 여성/제3세계 페미니스트에 그 비판이 겨누어질 수밖에 없는 바로 그 문맥에서 심한 불편함을 느꼈으며, 나아가 고종석씨의 위치, 즉 실제로 하는 건 없이 훈수만 두는 "이데올로기적 후원자"(벤야민)의 위치를 비판했다. 그리곤 고종석 같은 남성 지식인 모델이 현실 페미니즘 운동의 공적임을 천명한다.
고종석 선생을 지지하자면, 글로벌 사회에서 한국 남성 그것도 늙은 남성의 계급적 위치는 젊은 백인 여성 셀레브리티와 비교했을 때 그리 강자의 위치가 아니다. 노정태씨는 우리가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 있으며, 마치 고종석의 주체를 백인 남성 주체와 거의 동급이라도 된 듯 생각하고 있으나 실상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이것이 고종석 스스로가 인식하고 있는 그 자신의 위치인 것으로 보인다. 제3세계 국가의 남성이 '자신의 목소리(한글)'로 그녀에게 발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가 도달할 가능성이 제로에 육박하지 않는가. 에마 왓슨이 이 편지를 스스로 찾아서 번역해서 읽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고종석이 봤고 우리가 본 왓슨의 연설에 대해 지금도 우리가 이렇게 침이 마르도록 뭔가를 말하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에도 말이다. 노정태씨는 이 대목에서 이 글의 독자가 왓슨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정말로 고종석 선생이 왓슨에게 편지를 썼다곤 왜 생각하지 않을까. 그 불가능성에 대한 전제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아닌게 아니라 고종석 선생의 글은 어떤 강력한 시선에 사로잡혀있다. '당신도 익히 아시듯이...'식의 문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글이 뭐랄까, 좀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 한글로 쓰여진 편지글은 그런 글로벌 사회에서의 허마이어니와 JS의 계급적 위치 같은 걸 어쩔 수 없이 드러내는 거 아닌가 싶다. 이 위치는 어떻게 결정되어 있을까? 고종석 선생 그 자신이 자신의 글에서 가감없이 노출하고 있는 그 자신의 위치는 페미니즘 이슈에서 중요하지 않은 건가? 나아가 내 개인적인 질문을 덧붙이자면 유엔은 그것을 해결할 충분한 용의가 있을까?
한편 노정태씨를 지지하자면, 고종석 선생의 글이 굉장히 형식적이란 점에서 그럴 것 같다. "서한 형식"이 문제가 된다고 말이 나왔을 때 실상 문제는 편지 그 자체라기 보다, 글 자체의 형식성에 기인하는 것 같다. 무슨 말이냐. 현실 페미니즘 운동, 특히 한국 사회에에서 이 편지는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쥐꼬리라도 붙잡고 열심히 해보려는 사람한테, 그리고 그런 움직임에 감동하고 함께 실천하려는 사람한테, 그 사람도 익히 알고 있을 문제점을 지루하게 설명한다. 그러니까 노정태씨는 글의 형식이 공히 에마 왓슨을 표적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한국 현실 페미니스트의 사기를 꺾고 가르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점을 못 마땅해하는 것 같다. 노정태씨는 내가 보기에 굉장히 급진적이고 행동주의적이다(하지만 충분하진 않은데 실질적으로 그가 현실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조직한단 소리는 못들어봤기 때문에. 즉 그도 칼럼으로 먹고 산단 소리. 그런 점에서 실용파?). 탁상공론보단 실질적인 '효과'나 '대안'을 중요시 한다. 우리가 유엔의 문제점을 비판하거나 백인 중산층 여성의 스테레오타입을 비판하는 것은 쉬우나 그들을 '실질적으로' 바꾸긴 어렵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있다. 그들이 좋은 모델이 되어 우리가 그들을 따라한다면, 지금보단 더 나아질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뭐 이런 것 아닐까? 고종석씨가 다소 탁상공론에 일반론을 개진한 반면 말이다.
노정태씨가 이런 행동주의적 입장을 취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백종원 관련 칼럼에서도 백종원을 새로운 남성 페미니스트 행동가 모델로 거의 상정하고 글을 썼다. 내가 읽기엔 그랬다. 나는 노정태씨가 가진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어떤 긍정적이고 패기넘치는 생각이 좋다고 생각한다. 젊으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난 좀 애늙은이 같으니, 동의하지 않는 지점도 있다. '효과'의 주장이 반대로 '효과 없으면 닥쳐라'는 의미로 종종 사용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예컨대 그는 종종 실패하거나 효력을 못 본 운동을 두고 '이미 끝났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현실적으로 전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하고 있는 진보를 얼마나 과거로 묻어버리고 싶었을까. 그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현실을 모면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것은 그리 현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지금 한국이 헬조선이라고 해도, 미국을 모델로 삼거나 자본가를 모델로 삼거나 유엔을 모델로 삼는 것이 그리 바람직해보이지 않는다. 그게 바로 지금의 헬 같은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되어 줄 지라도 말이다.
고종석 선생이 한 마디 하고자 했던 대상은 그래서, 쓰여진 그대로 (그의 생각에) 제3세계와 무관하게 진행될 우려를 가지고 있는 국제(?) 페미니즘 운동의 실상이지만, 노정태씨는 결국 한국 여성/제3세계 페미니스트에 그 비판이 겨누어질 수밖에 없는 바로 그 문맥에서 심한 불편함을 느꼈으며, 나아가 고종석씨의 위치, 즉 실제로 하는 건 없이 훈수만 두는 "이데올로기적 후원자"(벤야민)의 위치를 비판했다. 그리곤 고종석 같은 남성 지식인 모델이 현실 페미니즘 운동의 공적임을 천명한다.
고종석 선생을 지지하자면, 글로벌 사회에서 한국 남성 그것도 늙은 남성의 계급적 위치는 젊은 백인 여성 셀레브리티와 비교했을 때 그리 강자의 위치가 아니다. 노정태씨는 우리가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 있으며, 마치 고종석의 주체를 백인 남성 주체와 거의 동급이라도 된 듯 생각하고 있으나 실상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이것이 고종석 스스로가 인식하고 있는 그 자신의 위치인 것으로 보인다. 제3세계 국가의 남성이 '자신의 목소리(한글)'로 그녀에게 발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가 도달할 가능성이 제로에 육박하지 않는가. 에마 왓슨이 이 편지를 스스로 찾아서 번역해서 읽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고종석이 봤고 우리가 본 왓슨의 연설에 대해 지금도 우리가 이렇게 침이 마르도록 뭔가를 말하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에도 말이다. 노정태씨는 이 대목에서 이 글의 독자가 왓슨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정말로 고종석 선생이 왓슨에게 편지를 썼다곤 왜 생각하지 않을까. 그 불가능성에 대한 전제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아닌게 아니라 고종석 선생의 글은 어떤 강력한 시선에 사로잡혀있다. '당신도 익히 아시듯이...'식의 문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글이 뭐랄까, 좀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 한글로 쓰여진 편지글은 그런 글로벌 사회에서의 허마이어니와 JS의 계급적 위치 같은 걸 어쩔 수 없이 드러내는 거 아닌가 싶다. 이 위치는 어떻게 결정되어 있을까? 고종석 선생 그 자신이 자신의 글에서 가감없이 노출하고 있는 그 자신의 위치는 페미니즘 이슈에서 중요하지 않은 건가? 나아가 내 개인적인 질문을 덧붙이자면 유엔은 그것을 해결할 충분한 용의가 있을까?
한편 노정태씨를 지지하자면, 고종석 선생의 글이 굉장히 형식적이란 점에서 그럴 것 같다. "서한 형식"이 문제가 된다고 말이 나왔을 때 실상 문제는 편지 그 자체라기 보다, 글 자체의 형식성에 기인하는 것 같다. 무슨 말이냐. 현실 페미니즘 운동, 특히 한국 사회에에서 이 편지는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쥐꼬리라도 붙잡고 열심히 해보려는 사람한테, 그리고 그런 움직임에 감동하고 함께 실천하려는 사람한테, 그 사람도 익히 알고 있을 문제점을 지루하게 설명한다. 그러니까 노정태씨는 글의 형식이 공히 에마 왓슨을 표적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한국 현실 페미니스트의 사기를 꺾고 가르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점을 못 마땅해하는 것 같다. 노정태씨는 내가 보기에 굉장히 급진적이고 행동주의적이다(하지만 충분하진 않은데 실질적으로 그가 현실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조직한단 소리는 못들어봤기 때문에. 즉 그도 칼럼으로 먹고 산단 소리. 그런 점에서 실용파?). 탁상공론보단 실질적인 '효과'나 '대안'을 중요시 한다. 우리가 유엔의 문제점을 비판하거나 백인 중산층 여성의 스테레오타입을 비판하는 것은 쉬우나 그들을 '실질적으로' 바꾸긴 어렵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있다. 그들이 좋은 모델이 되어 우리가 그들을 따라한다면, 지금보단 더 나아질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뭐 이런 것 아닐까? 고종석씨가 다소 탁상공론에 일반론을 개진한 반면 말이다.
노정태씨가 이런 행동주의적 입장을 취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백종원 관련 칼럼에서도 백종원을 새로운 남성 페미니스트 행동가 모델로 거의 상정하고 글을 썼다. 내가 읽기엔 그랬다. 나는 노정태씨가 가진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어떤 긍정적이고 패기넘치는 생각이 좋다고 생각한다. 젊으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난 좀 애늙은이 같으니, 동의하지 않는 지점도 있다. '효과'의 주장이 반대로 '효과 없으면 닥쳐라'는 의미로 종종 사용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예컨대 그는 종종 실패하거나 효력을 못 본 운동을 두고 '이미 끝났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현실적으로 전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하고 있는 진보를 얼마나 과거로 묻어버리고 싶었을까. 그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현실을 모면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것은 그리 현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지금 한국이 헬조선이라고 해도, 미국을 모델로 삼거나 자본가를 모델로 삼거나 유엔을 모델로 삼는 것이 그리 바람직해보이지 않는다. 그게 바로 지금의 헬 같은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되어 줄 지라도 말이다.
fgf
Art of Projection http://www.hatjecantz.de/art-of-projection-2278-1.html
october 138 http://www.mitpressjournals.org/toc/octo/-/138
october 138 http://www.mitpressjournals.org/toc/octo/-/138
낙원추방 (2014)
캐릭터가 3D 모델링으로 만들어져서 움직임의 차원이 남다르다. 메시지가 꽤 많은데, 다들 왠지 어디서 본듯한 느낌이랄까. 건담부터 공각기동대, 월-이 등...
2015년 9월 23일 수요일
위법정신과 보조금
단순하게 행정적인 절차는 행정적으로 잘 지켜졌으면 좋겠다. 그게 법치 국가다. 현재 민주주의 시스템이 마음에 안 든다면 이건 또 따져봐야 할 문제겠지만, 그렇다면 사회 근간이 흔들리게 될 터이니 그걸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 법과 절차는 지켜지는 편이 좋고, 그래야만 한다. 이건 공무원뿐만 아니라 예술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공무원이 그것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좀 완화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여기서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몇몇 예술가들에게 해당된다.
아무리 거지같은 프로젝트라도 일단 절차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합의하고 결정한 이상 그대로 수행해야 한다. 그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최대한 오류 없이 투명하게 모든 것이 수미일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관료주의 사회의 나쁜점이자 장점이기도 하다. 종종 몇몇 예술가들은 문예지원기금과 지자체 산하 프로젝트 보조금을 마치 치외법권 속에서 사용하길 원하는 것 같다. 소위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간섭하지 말라는 말은 창작에 대한 부분이지 절차적 문제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 종종 몇몇의 예술가들은 그 절차까지 무시하길 원한다. 지원 기금을 많이 굴려본 작가들에게서 더욱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보통 이런 태도로 일관된다: 제도는 무조건 썩었으니 눈먼 돈을 예술가들 끼리 재밌게 잘 쓰면 좋은 거 아닌가, 어짜피 엉뚱한 곳에 쓰일 돈일 테니 일종의 제도에 대한 예술가의 개입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이들의 '돈빼기' 기술은 현란하다. 지원기관의 행정적 요구 사항을 완벽하게 꿰고 그것에'만' 걸리지 않게 서류를 조작한다. 그들에겐 너무나 쉬운 일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정말 한심하다. 나는 몇몇 예술가들이 버젓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그냥 그 사람이 굴리는 돈 몇천만원을 만원씩 쪼개서 서울역 광장 노숙자에게 나눠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제도를 완화시켜라, 정산을 간소화시켜라는 말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위법정신은 정말 구토를 유발한다. 카드깡은 기본이며 말도 안되는 인건비를 만들어 내어 지원금을 나눠가진다. 마치 월급처럼... 이건 약과다. 대규모 지원사업을 받아서 전국에 땅을 사고 다니는 작가도 있다. 문화거점을 구축한다는 이유로 개인 집을 사고 개조하는데 이 돈을 사용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예술가의 삶이 기본적으로 열악해서? 아티스트피 한번 제대로 받기 힘들어서? 이런 핑계는 말도 안된다. 지원사업에서 왜 피를 찾나. 생활이 어려우면 예술인복지재단에 알아보라. 부족하다면 거기에 대고 항의하라. 당신이 편리하게 유통해 쓰는 돈은 그러라고 준 돈이 아니다.
아무리 거지같은 프로젝트라도 일단 절차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합의하고 결정한 이상 그대로 수행해야 한다. 그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최대한 오류 없이 투명하게 모든 것이 수미일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관료주의 사회의 나쁜점이자 장점이기도 하다. 종종 몇몇 예술가들은 문예지원기금과 지자체 산하 프로젝트 보조금을 마치 치외법권 속에서 사용하길 원하는 것 같다. 소위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간섭하지 말라는 말은 창작에 대한 부분이지 절차적 문제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 종종 몇몇의 예술가들은 그 절차까지 무시하길 원한다. 지원 기금을 많이 굴려본 작가들에게서 더욱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보통 이런 태도로 일관된다: 제도는 무조건 썩었으니 눈먼 돈을 예술가들 끼리 재밌게 잘 쓰면 좋은 거 아닌가, 어짜피 엉뚱한 곳에 쓰일 돈일 테니 일종의 제도에 대한 예술가의 개입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이들의 '돈빼기' 기술은 현란하다. 지원기관의 행정적 요구 사항을 완벽하게 꿰고 그것에'만' 걸리지 않게 서류를 조작한다. 그들에겐 너무나 쉬운 일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정말 한심하다. 나는 몇몇 예술가들이 버젓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그냥 그 사람이 굴리는 돈 몇천만원을 만원씩 쪼개서 서울역 광장 노숙자에게 나눠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제도를 완화시켜라, 정산을 간소화시켜라는 말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위법정신은 정말 구토를 유발한다. 카드깡은 기본이며 말도 안되는 인건비를 만들어 내어 지원금을 나눠가진다. 마치 월급처럼... 이건 약과다. 대규모 지원사업을 받아서 전국에 땅을 사고 다니는 작가도 있다. 문화거점을 구축한다는 이유로 개인 집을 사고 개조하는데 이 돈을 사용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예술가의 삶이 기본적으로 열악해서? 아티스트피 한번 제대로 받기 힘들어서? 이런 핑계는 말도 안된다. 지원사업에서 왜 피를 찾나. 생활이 어려우면 예술인복지재단에 알아보라. 부족하다면 거기에 대고 항의하라. 당신이 편리하게 유통해 쓰는 돈은 그러라고 준 돈이 아니다.
파트너쉽과 우정
확실히 알았다. K 작가든 L 작가든 누구든 간에 머리가 굵은 미술계 사람들은 관계를 이해타산적으로 생각한다. 만나자고 하거나 연락이 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종종 이런 사람들은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물어온다. 보통 공모에 관한 내용이다. 함께 어딘가를 지원하자고 할 때도 종종있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 그것의 불가능성에 관해서 말한다. 그것이 왜 미술이 아니며 쓰잘 데기 없는 것인지를 한참 말한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듣고 싶은 대답은 완벽하게 그런 것이 아니다. 주제와 문장과 구조를 고쳐서 공모에 당선될 만한 제안서를 만들어주는 것, 그것만이 그들의 소망이다. 나는 진실로 그들이 갑갑하다. 그리고 나 자신도 갑갑하다. 그들은 왜 미술이 아닌 걸 기를 쓰고 하려고 하며, 왜 거기에 나를 끼우고 싶어 할까. 그리고 난 왜 그들의 사정을 꽤나 자세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굳이 애써 도와주지 않으려고 할까, 이건 일종의 똥폼이자 선민의식일까.
그 사람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뭘 하고 있고 할 것이며,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직책을 가질지만 궁금해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재빨리 내 쓸모를 계산한다. 그리고 적절한 기회에 한 번 써먹고 싶어 한다. 그러고 나면 끝일 것이다. 다른 쓸모를 찾아 또 헤멜 것이다. 내가 함께하고 싶거나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은 이런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난 일 할 파트너와 파트너쉽이 필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대신에 동료와 우정이 필요하다.
종종 이런 사람들은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물어온다. 보통 공모에 관한 내용이다. 함께 어딘가를 지원하자고 할 때도 종종있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 그것의 불가능성에 관해서 말한다. 그것이 왜 미술이 아니며 쓰잘 데기 없는 것인지를 한참 말한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듣고 싶은 대답은 완벽하게 그런 것이 아니다. 주제와 문장과 구조를 고쳐서 공모에 당선될 만한 제안서를 만들어주는 것, 그것만이 그들의 소망이다. 나는 진실로 그들이 갑갑하다. 그리고 나 자신도 갑갑하다. 그들은 왜 미술이 아닌 걸 기를 쓰고 하려고 하며, 왜 거기에 나를 끼우고 싶어 할까. 그리고 난 왜 그들의 사정을 꽤나 자세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굳이 애써 도와주지 않으려고 할까, 이건 일종의 똥폼이자 선민의식일까.
그 사람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뭘 하고 있고 할 것이며,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직책을 가질지만 궁금해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재빨리 내 쓸모를 계산한다. 그리고 적절한 기회에 한 번 써먹고 싶어 한다. 그러고 나면 끝일 것이다. 다른 쓸모를 찾아 또 헤멜 것이다. 내가 함께하고 싶거나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은 이런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난 일 할 파트너와 파트너쉽이 필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대신에 동료와 우정이 필요하다.
2015년 9월 21일 월요일
소소한
어제는 문득 굉장히 무료해서 새벽에 한 세시간정도 걸었다. 집에 들어오니 다섯시였다.
최근까지 음악이 별로 좋지 않아져서 안듣다가 듣는 방법을 발견했다. 산보하면서 듣는 음악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신나는 음악이면 더욱 좋다.
밤의 여흥이랄까. 밤의 풍경이 선사하는 표정 같은 것이 있다. 이사도 했겠다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을 용감하게? 다녀보는 일의 기쁨도 깨달았다.
최근엔 혼자 맥주한잔 가볍게 해도 이상해보이 않는 술집이 절실해졌다. 그렇다고 바 같은 곳을 가고 싶지는 않고. 그래서 밤에 그런 술집을 탐사하는 일을 가끔씩 한다. 물론 무위로 돌아가지만 그럴 땐 맥주 한캔과 오징어 땅콩을 편의점에서 사서 집 근처 놀이터 밴치에 안ㄷ아 먹으면 그것도 꽤 운치가 있다.
2015년 9월 20일 일요일
형식, 논리, 예술
전형적인 모더니즘은 미술작품의 물질적인 모양 그 자체를 '의미있는 형식'(클라이브 벨)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것(상징)이 불가능함을 논리(포스트구조주의적 알레고리)로 증명하며 그 형식을 파편화시킨다.
크라우스나 부리요에 의해 다시 제기된 형식(매체)의 문제는 대체로 이런 것 같다. 형식은 물질에 국한되지 않는다. 논리(포스트구조주의) 그 자체가 형식 혹은 매체(medium), 구성체(formation)가 될 수 있는데, 이때 그 적절하고 강력한 예로 등장하는 것이 예술작품이다. (예술작품은 이런 면에서 참 편한데, 언어로 치환되지 않지만 분명히 형태상으로 응축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형식이 있는 의미랄까, 다르게 말하자면 (포스트구조주의로 잘게 찢어진 모더니즘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작품이 아닌) 일신으로 육화한 포스트구조주의로서의 예술작품이랄까.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것(상징)이 불가능함을 논리(포스트구조주의적 알레고리)로 증명하며 그 형식을 파편화시킨다.
크라우스나 부리요에 의해 다시 제기된 형식(매체)의 문제는 대체로 이런 것 같다. 형식은 물질에 국한되지 않는다. 논리(포스트구조주의) 그 자체가 형식 혹은 매체(medium), 구성체(formation)가 될 수 있는데, 이때 그 적절하고 강력한 예로 등장하는 것이 예술작품이다. (예술작품은 이런 면에서 참 편한데, 언어로 치환되지 않지만 분명히 형태상으로 응축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형식이 있는 의미랄까, 다르게 말하자면 (포스트구조주의로 잘게 찢어진 모더니즘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작품이 아닌) 일신으로 육화한 포스트구조주의로서의 예술작품이랄까.
아프리카 티비와 마이 리틀 텔레비전
아프리카 티비에 별창녀란 직종이 있다. 적당히 예쁘게 생긴 여자들이 개인 방송을 열어 음악을 틀어 놓고 채팅창에서 사람들이 시키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음란한 짓도 하고 뭐 그러면서 사람들이 주는 별(코인 같은 것)로 돈을 버는 일을 말한다. 나는 이런 성의 상품화의 윤리적 올바름과 그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다만 최근에 마이리틀텔레비전을 보면서 들었던 이들의 상행위의 어떤 한계에 대해선 짚고 넘어가고 싶다. 단적으로 마리텔은 아프리카티비의 방식과 동일하다. 다시 말해서 스타들이 개인 방송을 열어 장기를 보여주며 사람들과 인터렉션한다. 다른 점은 이들은 출연료를 마리텔측에서 (아마) 받을 것이고, 마리텔 시청자는 진행자에게 별을 쏠 필요가 없다.시청률로 인해 수반되는 이익은 다른 채널을 통해 생길 것이며 그것을 방송사가 챙길 것이다.
개인방송으로 공공채널을 우회해서 상호소통/상행위하는 방식을 다시 공공채널에서 전유하는 이런 상황은, 마치 소상공인의 히트 아이템을 그대로 빼앗아 프렌차이즈화 시키는 대기업의 횡포와 닮았다. 잘 다듬어진 얼굴을 한 연예인이 만약 스크린에서 애교스런 표정을 하고 말을 받아준다면, 다소 어색하게 성형한 얼굴을 한 아프리카의 그들보다 훨씬 보기도 기분도 좋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이쪽은 별을 쓸 필요도 없다. 많이 과장한다면 마리텔 같은 프로그램이 많아졌을 때 아프리카의 별창녀 다수가 직업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은 고객 중 일부는 반드시 빼앗기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별창녀의 새로운 기술(사용)은 결국 원래 마리텔(혹은 미래의 어떤 프렌차이즈)의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마리텔을 위해 별창녀는 그 기술을 테스트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좌파들은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
좌파들은 기술을 자본가가 절대로 전유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끊임 없이 기술을 혁신해야 한다. 그런 방식의 기술의 혁신을 통해 기술은 혁명을 이룬다. 반대로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본가의 손에 그 기술이 떨어지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개인방송으로 공공채널을 우회해서 상호소통/상행위하는 방식을 다시 공공채널에서 전유하는 이런 상황은, 마치 소상공인의 히트 아이템을 그대로 빼앗아 프렌차이즈화 시키는 대기업의 횡포와 닮았다. 잘 다듬어진 얼굴을 한 연예인이 만약 스크린에서 애교스런 표정을 하고 말을 받아준다면, 다소 어색하게 성형한 얼굴을 한 아프리카의 그들보다 훨씬 보기도 기분도 좋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이쪽은 별을 쓸 필요도 없다. 많이 과장한다면 마리텔 같은 프로그램이 많아졌을 때 아프리카의 별창녀 다수가 직업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은 고객 중 일부는 반드시 빼앗기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별창녀의 새로운 기술(사용)은 결국 원래 마리텔(혹은 미래의 어떤 프렌차이즈)의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마리텔을 위해 별창녀는 그 기술을 테스트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좌파들은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
좌파들은 기술을 자본가가 절대로 전유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끊임 없이 기술을 혁신해야 한다. 그런 방식의 기술의 혁신을 통해 기술은 혁명을 이룬다. 반대로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본가의 손에 그 기술이 떨어지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얀스 호프만, 큐레이팅의 예술과 예술의 큐레이팅 (2004)
source: http://www.theutopiandisplay.com/platform/the-art-of-curating-and-the-curating-of- art
10년 전이구나. 이 사람은 창조적 큐레이터의 모델을 예술가로부터 도출해낸다. 옛날부터 예술가가 큐레이팅을 한 경우가 많았고, 그런 전시는 단순히 기계적인 디스플레이나 쇼가 아니라 창작물이었다는 것이다. 멀게는 쿠르베, 조금 더 가까이는 뒤샹, 더욱 가까이는 마우리치오 카텔란 같은 사람을 거론한다. 이들이 큐레이팅한 전시는 그야 말로 창작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렇게 판단한다.
그래서 그는 제도 기관에 속한 큐레이터가 물론 어떤 위험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 예로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 니콜라스 샤프하우셴, 마지프 코르툰, 마리아 린드, 마리아 히아바조바, 니콜라 부리요를 든다. 그는 이들이 제도에 속해있는 큐레이터지만 전혀 제도화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제도 안에서 제도를 바꾸는 타입이라고.
큐레이터가 이런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예술가들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창조적으로 큐레이팅을 지속하는 한, 창조적 큐레이팅의 모델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얀스 호프만은 주장한다. 예술가가 있는한 큐레이터는 구제될 수 있다.
요즘 상황을 보자. 자세한 내부 사정은 모르겠지만 니콜라 부리요는 보자르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당했다고 한다. 드아펠의 로렌초 베네데티도 비슷한 꼴이다. 이것을 일반화하긴 무리가 있지만, 이정도 이름 있는 자들에 대한 제도의 처사는 놀랍도록 냉정하다. 제도 안에서 제도를 바꾼다는 것은 제도가 참아줄 수 있는 꼭 그만큼 아닐까? 제도가 참아줄 수 있는 만큼, 그리고 또한 어떤 예술의 창조적 요구 또한 수용할 수 있을만큼만 큐레이터가 창조성을 발휘해 제도 내에서 큐레이팅 할 수 있다면 조금은 맥이 빠진다. 동시에 그런 일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인줄 알기 때문에 뭐라고 할 말은 없다.
창조적 큐레이터는 거의 예술가만큼 자유로운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 것 같다. 조금 막나가는 행동도 하는 것 같다. 이플럭스에서 누군가는 드아펠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
카더라 통신이라서 그렇긴 하지만 여하튼 조직 사회에서 큐레이터가 문제를 일으킨 것만은 틀림없다. 관료주의 큐레이터(예컨대..국현 큐레이터)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유를 누리는 만큼 관료 사회에서 신용도는 반비례한다. 이것이 창조적 큐레이터가 가지는 어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딜레마는 제도에 여전히 남아있는 큐레이터에게 어떤 혐의를 부과할 수 있다: 어떻게 그들은 아직까지 살아 남아 있을까?
10년 전이구나. 이 사람은 창조적 큐레이터의 모델을 예술가로부터 도출해낸다. 옛날부터 예술가가 큐레이팅을 한 경우가 많았고, 그런 전시는 단순히 기계적인 디스플레이나 쇼가 아니라 창작물이었다는 것이다. 멀게는 쿠르베, 조금 더 가까이는 뒤샹, 더욱 가까이는 마우리치오 카텔란 같은 사람을 거론한다. 이들이 큐레이팅한 전시는 그야 말로 창작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렇게 판단한다.
그래서 그는 제도 기관에 속한 큐레이터가 물론 어떤 위험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 예로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 니콜라스 샤프하우셴, 마지프 코르툰, 마리아 린드, 마리아 히아바조바, 니콜라 부리요를 든다. 그는 이들이 제도에 속해있는 큐레이터지만 전혀 제도화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제도 안에서 제도를 바꾸는 타입이라고.
큐레이터가 이런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예술가들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창조적으로 큐레이팅을 지속하는 한, 창조적 큐레이팅의 모델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얀스 호프만은 주장한다. 예술가가 있는한 큐레이터는 구제될 수 있다.
요즘 상황을 보자. 자세한 내부 사정은 모르겠지만 니콜라 부리요는 보자르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당했다고 한다. 드아펠의 로렌초 베네데티도 비슷한 꼴이다. 이것을 일반화하긴 무리가 있지만, 이정도 이름 있는 자들에 대한 제도의 처사는 놀랍도록 냉정하다. 제도 안에서 제도를 바꾼다는 것은 제도가 참아줄 수 있는 꼭 그만큼 아닐까? 제도가 참아줄 수 있는 만큼, 그리고 또한 어떤 예술의 창조적 요구 또한 수용할 수 있을만큼만 큐레이터가 창조성을 발휘해 제도 내에서 큐레이팅 할 수 있다면 조금은 맥이 빠진다. 동시에 그런 일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인줄 알기 때문에 뭐라고 할 말은 없다.
창조적 큐레이터는 거의 예술가만큼 자유로운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 것 같다. 조금 막나가는 행동도 하는 것 같다. 이플럭스에서 누군가는 드아펠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
I hear voices from De Appel saying his leadership was lacking, he was abroad too often preparing for new projects, he wasn’t able to engage his own staff, the municipality and other institutions in the city in his plans. (http://conversations.e-flux.com/t/popular-curator-lorenzo-benedetti-unexpectedly-fired-from-de-appel/2480)
카더라 통신이라서 그렇긴 하지만 여하튼 조직 사회에서 큐레이터가 문제를 일으킨 것만은 틀림없다. 관료주의 큐레이터(예컨대..국현 큐레이터)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유를 누리는 만큼 관료 사회에서 신용도는 반비례한다. 이것이 창조적 큐레이터가 가지는 어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딜레마는 제도에 여전히 남아있는 큐레이터에게 어떤 혐의를 부과할 수 있다: 어떻게 그들은 아직까지 살아 남아 있을까?
2015년 9월 18일 금요일
말 할 준비는 언제부터
나는 말 할 준비가 되었나? 비판을 한다는 건 비판을 받는다는 것과 동일하다. 비판을 하면서 비판받지 않겠다는 생각은 결국 안전한 비판만 한다는 의미이거나 혹은 자기 할 말만 하겠다는 독선적 태도에 다름 아니다. 가장 비평다운 비평은 기존의 인식을 깨뜨리거나, 기존의 인식과 다른 방식의 사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비평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때로는 심한 말을 들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꽤나 우울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본격적인 비평가가 되려면, 말을 하려면, 역으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도 혹독하게 매운 말을 정면으로 들어 내고 똑바르게, 선의에 찬 마음으로 답해낼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들이 비록 나를 싫어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내가 언젠가 그렇게 하는 날이 온다면, 아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를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 근본적이고 세밀한 지점까지 들어갈 수록, 가장 불편한 면을 드러낼 수록 대다수 사람들은 나를 외면할 것이다. 그러면 외로워질 것이다. 그렇게 쭉 생각했다. 만약 내 옆에 한 사람만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면 왠지 힘이 나서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비판을 해야할까? 이건 더욱 근본적인 문제다. 나는 왜 비판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비판을 하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소박한 인간일 뿐이다. 미술을 했고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미술을 더욱 잘 알고 싶은 그냥 그런 사람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비판적 프리즘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여가의 대상이면 고급진 거고, 어려워하거나 관심없어 한다. 그러니까 꼭 미술을 공부해도 비판적일 필요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왜?
짜증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어떤 불편함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발을 신는데 뭔가 발에 신발이 안맞아 불유쾌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식의 불편함이랄까. 분명히 밖에 나가서 걸어다닐 수는 있는데 신발을 벗기 전까진 계속해서 신경쓰이는 그런 방식의 불편함이랄까,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니까 미술이 매일 신고다니는 신발이 되었을 때, 그런데 미술이 내 발에 잘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것을 참지 못하게 됐을 때 비판을 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렇담 미술은 내 신발이 맞을까? 과거엔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이건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그래서 내가 언젠가 그렇게 하는 날이 온다면, 아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를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 근본적이고 세밀한 지점까지 들어갈 수록, 가장 불편한 면을 드러낼 수록 대다수 사람들은 나를 외면할 것이다. 그러면 외로워질 것이다. 그렇게 쭉 생각했다. 만약 내 옆에 한 사람만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면 왠지 힘이 나서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비판을 해야할까? 이건 더욱 근본적인 문제다. 나는 왜 비판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비판을 하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소박한 인간일 뿐이다. 미술을 했고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미술을 더욱 잘 알고 싶은 그냥 그런 사람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비판적 프리즘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여가의 대상이면 고급진 거고, 어려워하거나 관심없어 한다. 그러니까 꼭 미술을 공부해도 비판적일 필요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왜?
짜증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어떤 불편함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발을 신는데 뭔가 발에 신발이 안맞아 불유쾌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식의 불편함이랄까. 분명히 밖에 나가서 걸어다닐 수는 있는데 신발을 벗기 전까진 계속해서 신경쓰이는 그런 방식의 불편함이랄까,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니까 미술이 매일 신고다니는 신발이 되었을 때, 그런데 미술이 내 발에 잘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것을 참지 못하게 됐을 때 비판을 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렇담 미술은 내 신발이 맞을까? 과거엔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이건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2015년 9월 17일 목요일
Anton Vidokle, Art Without Artists? (2010) published on e-flux
(source: http://www.e-flux.com/journal/art-without-artists/)
이 글은 예술가가 아닌 것들이 예술가 연 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하고 있다. 조금 원색적인 표현이 많고 근거는 불충분하다고 해도 어떤 시사점은 분명히 있다.
이런 상황이다. 비평가의 권위가 실추하면서 큐레이터의 권위가 증가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가 보기엔 큐레이터가 비평가로서의 역할까지 겸하며, 더군다나 예술가의 역할까지 탐내고 있다. 얀스 호프먼 등 유럽권 큐레이터에 의해 실천된 뉴인스티튜셔널리즘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걸 비판하고 싶은데, 이때 전제사항은 이렇다: '큐레이토리얼 프랙티스'라고 하는 건 예술작업의 부수적인 결과물이다. 즉 큐레이토리얼은 예술작업의 필연적인 부산물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노동과 저작권을 빼앗거나 최소한 공유하고자 함으로써 예술에서 예술가와 작업을 소외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꼭 그만큼 그 자체가 예술 제도 내에서 권력화된다. 구체적으로 쓰고있진 않지만 그는 이런 현상이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하는 듯하다.
그는 대안으로써 큐레이터로서의 예술가 상을 제시한다. 예술의 공간을 확장하고 사회적 참여의 공간을 열어 젖힌다는 의미에서...주로 예를 드는 예술가가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내가 봤을 때 이 글에서 문제점은 이런 것이다. 그는 일종의 소명의식을 주장하고 있다. 예술가는 예술가 답게, 큐레이터는 큐레이터 답게라는. 그에겐 주어진 예술가상, 큐레이터상이란 것이 분명하게 있는듯 보인다. 그게 언제쩍 시절인가 보면, 대략 20세기 초반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적 권력을 막강하게 쥐면서 예술로 혁명이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믿었던 예술가가 살던 시절 말이다. 그리고 큐레이터가 단순 전시 행정가로서 일했던 시절 말이다.
그냥 이 상태에 머물렀으면 괜찮을 뻔 했는데, 그는 티라바니자를 옹호하면서, 예술의 공간을 일상으로, 대중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반드시 예술/가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큐레이터로부터가 아니라.
하지만 이건 모순적이다. 티라바니자의 퍼포먼스가 반드시 예술로부터 나왔다고 보증하는 것은 티라바니자란 예술가 주체를 인증하는 예술제도 밖에 없다. (그는 그렇다고 믿는 것 같다.) 즉슨, 그는 (아마도 20세기 버전일) 예술의 제도는 인정하면서, 그것의 최신 버전의 (큐레이터의 프로덕션과 일상의 창조적 활동을 포함하는) 확장된 제도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술의 제도를 확장하는(예술의 공간을 열어 젖히는) 작업이 좋은 작업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는 결국 그가 비판했던 큐레이팅의 세계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티라바니자의 퍼포먼스는 그 자체가 큐레이팅의 산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복잡한데, 이 말은 결국 예술가의 특권도 챙기고 싶고 사회적 차원의 급진성도 챙기고 싶은 것이다. 큐레이터 사정은 너네들 문제니까 고려하지 않겠단 태도 또한 그런 혐의를 가지게 만든다.
이 글은 예술가가 아닌 것들이 예술가 연 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하고 있다. 조금 원색적인 표현이 많고 근거는 불충분하다고 해도 어떤 시사점은 분명히 있다.
작년 나는 “큐레이토리얼 액티비즘”이란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컨퍼런스의 발제자로 초대받은 적이 있다. 참여자 중 한 사람은 액티비즘적 실천으로서 뉴욕 예술 기관의 봉급쟁이 디렉터쉽에 관해서 발언했다. 내가 데모를 위해 페이를 지급받는 사람들은 액티비스트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고용된 신체라고 지적했을 때, 관객은 보기에도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내 요점은 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왜 오늘날 도전적으로 일하고, 그것을 잘 수행하고, 진정한 헌신과 참여 속에서, 그것에 자존감을 가지는 것이 충분하지 않은가라는 점에 있었다. 액티비즘이나 문화적 프로덕션, 예술의 프로덕션 따위로 그것을 제시함으로써 그것의 지위를 업그레이드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말이다.
이런 상황이다. 비평가의 권위가 실추하면서 큐레이터의 권위가 증가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가 보기엔 큐레이터가 비평가로서의 역할까지 겸하며, 더군다나 예술가의 역할까지 탐내고 있다. 얀스 호프먼 등 유럽권 큐레이터에 의해 실천된 뉴인스티튜셔널리즘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걸 비판하고 싶은데, 이때 전제사항은 이렇다: '큐레이토리얼 프랙티스'라고 하는 건 예술작업의 부수적인 결과물이다. 즉 큐레이토리얼은 예술작업의 필연적인 부산물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노동과 저작권을 빼앗거나 최소한 공유하고자 함으로써 예술에서 예술가와 작업을 소외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꼭 그만큼 그 자체가 예술 제도 내에서 권력화된다. 구체적으로 쓰고있진 않지만 그는 이런 현상이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하는 듯하다.
그는 대안으로써 큐레이터로서의 예술가 상을 제시한다. 예술의 공간을 확장하고 사회적 참여의 공간을 열어 젖힌다는 의미에서...주로 예를 드는 예술가가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내가 봤을 때 이 글에서 문제점은 이런 것이다. 그는 일종의 소명의식을 주장하고 있다. 예술가는 예술가 답게, 큐레이터는 큐레이터 답게라는. 그에겐 주어진 예술가상, 큐레이터상이란 것이 분명하게 있는듯 보인다. 그게 언제쩍 시절인가 보면, 대략 20세기 초반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적 권력을 막강하게 쥐면서 예술로 혁명이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믿었던 예술가가 살던 시절 말이다. 그리고 큐레이터가 단순 전시 행정가로서 일했던 시절 말이다.
그냥 이 상태에 머물렀으면 괜찮을 뻔 했는데, 그는 티라바니자를 옹호하면서, 예술의 공간을 일상으로, 대중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반드시 예술/가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큐레이터로부터가 아니라.
나에겐 예술가의 사회적 형식과 실천과 관련된 참여가 평범한 예술의 공간을 열어 젖히고 에이전시의 증가를 보증하는 예술의 언어로 고려되는 반면, 그들 자신의 실천을 예술적으로 재맥락화시키려는 큐레이토리얼과 제도적 시도는 그 반대의 효과를 낸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건 모순적이다. 티라바니자의 퍼포먼스가 반드시 예술로부터 나왔다고 보증하는 것은 티라바니자란 예술가 주체를 인증하는 예술제도 밖에 없다. (그는 그렇다고 믿는 것 같다.) 즉슨, 그는 (아마도 20세기 버전일) 예술의 제도는 인정하면서, 그것의 최신 버전의 (큐레이터의 프로덕션과 일상의 창조적 활동을 포함하는) 확장된 제도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술의 제도를 확장하는(예술의 공간을 열어 젖히는) 작업이 좋은 작업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는 결국 그가 비판했던 큐레이팅의 세계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티라바니자의 퍼포먼스는 그 자체가 큐레이팅의 산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복잡한데, 이 말은 결국 예술가의 특권도 챙기고 싶고 사회적 차원의 급진성도 챙기고 싶은 것이다. 큐레이터 사정은 너네들 문제니까 고려하지 않겠단 태도 또한 그런 혐의를 가지게 만든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북해에서의 항해> 6장 독해
크라우스의 <북해에서의 항해>에서 핵심이라면 핵심, 6장 부분의 브로타스의 <Baudelaire, Je hais le mouvement qui déplace les lignes>, <Un coup de dés jamais n'abolira le hasard>, <A Voyage on the North Sea> 비평을 다시 읽었다. 어려운 대목이라서 대충 읽고 말았는데 이번 기회에 쫀쫀하게 읽었다.
브로타스의 <보들레르, 나는 선(線)을 옮겨 놓는 움직임을 미워한다>는 책 작업인데,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수록된 "아름다움"이란 시를 레퍼런스로 삼고 있다.
첫 번째 페이지에 이 시가 통짜로 프린트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이 붉은색으로 저 행을 강조하고 있다(이미지는 못구함).
나는 선(線)을 옮겨 놓는 움직임을 미워한다(Je hais le mouvement qui déplace les lignes). 선(line)이라고 함은 시행을 뜻하기도 하는듯. 크라우스는 이 말이 마치 "조각이 완벽한 형식의 일시적 팽창에 저항"한다는 의미와 비슷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완벽한 형식이란 주관과 객관이 합일되는 전형적인 모더니즘적 테제고, 팽창이란 그 완벽한 형식이 어그러지는 상황을 말한다.
그러나 브로타스는 다음 페이지부터 "Je hais le mouvement qui déplace les lignes"에서 단어를 하나씩 따로따로 떼어내서 페이지 아래쪽에 하나씩 배치한다. 다시 말해서 팽창, 즉 쭉 늘어져있다.
크라우스는 이것이 시행을 이동(shift) 혹은 전치(displacement)했다고 봤다. 다시 말해 브로타스는 "I hate the movement that shift the line"이라고 해놓고 바로 그 line을 이동(shift)시켰다. 흑화된 보들레르의 <아름다움>.
한편 크라우스는 이 보들레르의 시를 재해석한 <보들레르> 작업이 브로타스의 또 다른 작업, <Un coup de dés jamais n'abolira le hasard(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폐기하지 못하리라)>와 반대라고 했다. 갑자기 말라르메를 가지고 오는 건 <보들레르> 작업 설명을 그것과 비교해서 편하게 하기 위해서...이 작업의 표지는 이렇게 생겼다.
크라우스 말에 따르면(나는 안봐서 모르겠다) 여기서도 모든 페이지 하단에 제목의 단어가 분절되어서 나타난다고 하는데, 핵심은 시행을 이미지처럼 만들어 놨다는 것. 말하자면 이 작업에서 브로타스는 말라르메가 하고자 했던 것(이미지즘; 완벽한 형식)을 극단으로 밀고나갔단 소리.
크라우스는 이런 방식이 (글쓰기의 순차적 조건을 움직임 속에서 동시적 영역으로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보들레르>에서 나타나는 "Fig." 넘버와 비슷해보일 수 있지만 사실 반대라고 주장한다.(50-51쪽)
이유는 첫째, 브로타스의 "Fig." 개념은 (그 스스로가 주장했듯이) "이미지의 이론"이다. (말라르메에 의해서 시도됐듯이) 글과 이미지를 동시에 융합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이때 "Fig." 개념은 언어(word)의 불완전하고 파편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저항하는 것은 바로 이미지의 완전한 자기 현전(self-present)이다. 크라우스는 이것을 받아서 "Fig."는 이미지를, 픽션(fiction)의 자기-수정(self-deferring)과 전치하는 위상(displacing status)으로 이론화한다고 주장했다.(51쪽) 이런 견지에서 "Fig."는 말라르메의 시를 캘라그래피적으로 모사하는 것처럼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질문한다.
둘째, <보들레르>에서 나타나는 순차화(sequentialization) 작업의 방법이 말라르메식 작동방식과 다르다. 크라우스는 말라르메 시에서 나타나는 건 끊임없는 페달 포인트(지속음)인데, 이것은 음악의 통시적 흐름을 단음의 공시적 공간으로 순간적으로 변형시킨다고 한다. 무슨 음악적인 비유를 많이 드는데 그러니까 그냥 다 똑같아보이고 그것의 지속이라는 것. 하지만 <보들레르>에서는 그것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즉 이미지의 게슈탈트를 서사적으로 탈바꿈시킨다.(52쪽) (하지만 일방향 서사는 아닌 것 같다.) 이런 예가 크라우스는 <북해에서의 항해>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고 한다.
<북해...>는 모더니즘의 도전의 역사를 뒤섞어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그리고 있다. 이때 크라우스가 보기에 브로타스가 서사화, 혹은 픽션화(크라우스는 fiction을 가상이란 뜻으로도, 소설적 구조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듯) 하는 것은 어떤 불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그의 픽션은 단선적 모더니즘을 복잡화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픽션 작업 안에서 모더니즘은 끊임 없이 자기-수정하는데, 그의 픽션 구조가 그것을 그렇게 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한 브로타스에게 픽션은 하나의 확장된 매체다. 아닌게 아니라 <북해...>작업은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책의 형태를 차용한다. (그림책은 가상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브로타스의 <보들레르, 나는 선(線)을 옮겨 놓는 움직임을 미워한다>는 책 작업인데,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수록된 "아름다움"이란 시를 레퍼런스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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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는 요롷게 생김. 제목은 <아름다움>의 시구 중 하나를 발췌해서 사용했다. '나는 선/시행(line)을 옮겨놓는 움직임을 혐오한다.' |
첫 번째 페이지에 이 시가 통짜로 프린트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이 붉은색으로 저 행을 강조하고 있다(이미지는 못구함).
아름다움 / 샤를 보들레르
나는 아름답다 오, 인간이여! 돌의 꿈과도 같이.
그리고 누구나번갈아 상처 받는 내 가슴은,
물질처럼 말없는 영원한 사랑을
시인에게 불어넣어 주려고 만들어진 것.
나는 흡사 수수께끼의 스핑크스, 창공에 군림한다.
나는 눈(雪)의 마음을 백조의 흰 빛에 결합한다.
나는 선(線)을 옮겨 놓는 움직임을 미워한다(Je hais le mouvement qui déplace les lignes.)
그리고 나는 아예 울지 않는다, 아예 웃지도 않는다.
가장 의젓한 기념상에서 빌어 온 듯한
내 존대한 몸가짐 앞에서, 시인들은
준엄한 탐구 속에 평생을 탕진하리.
왜냐하면, 이 유순한 애인들을 홀리기 위해,
나는 모든 것을 한결 미화하는 맑은 거울 가졌으니.
그것은 나의 눈, 영원히 반짝이는 커다란 눈!
그러나 브로타스는 다음 페이지부터 "Je hais le mouvement qui déplace les lignes"에서 단어를 하나씩 따로따로 떼어내서 페이지 아래쪽에 하나씩 배치한다. 다시 말해서 팽창, 즉 쭉 늘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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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안보이지만 저 아래 부분에 페이지 별로 하나씩 보이는 단어가 왼쪽은 'les' 오른쪽은 'lignes'다. |
크라우스는 이것이 시행을 이동(shift) 혹은 전치(displacement)했다고 봤다. 다시 말해 브로타스는 "I hate the movement that shift the line"이라고 해놓고 바로 그 line을 이동(shift)시켰다. 흑화된 보들레르의 <아름다움>.
한편 크라우스는 이 보들레르의 시를 재해석한 <보들레르> 작업이 브로타스의 또 다른 작업, <Un coup de dés jamais n'abolira le hasard(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폐기하지 못하리라)>와 반대라고 했다. 갑자기 말라르메를 가지고 오는 건 <보들레르> 작업 설명을 그것과 비교해서 편하게 하기 위해서...이 작업의 표지는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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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로타스의 말라르메 페러디 작품. 표지다. |
크라우스 말에 따르면(나는 안봐서 모르겠다) 여기서도 모든 페이지 하단에 제목의 단어가 분절되어서 나타난다고 하는데, 핵심은 시행을 이미지처럼 만들어 놨다는 것. 말하자면 이 작업에서 브로타스는 말라르메가 하고자 했던 것(이미지즘; 완벽한 형식)을 극단으로 밀고나갔단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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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시를 까만줄 친듯. 진짜 오리지널 시에서도 시행이 저런식으로 이미지처럼 배치되어 있다. |
크라우스는 이런 방식이 (글쓰기의 순차적 조건을 움직임 속에서 동시적 영역으로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보들레르>에서 나타나는 "Fig." 넘버와 비슷해보일 수 있지만 사실 반대라고 주장한다.(50-51쪽)
이유는 첫째, 브로타스의 "Fig." 개념은 (그 스스로가 주장했듯이) "이미지의 이론"이다. (말라르메에 의해서 시도됐듯이) 글과 이미지를 동시에 융합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이때 "Fig." 개념은 언어(word)의 불완전하고 파편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저항하는 것은 바로 이미지의 완전한 자기 현전(self-present)이다. 크라우스는 이것을 받아서 "Fig."는 이미지를, 픽션(fiction)의 자기-수정(self-deferring)과 전치하는 위상(displacing status)으로 이론화한다고 주장했다.(51쪽) 이런 견지에서 "Fig."는 말라르메의 시를 캘라그래피적으로 모사하는 것처럼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질문한다.
둘째, <보들레르>에서 나타나는 순차화(sequentialization) 작업의 방법이 말라르메식 작동방식과 다르다. 크라우스는 말라르메 시에서 나타나는 건 끊임없는 페달 포인트(지속음)인데, 이것은 음악의 통시적 흐름을 단음의 공시적 공간으로 순간적으로 변형시킨다고 한다. 무슨 음악적인 비유를 많이 드는데 그러니까 그냥 다 똑같아보이고 그것의 지속이라는 것. 하지만 <보들레르>에서는 그것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즉 이미지의 게슈탈트를 서사적으로 탈바꿈시킨다.(52쪽) (하지만 일방향 서사는 아닌 것 같다.) 이런 예가 크라우스는 <북해에서의 항해>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고 한다.
<북해...>는 모더니즘의 도전의 역사를 뒤섞어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그리고 있다. 이때 크라우스가 보기에 브로타스가 서사화, 혹은 픽션화(크라우스는 fiction을 가상이란 뜻으로도, 소설적 구조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듯) 하는 것은 어떤 불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그의 픽션은 단선적 모더니즘을 복잡화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픽션 작업 안에서 모더니즘은 끊임 없이 자기-수정하는데, 그의 픽션 구조가 그것을 그렇게 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한 브로타스에게 픽션은 하나의 확장된 매체다. 아닌게 아니라 <북해...>작업은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책의 형태를 차용한다. (그림책은 가상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2015년 9월 16일 수요일
이윤지, 한·일(韓日) 오타쿠 문화수용과 이미지 형성 비교 연구 (석사논문, 2013)에서 결론부분 인용.
킄캌 한국의 오덕후와 일본의 오타쿠를 비교연구한 석사논문이다. 난 여전히 미소녀를 잘그렸던 일본 일러스트레이터의 계보에 관한 글을 한 번씩 검색해보데 전혀 나오지 않고 엉뚱한 것만 걸린다. 예전에 어떤 매니아샵에서 본 책의 부록에 그 글이 있었던 건 분명한데 무슨 책이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건담 관련이었나? 아마노 요시타카였나...으아..모르겠다 모르겠어. 일본어를 할 줄 알았으면 더욱 양질의 자료를 검색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어를 공부해야하나? 여하튼.
논문을 보자면, 흠..이정도 차이라면 차라리 애니 오타쿠와 애니 오덕후로 좀 더 좁혀서 비교했음 어땠으려나? 첨삭하자면 두 번째 결론보다 세번째 결론에 유교적 가치관이 더욱 잘 붙는 것 같다.
논문을 보자면, 흠..이정도 차이라면 차라리 애니 오타쿠와 애니 오덕후로 좀 더 좁혀서 비교했음 어땠으려나? 첨삭하자면 두 번째 결론보다 세번째 결론에 유교적 가치관이 더욱 잘 붙는 것 같다.
"처음 오타쿠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는 양국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둘 모두 한 가지 대상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세상으로부터 지탄 받기도 하는 집단을 가리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타쿠가 몰두하는 그 대상에는 한일 간의 차이가 있다. 일본의 경우는 매우 넓은 분야에 결처 오타쿠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었다. 반면 한국의 경우에는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만화, 게임 등의 한정적 분야에만 오타쿠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차이가 오게 된 이유는, 오타쿠의 이미지 형성 과정과 함께 살펴봄으로서 유추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의 오타쿠에 대한 이미지는 양쪽 모두 부정적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된 이유는 조금 다르다. 일본에서의 오타쿠는 일반 대중들에게 엽기 범죄 사건을 계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언론에서 오타쿠를 조명하여, 오타쿠는 사회 부적응자로 잠재적 범죄자 기질 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 인식 되었다. 한국에서의 오타쿠는, 처음에는 일본의 경제 성장의 한 틀을 책임지고 있는 아마추어 전문가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서적을 통해 들어왔다. 이러한 이미지는 다양한 오락 미디에 소개된 오타쿠의 모습들에 의해 바뀌게 된다. 일반 사람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괴상한 취미를 즐기는 집단으로 인식되어 조롱의 시선을 받게 된 것이다. 한국의 대중미디어 속 오타쿠는 일본 애니메이션, 그 중에서도 미소녀 캐릭터에 사랑의 감정을 품을 정도로 몰입해 있는 사람으로 소개되었으며, 뚱뚱하고 현실에서도 애니 메이션에 등장할 법한 일본어 말투를 사용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러한 이미지가 각인되어 사람들은 오타쿠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오타쿠는 일본의 하위문화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국에 정착하게 된 오타쿠가 가지는, 일본과 비교되는 한국형 오타쿠의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첫 째, 한국의 오덕후는 대상물의 범위가 일본에 비하여 현저하게 좁다. 정확히는 한국의 오덕후는 일본의 콘텐츠에 열광해 있는 사람들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오덕후(오타쿠)라 는 말이 사용되는 범례만 보아도 일본에 비해 그 수가 극히 적다.
둘째, 한국의 오덕후는 일본의 오타쿠에 비해 관련된 물건을 모으는 데 집착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물건을 잔뜩 모아 가지고 있기 보다는 관련된 지식이나 경험을 쌓는 데에 보다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차이는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 한일 양국 간에 차이로부터 온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옛날부터 물건을 세트로 모으는 데 노력하던 일본인에 비하여 한국인들은 많은 물건을 모으는 것에 긍정적이지 않았으며, 물욕을 버리는 것이 보다 현명하고 바른 삶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최근 들어 희미해 져가기는 하나 한국인의 무의식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유교적 가치관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로, 한국의 오덕후는 일본의 오타쿠에 비해 평균 연령대가 지극히 어리며, 2차 창작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다. 이는 일본과 비교하여 군대라는 오덕후 활동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사회 풍토에서 오덕후 활동은 어른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닌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으로 규정되어 나이가 들수록 활동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성별의 경우에는 한국에 오덕후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와 인터넷 보급 시기가 겹쳐, 사이버 페미니즘의 일종으로 오덕후 문화에서도 여성의 목소리가 크다는 의견이 있다. 이와 더불어, 사회적으로 여성 오덕후를 보는 시선보다 남성 오덕후를 바라보는 시선이 확연히 더 나빠 남성 2차 창작자들이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데 어려운 환경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와 더불어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성인 창작물을 온라인에 게재하는 것이 힘들어져, 남성들의 2차 창작물 활동은 앞으로도 여성에 비해 더딜 것으로 예상된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오덕후는 일본의 오타쿠에 비하여 자신의 수집품을 타인에게 원본 그대로 공개하고자 있는 성향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러한 부분은 단순히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영화나 음원 등 디지털 콘텐츠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한국의 특징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인이 일본에 비해 준법 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으나,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정품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적었기 때문이라는 쪽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최근 다양한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들이 개국함에 따라 애니메이션 역시 영화나 디지털 음원처럼 정품 구매가 용이해져 사용하는 사람의 수가 지금보다는 늘어 날 것으로 판단된다."(89-91쪽)
아..인터넷 뱅킹
인터넷 뱅킹이 안되서 농협 ATM에 갔다. 그런데 계좌이체가 안돼서 갸웃했다. 이체할 계좌번호가 잘못됐을 거라고 생각하고 전화로 연락해서 계좌번호를 확인해달라고 했다. 담당자도 확실히 모른다고 좀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동안 나는 마트에서 아이쇼핑을 했다. 그리곤 계좌번호가 맞다고 연락이 왔다. 창구를 이용해보라고.
창구에서 순서를 기다려 내 차례가 됐다. 용지에 이체할 금액을 써냈더니 신분증을 달라고 했다. 신분증을 안가져온 것이었다. 그래서 통장으론 ATM기계를 이용못하냐고 했더니 이 통장은 통장으로 거래하는 걸 막아놨다고 했다. 좌절...나는 통장만 들고오고 카드를 들고가지 않았던 것이다.
집으로 와서 화가나서 인터넷 뱅킹을 다시 이용하려고 시도했다. 공인인증서부터 시작해서 주민번호, 통장비밀번호 등 뭔 비밀번호가 그리 많은데 초기 비밀번호란게 또 있었다. 언제쩍인지 기억도 나지 않아 여러번 비번을 틀리고 말았다. 나는 보통 숫자로 쓰는 비밀번호를 4자리 숫자만 써왔는데 여긴 6자리였다. 이것저것 시도해봤는데 다 틀렸다.
멘붕이다. 나는 그냥 현대사회에서 살기에 부적합한 인간인 것인가. 죽고싶다...
*
다시 다녀왔다. 그냥 가기 너무 심심해서 어제 읽다 말았던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를 들고 나가서 걸어가면서 읽었다. 왔다갔다 한 30분 걸렸다. 한 장 정도 더 읽은 것 같은데...꽤 이것도 괜찮네?
아무튼 임무 완료. 뱅킹 업무는 너무 힘들다.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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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다녀왔다. 그냥 가기 너무 심심해서 어제 읽다 말았던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를 들고 나가서 걸어가면서 읽었다. 왔다갔다 한 30분 걸렸다. 한 장 정도 더 읽은 것 같은데...꽤 이것도 괜찮네?
아무튼 임무 완료. 뱅킹 업무는 너무 힘들다. 나에게.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재밌었다고 했더니 김형관 작가가 <잘라라>와 <사상으로서의 311>를 빌려줬다. 잠이 안와 <잘라라>를 펴들고 한 반절 정도 읽었나. 시작부터 늘어지는 구어체라 좀 실망했지만 읽다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글쓴이는 다 아는 이야기라고 너스레를 떨지만서도 종교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나에겐, 종교인 혁명가의 언술에 주석을 달아가는 과정이 신기해보이기도 하고 정보적으로도 알찬 느낌이었다.
책 읽기에 관한 사상이다. 책은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평생의 업같은 것일진데, 이런 글을 한 번 써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일지 모르겠다.
글쓴이완 다른 레벨에서 나 또한 읽은 책이 이해가 되지 않아 반복적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 한 문장 읽고 나서 다음 문장을 읽으면 까먹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어쩔 때는 한문장 한문장 필사를 해야지만 읽히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텍스트와 맞대면하는, 스스로의 모든 것을 걸고 텍스트와 투쟁하는 인간상이란게 오늘날 존재하는가? 글쓴이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더욱 정보를 차단하고 더욱 반복해서 하나의 텍스트를 읽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천지난만한 범생이의 무리한 소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미 텍스트를 소비하는 방법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텍스트와 인간의, 존재론적 위상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은 여러가지 정보와 동일한 수준에서 서로 얽히고 섥혀있다. 그것을 차단하고 독서에 심취해 자기 자신 안에서 혁명을 해가자는 주장은 산골짜기에서 공자왈맹자왈 읊어도 그 또한 혁명이라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또 정보-인간으로서의 자기부정처럼 들리기도 한다. 우리는 정보 네트워크와 분리되어 살아갈 수 있는가? 만약 그 밖이 없다면, 사사키 아타루란 독서가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에 위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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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모든 혁명이 텍스트로부터 일어난다고 했다. 텍스트를 급진적으로 독해하는 길만이 가장 혁명적이라고. 이 대목에 동의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한편으로 의심스러운 부분도 여전히 존재한다. 왜냐면 사람들이 그것을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하는 많은 텍스트들이 있지만 그것이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냉소하는 시대다. 다이빙벨 같은 영화만 봐도 그렇다.텍스트와 맞대면하는, 스스로의 모든 것을 걸고 텍스트와 투쟁하는 인간상이란게 오늘날 존재하는가? 글쓴이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더욱 정보를 차단하고 더욱 반복해서 하나의 텍스트를 읽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천지난만한 범생이의 무리한 소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미 텍스트를 소비하는 방법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텍스트와 인간의, 존재론적 위상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은 여러가지 정보와 동일한 수준에서 서로 얽히고 섥혀있다. 그것을 차단하고 독서에 심취해 자기 자신 안에서 혁명을 해가자는 주장은 산골짜기에서 공자왈맹자왈 읊어도 그 또한 혁명이라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또 정보-인간으로서의 자기부정처럼 들리기도 한다. 우리는 정보 네트워크와 분리되어 살아갈 수 있는가? 만약 그 밖이 없다면, 사사키 아타루란 독서가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에 위치할까?
[위시리스트] Jane Bennett, Vibrant Matter (2010)
https://www.dukeupress.edu/vibrant-matter
In Vibrant Matter the political theorist Jane Bennett, renowned for her work on nature, ethics, and affect, shifts her focus from the human experience of things to things themselves. Bennett argues that political theory needs to do a better job of recognizing the active participation of nonhuman forces in events. Toward that end, she theorizes a “vital materiality” that runs through and across bodies, both human and nonhuman. Bennett explores how political analyses of public events might change were we to acknowledge that agency always emerges as the effect of ad hoc configurations of human and nonhuman forces. She suggests that recognizing that agency is distributed this way, and is not solely the province of humans, might spur the cultivation of a more responsible, ecologically sound politics: a politics less devoted to blaming and condemning individuals than to discerning the web of forces affecting situations and events.
Bennett examines the political and theoretical implications of vital materialism through extended discussions of commonplace things and physical phenomena including stem cells, fish oils, electricity, metal, and trash. She reflects on the vital power of material formations such as landfills, which generate lively streams of chemicals, and omega-3 fatty acids, which can transform brain chemistry and mood. Along the way, she engages with the concepts and claims of Spinoza, Nietzsche, Thoreau, Darwin, Adorno, and Deleuze, disclosing a long history of thinking about vibrant matter in Western philosophy, including attempts by Kant, Bergson, and the embryologist Hans Driesch to name the “vital force” inherent in material forms. Bennett concludes by sketching the contours of a “green materialist” ecophilosophy.
2015년 9월 15일 화요일
[스크랩] 니콜라 부리요 The Exform: 리움 10주년 기념강연
첫 번째는 세계화와 그 영향이며, 두 번째는 그 보다 최근 개념인 ‘인류세(Anthropocene)`입니다. ‘인류세’는 제가 기획하여, 몇 주 전에 개막한 2014년 타이페이 비엔날레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인류세는 1980년대 과학자들이 사용한 과학적 용어로, 인간의 활동이 지구환경에 끼친 영향이 나타나는 지질학적 기간을 가리킵니다. 세계화부터 인류세에 이르는 개념을 살펴보며 ‘엑스폼(exform)’을 소개하고, 그것이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이 강의를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주제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논의할 건가요? 첫 번째로, 매우 어리석은 일이긴 합니다만, 예술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입니다. 예술에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을 매번 다시 정의해야 합니다. 예술은 첫째 우리가 살아하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는 활동이자 도구입니다. 세계화와 인류세에 대해 언급했습니다만, 이 두 가지 개념은 오늘날의 예술에서 매우 가시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특정한 층위입니다. 그것은 감각적 인식과 우리가 ‘형태’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형태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로제 카이와는 형태를 매우 흥미롭게 정의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네 종류의 가능한 형태는
-거기엔 다섯 번째 형태라는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네 가지만 있습니다. 첫째로, 성장에 의해 생성되는 형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식물처럼 말입니다. 또한, 우연으로 발생된 형태가 있습니다. 그리고, 틀에 의한 주조로 만들어진 형태가 있습니다. 네 번째 종류의 형태는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기획에 의해 생성된 형태입니다. 예술은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형태입니다. 그것은 개인이나 집단을 투영하며, 매우 특정한 종류의 형태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성장에 의한 것도, 우연에 의한 것도, 틀에 의한 것도 아닌, 기획에 의한 형태입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현대미술은 이 네 가지의 형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여러분은 많은 전시들에서 식물적인 요소, 또는 무기물, 틀에 의한 형태, 그리고 우연에 의한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위해 아주 간략하고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예술은 세상과의 관계를 구체화하는 활동입니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안경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세계와 맺은 특정한 관계의 구체화는 어떤 종류의 요소로도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몸짓이 될 수도 있고, 사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관계를 구체화시키는 그 어떤 것이든 가능합니다. 예술은 그 자체로 영향을 주며 현실에 관여한다는 사실에서 다른 여러 활동과는 다릅니다. 예술은 현실에 관여하고, 그 결과로 예술 고유의 영역을 만들어 냅니다. 선사시대 동굴부터 지금에 이르는 모든 예술의 공통점중 하나는 축소된 모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른 규모의 것입니다. 실제 사물과 일대일의 크기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다른 규모의 것입니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현실에 분명히 직접적으로 개입하며, 현실 속에서 현실과 함께 작업을 합니다. 현실의 재현일 필요는 없지만, 예술은 여전히 다른 크기의 축소된 모형으로 여겨집니다. 예술의 또 다른 특성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요소들을 다시 불러낸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이곳 카페에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 영국작가 리암 길릭은 예술가의 활동을 주인이 던진 물건을 물어오는 개의 행동에 비유했습니다. 예술가들은 방 한가운데에 있는 카펫위로 물건을 다시 가져옵니다. 이것은 늘 원심적, 구심적 움직임입니다. 물건을 던지는 ‘원심적’ 움직임, 물건을 카펫위로 다시 가져오는 ‘구심적’ 움직임 이러한 움직임이 바로 제가 ‘엑스폼’이라고 부르는 그것입니다. 이것은 배제와 수용의 과정에 있는 형태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사회가 보고 싶어 하지 않지만, 예술가들이 현장으로 다시 가져오는 모든 것들―요소들, 기호들, 형태들―입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했지만, 매우 광범위한 서론이 되었는데요.
이제 세계화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세계화는 현재 우리 모두와 관여된 인류의 과정입니다. 세계화는 사실 오래전에 시작되었지만, 미술계에는 최근에야 그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시점을 1989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1989년은 <지구의 마술사들>이라는 대형전시가 열린 해입니다. 이 전시는 세계 곳곳의 작가들이 참여한 첫 전시였습니다. 1980년대 이전 주요 전시나 비엔날레의 작가명단을 보면, 거의 몇몇 정해진 같은 나라의 작가들만 참여했었습니다. 1989년은 또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로 세계화 운동이 확산되고, 세계의 수평화가 시작된 해입니다. 이는 곧 미술 세계화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 영향으로서의 세계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비록 아주 극적이고 가시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세계화는 근원이라는 발상에 대한 물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근원이라는 개념은 제가 지금까지 써온 모든 책과 글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입니다.
언급되었듯이 관계미학은 예술작품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대한 고찰입니다. 의미는 정말로 작가에 의해서만 생성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집단적인 과정, 혹은 상호 교류적 과정일까요? 90년대 초에야 대두되긴 했지만, 이것은 새로운 개념이 아닙니다. 들라크루아는 그의 일기장에 예술작품은 마치 구름과 같다고 적었습니다.예술가는 에너지와 의미를 응축하여 작품을 만들어내고, 감상자는 그 의미를 “비”를 맞듯 전달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항상 삼각구조를 이룹니다. 우리가 예술가와 맺는 관계는 항상 삼각관계입니다. 거기엔 저자, 즉 예술가가 있고, 작품이 있으며, 관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이해를 도울 간단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관념주의 철학자에 대립되는 유물주의 철학자를 아주 평범한 기차 이미지에 비유하여 정의했습니다. 관념주의자에 대한 비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알튀세르에게 관념주의 철학자나 관념주의 사상가는 기차가 어디에서 오고, 기차가 어디로 떠나는지 알고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유물주의 철학자는 어디서 기차가 오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기차에 타는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세상을 보는 매우 대립된 방식입니다. 저는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데, 저는 기차가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기차에 올라타서 주변사람들과 함께 의논하며,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또 다른 책 <포스트프로덕션>에서 근원에 대한 이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제기하고자 했습니다. 이 책의 요지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화의 생산자란 무엇이고, 문화의 소비자란 무엇일까요? 여러 다양한 현상에 의해 그 경계의 소멸은 점점 더 가속화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산과 소비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를 음악에서 찾아본다면, 바로 디제이입니다. 디제이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음악을 틀지만, 동시에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요소의 연결이고, 이는 그 음악의 원재료보다 중요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현대미술에 적용해보면, 그것은 오늘날 전시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여러 측면으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구조를 이용해 작업하는 작가들.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 둘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우선 리크릿 티라바닛을 예로 든다면, 리크릿 티라바닛는 항상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구조를 이용합니다. 이것은 관람자에게는 잘 드러나지 않는 그의 작품 양상이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유쾌함만큼 중요합니다. 리크릿은 항상 이미 존재하고 있는 형태들로 작업을 합니다. 그는 그 형태들에 거주합니다. 과거로부터 온 형태들에 거주하는 방법을 만들어냅니다.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서, <레디컨드>라는 책에서도 근원에 대한 고찰을 다룹니다. ‘레디컨트’는 사전에서 존재하는 단어로, 일반적으로 ‘레디컬’ 바로 다음에 나오는 단어입니다.아시다시피 ‘레디컬’은 근본적임을 의미하고 ‘레디컨트’는 근본, 뿌리가 뻗어 나가며 자라는 식물이나 유기체를 의미합니다. 아이비나 딸기와 같이 말입니다. 20세기의 모더니즘은 레디컬 했습니다.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것과 동의어인 급진성(radicality), 급진주의(radicalism)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뿌리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21세기의 모더니즘이 다양화되는 뿌리들, 증식하는 근원들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근원은 우리가 정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에 우리 자신을 동일시해야 할까요? 이것이 실제 주된 질문이고, 이 질문에 오늘날의 많은 예술가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된 세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뿌리’와 ‘근원’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며, 특권들에 대한 질문들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고, 다중화 되는 정체성, 변화하고 유동적인 정체성의 개념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레디컨트는 생장이 진행됨에 따라 그 뿌리를 확장하는 유기체입니다. 그것은 주체인 개인과 환경 사이의 새로운 관계 양상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움직이는 매순간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예술에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요소입니다.
저는 강연 앞부분에서 엑스폼을 과정으로 끌어들여진 형태라고 정의했습니다. 이 형태는 하나의 안정된 형태로 포착하기에 매우 힘든 것입니다. 이것은 늘 다른 관점들에 의해서 정체성이 부여되는 형태입니다. 예를 들어, 모더니티의 근원으로 돌아가 보면, 여기서 저는 근원이라는 용어를 하나의 역사적인 용어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테면 모더니즘의 역사 말입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정치 세계를 한쪽에 두고, 이에 포함되지 않은 모든 것들을 다른 한편에 두는 형태입니다. 우리가 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화적 윤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이나 지배적인 이념에 의해 폐기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겼던 사상, 사물, 장면들에게 존엄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긴 투쟁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모든 시대와 장소에는 공식적인 이념이 있는데, 이러한 이념은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거부된, 공적인 논의가 불가한 것들을 만들어냅니다. 지난 두 세기 동안 모더니즘의 역사를 살펴보면, 회화나 조각에 있어 예술가들이 복원하고자 했던 대상 혹은 상태를 찾을 수 있습니다. 1863년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를 예로 들면, 물론 쿠르베도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올랭피아>는 프랑스에서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처음 살롱전에서 거부된 이후, 2년 후인 1865년에야 전시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관람자와 주류 인식들은 이 작품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올랭피아>에 그려진 창녀와 꽃을 든 하녀의 모습을 알아봤고, 이는 절대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절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공적인 영역에서 감춰지고, 보이지 말아야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창녀였습니다. 둘째로, 한스 벨팅이 쓴 매우 흥미로운 글에 따르면, 이것은 분명하게 돈의 이념을 가시화한 회화였고, 그 회화 자체를 상품화하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당시 관람객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한편엔 부르주아, 즉 기득권층이 있고, 다른 한편에 그에 반하는 논쟁자, 아웃사이더가 있습니다. 그 사이에는, 둘 사이의 타협 대상인 거대한 무리의 기호와 이미지들이 줄지어 놓여 있습니다. 모더니즘 회화는 이전에 보여줄 수 없었던 대상과 주제를 화면 속으로 가져왔습니다. 19세기 회화 주제의 위계질서는 매우 분명하였고, 명문화되어 있었습니다. 역사화는 고상한 것이었지만,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그림은 하찮게 여겨졌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 회화의 역사는 하찮게 여겨졌던 대상들이 주된 주제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현실은 합의의 산물입니다. 그것은 함께하는 토론이며 타협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제가 제 어깨 위에 분홍색 토끼가 있다고 한다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은 믿지 않으시겠지만,제가 정말 있다고 여러분을 설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서로 의견일치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과정이 있을 것입니다. 예술은 이러한 의견일치의 파기, 혹은 균열입니다.
예술은 배제되고 감추어진 것을 가시적 영역으로 드러냅니다. 이것이 지난 두 세기 동안, 문화계에서 벌어진 배제와 수용의 움직임이었습니다. 20세기 심리학, 이념, 예술과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패턴입니다. 이것이 모더니즘의 초석입니다. 모더니즘의 예술가들은 발터 벤야민이 유물론적 역사학자라고 불렀던 개념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벤야민이 보들레르에 대해 썼던 글에서 유물론적 역사학자를 넝마주이에 비유한 매우 흥미로운 구절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 예술가들에 대한 절묘한 정의가 될 수 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넝마주의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여기 매일 도시의 잔재를 줍는 사람이 있다. 대도시가 폐기하고, 잃어버리고, 멸시하고, 망가뜨린 것들을 그는 목록화하고 수집한다. 그는 방탄한 생활의 아카이브인 쓰레기더미를 뒤진다. 그는 마치 보물을 모으듯 한다. 신성한 산업이 내친 모든 쓰레기들은 이제 실용적인 대상 혹은 쾌락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쓴 이 짧은 구절은 폐기되고 버려진 것들을 다시 살려내는 과정으로서의
20세기 모더니즘의 역사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리암 길릭이 말한 던져진 뼈를 다시 카펫 위로 가져오는 개와도 같습니다. 지난 20년간이 어땠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물론 60년대도 살펴볼 수 있을 겁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와 같이 잔재를 수집하고, 사회가 폐기한 작은 요소들을 모으는 수집가가 되었습니다. 많은 작가들은 이처럼 사회가 무시하고, 폐기하고, 묻어버린 것들을 여러 방법으로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예술가는 현재를 발굴해 가는 고고학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정의와 관련이 깊습니다. 벤야민을 다시 인용하자면, 이것은 실제 그의 정치철학의 주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역사는 항상 승자들에 의해 기록됩니다. 오로지 승자만이 역사를 기록하고, 그들 관점의 역사를 적용합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이와 상반되는, 전쟁에서 패한 “패자”들에 의한 역사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특히, 지난 30년간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의 급증 속에서 우리는 승자의 버전이 아닌 역사, 소수집단과 군소공동체에 의한 그들 입장에서의 역사와 현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그려본다면 그것은 마치 전쟁터에 묻혀 있는 것들, 즉 패자들의 것들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발터 벤야민이 제기한 역사이론입니다. 19세기 이후의 이런 경향의 미술을 `리얼리즘(Realism)`이라고 불렀습니다.
쿠르베가 정의한 리얼리즘은 조형적인 측면에서 사실적 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욱 복합적인 것이었습니다.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폐기된 요소들을 다시 현장으로 가져오는 것이었으며, 사회의 소수세력을 대변하는 노동자들을 화폭에 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쿠르베가 정의한 리얼리즘입니다. 시각적인 리얼리즘이 아니라, 정치적 리얼리즘입니다. 그것은 권력의 이상화에 대항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어떤 권력이든 그들의 존재를 이상화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형태들을 이상화합니다. 예술가의 역할은 이런 요소들을 탈-이상화(de-idealize)시키는 것입니다. 이상화는 세계가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정당화하는 과정이자, 기존질서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과정입니다. 예술가들은 그 정반대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예술을 `현실`이라고 불리는 영화를 다른 방식으로 생산해내는 `편집테이블(editing table)`로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예술가는 항상 세계를 재편집합니다. 새로운 버전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세계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권력이 얼마나 연약하며 불안정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권력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세트이자, 시나리오 더미인 `미장센`입니다. 우리는 시나리오를 따릅니다. 예술의 역할은 대안적인 시나리오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쿠르베가 이야기 하는 리얼리즘, 오늘날 제가 말하는 리얼리즘은 예를 들어, 저에겐 리암 길릭은 `리얼리스트(Realist)`입니다. 시각적인 리얼리스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리얼리즘은 문화적 위계질서에 대한 비평입니다. 이것은 사회가 배제의 메커니즘을 유지하는 전제조건들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리얼리즘은 이러한 메카니즘을 가시화시키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예술가는 우리가 폐기하고, 버리고, 거부하는 방식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리얼리즘입니다. 이러한 리얼리즘은 예술뿐만 아니라 정치학, 심리학과도 연관됩니다. 칼 막스의 역사론을 예로 들자면, 그 주제는 `프롤레타리안`입니다. `프롤레타리안`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라틴어 `프롤레스 proles`로부터 나왔습니다. `프롤레스`는 자식 이외에 어떤 부(富)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뜻합니다. 이것이 `프롤레스`의 정의입니다. 존재하기 위한 생물학적 위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프롤레타리안`입니다. 19세기 지그문트 프로이드에 따르면 심리학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심리학의 주제는 무의식입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의 내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의식으로부터 추방된 것을 말합니다. 모두 같은 방식입니다. 범위는 다르지만, 과정은 같습니다. 프롤레타리안은 사회로부터 밀려난 대상입니다. 무의식도 의식으로부터 쫒아낸 것입니다. 모더니즘의 역사에서 현대예술의 주제는 이와 동일합니다. 그것은 과소평가된 것들, 경시된 것들, 폐기된 것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가장 사소한 기호들, 가장 우스꽝스럽고, 경시되는 형태나 이미지에 미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모더니즘의 역사가 보여주는 주된 패턴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스스로에게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원심적 활동의 최근 형태는 무엇인가입니다. 19세기엔 모든 것이 훨씬 단순했습니다. 한쪽에는 권력이 다른 한쪽에는 예술가가, 한쪽에 배제가 다른 한쪽에 수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훨씬 복잡해지고, 더욱 수평화 되었습니다.
오늘날 수용과 배제의 이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두 가지 주된 특징을 상기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 시대의 문화, 21세기 문화의 특징적 요소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미지의 영역 terra incognita’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 구석구석을 모두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처음 맞이하는 상황입니다. 지구의 마지막 미지의 장소는
20세기 초에 발견되었습니다. 보르네오가 그 미지의 장소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구석구석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새로운 현상입니다. 인류는 지금과 같은 완전함을 느끼며 산 적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지구상에 미지의 장소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점과 연결시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과거, 아카이브, 역사에 그렇게 관여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탐험할 수 있는 마지막 대륙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공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미래와 과거 같은 시간에 대한 발견과 탐구입니다. 지난 20년간 예술에서 역사가 차지했던 중요성을 되돌아보면, `미지 영역 terra incognita`의 종식에 대한 공명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능성, 이것이 제가 제시하는 가설입니다.
이러한 진화의 또 다른 부산물 혹은 효과는 우리는 다양한 시간이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처럼 과거가 현재와 함께 공존하는 때는 인류 역사상 없었습니다. 이를 위한 지식의 주된 도구는 인터넷입니다. 우리는 모든 시대의 이미지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베르메르의 그림, 프랭크 스텔라의 작품, 또는 작년에 생산된 작품들이 오늘날엔 모두 같은 층위에 있습니다.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 것은 역사적 깊이입니다. 지난 세기에 우리는
`과거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겐 중세나 지난 세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요소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역사에 대한 우리의 시간 개념은 밤하늘의 별자리와 같습니다. 밤하늘을 보면 별자리를 볼 수 있는데, 그 특징은 여러분이 보는 요소들, 여러분이 보는 별들은 모두 다른 시간대에서 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별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여러분이 보는 것은
환영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 옆에 더 가까이 존재하는 별이 있다 해도, 모두 같은 층위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것은 다른 시간대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 대한 완벽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별자리의 패턴은 인터넷에서 더할 나위 없이 구현됩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매우 평면적입니다. 여러분은 한 사이트에서 다른 사이트로 이동할 수 있는 수평성을 갖습니다. 별자리 개념과 그것의 가상세계 장악, 그것이 진행되는 방식, 오늘날 우리가 지식을 찾는 방식들이 모두 같습니다. 별자리와 인터넷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21세기의 두 번째 특징은 제가 ‘과생산 hyper-production’이라 부르는 현상입니다. 제가 25년 전 처음 젊은 큐레이터로 일을 시작했을 때, 현대미술계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여전히 가능했습니다. 60년대에는 더욱더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부터 어떤 분야든 한 분야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너무나 많은 작품들, 출판물 등이 생산되어 한 분야의 모든 지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박학다식 교양인의 개념은 이제 불가능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지식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지식은 여러 정보들 속에서 원하는 것을 검색하는 최적의 방법을 찾는 것이며, 선택을 위한 올바른 열쇠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현대미술에서도 과생산의 공명을 볼 수 있습니다.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하는 많은 예술작품들, 제가 언급했던 수집의 개념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아카이브의 개념은 심지어 더욱 구체적입니다. 그러한 작품 안에서 정보, 데이터는 축적되지만 읽거나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추상적인 형태의 지식입니다. 이러한 개념에 부합하는 첫 번째 작품은 일본계 미국인 작가인 온 카와라가 1971년에 만든 <일백만 년>이라는 작품입니다. 일백만년을 나열한 것입니다. 물론 아무도 읽지 않겠지만, 매우 강력한 개념을 보여주었습니다. 1971년은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발명된 해였습니다. 기계발전으로 계산에 대한 인간의 한계를 넘는 순간을 목도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카이브의 개념입니다. 아무도 아카이브의 전체를 파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여러분은 온 카와라의 작품과도 같이 우리의 가능성을 초월하는 수많은 예술작품들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과도한 기억의 세상 hyper mnemonic world`에 살고 있습니다. 아카이브의 거대한 구조체인 박물관과 같은 세계입니다. 박물관은 우리가 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꺼내어 쓰는 보고이자 우물입니다. 하지만 그 아카이브는 인간의 가능성을 초월합니다. 예술가는 이 기억의 문지기이자, 역사 속을 항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저는 예술가들을 ‘기호-항해사 semio-naut’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semios`는 `기호`에서 왔고, `nautos`는 `항해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술가는 기호를 통해 항해하고 기호들을 연결하는 방법을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이런 과생산의 세계에서 항해 능력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식을 얻기 위한 주된 도구입니다. 매일 우리가 마주하는 거대한 데이터 구름을 뚫고 항해할 우리의 나침반은 무엇일까요? 예술가들은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맞설 수 있는 패턴, 혹은 모델을 제공합니다. 배제와 소외는 과생산-우리가 살고 있는 과축적된 아카이브 (hyper archive)와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저는 3명의 매우 다른 예술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제프 쿤스, 가브리엘 오로즈코, 피에르 위그, 이 세 작가들은 다른 종류의 기호를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제프 쿤스는 유치하거나 상업적인 하찮은 기호들에 럭셔리 코드들을 흥미롭게 적용합니다. 이것은 쓰레기와 대중문화의 간극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간극은 제프 쿤스의 작품에서 ‘자본 이득 capital gain‘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부가 가치 말입니다. 이것은 무작위적으로 시작됩니다. 제프 쿤스가 사용한 기호나 형태는 기념품과 같은 교환의 세계로부터 온 것입니다. 공항에서 볼 수 있는 조잡한 기념품의 세계 말입니다. 그가 사용하는 모든 기호는 이런 조잡하고 빈약한 기념품, 장남감, 도구의 세계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대개 교환에 관한 것입니다. 자본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제프 쿤스의 작품은 이런 식으로 자본의 잔인함을 보여줍니다. 임의로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이유로 그의 작품이 많은 경우 무자비하다고 간주되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오로즈코의 작품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그는 주로 건축 자재, 돌, 나뭇잎, 동물화석 등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산업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과 문화 사이의 긴장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문화는 학문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자연과 문화 둘 다 산업의 지배를 받습니다. 둘 다 산업화 과정으로 왜곡됩니다. 가브리엘 오로즈코의 작품에서 인간의 존재는 무엇일까요? 인간은 자국, 흔적, 또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의 모습이 묘사되어있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의 흔적, 지문, 얼룩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존재는 희미해집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피에르 위그의 작품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 작가는 제가 90년대에 쓴 <관계 미학>에서 많이 언급한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는 인간의 영역에서 생태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최근 퐁피두 센터의 전시에서, 이 전시의 새로운 버전이 곧 로스엔젤레스의 LACMA에서 열릴 예정입니다만, 그는 이 전시에서 조개와 같은 작은 동물들을 가지고 작업을 했습니다. 심지어 독감 바이러스와 같은 박테리아도 사용하였고, 개미 등과 같은 미생물의 형태를 사용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중심에서 보다 확장된 생태계의 영역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영역에서 생태영역으로 확장된 진화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이 관계 미학 이면에 숨은 가장 중요한 핵심 중에 하나입니다.
이러한 상황 또한 변화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에는 소셜 네트워크가 존재하지 않았고, 스마트폰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늘 기계에게 이야기하고, 이것을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현상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계에 대고, 기계를 통해 말하며 지낼까요? 몇 년 후에는 늘 기계와만 대화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 우린 점점 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관계 미학 이면의 이러한 실제적 핵심에 대해 잠시 후에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올해 타이페이 비엔날레의 바탕이 된 주제이기도 하며, 인간이 저버린 모든 가능한 영역 속에 인간을 다시 들여오는 개념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잠시 후 다루겠습니다. 오늘날 배제와 소외의 새로운 형태인 엑스폼을 요약하자면 사회나 시민에 의해 거부되거나 요구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호가 엑스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수용과 배제의 이중적인 활동을 취하는 형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문화적 위계질서는 더 이상 이분법적이지 않습니다. 더 이상 권력과 시민사이의 대화가 아닙니다. 더욱 복합적이고 수평화 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잡하게 얽힌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네트워크 되고, 자본이 유동하고, 이주민의 이동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현재 유동과 네트워크는 장소보다 더 중요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19세기 민속학은 아마조니아로 연구자를 보내 ‘타자’의 생활을 사진으로 기록하거나 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은 ‘타자’에 대한 정의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타자는 더 이상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소셜 네트워크만 보더라도 거의 모든 이가 현실의 이미지, 삶에 대한 정보와 기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리포터가 되었습니다. 모든 이가 이미지를 생산하고, 이미지를 보내거나 공유합니다. 이러한 집단적인 공들임은 몇 십 년 전만해도 불가능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영화 평론가 세르주 다네가 말한 여행과 사진 찍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는 사진 찍는 것이 극도로 폭력적인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 그는 엽서를 샀는데, 그곳 사람들 스스로가 표현한 그들의 이미지이기 때문입니다. 엽서는 거의 사라지고 있지만, 그 비유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저는 세계화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세계화와 병행하는 또 다른 양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류세 anthropocene`입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세계 2차 대전이후 우리가 접어든 이 지질학적 시대는 인간의 활동이 지구에 끼치는 영향으로 인해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세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이라는 주체 자체입니다. 인류가 지구의 한 종으로서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각각의 개인으로서 우리가 현실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인류세 역설 anthropocene paradox”입니다. 우리는 기술적 영역으로서 지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개인으로서 우리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점점 미미해 집니다. 우리는 스스로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느낍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21세기의 또 다른 특징은 인간이 시스템의 잔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관계미학을 다시 언급하려는 이유이고, 제가 타이페이 비엔날레 전시인 <극렬가속도 劇烈加速度 The Great Acceleration>에서 다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첫째로 최근의 철학에서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는 것은 중앙 집중화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비평입니다. 분명, 소위 중심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비판하고 해체하며, 더욱 수평성을 확보하려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주된 비평은 ‘인간중심주의 anthropocentrism`에 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관계미학과 인간의 관계성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예술가들의 실천들이 많은 사상가와 철학자들로부터 인간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최근 철학의 경향이 ’사변적 리얼리즘 speculative realism‘입니다. 이것은 사물, 현상, 그리고 인간을 같은 층위의 것으로 보는 `사물의 민주주의 democracy of objects`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퀀틴 메이야수가 아주 흥미로운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항상 주체와 객체 간의 상호관계 결과라고 보고 이를 ‘상관주의 correlationism’라 말했는데, 전형적인 서구 철학의 관점입니다. 상관주의를 벗어난 전시나 예술은 무엇일까요? 사실,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예술의 개념 자체가 상관주의, 즉 인간의 의식과 상황의 공존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셀 뒤샹에 따르면, 관람객이 그림을 작품이 되게 하고, 그것이 인간의 의식에 의해 활성화되지 못한다면, 모든 작품은 단순한 사물이나 상품으로 변형되고 맙니다. 이것이 제가 새로운 관계적 풍경을 포함한 새로운 관점으로 관계미학을 다시 생각해보는 방식입니다.
저는 앞에서 우리가 늘 사용하는 여러 종류의 기계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자연이나 동물들과 맺는 관계도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 영역의 측면에서 보자면 더 이상 그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타이페이 비엔날레는 관계적 세계의 이러한 새로운 전개양상을
다루고자 한 전시입니다. 90년대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인간적 척도가 무너졌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회는 스스로를 구성구요.
이렇게 다시 설명해보겠습니다. ‘경제 economy`라는 단어는 `집의 구성`을 의미하는 ‘오이코스 노모스 oikos nomos’라는 그리스어에서 왔습니다. 그것은 매우 가정의 차원이고 인간적인 척도를 기반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경제의 75%는 기계와 로봇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고빈도 매매 high-frequency trading’라고 합니다. 인간은 그들 자신을 위한 기술영역, 기반시설의 방관자이자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금융체의 75%가 사람이 아닌 기계에 의해 생산됩니다. 이 전시는 제가 어떤 기사를 읽고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상에 인간보다 로봇이 더 많다는 내용이었는데, 이것은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인터넷은 90년대에 소통의 수단으로, 유희를 위한 수단으로, 교환의 가능성을 증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터넷에서 인간은 소수집단이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인터넷에서 인간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인터넷 상에서 개인정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봇에 의해 수집된 정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체계가 뒤집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새로운 상황의 특징은 우리가 각각의 개인으로서, 시민으로서, 그리고 동물, 식물, 자연적 요소, 대기로 구성된 새로운 부차적인 계층으로서 상호관계의 필요성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기술 산업 체계의 공격을 받고, 시민사회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동양과 서양 사이, 서양의 사상과 아시아의 사상 사이의
새로운 대화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서양철학에 전제되어 있는 개념은 메이야수가 말한 `상관주의 correlationism`입니다. 그것은 한 편에 자아가, 다른 한 편에 그 자아가 세계를 통해 보거나 인식하는 것, 이들에 대한 사유 없이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서양 철학에 따르면 자아의 바깥에는, 모든 것의 가치를 평가하는 인간의 인식의 바깥에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전시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사물, 자연요소, 동물, 다양한 생명체들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형태의 연결성을 어떻게 확립할 수 있을까요? 가능한 한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52명의 작가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모든 작품의 이미지를 보여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영역들 사이의 새로운 형태의 연결성과 대화를 보여주는
몇몇 작품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를 약화시키거나 과소평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거대한 `상호활동 영역 co-activity sphere`인 이 세계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한 것입니다. `상호활동 co-activity`이란 인간, 자연현상, 동물, 그 외의 생명체들이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며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벨기에 출신 예술가 해롤드 앤카르트의 작품입니다. 그는 먼지나 불을 사용한 작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미지의 왼쪽에 보이는 커다란 더미는 작가가 우연히 발견한 1930년대 프라하 동물원의 카탈로그를 재인쇄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노아의 방주와도 같은, 이미 사라진 동물원의 동물들에 대한 이상한 모음집을 재인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알리사 바렌보임의 작품입니다. 이 작가는 합성 재료, 새로운 재료, 폴리머를 이용해 작품을 만듭니다.
이것은 피터 부게누 작품의 이미지입니다. 이 작가도 조각 작품의 주된 재료로 먼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타니엘 멜로, 여기 보이는 두 작품은 그가 `애니마트로닉스 animatronics’라고 부르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말하며 움직이는 두상을 비디오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주요 캐릭터는 여러분 왼쪽에 보이는 네안데르탈인입니다.
셰자드 다우드. 여기 보시는 이 작품은 3D 두상조각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자연적인 요소와 기계적인 요소가 뒤얽혀있는 오늘날의 인간 모습을 그만의 형식적 혼합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시는 것은 양혜규의 설치작품입니다. 거대한 월페이퍼와 조각은 기계적인 요소와 자연적인 요소를 모두 담고 있는 토템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카미유 앙로의 조각입니다. 이 작품은 그녀가 척추지압사와 같은 각기 다른 치료사들에게 진흙판 위에 그들의 활동을 실행하게 한 후, 그것을 청동조각으로 만들어낸 일련의 연작 중에 한 부분입니다. 인간의 척추 같아 보이지만 조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로저 하이온즈의 작품은 먼지가 된 비행기를 보여줍니다.
닐 벨루파는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시간이 부족해 설명하지 못했지만 무척 흥미로운 양상입니다. 인터넷과 스크린 자체가 우리가 영상과 맺는 관계를 아주 깊이 변화시켰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이 슬라이드에서는 잘 안보이겠지만, 거기엔 영상과 영상에 나온 사람들과의 논의에 대한 정보가 중첩되어. 투명한 스크린 시스템에 의해 잘려진 이미지들은 항상 움직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닐 벨루파 작품의 세부 이미지입니다.
로르 프로보스트는 여기 안쪽 블랙박스 안에 보이는 비디오작품을 설치했습니다. 양 옆에 설치된 모든 사물들은 실제 비디오를 촬영할 때 사용한 것들입니다.
브라질 작가 마테우스 로샤 피타는 매우 동시대적인 또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일상적인 이미지에 밀도와 무게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멘트입니다. 실제 브라질에서 저렴한 묘지석을 만드는 방법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시멘트 연작입니다. 로샤 피타는 손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 작품의 한 부분에 작가가 사용한 사진 이미지가 보입니다.
그리고 작가는 작품위에 사진 속의 손을 정확히 재현해 냅니다.
미카 로텐베르그의 비디오 작품입니다. 이 작가는 생산라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시에서 이 작가는 다른 많은 생산라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비디오 작품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 생산라인들, 예를 들어, 왕포치가 일하는 실제 생산라인 말입니다. 여기 이 모습은 매우 비정상적인 형태의 생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매우 복합적이며, 부조리합니다.
시마부쿠는 선사시대 유물과 스마트폰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합니다. 스털링 루비도 매우 선사시대적인 원형의 형태들을 보여줍니다.
수라시 쿠솔롱의 작품입니다. 전시 관람객들은 작품 속에 숨겨진 금목걸이를 찾기 위해 거대한 설치작품 속을 뒤집니다. 그 공간속에서 부조리한 활동을 유발하려는 시도입니다.
저는 활동에 대해 능동성과 수동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키워드일 것입니다. 제가 ‘관계 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술가들이 관람객들과 만들어내고 있는 활동에 대한 논의입니다. ‘포스트프로덕션’도 능동성에 대한 것입니다. 과학의 생산과 소비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타이페이 비엔날레 전시에서 소개한 `상호활동`이라는 개념은 동물, 기계, 인간과 자연적 요소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며, 관계의 영역이 이들 기계, 동물, 식물 더 나아가 무기물까지 확장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핵심이며, 미래의 예술을 위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현실을 구성하는 여러 다른 영역들을 다룰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러한 영역들을 이제 더 이상 무시할 수도 없고, 우리가 이전에 그랬듯이, 그것들을 장악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언급한 ‘사변적 리얼리즘’이라는 철학적 경향이 제시하는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사물, 자연, 동물과 맺는 우리의 관계에 대한 것이며, 예술이 이들 사이의 관계를 창조해내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15년 9월 13일 일요일
[스크랩] "What Is Micropop?" by Midori Matsui (2007)
The term "Micropop" is used to describe the attitude or approach to life that creates an unique and original path of living or aesthetics by combining fragments gathered from various places, without relying on institutional morals or major ideologies.
It refers to the stance taken by people who have been relegated to a "minor" position vis-a-vis the major culture that surrounds them, in the same manner as immigrants and children do. Those people - forced to function within the major culture without having sufficient tools to do so - make do with what they have, trying to fill in the gaps through leaps of imagination, thereby coming up with a peculiar amalgam or composite. The process of developing such a strange culture bears close resemblance to the way that children or immigrants, ignorant of the grammar of the major tongue and deficient in terms of vocabulary, come up with their own new language characterized by neologisms and deviant grammatical constructs.
Micropop also focuses its attention upon those places inside the city that people have forgotten, as well as upon obsolete, time-worn things. By adding something to those things and places - that is, often the minor act of inserting them within a new chain of relationships, or the setting up of a new site for gathering - Micropop evokes their hidden meaning, creating the impetus for the fostering of a new consciousness of community.
The idea of Micropop was inspired by the concept of "minor literature" as proposed by the French philosopher Gilles Deleuze. It referred originally to the modernist novels written by such authors as Kafka, Joyce, Becket. Those authors, writing in languages that were not their mother tongues, created new compounds/composites within the gaps left by those major languages, linking lofty ideas and themes with vulgar actions and expressions, thereby developing new structures of discourse. Deleuze's analysis went beyond the categories of literary criticism, treating the methods adopted by those novels and the stance supporting them as a model for cultural creation in general. He saw it as a process of creation that takes place under fluid circumstances in an age when many people live away from their home countries, in which the consciousness of smaller regional cultures is forced to transform itself under the broad influence of the world's major cultures.
To sum up, the concepts of "Micropop" and "pop" emerge from the confusion of the cultural set of values known as "post-modern." The term "pop" is another expression that Deleuze used to demonstrate the stance or position of "minor" creation (it is "pop" with a small "p," and not directly related to American Pop Art). Instead of referring to major styles of popular culture, it demonstrates the basic posture that encourages the emergence of a consciousness or awareness of new forms of culture peculiar to a certain place. It expresses the stance of those people who live in a big city while not belonging to any particular institution or system; instead, such people glean their information from various sources, enjoying both high culture and popular culture, and treating them as equals. The sensibility of "minor pop" takes the manufactured objects of popular culture and reads into them allegorical symbolism of human dreams and desires, finding philosophical meaning in the "insignificant" events of everyday life as well as hints for action leading toward freedom.
In that sense, Micropop is also micro-political, as it involves the efforts individuals make to remove themselves from the framework of institutional thinking and the influence of modern capitalism and standardization, and to develop a posture of discovering the creation of an original sensation/perception and acquiring the venue of creation, while responding to the substantive conditions of "the here and now." That effort is the demonstration by the individual of the statement, carried to extremes, of his/her voluntary ability to determine or decide. While responding to the mutability of things and thoughts in the post-modern era, that posture does not accept or approve of the concept that everything can be reduced to a simulation of a play of symbols/representations, or that reality can be surpassed by copies.
Accordingly, the stance adopted by Micropop can be seen as one of resistance toward the thrust toward totality that is being made by global capitalism and information networks. It sprouts amidst cultural crisis, for example, in those societies caught up in the vortex of vast structural change, or beset by disaster, or haunted by a sense of stagnation/frustration.
Japan, from the mid-1990s to the end of the decade, experienced precisely such an age of cultural crisis. The massive Kobe earthquake and the sarin-gas subway attacks of 1995 only amplified and intensified people's anxiety toward the future. In addition to that, the prolonged economic recession lured young people away from a pursuit of material success and toward a search for spiritual meaning in their daily lives. The standardization of lifestyles and reification of cultural expressions encouraged them to create a narrow space where they could experience their own original sensations and perceptions. The means by which they accomplished that included recombining the relations between familiar things, gathering together "useless" fragments to create new compounds and amalgams, and reviving the meaning of forgotten places and things.
Those efforts, in turn, gave birth to new art forms and activities. The childlike creativity and curiosity of these "minor people" transformed their so-called "drawbacks" -- i.e., their lack of funds, technology, and social status, and most importantly, their deviation from the norms of "adult" society - into their forte. The expressions of this new art thinks up new ways to use abandoned things, such as old legends and empty spaces, creating venues for communication. They include drawings that relay the action of intervention and the process of association, or which support the formation of individual affinity, as well as video artworks that use collections of fragments that float to the surface and create a complete picture of a living being or personal character, in order to depict the continued and complicated nature of the everyday.
Micropop represents an attitude that expresses the efforts of individuals, in the final stage of post-modern culture, to find a way to survive. It is a mode of resistance to a process of growing inhumanity that began in the 1960s, and which now seems to have reached its extreme limits. By treating the disadvantageous conditions of those in a "minor" position as the unique foundation for a creative method, the people of Micropop have broadened the possibilities of renewing our sensation, and giving rebirth to the values of the world in which humans live.(강조는 인용자)
It refers to the stance taken by people who have been relegated to a "minor" position vis-a-vis the major culture that surrounds them, in the same manner as immigrants and children do. Those people - forced to function within the major culture without having sufficient tools to do so - make do with what they have, trying to fill in the gaps through leaps of imagination, thereby coming up with a peculiar amalgam or composite. The process of developing such a strange culture bears close resemblance to the way that children or immigrants, ignorant of the grammar of the major tongue and deficient in terms of vocabulary, come up with their own new language characterized by neologisms and deviant grammatical constructs.
Micropop also focuses its attention upon those places inside the city that people have forgotten, as well as upon obsolete, time-worn things. By adding something to those things and places - that is, often the minor act of inserting them within a new chain of relationships, or the setting up of a new site for gathering - Micropop evokes their hidden meaning, creating the impetus for the fostering of a new consciousness of community.
The idea of Micropop was inspired by the concept of "minor literature" as proposed by the French philosopher Gilles Deleuze. It referred originally to the modernist novels written by such authors as Kafka, Joyce, Becket. Those authors, writing in languages that were not their mother tongues, created new compounds/composites within the gaps left by those major languages, linking lofty ideas and themes with vulgar actions and expressions, thereby developing new structures of discourse. Deleuze's analysis went beyond the categories of literary criticism, treating the methods adopted by those novels and the stance supporting them as a model for cultural creation in general. He saw it as a process of creation that takes place under fluid circumstances in an age when many people live away from their home countries, in which the consciousness of smaller regional cultures is forced to transform itself under the broad influence of the world's major cultures.
To sum up, the concepts of "Micropop" and "pop" emerge from the confusion of the cultural set of values known as "post-modern." The term "pop" is another expression that Deleuze used to demonstrate the stance or position of "minor" creation (it is "pop" with a small "p," and not directly related to American Pop Art). Instead of referring to major styles of popular culture, it demonstrates the basic posture that encourages the emergence of a consciousness or awareness of new forms of culture peculiar to a certain place. It expresses the stance of those people who live in a big city while not belonging to any particular institution or system; instead, such people glean their information from various sources, enjoying both high culture and popular culture, and treating them as equals. The sensibility of "minor pop" takes the manufactured objects of popular culture and reads into them allegorical symbolism of human dreams and desires, finding philosophical meaning in the "insignificant" events of everyday life as well as hints for action leading toward freedom.
In that sense, Micropop is also micro-political, as it involves the efforts individuals make to remove themselves from the framework of institutional thinking and the influence of modern capitalism and standardization, and to develop a posture of discovering the creation of an original sensation/perception and acquiring the venue of creation, while responding to the substantive conditions of "the here and now." That effort is the demonstration by the individual of the statement, carried to extremes, of his/her voluntary ability to determine or decide. While responding to the mutability of things and thoughts in the post-modern era, that posture does not accept or approve of the concept that everything can be reduced to a simulation of a play of symbols/representations, or that reality can be surpassed by copies.
Accordingly, the stance adopted by Micropop can be seen as one of resistance toward the thrust toward totality that is being made by global capitalism and information networks. It sprouts amidst cultural crisis, for example, in those societies caught up in the vortex of vast structural change, or beset by disaster, or haunted by a sense of stagnation/frustration.
Japan, from the mid-1990s to the end of the decade, experienced precisely such an age of cultural crisis. The massive Kobe earthquake and the sarin-gas subway attacks of 1995 only amplified and intensified people's anxiety toward the future. In addition to that, the prolonged economic recession lured young people away from a pursuit of material success and toward a search for spiritual meaning in their daily lives. The standardization of lifestyles and reification of cultural expressions encouraged them to create a narrow space where they could experience their own original sensations and perceptions. The means by which they accomplished that included recombining the relations between familiar things, gathering together "useless" fragments to create new compounds and amalgams, and reviving the meaning of forgotten places and things.
Those efforts, in turn, gave birth to new art forms and activities. The childlike creativity and curiosity of these "minor people" transformed their so-called "drawbacks" -- i.e., their lack of funds, technology, and social status, and most importantly, their deviation from the norms of "adult" society - into their forte. The expressions of this new art thinks up new ways to use abandoned things, such as old legends and empty spaces, creating venues for communication. They include drawings that relay the action of intervention and the process of association, or which support the formation of individual affinity, as well as video artworks that use collections of fragments that float to the surface and create a complete picture of a living being or personal character, in order to depict the continued and complicated nature of the everyday.
Micropop represents an attitude that expresses the efforts of individuals, in the final stage of post-modern culture, to find a way to survive. It is a mode of resistance to a process of growing inhumanity that began in the 1960s, and which now seems to have reached its extreme limits. By treating the disadvantageous conditions of those in a "minor" position as the unique foundation for a creative method, the people of Micropop have broadened the possibilities of renewing our sensation, and giving rebirth to the values of the world in which humans live.(강조는 인용자)
2015년 9월 12일 토요일
얼마만큼 비판할 수 있을까
서구 비판적 미술은 이렇게 흘러간다. 자 예술로 혁명을 해보자!(아방가르드) 아..그런데 해보니 예술을 포함해, 제도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네? 제도-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해체하자!(네오아방가르드) 그런데 지금은 제도 없으면 예술 자체가 성립이 안되네? 그렇다면 제도 안에서 제도를 바꿔보자!(뉴인스티튜셔널리즘 등) 그런데 바뀔 생각을 안하네? 멘붕...아니면 새로운 제도를 자유롭게 상상이라도 해보자!(관계미학)--상상만... 그와중에 예술은 감각적인 것을 재분배하는 힘이 있으니 우리의 희망입니다.(랑시에르)--그거 우리 맨날 해오던 건데 이 꼴이자나...
한국에서 아방가르드와 네오아방가르드가 있었다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만, 확실히 현시점에서 제도가 없으면 창작행위를 지속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문화재단 지원사업 개편, 서울시립의 일련의 전시 같은 것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것 같다.
하지만 이건 굉장히 의심스럽다. 그들은 제도가 변화하길 원하지만 근본적으로 바뀌길 원하지 않는다. 어떤 차원에서는 굉장히 제도 다운 제도를 요청한다. 예컨대 개념 정의에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식이다: 미술관은 미술관 다워야 하고 미술은 미술다워야 한다. 혹은 어떤 사람들은 제도가 무한대로 확장되길 원한다: 미술관이 이것저것 다 포용해야 한다는 식...
이 말이 꼭 틀렸다곤 볼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다. 제도는 비제도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내줄 준비가 되어있는가? 만약 제도가 어떤 변화를 시도한다면 어떤 이유에서? 당연히 제도 그 자신을 위해서다. 그런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안전한만큼만 그 비판을 수용해 다음 버전으로 갱신된다.
이런 견지에서 미술관의 정상화 같은 가능할 법한 일에 대한 요청/비판은 사회운동 차원에서 분명히 시도될 수 있고 그래야 하겠지만, 사실 가장 근본적인 비판은 아니다. 근본적인 비판은 가장 불가능한 것, 제도가 가장 수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말하기다. 여기엔 대안이 없다. 하지만 반드시 말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예술 작품 그 자체로부터 나와야 한다.
2015년 9월 11일 금요일
David Joselit, Against Representation, In conversation with David Andrew Tasmam
During February and March of 2015, David Andrew Tasman met with David Joselit to discuss his
recent essays, “Material Witness” and “The Art Effect,” as well as the tragic death of Eric Garner, the
limits of institutional critique, and art’s capacities beyond representation.
The Art Effect (2014): http://www.aucegypt.edu/GAPP/CairoReview/Pages/articleDetails.aspx?aid=614
Material Witness (2015): http://theorytuesdays.com/wp-content/uploads/2015/01/Material-Witness-Visual-Evidence-Joselit.pdf
David Andrew Tasman: In your recent essay in Artforum, “Material Witness,” you articulate the outrage many of us have felt in light of ongoing U.S discrimination and police brutality, contextualizing recent events to reflect on visual politics. Is your recommendation to be “skeptical of the ideological promises of representation,” in regards to the video of Eric Garner’s murder, an indictment of image or format?
David Joselit: To assess the efficacy of an image requires a definition of what we mean by success. I’ve been dismayed by the claims for image effects that seem exorbitant while also missing what an image can actually do. In the case of the video showing Garner being assaulted, the fact that his choking was recorded but didn’t lead to the outcome expected — namely, an indictment of the police officer involved — is an instance of the difference between what an image seems to show and what it can actually do. Art can occupy that space. What I define as a “format” in After Art is a strategy for activating the space between what an image shows and what an image does. Thinking about the real-world effects of images, including art images, results in two questions. Are images doing what you want them to do in a particular context? And, if they aren’t, does their format become increasingly relevant? The artwork almost always contains vestiges of what might be called the roots — or infrastructural extensions — of its entanglements in the world. These might include the means of production of the image, the human effort that brought it into being, its mode of circulation, the historical events that condition it, etc. The artwork’s format solidifies and makes visible that connective tissue, reinforcing the idea that the work of art encompasses both an image and its extensions. The term format does not merely distinguish between digital vs. analog, as medium might do, but points to how an image is situated within a set of relations that condition how efficacious it may be. Formats attract attention and exercise power. The difference between format and medium lies largely in the heterogeneity of the components — aesthetics, data, history, the scene of an action — which is anathema to traditional concepts of medium. When Bruno Latour talks about assemblages, he is talking about linkages — not the abstract infinity of a network. It’s difficult to quantify the limits of extension, for instance, one must think about what is folded into images as well as what extends out from them.
DAT: In your essay “Material Witness,” as one strategy to increase the legibility of these extensions, you cite Eyal Weizmann and Anselm Franke’s interest in Quintilian’s concept of “the mediated speech of inanimate objects.” Is this concept a critique of Bruno Latour’s “Parliament of Things,” or New Materialism and Post-humanism, in support of Vibrant Matter, Biopolitics, and Speculative Realism?
DJ: Well, these theories are complex, quite diverse and often contradictory in their positions. What I think they do share, however, is an effort to understand the agency of objects (politically, socially, materially), and a commitment to de-centering the importance of human perception in conceiving of the world. One of the important things I take away from this is that we need to change our habit of thinking that art objects stand for something else; that their primary function is to represent. Instead, these objects act in various ways, including provoking future events or effects. Representing is always retrospective: something has to pre-exist the art object in order to be re-presented. I think art’s special capacity is, on the contrary, its futurity.
DAT: How might this paradigm shift inflect modes of cultural production or the politics of art? Is there a wish for these kinds of actions to spill over outside of the art context?
DJ: I’ve changed my opinion on that quite a bit over time. When art moves outside of its own context it loses some of the power that is sustained through its connection to art institutions. The desire to go outside that context is also an implicit statement that the art world isn’t a place where power relations exist in a material way. In After Art, I argued that, while the art world in fact shouldn’t be elided with the world of enterprise or politics, it is in fact a realm of enormous cultural and economic power. Paradoxically, it seems to me that standard Institutional Critique has all but drifted away from engaging with the terms of the actual institutions that support art right now — in part because such critique has found such a welcome place in museums and galleries. The most potent examples I can recall in recent years have interrogated the conditions of labor for art handlers, or for the builders of museums and universities in the Persian Gulf. I wonder if a more productive mode than Institutional Critique is what the DIS collective is doing — which is to mobilize a potentially new model instead of critiquing existing ones. That seems to me ultimately where the future lies.
DAT: The line between transparency and opacity may in fact be a gradient: on the one hand transparency seems to operate within a sort of journalistic critical method, while opacity potentially operates within a mobilized form of communication or action. You conclude “Material Witness” with some doubts that the forensic image will be able to speak, coupled with a sanguine reference to Stefano Harney and Fred Moten’s concept of “the undercommons,” described in their 2013 eponymous book on one occasion as a space where, “the aim is not to support the general antagonism but to experiment its informal capacity.” What role can art have in, or learn from, the “undercommons”?
DJ: Since the rise of identity politics and its important achievements of the 1990s, and later through the writing of Jacques Rancière, there has been a strong association between visibility — or becoming visible — and political claims. Harney and Moten argue for the use-value of remaining outside of representation (and incidentally, so has Hito Steyerl in some of her recent works and writings). There are a lot of opaque spaces that art has the capacity to indicate and activate. Since right now almost anything can be monetized or rendered as information, we are all harvested and profiled as information-capital. Occlusions and opacities might be a means of protecting oneself from such economic forms of alienability or alienation. I think your term gradient is very helpful in this regard. The gradient of consumability is a powerful differential at a moment where the primary goal of a neoliberal system is to make things easy to consume; I think that art can forestall or at least slow down such easy consumption.
DAT: In your recent piece, “Art Effects” for The Cairo Review you present flickers of optimism in your assurance that art may also “participate in the formation of civil society […] putting into form new spaces of public interaction.” Do you see a similarity between the space described in Ariella Azoulay’s “citizenry of photography” and Harney and Moten’s “undercommons?”
DJ: Yes. I think that art has always been able to constitute spaces and publics that were not necessarily anticipated by its makers or commissioners — this is part of what I mean by art’s futurity. I think that seeing images of Apartheid, for instance, made a huge difference in mobilizing opposition to that system outside of South Africa. South African photographers addressed not just their own communities through their work, but the world, and this allowed pressure to be exerted from outside. If we live more and more in images, images attain more and more new powers. The question is how to experiment with such power, how to learn to use it for something other than accumulating capital.
The Art Effect (2014): http://www.aucegypt.edu/GAPP/CairoReview/Pages/articleDetails.aspx?aid=614
Material Witness (2015): http://theorytuesdays.com/wp-content/uploads/2015/01/Material-Witness-Visual-Evidence-Joselit.pdf
David Andrew Tasman: In your recent essay in Artforum, “Material Witness,” you articulate the outrage many of us have felt in light of ongoing U.S discrimination and police brutality, contextualizing recent events to reflect on visual politics. Is your recommendation to be “skeptical of the ideological promises of representation,” in regards to the video of Eric Garner’s murder, an indictment of image or format?
David Joselit: To assess the efficacy of an image requires a definition of what we mean by success. I’ve been dismayed by the claims for image effects that seem exorbitant while also missing what an image can actually do. In the case of the video showing Garner being assaulted, the fact that his choking was recorded but didn’t lead to the outcome expected — namely, an indictment of the police officer involved — is an instance of the difference between what an image seems to show and what it can actually do. Art can occupy that space. What I define as a “format” in After Art is a strategy for activating the space between what an image shows and what an image does. Thinking about the real-world effects of images, including art images, results in two questions. Are images doing what you want them to do in a particular context? And, if they aren’t, does their format become increasingly relevant? The artwork almost always contains vestiges of what might be called the roots — or infrastructural extensions — of its entanglements in the world. These might include the means of production of the image, the human effort that brought it into being, its mode of circulation, the historical events that condition it, etc. The artwork’s format solidifies and makes visible that connective tissue, reinforcing the idea that the work of art encompasses both an image and its extensions. The term format does not merely distinguish between digital vs. analog, as medium might do, but points to how an image is situated within a set of relations that condition how efficacious it may be. Formats attract attention and exercise power. The difference between format and medium lies largely in the heterogeneity of the components — aesthetics, data, history, the scene of an action — which is anathema to traditional concepts of medium. When Bruno Latour talks about assemblages, he is talking about linkages — not the abstract infinity of a network. It’s difficult to quantify the limits of extension, for instance, one must think about what is folded into images as well as what extends out from them.
DAT: In your essay “Material Witness,” as one strategy to increase the legibility of these extensions, you cite Eyal Weizmann and Anselm Franke’s interest in Quintilian’s concept of “the mediated speech of inanimate objects.” Is this concept a critique of Bruno Latour’s “Parliament of Things,” or New Materialism and Post-humanism, in support of Vibrant Matter, Biopolitics, and Speculative Realism?
DJ: Well, these theories are complex, quite diverse and often contradictory in their positions. What I think they do share, however, is an effort to understand the agency of objects (politically, socially, materially), and a commitment to de-centering the importance of human perception in conceiving of the world. One of the important things I take away from this is that we need to change our habit of thinking that art objects stand for something else; that their primary function is to represent. Instead, these objects act in various ways, including provoking future events or effects. Representing is always retrospective: something has to pre-exist the art object in order to be re-presented. I think art’s special capacity is, on the contrary, its futurity.
DAT: How might this paradigm shift inflect modes of cultural production or the politics of art? Is there a wish for these kinds of actions to spill over outside of the art context?
DJ: I’ve changed my opinion on that quite a bit over time. When art moves outside of its own context it loses some of the power that is sustained through its connection to art institutions. The desire to go outside that context is also an implicit statement that the art world isn’t a place where power relations exist in a material way. In After Art, I argued that, while the art world in fact shouldn’t be elided with the world of enterprise or politics, it is in fact a realm of enormous cultural and economic power. Paradoxically, it seems to me that standard Institutional Critique has all but drifted away from engaging with the terms of the actual institutions that support art right now — in part because such critique has found such a welcome place in museums and galleries. The most potent examples I can recall in recent years have interrogated the conditions of labor for art handlers, or for the builders of museums and universities in the Persian Gulf. I wonder if a more productive mode than Institutional Critique is what the DIS collective is doing — which is to mobilize a potentially new model instead of critiquing existing ones. That seems to me ultimately where the future lies.
DAT: The line between transparency and opacity may in fact be a gradient: on the one hand transparency seems to operate within a sort of journalistic critical method, while opacity potentially operates within a mobilized form of communication or action. You conclude “Material Witness” with some doubts that the forensic image will be able to speak, coupled with a sanguine reference to Stefano Harney and Fred Moten’s concept of “the undercommons,” described in their 2013 eponymous book on one occasion as a space where, “the aim is not to support the general antagonism but to experiment its informal capacity.” What role can art have in, or learn from, the “undercommons”?
DJ: Since the rise of identity politics and its important achievements of the 1990s, and later through the writing of Jacques Rancière, there has been a strong association between visibility — or becoming visible — and political claims. Harney and Moten argue for the use-value of remaining outside of representation (and incidentally, so has Hito Steyerl in some of her recent works and writings). There are a lot of opaque spaces that art has the capacity to indicate and activate. Since right now almost anything can be monetized or rendered as information, we are all harvested and profiled as information-capital. Occlusions and opacities might be a means of protecting oneself from such economic forms of alienability or alienation. I think your term gradient is very helpful in this regard. The gradient of consumability is a powerful differential at a moment where the primary goal of a neoliberal system is to make things easy to consume; I think that art can forestall or at least slow down such easy consumption.
DAT: In your recent piece, “Art Effects” for The Cairo Review you present flickers of optimism in your assurance that art may also “participate in the formation of civil society […] putting into form new spaces of public interaction.” Do you see a similarity between the space described in Ariella Azoulay’s “citizenry of photography” and Harney and Moten’s “undercommons?”
DJ: Yes. I think that art has always been able to constitute spaces and publics that were not necessarily anticipated by its makers or commissioners — this is part of what I mean by art’s futurity. I think that seeing images of Apartheid, for instance, made a huge difference in mobilizing opposition to that system outside of South Africa. South African photographers addressed not just their own communities through their work, but the world, and this allowed pressure to be exerted from outside. If we live more and more in images, images attain more and more new powers. The question is how to experiment with such power, how to learn to use it for something other than accumulating capital.
2015년 9월 10일 목요일
벤야민, 수집가, 아케이드프로젝트 중에서
다음의 인용은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쓴 <북해에서의 항해>에서 오래된 매체 개념을 재활용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로 긴밀히 사용되는 부분:
'실내, 흔적'에 관해 쓴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다른 장에서 벤야민은 실내와 장식이 서구 초기 부르주아의 어떤 소외와 관련이 있다고 쓴다. 그래서 상기 인용에서도 수집가는 "자아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한' 수집가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쓴다. 이 진정한 수집은 사물에 다른 방식으로 완전성--즉 아우라를 주입하는 수집가의 어떤 능력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부르주아의 실내 장식은 진정한 수집이 아니다.) 수집으로 아우라는 (세속적인) 가까이 있는 것(proximity)으로 떠오른다. 벤야민은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인 고찰"이라고 썼다. 벤야민이 수집에 관해 이렇게 통찰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텍스트에 관한 훌륭한 수집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하나의 수집 프로젝트며, 그런 한 벤야민은 이것을 정치적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
상기 인용은 수집가 Vs. 알레고리가에 관한 설명. 하지만 수집가가 어떤 완전한 마술적 백과사전을 이룬다고 할 지라도 그것이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비밀스럽게 수집가는 알레고리가라고 주장. 한편 알레고리가는 어떤 사물로 다른 사물을 대체하는 것이 장기이지만 알레고리가가 사물의 의미를 제대라 모르는 이상 그 사물 자체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알레고리가는 사물을 계속 수집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어떤 덕후가 금발벽안 피규어를 완벽하게 수집했다고 했을 때, 정말 그런지는 확인 할 길도 없으며 새로운 피규어가 지금도 나오고 있는 이상 그럴 가능성도 없다. 언젠가 수집하지 못한 무언가는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완벽 수집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한편 금발벽안이 트랜드일 때 구입했던 얼리아답터는 금발벽안의 묘미를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계속해서 적안흑발, 흑안적발 같은 새로운 피규어를 사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얼리아답터 또한 어떤 데이터베이스를 계속해서 끌어모으는 수집가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골동품 수집가는 계속해서 체계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 얼리아답터가 되어야 하며, 얼리아답터는 어떤 것도 제대로 만족하며 사용해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만족을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수집해야 한다.
한편 포스터는 크렉 오웬스식의 알레고리적 충동과 아카이브적 충동 사이에도 선을 긋는다. 길게 설명하지 않지만, 오웬스의 알레고리적 충동은 모든 것을 무질서하게 파편화시킴으로써 "저자적 상징의 총체"에 저항했다. 하지만 아카이브적 충동은 (이것이 상식적이진 않을지라도) 새로운 질서를 제안하는 "접속으로의 의지"이며 그것을 위해 무질서한 파편을 취한다.
포스터는 이런 예술가상을 편집증자에 비유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편집증자는 불길하게 같아 보이는 세상에 의미를 투사하려고 노력하는데, 이때 포스터가 보기에 편집자로서의 아카이브 미술가가 질서를 투사하는 배경에는 어떤 문화적 실패가 근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실패는 다름아닌 "유토피아적 차원"이다. 포스터는 묻는다. "만약 사물이 원초적 장소와 지독하게 분리된 것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접속이 그렇게 열병적인 이유가 있을까?"(Foster, p. 22.)
따라서 포스터는 아카이브적 미술이 "구축적 장소", 즉 땅 위에서 무엇을 짓는 유토피아적인 것이라고 쓴다. 이것은 그가 얼마 전에 지지했던 "발굴적 장소", 그러니까 역사 안에 침잠하는 어떤 트라우마적인 것과 상당히 대비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포스터는 이 글에서 벤야민을 언급하지 않는다. 아마 알레고리적 충동을 지지하면서 벤야민을 그토록 써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_-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터의 아키비스트로서의 예술가상은 벤야민의 수집가와 많이 겹친다. 알레고리가와 대비되는, 자신만의 백과사전을 구축하려고 하는 '진정한' 수집가 말이다. (물론 이건 완수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안의 '충동'일 뿐이다.)
하지만 내 불만은 이런 것이다. 이런 방식은 역사를 쓰는 작업에서 아주 흔한 것이며 미술관 급과 큐레이터들은 항상 해왔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별 특별할 것이 없다. 여기에 아카이브란 생소한 말을 사실 붙일 필요도 크게 없다. (포스터도 아키비스트로서의 예술가는 큐레이터로서의 예술가와 같은 의미라고 말한다. 즉 큐레이터는 아카이빙을 늘상 하고 있단 이야기. 단, 제도적이고 관습적인 차원에서 그렇단 것인데 내 생각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너무 미술관 싫어하는 듯...)
아카이브란 말을 유행시킨 포스터가 이 말을 쓴 이유는 작품 비평을 위해서였다. 데이터베이스의 세례를 받는 세계가 도래하면서 알레고리적 충동으로 설명되지 않는, 레디메이드 데이터베이스를 매체 삼아 어떤 가상적 결과물을 직조해내는 예술가(포스트프로덕션에 익숙한 프로듀서로서의 예술가)가 출현했고, 할 포스터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새로운 모델(더욱더 촉각적인, 아키비스트로서의 예술가)을 만들어낸 것 같다. 하지만 한국 미술계에서 아카이브란 말은 단지 자료전을 뜻하기 위해 더욱 많이 쓰인다.
틀렸다곤 볼 수 없겠지만 조금 이상하다. 마땅히 예술가와 작업에 먼저 쓰여야할 미술 용어가 제도적 차원에 더욱 적용되고 있다니 말이다. 물론 아카이브적 충동이 "제도적"이고 "입법적"인 이상 제도 기관과 친밀함을 보여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리고 아키비스트로서의 예술가의 원형은 어쩌면 큐레이터인 것도 맞다. 하지만 제도 기관으로서 미술관과 그에 부속된 큐레이터의 창조 행위란 의심스럽게 그지 없다. 주어진 제도는 그 제도의 경계를 넘지 못하기 때문에 제도다.
두 가지 가정이 있을 수 있다. 첫째, 한국에는 '아카이브적 충동'으로 해석될 만한 작업이 별로 없다. 둘째, 한국에서 창조적 행위와 권력은 예술가에서 제도적 수준으로 넘어가버렸다. 첫째 가정은 일단 선후관계가 틀렸다. 작업이 먼저 있고 해석이 있는 것이다. 아카이브적 충동이 먼저 나올 이유가 없다. 하지만 또한 아카이브적 작업이 없다는 것도 상상은 안된다.
둘째 가정은 과장되었지만 의미심장하다. 개인전보다 기획전--과장하자면 비엔날레--이 제대로된 대접을 받는다. 어떤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인지가 어떤 전시의 인장 역할을 한다. 작업보다 공간의 이름이 넘친다. 지원 제도 없이는 전시를 하지 못하는 작가와 공간이 수두루빽빽하다. 등등... 알아주지 않아도 자생자족하면서 그 나름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그런 방식의 문화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 제도들이 미술의 조건을 지탱하고 있다. 반대로 말해 이런 조건이 없는 현재의 미술계란 상상이 거의 불가하다.
"수집에 있어 결정적인 것은 사물이 본래의 모든 기능에서 벗어나 그것과 동일한 사물들과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긴밀하게 관련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는 유용성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며, 완전성이라는 주목할 만한 범주에 속하게 된다. 이러한 '완전성'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현존이라는 사물의 완전히 비합리적인 성격을 새로운,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역사적 체계 속에 배치시킴으로써, 즉 수집을 통해 극복하려는 장대한 시도이다. 그리고 진정한 수집가에게 있어 이 체계 속에 들어 있는 하나하나의 사물은 어떤 시대, 지역, 산업이나 원래의 소유자에 관한 만학의 백과사전이 된다. 마지막 전율(취득되는 데 대한 전율)이 한 사물을 빠져나가는 가운데 사물이 응고되는 순간 특정한 물건을 하나의 마법의 원(magic circle: 마법진을 말하는듯) 안에 봉해버리는 것이야말로 수집가가 가장 깊숙이 마술에 홀리는 순간이다. ... 그는 자아를 잊어버렸다. 이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지푸라기라도 하나 붙잡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그의 감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의 바다에서 그가 지금 바로 손에 넣은 수집품이 하나의 섬처럼 더오르는 것이다--수집은 실천적인 상기의 한 형식이며 '가까이 있는 것'의 온갖 세속적인 현현 중에서 가장 구속력이 강한 현현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인 고찰은 아무리 사소한 종류의 것이라도 골동품 거래에서 신기원을 여는 것이 된다."(533쪽)
'실내, 흔적'에 관해 쓴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다른 장에서 벤야민은 실내와 장식이 서구 초기 부르주아의 어떤 소외와 관련이 있다고 쓴다. 그래서 상기 인용에서도 수집가는 "자아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한' 수집가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쓴다. 이 진정한 수집은 사물에 다른 방식으로 완전성--즉 아우라를 주입하는 수집가의 어떤 능력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부르주아의 실내 장식은 진정한 수집이 아니다.) 수집으로 아우라는 (세속적인) 가까이 있는 것(proximity)으로 떠오른다. 벤야민은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인 고찰"이라고 썼다. 벤야민이 수집에 관해 이렇게 통찰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텍스트에 관한 훌륭한 수집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하나의 수집 프로젝트며, 그런 한 벤야민은 이것을 정치적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
"수집가의 가장 비밀스러운 동기는 아마 이렇게 표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분산에 맞서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 [반면에] 알레고리가는 말하자면 수집가의 대극을 이루고 있다. 알레고리가는 각각의 사물들이 어떤 유사성을 갖고 있으며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을 통해 사물을 해명하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 이와 반대로 수집가는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로 결합시킨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수집가 속에는 알레고리가가 숨어 있게 마련이며, 모든 알레고리가 속에는 수집가가 숨어 있게 마련이다. 수집가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의 수집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단 한 조각이라도 결여되어 있으면 그가 수집해온 모든 것은 이러한 패치워크에 머문다. 다른 한편 알레고리가에게 사물들이란 사정에 정통한 사람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런 사전의 표제어에 불과하므로 그는 어떤 사물을 수집해도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침잠해서 사유하는 것을 통해 사물들 하나하나에게마다 어떤 의미를 반환하도록 요구할 수 있을지는 어떤 반성으로도 예견될 수 없는 것인 만큼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의 자리를 대신할 가능성은 그만큼 적기 때문이다."(546-547쪽)
상기 인용은 수집가 Vs. 알레고리가에 관한 설명. 하지만 수집가가 어떤 완전한 마술적 백과사전을 이룬다고 할 지라도 그것이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비밀스럽게 수집가는 알레고리가라고 주장. 한편 알레고리가는 어떤 사물로 다른 사물을 대체하는 것이 장기이지만 알레고리가가 사물의 의미를 제대라 모르는 이상 그 사물 자체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알레고리가는 사물을 계속 수집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어떤 덕후가 금발벽안 피규어를 완벽하게 수집했다고 했을 때, 정말 그런지는 확인 할 길도 없으며 새로운 피규어가 지금도 나오고 있는 이상 그럴 가능성도 없다. 언젠가 수집하지 못한 무언가는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완벽 수집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한편 금발벽안이 트랜드일 때 구입했던 얼리아답터는 금발벽안의 묘미를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계속해서 적안흑발, 흑안적발 같은 새로운 피규어를 사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얼리아답터 또한 어떤 데이터베이스를 계속해서 끌어모으는 수집가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골동품 수집가는 계속해서 체계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 얼리아답터가 되어야 하며, 얼리아답터는 어떤 것도 제대로 만족하며 사용해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만족을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수집해야 한다.
*
벤야민의 수집가의 아이디어는 곧 바로 동시대 미술에서 주류의 형태로 떠오른 아카이브적 미술로 연결된다. 할 포스터는 <아카이브적 충동>에서 포스트모던 알레고리 충동과 구분해서 동시대 미술에서 나타나는 아카이브적 충동을 주목한 바 있다. 그는 데이터베이스 미술--인터넷이란 메가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하는 가상적 레디메이드로서의 예술--과 아카이브적 예술 사이에 선을 긋는다. 그는 데이터베이스 미술이 철저히 가상적이라면 아카이브적 예술은 촉각적이고 면 대 면의 방식이라고 한다. 데이터베이스 예술이 다루기 쉬운 재료를 쉽게 가공해서 재조합하는 예술이라면, 아카이브적 미술의 재료들은 다루기 힘든, 대체물을 생각할 수 없는 파편들이다.한편 포스터는 크렉 오웬스식의 알레고리적 충동과 아카이브적 충동 사이에도 선을 긋는다. 길게 설명하지 않지만, 오웬스의 알레고리적 충동은 모든 것을 무질서하게 파편화시킴으로써 "저자적 상징의 총체"에 저항했다. 하지만 아카이브적 충동은 (이것이 상식적이진 않을지라도) 새로운 질서를 제안하는 "접속으로의 의지"이며 그것을 위해 무질서한 파편을 취한다.
포스터는 이런 예술가상을 편집증자에 비유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편집증자는 불길하게 같아 보이는 세상에 의미를 투사하려고 노력하는데, 이때 포스터가 보기에 편집자로서의 아카이브 미술가가 질서를 투사하는 배경에는 어떤 문화적 실패가 근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실패는 다름아닌 "유토피아적 차원"이다. 포스터는 묻는다. "만약 사물이 원초적 장소와 지독하게 분리된 것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접속이 그렇게 열병적인 이유가 있을까?"(Foster, p. 22.)
따라서 포스터는 아카이브적 미술이 "구축적 장소", 즉 땅 위에서 무엇을 짓는 유토피아적인 것이라고 쓴다. 이것은 그가 얼마 전에 지지했던 "발굴적 장소", 그러니까 역사 안에 침잠하는 어떤 트라우마적인 것과 상당히 대비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포스터는 이 글에서 벤야민을 언급하지 않는다. 아마 알레고리적 충동을 지지하면서 벤야민을 그토록 써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_-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터의 아키비스트로서의 예술가상은 벤야민의 수집가와 많이 겹친다. 알레고리가와 대비되는, 자신만의 백과사전을 구축하려고 하는 '진정한' 수집가 말이다. (물론 이건 완수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안의 '충동'일 뿐이다.)
*
한국 미술계에서도 아카이브란 말이 떠돈지 이제 몇년 된 것 같다. 대부분 특정한 전시 형식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예컨대 안젤름 프랑케의 <애니미즘>이나 박해천의 <다음문장을 읽으시오>.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연 몇몇 전시가 그렇다. 물론 이것이 흘러간 역사를 모아서 각주를 다는 일인 이상 <아케이드프로젝트>에서 벤야민이 한 작업과 같은 수준에서 이야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내 불만은 이런 것이다. 이런 방식은 역사를 쓰는 작업에서 아주 흔한 것이며 미술관 급과 큐레이터들은 항상 해왔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별 특별할 것이 없다. 여기에 아카이브란 생소한 말을 사실 붙일 필요도 크게 없다. (포스터도 아키비스트로서의 예술가는 큐레이터로서의 예술가와 같은 의미라고 말한다. 즉 큐레이터는 아카이빙을 늘상 하고 있단 이야기. 단, 제도적이고 관습적인 차원에서 그렇단 것인데 내 생각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너무 미술관 싫어하는 듯...)
아카이브란 말을 유행시킨 포스터가 이 말을 쓴 이유는 작품 비평을 위해서였다. 데이터베이스의 세례를 받는 세계가 도래하면서 알레고리적 충동으로 설명되지 않는, 레디메이드 데이터베이스를 매체 삼아 어떤 가상적 결과물을 직조해내는 예술가(포스트프로덕션에 익숙한 프로듀서로서의 예술가)가 출현했고, 할 포스터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새로운 모델(더욱더 촉각적인, 아키비스트로서의 예술가)을 만들어낸 것 같다. 하지만 한국 미술계에서 아카이브란 말은 단지 자료전을 뜻하기 위해 더욱 많이 쓰인다.
틀렸다곤 볼 수 없겠지만 조금 이상하다. 마땅히 예술가와 작업에 먼저 쓰여야할 미술 용어가 제도적 차원에 더욱 적용되고 있다니 말이다. 물론 아카이브적 충동이 "제도적"이고 "입법적"인 이상 제도 기관과 친밀함을 보여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리고 아키비스트로서의 예술가의 원형은 어쩌면 큐레이터인 것도 맞다. 하지만 제도 기관으로서 미술관과 그에 부속된 큐레이터의 창조 행위란 의심스럽게 그지 없다. 주어진 제도는 그 제도의 경계를 넘지 못하기 때문에 제도다.
두 가지 가정이 있을 수 있다. 첫째, 한국에는 '아카이브적 충동'으로 해석될 만한 작업이 별로 없다. 둘째, 한국에서 창조적 행위와 권력은 예술가에서 제도적 수준으로 넘어가버렸다. 첫째 가정은 일단 선후관계가 틀렸다. 작업이 먼저 있고 해석이 있는 것이다. 아카이브적 충동이 먼저 나올 이유가 없다. 하지만 또한 아카이브적 작업이 없다는 것도 상상은 안된다.
둘째 가정은 과장되었지만 의미심장하다. 개인전보다 기획전--과장하자면 비엔날레--이 제대로된 대접을 받는다. 어떤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인지가 어떤 전시의 인장 역할을 한다. 작업보다 공간의 이름이 넘친다. 지원 제도 없이는 전시를 하지 못하는 작가와 공간이 수두루빽빽하다. 등등... 알아주지 않아도 자생자족하면서 그 나름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그런 방식의 문화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 제도들이 미술의 조건을 지탱하고 있다. 반대로 말해 이런 조건이 없는 현재의 미술계란 상상이 거의 불가하다.
quotes from “Girls are dancin’”: shōjo culture and feminism in contemporary Japanese art
미소녀 작화의 역사 따위를 검색하려다가 이딴 걸 발견했다. Emily Wakeling이라는 분...현재 도쿄아트비트? 란 플랫폼에 리뷰도 올리고 그러시는 듯. 뭐 논문이라기보단 비평 쪽에 가까운 것 같은데 그냥 읽은 김에 기록. 석사논문인 것 같다. Jennifer Baumgardner 같은 사람의 언급이 키인데...한 번 읽어보고 싶긴 하다.
source: http://pdf.jpf-sydney.org/newvoices/5/chapter6.pdf
"Found throughout the practices of many young Japanese artists, the shōjo motif is key to understanding some of Japan’s best recent contributions to contemporary feminist art. . . . The Japanese term “shōjo” is particularly useful to gender discussions of the Japanese girl. It is a way of referring to someone as feminine, but with a distinct suggestion of youth. Kotani Mari defines shōjo as the ‘juvenile existence....prior to the adoption of adult femininity’.7 The shōjo is ‘free and arrogant, unlike meek and dutiful musume [daughter] or pure and innocent otome [maiden]’.8 “Daughter” and “maiden” both suggest the presence of a male authority in determining the girl’s identity, while the concept of shōjo has neither of these connections."(p. 130-131.)
"Writers such as the widely quoted Japanese sociologist Ôtsuka Eiji have shaped stereotypes by discussing the shōjo as representing ‘an exotic and longed-for world of individual fulfillment, decadence, consumption and play’.10 It is only in the closed world of shōjo culture that girls negate these wide-held stereotypes.
The exclusivity of shōjo culture is one reason why a shōjo’s gender transgressions are typically not a politically didactic public statement. The intriguing, even paradoxical politics evident in young Japanese women’s lives are a potent source of artistic critique. They are a generation who are described by feminist curator Kasahara Michiko as having little awareness or contact with women’s rights campaigns in comparison to their awareness of its very public backlash in the media.11 While “feminist” per se is not a widespread political allegiance for Japanese youth, some characteristics of shōjo culture share in common tactics found in contemporary - or what is called “third-wave” - feminism.
[...]
The shōjo motif is a distinct, recurring graphic figure found in many contemporary Japanese artists’ works within the last two decades. The artists chosen for mention in this article are far from the only current Japanese artists interested in the shōjo motif, but what differentiates them from others is their use of the shōjo motif in reference to the gender-transgressive expressions found in shōjo culture. A celebration of femininity and girlishness is one theme that overlaps in third-wave feminist thought and shōjo culture. By assembling arguments about the gender-transgressive nature of shōjo culture along with the prevalence of the shōjo motif in contemporary Japanese art, it is possible to contextualise the shōjo motif in the world stage of contemporary feminist art"(132)
...
shōjo 이미지를 폭력적으로 성적 대상화하는 두 인물: Aida Makoto, Araki
...
그리곤 지지할 만한 6인의 아티스트 소개. 이 아티스트는 그가 보기에 이 작가들은 아라키나 아이다 마코토완 다르게 접근함: "‘approaches to female gender and identity that have little in common with such objectifying and otherwise predominant tropes.'" 그리고 소녀(순정?) 이미지를 "the fantastic, girlish aesthetics or gender-transgressive concepts found in shōjo culture"--이런 방식으로 창조적으로 사용.
"Sandra Buckley declares “aaa, kawaiiiiii!” as the ‘rallying cry of the shôjo’. Although not exclusive to shōjo culture, kawaii (cute) finds a special place with youth and especially girls. When defining the phenomenon of kawaii and its role in contemporary Japanese art, Vartanian focuses on how it is not necessarily shallow because ‘cuteness, though ostensibly devoid of irony, does not negate darkness, and can in fact be a means to accessing darkness, as characters become loci of emotion and identification’."(134; 강조 인용자)
1. Aoshima Chiho
"Aoshima Chiho, in a sense, illustrates Vartanian’s speculations. Through a cute aesthetic (which can double as a shōjo aesthetic), including girls with big doe-eyes and small faces, she makes the shōjo’s body cute as well as ugly, abject, scary, funny or epic. . . . The physical transgressions and abject presentations challenge what is cute and beautiful about the objectified shōjo, and Aoshima makes this point via a flowery, cute shōjo aesthetic."(134-135)
2. Kunikata Mahomi
"[쿠니카타는] ... …expresses the fantasies of the adolescent feminine unconscious but gives them violent forms….Kunikata adopts their sadomasochism but intensifies the nightmarish atmosphere by placing her adolescent characters in violent situations that involve murder, beheadings, cannibalism, and disintegration. Her works evoke both the horror of losing one’s identity and the erotic pleasure of such submission."
"Aida Makoto, introduced before, is an artist troubled by questions about sex and exploitation,26 but instead of seeking a visual language outside of dominant patriarchal culture, his art exaggerates and sensationalises his own powerful position as a man. Similarly, Kunikata’s shōjo are often bleeding, in pain, or dying, but this is where their commonalities stop. In contrast, Kunikata foregrounds the shōjo’s psychological state, and her personal anxieties. Kunikata makes critique by expressing her own seemingly powerless position as shōjo."
3. Takano Aya
"Takano Aya’s paintings and drawings refer to the girl-only spaces imagined in shōjo culture combined with her inspiration from science fiction. As a Micropop artist, and a self-confessed science-fiction fan, Takano’s art is described by Matsui as works made by an ‘“adolescent” mind’.28 Placed in science-fiction backgrounds, Takano’s kawaii shōjo become like aliens. The artist often has her shōjo as ‘interstellar immigrants’,29 transiting through environments such as space, the sky, or underwater. . . . Contrasting the soft, thin bodies of the shōjo against the hyper-urban background shows the vulnerability and shock of these figures. There is a shape in the sky, perhaps a spaceship, which further suggests that they are fantastical aliens in this environment. . . . Takano visually refers to a fantasy (specifically, science-fiction) convention often found in shōjo manga and fictions. In Matsui’s words, Takano is a creator of ‘subversively feminine visions of Utopia’."
4. Sawada Tomoko
"Sawada Tomoko works with female identity in all its variable forms, including exploring the various signifiers for shōjo. She pushes definitions of what it is to be a selfportraitist through multiple acts of costume or role-play. At first glance, works such as School Days / A may look like an entire class of school-age shōjo and their teacher, but on closer inspection the faces, despite their different hair-cuts and expressions, have a certain sameness that suggests the masquerade that is actually happening: all figures are played by the artist. The School Days series brings up the essential role of schools to the formation of early shōjo culture and the hidden world of girls discussed by Kotani and Honda. . . . Sawada’s transformations are domestic in their scope—her focus is exclusively on the human, and more specifically, on her many, many variations of the feminine. In her Costume series, this transformation is achieved by changing her attire in each photograph to suit different jobs."
5. Yanagi Miwa
등등...
///
다음은 포스트/뉴페미니즘에 관한 설명. 여기서 전-여성적 단계로서의 소녀스러움이 굉장히 중요한 듯...
"While its definition is often contested, third-wave feminism has come to shape contemporary feminism and feminist art through its emphasis on concepts such as intersection, contradiction and self-conscious politics. Third-wave feminism is historicised by Carisa Showden as a discourse informed by various notions of “new feminisms”, or so-called postfeminism, neo-feminism, etc., that began emerging in the 1980s and found momentum at the start of the 1990s.43 The 1990s was a time when feminism’s interest in sexual and gender difference between men and women made way for ‘an emphasis on the differences among women’,44 shown by the popularity of referring to feminism as a plural, and best articulated with the terms second-wave versus thirdwave feminism. By the beginning of the 1990s many theorists and artists were revising how feminist discourses relate to and align with other social and cultural revolutions such as queer studies, anti-racism and the post-colonial movement. Showden describes third-wave politics as:
In Showden’s analysis of the politics behind the new feminisms, she focuses on postfeminism’s popularist role as the forerunner for so-called “girlie” or girl power feminism (the catch-cry for iconic 1990s pop group The Spice Girls). It is a movement described as ‘the best known and largest group of third wavers’.46 Girls, as opposed to women, have been embraced as a youth category as well as a state of mind in thirdwave feminism. The following is third-wave feminists Jennifer Baumgardner and Amy Richards’ definition of girlhood: ‘those grown women on Sex in [sic] the City who in their independence, their bonds with female friends, and their love of feminine fashion invoke a sense of eternal girlhood’.47 In a key third-wave text, Manifesta, girlie feminism is defined as consisting of feminist principles ‘based on a reclaiming of girl culture (or feminine accoutrements that were tossed out with sexism during the Second Wave), be it Barbie, housekeeping, or girl talk’.48 Jennifer Eisenhauer notes how, for a long time, the figure of the girl has been a ‘repeatedly othered subject within feminisms’,49 but in third-wave feminism girls are often positioned as the “daughters” of second-wave feminism. While reference to daughters (in English or Japanese) can imply the seniority of a father over his child, in the third-wave context she comes from a matriarchal lineage. Therefore, as well as being a critique of racial hegemony and Western bias, third-wave ‘came to be specifically associated with a “young” feminist generation’50 of self-described girls. Third-wave feminism is ideally positioned as the discourse for shōjo."(강조는 인용자)
결론: 포스트페미니즘은 '순정' 담론에 잘 맞다.
source: http://pdf.jpf-sydney.org/newvoices/5/chapter6.pdf
"Found throughout the practices of many young Japanese artists, the shōjo motif is key to understanding some of Japan’s best recent contributions to contemporary feminist art. . . . The Japanese term “shōjo” is particularly useful to gender discussions of the Japanese girl. It is a way of referring to someone as feminine, but with a distinct suggestion of youth. Kotani Mari defines shōjo as the ‘juvenile existence....prior to the adoption of adult femininity’.7 The shōjo is ‘free and arrogant, unlike meek and dutiful musume [daughter] or pure and innocent otome [maiden]’.8 “Daughter” and “maiden” both suggest the presence of a male authority in determining the girl’s identity, while the concept of shōjo has neither of these connections."(p. 130-131.)
"Writers such as the widely quoted Japanese sociologist Ôtsuka Eiji have shaped stereotypes by discussing the shōjo as representing ‘an exotic and longed-for world of individual fulfillment, decadence, consumption and play’.10 It is only in the closed world of shōjo culture that girls negate these wide-held stereotypes.
The exclusivity of shōjo culture is one reason why a shōjo’s gender transgressions are typically not a politically didactic public statement. The intriguing, even paradoxical politics evident in young Japanese women’s lives are a potent source of artistic critique. They are a generation who are described by feminist curator Kasahara Michiko as having little awareness or contact with women’s rights campaigns in comparison to their awareness of its very public backlash in the media.11 While “feminist” per se is not a widespread political allegiance for Japanese youth, some characteristics of shōjo culture share in common tactics found in contemporary - or what is called “third-wave” - feminism.
[...]
The shōjo motif is a distinct, recurring graphic figure found in many contemporary Japanese artists’ works within the last two decades. The artists chosen for mention in this article are far from the only current Japanese artists interested in the shōjo motif, but what differentiates them from others is their use of the shōjo motif in reference to the gender-transgressive expressions found in shōjo culture. A celebration of femininity and girlishness is one theme that overlaps in third-wave feminist thought and shōjo culture. By assembling arguments about the gender-transgressive nature of shōjo culture along with the prevalence of the shōjo motif in contemporary Japanese art, it is possible to contextualise the shōjo motif in the world stage of contemporary feminist art"(132)
...
shōjo 이미지를 폭력적으로 성적 대상화하는 두 인물: Aida Makoto, Araki
...
그리곤 지지할 만한 6인의 아티스트 소개. 이 아티스트는 그가 보기에 이 작가들은 아라키나 아이다 마코토완 다르게 접근함: "‘approaches to female gender and identity that have little in common with such objectifying and otherwise predominant tropes.'" 그리고 소녀(순정?) 이미지를 "the fantastic, girlish aesthetics or gender-transgressive concepts found in shōjo culture"--이런 방식으로 창조적으로 사용.
"Sandra Buckley declares “aaa, kawaiiiiii!” as the ‘rallying cry of the shôjo’. Although not exclusive to shōjo culture, kawaii (cute) finds a special place with youth and especially girls. When defining the phenomenon of kawaii and its role in contemporary Japanese art, Vartanian focuses on how it is not necessarily shallow because ‘cuteness, though ostensibly devoid of irony, does not negate darkness, and can in fact be a means to accessing darkness, as characters become loci of emotion and identification’."(134; 강조 인용자)
1. Aoshima Chiho
"Aoshima Chiho, in a sense, illustrates Vartanian’s speculations. Through a cute aesthetic (which can double as a shōjo aesthetic), including girls with big doe-eyes and small faces, she makes the shōjo’s body cute as well as ugly, abject, scary, funny or epic. . . . The physical transgressions and abject presentations challenge what is cute and beautiful about the objectified shōjo, and Aoshima makes this point via a flowery, cute shōjo aesthetic."(134-135)
2. Kunikata Mahomi
"[쿠니카타는] ... …expresses the fantasies of the adolescent feminine unconscious but gives them violent forms….Kunikata adopts their sadomasochism but intensifies the nightmarish atmosphere by placing her adolescent characters in violent situations that involve murder, beheadings, cannibalism, and disintegration. Her works evoke both the horror of losing one’s identity and the erotic pleasure of such submission."
"Aida Makoto, introduced before, is an artist troubled by questions about sex and exploitation,26 but instead of seeking a visual language outside of dominant patriarchal culture, his art exaggerates and sensationalises his own powerful position as a man. Similarly, Kunikata’s shōjo are often bleeding, in pain, or dying, but this is where their commonalities stop. In contrast, Kunikata foregrounds the shōjo’s psychological state, and her personal anxieties. Kunikata makes critique by expressing her own seemingly powerless position as shōjo."
3. Takano Aya
"Takano Aya’s paintings and drawings refer to the girl-only spaces imagined in shōjo culture combined with her inspiration from science fiction. As a Micropop artist, and a self-confessed science-fiction fan, Takano’s art is described by Matsui as works made by an ‘“adolescent” mind’.28 Placed in science-fiction backgrounds, Takano’s kawaii shōjo become like aliens. The artist often has her shōjo as ‘interstellar immigrants’,29 transiting through environments such as space, the sky, or underwater. . . . Contrasting the soft, thin bodies of the shōjo against the hyper-urban background shows the vulnerability and shock of these figures. There is a shape in the sky, perhaps a spaceship, which further suggests that they are fantastical aliens in this environment. . . . Takano visually refers to a fantasy (specifically, science-fiction) convention often found in shōjo manga and fictions. In Matsui’s words, Takano is a creator of ‘subversively feminine visions of Utopia’."
4. Sawada Tomoko
"Sawada Tomoko works with female identity in all its variable forms, including exploring the various signifiers for shōjo. She pushes definitions of what it is to be a selfportraitist through multiple acts of costume or role-play. At first glance, works such as School Days / A may look like an entire class of school-age shōjo and their teacher, but on closer inspection the faces, despite their different hair-cuts and expressions, have a certain sameness that suggests the masquerade that is actually happening: all figures are played by the artist. The School Days series brings up the essential role of schools to the formation of early shōjo culture and the hidden world of girls discussed by Kotani and Honda. . . . Sawada’s transformations are domestic in their scope—her focus is exclusively on the human, and more specifically, on her many, many variations of the feminine. In her Costume series, this transformation is achieved by changing her attire in each photograph to suit different jobs."
5. Yanagi Miwa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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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포스트/뉴페미니즘에 관한 설명. 여기서 전-여성적 단계로서의 소녀스러움이 굉장히 중요한 듯...
"While its definition is often contested, third-wave feminism has come to shape contemporary feminism and feminist art through its emphasis on concepts such as intersection, contradiction and self-conscious politics. Third-wave feminism is historicised by Carisa Showden as a discourse informed by various notions of “new feminisms”, or so-called postfeminism, neo-feminism, etc., that began emerging in the 1980s and found momentum at the start of the 1990s.43 The 1990s was a time when feminism’s interest in sexual and gender difference between men and women made way for ‘an emphasis on the differences among women’,44 shown by the popularity of referring to feminism as a plural, and best articulated with the terms second-wave versus thirdwave feminism. By the beginning of the 1990s many theorists and artists were revising how feminist discourses relate to and align with other social and cultural revolutions such as queer studies, anti-racism and the post-colonial movement. Showden describes third-wave politics as:
…a committed focus on intersectional identities and multilayered discrimination. While intersectionality is not itself a “politics”, it is an attempt to shift the epistemological standpoint of feminism, providing a new subject position from which feminist critique is articulated.45
In Showden’s analysis of the politics behind the new feminisms, she focuses on postfeminism’s popularist role as the forerunner for so-called “girlie” or girl power feminism (the catch-cry for iconic 1990s pop group The Spice Girls). It is a movement described as ‘the best known and largest group of third wavers’.46 Girls, as opposed to women, have been embraced as a youth category as well as a state of mind in thirdwave feminism. The following is third-wave feminists Jennifer Baumgardner and Amy Richards’ definition of girlhood: ‘those grown women on Sex in [sic] the City who in their independence, their bonds with female friends, and their love of feminine fashion invoke a sense of eternal girlhood’.47 In a key third-wave text, Manifesta, girlie feminism is defined as consisting of feminist principles ‘based on a reclaiming of girl culture (or feminine accoutrements that were tossed out with sexism during the Second Wave), be it Barbie, housekeeping, or girl talk’.48 Jennifer Eisenhauer notes how, for a long time, the figure of the girl has been a ‘repeatedly othered subject within feminisms’,49 but in third-wave feminism girls are often positioned as the “daughters” of second-wave feminism. While reference to daughters (in English or Japanese) can imply the seniority of a father over his child, in the third-wave context she comes from a matriarchal lineage. Therefore, as well as being a critique of racial hegemony and Western bias, third-wave ‘came to be specifically associated with a “young” feminist generation’50 of self-described girls. Third-wave feminism is ideally positioned as the discourse for shōjo."(강조는 인용자)
결론: 포스트페미니즘은 '순정' 담론에 잘 맞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