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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8일 수요일

기동전사 건담: 철혈의 오펀스 (2015-6)

탈레반 생각도 나고.. 요즘 시국에 재밌게 시청했다.

2015년 12월 13일 일요일

백남준, 글로벌 그루브와 비디오 공동시장 (1973)

1970년에 쓰여진 “글로벌 그루브와 비디오 공동시장”이란 에세이에서 백남준은 당대 비디오 문화를 “우주선 지구호에 실린 ‘비디오 랜드’”에 비유했다. 이런 테마파크의 비유는 명백하게 (마샬 매클루언의 유명한 용어 ‘지구촌’을 상기시키는) ‘지구호’와 대조를 이루는데, 이때 백남준이 문제삼은 것은 비디오 랜드가 전지구적인 규모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백남준이 보기에 세계의 방송국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프로그램을 생산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가 그것에 접근하기는 용이치 않았다. ("우리가 프랑스 텔레비전을 마지막으로 본 적이 언제인가?!") 그는 이런 상황을 1930년대 서구의 배타적 경제체제, 심지어는 파시즘과 비견될 수 있다고 하면서, 공영 텔레비전이 세계 평화와 지구 보존에 힘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때 백남준이 제시한 해법은 다름 아닌 비디오 문화에 자유무역시장의 정신과 기능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백남준은 이 글에서 유럽경제공동체를 보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말하면 FTA 같은 걸텐데.)

비디오 문화의 자유시장화, 즉 비디오 공동시장이 세계의 평화와 보존을 약속한다는 백남준의 견해는 다소 뜬금없이 들린다. 하지만 당시 텔레비전 방송의 편파적 보도와 제한된 접근성으로 인한 “정보의 결핍”이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백남준은 그런 ‘단방향 통신’이야말로 베트남 전쟁과 같은 파국적 결말을 이끈 장본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백남준은 정보 채널의 전지구적 개방을 통해서 세계 평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비디오 문화는 예술이란 범주에 제한되지 않았는데, 오히려 백남준은 비디오 공동시장의 기획을 위해서 더욱 빠른 자본의 회전이 필요하다고 하며, 심지어 그것이 가능할 때 예술과 “세계평화”가 상품성을 띤 생생한 것이 된다고 했다.

백남준은 이것을 미디어 이론가 벅민스터 풀러의 말을 빌려 ‘생태학’이란 말로 압축했다. 풀러에 의하면 “경제라는 용어의 기원은 그 자체가 생태학, 즉 주거를 근본으로 하는 삶의 기술에 있다.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주거조건이 아니라 삶에 대한 총체적인 탐구이며 기획이다.”

2015년 9월 8일 화요일

백남준, 기원전/기원후 (1992)

이 글은 임종을 앞 둔 존 케이지를 위한 추모글이다. 자전적이기도 하며 추모적이기도 하고 비평적이도 한, 와 엄청난 글이다.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케이지에 관해 흥미로웠던 부분 몇 개를 인용한다.

"사람들은 케이지가 재능 있는 수많은 음악가에게 영향을 준 훌륭한 음악 철학자이지만, 그 자신은 훌륭한 작곡가가 아니었다고들 말한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끌렸던 것은 그의 음악이지, 그의 이론이 아니다. 1958년, 독일의 다름슈타트에서 ... [그는] 흔히 볼 수 있었던 미국 출신의 현대 선사상가였다. 내가 케이지의 열성분자로 돌변한 것은 바로 그가 데이비드 튜더와 함께 개최했던 음악회 때문이다. ... 그의 수많은 제자와 젊은 친구들은 케이지의 세례를 받고 나서 더 선별적이며 미학적으로 변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유독 케이지만이 너절한 것들을 맽어낼 용기와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42-43쪽)

이 부분은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의 입장을 상기시킨다. 손택은 이 책에서 예술 그 자체를 해석학적 비평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재현의 문제를 끌고 들어온다. 손택은 여기서 '예술이 재현이 아니다'의 손을 들어주면서, 만약 재현일 경우 형식과 내용이 분리되어버리는 괴상한 시각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의 예술 작품은 그것의 내용"이고, "해석은 예술에 대한 지성의 복수"며, "비평은 예술작품에 봉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혹은 열렬히 사랑하거나.

백남준이 케이지의 이론보다 음악에 끌렸다는 말은, 케이지의 이론보다 음악 그 자체가 진짜라는 말로 풀이된다. 그것은 손택이 옹호하고자 했던 (더 이상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존재하는 그대로인 것'으로서의 예술, 재현하지 않는 즉 그린버그 같은 사람의 모더니즘에 의해 정식화된 '진정한' 존재, 천재로서의 예술가의 분신으로서의 예술, 매개 없이 그 자체로서 말을 걸어오는 무엇이다.

형식파괴자 백남준이 은밀하게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결국 미술은 미술이며, 어떠한 좋은 미술(예컨대 너절한 미술)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어떤 믿음 같은 것을 반증한다. 혹은 미술을 극단적으로 비미술화해버린 결과 미술이란 개념이 사라졌을 때의 어떤 무의미가 "텅빈 캔버스" 이상으로 공포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혹은 완벽히 비미술화된 어떤 것은 그 무엇도 아니라는 커먼센스에 기반된 관념일지도 모른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진정한'이란 수사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다만 진정한 것이 다른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예컨대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단수가 아닌 복수, 고정성이 아닌 유동성, 확실함이 아닌 불확실성이야말로 '진정한' 무엇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때 그 진정한 '무엇'은, 결국 똑같은 진정한 어떤 모습의 예술과도 같다. 궤변인가.

왜 이렇게 무리하게 과대?해석을 시도하냐. 이유는 나는 백남준이 단순히 반미학을 추구한 예술 파괴자, 앙팡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어쨋거나 저쨌거나 '예술'을 사유하고 창작한 작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뉘앙스를 그의 글에서 발견한다면 기록해두고 싶었다.

한편 흥미로웠던 점은 하나 더 있다. 존 케이지의 음악이 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양이 많아서 좋았다는 백남준의 평.

"1968년 경, 전자 서커스에서 열린 체스 음악회가 생각난다. 그는 체스를 두었는데, 체스판이 튜더가 조정하는 기계에 연결되어 있었다. 3년에 걸쳐 작곡하고, 반복적으로 연습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3시간 동안이나 그렇게 '훌륭한' 곡을 연주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것이 즉흥적으로 진행되었다. . . . 4시간 동안 음악의 양탄자가 깔렸다. . . . 나는 사람들이 자연이나 우주를 받아들이듯 '나는 케이지를 받아들인다'라고 말했다. 엄청난 양이 우리가 '질'이라고 부르는 측정의 단위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있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우리는 '질'이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1. 훌륭하거나 혹은 형편 없거나: 비교급 형용사
  2. 다르다는 의미... 예를 들어 뮌스터의 치즈는 카망베르보다 더 좋거나 나쁠 수 있지만, A는 분명히 B와 다른 것이다.
  케이지의 음악에서 양의 중요성이 이러한 구분을 마비시킨다. 모래를 씹는 기분이라고 할까...케이지 이전이나 이후 그 어떤 예술가도 그렇게 완벽하게 장식지상주의, 출세지상주의, 최상주의를 넘어선 사람은 없었다. 케이지는 '질'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얼마든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작곡할 수 있었다."(42-43쪽)

이 '양'에 대한 개념적 설명은 맥루언의 비율(ratio) 개념(혹은 부리요의 근접성 개념까지) 닮았다. '양'이란 것은 단지 비슷비슷한 단위들이 많고 적어짐에 따라 뭔가가 바뀌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뭐가 달라서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방식의 인식론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를 '질'적으로 가리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는 양적인 분류 체계 속에서 그라데이션된다.

백남준, 노스텔지어는 피드백의 제곱근이다. (1930년-1960년-1990년) (1992. 9)

제목이 시사하듯이 백남준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곱절의 피드백과도 같다고 썼다. 그는 30년을 주기로 가정하며 90년대와 60년대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일단은 적으며 시작한다.

"30년이라는 기간을 예로 들어보자. // 지난 30년을 뒤돌아보면 60년대는 우리에게 비교적 가깝게 느껴진다. 그 당시 스타가 지금도 대부분 살아 있고, 여전히 활동하는 사람도 많다. 예전의 자리를 지키는 이들도 있다. 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것만큼 사람들의 예술적 취향이 달라지지는 않은 것이다."(35쪽)

하지만 60년대에서 본 30년대는 엄청나게 멀다고 말한다. 즉 과거로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우리는 당대의 사실과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며, 그런한, 피드백, 즉 정보의 순환 속에서 기존의 정보가 계속 다르게 갱신되는 프로토콜이 제곱근으로 가속화 된다고 보고 있다.

"반면 60년대에 서서 30년을 되돌아보면 심연처럼 멀어 보인다. 그 30년은 히틀러의 등장으로 시작되어 케네디 대통령의 선거운동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사이를 스탈린, 집단농장,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한국, 베를린, 아이젠하워의 자주노선이 차지하고 있다.
이 두 기간을 가르는 또 다른 심연이 있다. 바로 인쇄매체와 전자매체의 간격이다. 인쇄매체는 실제 일어난 일과 거의 정확한 이미지를 전달하지만, 전자매체는 그레타 가르보나 진저 로저스와 같은 당시 할리우드식 버전에 국한되어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30년대를 독재와 경제공황의 시대가 아니라 버스비 버클리의 시대로 상상하며 자랐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1960년대를 다시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같은쪽)

상기 인용에서 90년대의 젊은이는 30년대를 (헐리우드식으로) 매우 다르게 인식한다. 그렇다면 90년대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60년대도 다시 짚어봐야 되지 않을까,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30년대의 인쇄매체는 상대적으로 정확한 기록을 남기지만 60년대부터 전자매체는 헐리우드식 버전으로 남긴다고 하였다. 따라서 90년대의 젊은이들은 30년대를 헐리우드식으로 상상하며 자란다. (상기 인용에서 느껴지는 바는 백남준이 '헐리우드'에 관해 어떤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상대적으로 정확한 팩트가 있는 30년대도 현재 이렇게 왜곡 인식하는데 헐리우드 전자매체가 주름잡은 60년대 이후는 오죽하겠냐. 많은 기억의 변조가 있었을 것이다--라는 것--그리고 어딘가 그건 잘못됐다는 것.

여기서 그는 로버트 라우센버그를 거론한다. 라우센버그의 '9일밤'에서의 공연은 백남준이 보기에 대단했던 것 같다. 짧은 글의 많은 지면을 그 공연을 묘사하는 데 쓰고 있다. 하지만 포인트는 라우센버그가 그런 공연을 감당하기 위해 "광고를 해야 했다"는 것, 그래서 그가 혹독하게 비판받았다는 것.(36쪽) 그리곤 그 자신의 비슷한 경험담을 술회한다.

백남준이 티비랩에서 만든 실험물은 WNET이란 케이블 방송국을 통해 인기를 끌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영 TV로 중계되면서 나라 전체, 다시 말해 40억 시청자를 상대해야 했다."(같은쪽) 그때 백남준은 "그 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렀다"(37쪽)고 회고하는데, 왜냐면 "예산이 우리 것보다 20배가 넘는 할리우드나 BBC의 프로그램을 주로 다루던 메디슨 가의 전문 광고업자를 고용했던 것이다."(같은쪽) 그래서 백남준은 자신의 프로그램이 "첫 방송 시리즈 이후 잊힐 수밖에 없었다"고 적었다.(같은쪽)

백남준은 많은 대중을 비디오아트로 끌어들이는 것에 성공했으며, 더욱 큰 성공을 위해 광고업을 끌어들였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즉 지나고 보니 헐리우드와 손을 잡아선 안됐다. 생각해볼 수 있는 점은 백남준이 록펠러재단과 같은 기업과 비디오아트 국립방송을 창시하긴 했지만, 헐리우드 광고 같은 상업주의를 그 자체로 지지하진 않았단 사실이다. 즉, 그들과 손은 잡되 스스로를 동류로 포지셔닝하진 않았다.

여기까지가 비디오아트(아방가르드)-광고(상업방송) 간의 어떤 제휴와 실패를 말하고 있다면 마지막 단락은 약간 애매하게 붙어있다. 마치 내가 옳았다를 증명하는 것처럼, 헨리 겔트잘러란 미술평론가와의 저녁식사에서 나눈 다소 거북한 대화--즉 그녀가 비디오아트에 비판적인 시각을 내비친 관점: "예술가는 여러가지 기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술 자체는 어떤 미적 감각도 없어요. 기술이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37쪽)--를 버젓이 쓴 뒤, 그녀가 70년대 NEA에서 비디오아트 분야 장학금을 지급했다고 다시 적으며 그녀의 과거 말을 비꼰다.

말하자면 비디오아트(아방가르드)-예술계(제도)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앞서 예술이 광고 쪽과 붙는 일에 백남준이 "실패"라며 거부반응을 보인다면, 반대로 예술계 쪽에서 비디오아트에 일방적인 거부권을 행사했던 사실에도 거북한 반응을 보인다. 종합해보면 백남준은 비디오아트가 텔레비전 광고가 아니라 결국 예술이며 상업주의에 저항해야 한단 소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고 과거를 회상해보니(노스텔지어) 얻어진 통찰이자 진실(피드백)이라고 그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한편 그가 과거를 회상/비판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60년대로 날아가서 당대를 비판하는 것과 같은 어조다. 즉 그 당대가 아니라 그 시간축을 뒤로 물려 아주 편하고 명백한 관점에서, 하지만 마치 당대에 있는 것처럼 비판한다. 나는 이런 방식이 꽤나 흥미롭게도 한데, 현재의 관점으로 역사가 다시 써진다는 점이 그렇다. (즉 또 다시 30년이 지난 후에 백남준의 관점이 다시 뒤집어질지도 모른다.) 마치 정말로 시간을 가역적인 것으로, 혹은 비디오를 타임머신 기계처럼 망상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이 글의 최초에서 그가 "1950년 이전 예술가들은 추상적인 공간을 발견했다. // 1960년 이후 비디오 예술가들은 추상적 시간을 발견했다. // 아무 내용이 없는 시간을"이라고 썼던 이유처럼 보인다. 그리고 노스텔지어가 피드백의 제곱근이라고 썼던 이유이기도 하다.

2015년 9월 5일 토요일

몇몇 프랑스인(?) 친구들 (1992), 에디트 데커, 말에서 크리스토 중에서

다음의 백남준의 스포에리에 관한 기억은, 벤야민이 쓴 <아케이트 프로젝트>의 "수집가" 같은 장을 생각나게 한다.

"다니엘 스포에리는 성공했지만, 우울증에 빠지곤 했다. 나는 스포에리에게 강한 친밀감을 느낀다. 우리는 둘 다 진정한 의미의 골동품 수집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이 골동품들은 단순히 발견한 객관적인 사물이 아니라 선택된 사물이며, 우리가 직접 조각한 작품과도 같다. 우리가 그것을 조각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돈과 노력의 낭비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훌륭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역사의 흐름을 통해서만 가능한 노화과정을 재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포에리도 나만큼이나 오래된 신문에 미쳐 있었다. 쾰른 쿤스트페어라인에서 그는 아방가르드 예술가와 암울한 역사 속에서도 살아남은 냉소적인 생존가의 재검토를 거친 고가의 벼룩시장을 구상했다. 세상의 부조리는 일상적인 사물들 속에서 스스로 시간의 냄새를 퐁긴다. 이 작품들은 쾰른의 여러 박물관에서 신중히 선택하여 소장했다. 마르크스가 어렵게 허가를 받아 발행한 쾰른의 일간지 마지막 호도 전시되었는데, 모두 선명한 붉은색으로 인쇄되어 있었다.(약 열 건의 기사가 실려 있다.) 마치 플럭서스의 선언문을 읽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렇게 많은 평범한 할머니들이 기분 좋게 웃으며 현대미술 전시회를 관람하는 모습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29-30쪽)

그리고 다음의 인용은 데이빗 조슬릿이 시청자가 곧 상품이며, 또 네트워크라고 지적한 바로 그 상황이다.

"스탠턴은 최초로 시청자의 행동을 연구해서 시청률에 관한 기본적인 틀을 마련했다. TV 세계에서 예술적이든 상업적이든 유행을 따르기는 쉬워도 역행하기는 어렵다. 벌판에 나가 고함을 질러봤자, 반향이 있을 리 없다. 스탠턴과 라저펠트의 연구 결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누가 당신의 말을 듣고 있는지, 즉 시청률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아도르노는 왜 이런 것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이어서 예술활동과 상업적인 면을 같은 서킷에서 생각하는 백남준의 빛나는 아이디어.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에서 나는 예술활동의 상업적인 면을 강조해왔다. 사실 비디오 예술가들이 수많은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고객을 찾는 일이다(상류 대 하류의 문제)."(31쪽)

상류 대 하류의 문제란 말은 아마 이런 것이다. 비디오아트의 상업적 버전은 상업 텔레비전 방송이다. 상업 텔레비전의 고객은 대중이다. 대중을 예술의 소비자로 만든다는 말은 곧 비디오아트가 텔레비전 방송이 된단 말이 된다. 바이바이 키플링 같은 작품을 증언하는 말이다.

백남준, 미디어의 기억 (1992), 에디트 데커 편, 말에서 크리스토 중에서

백남준은 이 글에서 복수의 언어를 구사하는 배경에 대해 밝히고 있다. 식민지 시기 학교를 다녔던 백남준은 약자의 입장에서 한국어를 금지당하고, 대신 일본어를 사용하길 강요당한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미디어에 대한 모든 연구는 언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데 언어에 대한 내 기억은 마치 모자이크와 같다."(24쪽)

언어란 미디어를 통해, 인간은 세계와 조우한다. 그런데 이때 각 언어는 이종적이기 때문에 백남준의 언어에 대한 기억은 마치 모자이크 같다. 약자는 그렇게 여러가지 언어를 배워야 한다. 미국인은 영어만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한국인은 일본어도 해야하고 독일어도 해야한다. 하지만 그는 이것에 대해 크게 피해의식이 없다. 오히려 조이스나 존 레논 같이 소위 세계적 명사 또한 약점을 지닌 사람들이었다고 평가한다.

"나 역시 지금 이 글을 영어로 쓰고 있다(물론 내 의지로). 조이스나 존 레논, 버나드 쇼, 와일드 혹은 베케트가 켈트어로 작품을 섰다면 세계 문화계는 꽤 고생하지 않았을까. 위의 천재들은 자신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글을 쓰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국지적인 모국어보다는 독일어나 영어로 글을 쓰려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모두 약점을 지닌 사람들이었다."(25쪽)

이런 '약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손에 쥔다. 약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더욱 강자에게, 보편 사회에 그들이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알려야 했고, 이들은 국제적 감각, 언어, 미디어를 익혀야만 했다. 이때 정보의 과잉과 결핍을 가늠하는 백남준의 기준이 흥미롭다. 오늘날 정보사회보다 과거 다락방에서 봤던 책들을 가리키며 "정보로 넘친다"고 말했다.

"어느 날 대청소를 하려고 어머니를 따라 다락에 올라갔다가 나는 먼지 더미 속에서 엄청난 보물을 발견했다 ... 꽤 큼직하고 두툼한 책들이었다. 그 책들은 서구세계로 열린 나의 유일한 창이었다. ... 그것은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문화의 사막에서 발견한 오아시스였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소위 '정보로 넘친다'라는 말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오늘날 전 세계 어느 대도시에서도 그 시절과 같은 정보의 포화 상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26쪽)

여기서 그는 상대적이며 상황적으로 정보의 밀도를 보고 있다. 오늘날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라면 모두 어느정도는 평등한 정보접근성을 가진다. 하지만 백남준의 기준에선 이런 상황은 정보로 넘치는 상황이 아니다. 왜냐면 나에게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약자'의 입장에서 뭔가를 습득해야만 하는 상황, 그럼으로써 어떤 새로움이 강하게(거의 반강제적으로) 그에게 어필하는 상황에서 정보는 넘치게 된다. 백남준이 다락방에서 맞닥뜨린 책더미는 그러한 의미에서 정보로 넘친다. 그것은 백남준으로 하여금 "뉴욕으로 가고 싶다는 욕구에 불을 지핀 셈이 됐다."(27쪽) 즉, 미디어는 약자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이동하게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