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열거한 바가 <굿-즈>의 모든 것을 포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경향이 한국의 컨템퍼러리 아트씬에서 굉장히 낯선 종류의 것임은 분명하다. 오늘날의 예술가는 계산이 필요한 냉소의 시대와 마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쩌면 그들은 전통적으로 (좋은) 비판의 대상이 돼주었던 ‘자본’에 저항하길 기꺼이 포기하고, 되레 그것의 규칙을 더욱 충실하게 따르거나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예술가와 예술이 왜 예외여야 하는지 묻는다. 하나의 거대한 작품을 여러 작은 파트로 나눈 뒤 합리적인 가격을 적극 제시하거나(노상호, 김웅현), 팔리지 않으면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아트상품과 동일한 형태의 작품을 제작한다거나(윤향로), 동정심을 자극해, 혹은 ‘불쌍함’을 팔아서 불로소득을 얻는 삶-행위자 그 자체가 됨으로써(김동규) 말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모든 예술가는 실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와 상품의 논리로 굴러가는데, 왜 예술만은 그렇지 못하냐고 되묻는다.
선량한 예술이 처한 문제
오늘날의 선량한 예술이 처한 곤경을 지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최근에 표현의 자유에 관한 검열 문제가 여럿 불거졌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한 가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예술의 사회 비판적 기능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존중과 보호 받아야 할 그 영역을 검열하는 정치 관료주의를 통렬하게 비난했다. 이때 기대되는 예술과 예술가의 상은 이런 것이다. 이들은 사회의 결점에 끊임없이, 이상적으로 맞서거나 사회를 재생시킬 수 있는 ‘대안’적인 이상을 제시하길 요청받는다.
하지만 이런 요구는 사실상 가짜다. 왜냐하면 검열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끊임없이 그런 자율적 권한은 사회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예술가에게 어떤 정의의 사도 역할을 자임하도록 요구하는데, 이때 일종의 불문율이 존재한다. 예술은 무균질적 장소에 안전하게 앉아서 사회를 가능한 그럴듯하게 비판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때 예술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거나 전복시킬 수 없기 때문에 그 강도는 검열과 같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조정되며, 예술은 여기에 대해서 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예술과 사회는 건널 수 없는(건널 생각조차 없는)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립하며, 또 그런 방식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유지한다. 이때 예술과 사회는 그 자체로 근본적으로 질문되어지지 않으며, 심지어 그 자신을 위해 서로 공모한다.
예술이 아닌, 그렇다고 상품도 아닌
<굿-즈>가 단연 흥미로웠다면, 그 이유는 예술의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질문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레디메이드가 작동하는 방식과도 유사하다. 마르셀 뒤샹이 20세기 초반에 변기를 뉴욕 독립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을 때 소리소문 없이 폐기처분 됐던 이유는, 그것이 통념상 일개 상품이지 예술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변기가 불러일으킨 것은 기호학적 대혼란이다. 뒤샹은 고정된 기호를 해체하고 재약호화하는 특수한 기호의 운동 상태를 고안했다. 이를 통해 예술은 자기규정의 폐쇄회로를 열어젖히고 사회와의 접면을 근본적으로 재고찰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굿-즈>에 출품된 ‘굿-즈’는 그 자체로 상품으로 제작된 예술작품이었으며, 여기서 예술가는 상품제작자이자 상인이었으며, <굿-즈>는 그런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전시이자 아트페어였다. <굿-즈>는 이런 방식으로 굉장한 기호학적 혼란을 양산했다. 누군가는 <굿-즈>를 창조적인 미술전이나 대안적 아트페어라고 부르며 찬사를 보냈다. 또 누군가는 예술이 자발적으로 상품이 되려한 전무후무한 보수적인 행사로 규정, 비판했다. 하지만 이들은 한 가지만 보려고 하거나 전혀 아무 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굿-즈는 ‘예술’이나 ‘상품’이 아니다. 굿-즈는 ‘예술’이거나 ‘상품’이다. 굿-즈는 그저 굿-즈다.
<굿-즈>가 이룬 성취는 분명해 보인다. 레디메이드의 전통에 따라, 현재 예술에 관한 통념을 보다 더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특히 상업과 결탁하는 제스쳐를 취함으로써, 예술과 상품, 예술계와 시장계 사이의 어디쯤에 스스로를 슬며시 놓음으로써, <굿-즈>와 ‘굿-즈’는 기존의 예술의 고질적 문제, 즉 쓸모없는 도덕적 엄숙주의와 공허하기만한 반자본주의적 투사의 자리를 해체하는 한편, 문제의 장소로 깊숙이 들어가 그 메커니즘의 한복판에 예술을 위치시킨다. 이로써 예술은 통합적 생태계에서 움직이는 더욱 활기차고 유연한 기호로 재정의 된다. 예술의 개념은 변하겠지만, 시장 또한 변할 것이다. 이때 예술은 예술 자신이나 사회에 관해 더욱 할 말이 있을 것이다. (15.11.28)
예술이 아닌, 그렇다고 상품도 아닌
<굿-즈>가 단연 흥미로웠다면, 그 이유는 예술의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질문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레디메이드가 작동하는 방식과도 유사하다. 마르셀 뒤샹이 20세기 초반에 변기를 뉴욕 독립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을 때 소리소문 없이 폐기처분 됐던 이유는, 그것이 통념상 일개 상품이지 예술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변기가 불러일으킨 것은 기호학적 대혼란이다. 뒤샹은 고정된 기호를 해체하고 재약호화하는 특수한 기호의 운동 상태를 고안했다. 이를 통해 예술은 자기규정의 폐쇄회로를 열어젖히고 사회와의 접면을 근본적으로 재고찰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굿-즈>에 출품된 ‘굿-즈’는 그 자체로 상품으로 제작된 예술작품이었으며, 여기서 예술가는 상품제작자이자 상인이었으며, <굿-즈>는 그런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전시이자 아트페어였다. <굿-즈>는 이런 방식으로 굉장한 기호학적 혼란을 양산했다. 누군가는 <굿-즈>를 창조적인 미술전이나 대안적 아트페어라고 부르며 찬사를 보냈다. 또 누군가는 예술이 자발적으로 상품이 되려한 전무후무한 보수적인 행사로 규정, 비판했다. 하지만 이들은 한 가지만 보려고 하거나 전혀 아무 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굿-즈는 ‘예술’이나 ‘상품’이 아니다. 굿-즈는 ‘예술’이거나 ‘상품’이다. 굿-즈는 그저 굿-즈다.
<굿-즈>가 이룬 성취는 분명해 보인다. 레디메이드의 전통에 따라, 현재 예술에 관한 통념을 보다 더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특히 상업과 결탁하는 제스쳐를 취함으로써, 예술과 상품, 예술계와 시장계 사이의 어디쯤에 스스로를 슬며시 놓음으로써, <굿-즈>와 ‘굿-즈’는 기존의 예술의 고질적 문제, 즉 쓸모없는 도덕적 엄숙주의와 공허하기만한 반자본주의적 투사의 자리를 해체하는 한편, 문제의 장소로 깊숙이 들어가 그 메커니즘의 한복판에 예술을 위치시킨다. 이로써 예술은 통합적 생태계에서 움직이는 더욱 활기차고 유연한 기호로 재정의 된다. 예술의 개념은 변하겠지만, 시장 또한 변할 것이다. 이때 예술은 예술 자신이나 사회에 관해 더욱 할 말이 있을 것이다. (15.11.28)
* 첨부서류에 전시리뷰를 2쪽짜리 써내라고 해서 한 번 써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