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2일 수요일

서문의 정석

 반민수 Auction House: Bronke.. : 네이버블로그

반이정은 이런 글을 잘 쓴다. 전시서문의 정석..?

그나저나 반민수란 작가의 작업은 흥미롭다.

2025년 10월 21일 화요일

김어준의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어젠가 뉴스공장에서 김어준이 자신이 조만간 큰 공격을 받게될 것이고 여기에 대한 대비는 이미 10여년 전에 끝났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정준희와 인터뷰에서도 느낀 것인데 습관적으로 김어준은 '나는' '이런 사람이야' '그런 사람 아니야'라는 어법을 사용한다. 마치 이 부분은 일정 부분 이명박의 유명한 대선 주장 '나는 그런 삶을 사라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과 겹치면서도 (사건이 아닌 인물을 통해, 사실보다는 믿음을 전제해야 한다는 점에서) X세대 특유의 '나'라는 자의식이, 마치 '나'에 대한 드러냄을 '책임' 혹은 '진리'와 연결시키는 것 같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당연하게도 나를 드러냄이 곧 책임과 연결되지 않을 뿐더러 진리와 연결되지도 않는다. 

한국 동시대미술 비평의 맥락적 퀀텀점프

김장언(1) 김소라의 불 : 공(空)과 색(色) - PONG

미술사적으로 루샤와 나우먼의 불은 시각적으로 침묵의 발언과 사물의 소멸, 남겨진 것과 사라진 것, 순간과 영원이라는 의미에서 캘리포니아 개념미술가들의 비사회적(asocial) 혹은 냉소적 정치성을 함축하는 듯하다.[2] 이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오히려 직접적인 발언을 소거하는 침묵의 방식을 통해 시대의 폭력성에 응답하려는 역설적인 정치적 실천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압력에 대한 응답으로서, 어떤 사건을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그 불안의 공기를 무심히 태우고, 그 행위와 시간을 무덤덤하게 기록한다. 그들은 침묵했지만 불태웠으며, 우리는 그들의 뒤틀린 불을 추론해야 한다.

김소라의 전시, 《EMPTY》는 다소 특이점이 있다. 김소라는 6, 70년대 개념미술가들의 실천을 참조하듯이 [...]

나는 이 말이 웃기다. 미국 미술사에서 띄우는 대표적인 작가 에드 루샤와 브루스 나우먼을 들먹이다가 갑자기 (미국) 60, 70년대 개념미술가의 실천을 '참조'하는 김소라로 퀀텀 점프한다. 미국 미술사적 맥락이 도입되는 배경에 대한 설명보다 발빠르게 앞서 그 맥락이 '있음'을 독자에게 심어 넣는 것이 대체 어떤 유의미함이 있는지, 그 간극에 대한 설명은 책 10권으로 부족할 것이다.

내 생각엔 이런 글의 증상은 필자 자신을 향해 원인을 귀속시켜야 마땅한데, 김장언 같은 행동력이 결여된 X세대 코스모폴리탄은 이게 '당연'한 거다. 한국 작가가 미국 60-70년대 개념미술가를 당연히 참조할 수 있는 것이다. 미술은 시간적으로 컨템퍼러리하며 공간적으로 글로벌하기 때문이다. 후배 세대인 나는 전혀 믿지 않지만...

2025년 10월 16일 목요일

최진욱 블로그를 보다가

포럼A에 쓴 글 카테고리의 글을 쭉 읽다가 최진욱이 쓴 글에 누군가가 댓글 단 부분이 웃겨서 가져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ㅋㅋ

 신영식님 의견 2004-09-23 오전 10:57:00 Delete

젊은 평론가라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노라면,
뭔가 상당히 착각하는거 같은데, 자신들의 지적, 실천적 경험의
얕음과 일천함을 선정적인 수사들로 채우는걸 좋아한다는 것이다.
비유의 방식등을 보면 아마, 다른 대중문화들의 담론형식(특히 영화)을 모방하는것 같다.

글은 기름기가 잔뜩 배어있으나 진정으로 '미술적'인 시각의 필터를 구축하지 못했으므로
현실을 보는 눈들은 정확하지도 못하고 무엇보다 앙상하다.
찾아내는게 아니라 재단하는걸 좋아하는 아주 못된 습성들만 전세대에서 이어받은거 같다.

도데체 같은 세대인 내가 보아도 정말 하릴없고 얕고 무의미한 글들이 많다.
지적배경또한 날림이라는게 금방 감지되어서 조금은 기대를 했다가 재빨리 접는다.
그정도 얕은 시각의 글들은 인터넷에도 널렸기 때문에 굳이 볼 필요가 없다.
차라리 수많은 익명의 블로거들, 혹은 논자들이 더 현명하고 깊다.
평론가라는 명함을 내밀려면 이들보다는 다른(즉 전문적인) 뭔가를 보여줘야 할게 아닌가?
사실 기대를 끄는게 열받지 않는길일게다. 미술이 뭐란 말인가?
그 물음들을 평론가들에게 먼저 되돌려 주고 싶어진다.

2025년 10월 10일 금요일

피자 기억

피자가 정말 먹고 싶었던 어린 시절. 어디서 파는지도 모르겠고 프렌차이즈가 지금처럼 발달을 하지도 않았고 비쌀 것 같아서 주문해 달라고 감히 그렇게 말 할 수도 없었던 시절 할 수 있었던 건 '엄마 피자 좀 만들어주면 안 되나?' 엄마는 당연히 할 줄 모른다고 했던 것 같지만 계속 먹고 싶다고 하니까 나름 연구를 해서 후라이팬을 사용해서 만들어 보셨다. 술빵같이 떡진 식감의 빵 위에는 피망과 햄, 케첩, 양파를 얹었다. 뭔가 소시지 야채 볶음 같은 맛도 나고..그랬던 것 걑다. 원래 피자 맛을 모르니 그런가보다 하고 몇 번 먹었던 기억. 특히 기억나는 건 아빠가 여보 피자 한판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던 말. (그 빵을 '피자'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순간.) 옛 기억을 떠올려보지만 그때 치즈가 올라갔었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치즈맛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건 환이 집에서 식빵으로 만든 피자를 먹었을 때 치즈가 늘어나는 걸 보고 놀라워했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2025)

★★★★★

2025년도 영화의 모범답안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것.

이타도리의 영역


주술회전 마지막에 와서 이타도리는 제대로 익히지 못해 불완전한 영역전개를 스쿠나에게 시전한다. 영역전개라 함은 자신에게 유리한 규칙이 적용되는 비현실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으로 상대방을 끌어들여 공격하는 최고 등급의 주술이다. 이타도리의 영역전개는 스쿠나를 끌어들여 자신이 어린시절에 좋아했던 장소, 가족의 기억, 지금은 없어져버린, 갈수도 없어진 그런 장소를 방문한다. 그저 그뿐이다. 다른 영역과 다르게 이 공간에는 공격 기능이 없다. 제대로 익힌 게 아니라 급조해서 엉성하다고 하는데, 스쿠나는 싱거워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끌려 다니면서 이타도리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사상최강의 주령에게, 절체절명의 순간, 고작 고안했다는 게 '좋았던 옛날 이야기'라니. 그 전까지 현란한 수싸움과 잔인한 묘사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런 식의 '급감속'으로부터 나름의 마이너스적 충격을 먹는다. 한동안 주술의 (폭력적인) 세계에 푹 빠졌던 독자는 절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주술-외-세계, 즉 너무나 평범한 현실이 너무나 무신경하게 쉽게 그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것처럼 오는 충격이 바로 그것이다. 헤이안 시대라는 상상적 폭력의 공간. 그 모든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모던 라이프. 그 유명한 앗시발꿈. 기억 여행을 하던 도중 스쿠나는 이타도리에게 급발진하면서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느냐고 분노를 퍼붓는다. 이타도리는 지금까지 밀리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그렇다고 하며 자신은 스쿠나를 당장 죽일 수 있다고 하는데, 독자들이 의아한 부분이 여기다. 전력으로 계속 밀리던 이타도리가 무슨 자신감으로? 왜냐면 넌 이미 죽어있기 때문에. 이미 주술이 믿어지는 시대는 지나갔기 때문에. 이타도리의 영역은 그런 의미에서 스쿠나의 존재 부정에 관한 사상이다. 만약 주령의 존재가 있다는 걸 믿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면 이타도리의 영역전개는 주령에 있어서는 최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