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어: 안대웅
◉ 인터뷰이: 김선미
뉴뮤직랜드
▲ 제가 작품의 방법론을 이해한 바로는 이렇습니다. 김선미 작가는 어떤 특정한 상황을 조사, 기록하고 그 산물을 가지고 후반작업을 합니다. 후반 작업은 설치나 영상으로 대략 나옵니다. 여기서 질문인데요. 설치가 영상의 원본 자료를 보여준다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이 어떤 미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죠?
◉ 각 작품마다 설치가 포함된 작업도 있고, 영상만으로 풀었던 작업도 있었고, 혹은 설치가 진행된 후 영상이 마지막 기록물처럼 나온 적도 있습니다. (지금 <유령여행사> 같은 경우는 먼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설치가 진행되었고 후에 영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영상만으로 풀었던 작업들은 전시를 목적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영상 안에서 오히려 설치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에 제가 했던 작업들은 전시를 한다는 계획 하에 작업을 했기 때문에 영상 안에서 오히려 설치가 분리되어 나왔다고 볼 수 있겠네요.
설치가 영상의 원본 자료를 보여 준다… 이것은 제가 <아현동 표류기>를 작업했을 때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모호한 상황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제가 마주했던 실제들 혹은 가짜로 만들어진 것들을 뒤섞여 놓은 채 영상 안에 넣어 놓았는데요. 만약 이 작업이 전시가 재대로 이루어 졌다면, 제가 임의대로 뒤섞여 놓은 여주인공들의 물건들이 설치로 전시장으로 나왔을 지도 모르겠네요(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영상의 원본 자료들이 설치로 나왔던 적은 없었습니다). 어떤 작업을 보시고 얘기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뉴뮤직랜드> 같은 작업에서 특히 잘 드러나는 특징인 것 같아요. ‘사장님과의 인터뷰’ 영상과 엘피 음반 설치는 상당히 뉴뮤직랜드를 재현했다는 측면이 느껴져요. 물론 여기서 재현이라고 하면 완벽한 시뮬레이션은 아닙니다만, 그런 태도가 드러난다는 거예요. 한편 이 작업에서는 디제이와 함께 인터뷰의 소리를 재해석해서 새로운 음악으로 만들었어요. 이건 상대적으로 뉴프로덕션으로 보인다는 거죠. 굳이 이런 두 가지 요소를 병치한 이유가 있을지 궁금해요. 생각하기에 따라선 후자만 있어도 되지 않을까.
◉ 엘피 때문에 설치 얘기가 나온거군요.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뉴뮤직랜드 사장님도 전시장에 한 부분을 같이 채워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설치를 했습니다. 엘피를 설치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민도 됐었는데, 막상 사장님의 고향집에 갔을 때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영상 안에서 디제이 션만과 사장님이 같이 음반을 고르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 장면을 촬영하면서 음악적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대화와 그 순간들이 영화처럼 보였습니다. 화면 속의 영화적 순간이 실제의 모습으로 전시장으로 보여주는 것, 이것을 바랐던 것 같네요.
그리고 션만의 음악에 대한 것은, 디제잉라는 특징, 시간의 조립이 가능한 마치 영상의 편집과도 같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사장님의 인터뷰를 가지고 믹싱과 스크래치를 이용해서 음악을 악보를 만들어 보자 했던거죠.
▲ 실제 일어나고 있었던 사건이 영화처럼 보였다고 기술하는 시각이 흥미로워요. 영화처럼 보였던 것이 특별히 작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왜 그것이 중요했을까? 나아가 영화처럼 보였던 순간을 전시장에서 왜 다시 보여주고 싶었을까? 그것과 실제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구분해서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하게 돼요. “영화처럼 보였던 순간”을 한 번 ‘영화적 현실’이라고 불러 보죠. 영화적 현실에 대한 관심은 말씀하신 디제잉에 대한 관심에서도 잘 드러나는듯 보이는군요.
◉ 길을 가다가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본다고 가정하면, 그런데 그 낙엽이 떨어지는 순간 시공간이 멈추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다양한 것이 있겠죠. 그 장면 때문에 과거의 어떤 것이 상기되거나, 혹은 또 다른 장면과 연결이 되어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것과 같은 경험이 만들어지는 것이 영화적 순간인 것 같아요. 평소에도 가끔 그런 경험들은 있잖아요. 그런데 영화적 현실에서는 만드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시공간을 바꿀 수 있는 조작이 가능하죠. 인터뷰를 이어나가다 잠깐의 호흡을 위해 다른 공간으로 바꾸어버린 것이 그 대화 씬 인 것 같아요. 그래서 둘의 대화가 좀 더 현실 같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죠. 또 이 순간을 전시장에 설치한 것은 단순한 이유예요. 그 순간을 다른 사람들도 같이 공유하길 바랐어요. 그리고 영상 속에 있던 엘피들이 모니터 밖으로 나오면서 영상은 좀더 리얼함을 줄 수 있겠죠.
▲ 낙엽의 비유는 마치 프루스트의 마들렌 과자나 바르트의 푼크툼 개념을 상기시키는군요. <밝은 방>에서 바르트는 푼크툼을 스투디움과 비교해서 설명을 합니다. 푼크툼은 스투디움과 달리 작가의 의도를 벗어납니다. 말하자면 푼크툼은 관객의 주관적 마음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현상이죠. 작가가 느낀 고유한 푼크툼이 어떤 기술을 통해 재현되고 또 관객에게 동일하게 전달 될 성질의 것이라면, 더이상 푼크툼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스투디움에 더욱 가까운 무엇이겠죠. 여기서, ’리얼’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 스투디움에 더욱 가깝다고 말씀하시는 건 단순한 재현의 의미로(보여주는것) 단정한다는 건가요? 그리고 ‘리얼’하다는 것은 영상 장면 속 시간과 공간을 전시장으로 더 가깝게 연결 될 수 있다는 표현이었습니다.
▲ 실제 사물이 작업의 부분으로 채택되었다고 좀 더 리얼해지는 것일까요? 이 ‘리얼’함은 누구의 리얼함일까요? 작가 본인만이 느끼는 리얼함 아닐까요? 그런데, 그 작업 요소로서의 리얼함은 작가가 느낀 그 리얼한 심상과 같은 것일까요? 혹은 인터뷰이, 여기서는 음반 가게 주인의 리얼함과 같은 것일까요? 혹은 관객이 느끼는 리얼함과는? 리얼하다는 의미를 한 번 따져보죠. 순수하거나 본질적이다. 혹은 근본적이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봤을 때 작가가 생각하는 리얼함이 작업의 어떤 상징 체계 안에서 ‘기호화’했어요. (한편 가게 주인이나 관객의 리얼함에 관해선 상대적으로 무관심해보이기도 하고요.) 기호화한 의미는 아시다시피 실재적인 것the real과는 차이가 있어요. 기호화 과정을 통해서 순수의미 그 자체는 많은 부분에서 평면화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작업에서 작가가 느낀 리얼함의 재현적 요소를 발견합니다.
제가 이걸 꼭 찝어서 여쭤본 건, 지역을 사유하는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무언가가 느껴져서에요. 어떤 기시감이랄까요. 다큐멘터리, 기록적 자료를 가지고 표현적 측면으로 갔을 때 자의적인 건지, 아니면 사회적 관계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그런 취지에서 질문을 드렸던 것 같아요.
◉ 어쨌거나 필터링이 거쳐지니까 리얼할 수는 없는 거죠. 그런데 제가 말한 리얼한 것은 엘피를 고르는 영상 장면 안에서 보여지는 것이 리얼하다고 하진 않잖아요. 하지만 그 속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조금 더 현실감을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의 리얼함이었어요. 영상 자체가 리얼함을 전달한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 영상 안에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오브제를 통해서, 그 둘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단 말씀으로 요약 가능할까요?
◉ 처음 디피를 했을 때 거기에 있는 장면을 실제로 디피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처음엔 션만이란 친구와의 협업 작업이었는데, 어느 순간 사장님이 주인공이 되었고, 션만과의 관계가 있다보니까 저는 기록자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러다보니까 사장님도 협업 안에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왜냐면 사장님에 대한 이야길 하기 시작한 거니까요. 션만이란 친구가 군산에서 음악 작업을 하면서 그 음반 가게가 본인에게 특별한 장소에요. 그리고 사장님과의 관계도 있어요. 저는 제3자이고. 그러다 보니까 사장님도 이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협업자가 3명이 된 거죠. 그랬을 때 공간을 사장님을 위해 한 곳을 배정했어요. 사장님께 처음엔 곡 리스트를 받았어요. 특별한 기억이 담긴. 그걸 디피하려고 하다보니 문제점이 발생했어요. 사장님 고향집에 가면 엘피가 굉장히 많은데, 그럼 그 음악을 같이 골라보자 제안했어요. 그러면서 그 영상이 나오게 된 거죠. 그래서 그때 골랐던 엘피가 거기에 설치가 된 거죠. 정황은 그렇게 된 거고.
이 디피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민을 하기도 했었죠. 다시 이때 촬영을 하러 갔었고, 두 사람이 거기서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여태까지 가꾸어 왔던 순간들을 이야기했어요. 그런 과정이 저에겐 영화적 순간으로 보였어요. 그런 장면 없이 그냥 사장님의 물건을 디피하는 것과 그 순간의 어떤 부분을 갖고 나오는 건 다르다고 생각해서 디피를 결정하게 됐어요.
▲ <뉴 뮤직랜드>를 이어서 질문할게요. 영상이 다소 다큐멘터리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요. 인터뷰에 기반한 실제 장소 촬영 및 제시란 점에서. 다큐멘터리와 본인 영상의 차별점이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어떤 포지션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해요.
◉ 그 영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터뷰를 바탕으로 짧은 다큐를 만들 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군산에서 음악 하는 션만이라는 친구와 같이하는 협업 작업이었고, 처음엔 인물중심보다는 뮤직랜드 라는 오래된 공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실제로 사장님과 만나고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공간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많이 옮겨지면서 그곳을 지켜온 사장님에 대한 이야기로 테마가 옮겨졌습니다. 차별점이라면 글쎄요... 잘모르겠네요 이 작품에서는 특별한 지점은 없는 것 같습니다. 협업을 진행하면서 사장님과의 션만과의 관계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서로 관계를 유지하면서 영상을 만들어 내고 마무리 하는 것에 더 많은 중점을 뒀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 작업에서 저는 기록자 역할이었습니다
그리고 포지션에 대한 질문은 전에도 한번 받았던 질문인데요. 저는 작업에 맞는 형식을 찾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내용에 맞춰서 틀도 바꾸고 바탕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의 정확한 포지션은 없다 라고 말하면 너무 무책임한 답변이 될까요? 하지만 장르로 따지면 페이크 다큐 쪽으로 관심이 있기는 합니다.
▲ 계속해서 재현의 문제에 관해 질문하게 되는데요. 사진이나 비디오의 다큐멘터리, 즉 기록적인 성격이란 것은 상당히 신화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프레임 안에 담는 행위 자체에 반드시 해석적인 차원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수전 손탁이 때문에 “해석에 반대한다”라는 말을 한 것이지요. 이 말은 재현에 반대한다로 대치될 수 있는 것이지요.
한 사람의 일생이나 한 공간의 역사는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는가? 재현 자체가 올바른 방법론인가? 그렇다면 지금 현재 상황에서 뉴뮤직랜드는 어떤 방시으로 재현되어져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습니다. <뉴뮤직랜드>로 돌아가자면, 현재 구조화 되어 있는 재현적 상황을 조망하고 비판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과거의 어떤 잊혀진 순간을 일종의 발굴을 통해 재현하고 심지어 낭만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감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이 작업은 자연스럽게 사장님 입을 통해 쇠퇴해가는 군산의 상황과 음악시장에 대한 것, 그리고 본인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의도했었습니다. 인터뷰 방식을 선택한 것도 이런 우려 때문에 최소한의 오해를 줄이려고 선택한 형식이었는데요. 그리고 사장님의 말투 또한 자막에서 그대로 재현하려고 노력했고… 하지만 편집이라는 방식이 사용되는 과정에서 당연히 어느 정도의 저의 생각과 의지가 아예 분리된 채 영상이 만들어 질 수는 없겠지요.
◉ 작업을 하다면서 여러 방향으로 고민을 하게 되잖아요. 처음 시작은 작은 사건 혹은 작은 단서에서 시작하지만, 작업을 시작하다 보면 그 속에서 여러 층위들이 포함되어있고, 또 여러 맥락에서 생각하다 보면, 작은 사건임에도 그 범위를 넓히다 보면 처음 시작과 달리 이야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죠. 그러면 다시 불필요한 부분은 잘라내거나 오해를 줄이는 작업을 하는 것 같아요. 혹은 모른척하기도 하죠ㅋㅋ. 이 과정이 많아지면 원하는 이미지를 사용하지 못하거나, 결과적으로는 포기하는 부분이 많아 지지만 이 부분이 성실히 행해지면, 이야기가 뚜렷해 지겠죠.
◉ 불필요한 부분은 가지치기 같은 거죠. 작품 하나에 모든 것을 담을 수도 없고, 많이 것들이 포함되면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흐릿해질 수 밖에 없겠죠.
◉ 앞에 대답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네요. 시작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죠. 담벼락에 쓰인 낙서부터, 빈집의 사진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범위를 넓히다 보면, 그 장소가 개인의 장소가 아닌 사회적 구조 안의 장소가 되죠. 처음부터 큰 틀을 가지고 시작하지는 않아요. 탐정처럼 작은 단서를 쫓아가다 보면 그곳에 큰 그림이 있죠.
◉ 저한테는 너무 당연한 얘기라… 더 어렵네요. 어떤 필요 때문이라기 보다는 너무 당연한 과정 같아요. 그럼 제가 질문드리고 싶네요. 테이블에 사과가 놓여있는데 거기서 뭘 봐야할까요? 다양한 관점에서 보지 않을까요?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게 되는 이런 과정들이 쌤이 말하는 통합적 서사인가요?
◉ 근데 왜 어느 순간부터 낭만이라고 하는 말이 부정적으로 인식되나요?
◉ 사실 <아현동> 같은 것도 꼭 아현동이 아니어도 되거든요. <옥수동>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유령 여행사> 같은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새만금 관련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실 시화호여도 되고 인천이어도 되고 상관은 없거든요. 지역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건 군산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말이에요.
▲ 오해를 줄인다는 것은 한편으로 오해가 있다는 말도 되잖아요? 그 간극은 작가가 작업하는 데 있어서 어떤 작용을 하게 되는지 궁금해요.
◉ 작업을 하다면서 여러 방향으로 고민을 하게 되잖아요. 처음 시작은 작은 사건 혹은 작은 단서에서 시작하지만, 작업을 시작하다 보면 그 속에서 여러 층위들이 포함되어있고, 또 여러 맥락에서 생각하다 보면, 작은 사건임에도 그 범위를 넓히다 보면 처음 시작과 달리 이야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죠. 그러면 다시 불필요한 부분은 잘라내거나 오해를 줄이는 작업을 하는 것 같아요. 혹은 모른척하기도 하죠ㅋㅋ. 이 과정이 많아지면 원하는 이미지를 사용하지 못하거나, 결과적으로는 포기하는 부분이 많아 지지만 이 부분이 성실히 행해지면, 이야기가 뚜렷해 지겠죠.
▲ 불필요한 부분이란 건 어떻게 선택되나요? 만약 영상에서 서사가 중요하다면 그 이유도.
◉ 불필요한 부분은 가지치기 같은 거죠. 작품 하나에 모든 것을 담을 수도 없고, 많이 것들이 포함되면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흐릿해질 수 밖에 없겠죠.
▲ 약간 화제를 돌려보죠. 지역성에 대한 관심이 작품에서 종종 드러나요. 보통 지역이라는 말은 수도권과 대구를 이룬다고 생각하는데요. 단순히 장소라기보다는 가시화되지 않은 원시적 장소랄까요. 그랬을 땐 지역은 단순한 공간이라기보다 사회적 구조 안의 장소가 됩니다. 작가가 특정 장소를 지향하는 작업을 했을 때 이러한 프레임을 염두에 두시는지요? 그렇다면 왜 그런지 궁금해요.
◉ 앞에 대답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네요. 시작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죠. 담벼락에 쓰인 낙서부터, 빈집의 사진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범위를 넓히다 보면, 그 장소가 개인의 장소가 아닌 사회적 구조 안의 장소가 되죠. 처음부터 큰 틀을 가지고 시작하지는 않아요. 탐정처럼 작은 단서를 쫓아가다 보면 그곳에 큰 그림이 있죠.
▲ 앞서 질문과 연결시키자면, 그 작은 단서가 통합적인 서사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 저한테는 너무 당연한 얘기라… 더 어렵네요. 어떤 필요 때문이라기 보다는 너무 당연한 과정 같아요. 그럼 제가 질문드리고 싶네요. 테이블에 사과가 놓여있는데 거기서 뭘 봐야할까요? 다양한 관점에서 보지 않을까요?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게 되는 이런 과정들이 쌤이 말하는 통합적 서사인가요?
▲ 불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건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건데요. 그 필요한 부분을 조합해 의도를 완성하는 것이 전형적인, 말하자면 스투디움의 제작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외의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적어집니다. 제가 서사가 중요하냐고 여쭤봤을 때 염두에 뒀던 건, 말씀하신 대로 마치 탐정처럼, 어떤 단서를 가지고 발굴적 태도를 가지고 어떤 주제에 접근하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한편으로 그 형식이 몇 가지 예상 가능한 루트를 따릅니다. 예컨대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어느정도 진행 방식을 예측 할 수 있단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 장르 서사를 따르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건 설치 방식에서도 느껴지는데, 말씀드렸던 엘피판 디피의 문제는 제가 봤을 때 박물관의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과거를 수집해서 보존하고 제시하는 거죠. 하지만 이 박물관 프레임에는 분명히 프레임 자체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까 언급나온 ‘가지치기’는 곧 어떤 지식 혹은 자료를 취사 선택한다는 뜻이잖아요? 일견 자의적이죠. 필시 그 장면이 작가의 시선을 끌었기 때문일 텐데요. 사장님과 션만이 추억에 젖어 이야기를 하는 장면, 말씀하신 영화적 순간이 그랬다고 보여요. 그런데 이것이 과거를 제3자의 관점에서 흘러간 과거를 낭만화시킨다고도 보여진다는 거죠. 그것을 재현한다? 그런 낭만적인 순간들을 영상이나 기타 설치물로 재현한다고 했을 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 근데 왜 어느 순간부터 낭만이라고 하는 말이 부정적으로 인식되나요?
▲ 낭만주의가 근대 천재 예술가상을 만들어 냈다는 게 큰 이유고 그게 신화라고 비판했던 거겠죠. 낭만이라고 하는 말은 비합리성과도 비슷할 수 있겠고요. 음… 예컨대 지역과 관련된 낭만주의는 대략 이런 거라고 볼 수 있겠죠. 지역을 굉장히 서울과 대비되는 순수하고 원시적인 자연이라고 보는 입장 같은 거요. 영화에서 많이 보여요. <부산행>이나 <곡성>이 딱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봐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가요? 부산은 어찌보면 서울보다 더 현대화된 도시죠. 곡성은 원래 그런 그로테스크한 도시였을까요? 이런 점에서 지역에 관한 낭만주의는 상당부분 날조된 것이라는 거예요. 마찬가지의 잣대를 <뉴뮤직랜드> 작업에도 들이 댈 수 있을 거 같고요. 작가가 제3자의 입장에서 포착해 낸 영화적 순간이 사실은 실재를 낭만적으로 날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사실은 이런 관념이야말로 비판되고 해체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닐까요. 지역의 목소리를 가시화 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그런 프레임 속에서 지역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이 중요해요.
◉ 사실 <아현동> 같은 것도 꼭 아현동이 아니어도 되거든요. <옥수동>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유령 여행사> 같은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새만금 관련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실 시화호여도 되고 인천이어도 되고 상관은 없거든요. 지역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건 군산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말이에요.
▲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한다고 했을 때조차도 작업의 구조가 특수와 보편을 모두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말 자체가 외삽된 것에 불과하겠죠. 작업은 이미 말을 하고 있어요. 내용으로나 형식으로나.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작업은 지역의 특수한 역사적 사실을 조명한다는 그 관점이 역설적으로 특수한 지역성을 생산해내거나, 최소한 신화적인 측면이 있다고 보여요. 반대로 션만과의 협업 작업은 흥미로워 보여요. 인터뷰를 기반으로 디제잉 음악을 작곡하고 또 새롭게 고안된 음표를 통해서 그것을 시각화 하는 방식 말이에요. 이 작업의 경우 자료를 리서치하고 그걸 정교하게 편집해서 어떤 지역성을 지식으로 규정해 나간다기 보다는 더욱 감각적인 측면을 활성화하는 것 같거든요. 이런 작업은 관객 입장에서 기존의 자료를 습득하고 이해한다는 측면보다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죠. 이런 점이 훨씬 재밌죠. 관객 입장에서.
유령 여행사
▲ <유령 여행사>로 넘어가 보죠. 과거 섬이었지만 어떤 형태로든 변형된 지역을 신청자와 함께 한 번 가본다. 그런 거죠? 실제 지역에 가는 것과 지역에 관한 자료 및 기록을 제시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 프로젝트를 하면 끝을 알 수 없잖아요. 제가 시작은 하지만 나머지는 신청자가 메워 가는 건데, 그걸 펼쳐 놓고 지켜보는 재미도 있는 것 같아요. 제 입장에서는.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반응을 하는지에 흥미가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약간 다크투어리즘인데… 바닥이 메워지고 있는 곳은 불법이에요. 그래서 야간에 몰래 들어가야 해요. 갈 수 없는 구역을 간다. 이런 취지가 큰 것 같아요. 사실 아직 가지는 못했어요.
▲ 전시된 책자에 관해서 좀 설명 부탁해요.
많은 섬이 있지만 그 중에서 4군데 섬과 한 군데 신대륙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자를 만든 거예요. 그 안에 구글지도에서 포착되는 위치와 지명의 유래 같은 내용이 들어 있어요.
▲ 신대륙은 작가님이 지어내신 거예요?
◉ 신대륙 같은 경우는 실제로 있는 땅인데 구글지도에선 황해로 나오거든요. 신대륙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어요.
▲ 작업 진행하시면서 신대륙처럼 의외의 자료에서 연결 지점을 발견하신 적은 없으세요? 예를 들어 섬을 찾으려고 했는데 땅이 아니라고 표시된 곳에서 땅을 발견하신 거잖아요? 최초의 의도와는 벗어난 수집물이 있나요?
◉ 관계 없는 것도 있고 있는 것도 있는데, 관계 없는 것 중 하나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미군 기지가 들어 섰는데 군산 공항이 캘리포니아 땅으로 되어 있어요. 공항 활주로 임대료를 미국에 내고 있어요. 지도상으론 잘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요. 직접 가면 미군 기지가 있어요. 너무 웃긴게 새만금도 철조망을 확장시키며 자기 땅을 불법적으로 늘리고 있거든요. 한쪽에는 미군부대와 붙어 있는 마을에 탄약고를 만든다고 주민을 이동시키기도 했고요. 한 동네는 비어 있는 상태고.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거기까지 가면 이야기가 너무 확장되다 보니까 거기까진 이야기가 안 되고 있어요.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 저는 이런 발굴적 차원에 흥미가 있어요. 보통 아카이브 충동이라고들 하는데. 발터 벤야민의 수집가로부터 온 건데. 세세한 이야기를 건너 뛰면, 할 포스터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인터넷이란 메가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한 데이터베이스아트가 있다. (니콜라 부리오의 포스트 프로덕션을 염두에 둔 말이죠.) 그런데 아카이브 충동이란 게 있다. 이 아카이브 충동은 디지털로 손쉽게 콜라주되는 가상적 차원이 아니라 굉장히 힘든 거다. 촉각적인 거다. 수집가는 완성된 체계를 구축하려고 하는데 사실 수집을 하면 할 수록 알게 되는 건 아, 수집품이 부족하구나, 하는 사실이잖아요? 아카이브는 절대로 완성될 수 없는 거에요. 수집을 하면 할 수록 미궁에 빠지지만 그럴 수록 더욱 수집을 할 수밖에 없는 거죠. 포스터는 이런 특성을 촉각적이고 좀 더 리얼하다고 보고 있어요. 저도 동의하는 부분이고. 아카이브 충동은 포스트모던한, 이른바 알레고리 충동과도 달라요. 알레고리 충동은 상징 체계를 파편화하고 해체하잖아요. 아카이브 충동은 반대에요. 파편적인 것들을 끌어 모아서 구축하려는 충동이에요. 이건 굉장히 이종적인 것의 혼합체일 수밖에 없잖아요. 푸코식으로 말하면 작업은 헤테로토피아적인 장소가 되는 거죠. 엄청난 확장성을 지니죠.
◉ 그러면 여러가지 정보가 하다보면 산발적으로 들어오잖아요. 그걸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 그게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이야길 할 수 있는 계기 아닐까 해요.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 제가 하는 방식과는 반대라고 보여지는 데, 흥미로운 지적이네요. 제가 작업에 접근하는 태도는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라는 게 있거든요. 내가 제어 할 수 있는 범위만 잘 하자는 거죠. 근데 말씀하신 건 막 펼쳐 놓는 거잖아요. 결과적으로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되지 않아요.
▲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 같으세요? 아마도 어떤 특수한 아이덴티티를 결국 규정해내고 재현해서 시각적 지식을 만들어내는 형태로 가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건 아까 이야기했던 지역에 대한 낭만주의라던지 날조된 재현이라는 의도치 않은 결과가 될 수도 있어요.
◉ 보는 사람 입장에선 뭘 느낄 수 있을까요? ‘뭐지?’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그 전제는 의도주의가 가지는 오류인 것 같아요.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순수하게 담고 있고 그 의도를 관객이 읽어내는 것이 작품 감상이라는. 하지만 작가의 의도를 누가 아나요? 작가 스스로도 모르는데… 저는 작품의 구조에 이렇게 관객을 좀 더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차원의 존재자로 상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 얘기만 들었을 땐 프루스트 이런 소설을 보면 주인공이 무언가를 주으러 다니잖아요. 본인만의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 그러는 건데… 사실 어떤 연결고리도 없어요. 그 결과물은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백가지 천가지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 지금 말씀하시는 건 내용 측면인데 제가 강조하고 싶은건 내용은 형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는 거에요. 어떤 내용이 어떻게 전개되고 수렴되느냐도 물론 관심사일 수 있지만 그 못지 않게 그 내용 전개의 형식, 형태, 다른 말로 하면 구조 자체가 어떤 의미로 작동하느냐도 중요하다는 거죠. 다시 이야기 하자면 그 어떤 프레임으로 사태를 본다고 했을 때 그 사태로부터 의미가 발생하는 게 아니라 프레임 자체가 의미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는 거예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그래서 프레임을 해체해야 한다고 믿었던 거고요. <유령 여행사>를 위한 조사에서 끼어든 신대륙은 작가 본인이 염두에 뒀던 요소가 전혀 아니죠. 그런데 작업의 방법론적 구조 상 의외의 것들을 발견할 수 밖에 없었던 거라고 보여져요. 새로운 것을 수집함에 넣는 순간 기존의 체계가 단지 콜라주란 사실이 드러나요. 저는 여기서 <유령 여행사>의 구조가 열려 있고 또 생성적이라고 봐요. 아쉬운 점은 더 많은 의외의 것들이 많을 거 같은데 약간은 스스로 제한하고 계신 점이고요. 아직 과정 중에 있는 작업이니 한 번 시도 해 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조금 더 과감해지셔도? (웃음)
<뉴뮤직랜드>: http://www.yeoinsuk.com/single-post/2016/09/06/예기치-않은-만남-유연한-교류
<유령 여행사> http://www.yeoinsuk.com/single-post/2016/06/24/군산민낯
군산여인숙 비평가 매칭 기고문으로 쓰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