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8일 월요일

로컬들

우리나라에서 로컬이란 인식이 전방위적으로 생기기 시작한 건 아마 88올림픽 전후, 미술계에선 IMF 이후 유학 세대가 돌아오고 90년대 광주비엔날레가 생긴 시점부터가 아닐까 한다. 국내에 머물던 시야는 삽시간에 ‘지구’ 차원으로 확장됐다. 소위 선진국과의 반강제적 연결은 ‘우리는 뭐지’라는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지역, 지방, 비수도권, 주변, 비주류 등 그중에서도 로컬은 우리를 부르는 가장 세련된 명명법일 것이다. 이 영단어는 자주 번역 없이 그대로 쓰는데, 아마 로컬이라는 말이 글로벌과 함께 탄생했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로컬은 항상 글로벌을 의식한다. 여기에 로컬의 문제가 있다.

로컬에는 항상 모순된 이중의 과제가 부과되어 있다. 하나는 로컬 투 글로벌(local to global)로, 글로벌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로컬 자신의 강박이다. 이때 가정되는 것이 일종의 글로벌 스탠다드, 표준 규약이다. 이런 인식에 따르면, 글로벌에는 보편적이고 선진화된 규약이 있으며, 로컬은 아직 거기에 닫지 못했다. 그래서 들어 봤을 법한 로컬의 행사에는 항상 중앙의 인물이, 그가 서울이든 뉴욕이든, 몇 명씩 끼어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가 ‘못지않다’, 혹은 ‘따라가고 있다’를 표명을 하고 싶어 한다. 90년대 이후 큐레이터를 중심으로 수없이 나타난 국제교류, 네트워킹 행사와 지원 사업을 떠올려 보라.

또 다른 과제는 글로벌 투 로컬(global to local)로, 글로벌 체제가 강요하는 지방색이 바로 그것이다. 실로 로컬은 글로벌 표준에 가까이 갈수록 절대로 같아질 수 없다는 열패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사실 이는 시작부터 불가능한 꿈이었는데, 글로벌은 강대국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체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 낭만주의 이래로 제국의 체제는 이국주의를 소비했다. 로컬은 글로벌 권력의 아주 원시적 상태를 자신의 것으로 정체화할 때만 흥미로운 것이 된다. 그들의 질문: 로컬은 로컬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모종의 합의가 이뤄지는데, 로컬은 글로벌 경기장에 참가하기 위한 티켓을 얻는 대신, 제국의 로컬로 남아 있기를 서약을 한다. 한국 고유한 미술로 단색화를 재발명하려는 여러 큐레이토리얼 실천을 떠올려 보라.

따라서 로컬과 글로벌은 일상 감각에서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 같지만 어떤 경우에든, 사실은 한 몸통이어 왔다. 로컬로부터 시작해 글로벌과 같아지든, 지방색으로 글로벌 체제에 흡수되든, 이는 글로벌과 로컬의 상호 관계 속에서 정립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글로벌이란 개념은 환상에 불과하며 실은 로컬 자체도 그렇다. 90년대 이후 큐레이팅은 한편에서 국제교류라는 환상 속에서, 다른 한편에서 로컬이라는 환상 속에서 글로벌 체제에 참여했다고 봐야 한다.

로컬이 글로벌을 닮으려고 할수록 로컬이 사라지고, 진정성, 지방색으로 규정되어서야 글로벌에 참여한다는 이런 이중구속의 상황을 로컬은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먼저, 로컬은 글로벌이 강요했던 지방색 담론을 고스란히 돌려줄 필요가 있다. 봉준호의 “오스카도 로컬이잖아” 발언을 떠올려 보자. 만약 글로벌을 단일한 규준이 아니라, 서로 다른 다양한 지방에 불과한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면, 로컬이 실패하고야 마는 글로벌 따라잡기 역시 교정되어야 한다. 우리가 따라잡고자 했던 것은 실제론 다양한 로컬이라고. 이렇게 우리는 단일한 것으로 상상된 글로벌 체제 속에서 지방색에 갇힌 로컬의 운명을 구제할 방법을 얻게 된다. 로컬은 다양한 로컬과 연결됨으로써 단일한 지방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로 향할 수 있다. 이때의 글로벌은 인터-로컬(inter-local)이라고 다시 명명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오픈스페이스배 <<로컬 투 로컬>> 카탈로그 글로 씀

2021.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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