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4일 수요일

엄마

울산 가야지 가야지 하다가 결국 엄마가 아프다고 하니 병실에서 엄마를 만났다. 바늘이 몸안에 있다고 하는데 수술로 빼낼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엄마 몸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수술을 받으면 분명히 몸에 무리가 따를텐데 그게 너무 걱정된다.

병실에 있으면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생명이란게 참 덧없다. 나도 언젠가 이 자리에 눕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엄마가 여기 누워 있는 게 좀 위로가 된다. 엄마가 처음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때 충격은 엄청났다. 그러고 병원의 분위기를 배우게 되었다. 아픈 엄마의 모습도 익숙해졌다. 그럴수도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건 내 삶도 유한하단 깨달음과 같이 간다. 

지금 엄마가 잠든 거 같다. 우리 엄마는 잠을 잘 못잔다. 신경성 때문이란다. 그게 잠을 잘 못자는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잠을 잘 못잤다고 사면 속삭하다. 두시간 잘 잤단 이야길 들으면 뭐라고 반응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엄마 괜찮을거야. 앞으로 오래오래 살자

2021년 11월 13일 토요일

가능성과 변화

가능성이 있다고 변화가 따라오지는 않는다. 넷플릭스에는 1년동안 봐도 다 못볼 컨텐츠가 쌓여있다. 그런 가능성이 1편의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변화로 이끌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가능성은 종종 1편의 영화의 독특함도 포착하지 못하는 산만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용자가 하는 일이란 나중에 볼 목록 정도를 작성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고선 안심한다. 그 목록에서 다시 그 영화를 찾을 일이 없음에도.

그 영화를 다시 찾는다면 그건 아마 사라지는 영화 리스트에 그 영화가 포함되어 있을 때 정도일 것이다. 혹은 넷플릭스가 더 이상 서비스를 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들었을 때? 따라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건 데이터베이스-가능성이 아니다. 오히려 가능성이 사라지는 순간 변화의 불씨가 당겨진다.

2021년 11월 10일 수요일

미술감상과 큐레이토리얼

배경

미술에서 ‘저자(author)’는 보통 캐캐묵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따지고 보면 근대에 발명된, 약 100여년 된 개념에 불과한데, 미술사 책에 나오는 반 이상의 도판의 진정한 주인공은 실상 커미셔너였다. 근대가 들어서자 미술은 커미셔너와 단절하고 자율성을 얻기 시작했다. 저자는 작품의 절대적인 기원처럼 생각되었고, 이것이 1900년대 이후 서양미술에서, 사실 지금까지도 지배적이다. 서양미술을 제도로 받아들인 우리나라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모더니즘 이후의 많은 미술 실천을 저자라는 울타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짓이라고 압축할 수 있지도 모른다. 미니멀리즘의 유명한 연극성, 포스트-미니멀리즘의 제도비판과 장소특정성, 플럭서스의 해프닝과 이벤트, 팝의 대중주의, (뉴장르)공공미술, 관계미술과 사회적 실천 등 이루 다 열거하지 못하는 많은 흐름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 모두 단일한 저자-기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요약된다.

제도 자체도 유사하게 변해왔다. 원래 예술품 같은 진귀한 물건은 귀족이 사적으로 교류하기 위해서 만든, 분더캄머(Wunderkammer), 스투디올로(studiolo), 진귀한 캐비닛(cabinet of curiosities) 등으로 유럽의 각 나라에서 불리는 제한된 방에서만 볼 수 있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혁명 이후 이런 공간적 분할이 재배치된다. 혁명정부는 왕가와 귀족을 위한 궁이었던 루브르를 미술관/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왕실 소속이었던 예술품은 이제 무료로 일반 예술가나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여기에 비치된 다양한 그림을 통해 시민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는데, 박물관은 말하자면 시각 교육의 장으로 기능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공미술관/박물관의 원형이다.

1960년대 후반 하랄트 제만이라는 창조적 큐레이터의 부상은, 최소한, 예술가가 유일한 저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일깨웠다. 이후 큐레이터쉽의 확장은 (그것이 큐레이터라는 저자의 강화를 가져왔다손 치더라도 일단은) 예술가와 작품에 독점적으로 부과된 권위(authority)를 약화시켰고, 대신, 부차적이라고 생각했던 다양한 것—아티스트 토크, 설문조사, 오프닝 퍼포먼스, 카탈로그 및 출판, 전시 티켓 등—이 예술 프로덕션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이들의 주제는 다양하다 하더라도, 더욱 많은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나누고 생산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압축된다. 이후 미술계의 창작 방법을 보면 큐레이터와 예술가 매한가지로 무엇이 큐레이팅이고 무엇이 작업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혼종적인 양상을 보인다. 더 이상 기존의 카테고리로선 이해하고 정의할 수 없는 확장된 실천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00년대 쯤, 유럽에서는 볼로냐 선언(Bologna Process, 1999)이라는 대규모 학제 개편과 함께 아카데미가 자본주의로 물들어가고 있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교육이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진다. 그리고선 큐레이토리얼에서는 ‘교육적 전환(educational turn)’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큐레이터와 예술가는 매한가지로 교육이라는 어젠다, 지식의 생산과 공유라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다. 여기서 핵심은 앎의 자유와 평등이다. 아카데미가 지식을 독점하고 그것을 자본화하는 시대에, 더욱 자유롭고 평등한 앎의 실천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교육을 계급 상승의 동아줄쯤으로 보는 게 상식인 우리나라 사정에 비추어 봤을 때 속 편한 고민이지만 유럽에서는 달랐던 것 같다. 별로 인지되지 못했던 것 같지만 부산에서 친숙한 로저 뷔르겔 감독의 2012년 부산비엔날레 《배움의 정원》은 그런 맥락이 한국에 이식된 것이다.

미술관 교육의 경우

주지하다시피 능력주의는, 최소한, 한국 교육에서 상례화된 인식이다. 어렸을 때부터 시험 경쟁에서 살아남아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매우 평범한 꿈이다. 능력을 키워야 한다. 능력은 공정하게 평가되어야 하므로, 사회는 시험이라는 눙력의 계량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다. 시험은 교육을 고효율 단방향 지식 습득의 장으로 이끈다. 입 아프게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다 아는 ‘교육’은 바로 이런 것이다.

여전히 한 쪽에서 능력과 능력의 계량을 중심으로 아우성이 있다면, 이제 앞서 나가는 기업은 모두 창의적인 인재를 요구하고 있다. 입사 지원 철마다 구글이나 삼성 등 초거대기업의 면접 시험 질문과 답이 ‘카더라’ 소문처럼 인터넷상에 공유된다. (‘아무말 대잔치 했는데 붙었어요’가 레퍼토리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학부모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미술이나 예술을 접하게 하도록 노력한다. 주말이 되면 우리 미술관에도 아이 손을 잡고 미술관을 방문하는 어른 관객을 많이 볼 수 있다. 미술관 교육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이들이다. 대부분 학부모는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는 것처럼 미술관에 아이를 맡기고 이 프로그램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이 사라진다. 또 중고등학생은 거의 본 적이 없다. 국, 영, 수 하느라 바쁠 것이다. 미술은 그래서 아이들의 몫이고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미술관 교육에서 노력하는 건 단순하다. 미술이 모두에게 열려있고 사실은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시립미술관은 그림도 있고 해서 자세히 보면 이해할 수 있는데 현대미술관 전시는 도무지 모르겠다고. 이는 아이든, 어른이든, 입시생이든 누구나 관객으로서 겪게 되는 문턱이다. 미술은 어렵다는 것. 물론 미술의 지식을 얻기엔 쉽지 않다. 미술은 오래된 역사가 만들어 놓은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술을 알기 위해선 선행공부가 필요하다. 그런 지식 없이 미술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미술의 감상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리 주어진 지식과 지금, 여기서 내가 무엇을 느낌으로써 앞으로 만들어질 지식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감수성의 능력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 있다. 누구나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매우 다이나믹한 지적 활동이다. 내가 원래 알고 있는 것과 오늘 내가 겪었던 일과 뉴스에서 본 사건과 작업의 단편적인 느낌을 서로 연관지으면서, 그것을 내 옆의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깨쳐가는 길이다. 그리고 이는, 미술관 밖을 나서면서도 계속 이어진다. 이런 활동을 통해, 심지어는, 동시대미술로부터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에 나오는 어느 챕터로 들어갈 수 있다. 좋은 감상은 그런식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입시생도 모두 포함된다.

우리 미술관에서 기획하는 교육은 모두 이런 아이디어를 바탕에 깔고 있다. 아이들 손을 잡고 미술관에 온 많은 학부모는 여전히 교육 프로그램에 ‘미술 시간’을 기대한다. 무언가를 그리거나 만들어보고 그 결과물을 집에 가져간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정확하진 않지만) 창작자를 키워내는 데 도움이 될지언정, 감상자를 키워내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사실은 좋은 감상자는 키워낼 수 없다. 왜냐면 좋은 감상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미술관에서는 미술교육의 고정관념을 탈피하려고 조금씩 노력하고 있다. 발단-전개-마무리로 가는 관례화된 교육은 최소한 내가 이해하기론 미술에선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수많은 고정관념이, 어른부터 아이까지, 심지어 미술관 제도 안에도 상존해 있다. 그리고 때와 상황에 따라 그것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운 감상의 문제는 그렇게 될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제시하느냐에 달렸다. 이 조건은 프로그램화 될 수 없기에 매번 다르게 기획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럴 때 교육은 큐레이토리얼 실천이다.

21.11.10. 

부산문화재단 포스트-에듀케이터 심포지엄 발제문으로 씀

2021년 11월 8일 월요일

로컬들

우리나라에서 로컬이란 인식이 전방위적으로 생기기 시작한 건 아마 88올림픽 전후, 미술계에선 IMF 이후 유학 세대가 돌아오고 90년대 광주비엔날레가 생긴 시점부터가 아닐까 한다. 국내에 머물던 시야는 삽시간에 ‘지구’ 차원으로 확장됐다. 소위 선진국과의 반강제적 연결은 ‘우리는 뭐지’라는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지역, 지방, 비수도권, 주변, 비주류 등 그중에서도 로컬은 우리를 부르는 가장 세련된 명명법일 것이다. 이 영단어는 자주 번역 없이 그대로 쓰는데, 아마 로컬이라는 말이 글로벌과 함께 탄생했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로컬은 항상 글로벌을 의식한다. 여기에 로컬의 문제가 있다.

로컬에는 항상 모순된 이중의 과제가 부과되어 있다. 하나는 로컬 투 글로벌(local to global)로, 글로벌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로컬 자신의 강박이다. 이때 가정되는 것이 일종의 글로벌 스탠다드, 표준 규약이다. 이런 인식에 따르면, 글로벌에는 보편적이고 선진화된 규약이 있으며, 로컬은 아직 거기에 닫지 못했다. 그래서 들어 봤을 법한 로컬의 행사에는 항상 중앙의 인물이, 그가 서울이든 뉴욕이든, 몇 명씩 끼어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가 ‘못지않다’, 혹은 ‘따라가고 있다’를 표명을 하고 싶어 한다. 90년대 이후 큐레이터를 중심으로 수없이 나타난 국제교류, 네트워킹 행사와 지원 사업을 떠올려 보라.

또 다른 과제는 글로벌 투 로컬(global to local)로, 글로벌 체제가 강요하는 지방색이 바로 그것이다. 실로 로컬은 글로벌 표준에 가까이 갈수록 절대로 같아질 수 없다는 열패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사실 이는 시작부터 불가능한 꿈이었는데, 글로벌은 강대국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체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 낭만주의 이래로 제국의 체제는 이국주의를 소비했다. 로컬은 글로벌 권력의 아주 원시적 상태를 자신의 것으로 정체화할 때만 흥미로운 것이 된다. 그들의 질문: 로컬은 로컬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모종의 합의가 이뤄지는데, 로컬은 글로벌 경기장에 참가하기 위한 티켓을 얻는 대신, 제국의 로컬로 남아 있기를 서약을 한다. 한국 고유한 미술로 단색화를 재발명하려는 여러 큐레이토리얼 실천을 떠올려 보라.

따라서 로컬과 글로벌은 일상 감각에서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 같지만 어떤 경우에든, 사실은 한 몸통이어 왔다. 로컬로부터 시작해 글로벌과 같아지든, 지방색으로 글로벌 체제에 흡수되든, 이는 글로벌과 로컬의 상호 관계 속에서 정립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글로벌이란 개념은 환상에 불과하며 실은 로컬 자체도 그렇다. 90년대 이후 큐레이팅은 한편에서 국제교류라는 환상 속에서, 다른 한편에서 로컬이라는 환상 속에서 글로벌 체제에 참여했다고 봐야 한다.

로컬이 글로벌을 닮으려고 할수록 로컬이 사라지고, 진정성, 지방색으로 규정되어서야 글로벌에 참여한다는 이런 이중구속의 상황을 로컬은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먼저, 로컬은 글로벌이 강요했던 지방색 담론을 고스란히 돌려줄 필요가 있다. 봉준호의 “오스카도 로컬이잖아” 발언을 떠올려 보자. 만약 글로벌을 단일한 규준이 아니라, 서로 다른 다양한 지방에 불과한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면, 로컬이 실패하고야 마는 글로벌 따라잡기 역시 교정되어야 한다. 우리가 따라잡고자 했던 것은 실제론 다양한 로컬이라고. 이렇게 우리는 단일한 것으로 상상된 글로벌 체제 속에서 지방색에 갇힌 로컬의 운명을 구제할 방법을 얻게 된다. 로컬은 다양한 로컬과 연결됨으로써 단일한 지방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로 향할 수 있다. 이때의 글로벌은 인터-로컬(inter-local)이라고 다시 명명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오픈스페이스배 <<로컬 투 로컬>> 카탈로그 글로 씀

2021. 11. 8.

2021년 11월 4일 목요일

어뷰징

엄청 배고프고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이 눈 앞에 있다면 무엇을 먼저 먹을 것인가. 맛있는 걸 먼저 먹는 쪽은 높은 확률로 모든 것에 그런 태도를 취할지도 모른다. 이런 스타일은 좋은 것에 다음이 없다. 지금 당장 그것을 하지 않으면 곧 사라지거나 혹여나 있다고 하더라도 의미가 없어지거나 누군가에게 빼앗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쾌락의 독점주의는 자신에겐 최선의 가성비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한철 메뚜기식 장사의 경우 공동 자산이란 아이디어는 시작부터 불가능하다. 한편 이 쾌락이 극단에 치달으면 적당히 쾌락을 생산하는 현실원칙 자체에 “구멍”을 낼지도 모른다. 어떤 라캉적 실재주의자는 그런 의미에서 쾌락이 작동하지 않을 때까지 쾌락을 착취하고 또 혁명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혹시나 밥솥에 남은 다음 한 숟가락을 기다리던 평범한 사람에게 그것은 재앙에 가깝다. 모두가 한 숟가락 씩 먹으려고 경쟁할 바엔 차라리 경쟁을 멈추기 위해 한 숟가락마저 없애버리자. 이건 아무리 모두를 위한 재앙이라고 주장해봤자 그건 평범한 사람에겐 어뷰징이다. 단숨에 혁명이 일어나면 모를까 그 과정 속에서 나머지 한 사람이 굶어 죽고 또 다른 한 사람이 그것을 지켜 보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사실상 혁명은 죽음조차 불사하며 밥을 처먹은 자기를 기특하게 여기는 수사학에 불과하다.

2021년 11월 1일 월요일

예술과 디자인

얼마 전 ≪서울, 25부작≫의 홈페이지와 관련해 SNS상에서 자그마한 논란이 있었다. 시작은 최황이라는 이름의 작가로, ≪서울, 25부작≫의 웹사이트가 자신이 기획하고 작가로 참여한 ≪광장조각내기≫와 “아이디어와 보여주는 형식”이 몹시 유사하다는 것이 이유였다.[1] ≪서울, 25부작≫의 웹사이트는 미술계 일을 꽤 많이 맡아서 하는 걸로 알려진 디자인 스튜디오인 일상의 실천이 만든 것으로, 공교롭게 일상의 실천은 ≪광장조각내기≫ 웹사이트의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일단, 최황은 일상의 실천이 아니라 ≪서울, 25부작≫의 실무자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아마 ≪광장조각내기≫의 웹사이트의 제작자가 일상의 실천으로 동일하므로 표절까지 가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테다.[2] 그러다 약 4시간 뒤 최황은 생각을 바꾼다. 자신의 SNS 계정에서 최황은 ≪서울, 25부작≫이 웹사이트뿐만 아니라 전시의 주제나 형식까지 모두 유사하다고 판단하여, “창피한 줄 압시다”라는 문장을 필두로 본격적인 비판을 시작한다.[3]

여기서 최황은 일상의 실천을 향해 큰 실망감을 표하며 “문법의 문제가 아니라 문체의 문제”를 문제 삼았다.[4] 문법과 문체는 뭐가 다를까? 이걸 이해하기 위해 『글쓰기의 영도』 씩이나 들고 올 필요는 없겠지만 대략 문법은 일반적이고 문체는 독특하다고 이해하면 여기선 무리가 없을 듯하다. 왜 이런 구별을 했는지는 비교적 분명한데, 최황은 일단은, 일상의 실천을 자신의 ≪광장조각내기≫에 디자이너이자 작가로 섭외했기 때문이다.[5] (그리고 이것이 일차적으로 최황이 비판의 대상으로 일상의 실천이 아니라 ≪서울, 25부작≫의 실무진을 떠올린 이유인 듯 보인다.) 최황 입장에서, 일상의 실천은 비슷한 컨셉의 전시에 비슷한 작품을 다른 듯이 내는 아방하지 않은 작가로 비쳤을지도 모르며, 약간의 심한 배신감과 함께 매머드급의 ≪서울, 25부작≫ 프로젝트가 일상의 실천이 디자인한 홈페이지를 통해 유명세를 탈 경우, ≪광장조각내기≫의 의미가 역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퇴색될 수 있으리라 걱정이 미치는 것도 자연스러운 전개다. 두 작품의 전체적인 컨셉과 형식이 유사하다고 비쳐질 때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작가가 가지는 고민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하다.

더군다나 ≪광장조각내기≫가 안티-공공미술이라면 최황이 보기에 ≪서울, 25부작≫은 ≪광장조각내기≫를 정반대로 차용한, ≪광장조각내기≫가 비판하고자 했던, 누가 봐도 “관-제도”의 공공미술이다. 만약 일상의 실천을 작가의 위치에 놓을 수 있다면, 이는 실로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데, 똑같은 작업물로 하나는 안티-공공미술에, 다른 하나는 정반대의 관-제도 공공미술에 참여한 것이다—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급이 되는 디자이너만 출연한다는 가장 힙한 디자인 비엔날레다. 최황이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여기쯤인 듯하다.

일상의 실천이 내놓은 답변은 조금 다르다. “최황 작가가 찾아온 것은 작년 8월이었다”로 운치 있게 시작하는 이 글은 곧바로 ‘손님 이제 와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는 흐름으로 간다.[6] 그에 따르면, ≪광장조각내기≫의 웹사이트 작업은 원래 2017년 ≪타이포잔치≫에 출품했던 골격을 그대로 사용한 작업이며, 터무니없이 적은 보수로 열정페이를 강요하고 시간도 별로 주어지지 않았지만 의미가 있어 보여서 특별히 자신의 ‘문체’를 “차용할 수 있게 허락해줬다.” 마지막의 표현의 이 복잡 미묘한 울림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아무튼 간에 일상의 실천은 이 논란에서 최황이 애매하게 부과한 ‘작가’라는 타이틀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대신, 일상의 실천은 예술가의 생각을 충실히 구현해주고 싶은 선의의 마음을 가진 디자인 에이전시로 돌아간다—여기서 최황은 당연히 클라이언트가 된다. 디자인은 매우 “섬세한 노동”이며, 3개의 프로젝트는 큰 골격은 공유하고 있지만 “레이아웃, 타이포그래피, 인터페이스, 개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른 접근과 고민으로 만들어진 결과물들이다”라는 것—이것은 모두 기술적인 문제다.

여기에 더해, 이어지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 최황은 기획자와 작가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일상의 실천을 작가로서 섭외할 때 최황은 기획자이지만, 이제는 자신이 기획자가 아니라 작가라 기획의 일반적인 진행을 잘 알지 못하며, ≪광장조각내기≫ 역시 그 자체로 자신의 작업과 다름이 없다고 밝힌다.[7] 이 발언은 물론 자신의 진심을 표출하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부지불식 기획자와 다른 참여 작가 사이의 암묵적 거리를 좁히는 효과도 있다. 이것은 창조적인 큐레이터가 작가의 작업을 도판으로 만들어버린다거나 하는 전시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일로 사실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위해 고용한 어시스턴트의 창의력까지 도용하는 일에 비견될만 하며, 최황이 전시가 작업이었다고 공표하는 순간 이 갈등은 심화된다. 이렇게 최황은 기획자와 작가 클라이언트 사이에서, 또 일상의 실천은 참여작가와 디자인 에이전시 사이에서 몹시 진동한다.


가장 바깥의 표층

두 프로젝트에 관한 논란을 지켜보다 보면 한 가지 의구심이 든다. 유사하든지 다르든지 간에, 양측의 말에서는 전혀 구체적인 참여작이 등장하지 않으며, 마치 웹사이트가 전체 프로젝트를 대변하는 듯 다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웹사이트를 보면, ≪광장조각내기≫의 경우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건 서울의 지도 위에 표시된 작업의 좌표인데, 여기를 클릭하면 간단한 작업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일단은 이것이 가장 먼저 ≪서울, 25부작≫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튼 상당히 깔끔한 레이아웃에 다양한 필자의 텍스트와 작가의 이력, 작업 아카이브가 올라와 있어서 전시 카탈로그를 대체해도 될 정도로 포멀한 인상이다. 그럼에도, 부분적인 작가의 스테이트먼트와 스틸컷, 영상만으로는 대략의 스케치는 가능해도 작업의 전모를 구체적으로 파고 들기는 힘들다—그러니까 레이아웃이 깔끔하게 잘 빠졌을 뿐, 일반적인 카탈로그의 수준 이상의 정보는 아니라는 것이다.

≪서울, 25부작≫의 경우는 어떨까? 먼저 ‘스토리’ 페이지에는 서문 격의 인사말과 참여작가의 한마디가 짧게 올라와 있어서 ≪광장조각내기≫의 ‘광장’과 대응한다. ‘스페이스’ 페이지에서 보여주는 지도의 경우, 라운드가 직각이 되어 있다거나 하는 것만 빼놓곤 ≪광장조각내기≫와 같은 시스템을 사용한 것처럼 보이며, 마찬가지로 클릭하면 간단한 작업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외 ‘시퀀스’와 ‘스토리지’ 페이지에는 각각 진행과정과 보도내용 등을 기록해놨는데, 큰 틀에서 둘을 비교하면 이렇다. ≪광장조각내기≫의 경우, 좀 더 기획자와 참여자의 작가주의 성향이 드러난다면, ≪서울, 25부작≫의 경우, 서문을 통해 드러나는 기획자의 방향성보다는 참여작가의 짧은 후기로 대체했고, 대체로 다양성과 공정한 과정 집행을 사이트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이것은 최황이 쓴 “관-제도”라는 말과 공명한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웹사이트 디자인은 두 프로젝트에서 모두 중요한데, 왜냐면 두 경우 모두에서 서울시에 분산되어 있는 개별 작업을 총괄하는 아이덴티티는 오로지 웹사이트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란 메가-데이터베이스, 어떠한 필요와 판단 이전에 이미 무지막지한 양의 정보가 내 편이라고 믿게 만드는 상호수동적 매체의 시대다—인터넷에 있다면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 끝을 시작으로 습관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타임라인 속에서 가시성 있게 포착되는 이미지는 단순하게 작업된, 말하자면 포스터, 그래픽 디자인이다. 누가 그의 작업을 보러 친히 전시장을 찾을까? 따라서 최근 담론에서 디자인은 예술의 가장 바깥쪽을 감싸면서 거기서부터 안을 향해 예술을 정의하고 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웹사이트에 올라오는 짤막한 소개와 파편적인 이미지가 결국 실질적인 작업의 프레젠테이션이다. 그런 면에서 웹사이트 디자인은 프로젝트 자체의 아이덴티티를 정의하고 프레젠테이션하는 중요한 미적 형식이며, 거듭 최황이 지적한 문체는 프로젝트 전체를 통틀어서도 중요한 문제로 다가온다.[8] 확실히 최황이 지적한 어떤 종류의 문체—예를 들어 타이포그래피 중심의 미니멀한 기능주의적 레이아웃—는 두 프로젝트가 확실히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어떤 면에서 일상의 실천이란 디자인 스튜디오가 가진 독특한 저자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동상이몽

그래서 무엇이 문제란 말일까? 최황은 웹사이트의 형식을 “전시의 구조”라고까지 이야기한다.[9] 앞서 최황은 두 웹사이트의 문체가 유사함을 지적했는데, 거듭 문체는 저자의 독특성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여기서 되돌아오는 질문. 일상의 실천이 가진 ‘문체’, 즉 독특성은 최황의 전시의 구조가 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질문은 일상의 실천은 그 문체를 최황이 차용하도록 허락해줬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두 가지 문제는 사실 공공미술 사업에서 다른 형태로 빈번하게 일어난다. 전자는 예술가가 참여한 관급 사업에서 자주 보이는데, 이때 행정가 입장에서 예술가는 용역이고 작업은 물품이자 자산이다—행정적 프로토콜에서 그런 격이다. 따라서, 결과물에 관해 기관은 배타적 소유권을 가지며, 참여한 예술가가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으며, 성공적일 경우 그것은 담당자나 관리자, 기관의 실적으로 홍보될 것이며, 운이 나쁘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 같은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 별다른 특약이 없다면 대체로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여기서 예술가의 자리는 차라리 디자인 업체다.

후자의 경우 속되게 말해 공공미술의 업자를 떠올려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업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유는, 알다시피 자신의 예술혼을 다른 사람에게, 느낌적으론 부적절하게 팔아넘기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지방의 홍보 캐릭터 조형물이 때가 되면 인터넷 밈으로 주기적으로 떠돈다. 대부분 지방의 공무원의 미감이란 일반인 평균에 운 좋으면 가깝거나 대부분 미달한다. 이런 공무원과 가장 시너지가 좋은 사람이 업자 예술가인데, 이들은 클라이언트의 무리한 요구에 최대한 부합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줄 뿐이다—이유는 다양한데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실적일 때도 있다. 무엇이 좋은 예술인지 판단할 수 없다면 쉬운 방법은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며 그래서 전국 방방곳곳 공원이나 휴양지에서 항상 보게 되는 것이 땡땡 미대 교수의 어시스턴트가 열심히 만들었을 조형물이다—그런데 이 업자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평가가 일하기 편한 디자이너의 긍정적 요건이 된다.

작가의 경우 문체는 오로지 자신에게 귀속된다. 반면 업자는 문체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다. 이를 다시 돌아와서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근대 이후 예술가는 자율적 대상을 디자이너는 도구적 대상을 만드는 것으로 분화했다. 두 가지 상반된 미술의 단면이 일상의 실천과 최황의 예에서 봤듯이, 공공미술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이따금씩 충돌한다. 우리는 왼쪽을 보면서 오른쪽을 볼 수 없으므로, 둘 다 가능하다는 애매모호한 표현은 되도록 피하자. 공공미술은 예술일까 디자인일까? 공공의 이익, 그러니까 되도록 많은 사람의 만족이 중요하다고 믿을수록 공공미술은 디자인에 가까워진다. 반면 독특하고 자유로운 표현이 중요하다고 믿는다면 공공미술은 예술에 가까워진다. 작가주의를 밀어붙인 경우, 작가로서 성공은 차치하고서라도 클라이언트에 만족을 주지 못해 실패한 디자이너가 되기 십상이다—이럴 경우 작업에 붙은 대부분의 별칭은 흉물이다. 디자이너로서 클라이언트의 만족에 가까워지면 실패한 작가라는 평가를 피하기 힘들다—별칭은 역시 업자다. 이렇게 공공미술에 대한 이중잣대는 자유롭고 독창적인 표현이 최대한 다수의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가능할까?

실로 최황과 일상의 실천은 동상이몽을 꾸었다. 최황의 야심은 디자인을 예술로 끌어당기는 것이었지만, 종국에 드러낸 것은 모더니스트적 독단적 저자성이다. 이는 최황이 작가로서, 큐레이터로서, 참여작가를 섭외하고, 또 디자이너를 섭외할 때 주문했던 모순적인 위치성--충분히 독창적이면서도 자기목적성을 가지면 안 된다는--을 독단주의적으로 편취한 것에 기인한다. 여기서 일상의 실천은 큐레이터의 생각을 표현해주는 수단, 즉 디자이너일 뿐이다. 반면, 일상의 실천은 나쁜 업자와 착한 업자 사이에서 진동한다. 일상의 실천은 정반대의 취지를 담고 있는 전시에 같은 계열의 작품을 보낼정도로 의식이 없는 업자-작가이거나, 혹은 클라이언트의 의제에 부합하는 무언가를 안 되는 여건 속에서도 제공해주는 착한 업자-디자이너다. 이런 일상의 실천의 위치는 최황과 일상의 실천 모두 절대로 바란 것이 아니었겠지만, 봤다시피 구조적으로, 시작부터 그렇게 되어 있다. 


소결

이 웹사이트를 둘러싸고 벌어진 자그마한 해프닝은 그래서 우리가 공공미술을 볼 때 부과하는 교묘한 이중잣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같다. 그리고 이 심급에 구조화되어 있는 것은 예술과 디자인이라는 분화된 학제가 서로의 위치를 고수한 채 씨름하고 있는 줄다리기며, 이는 엘리트주의와 대중주의 사이의 익숙한 반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혹은 서로를 편취하는 것 이상이 가능할까? 최황이 바랐던 것처럼, 예술과 디자인은 동료가 될 수 있을까? 같이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상태일까? 모두의, 모두에 의한, 모두를 위한 예술이란 게 가능이나 한 것일까? 

한 가지 사례로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장근희와 김태균은 2015-7년 <파지키트>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는 경기문화재단의 문화 바우처 사업으로, 보통 차상위 계층에 문화상품권 따위를 나눠주는 것으로 일이 진행된다—사업의 성격상 여기서 독특한 예술 실천이란 기대되기 힘들다. 당시 경기문화재단 사업 담당자였던 류혜민은 예술가를 채용해 관례적인 무언가를 넘어보자 했다—그렇다고 해서 '문화를 나눈다'라고 하는 현물 지급의 성격이 바우처 사업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파지키트> 프로젝트에서 바우처 대상으로 주목한 건 파지 줍는 노인이다. 컬렉티브가 보기에 이들이 리사이클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 너무나 주변화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이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파지키트'를 디자인한다. <파지키트>는 파지를 줍고 리어카에 싣고 이동할 때 제반 효율성과 안정성을 강화시키는 도구다. 폐지를 주우면서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지압 점이 새겨 있는 방수 손 장갑이라던가, 자동차 운전자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형광색 고무밴드로 만든 수레 고정끈, 파지 보관 시 비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꽃과, 숲, 그리고 보석함이 인쇄된 방수 덮개 등이 이 파지키드에 담겨 있다. 이 키트는 바우처 사업이라는 한계 내에서, 차상위 계층을 대상으로 현물을 지급하기 위해 디자인 된 물건임에 분명하다—더군다나 이 키트는 철저히 효율적 도구로서 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파지키트>는 도구적인 무언가를 넘어서는 면이 있다. 예술가가 상상하기에, <파지키트>는 전문가의 장비이며, 그것을 장착하는 순간, 남들이 쓰다 버린 고물을 주워다가 생계를 연명하는 불쌍한 노인은 사회의 리사이클러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파지키트>는 파지를 줍는 도구가 아니라 일종의 변신 키트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물론 예술가의 상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상상은 독단주의라고 볼 수 없다. <파지키트>가 제공하는 어떤 효율성, 다시 말해 달리는 차와 거친 고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것을 통해 사용자는 지금 보다는 더욱 나은 삶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파지키트>는 일반성—파지 줍는 노인의 스테레오 타입—을 넘은 독특성이 나타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며, 저자의 독단주의라기보다 전적으로 사용자에 달린 것이다. 이 계기는 클라이언트와 에이전시 사이의 관계 너머의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과 디자인은 무언가 배울 필요가 있다. 


미주

[1] 최황, “제가 2020년에 아르코 후원을 받아 기획했던...”, 페이스북, 2021년 8월 19일, (접근: 2021년 9월 24일, https://www.facebook.com/eltitnu.1984/posts/1335168570212127)
[2] 이런 언급이 특히 그렇다: “디자인은 모두 일상의실천이 맡았습니다. 일단 그래서 표절까지는 아닌 것 같고요.” 위의 글.
[3] 최황, “<서울, 25부작>을 기획한 관계자들, 정말 창피한 줄 압시다.”, 페이스북, 2021년 8월 20일. (접근: 2021년 9월 24일, https://www.facebook.com/eltitnu.1984/posts/1335961470132837)
[4] 위의 글.
[5] 최황은 자신을 큐레이터이자 작가로, 일상의 실천을 작가이자 디자인 에이전시로 모호하게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뒤에 다루겠다. 최황, “정말로 잘못한 게 0.1g도 없기 때문에...”, 페이스북, 2021년 8월 26일, (접근: 2021년 9월 24일, https://www.facebook.com/eltitnu.1984/posts/1339853853076932)
[6] 일상의실천, “최황 작가의 ‘게으른 디자이너’라는 비난에 대한 답변,” 페이스북, 2021년 8월 23일. (접근: 2021년 9월 24일, https://www.facebook.com/ilsanguisilcheon/posts/2617072175094179). 이후 일상의 실천의 인용은 모두 여기.
[7] 최황, “정말로 잘못한 게 0.1g도 없기 때문에...”
[8] 공공미술 프로젝트에서 웹사이트가 이렇게 중요하게 디자인 된 경우가 과거에는 흔치 않았는데, 이는 여러 미디어 환경의 재편성과도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포스트-인터넷이라는 담론이 시사하듯, 현재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구별은 무의미하며, 웹사이트 자체가 작업의 결과물로 프레젠테이션되거나 관급 전시에서 3D 시뮬레이션으로 전시를 공개하는 등 이런 현상은 포스트-코로나를 경유하며 심화되고 있다. 
[9] 최황, “<서울, 25부작>을 기획한 관계자들, 정말 창피한 줄 압시다.”


2021. 11. 1.

동무비평 삼사를 위해 쓰다가 기한을 어겨 폐기한 글을 마무리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