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9일 일요일

가난한 이미지를 다시 변호하며

나는 히토 슈타이얼의 "가난한 이미지(poor images)"를 단순히 열화되고 변형된 정보로 지금까지 생각했다. 슈타이얼은 그 이미지에 프롤레타리아트, 혹은 프레카리아트의 위치를 부여했다. 도발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그리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신지승 감독의 말을 보는 순간 광채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페북에선 지우신 것 같아 여기에다 기록.


영화제 잔혹사 #1

나는 다큐멘타리를 경멸한다.
몇몇의 다큐멘타리들은
주인공의 흥을 죽이고 관객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교회와 절에 간듯 엄숙하고 진지했다.
분명 그들에게도 일상의 흥이 있을 지은데 그들의 흥은 간데없고 상처와고통을 도라지게한다.

그들의 상처와 고통은 일상의 작은 흥으로 버티고 있다는 걸 그들은 애써 무시할 수 밖에 없다 .극장이나 영화제의 문턱은 진실로 영화를 봐야 할 가난한 자들을 내쫓고 있다는 걸

내 영화는 '가난'에 대한 영화다.
경제적 인 가난 뿐 아니라 자연속에서 인간의존재가 얼마나 가난하고 처량한지 하지만 하루 하루 즐거움이 가득하다 ..

그래서 '우리시대의 가난'을 다큐를 찍었다 .
역사앞에서 ,자연앞에서 그리고 먹고 사는 가난안에서 생존하는 영화를 찍었다 .

영화제에서 '영화적 약자' 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고
내 아이들은 매번 마다 관객의 수를 세고 있었다 .
비참 했다 .
내 영화의 문턱을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내 영화를 놓고 돈을 받는가 ?
내가 돈을 원했는가 ?
난 내 영화와 우리 시대의 가난을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닫혀 있었다.

숙소에는 영화제의 흔한 현수막 하나 걸려 있지 않은
유흥가 근처 창문도 없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
새벽에는 이상한 남녀의소리가 들려 잠을 깨게하는 호텔이라는 이름의 모텔이었다 .
영화제의 셔틀버스도 다니지 않는 메인라인과는 차로도 15분 거리였다 .
물어보니 7개방만 영화제관계자에 쓴다고한다 .

우리 가족은 이상한 공간에 유배된 것이었다 . 내 영화는
경쟁도 아니고 주목 할 영화도 아닌 탓에 어쩔 수 없이
멋진 숙소의 순번에서
밀린 것이겠지
하지만 차별과 멸시가 존재하는 어떤 씨쓰템도 저항하고 비판 할 자유는 있는 법이다 .

애초에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다른 영화를 만든 감독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상상 부터 축제의분위기를 떠올렸었다 .
하지만 아이들은 트럭보다 더 어두운 공간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 숙소는 교회 나 절에 온듯 고요했다.
일일히 바쁜 스텝들이 9살 아이들의 복지를 생각할 겨를이 있었을까

우리는 가난하다 .
가야 될지 말아야 될지 걱정 부터 앞섰다 .
숙소는 제공한다고 하지만 4박 5일의 식사비는 어떡하지 ?
하지만 아이들의 영화제라는 새로운 체험 때문에 기대에 들떴다.

우연히 3일째 외국인들은 끼니를 어떻게 해결하지? 돈이 많은 사람들인가 ? 싶어 물어본 뒤에 감독에게는 조식 쿠폰이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
-조식쿠폰을 받지 않았어요 ?
왜 우리만 빠뜨렸는지..이제사라도 좋아해야하는데
항상 가난한이들은 그렇게 생각하게 마련이다

영화제 감독이나 게스트들이 묵고 있다는 mvl 호텔 ,지지향 게스트룸을 카메라로 찍으러 갔다 . 아 이렇게 멋진 곳에 우리가 몇일을 지냈다면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부러움이 앞선다 .

몇년 만에 처음으로 가난해진다 .

42억이라는 풍요로운 예산으로 벌이는 영화제 에서
우리가 가난을 느껴야하다니 ..

내 살아 가야 할 길은 오래
전 부터 정해져 있는 걸 깨달았다.

마지막 날 우연히 길에서 만난 분 과 이야기나누다 오늘 저녁 감독분들을 모시고 ... 비공식 만찬 인가보다 ..하지만 가난한자는 삐딱하게 상상한다 .길에서 만나지못했다면 3시간 뒤 그 자리는 몰랐을 것 아닌가 ?
결국 나는 그 자리를 갈 엄두를 못내었다.
그게 머리좋은 가난한 자들의 보편적 태도 란 걸 알아야 한다.

애초부터 감독의 동의없이 공개된 시놉시스를 바꾸었을때에는 선의거니 생각했다
작품에 대한 흔한 코멘트도 사전에 없었고,보도자료에도 우리 작품은 없었다.
150편을 다 소개하지는 못하겠지.. 이해 할 만 하지만 당한 자는 가난해지게 마련이다.

소위 외국 거장들의 5년도 더 지난 낡은 작품보다 장점을 파악해내는 대우를 해주지 못할 바에야 어설픈 국내 작품들은 초청하기 보단 거장들 작품전이나 하는게 낫지 않을 까 .

안목있는 관객보다 작품을 추켜세워주지못하는 영화제란게 감독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보도자료는 기자가 취사선택하게 초청된 작품 고르게 해주어야한다 .
차별은 용납하지 말아야한다 . 어렵지 않을 것이다 .
돈이 없어 버스로 가면 어떡할 거냐는 가난한 사람의 질문에 끝내 답변 하지 않은 영화제측의 무시 혹은 바쁨 .
하지만 가난한 자는 시간이 지나도 기록하고 기억하게 마련이다.
어느 영화제의 5일동안 우울하고 진지했던 나의 다큐멘타리를 경멸한다.가난과 약자를 옹호 하는 영화들 속에 는 영화적 약자는
존재해서는 안된다.

2019년 9월 24일 화요일

《젠더 트래블》 큐레이터 노트 / 안대웅

오래전 이건용과의 인터뷰에서 들었던 한 에피소드가 종종 생각이 난다. 1970년대 초 이건용은 파리비엔날레에 초대를 받았는데, 당시 한국에서 해외여행은 엄격하게 규제되었고, 더군다나 제대로 된 펀딩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탓에, 작가 신분으로 티켓 값을 감당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끝내 그가 파리에 갈 수 있었던 방법은 ‘입양아 에스코트 제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근 50년 전 한국의 미술이 세계와 연결되는 방식은 그런 비/공식 루트를 통해 이루어졌다.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를 강력하게 표방했듯이, 90년대 이래 한국미술은 꾸준히 국제화에 힘썼고, 국제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대중소 규모의 행사가 끊임없이 기획되었다. 지금 현대미술가의 강력한 이미지 중 하나는 트래블러(traveler)다. 이를 위한 펀딩은 비할 데 없이 증가했고, 리서치를 위해, 더 좋은 아트 레지던시를 찾아서, 국제 미술 행사 참가를 위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은 오늘날 현대미술가에게 익숙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이건용과 파리를 이어준 것이 공교롭게도 입양아였듯이, 예술가의 트래블이 매끄러운 표면 위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피해자로서, 때때로 액티비즘의 중심을 자처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들은 젠트리파이어(gentrifier)로서, 젠트리피케이션의 출발선에 서 있기도 하다. 이들이 더 좋은 펀딩을 찾아 이리 저리 헤매고, 더 좋은 기회와 스펙을 찾아 새로운 전시에 참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미술계 경쟁 체제가 유래 없이 강화되는 것과 불가분한 관계를 맺지만, 또 한편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이들이 궁핍과 죽음에 실제로 내몰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가의 트래블은 실로 안정된 무엇과 거리가 멀다. 되려 트래블이 트러블을 일으키거나, 트래블 자체에 트러블이 포함되어 있다. 트래블의 어원인 고대 프랑스어 travailer에 고역이라는 뜻이 들어있다는 것은, 내게는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이 생각을 진지하게 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안산의 작은 대안공간인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에서 일하며 소위 ‘커뮤니티아트’라고 불리는 한국형 공공미술-제도에 직면하면서부터다. ‘공공미술은 공공선을 위한 것’이라는 제도적 정식 아래에서 커뮤니티아티스트의 역할은 거의 정해져 있다고 봐야한다. 문제는, 커뮤니티아티스트는 애초부터 커뮤니티의 일원도 아니고, 한국의 예술이 기본적으로 삶과 유리되어 있으며, 예술의 근본적인 속성 자체가 삶에 유용한 것도 아니어서, 이들의 활동은 대다수 지역의 트러블을 해결하기 위해 투입됨에도 불구하고, 원하든 그렇지 않든,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의미에서든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사실에 있었다―최소한 공식적 시선에 들어오는 가장 성공적인 프로젝트의 결과는 젠트리피케이션이고, 가장 실패한 사례는 커뮤니티의 잔해이며, 대다수 프로젝트는 이 사이에서 진동하며, 아티스트와 커뮤니티는 둘 다 혼란에 빠진다. 그렇다면 커뮤니티를 향한 커뮤니티아티스트의 진정성은 고작 트래블러의 깊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만약, 민족지학적 라포가 거짓말 따위로 드러난다면, 예술가의 트래블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언젠가부터 미술계에서 사용하는 지역이란 낱말이 신경 쓰였다. 내가 알기로 대체로, 최소한 한국 미술계에서 지역은 비서울권역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에서 서울과 비서울을 가를까? 먼저 양의 문제가 있다. 1993년 중앙일보 기사는 91년 기준, 서울의 전시가 전국의 61%로, 중앙집중화를 지적하고 있다. 아주 최근, 뉴시스에서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정부 지원 사업 10건중 7건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근 30년 가까이 서울과 비서울의 격차가 꾸준히 이어졌다는 수치는 놀랍지만, 특히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이 기사의 전제였다. 많은 것이 곧 좋은 것이다라는. 여기서 대개 많다는 것은 미술대학과 미술관, 갤러리, 미술인구 등 인프라스트럭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이는 지방 소도시가 결여한 것이다. 간단히 지역은 미개발되었다는.

한편, 질의 문제가 있다. 지방 소도시에서 미술 활동은 토착적 미술 단체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이것이 소위 말하는 동시대미술이 아니라는 것에는 지금까지 암묵적 합의가 있어 왔다. 다시 말해 동시대미술이 국제 미술 사회와 연결된 현재주의라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은 지역의 미술이 곧 후진 미술이라는 근거가 되는데, 여기서 시간은 중요한 문제다. 즉, 지역은 서울과 뉴욕의 현재와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과거의 것이라는, 다시 말해서 시대착오적이라는.

이런 토건주의와 현재주의의 응시는 지금까지 지역의 문화적 공간을 발작적 상황으로 몰아넣어왔다. 따라잡기―예를 들어 지역 레지던시와 비엔날레의 건립―와 떨어지기―예를 들어 전통 복원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됐다는 것인데, 어떤 경우에도 중심을 향한 강박이 있다. 그래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중심과 나란히 서길 원할수록 지역은 중심으로부터 포착된 정체성을 극단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역설. 이때의 정체성이란 대개 토착적이고, 미개발된, 원시적인 것이며, 심지어 많은 경우에 여성적인 형상으로 재현된다. 오래 전 레이 초우는 이를 원시적 열정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초우는 중국의 5세대 감독의 영화를 분석하면서, 이들이 중국의 원형을 원시적인 것으로 형상화하는 이유는 남근로고스중심주의를 내면화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밝혔다.

지역 사회를 향한 예술가의 열정―지역을 재현하고자 하는 열정―이 이런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재현 역시 근본적으로 불안정하며, 영화와 다르게, 시간을 두고 장소에 직접 가서 진행하는, 보다 촉각적이고 수행적인 미술이라면 특히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지역 사회를 방문한 예술가가 공동체와 행정과 작던지 크던지 트러블을 겪었다는 이야기는 늘상 잡음처럼 들려온다. 그리고 만약 재현의 트러블이 이렇게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 트러블을 어떻게 성찰하는지가 내게는 중요해 보였다. 이 말은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의 서문에 나오는 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여기서 저자인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트러블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최선의 트러블을 일으킬 것인지, 또 그렇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지가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한다.(76) 나는 젠더의 트러블과 지역의 트래블을 나란히 놓고 생각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이 책에서 버틀러는 재현의 정치의 공과 실을 따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성 주체의 적절한 재현은 여성의 잘못된 재현을 바로잡고 합법화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버틀러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재현의 정치가 여성 주체를 사법적 권력이 생산하는 꼭 그만큼의 재현에 머물게 한다는 것이었다. 버틀러는 묻는다. “여성이라는 범주를 일관되고 안정된 주체로 확립하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젠더 관계를 규제하고 물화하는 것은 아닐까?”(95) 이는 내가 앞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지역 정체성을 둘러싼 재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며, 사실 지역이 여성의 알레고리라는 점에서 두 문제는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지역의 프로젝트에서 예술가는 일종의 민족지학자로서의 태도를 요구받았다. 지역에 들어가서 최대한 동화되는 과정을 거친 다음 소기의 목적을 서서히 이루는 것이, 그런 능력을 가진 것이 지역 프로젝트를 임하는 예술가의 미덕인 것처럼 알려졌다. 지역이 여성이나 어린아이, 노인 같은 취약한 대상이라는 전제는 여기서 명확하다. 하지만 언급했듯이, 이는 프로젝트의 공식적 발화에 불과하며, 비공식적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예술가는 언제나 트러블메이커다.

이 전시에서 나는 예술가의 지역 방문이 단순히 트래블에 불과하며, 그것으로 충분하며, 오히려 최선의 트래블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분홍공장은 연간 기획인 ‘젠더 지리학’에 따라서 예술가를 모집했는데, 프로그램 디렉팅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것이 내게는 일종의 지역 젠더 투어리즘으로 보였다. 내가 감히 이 프로그램을 투어리즘으로 다소 가볍게 언급하는 것을 다소 의도적인 것이라고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아즈마 히로키가 어디선가 말했듯이, 투어의 목적은 약한 연결을 위해서이며, 이는 역으로 강한 연결을 끊어 내기 위해서다. 아즈마에 따르면, 강한 연결에서 인간은 주어진 입력을 단지 출력할 뿐인 기계가 된다. 반대로, 약한 연결에서는 제한되었던 욕망이 다시 머리를 내밀며, 여기에는 소위 말하는 노이즈가 가득하다. 버틀러가 최선의 트러블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듯이, 아즈마에게 노이즈는 곧 기회다. 투어는 그런 면에서 욕망을 자극하는 현대적 고안물이며, 내가 아는 한, 예술가는 욕망을 다스리는 최고의 전문가다.

분홍공장이 투어 프로그램으로 지역과 젠더로 들어갈 수 있는 채널을 열었다면, 예술가는 그 길을 따라 지역의 신비로운 풍경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야기나 역사에, 시장 사람들에, 군대와 지역 행정에 매혹되었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젠더와 지역이라는 양 무게추를 가볍게 만든다고 질타한다면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런 이끌림조차 부정한다면, 내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젠더와 지역이라는 정체성 아래에 억압된 수많은 것의 몫은 여전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끌림은 최소한 무언가를 대면하게 하고 범상한 풍경을 특별하게 만든다. 이 특별함이 꼭 가볍게 취급될 필요는 없으며, 우리는 이를 장소를, 삶을 재성찰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왔다면 여러분은 이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하실지도 모르겠는데, 감히 직접 와서 보라고, 트래블을 권하고 싶다. (19.9.21.)

2019년 9월 18일 수요일

aoa 퀸덤 공연

정말 개웃기네. 안무와 의상 컨셉이 aoa가 주도한 거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외신이 한국의 여자 아이돌을 팩토리 걸이라고 부르는 바가 여기서는 극복되어 있는 것일까? 단지 보이시하게 옷을 입고 마마무 노래를 불렀다고? 백댄서 남자가 트랜스? 혹은 여자 분장을 했다고? 개가 웃겠다.

2019년 9월 11일 수요일

키즈모노가타리 중

 오시노는 능글맞은 얼굴로--말했다.
「그래서, 네 소망은?」
「……모두가 행복해질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면 한다」
 나는 말한다.
 진심의 소망을.
「아무도 불행해지지 않고 끝날, 그런 방법을」
「있을리 없잖아, 그런거」

 바보 아니야, 하고 오시노는 어깨를 움츠렸다.
「적당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런건 초등학생이 도덕시간에 하는 작문의 테마라고. 현실적이지 않아」
「오시노--나는」
「단」
 담배를 입에서 빼내어 포켓에 넣고.
 하네카와와 키스 숏과 그리고 나를 차례로 보며--오시노 메메는 말한다.

「모두가 불행해질 방법이라면 있어」
 그 말에 아연하게되는 저희를 상대에게
 그는 막힘없이 말했다.
「즉, 이번일에 의해 생긴 불행을 모두 나눠서 짊어진다는 소리지--누구의 소망도 실현되지 않지만, 그래도 좋다면, 그런 방법은 있다」

「…………」

 모두가 불행하게 된다--모두 불행을 짊어진다.
 나눠서.
 조금씩--짊어진다.
 결코, 누군가 한사람에게 강요하지 않고.

2019년 9월 10일 화요일

Shane Denson가 편집한 post-cinema reader

https://reframe.sussex.ac.uk/post-cinema/contents/

Shane Denson은 이런 사람:
https://shanedenson.com/bio.html#about

무한 반복 듣기

4분짜리 음악을 듣다보면 정말 그 곡에서 듣기 좋은 소리/꽃히는 부분은 1초나 2초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 1초나 2초만을 안 지루하게 무한반복해서 듣고 싶다. 이런 발상이 요즘 음악을 구성하고 있는 것 같다. 베이퍼웨이브 장르를 민하가 소개해줘서 듣게 됐는데 이게 꼭 그렇다. 물론 나는 음악을 보통보다 잘 알지 못하니 뇌피셜이라고 해야겠다만.

Dominic Pettman, Infinite Distraction

https://www.amazon.com/Infinite-Distraction-Theory-Dominic-Pettman/dp/1509502270

제목 죽이네

리뷰:
https://lareviewofbooks.org/article/hyperdistractions/

2019년 9월 9일 월요일

박권일스러운

http://www.newsmin.co.kr/news/41619/?fbclid=IwAR394O1QclyKtMpyf5b-yIlOM66a-RmbjLR6CR8h2uo8gU4Js3dD-__-5AQ

"당신과 나는 위에 열거한 조국 사태의 다양한 측면 중 어디를 주로 바라보고 있을까? 속된 말로는 어디에 ‘버튼’이 눌리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겠다. 각자의 대답은 다를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조국이라는 이름의 다면체 어느 면에 주목하는가가 당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말해준다는 점이다."

박권일이 또 박권일스러운 글을 썼다. 지지층은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 몰라서 조국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충분히 알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까 박권일은 원인과 결과를 거꾸러 놓고 뭔가 엄청난 비밀을 알려주는 것처럼 칼럼을 쓰지만 아무 것도 실상 알려주는 게 없다. 이 글이 알려주는 건 박권일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말해준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신분상승하고 싶은 중간계층의 분노와 문빠 팬덤의 무조건적인 지지, 둘다 싫은 철탑위의 노동자, 여전히 무존재인 퀴어 사이에는 심연의 강이 흐를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어진다. 박권일 역시 그 통약불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 같다. 마치 추석때 내려가서 부모님 세대와 말이 안 통하는 걸 확인하고 올라오는 젊은 세대의 짜증을 듣는 것 같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중요한 것은 이들을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링크를 걸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일을 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2019년 9월 6일 금요일

메타담론

지식인이 메타담론으로 빠져서 사태에 대해 관전평이나 하고 있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럼 메타에 메타 층위를 거쳐서 세상에... 우리는 출발점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논의는 형식 싸움으로 변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정치의 '목적없는 합목적성'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하자. 이 건은 조국을 임명하냐 마느냐로 심플하다. 여기서부터 시작하고 여기에서 끝나지 않으면 곤란하다.

2019년 9월 3일 화요일

억견

공론장이 붕괴했다.
어떤 정론도 (그것이 있다고 해도) 발화 즉시 억견 이상 이하의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사실 억견만 있었다는 것이 외설적 진실이라면, 어쩔텐가?

조국 기자회견

오늘 긴긴시간동안 확인할 수 있었던 건 한국의 미디어스케이프가 진실로 쓰레기통이었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보수의 미래. 오늘 조국이 보여줬던 건 보수의 미래다. 합리적 이성과 더불어 댄디와 품격을 고루 갖춘. 현시점에서 저정도 매력적인 보수주의자가 집권다면, 미래가 아주 불투명하진 않겠다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조국과 노회찬이 보수와 진보의 대표로 대권을 다투는 그림은 어땠을까.

* 그나저나 매체이론 한다는 분들은 지금의 미디어스케이프엔 관심이 없나? 프랑스 영화나 기생충 블라블라, 납작한 무빙 이미지 따위 말고는?

2019년 9월 2일 월요일

When Attitudes become Form / Zeeman

It has always been the task of the Kunsthalle to inform another audience about the latest trends in fine art. She has done so programmatically in the last four years. The stages of these thematic overviews are: Light and Movement / Kinetic Art (1 965), Weiss auf Weiss / Monochromie (1966), Surrealism / Fantastic Art (1 966), Science Fiction (1 967), Polychrome Plastik (1967), Formen del 'color (1 967), Environments (1 968). These were the most elaborate, but also the most visited and always attended by a number of foreign museums exhibitions of our institute. As a result of this series of exhibitions, Philip Morris Europe's director of the art gallery has been given the means to organize another review of contemporary art. The choice fell on the latest art both in America and Europe. If the 4th Documenta last year showed the art until the beginning of 1 968, then the current exhibition, roughly speaking, should document what has just been written. In the catalog are 69 artists from America, Belgium, Germany, England, France, Hoil and, Italy: in the exhibition there are about 40, which are represented with works; for the activities of others can only be "informed" because their "works" can not be exhibited.

The exhibition When Attitudes Form (Works - Concepts - Actions - Situations - Information) seems strangely incoherent and complicated to its predecessors, as an addition of first-person narrative. The question is permissible: do we deal here with a reaction to the geometry which has overpowered in recent years, with a subjective art, with a new edition of Tashism? Certainly, for most of the artists exhibited here, the previous work process of Duchamp, the intensity in Pollock's gesture, the unity of material, physical effort and time in the happenings of the early sixties as part of an artistic pedigree. But in some cases, it's not purely visual experiences that create the desire to create works, have drawn. Hippietum, rocker existence, the use of orogen had to affect the behavior of a younger generation of artists sooner or later. It is significant that some of the main representatives come from the American West Coast, which is particularly exposed to Eastern influences. Much of this social anti-form, on the one hand the penchant for contemplation, and on the other hand the action carried on by the glorification of the physical and creative ego, has flowed into this new art. There are more mosaic pieces in Europe: the lack of a center is prompting more and more artists to stay in their hometowns and against all the ideas of their respective societies to make consciousness art. At the same time, the desire is felt to burst the "triangle in which art takes place" - studio, gallery, museum. The complex phenomenon has so far lacked the name and pendant, as was the case with the "image-related" pop, op, and minimal. The proposed terms "anti-form", "micro-emotive art", "possible art", "impossible art", "concept art", "arte povera", "earth art" always have one aspect: the apparent opposition to form; the high degree of personal and emotion-based engagement; the explanation of things to art that are not yet identified as such; the shift of interest from the result to the process; the use of poverer materials; the interactions of work and material; Mother Earth as a work material, work space, the desert as a concept.

Striking is the complete freedom in the use of materials and the consideration of the physical and chemical properties in the factory. While polyester and computer fascinated the progressive artist as a media two years ago and at the same time formed the message, in this art the medium no longer seems important: the belief in technology has been replaced by belief in the artistic process. No longer the main feature of contemporary art, the design of space, but the activity of man, of the artist is the main theme and content. Therefore, the title (a sentence and not a slogan) of the exhibition is to be understood: never before has the artist's inner attitude become so directly his work. Of course, it has always been this way: Mondrian and Pollock have let the inner attitude form - but with regard to the finished result, the autonomous object.

The artists of this exhibition, however, are not object makers; on the contrary, they seek freedom from the object, thereby expanding their layers of meaning to be the very important situation beyond the object. They want the artistic process to remain visible even in the final product and in the exhibition.

독일어를 구글번역기로 돌림.
놀랐던 건 이 전시가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것처럼 개념미술을 모아서 보여준 게 아니란 사실. inner attitudes에는 예술가의 머랄까 진짜 태도, 감정이 포함된단 사실. 즉 이 전시의 핵심은 오브제가 아니라 예술가 주체의 퍼포머티브를 중심에 놓았다는 사실. 지적인 개념미술(?)을 컨템퍼러리로 제시한 게 아니란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