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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20일 월요일

호프 보고 나서

길게 끄적거릴 생각은 없고. 

민하와도 대화를 나누었지만 이런 류의 영화를 볼 때 느끼는 한국인의 긴장은 영화 내적인 것 반, 외적인 것 반이다. 내적인 것은 말 안 해도 알 것이고 외적인 것은 아.. 여기서 컴퓨터 그래픽이 봉준호 정도만 나와줘도 좋을 것 같은데.. 등과 같은 불안, 한일전을 볼 때와 같은 기대, 응원, 실망, 안도감 등과 같은 것이 꽤나 자주 반복된 다는 의미다. 최소한 참고 볼만할 정도만 되어 줬으면, 다시 말해 내가 영화관을 들어올 때 입구에 맡겨 두었던 의심을 다시 찾아오지 않게끔 해달라는 간절한 희망이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결과적으로 느낀 점은 마지노선 정도는 지켜줬다는 것--그렇다면 이것은 영화이긴 영화이다.

내가 본 그것이 영화인 이상--영화가 아니라면 다음은 없다--그 다음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느꼈던 그 찝찝함은 무엇일까인 것인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A급 테크놀로지의 B급 스타일이라는 의도로 이해하고 싶은 듯하다. 어떤 부분은 매우 최상급으로 세공된 부분이 있다. 다른 어떤 부분은 그것이 미치지 못하는 무언가로 남아 있다. 보는 사람들은 대개 일관성을 가정하기에 이것을 이렇게 잘하는 감독이 저것을 그대로 놔둘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B급 스타일론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제작비 타령을 한다. 많이 지적되었던 부분, 그래픽은 헐리우드급 자연스러움을 위해서 더 큰 예산이 투입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저 그래픽은 오히려 최근 한국 영화에서 선호 되는 크리처의 형태에 더욱 가깝다--최근에 <동궁>이란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괴물이 귀신으로 나온다. 형태의 내재적 논리가 전혀 없는, 근본 없는, 그런 의미에서 기괴하고 실망스러운, 후방가르드--뭐라고 묘사해야할지--한 크리처는 그 자체로 한국인이 상상하는 무너져야 할 괴물의 형태가 아닐까 싶은데, 즉, 사실은 어떤 외형이여도 상관없다는 거 아닐지?

2026년 7월 8일 수요일

이력을 정리하는 일

최근에는, 아니 아마도 미술관 일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이력을 정리하는 일을 그만뒀다. 큰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큐레이터 시절 글 하나 쓴 이력, 어딘가에 패널 디스커션으로 참여한 이력 하나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이제 너무 흔해져버렸고 그것 하나 참여 여부가 나의 일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편으로 그 의미는 이런 거다. 더 이상 하나 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경우가 줄어들었다. 기관에서 일하는 건 가능성의 변동성이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 어느 정도는 미래가 예정되어 있고, 그 길 외에 더 좋은 길을 가기란 지금까지 왔던 길보다 훨씬 힘들다. 가성비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변화하기는 힘들 것 같고 과거로 돌아가기도 싫다. 그 의미는 어떤 일에도 최선을 다할 동기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이가 이제 40살이 넘었는데 이런 고민이라니. 좀 우습다.

2026년 6월 9일 화요일

참교육

 참교육을 보고 자칭 진보좌파들이 폭력의 정당화를 우려하고 나섰다. 아무리 요즘 애들 다루기 힘들다 하더라도 교실 선진화 전 폭력이 난무하던 미개 상태로 돌아가는 건 퇴행이라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드라마나 코미디나 이런 대중극이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건 광범위한 공감대다. 공감대가 만약 성립하지 않는다면 제작조차 시도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선후관계가 잘못되었다. 이런 영상물 때문에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폭력이라도 돌아오지 않으면 도무지 해결이 안 될 것 같은 현실 감각이 동시대를 지배하고 있다고 봐야 더욱 정확할 것이다. 미디어비평가 중 몇이 말한다. 그러니까 이런 극은 조심해야한다고. 대중들에게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콘텐츠는 나쁜 콘텐츠이므로 비판해야 한다고. 내 생각은 당신 말이 틀리지 않았다. 다만 틀리지는 않았을 뿐이다.

예술가와 표현의 자유

 “이혼이나 당하고” 발언에…이승환, 윤서인에 5000만원 손배소 | 중앙일보

진보적 가수와 보수적 만화가가 표현의 자유를 가지고 붙었다. 가수는 표현의 자유가 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화가는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표현의 자유란 명제는 어떤 면에서 맥락적 무기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그 말이 소환되는 순간은 언제나 억압받는 쪽이 생겼을 때이고, 결국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포지션의 문제에 불과할 때가 많다.

표현에 대한 규제의 필요성은 사회의 유지 관리 차원에서 대두된다. 하지만 변혁의 국면에서 무제한적 표현은 진보의 무기이기도 했다. 상대방의 무기를 빼앗으려다 우리 무기도 내던지는 모양새도 어리석다. 권력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작은 세력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보기에 이승환은 무언가를 변혁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법과 원칙이 존재하는 리버럴한 세계, 곧 상식적인 세계를 지키고자 한다. 반면 윤서인의 세계는 무언가 상식적이지 않다. 무언가 불만이 쌓이는데 해결은 안 되니 열이 받고 화가 나고 세계가 잘 못 된 것 같은데 나와 상관없이 세계는 잘 돌아가는 것 같고 할 수 있는 것은 화를 내고 조롱하고 욕을 한다.

2026년 6월 5일 금요일

선거가 끝나고

TK 지역 청년과 이야기해보면 이들이 '팩트'라고 부르는 정보 분자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정보 원자와는 다른 단위의 객체란 생각이 든다.

2026년 6월 2일 화요일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시전하는 사람들이 아주 가끔씩 있다. 때때로 이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쓴다.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 희망을 향한 꺼지지 않는 불씨.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며, 불합리하며, 나아가 해악이다. 이 '그럼에도' 부류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소통할 생각이 없으며 바꾸거나 개선할 생각 전혀 없이 찰거머리처럼 수구적인 태도로 무언가에 매달린다.

2026년 5월 21일 목요일

돈 앞에 부모 형제도 없다

"우리도 삼성처럼"…'6억 돈잔치' 도미노 공포에 재계 초비상

성공하려는 순간, 그 정점에서 갑자기 풍비박산이 나는 조직, 공동체는 얼마든지 있다. 청춘과 잉여를 기획했던 우리도 그랬다. "돈 앞에 부모 형제도 없다." 이 말은 잔인한 면이 있다. 우애와 의리가 분배할 것이 없는 상태에 의존하고 있었다니 말이다.

2026년 5월 20일 수요일

문화예술계의 기업 비판에 관해

정용진, ‘5·18 탱크데이’ 사과했지만…‘정치 편향’ 오너 리스크 현실화

“아트워싱에 반대한다”···퐁피두센터 한화 개관 규탄하는 예술인들, 왜 - 경향신문

정용진 사태와 한화 퐁피두센터에 대한 비판을 겹쳐 놓고 보면서, 왜 하나는 공분을 사고 나머지 하나는 뭥미? 같은 감정이 드는지 잠깐 생각해 봄.

정용진 건은 직접적, 한화 건은 간접적. 

어쨌든 한화 퐁피두 수입은 가해적 행동이 아니라 사회 공헌적 맥락을 가지며, 아트워싱의 직접적 인과관계로부터 탈락 되어 있다. 어떤 워싱이냐? 특정한 잘못을 했는가? 그것을 공헌활동을 통해 상쇄하려고 하나? 애매하다. 그냥 방위산업체 자체가 맘에 안 드는 것 같다. 아트워싱은 그런 방위산업체가 좋은일을 하는 것 같으니까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악당으로 남아 있으란 것..?

또한 이런 식의 기업 비판은 <예스맨> 프로젝트든, 낸 골딘의 행동주의에서 익숙하다. 하지만 예스맨처럼 영악하거나 예술적이지도, 낸 골딘처럼 인물 자체가 간지나거나 카리스마적이지도 않다. 그보다 신경쓰이는 건 서양 행동주의의 시뮬라크르의 냄새랄까. 행동주의는 어떤 효과를 이루고자 한다. 하지만 이번 퐁피두 건은 도덕주의적 자세잡기에 훨씬 더 가깝다. 좌파의 게토화로 이어진다.

한편 방위산업체가 우리나라에서 왜 발전하게 됐는가? 휴전 상태인 국가에서 군비 증강에 대한 부분은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으며, 그것이 어쩌면 남한이란 국가에서 그래도 이정도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일정 부분 구성한다. 우파적 시각에선 이런 면을 물론 강조할 것이다. 배은망덕한 년/놈들은 우리나라를 떠나라..!

한편 정용진의 탱크데이는 무언가 우파적 이데올로기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가 있다. 좌우 할 것 없이 '이것은 가해'라는 프레임이 작동한다는 것. 

만약 한화를 정말 비판하고 싶었다면 그래서, 우파의 윤리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잠깐 듦.

2026년 4월 27일 월요일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구교환과 고윤정이 투톱 주인공이지만 아직까지는 구교환의 캐릭터성이 도드라진다. 소위 말하는 베타남, 하남자, 루저들이 타인에 의한 냉혹한 자기 평가...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뿜는 분노. 이들이 팩트에 집착하고 '합리'에 목숨 거는 이유가 어쩌면 누구보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하고 싶은 걸 했을 뿐인데 세상이 억까하는 느낌, 무언가 차별적으로 돌아가는 느낌, 나는 사실 누구보다 명석하고 선량한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은 뜨지 못한 예술가가 가지는 감정의 전매특허이지만 이대남과도 닮아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자무싸의 구교환은 '이대남의 탄생' 프리퀄 같달까? 예술가를 보통 좌파를 디폴트로 놓는 경우가 많지만, 어쩌면 예술가는 원래 우파적으로 태어난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보 성향의 예술가는 극소수다. 그 나머지를 별로 떠올려본 적은 없는 듯.

2026년 4월 8일 수요일

김미정, 국가주의 모더니즘

 약간은 뻔한 주제라고 생각했지만 몇 줄만 읽어봐도 왜 이분의 책이 사후에 나왔는지 알겠다. 보석을 세공하는 감각이 이런 것 아닐까. 이런 연구자의 성과를 보면 나 스스로 공부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되고 나의 상황이 한편으로 답답하다. 솔직히 나는 지금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하루에 몇 번씩 가슴에 열이 올라 미칠 지경인데, 회사 일 때문이다. 이게 얼마나 바보 같은가 알면서도 고쳐지질 않는다. 신진 연구자가 출현해서 책을 출간하는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마음만 그렇고 몸이 안 움직인다. 사실 현상 유지하는 것만 해도 벅차다. 좋은 연구서를 읽었는데 우울해지기만 한다.

2026년 4월 2일 목요일

인상적인 문구

 "창작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고, 일정은 준비되었으며, 기대는 형성되었다."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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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페이스북에서 https://www.facebook.com/share/p/17UKGW1SU7/

성명서
창작지원금을 받았지만 창작을 할 수 없다 — 지급보증보험 요구는 예술가 배제 장치다
강원문화재단 2026년도 전문예술지원 문학 분야(개인) 창작지원 대상자로 선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급보증보험증권 가입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사업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 예술지원 제도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심각한 사례다.
창작지원금은 경제적 취약 상태에 있는 예술가에게 창작의 시간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지급보증보험 가입을 필수 조건으로 요구하는 순간, 지원 제도는 ‘창작 능력’이 아니라 ‘금융 신용’을 기준으로 작동하게 된다. 신용이 낮은 예술가는 선정되고도 배제되는 역설적 상황에 놓인다. 이는 지원이 아니라 선별이며, 창작 진흥이 아니라 창작 제한이다.
문학 창작자의 현실은 불안정하다. 고정 수입이 없고, 사회보험 이력도 취약하다. 장기간 창작 활동을 지속해온 이일수록 금융 신용에서 불리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구조를 고려하지 않은 채 보증보험을 요구하는 것은 창작 현장을 모르는 행정 편의주의에 불과하다. 공공 지원 제도가 시장 논리를 그대로 가져와 적용하는 순간, 가장 지원이 필요한 예술가가 제도 밖으로 밀려난다.
더 큰 문제는 선정 이후 배제라는 점이다. 심사를 통해 창작 가능성을 인정하고도, 금융 신용이라는 또 다른 장벽을 세워 지원을 무력화하는 것은 행정의 책임 회피다. 이는 예술가에게 심각한 시간적·정신적 피해를 준다. 창작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고, 일정은 준비되었으며, 기대는 형성되었다. 그 모든 것이 보증보험이라는 문턱에서 중단된다.
공공 예술지원은 위험을 감수하는 제도여야 한다. 창작은 담보로 증명되는 활동이 아니다. 결과는 작품으로 증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 보증을 요구하는 것은 공공 지원의 취지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다. 지급보증보험이 아닌 단계별 지급, 중간 점검, 정산 강화 등 대안적 관리 방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럼에도 가장 배제적인 방식만을 고수하는 것은 제도 설계의 실패다.
우리는 묻는다.
창작지원금은 신용이 높은 사람에게 주는 혜택인가,
아니면 창작이 필요한 예술가를 위한 공공 지원인가.
신용이 낮다는 이유로 창작의 기회가 박탈된다면, 공공 예술지원은 존재 이유를 잃는다. 예술가에게 요구되어야 할 것은 담보가 아니라 창작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보증이 아니라 신뢰다.
강원문화재단은 지급보증보험 의무 규정을 즉각 재검토하고, 신용 취약 예술가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선정하고도 배제하는 제도는 공정하지 않다. 창작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이 형식적 절차에 의해 무력화되어서는 안 된다.
창작지원금이 창작을 막는 현실을 즉각 개선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강덕구와 김어준

 변희재와 김어준을 경유한 음악에 관한 생각들 : 네이버 블로그

나 역시 오래 전부터 김어준에 관한 생각을 정리해 봐야겠다 생각했었지만 강덕구의 책, <밀레니얼의 마음>을 보고 그럴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도 그렇다. 김어준에 관해 이렇게 우아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다만 나의 경우는 김어준이란 사람보다 그의 작업물에 좀 더 관심을 가질 것 같다. 물론 '악인열전' 같은 게 훨씬 펑크한 바이브이긴 하지만 한 사람에게 동기화되는 것보단 한 사물에 동기화되는 게 소모가 덜하다.

2026년 4월 1일 수요일

포스트휴먼 어린이

 하다하다 포스트휴먼 어린이까지 나오네. 아기나 어린이는 언제나 프리휴먼이거나 안티휴먼이거나 포스트휴먼 아닌지. ㅎㅎ

포스트 휴먼 어린이 | 카린 무리스 - 교보문고

2026년 3월 26일 목요일

장인어른 기일

처음 맞는 장인어른 기일이다.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민하에겐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먼저 물어보진 말자고 생각했다. 몇 번 얼굴을 대면하지 못했던 분이다. 어떤 분일까 혼자 상상해본 적도 있다. 좀 답답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다. 

어쨌든 우리는 열심히 살고 있다고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지금은 그걸로도 과분하다. 

모쪼록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 

박찬경의 프로젝션적 회화 사전 메모

머랄까. 아직 전시를 보지 않았지만 이미 그런 바이브를 느낀다. 이건 대작이라고. 최진욱에 따르면 오픈스튜디오 품평회격 자리에서 이번 작업을 박찬경이 자신 없어 했다고 한다. 왜냐면 회화는 자신의 본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진욱이 여기서 해석한다. 화가의 무능함 때문에 박찬경 본인이 스스로 등판했다고. 박찬경의 이번 회화는 '아 이번에 회화에 한 번 도전해 볼까?'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부과된 긴급성' 같은 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미지로 보았지만 박찬경의 회화는 회화라기보다 이미지다. 정통파 화가, 페인털리 페인터의 페인팅이라기보다 뭔가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합성적인, 가공된, 이런 수식어가 적합한 무언가 얄팍한 말 그대로 이미지란 것이다. 그래서 사실상 실제 눈으로 보는 게 의미가 있나 싶다. <<안구선사>> 시리즈는 회화라기보다 영화의 미장센처럼 '구성'된 감각이며, '상징주의적인 것'이란 최근 발굴한 나의 주제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 (상징주의적인 것의 심급에 역시 박찬경 자신의 필생의 주제, 잃어버린 소중한 나의 것, 가족, 우리, 민족, 국가의 이미지,  즉, 실재가 도사린다고 느낀다.) <남매탑>이나 <칠성각>은 그야말로 어색한 초보 회화, 합성 이미지, 마치 장종완 같은 포토샵 합성 기반 페인터와 동일한 질적 수준을 보여주는데, 아무튼 이건 나아간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퉁쳐서 여러 주제와 맞물려 쉬운 단어로 '언캐니'하다. '박찬경이 회화?'라고 했을 때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박찬경은 미디어 아티스트다. 미디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업한다. 전시 중에 뒤샹의 유명한 핍홀(peep hole) 작업, <에탕 도네>를 노골적으로 참조한 디오라마가 있다. (<에탕 도네>가 앞에서 보면 여성 나부, 옆에서 보면 얄팍한 이미지의 조합이라면, 박찬경의 작업은 그것을 한 번 다시 한 번 '원본'으로서 참조하며 뒤집는 것 같다. 말하자면 '납작하지만 원본'이란 역설.) 마치 주재환의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를 오줌으로 패러디했듯이, 서울대 현발 계보의 작가에겐 범생이 같은 '이유 있는' 참조점이 있다. 이것이 어쩌면 박찬경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어쨋든 여기서 디오라마는 복합적인 탈식민 상황이 스치는 미디어다. 그에게 회화도 (다분히 서구적인 전통 매체라는 점에서) 그런 것일 것이다.

2026년 3월 12일 목요일

오동진 메모

오동진이 장혜영에게 페이스북 댓글로 "앞으로 영화 만든다고 깝죽대기만 해보거라. 자근자근 씹어주마"라고 한 건에 관하여. 

정치인 장혜영과 영화감독 장혜영을 구별할 수 있을까? 

정치인에 관한 의견은 최대한 폭넓게 제출할 수 있고 그걸  수용해야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게 비록 쌍욕이라도.

2026년 3월 11일 수요일

나이가 들어 글을 쓰기 힘든 이유

나이가 들어 글을 쓰기 힘든 이유를 얼마 전까진 머리가 퇴화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좀 생각이 다른데, 점차 세계를 이해하고 사고가 복잡해져서 하나의 입장으로 사고가 정리되지 않기 때문일지도...모른다. 어느 아재가 말로는 끊임 없이 떠드는데 글은 안 되는 경우, 바로 이 경우가 아닌지 생각해볼 것. 소위 포스트-모던한 글쓰기는...

2026년 2월 10일 화요일

맞고참?의 눈

사비나 30년. 한국 동시대 미술 지형 변모와.. : 네이버블로그

반이정은 내 윗세대 비평가에 속한다. 그들이 봤던 미술계 풍경. 나는 대안공간이 끝날무렵(구기동 풀) 미술계를 본격적으로 접했다. 갭이 매우 크다는 점을 이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2025년 12월 15일 월요일

세마 하나평론상

링크: 관종의 시대와 자기 노출 전략의 미학 :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을 중심으로 –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

집중해서 텍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다. 한 두 번 정도 스킴했으나 결국 제대로 읽진 못했다. 왜 그런진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 글에서 놀라운 점 하나는, 작품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로지 큐레이터의 의도만 가지고서 전시비평을 할 수 있다는 것일 텐데, 호오를 떠나서 이런 관점이 '수상'까지 했다는 건, 어떤 변화에 대한 합의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지도 모른다. 큐레이팅이든 비평이든.

- 이 글은 전시가 일종의 '수치플'을 하고 있다고 봄. 기후정의를 실천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는 자신을 일정 부분 '노출'하는 일. 수치스러움이야말로 여성적이고 해방적이다..?

- 할 포스터는 포르노그래피적인 것과 옵씬한 것을 구별한다. 최소한 내가 지속 가능한 미술관에서 본 것은 옵씬하진 않았다. 오히려 '지속가능성'이란 정상적 규범의 강박적 재현에 가깝달까..?

- 로라 멀비라는 반갑고도 오래된 이론가가 글 속에서 등장하는데. 내가 기억하기로 멀비의 <시각적 쾌락>은 글 대부분을 헐리우드 내러티브 영화가 여성을 재현하는(대상화하는) 방식, 소위 남성적 응시의 구조를 비판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그래서 멀비가 노출증을 해방적 요소라고 보았는 게 정말 그랬나? 싶은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체크해봐야겠다. 아무튼 멀비 같은 오래된 글을 이론에서 더 이상 보고 싶지는 않다. 너무 단순하지 않은가? 보는자 보이는자.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권력과 피해자 등등의 이분법.

- 관종의 원래 뜻에 좀 더 충실했다면 어땠을지. 노출증자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서 더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성기를 시각적으로 쏘아 보냄으로써 당하는 쪽이 당황하게끔 하는 게 목적 아닌가? 바바리맨이 고추를 보여줄 때 작다고 놀리면 당황해서 도망간다는 썰처럼. '과도하다'는 건 노출증자의 생각이 아니라 그걸 쓰고 있는 필자의 생각인듯. 암튼 노출증자의 목적은 성적 쾌락이지 수치스러움? 그 자체가 아니라는 거...

- 인격화된 미술관: 여럿 작품을 모아 둔 전시를 블랙박스화하고 블랙박스의 표면만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큐레이터는 작품과 미술관의 대변인이 될 수 있을까?

2025년 10월 22일 수요일

서문의 정석

 반민수 Auction House: Bronke.. : 네이버블로그

반이정은 이런 글을 잘 쓴다. 전시서문의 정석..?

그나저나 반민수란 작가의 작업은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