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27일 일요일

[스크랩] 박유하 선생의 페북 메모

박유하 선생의 페북 메모를 허락없이 스크랩했다. 모든 크리틱이 염두에 두어야 할 스스로의 자리에 관한 지침이란 점에서 두고두고 참고할만 하단 점에서 퍼왔다. 여기에 노정태씨가 답변할 수 있을까? 만약 한다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이 사람에 관해 일말의 존경심을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노정태씨의 고종석선생 비판에 대한 간단한 메모

박유하


1. 발화위치의 권력화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은 한국 여성'과 '백인 중산층 여성'의 격차에 대해 온전히 경험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사자로서 그 삶을 살아본 한국 여성뿐입니다."

<당사자주의>는 반만 올바르다. 당사자로서 볼 수 있는 (말할 수 있는)것이 있고, 거리(공간/시간/지식/사고력)를 동원해야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비당사자의 역할에는 구조를 파악하는 일도 있고 어느 한쪽이 특권화되면 권력이 된다.

2.발화되지 않는 발화의 간과
"앞서 제가 '지금까지의 맥락을 놓고 볼 때 HeForShe는 굉장히 이상한 프로젝트'라고 말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차이, 횡단, 교차, 가로지르기 등 9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페미니즘 혹은 젠더 연구 담론을 지배해온 용어들을 전혀 거론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젠더 범주들을 호명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일종의 금기어처럼 되어버렸던 '여성'이 복귀합니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꼭 정황이 고려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해나 곡해가 앞서는 경우 흔한)성급한 비판.
말하자면 여기에는 논의 "차원"의 차이의 문제가 있다. 한편에선 여성할례마저 존재하는 곳에서의 담론과 한국처럼 보기에 따라서는 여성상위처럼보이는 (그래서 역차별이라는 피해의식과 혐오마저 존재하는)공간에서의 담론은 다르거나 달라야 한다. 1이 아직 필요한 공간에서 3이 필요하다, 3도 모르냐고 비난하는 격.

3. 비판과 부정 사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남자 지식인들의 버릇이 잘못 들어 있습니다. 맥락에 따라서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성차별을 당할 수 있다는 식의 상대주의적 논변이 득세한 탓에, 정작 남자 지식인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지식을 달달 외울지언정 그것이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해버린 것 같습니다."

대상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대목. 경멸은 패기와 다르고 비난은 비판과 다르다. 노정태씨가 고정석선생의 "대머리"를 문제삼은 건 필연으로 보인다.

4. <선명성>에의 욕망
"3세대 페미니스트 중에서도 고종석 선생님의 이런 물타기성 발언에 대해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젠더 개념을 다각화하자는 것이지, 젠더가 폭력과 차별을 낳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 자체를 없는 셈 치자는 것이 아니니까요."

<물타기>라는 비난은 선명성에 대한 욕망이 때로 숙청, 혹은 그에 따른 권력의 선점을 욕망하기도 한다는 것을 잊게 만든다.

5."피해자간 차이"의 망각
"엠마 왓슨더러 '백인 중산층 여성'이라고 비난해봐야, 대한민국에서 여성은 남자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회적 차별을 감내하고 살아가기에, 많은 여성들은 선생님이나 저 같은 한국인 남자보다는 백인 중산층 여성에게 동질감을 느낄 가능성이 큽니다. "

그렇지 않은 여성들도 얼마든지 있다. 차별을 느끼지 않는 여성도 있고(존재여부와 상관없이) 반대로 가부장적 억압에 따르는 일로 남녀차이를 조장하는 "지적"여성들도 있다. 특히 후자는 민족적 결속을 더 중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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