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20일 월요일
호프 보고 나서
2026년 7월 8일 수요일
이력을 정리하는 일
최근에는, 아니 아마도 미술관 일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이력을 정리하는 일을 그만뒀다. 큰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큐레이터 시절 글 하나 쓴 이력, 어딘가에 패널 디스커션으로 참여한 이력 하나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이제 너무 흔해져버렸고 그것 하나 참여 여부가 나의 일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편으로 그 의미는 이런 거다. 더 이상 하나 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경우가 줄어들었다. 기관에서 일하는 건 가능성의 변동성이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 어느 정도는 미래가 예정되어 있고, 그 길 외에 더 좋은 길을 가기란 지금까지 왔던 길보다 훨씬 힘들다. 가성비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변화하기는 힘들 것 같고 과거로 돌아가기도 싫다. 그 의미는 어떤 일에도 최선을 다할 동기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이가 이제 40살이 넘었는데 이런 고민이라니. 좀 우습다.
2026년 6월 9일 화요일
참교육
참교육을 보고 자칭 진보좌파들이 폭력의 정당화를 우려하고 나섰다. 아무리 요즘 애들 다루기 힘들다 하더라도 교실 선진화 전 폭력이 난무하던 미개 상태로 돌아가는 건 퇴행이라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드라마나 코미디나 이런 대중극이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건 광범위한 공감대다. 공감대가 만약 성립하지 않는다면 제작조차 시도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선후관계가 잘못되었다. 이런 영상물 때문에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폭력이라도 돌아오지 않으면 도무지 해결이 안 될 것 같은 현실 감각이 동시대를 지배하고 있다고 봐야 더욱 정확할 것이다. 미디어비평가 중 몇이 말한다. 그러니까 이런 극은 조심해야한다고. 대중들에게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콘텐츠는 나쁜 콘텐츠이므로 비판해야 한다고. 내 생각은 당신 말이 틀리지 않았다. 다만 틀리지는 않았을 뿐이다.
예술가와 표현의 자유
“이혼이나 당하고” 발언에…이승환, 윤서인에 5000만원 손배소 | 중앙일보
진보적 가수와 보수적 만화가가 표현의 자유를 가지고 붙었다. 가수는 표현의 자유가 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화가는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표현의 자유란 명제는 어떤 면에서 맥락적 무기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그 말이 소환되는 순간은 언제나 억압받는 쪽이 생겼을 때이고, 결국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포지션의 문제에 불과할 때가 많다.
표현에 대한 규제의 필요성은 사회의 유지 관리 차원에서 대두된다. 하지만 변혁의 국면에서 무제한적 표현은 진보의 무기이기도 했다. 상대방의 무기를 빼앗으려다 우리 무기도 내던지는 모양새도 어리석다. 권력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작은 세력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보기에 이승환은 무언가를 변혁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법과 원칙이 존재하는 리버럴한 세계, 곧 상식적인 세계를 지키고자 한다. 반면 윤서인의 세계는 무언가 상식적이지 않다. 무언가 불만이 쌓이는데 해결은 안 되니 열이 받고 화가 나고 세계가 잘 못 된 것 같은데 나와 상관없이 세계는 잘 돌아가는 것 같고 할 수 있는 것은 화를 내고 조롱하고 욕을 한다.
2026년 6월 5일 금요일
2026년 6월 2일 화요일
2026년 5월 21일 목요일
돈 앞에 부모 형제도 없다
"우리도 삼성처럼"…'6억 돈잔치' 도미노 공포에 재계 초비상
성공하려는 순간, 그 정점에서 갑자기 풍비박산이 나는 조직, 공동체는 얼마든지 있다. 청춘과 잉여를 기획했던 우리도 그랬다. "돈 앞에 부모 형제도 없다." 이 말은 잔인한 면이 있다. 우애와 의리가 분배할 것이 없는 상태에 의존하고 있었다니 말이다.
2026년 5월 20일 수요일
문화예술계의 기업 비판에 관해
2026년 4월 27일 월요일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구교환과 고윤정이 투톱 주인공이지만 아직까지는 구교환의 캐릭터성이 도드라진다. 소위 말하는 베타남, 하남자, 루저들이 타인에 의한 냉혹한 자기 평가...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뿜는 분노. 이들이 팩트에 집착하고 '합리'에 목숨 거는 이유가 어쩌면 누구보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하고 싶은 걸 했을 뿐인데 세상이 억까하는 느낌, 무언가 차별적으로 돌아가는 느낌, 나는 사실 누구보다 명석하고 선량한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은 뜨지 못한 예술가가 가지는 감정의 전매특허이지만 이대남과도 닮아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자무싸의 구교환은 '이대남의 탄생' 프리퀄 같달까? 예술가를 보통 좌파를 디폴트로 놓는 경우가 많지만, 어쩌면 예술가는 원래 우파적으로 태어난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보 성향의 예술가는 극소수다. 그 나머지를 별로 떠올려본 적은 없는 듯.
2026년 4월 8일 수요일
김미정, 국가주의 모더니즘
약간은 뻔한 주제라고 생각했지만 몇 줄만 읽어봐도 왜 이분의 책이 사후에 나왔는지 알겠다. 보석을 세공하는 감각이 이런 것 아닐까. 이런 연구자의 성과를 보면 나 스스로 공부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되고 나의 상황이 한편으로 답답하다. 솔직히 나는 지금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하루에 몇 번씩 가슴에 열이 올라 미칠 지경인데, 회사 일 때문이다. 이게 얼마나 바보 같은가 알면서도 고쳐지질 않는다. 신진 연구자가 출현해서 책을 출간하는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마음만 그렇고 몸이 안 움직인다. 사실 현상 유지하는 것만 해도 벅차다. 좋은 연구서를 읽었는데 우울해지기만 한다.
2026년 4월 2일 목요일
인상적인 문구
"창작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고, 일정은 준비되었으며, 기대는 형성되었다."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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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페이스북에서 https://www.facebook.com/share/p/17UKGW1SU7/
강덕구와 김어준
변희재와 김어준을 경유한 음악에 관한 생각들 : 네이버 블로그
나 역시 오래 전부터 김어준에 관한 생각을 정리해 봐야겠다 생각했었지만 강덕구의 책, <밀레니얼의 마음>을 보고 그럴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도 그렇다. 김어준에 관해 이렇게 우아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다만 나의 경우는 김어준이란 사람보다 그의 작업물에 좀 더 관심을 가질 것 같다. 물론 '악인열전' 같은 게 훨씬 펑크한 바이브이긴 하지만 한 사람에게 동기화되는 것보단 한 사물에 동기화되는 게 소모가 덜하다.
2026년 4월 1일 수요일
2026년 3월 26일 목요일
박찬경의 프로젝션적 회화 사전 메모
머랄까. 아직 전시를 보지 않았지만 이미 그런 바이브를 느낀다. 이건 대작이라고. 최진욱에 따르면 오픈스튜디오 품평회격 자리에서 이번 작업을 박찬경이 자신 없어 했다고 한다. 왜냐면 회화는 자신의 본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진욱이 여기서 해석한다. 화가의 무능함 때문에 박찬경 본인이 스스로 등판했다고. 박찬경의 이번 회화는 '아 이번에 회화에 한 번 도전해 볼까?'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부과된 긴급성' 같은 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미지로 보았지만 박찬경의 회화는 회화라기보다 이미지다. 정통파 화가, 페인털리 페인터의 페인팅이라기보다 뭔가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합성적인, 가공된, 이런 수식어가 적합한 무언가 얄팍한 말 그대로 이미지란 것이다. 그래서 사실상 실제 눈으로 보는 게 의미가 있나 싶다. <<안구선사>> 시리즈는 회화라기보다 영화의 미장센처럼 '구성'된 감각이며, '상징주의적인 것'이란 최근 발굴한 나의 주제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 (상징주의적인 것의 심급에 역시 박찬경 자신의 필생의 주제, 잃어버린 소중한 나의 것, 가족, 우리, 민족, 국가의 이미지, 즉, 실재가 도사린다고 느낀다.) <남매탑>이나 <칠성각>은 그야말로 어색한 초보 회화, 합성 이미지, 마치 장종완 같은 포토샵 합성 기반 페인터와 동일한 질적 수준을 보여주는데, 아무튼 이건 나아간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퉁쳐서 여러 주제와 맞물려 쉬운 단어로 '언캐니'하다. '박찬경이 회화?'라고 했을 때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박찬경은 미디어 아티스트다. 미디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업한다. 전시 중에 뒤샹의 유명한 핍홀(peep hole) 작업, <에탕 도네>를 노골적으로 참조한 디오라마가 있다. (<에탕 도네>가 앞에서 보면 여성 나부, 옆에서 보면 얄팍한 이미지의 조합이라면, 박찬경의 작업은 그것을 한 번 다시 한 번 '원본'으로서 참조하며 뒤집는 것 같다. 말하자면 '납작하지만 원본'이란 역설.) 마치 주재환의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를 오줌으로 패러디했듯이, 서울대 현발 계보의 작가에겐 범생이 같은 '이유 있는' 참조점이 있다. 이것이 어쩌면 박찬경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어쨋든 여기서 디오라마는 복합적인 탈식민 상황이 스치는 미디어다. 그에게 회화도 (다분히 서구적인 전통 매체라는 점에서) 그런 것일 것이다.
2026년 3월 12일 목요일
2026년 3월 11일 수요일
나이가 들어 글을 쓰기 힘든 이유
2026년 2월 10일 화요일
2025년 12월 15일 월요일
세마 하나평론상
링크: 관종의 시대와 자기 노출 전략의 미학 :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을 중심으로 –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
집중해서 텍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다. 한 두 번 정도 스킴했으나 결국 제대로 읽진 못했다. 왜 그런진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 글에서 놀라운 점 하나는, 작품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로지 큐레이터의 의도만 가지고서 전시비평을 할 수 있다는 것일 텐데, 호오를 떠나서 이런 관점이 '수상'까지 했다는 건, 어떤 변화에 대한 합의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지도 모른다. 큐레이팅이든 비평이든.
- 이 글은 전시가 일종의 '수치플'을 하고 있다고 봄. 기후정의를 실천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는 자신을 일정 부분 '노출'하는 일. 수치스러움이야말로 여성적이고 해방적이다..?
- 할 포스터는 포르노그래피적인 것과 옵씬한 것을 구별한다. 최소한 내가 지속 가능한 미술관에서 본 것은 옵씬하진 않았다. 오히려 '지속가능성'이란 정상적 규범의 강박적 재현에 가깝달까..?
- 로라 멀비라는 반갑고도 오래된 이론가가 글 속에서 등장하는데. 내가 기억하기로 멀비의 <시각적 쾌락>은 글 대부분을 헐리우드 내러티브 영화가 여성을 재현하는(대상화하는) 방식, 소위 남성적 응시의 구조를 비판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그래서 멀비가 노출증을 해방적 요소라고 보았는 게 정말 그랬나? 싶은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체크해봐야겠다. 아무튼 멀비 같은 오래된 글을 이론에서 더 이상 보고 싶지는 않다. 너무 단순하지 않은가? 보는자 보이는자.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권력과 피해자 등등의 이분법.
- 관종의 원래 뜻에 좀 더 충실했다면 어땠을지. 노출증자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서 더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성기를 시각적으로 쏘아 보냄으로써 당하는 쪽이 당황하게끔 하는 게 목적 아닌가? 바바리맨이 고추를 보여줄 때 작다고 놀리면 당황해서 도망간다는 썰처럼. '과도하다'는 건 노출증자의 생각이 아니라 그걸 쓰고 있는 필자의 생각인듯. 암튼 노출증자의 목적은 성적 쾌락이지 수치스러움? 그 자체가 아니라는 거...
- 인격화된 미술관: 여럿 작품을 모아 둔 전시를 블랙박스화하고 블랙박스의 표면만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큐레이터는 작품과 미술관의 대변인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