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박찬경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박찬경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5년 5월 7일 목요일

[스크랩] 민정기의 '포옹' / 박찬경

다음 글은 어쩌면 내가 작업을 하지 않고 공부를 해야 겠다고 마음 먹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글일지도 모르겠다. 박찬경 선생님이 쓴 글 중에선 정동석 사진집 <반풍경>에 실린 글도 좋았는데, 어디서 다시 읽을 길이 없네. 지금은.


민정기, 포옹, 1981, 캔버스에 유채, 112 x 146cm.



민정기의 '포옹'

박찬경(작가, 평론가)

우리에게 근대화의 체험이란, 가설무대 위에서 진짜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나 한다. '국민의식'은 그 근대주의의 정신적 물질적인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 선동과 상투적 신기루에 크게 의존 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우리의 근대성 자체가 연극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볼 수도 있다. '강물에 유람선이 떠있는 대한민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대구 지하철 사고를 연극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반대로 종로타워('화신앞' 자리에 국세청건물)나 한나라당을 연극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산가족상봉, 인천공항, 아니 서울 전체를 단순히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미술이 이야기, 문학, 언어와는 달리 순수한 조형이라는 하나의 태도나 관념이 우리 미술에는 여전히 굳어져 있다. 돌아보면, 1980년대 초기에 한국에서 미술이 어떤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은 일종의 금기에 가까웠다. 나아가 미술이 사회참여적일수 있는지 여부는, 미술이 말을 할 수 있느냐는 원칙적인 질문에 의해 미리, 효과적으로 봉쇄될 필요가 있었다. 반대로 추상화가들은 2류 현상학을 늘어놓거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을 유일한 대화기술로 택했다.
'현실과 발언'이 창립 이후 몇 차례의 전시를 통해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미술이 말을, 엄숙한 선언이나 철학적인 개념어가 아니라 일상의 대화체로, 때로는 속어와 비어를 섞어 말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말은 문자로 똑같이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혀끝에 다다르지 않는, 마음 속에서 웅얼거리거나 머리 속을 맴도는, 아직 명확하게 내뱉어질 수 없는 어떤 이미지들이었다. 민정기의 그림이 오윤, 주재환과 더불어 '현실과 발언' 미학을 대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침묵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 미술에서 서사를 되살렸기 때문이다.

'포옹'이라는 작품에서 그가 선택한 색은 변화무쌍하고 풍부한, 아름답거나 미묘한 색이 아니라 단조롭고 우중충한 푸른색이나 고동색, 적색, 녹색 등이다. 이 그림에서 민정기는,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기술적으로 원숙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아마추어 화가의 표현을 의도적으로 모방한다. 민정기가 '이발소 그림'에서 보았던 것은, 이러한 미숙한 표현이 표현의 대상이나 느낌의 풍부함이 아니라, 대개는 표현의 욕망이나 목표만을 투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 있었다. 이를테면 이 그림에서 하늘은 곧 하늘색이다.
90년대에 들어서야 최정화 등에 의해 유명해진 '키치'의 정치학은 민정기에 의해 이미 80년대에 먼저 발견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정기의 키치는 최정화의 찬란한 '개발미학(aesthetics of development)'의 조울증과는 달리, 여전히 민중의 삶에 깊이 연루되어있는 상태로서의 키치, 키치라고 하기에는 온정이 너무 강하게 흐르는 미학이다. 젊은 작가들이 싸구려 플라스틱의 번쩍이는 표면을 찬양하는 전략을 택했던 반면, 민정기 키치의 민중적인 원천을 다시 복구하려고 했다. 이발소 그림의 표면이 명화를 의미하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서, 민정기는 이발소 그림을 이발소의 내용으로 채우는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 '세수'나 '대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민중공동체에 대한 솔직하고도 대담한 경애, 혹은 '프롤레타리아 낭만주의'는 어떤 다른 민중미술 회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전두환 통치 시대에 이 아무렇지도 않은 그림이 그토록 불순해 보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 그림이 '세수'나 '대화' 보다도 불온해 보였던 이유는, 이 그림이 더욱 풍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정기, 세수(Ⅰ), 1980, 캔버스에 유채, 130.3cm x 97cm.

여기서 보이는 풍경은 아마도 유명했던 '조국근대화'에 의해 망가진 풍경이자, 그로 인해 같이 '망가진 내면'의 풍경일 것이다. 그런데 '포옹'에서 풍경은 단순히 망가져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피안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그림은 현실의 풍경이면서도 피안이며, 개발지구이면서도 에덴동산이다. 현실의 자연주의적 모방도 물론 아니지만, 피안의 상상화는 더욱 아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뭔가 잘못되어있다.
민정기는 눈앞의 실제 풍경을 해석한 것은 물론 아니고, 사람들이 흔히 풍경화에서 기대하는 관념을 그리되, 뭔가 잘못되어 있도록, 기대에 '어긋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도상적 으로도 기이한 상태로 그렸다. 이런 소나무나 절벽은 이 그림 안에서의 도상적인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화면을 가로막는 철조망이나 포옹하고 있는 여인의 붉은색 치마의 낯설음만이 아니라, 소재의 배치 형태 색조 전반에서 뭔가 어긋나 있다.
이런 잘못된 풍경은 그러나 실제로 존재한다. 날이 흐린 날 일산의 호수공원에 가면 조금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또는 소규모 놀이동산이나 관광지에서 경험하는 피안과 현실의 독특한 겹침, 현실과 초현실, 자연과 기계문명, 문명과 유치한 욕망이 서로 포개져 있는 현장들은 실제로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그리고 이 그림은 그러한 현장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 그림이 그러한 현장이다. 이것은 '포옹'에서 도상들이 서로 따로 놀거나, 지나치게 도안처럼 그려졌다던가, 조형적 공식을 정교하게 배제하고 있거나 하는 이 그림의 전반적인 인공성에서 온다.

포옹하고 있는 남녀만 뺀다면, 이 그림은 하나의 독립된 회화라기 보다는, 어떤 '배경'에 가깝다. 옛날 사진관이나 연극무대의 배경 말이다. 이런 배경그림에는, '포옹'에서 인물 땅 바다 섬이 그러하듯이 근경 중경 원경이, 독립된 판넬처럼 기계적으로 분리되기 마련이다. 포옹하고 있는 인물로 인해 배경그림은 이제 완성된 연극이 된다.
그는 그림 그리기의 어떤 순간에 '잘 그리는' 화가이기를 포기하고 연극연출가나 무대 디자이너를 선택한다.(그가 대학시절 유명한 배우였다는 것도 하나의 배경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에서 색은 물감이다. 그것도 알파나 신안 물감에 흰색을 많이 섞은 화학재료의 탁색이며, 국산 물감의 탁색은 트로트 노래의 리듬처럼 일종의 '미학적 불륜', 짜릿하면서도 황폐한 감수성과 결부된다. 연극이란, 명확하게 가짜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 느낌 자체가 너무 현실적인 것이 아니던가. 붉은 물감-치마, 구름기계, 나아가 '포옹'이라는 진부하고도 심원한 소재 자체의 선택 등은 너무 가짜 같은, 진짜들이다.

민정기의 포옹, 다방레지와 도시노동자의 포옹은 60,70년대, 그러니까 황석영이 이농을 묘사할 때의 이미지이다. 아니면 국내에서 컬러티브이가 시작할 때 즈음, 아직 컬러모니터가 방사하는 빛에 충분히 익숙하지 않은 시절의 이미지이다. 이 시대를 거리를 두고 관조하기에는 지금도 너무 많은 흔적이 남아있다. 아니 반대로 너무 빨리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기억에 대한 집단적인 억압은 과거의 갑작스러운 회귀를 낳는다.
최근 텔레비전과 영화 패션 등, 대중문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회고정서의 가소로운 부추김은 이 말해지지 않은 시간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신기루이다. 신기루는 주로 국가와 상품이 미래를 그리고 약속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과거야말로 진정으로 넓은 시장이라는 것을 장사꾼들은 이제야 눈치채고 있는 중인 것이다.
대중매체가 사용하는 회고적 이미지들은 '조국근대화'의 거대한 연극에 대해 여전히 어쩔 줄 몰라하며, 그 주위를 맴돈다. 옛날 영화의 스타일을 보면서 낄낄거리다시피, 과거는 그저 어색하고 우스꽝스럽다. 그런데 그러한 감각이 돈이 되자, 과거의 낯설음마저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가 아니라 그것을 과도하게 잊어버린 현재를 어색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그림이 여전히 갖고 있는 특권 중에 하나이다.

2014년 6월 3일 화요일

굿, 삶과 죽음의 틈새를 대면케 하는 예술 – 미술가 박찬경 #1

http://blog.naver.com/itlara/10169885665

미술가 박찬경은 (FESTIVAL BOM, 3.22~4.18)에서 김금화 만신의 삶을 다룬 ‘판타지 다큐멘터리’ 『갈림길+아시아 고딕』(3.24~25, 극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을 선보였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 서해안배연신굿의 보유자이기도 한 김금화는 1931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나 17세에 외할머니로부터 내림굿을 받았다. 신과 인간 사이에 놓인 그녀의 삶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미신타파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한국전쟁 당시 남으로 내려온 실향민으로써의 인간사를 감내해야 했다. 나라의 만신이 되어 백두산 천지에서 대동굿을, 독일 베를린에서의 윤이상 진혼굿을, 임진각에서 통일맞이굿을 할 때, 그것은 역사의 아픔을 달래는 대의(大義)로서의 진혼제였고, 그녀 자신에게는 개인사의 아픔을 달래는 스스로를 위한 위로이기도 했다. 박찬경은 『그날(2011)』에 김금화가 내림굿을 받던 1948년의 시간을, 『갈림길(2012)』에 한국전쟁과 포개진 그녀의 삶을 담았다. 영화 상영 후에 렉쳐 ‘아시아 고딕’을 통해 영화의 제작과정과 ‘한국적인 것’에 대한 자신만의 시론(試論)과 시론(詩論)을 관중과 함께 나눴다.
박찬경은 고고학적 노동을 무기로 삼는 미술가. 묻힌 것을 꺼내어 붓질로 털어낸 유물의 살비듬은 그의 손을 거쳐 작품이 된다. 큰 아픔을 안고 있기에 묻을 수밖에 없었던, 묻힐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꺼내어 재인(再認)의 지평에 올려 놓는다.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102분·2010)는 안양을 소재로 도시성장에서 망각되고 왜곡된 역사적 시간을 쫓는 여덞 개의 에피소드로 엮었다. 계룡산의 신도안을 배경으로 한 『신도안』(45분·2008)은 일제 강점기와 근현대 속에서 전통 종교문화에 행해진 억압의 역사를 담았다. 이런 그의 작품이 놓인 화이트큐브로써의 갤러리는 미학적 성소보다는 망각된 역사를 호명하는 또 다른 기억과 기록의 장소가 된다.
박찬경은 어느 날 김금화의 자서전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와 마주쳤다. “무당으로서의 삶에 한국의 역사가 다 녹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기(傳記) 영화로 그려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은 두 달에 걸쳐, 『갈림길』은 세 달에 걸쳐 제작되었다. 인간으로서의 무당이 신을 맞이하여 신적인 영역으로 들어설 때, 아우라의 막은 두터웠다. 김금화 만신의 인간사, 그와 맞물려 있는 신의 신화적 시공간을 영화에 담으며 박찬경은 그 경계의 떨림을 한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겪었던 단단한 아우라의 시간과 체험을 모두 담아 김금화의 삶을 장편영화로 만드는 것을 계획으로 삼고 있다.
이제 영화를 따라 가보자. 『갈림길+아시아 고딕』이 상연되었던 『그날』의 시퀀스는 김금화의 재수굿으로 채워졌다. “카메라 대감님 잘 되게 해주소서.”
김금화 만신을 섭외하는데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까.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에도 굿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사진 1). 거기에 출연했던 조성연 씨가 다리를 놓아주었어요. 조성연 씨는 김금화 만신 아래서 수학한 황해도굿 전수자이고 또 영화PD로도 활동합니다. 그런 그에게 김금화 만신의 삶을 영화로 제작하지 않았냐고 물으니, ‘글쎄 왜 안 했을까요?‘ 하더군요. 너무 가까이 있는 존재이기에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판타지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눈길을 끕니다.
“독립영화·예술영화여도 관객에게 호기심을 끌어내야 하죠. 하지만 그보다는 영화가 무당과 무속에 관한 것이기에 종교적 상상과 환상이 묻어있다는 것을 암시하려 했습니다.”
‘판타지 다큐멘터리’로 담아내고 싶은 인물이 있습니까.
“전기(傳記)영화의 형식으로 홍대용·박지원·정약용 등과 같은 조선의 실학자들을 다루고 싶습니다. 유교적 지식을 가진 그들이 청나라를 통해 서양문물과 천문과학 등을 들여올 때, 머리 속에 떠오른 서양의 이미지, 뒤섞인 동서양의 판타지를 펼쳐내고 싶습니다. 그런데 투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웃음).”
『그날』과 『갈림길』 모두 화면이 흑백과 컬러로 나눠집니다. 무구(巫具)같은 것은 컬러로 채색되었고 사람들의 모습은 흑백에 가깝습니다. 개인적으로 피안으로써의 신의 세계는 컬러로, 현실적인 인간사는 흑백으로 그려진 듯 합니다.
“화면의 색을 많이 뺐습니다. 하지만 무구(巫具), 무복(巫服)이 지닌 울긋불긋한 ‘한국적인 화려함’은 살리려고 노력했죠. 시각적으로 전체를 원색으로 그리면 혼란스럽고, 오히려 무구와 무복의 강렬한 색채가 잘 드러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사진 2)
김금화의 내림굿 장면. 화면은 굿판에 걸린 무속화를 훑으면서 빠르게 반복되는 국악기의 선율을 들려준다. 선율이라기보다는 반복과 반복이 교직하며 만들어낸 몰입의 음향 같다. 작곡가 이태원이 이끄는 음악동인 ‘고물’의 소리다.
영화 내부에는 무악(巫樂)이 흐르고 있는데 새롭게 국악곡을 짜넣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태원 음악감독도 같은 이야기를 하더군요. ‘굿의 절반이 음악인데···.’ 저는 영화의 극적인 면과 전체적인 리듬에 있어서 현장에 속해있는 음악만으로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지만 감정을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데는 음악의 힘이 강하죠. 그래서 음악이 빠진 영화를 보는 것은 힘듭니다. 김금화 만신이 인간문화재이고, 소재가 전통문화이기에 서양음악을 넣고 싶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시각적으로는 전통문화가 비춰지지만 청각적으로는 산뜻함과 현대적인 느낌을 추구하여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었습니다. 이태원 음악감독이 이런 느낌을 잘 제시하는 작곡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인적으로 이태원 작곡가가 ‘개념음악가’라고 생각합니다. 『국악에 관한 세가지 논쟁』(2010.12.20-23, 웰콤씨어터) 등 근대를 거치면서 뒤틀어진 국악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음악회의 형식으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작업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요. 본인의 작업 또한 영화를 통한 역사 들춰내기라는 점에서 그런 면이 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도 이태원 음악감독의 공연을 봤습니다. 뭐 그리 어렵게 하냐고 제가 뭐라 한 적도 있어요(웃음).”

그런데 이태원 작곡가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습니까.

“『신도안』을 제작할 때, 박찬욱 감독의 소개로 어어부프로젝트의 장영규 씨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작에 같이 참여했고요. 장영규 씨가 이태원 음악감독을 굉장히 좋아하더군요. 작년에 LIG아트홀이 기획한 『영화음악∞음악영화』(2011.10.27-29)에서 장영규 씨가 큐레이팅을 맡았는데 제가 이태원씨와 잘 맞을 것이라 생각했나봐요. 그래서 함께 『그날』을 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사진 3).”

이번 『그날』과 『갈림길』 제작 전에 특별한 마음가짐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굿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애도(哀悼)의 수단으로서의 영화, 혹은 애도 프로세스를 담지한 영화. 굿에서 느껴지는 종교적인 카타르시스가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의 느낌에 겹쳐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굿에서 느껴지는 희열감을 배가하기 위해 3D방식도 생각해 봤었습니다.”

굿은 가무악(歌舞樂)이 어우러진 입체적 연행입니다. 이런 입방체가 영화의 장(평)면으로 들어갈 때 입체성이 훼손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그래도 리얼리티에 있어 영화만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은 화면이 움직이지 않잖아요. 영화가 지닌 입체성은 시공간의 자유로운 운동성을 통해서 리얼리티에 가장 근접하게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퍼포먼스를 담은 영화(영상)가 그 퍼포먼스를 실연보다 더 입체적으로 재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사진 4).
본인이 생각하는 굿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일단 시각적으로는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하나하나가 다 정교합니다(사진 5). 무엇보다 굿에는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이 달라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돼지머리에 만 원짜리 지폐를 척척 붙이는 장면은 욕망에 대한 솔직하고 투명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작두를 탈 때는 모든 시간들이 성스러워집니다. 그런 성스러움이 속된 세계와 인간의 욕망을 투명하게 향해있어요. 못 먹어 죽은 자는 먹이고, 총각·처녀는 결혼시켜주고. 독특한 ‘날 것’의 세계가 매력적입니다.”
라라 / L A R A d a – Life is LARA! / www.lara.kr

『갈림길』, 역사가 남긴 익명적 존재와 죽음을 향한 소실점

김금화가 내림굿을 받던 1948년을 그린 『그날』에 이어 상영된 『갈림길』은 김금화가 겪은 한국전쟁시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갈림길』에는 김금화 외에 갈림길에 선자들, 그 곳을 한번이라도 지나온 자들이 모두 주인공이다. 김금화와 함께 1998년에 임진각 통일맞이굿을 주최한 소설가 황석영도 등장한다.
김금화와 황석영은 통일맞이굿 당시를 증언한다. 김금화는 북쪽을 향해 있는 철조망을 향해 달려갔고, 황석영은 그곳에서 “통일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김일성의 혼령과 마주쳤다고 한다. 영화는 (배우를 통해) 1·4 후퇴 당시 마을에 들어온 남쪽 치안유지대의 총부리 앞에서 굿을 하는 김금화를(사진 6), 그리고 남쪽으로 피난 온 김금화를 그려낸다. 인천의 어느 섬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면서 김금화는 심한 풍랑과 마주쳤다. 그녀는 사람으로 태어나 무당으로 죽기를 원하며 곧 시체가 될 자신의 몸에 무당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무구(巫具)를 몸에 감기도 한다.
그리고 재연과 증언 사이에 파주 적군묘지에서 진오귀굿을 행하는 장면이 삽입됐다(사진 7).『갈림길』의 진정한 주인공은 그들, 괴물로서의 전쟁이 몰아쳐 죽어간 북한군들의 혼령이다. 죽어서도 고향으로 가지 못한 이들은 북과 가까운 남쪽에 묻혀 역사 속에 익명의 존재가 되어 한반도의 잘라진 허리를 맴돈다. 그들을 달래는 만신은 진오귀굿을 진행하다 울고불고 졸도한다. 산 자가 받아내는 죽은 자들의 역사(사진 8 ).
실향과 이방인, 이승과 저승에 걸쳐있는 김금화 만신의 모습은 마치 ‘경계인’같습니다.
“제목과 같이 김금화 만신의 삶 자체가 ‘갈림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저런 의미에서의 갈림길인 것이죠.”

김금화 만신의 삶을 그려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민간에 오랜 시간 존재해 온 무속신앙이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단 몇십 년 만에 미신으로 규정되고, 멀리 하게 되었나를 김금화 만신이라는 상징을 제시하면서 묻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다양한 문화 속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민족주의의 이면에는 토착적 문화에 대해 ‘쪽 팔려 하는’ 이상한 자기혐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미신타파라는 억압, 그것에 맞서 살아온 김금화 만신의 삶 자체는 인간의 실존이며 무속의 생존과정이기도 하죠.”

굿은 산자가 치르는 죽은 자를 위한 문화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죽음이 떠오릅니다. 영화의 소실점에 묘하게 포개져있는 ‘사점(死點)’에 시선이 잡혀 죽음과 직면할 때, 개인적으로 감상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저 같은 예술가가 함부로 할 말은 아니지만, 현대사회에서 죽음을 추방하려고 하는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생산의 도구이자 부를 창출하는 도구입니다. 노동과 생산과 반대에 있는 죽음은 당연 추방의 대상이죠. 예전에는 문화가 죽음과의 상생의 구조를 가졌습니다. 조상과 죽은 사람, 혹은 그들이 품은 원한이 산 자들의 삶 속에 떠돌아다녔고 이에 대한 상상도 발달했었죠. 하지만 오늘날에는 죽음을 통한 형이상학도 없어지고, 노동과 생산의 정반대에 대치시켜 놓음으로써 ‘추방’과 관리의 대상이 되었죠. 죽음에 관한 상상과 형이상학의 영역이 의료시장, 제약시장, 묘지시장 등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런 시장이 비대해지면서 죽음만이 아니라 삶도 가난해집니다.

레퀴엠 같은 것은 후기로 올수록 죽음에 대한 진지한 사유보다는 ‘스타일로써의 레퀴엠’이 됩니다. 표현과 스타일의 수사로서의 죽음을 차용하는 예술도 많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게라도 죽음에 대한 사유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삶과 죽음이 단절되었다고 생각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의 과정을 진행합니다. 사후에 아무런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죽음 이후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을 뿐이지 사실 단절된 것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불연속적이면서도 연속된 세계입니다.”
화면 속 파주 적군묘지. 진오귀굿이 진행되는 동안 무당의 눈물과 통곡은 짙어진다. 마르크스가『자본론』에서 말한 “우리는 산 것만이 아니라 또한 죽은 것 때문에 고통 받는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 땅이 빚어낸 고통의 역사에서 고집스레 사라지길 거부하는, 배회하는 영혼들. 그 익명화된 이름을 만신은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하나 불러주고 있었다(사진 9). 그런 순간을 지나는 무당의 고통은 어떻게든, 어떤 형식으로든 우리가 겪은 역사의 고통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윽고 그녀는 적군묘지의 한 복판을 날뛰다, 쓰러진다. 중간에 카메라는 쨍한 햇볕을 비춘다. 화면을 할퀴는 듯한 가야금 소리가 들리고, 죽음과 역사의 밑구녕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영화는 아니, 이 땅의 역사는 지켜보기 힘드니 허리 한번 펴고 하늘 한번 쳐다보며 숨돌리라고 권하는 것 같다.
『갈림길』을 제작하면서 기억에 남는 해프닝 혹은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파주 적군묘지에서 촬영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힘들었습니다. 묘지에 가면 어떤 특유의 냄새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굿을 하는데 강한 에너지들이 엉기는 것이죠. 묘지에 담긴 역사의 은유들이 굿판의 에너지와 감기니 그 현장을 오랜 시간 지켜봐야 하는 저로써는 감당이 안 되더군요.”

김금화 만신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표정이 밝지 않으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잘못된 것이 있나요?“ 여쭈었더니 “아니, 우리가 잘 못해서”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영화 속에 당신께서 행한 굿이 흡족하지 않았나봅니다. “굿을 좀 더 잘 할 걸”이라고 말씀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편집자 주
만신 만신은 한자를 빌려 ‘萬神’이라 쓰기도 하는데 보통 여자 무당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만신이란 단어는 굿판에서 자주 등장한다. 예로 만신말명이라 하면 무조(巫祖)를 의미하는데 무당을 뜻하는 만신과 조상을 의미하는 말명이 합쳐진 것이다.
내림굿 무병(巫病)을 앓거나 몸에 신기(神氣)가 있는 사람에게 신을 내리게 하고 신을 받는 굿. ‘신굿’, ‘신명굿’, ‘명두굿’, ‘강신제’라고 부르기도 한다.대동굿 지역 수호신인 당신(堂神)을 모셔놓고 마을의 평안과 생업의 번창을 기원하는 굿으로 황해도 해주·옹진·연평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성행하였다.진혼굿 망자의 혼을 달래고 좋은 곳으로 천도하기 위한 굿.시론 試論 시험 삼아 해 보는 의론.시론 詩論 시에 대한 이론. 또는 그 평론.시퀀스 Sequence 특정 상황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묘사하는 영상 단락 구분. 몇 개의 신(scene)이 한 시퀀스를 이룬다. 신은 한 개 이상의 쇼트(shot)가 이룬 장면. 다시 말해 쇼트가 신을 이루고 신이 시퀀스를 이룬다.재수굿 집안의 안녕함과 재복 그리고 자손의 창성, 가족의 수복을 비는 무속의례.
무구 무당이 굿을 할 때 사용하는 여러 가지 도구. 신ㆍ칼ㆍ작두ㆍ방울ㆍ부채 따위의 도구와, 장구ㆍ자바라 따위의 악기가 있다.
무복 무당이 굿을 할 때 입는 옷.
국악에 관한 세 가지 논쟁 이태원이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음악동인 고물의 뮤직다큐멘터리 작품. 국악과 관련한 사회적, 창작적 측면에서 비롯되는 논쟁거리를 던지고 국악의 패러다임을 논한다.
진오귀굿 죽은이의 한을 씻기고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망자의 가족이 무당을 불러 벌이는 굿으로 씻김굿과 같은 말이다



[인터뷰]굿, 삶과 죽음의 틈새를 대면케 하는 예술 – 미술가 박찬경 #2

http://blog.naver.com/itlara/10169885574


굿, 삶과 죽음의 틈새를 대면케 하는 예술 – 미술가 박찬경 #2
By 송 현민 (Song, Hyun-min) on November 13, 2012


‘아시아 고딕’, 한국적인 것에 대한 상상력

『갈림길』 상영 이후 박찬경은 제작과정과 자신이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생각을 풀어낸 렉쳐를 가졌다. 박찬경은 현대미술가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의 작품을 빌려와 굿에서 느낀 종교적 숭고의 감정을 말했다(사진 10). 정선의 진경산수화의 미학을 새롭게 발견하기 위해 19세기 서구 낭만주의의 시선과 개념을 빌려온 ‘한국적 낭만주의’, 이와 같은 선상에 있는 ‘아시아 고딕’ 등 개념적 조어(造語)을 설명하기도 했다. 중국의 감독 호금전(1931~1997)과 태국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970~)이 만든 ‘오늘날의 영화’에 차용된 ‘전통적인 이미지’를 예로 들며, 전통의 현대화라는 이름 하에 진행되는 각 국의 ‘전통활용법’을 논하기도 했다.
『그날』과 『갈림길』이라는 영화의 건축물을 지었던 설계도를 공개하면서도 박찬경은 본인 영화의 ‘심장’은 죽음에 대한 사유에 있다고 강조한다. 파주 적군묘지, 죽은 자 위에 또 죽은 자가 묻히고, 묻히면서 망각된 죽음과 역사는 결국 산자들의 삶을 위한 것이라며 렉쳐는 마무리되었다.

강연을 재밌게 보았습니다. 19세기 낭만주의를 이끈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 등의 그림이 굿을 소재로 한 영화에 영감을 주고 활용되었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보통 이런 과정을 거쳐 구도를 잡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이죠. 카메라 앵글을 잡을 때, 어떠한 그림이 떠오를 뿐이지 그림과 촬영 장면을 일대일로 대응해야겠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대신 결과적으로 보면 내가 그런 생각을 했었구나 하게 됩니다. 가끔 의식적으로 그렇게 선정하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사진 11과 12).”





보통은 ‘우리 것’을 보여주는 작품에 ‘우리 것’만 담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동서양의 구분 없이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어 숭고의 감정이라고 할 때, 이것은 동서양 구분 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인데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것을 프리드리히와 진경산수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습니다(사진 13과 14).”





박찬경은 서양미술사의 한 축을 이룬 19세기 낭만주의와 진경산수화의 교차지점에서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감정은 동서양의 구분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적 낭만주의’라는 그만의 조어(造語)가 가능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외래의 개념과 용어를 우리 문화에 끌어오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저는 남의 것처럼 되어 있는 ‘우리 것’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우리 것’보다 더 친숙한 서양의 용어와 개념을 가져와 우리의 전통문화를 바라보며 다가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괜찮다’는 대답에 내재된 위험성 같은 것은 없을까요. 예를 들면, 우리의 것을 그들의 시선으로 재단하는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문제도 걸릴 텐데요.
“위험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위험성을 너무 두려워하면 안 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값싼 오리엔탈리즘들은 물론 문화를 저해시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담론의 비판이 두려워 저와 같은 시도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월드뮤직은 민족음악의 고유성, 그리고 그것의 보편화를 위해 전 지구적으로 음악의 유통을 주도하고 있는 ‘그들’의 시선과 구미에 맞췄다는 점에서 비판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의 이런 작업과 비교가 되지는 않겠지만 김수영 시인은 『거대한 뿌리』에서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 것과 비슷한 차원인거 같아요. 지금 전통은 너무 멀리 있기에 어떤 형태로든지의 접근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들이나 예술가들이 실제로 오리엔탈리즘담론 비판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예 전통문화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의 것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툴이라면 우리의 것이 아니어도 응용하여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주창하는 ‘한국적 낭만주의’ ‘아시아 고딕’은 이런 생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고딕’에서 ‘고딕’ 또한 18-19세기 서구에서 유행한 ‘네오-고딕’ 문학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딕은 산업사회에 대한 좌절감, 과학기술에 대한 불안감, 자연에 대한 깊은 감정을 담고 있는데 이러한 감정이 서양에만 있지는 않았잖아요. 동양과 서양의 구분을 떠나 어디에나, 어느 시대에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죠. 우리의 문제를 바라보고 이해하는데 그런 툴을 가져다가 우리의 것을 더 잘 볼 수 있다면 못 쓸 이유가 뭐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국악계에서 현대화라는 명목 하에 뿌리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창작국악은 이제 상품으로 유통되기도 합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전통문화·민족문화를 응용·변용한 작품들은 사회참여적인 모습을 강하게 띠었다면, 현대화되는 오늘날의 전통문화는 이런 정신보다는 스타일과 상품화에 대한 추구를 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상업화와 상품화는 문제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이 상품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예술의 기능과 역할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죠. 예술에서 산업의 색채를 벗겨내야 한다는 것은 편협한 사고인거 같습니다. 산업이라는 이름을 달고도 그 안에서 좋은 예술을 할 수 있고, 싸움과 투쟁이 가능합니다. 아마 1970년대와 1980년대처럼 전퉁문화가 사회참여의 도구로 활용되는 시기가 또 올 것입니다. 정치적인 운동이나 사회의 변혁이 새로운 문화의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거니까요. 그럴 때 그런 정신이 생기고, 지속되다가 변화되는 시대에 맞춰 또 다른 변주를 만들 것입니다.”

라라 / L A R A d a – Life is LARA! / www.lara.kr
예술의 웰빙을 위하여
박찬경은 자신만의 작은 우주, 미술가(家)에 머물러 이미지의 집을 짓고, 다시 미술가(街)라는 길위에 올라 끊임없이 걷는다. 그 걸음은 미술과 세상, 미술과 삶에 수많은 발자국을 남기고 뚜렷한 길을 낸다. 이 땅의 미술가들의 보편적 행복을 위해 수많은 길과 교차로를 만들고, 보고 보이는 것을 빚어내는 이들을 그곳으로 불러 모은다. 2004년, 공사가 중단된 흉물스럽게 방치된 서울 목동 예술인회관 점거 퍼포먼스를 했던 것도, 『국제전시, 문화 세계화의 한국적 굴절과 전유』, 『한국미술의 ‘비판성’과 작가의 ‘관심’-민중미술과 현재』와 같은 미술담론에 관한 논문을 꾸준히 생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지금, 그는 무엇보다 영화제작에 주력하고 있다.

표현에 있어 사진, 영화, 교육, 퍼포먼스, 미디어아트, 글 등 다양한 도구를 활용합니다.
“저의 작업은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향해 있습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예쁘다’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풍부한 이미지입니다. 현상의 핵심을 찌르는 이미지를 얻고 싶은 욕망이 늘 있어요. 영화 한편 다 보고 난 뒤에 전체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어느 한 장면을 기억하잖아요. 그렇게 기억에 맺히는 ‘그림’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겠죠.

만약 미술을 안 했다면 무엇을 했을 것 같습니까.
“아마 영화를 일찍 더 만들었지 않았나 싶어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출강하고 있습니다. 주로 무엇을 가르칩니까.
“요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실기수업을 맡고 있습니다. 교육의 현장에서 난점을 많이 느낍니다. 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매번 뿜어내는 총체적인 변화와 자유인데 무의식적으로 규범과 과제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실에서 예술이 생기있게 나오는 경우가 드뭅니다. 단지 예술이 나 자신, 나의 삶과는 별개로 저기 있는데 어떻게 다가갈까를 주로 고민하는 것 같아요.”

작업의 대상이 되는 근현대의 시간층은 본인의 삶을 이루는 한 지반이면서도,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의 삶을 이루고 있는 지반이기도 합니다. 본인의 작품을 보는 학생들의 반응과 호응이 궁금합니다.
“학생들이 오히려 제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거 같습니다. 달리 생각해 본다면 제가 작품에서 제시하는 외래문화 수용의 문제는 미술(교육)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서양예술의 내용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과 박물관 제도와 경영방식, 시장, 비평과 저널 등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뼈대를 갖추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한국예술의 제도, 제도가 빚어낸 복합체를 믿지 말라고 해요. 그들은 몇백년 동안 쌓아온 전통 속에서 그것이 서로 맞물리면서 구축한 구조가 있는데 우리는 형태만 만들었을 뿐 실제로 그들의 구조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요. 그걸 깨고 다른 것을 하자기보다는 그런 것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고, 학생들에게도 그런 불신의 자세를 갖도록 합니다.”

문화부장관이 된다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문화부 장관이 된다면’ 예술가들의 복지에 대해서 고민을 하겠습니다. 지금 문화예술 관련 기금이 작업의 성향과 장르에 대한 고려 없이 배정됩니다. 전체예산의 1%에 해당되는 문화예술 예산 중 1% 안에서도 실제적인 창작에 대한 지원은 얼마 되지 안 됩니다. 어느 지자체나 정부나 문화예술을 존중한다고 하고, 문화도시를 표방하지 않는 지자체가 없는데 참 모순인거죠.”

본인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너무 어려운데요. 아름다움이란 유토피아와 관계된다고 생각합니다. 유토피아는 때로는 위험하기도 해요. 그 안에 내재된 정치적인 것들이 잘못 빚어지면 파시즘으로 나타나기도 하죠. 그러나 상상을 정치와 자본에 빼앗긴 시대에 예술에서마저 그런 상상을 하지 않는다면 끔찍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유토피아를 상상하기위한 도구라고도 볼 수 있겠죠.”

미술인으로써 국악인들에게 추천해줄 만한 미술작품이 있습니까. 혹은 관계된 그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박생광, 민정기, 오윤 등의 그림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사진 15, 16, 17). 또한 김지하 시인의 일관된 관심, 즉 아시아의 정체성이 어떻게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한국문화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한번쯤 짚어 봐야하는 중요한 사상가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가 최인훈, 김성동, 황석영 등의 작품에 나타나는 전통적인 소재들과 민담 등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박찬경과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국악에 관한 직접적인 이야기가 중심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또한 그를 향한 질문에 ‘국악’이라는 단어를 얹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박찬경의 작품과 답변은 국악의 역사 속에 있는 명암의 ‘갈림길’을 떠올리게 했고, 이내 국악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가동시켰다. 본 인터뷰의 소실점은 여기에 맞춰지기를 바랄 뿐이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살펴본 그의 작품들과 에서 발표한 『갈림길+아시아 고딕』을 통해 그의 이름은 필자에게 ‘찬·경(鏡)’ 즉, 차가운(찬) 거울처럼 느껴졌다. 그의 예술은 이 땅의 역사(史)에 익명으로 죽어간 것(死)을 비추는 거울이며 역으로 죽음(死)의 은유를 통해 산 자들의 역사(史)를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나는 이 언어유희에 담긴 은유를 고수하기로 했다.
그런 점에서 박찬경의 예술은 반성의 기술을 담고 있다. 그 반성의 기술이 근대화라는 다리를 건너온, 아니 아직 도착지점에 당도하지 못한 오늘날의 국악이 고개를 내밀어 취해야 할 요소라는 생각이 인터뷰를 정리하는 지금, 아득히 밀려온다.

편집자 주
오리엔탈리즘 원래 유럽의 문화와 예술에서 나타난 동방취미(東方趣味)의 경향을 나타냈던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제국주의적 지배와 침략을 정당화하는, 서양의 동양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태도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박찬경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1997년부터 <블랙박스 냉전 이미지의 기억>(1997), <세트>(2000), <파워통로>(2004), <비행>(2005), <신도안>(2008), <그날>(2011)과 <갈림길>(2012) 등을 발표했다. 1997년 금호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쌈지아트스페이스, REDCAT, Atelier Hermes, PKM 갤러리, Akademie Schloss Solitude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2004년 에르메스 미술상을 수상했으며,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2010)로 전주영화제 한국장편부문 대상을, <파란만장>(2011)으로 2011년 베를린영화제 단편부문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 인터뷰를 진행하는 데 도움을 준 FESTIVAL BOM의 성민경 팀장님, LIG ART HALL의 박은영 매니저님, 그리고 BOL PICTURE의 김민경 PD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전
[출처] [인터뷰]굿, 삶과 죽음의 틈새를 대면케 하는 예술 – 미술가 박찬경 #2|작성자 라라

박찬경 정리 블로그

http://www.kimshopping.com/skin/board/etopia_cheditor/print.php?bo_table=g08_b002&wr_id=65


<비행_Flying>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전후 최초 남북 직항로의 개설을 소재로 한 비디오 설치 작업이다. 작가는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남한 대표단을 태운 비행기 안에서 항공 촬영된 미방영 방송 소스를 재편집하였다. 이 비디오에는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가 석방된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 선생이 견우직녀의 설화를 소재로 작곡한 <더블 콘체르토>가 사용되었다. 윤이상 선생에 대한 헌사이기도 한 몽환적 비디오를 통해, 탈냉전과 냉전, 전쟁과 평화,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의 기묘한 관계가 드러난다. <독일로 간 사람들(2002)>은 전후 1960년대 국내의 암담한 상황에서 독일에 광부, 간호사로 갔던 사람들을 촬영한 사진시리즈작업으로, 국내에서는 사진집이 출간된 바 있다. 이 밖에 사진과 풍경에 관한 비평적인 신작이 소개되며 <파워통로> 등의 구작도 함께 전시된다.

2013년 9월 6일 금요일

"압축성장 속에서 압축될 수 없었던 나머지들"

The Way of Man-Guitars, but no Weeping


Installation View of Heart of Men at KIMUSA

<Heart of Men>

"남자는 실업자나 노숙자처럼 정밀한 사회적 통계로는 잡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남자는 처음부터 사회적 정체이기 보다는
하나의 문화적 정체, 나아가 하나의 ‘내러티브’ 이기 때문이다.
그는 못될 경우 ‘잘 차려 입을수록 궁색해 보이는 남자’이며,
잘된 경우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남자의 길’로 떠난 전설의
쌍기타’(배영환)이다. 그는 실존하기 보다는, 하나의 소문으로써,
이미지로서 떠돈다. 꽃무늬 남방, 백구두, 가짜 자개장, 신파
노래의 가사는 어떤 이야기들, 압축성장 속에서 압축될 수 없었던 나머지들이다."

- 박찬경, 대안공간 풀 디렉터


"They are not recognizable by precise
social statistics on the jobless or the homeless because
they have been, from the beginning, an aesthetic identity.
In the worst scenario, they are ‘men that look badly off in
nice clothes’ and at best, they are ‘legendary figures that
chose their ‘way of genuine men’ though they married out of love.’"

- The Way of Men,’ Prologue of the Exhibition of Pool the Alternative Space
An excerpt of the text written by Park Chan Kyong









FAST BREAK

전시명: FAST BREAK 

 
장소: PKM GALLERY, Beijing
기간: 4월13일- 6월30일
 

참여작가: 고승욱, 공성훈, 김범, 김보민, 김상길, 노재운, 박진영, 박찬경, 배영환, 송상희, 윤정미, 조해준, 플라잉시타, 함진

속공의 한계 Limitation of Fast Break

박찬경 (작가)  

 최근 십 년간 한국미술을 일정한 작도법에 의해 지도 그리는 것은 매우 어려워졌거나, 그 동기를 잃어버린 듯 하다. 그것은 우선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인식론적인 지형이 예전처럼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세계’의 이념적 정치적 지평과 만나면서도 구별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분단체제라는 놀라운 역사와 현실에서 비롯된다. 정치의 소제목으로서의 ‘분단’이 아니라, 한반도의 정신병리학을 포섭하는 하나의 실질적 힘이자 문학적인 비유로서 ‘분단’이라고 말할 때 말이다. 

  외국 사람의 시선에서 ‘분단’이라고 하면, 의례 세계적 차원에서 동서 냉전의 지역적 부산물로 간단히 정리될지 모르겠지만, 지역 주민이 외부의 시선이나 인지로부터 고립되는 것이야말로 분단사회의 폐쇄적 특성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상황은 매우 다르게 보일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도 내게는 윤정미 사진의 핑크와 블루가 남북한의 색채상징으로 읽힐 정도이다. 분단은 소위 ‘군사적 모더니티’라 불릴 수 있는 사회,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서부터 가족관계, 동서갈등과 종교적 편향에 이르기까지 사회전체를 강력한 힘의 장 속에 밀어 넣었다. 한국 현대 미술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이를테면 서구현대미술로부터 역사를 제거한다든가, 추상표현주의의 수입을 한국전쟁의 상처와 억지로 연결했다. 또 강력한 대학권력을 통해 이단적 사고를 차단하고, 무엇보다도 형식주의와 오리엔탈리즘 안전하게 결합하는 것을, 나는 분단체제로 인한 사회전반의 ‘휨’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아마도 여기 소개되는 작가들은 이러한 시대에서 반쯤 빠져 나온 첫 세대일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기술(記述)을 여전히 80년대에 사로잡힌 40대 초반 남자 작가의 입버릇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실제로 갤러리들이 밀집해있는 서울 인사동이나 사간동의 식당에 앉아서 외국에서 온 큐레이터를 만나는 동안, 서울의 주변풍경은 내가 하는 말의 설득력을 차례로 빼앗아 가버린다. 금융자본과 고급상품 숍들이 밀집해있는 서울 강남의 카페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미 긴장감이라고는 없는 관광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DMZ 투어를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제 한국에서 분단의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은, 가끔씩 한국전쟁과 분단의 트라우마를 사용해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영화관 말고는 거의 없다. 같은 시간 동안, 자유에 관한 복잡한 정의들과 무관하게, 한국에서 개인과 이익집단이 누리는 자유는 최근 20년 동안 마치 한풀이를 하듯이 터져 나왔다고 할만하다. 이것은 단지 급격한 변화가 아니라, 하나의 극적인 반전이다.
 
  현실감을 박탈하는 정신의 떠돎이랄까, 의미의 부유(浮游)랄까 하는 현상으로 인해, 실제 현실에 대한 심각한 감각이나 개입이 일상에서 부여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흩어져 버렸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새로운 현실자체가 작가들에게는 또 다른 충격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DMZ가 관광지가 되어 별다른 충격을 주지 않는 것 자체가 낯설다. 이는 기묘한 이중적 상황이다. 왜냐하면, 박진영의 사진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군사적 긴장과 그로 인한 사회전체의 양분과 같은 ‘과거’의 일이,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20년 동안 과거의 흔적을 하루가 다르게 걷어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걷어내자 과거와의 단절로 인한 그것의 회귀는 더 갑작스럽게 나타나고 우리를 얼떨떨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유리한 상황에 있는 야권의 두 후보는 70년대 개발주의와 인적으로든 이미지로든 연결되어있다. 정치와 함께 종교계와 언론계에서는 냉전시대의 흑백논리가 오히려 더욱 강화되는 것 같아 보인다. 북한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아, 그렇지, 북한이 있었지’ 라고 되뇌는 식이다. 박진영이 휴전선 부근에서 차라리 하늘이나 별로 눈을 돌리듯이 말이다.

  과거로부터의 지나친 단절감이라는 면에서, 2007년 현재는 80년대와 아주 다르다고 생각되는 동시에, 80년대 초의 상황과 유사한 점도 있다. 김보민의 그림이, 전통과 현대의 충돌이라는 80년대 초의 도상적 관심을 다시 등장시키는 것이나, 나 자신을 포함해 조해준, 배영환, 송상희, 노재운 등이 ‘기억의 정치’를 활용하는 것 등도 이 동떨어진 두 시대가 공히 겪었고 겪고 있는 단절감을 표현한다. 그러나 80년대의 그 이전에 대한 단절감, 또는 과거에 대한 망각은 대부분 억압에 의한 것이었던 반면, 현재의 망각은 대체로 ‘자유’라고 칭해지는 것에 의한 것이다. 문민정부이래 유명해진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같은 TV의 과거사 ‘진실폭로’ 프로그램은 억압과 검열로부터의 자유를 이미 제목 자체로 표현하지만, 이제는 수 백 개의 케이블 채널과 인터넷 정보더미 사이에 쉽게 묻혀버릴 자유를 뜻한다. 신학철, 박불똥 등 80년대 초의 민중미술이 기억의 직접적인 억압에 저항하는 몽타주를 사용했다면, '패스트 브레이크Fast Break' 전에 소개되는 상당수의 미술은 다다이스트적 몽타주로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훨씬 산만해진 기억회로를 뚫고 나가야 했다.

 물론 그 방식은 작가마다 다양하다. 조해준이 아버지와의 협업을 통해, 고전적인 방식으로 개인적 기억을 회복하는 것으로 대응한다면, 노재운은 디지털 세계에서 해체된 정보 파편들을 단지 유보적이고 불확실한 상태로 결합시킨다. 조해준이 아버지를 통해 기억해내려고 하는 과거사의 세부를 촘촘히 묘사하면서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저항한다면, 노재운은 오히려 집단적 기억상실증을 묘사하면서 과거의 ‘아득한 존재감’을 화면의 뒤쪽으로부터 서서히 나타낸다. 조해준은 그림을 사용하지만 오히려 사진적인 세부를 추구하고, 노재운은 사진을 많이 사용하지만 그림의 추상성에 더 가깝다. 어쨌거나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기억을 되살리는 노력이 길게 잡아야 불과 50-60년에 걸친 짧은 시간이라는 점이다. 

 빨리 돌아가는 사회일수록 향수는 강한 법이다. 북한 ‘속도전’의 거울인 남한의 압축성장은 말 그대로, 짧은 시간을 노동의 강도를 극대화함으로써 늘려 살아온 과정이기 때문에, 그 심리적 시간은 사실상 훨씬 길다. 따라서 물리적으로는 최근의 사건이라고 해도, 그것이 쉽게 잊혀질 수 있는 만큼, 향수도 강렬해지는 역설이 생겨난다. 이것은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압축될 수 없었던 것, 비인간적 시간의 배후에서 늘 합류할 수 없었던 욕망, 주체, 내러티브 등이 스프링처럼 어느 순간에 튀어나오는 것과도 같다. 배영환의 작업이 향수적 코드를 사용하면서도, 대중문화의 클리쉐를 적극 인정(recognize)하고 과장함으로써 오히려 뒤집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나 역시도 윤이상의 엘리트 현대음악을 북한 민족주의의 거의 저승에나 있을법한 신파성과 연결하면서 비슷한 시도를 했다. 송상희가 외국의 성노동자가 지은 시에다가 ‘달맞이꽃’이라는 센티멘탈한 제목을 붙인 것도 유사한 맥락이다. 이것은 타르코프스키의 롱테이크와는 달리, 질척거리고 섹시하며 다소 변태적인 ‘압축 향수’이다.

 이런 맥락 뒤집기라든가, 아이러니의 사용이라는 점에서 최근의 한국미술은 오히려 ‘역사적 팝아트’(팝아트를 리차드 프린스나 신디 셔먼, 댄 그래험, 또 동시대 세계전역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변종들에까지 확장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이런 말을 쓸 수 있을 것이다)에 가까운 면모를 보인다. 고승욱은 김밥을 만들어 여기다가 ‘밥아트’라는 민중주의적 각색을 했는데, ‘밥아트’의 진정한 아이러니는 밥의 역사에 섞여있는 여러 가지 마음고생을 이해할 때 비로소 생겨난다. 같은 맥락에서 황세준은 최근 공성훈의 그림을 이렇게 분석했다. “작가는 혐오하기 위해 인공적인 것을 날 것으로 강조하고, 강조된 날 것의 인공성에 매혹 당한다. 그것이 공성훈의 작업이 ‘역사’를 재현하는 방식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집중적으로 망가지기 시작한 남한의 모습을 고발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그것에 매혹되는 실존을 통해 혐오하는 방식. 또는 내면 없는 고통의 조립을 통해 외면이 곧 내면임을 입증하는 방식” 이다.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은 그러나, 반드시 고통스러운 것만도 아니다. 서울의 속도 체험은 잦은 변화로 인한 일상의 재미, 순간적으로 발산하는 에너지, 분단의 통일로의 반전, 한국이 곧 선진국이 되리라는 때로 건전할 수도 있는 희망 따위를 포함한다. 서유럽, 일본, 북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 짜릿한 변화의 즐거움. 이것은 아마도 윤정미와 함진의 플라스틱-유토피아에서 다소 연극적인 비평으로, 고승욱의 반-생산적(anti-productive)인 놀이에서 ‘발랄한 장자(壯子)’의 태도로 나타나는 바일 것이다. 플라잉시티는 이러한 긍정의 힘을 건축적 상상과 결합한다.

 지금도 전철을 타고 서울 북쪽의 변두리에서 시내로 들어 가다 보면 거대한 쓰레기 더미를 지나치게 되는데, 이것은 아파트를 짓기 위해 한 마을을 철거한 현장이다. 이러한 현장은 플라잉시티가 ‘예술적 영감’을 얻는 곳이다. 플라잉시티는 서울의 난개발 기억을 하나의 유희적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해방적 상상력의 소스로 전환시킨다. 사실 김상길의 사진에서 위생적 공간으로 나타나고 김범의 청사진 드로잉에 우울한 역상으로 나타나듯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모더니즘적 의지는 여전히 서구 민주주의와 기능주의 도시계획의 큰 줄거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플라잉시티는 헬리오 오이티시카(Hélio Oiticica)나 상황주의자(Situationist)들의 구상과 유사하게, 오히려 난개발 체험로부터 제3세계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발견하는 쪽이다. 그것은 미셸 푸코가 설명하는 것처럼 일상과 내면에 스며드는 미시적 권력관계보다 훨씬 폭력적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 보다 훨씬 엉성한 사회가 갖는 여전히 독특한 개방성과 일상의 여유분들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특히 우주선도 만든다는 청계천의 ‘창조적 노동자’의 발명과 서울의 복잡한 골목을 누비는 어린이의 심리-지리적 상상은, 다시 한국적 고도성장의 에너지 원천을 변증법적으로 되먹임하여 설명해준다. 한국식 표현으로 ‘맨땅에 헤딩하는’, ‘몸으로 때우는’ 힘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시야에서 보게 되면, 김범의 드로잉은 우울한 자아의 투영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이 엉성한 사회, 효율적 구조를 강변하지만 실은 매우 비효율적인 낭비사회에 대한 노련하고 지혜로운 해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 김상길 사진 속의 매우 기능적인 건물들은, 너무 엉성하지 않은 척 하기에 뭔가 수상하고 결함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에 이른다.

 패스트 브레이크Fast Break란 흔히 스포츠, 특히 농구나 배구 경기에서 상대편이 방어 태세를 가다듬기 전에 재빨리 공격하여 득점을 노리는 속공速攻을 뜻한다. 이 제목은 먼저, 분위기를 일변하는 신선한 계기, 재충전의 기회, ‘예술적’ 팀워크를 연상시킨다. 나는 한국의 여자배구팀이나 핸드볼 팀이 키 큰 서양선수들을 상대해, 놀라운 팀웍을 구사하며 속공을 취할 때, 한국 근대화의 모든 것을 동시에 떠올리곤 했다. 그 엄청난 투지와 맹목적인 훈련 말이다. 그러나 속공은 다소 기회주의적이라고 할 만큼, 게임의 운치와 적진에 대한 예의를 떨어트린다. 한국의 프로 기사가 싸움바둑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최고수를 물리칠 때, 이러한 집요하고 놀라운 수읽기가 어쩐지 바둑의 아취를 빼앗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한국사회가 공격적인 마케팅과 새로움의 찬양을 통해, 세계에서 전반적으로 예의를 떨어트리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류’의 중심 역할을 하는 한국의 TV연속극은, 일본에서는 향수를 자극할 것이고 중국과 동남아에서는 근미래의 일로 보이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속공의 또 다른 형태인 일종의 시간차공격이다. 드라마뿐만이 아니라, 무역에 기초한 한국경제나, 서구문화 수용 정도도 크게 보면 이러한 시차의 유리한 면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옛날식으로 다소 촌스런 질문을 한번 던져보자. 우리가 술자리에서 나누는 직관적 얘기라고 해서, 격식을 갖춘 글에서 꼭 회피해야 할 필요는 없다. 동시대의 한국미술이 동아시아에서는 어떤 점에서 유리한가? 나는 그것이 중국이나 일본의 미술에서 찾기 어려운, 섬세한 반성적 힘에 있다고 느낀다. 중국과 일본의 미술에 과문하지만, 현대미술에 있어서만은 한국의 미술이 훨씬 덜 선정적으로 보이며, 비교적 예의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마르크스주의든 유가(儒家)의 관습이든 설사 그것이 각각 반쪽만 남았다 할지라도, 급진적 사고와 수신(修身)문화, 미완된 근대주의 등의 복잡 다양한 흔적들이 분단과 압축성장, 식민화, 도시화의 단절된 시간경험 속에서도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시간차 공격이 아니라, 동아시아 시공간의 보편성이 다시 문제가 된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이란 문학비평가는, 포스트모더니스트 정치론이 득세한 것은, 과거의 정치적 문제들이 사라졌거나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제들이 당장 다루기 어려운 문제로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트라우마가 더 깊이 개인의 심리 속으로 숨어들어가거나, 아예 잊혀지게 될 시점에서 시장 지상주의와 새로운 형식주의가 나타날 가능성은 전반적으로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물신화된 비판과 ‘예술을 위하지 않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답답한 경계들도 해체된다. 이 전시에서 보이듯이, 오늘의 한국 작가들은 확실히 해석의 규범들로부터 상당히 해방되었으며, 관능을 윤리의 방에 가두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당장 다루기 어려운 문제’를 다루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공허감을 해결해야 하는 압박 또한 커진다. 이것은 결국 역사의 연속과 사람 사이의 연대에 대한 보편적인 꿈을 향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말은 너무 장엄한 것인가? 여기 전시된 김범의 ‘무제’ (2002, 종이)에 서로 의지해 매달려 있는 사람 형상은, 쉽게 찢어질 수 있는 종이쪼가리지만 그래서 더 장엄해 보인다. 
  


Limitation of Fast Break

Park Chan-kyong (Artist)

In the last few decades, mapping Korean contemporary art following a fixed topographical method has become either too difficult or it has lost its incentive. This condition can be assumed to stem from epistemological topography that is no longer as vivid as it used to be, and this is not only in the Korean society but it also exists at the level of international practice. Currently, the Korean and ‘international’ horizon of political ideology meets, yet it is still differentiated because of the astonishing history and reality of Korea’s divided constitution. Not ‘division’ as a sub-theme in politics, but ‘division’ as a literary metaphor that represents one of the essential strengths that alludes to the psychopathology of the Korean peninsula.

From a foreigner’s point of view at an international level, ‘division’ might be simply arranged as a regional by-product of the east-west cold war, but the situation may appear very different considering that the closed-off characteristics of a divided society actually comes from the isolation of a local resident from outer gaze or recognition. For example, even now, I still read the pink and blue colours in Yoon Jeong-mee’s photographs as the emblematic colours of the North and South Korea. The term division here is what can be called ‘military modernity’; from the songs that children sing to familial relationships, the east-west conflict, and religious prejudices are all extended and pushed together inside the space of a powerful loci. The circumstances are the same in Korean contemporary art. In other words, there is the removal of history in western contemporary art, or the obstinacy of connecting the revenues of abstract expression!ism with the wounds of Korean War.  Furthermore, through the forceful university authority, heretical thoughts are barred. Above all, the safe synthesis of formalism and Orientalism is something I cannot reflect on independent of the ‘distortion’ in the whole society caused by a divided constitution. The artists introduced here probably have one foot in the group of first generation and one foot half way out of this era.

Many people would probably regard this kind of description as a habit of speech by a man in his early forties still stuck in the 80s. In actuality, while meeting and dining with a foreign curator in an area massed with galleries such as Insa-dong or Sagan-dong in Seoul, the environmental scenery of Seoul gradually robs away my words of persuasion. I cannot even begin to talk about cafes in Seoul’s Gangnam, an area densely populated with financial centres and up-scale boutiques. Unfortunately, a guided tour of the DMZ wouldn’t change this situation greatly either, as DMZ has now become a tensionless tourist site. Now, about the only place where division can be perceived is in theatres where the trauma of Korean War and division is used occasionally to make blockbuster movies. Nevertheless, this sensation of division hardly exists anymore. At the same time, regardless of the complicated definitions of freedom, it is fair to say that the freedom enjoyed by personal and interest groups in Korea for the last twenty years has been unleashed like an explosion as though they were venting in spite. This is not simply a result of radical changes but a form of dramatic reversion. 

Even if the actual and serious perception of reality or intervention has been scattered to the point that it can no longer be held together in daily life due to the phenomenon of nomadic spirit that dispossesses reality or a suspended meaning, it is import!ant to point out that this new actuality is another shock for the artist. That is to say, DMZ becoming a tourist site and thereby no longer having a particular shock value itself is uncanny. This is an odd two-sided situation. As Area Park’s photos reveal, the bisection of the whole society in the ‘past’ due to military tension has not changed even today.

During the last twenty years, the traces of the past have been cleared away daily, creating the disconnection from the past, and this caused the process of recurrence to the past to be even more abrupt, thus provoking a sense of bewilderment. For instance, the two candidates of the political parties not currently in power but in favour for the next presidential election are inextricably linked to the 70s’ developmental policy either through human relations or images. Along with politics, religious circles and the press seems to only reinforce the black and white logic of the cold war era. With every publication of a news article related to North Korea, people seem to repeatedly exclaim ‘Ah, yes, North Korea exists!” This is a similar circumstance to Area Park turning his eyes away and focusing rather on the sky and the stars while in the vicinity of the border.

From the standpoint that there is an excessive sense of alienation from the past, it can be observed that the present in 2007 is very different from that of the 80s, yet there are also conditions today that are reminiscent of the early 80s. To re-focus on the iconographic interests of early 80s in the collision of the traditional and the contemporary in Kim Bo-min’s works, or the application of ‘politics of memory’ used by artists such as Jo Hae-jun, Bae Young-whan, Song Sang-hee, Rho Jae-oon and myself, expresses the sense of alienation equally experienced by the two distant generations. However, the sense of alienation about the years leading to the 80s – in the 80s, or the oblivion of the past is mostly due to repression. On the reverse, the present stupor is based on what is generally labeled ‘freedom’. TV documentaries such as Ijeneun malhal su itda (We can say it now) or JInsilpongno (Truth Exposure) that have become popular under the civilian government readily denotes the freedom from suppression and censorship through its titles, but now, this freedom is easily buried amongst several hundred cable channels and the heap of information on the Internet. If artists such as Shin Hak-chul and Park Bul-dong have used montage to create resistance against direct suppression of memory in early 80s Minjoong Art, a great number of artists exhibited in FAST BREAK had to burrow its way through an even narrower and a more discursive memory path which would not be sufficiently illustrated via the limited methodology of a Dadaist montage.

Certainly, the working processes vary among artists. Jo Hae-jun collaborates with his father to uncover personal memories in a classical manner, while Rho Jae-oon combines disbanded fragments of information from the digital world to re-present them in a deferred and uncertain state. Jo Hae-jun resists collective amnesia by vividly describing the details of the past affairs he tries to recollect through his father. On the other hand, Rho Jae-oon portrays collective amnesia and exposes ‘remote existence’ of the past emerging from the other side of the screen. Jo Hae-jun uses manual drawings but in pursuit of photographic details whereas Rho Jae-oon uses many photographic images reminiscent of painterly abstraction. In any case, it is remarkable that this hefty memory recovery process is only to redeem a short period of approximately fifty to sixty years.

Faster a society accelerates; stronger the nostalgia sentimentalizes. The mirror image of the North Korean sokdojeon (speed war; method of working for maximum quantity or highest quality in a given limited time) is the Korean compressed growth. As stated, compressed growth is the process of expanding by maximizing the intensity of labour in a short time. Therefore, the psychological time lapsed in during this period is actually much longer. As such, even if it is a current affair in a physical sense, it can be just as easily forgotten and thus it causes the paradox of a stronger nostalgia. It seems desires, subjects and narratives that were unable to be compressed and could not crisscross with each other in the background of the inhuman period finally bounced out like a spring at certain unexpected moments. In light of this context, Bae Young-hwan’s work utilizes nostalgic codes, but at the same time, positively recognizes and exaggerates the cliche of popular culture thereby turning it upside down. Likewise, I connected elite contemporary music composed by Yoon Isang to the incredibly crude sensibility of sinpa drama(1) of the North Korean democracy.  Also, the use of a sentimental title such as ‘Evening Primrose’ for poems written by sex workers in Song Sang-hee’s work is instilled in a similar narrative. Unlike Tarkovsky’s long-take shots, it is a muddy, sexy and more or less a perverse form of ‘compressed nostalgia.’

This kind of narrative turn over and the use of irony indicates the close proximity of current Korean art to ‘historical Pop Art’ (it would be possible to use such terminology if Pop Art can cover an expanded scope including Richard Prince, Cindy Sherman, Dan Graham, and other various figures who have emerged during the period, all over the world). Koh Seung-wook made gim-bab (Korean roll made with fillings such as eggs, pickled radish, meat and vegetables and wrapped in dried seaweed) and adopted the term ‘Bab Art (rice art)’ in a populist sense. However, the real irony of Bab Art is created upon understanding the adversity of history entwined with the history of bab(2). In the same vein, Hwang Se-joon recently analyzed Kong Sung-hun’s paintings as such: “The artist emphasizes the raw in the artificial to create an aversion, and then became fascinated and captivated by the artificiality of the accentuated rawness. That is the method of reviving ‘history’ in Kong Sung-hun’s work. He does not denounce nor explain the appearance of South Korea that has started to become particularly spoilt since late 20th century. Rather, his work shows disgust through fascination to that reality, and proves the appearance is in fact the internal through the assembly of hollow pain.” 

This painful process however, is not necessarily entirely painful. The experience of Seoul’s high speed includes: everyday amusement from incessant change, an instantaneous radiation of energy, wish for the unification of the division, and to some extent a healthy hope that Korea will soon be a rich country. The tingling delight brought on by this kind of change is something unique to Korea, not obtainable in Western Europe, Japan, or North America. This circumstance is featured in the rather dramatic critique of plastic-utopia highlighted by Yoon Jeong-mee and Ham Jin and portrayed in the manner of ‘cheerful Chuang Tsu’ in Koh Seung-wook’s anti-productive play. flyingCity combines this sort of affirmative strength with architectural imagination. 

Even now, upon entering the city from the outskirts of Seoul to the north in a subway, one passes by a colossal mound of rubbish. This is the site of village demolishment to build new apartments. At these sites, flyingCity gets their ‘artistic inspiration’. flyingCity uses the memory of Seoul’s haphazard urban development as a playground, transforming it into a source for liberating imagination. Depicted as hygienic spaces in Kim Sanggil’s photos and as melancholic inverse images in Kim Beom’s blue-print drawings, the dependence on modernism that dominate the Korean society still cannot free itself from the grand scheme of the western democracy and functionalism of urban planning. In the likeness of the conceptions by Hélio Oiticica or Situationists, flyingCity discovers the positive possibilities for the third world from the first-hand experience of reckless urban planning and deveopment. Although it can be more violent than the microscopic power relationship that permeates into the everyday or the mental state as Michael Foucault describes, these artists rediscover the unique openness and leisure in daily life that a yet-an-imperfect society allows. In particular, the invention of the ‘creative labourer’ of Cheonggyecheon (Stream) who claims to be capable of even crafting a spaceship, the mental-geographical imagination of children that weaves its way through the intricate alleyways in Seoul dialectically re-elucidates the source of energy of the Korean high-speed growth. This is the strength represented in the Korean expression! such as ‘to head at the bare ground’, or ‘to use one’s body as a tool’. In light of this perspective, Kim Beom’s drawings do not end at a reflection of the depressed self, but advances into a skillful and intelligent humour on this slovelny society – a society that quibbles for an efficient formation in its still inefficient and wasteful reality. Also, the seemingly very functional buildings in Kim Sanggil’s photographs try too hard not to appear faulty, thus ends up looking awkward and deficient. 

‘Fast Break,’ a term originally referring to a strategic swift attack with the aim of scoring a point before the opponent is able to get in a defensive position in sports such as basketball or volleyball; is applied here to represent a moment to generate a fresh tone, an opportunity for recharge, and to create ‘artistic’ teamwork. I used to reminisce of all aspects of Korean modernization while watching Korean women’s volleyball or handball team compete against tall, western athletes and command an astonishing teamwork. This includes the amazing combative spirit and ruthless training. However, as the original term ‘fast break’ is about opportunity, it lowers the courteousness towards the enemy’s position and the games’ elegance. When Korean professional gisa (skilled baduk player) defeats the most competent players from China or Japan in competitive match of baduk (Korean checkers, known as ‘go’ for Japanese) in a belligerent manner, I am overcome with the thought that this obstinate and astonishing measured movements steal away from the artistry of baduk. Honestly, I believe that through aggressive marketing and the praise of the new, Korean society has contributed to lowered etiquette in the world as a whole.

Korean serial dramas that take on the central role of Hanryu (the Korean Wave), have enjoyed its success due to its ability to stimulate nostalgia in Japan and act as a foreshadower in China and South East Asia of their own close future. This is another form of fast break – a form of delayed spiking. Not only through dramas, but the Korean economy based on trade and the fast acceptance of Western culture, by large, seems to have placed an advantage on Korea based on time difference. If so, let me throw out a rather old-fashioned and rustic question. Just because it is told in an instinctive and straight-forward manner at happy hour, it doesn’t mean that it should be avoided in formal writing. In what ways do Korean contemporary art have advantage in East Asia? I believe it is from the delicate and powerful introspection in Korean art that is difficult to find in Chinese or Japanese art. Although I am not thouroghly knowledgeable in Japanese and Chinese art, as far as contemporary art is concerned, I believe that Korean art appears to be less sensational and it seems to have some sort of courtesy. Whether it is the practice of Marxism or Confucianism, and even if only halves of each remain, the diverse and complex traces of radical thoughts, moral training culture and incomplete modernization still live through the disjointed experience of time from the divided nation, compressed growth, colonization, and urbanization. Namely, it is not delayed spiking but the spatio-temporal universality in East Asia that becomes problematic again.

Terry Eagleton, a literary critic, said that the postmodernist political argument rose to its power not because the past political problems have disappeared or because they have been solved. Instead, he pointed out, it lies in the fact that these matters were difficult to handle immediately. At the point in time when trauma hides deeper into the individual psyche or becomes forgotten entirely, market for markets’ sake mentality and the possibility for an emergence of a new formalism is considered to be greater overall. Still, on the contrary, fetishistic criticism and stifling borders of ‘art made not for the sake of art’ are dismantled. As this exhibition proves, it is certain that current Korean artists have been freed from standardized interpretation, and their desire is no longer trapped in a room of ethics. But at the same time, the pressure grows as they realise the emptiness that comes from the inability to handle the ‘issues too difficult to be handled immediately’. Ultimately, this ends up just being a path towards a universal ubiquitous dream about the solidarity between succession of history and human relationships. Is this phrase too grandiose? Kim Beom’s ‘Untitled’ (2002, paper), exhibited here of human forms dependently suspended together are merely pieces of paper that can be easily torn, but that is essentially why it appears even more sublime.

(1) Sinpa is also called new school drama. It is a form of Korean drama that first appeared in the 20th century. Sinpa drama broke down traditions and rules of classical drama and became a popular form of play that used modern daily lifestyle as its subject. Sinpa drama is not practiced today but it is recorded as a historical movement. It currently plays a very minor or a historical role in performance such as drama, film, radio and comedy. Due to its foundation on democratic rights and nationalism, Sinpa drama never successfully evolved with the changes in society or with newer generations.

(2) Bab, or steamed rice, is a staple food for Koreans.

박찬경 <내 작업과 영화의 관계에 대한 메모>

1. 내 작업과 영화의 관계에 대한 메모

내 작업 중에 영화에 관련된 것은 ‘블랙박스; 냉전이미지의 기억’(1997), 세트(2000), 파워통로(2004) 세 가지 이다. 오늘 발표에서는 이 중에 ‘블랙박스,,,’를 생략하고, 나머지 두 작업에 대해 설명하고,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만 작품을 보려고 한다. (여기 소개한 순서는 제작년도로는 역순이다.)

이 세 작업은 모두 분단과 냉전을 소재로 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분단이 어떤 ‘이미지’이고 어떤 이미지가 될 수 있는가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파워 통로 Power Passage
2004
파워포인트, 비디오, 설치

이 작업은 거의 동시대에 벌어진 두개의 사건에 기초한 것이다. 하나는 1975년 미소 우주선 도킹 프로젝트(ASTP)이며, 다른 하나는 그 무렵에 발견된 ‘땅굴’이다. 같은 ‘냉전’ 이라고 해도 세계적 차원과 국지적 차원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나는 하늘과 땅에서 벌어진 두 사건을 중심으로,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일들이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보이려 했다.
  이것은 탐정이 놀랍도록 부패한 진실을 찾아가는 ‘필름 느와르’의 플롯을 빌려온 것이다. 이 작업은 마치, 비밀수사관이 동료들 앞에서 수사경과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파워포인트 프리젠테이션처럼 구성되어있다. 이 프리젠테이션에는, 정치권력-영화-음모론-대기업-세계사적 배경-좌파적 경구-과학기술정보 등이 뒤얽혀있다. 물론 그 내용은 심각한 것이고, 표현은 때로 ‘시적 詩的’으로 보이긴 하지만, 상식의 눈으로 볼 때 그 내용이나 형식이나 대체로 황당하다. 왜냐하면 역사의 진행과 내역 자체가 상투적인 예술적 상상들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황당하기 때문이다. 그 중 간략히 몇 가지만 소개하면 이렇다.

  데탕트가 시작된 1972년 닉슨(Rechard M. Nixon)과 구소련의 코시긴(Aleksey Nikolayevich Kosygin)은 우주 랑데부 계획을 승인하였고, 이는 1975년에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 (ASTP; Apollo-Soyuz Test Project)라는 이름으로 성사되었다. 이것은 실제로는 미소 모두 군사-과학기술의 독점적 권력을 또한번 비축한다는 것 밖에는 특별히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지만, 하나의 상징이미지로서는 대단한 우주 스펙타클이다. 더구나 ASTP의 구상은 영화 ‘마룬드(Marooned)'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존 스터지(John Sturges)가 감독하고 그레고리 펙, 진 핵크만이 출연한 영화 ‘마룬드’는 소설에 기초해서 1969년에 만들어졌다.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U.S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의 필립 핸들러(Philip Handler)라는 사람은 1970년 모스크바를 방문해 소련 우주사업 관련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자세히 묘사하며 양국의 협력을 강조했다고 한다. 미국영화에서 미국인 우주인의 생명을 구한 소련 우주인이 영웅적으로 그려진 것은, 당시 소련 당국자들을 놀라게 했다.

  미소 사이의 우주 랑데부가 성사될 당시 한국에서는, 냉전의 주역들인 미-소, 미-중이 누렸던 데탕트 조차도 없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있었지만, 이는 새로운 대결을 위한 일시적인 명분이었을 뿐이었다. 제2땅굴은 ASTP가 성사된 바로 그 해, 정확히 넉 달 전에 발견되었다. 땅굴은 진정으로 음모론적이다. 당시 정부에서 만든 홍보 자료를 보면, 땅굴이 왜 북쪽에서 남쪽으로 판 것인가에 대한 다소 강박적인 해설이 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땅굴은 어느 쪽에서 파건 어느 쪽에서든 이용할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어떻게 서로 얽히고 섥히게 되나? ASTP의 핵심 도킹기술을 개발한 회사는 한반도에 배치된 무기들을 개발했다. 이 회사는 삼성과 관계가 있다. 우주경쟁에 관한 미국영화들은 NASA의 프로젝트에 영향을 미친다. 한반도에서도 인공위성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으며, 북한은 미사일발사실험을 인공위성 실험이라고 주장한다. 앞으로 남북한 관계를 다루는 영화들이 남북한 우주선 랑데부를 다루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서울이 대규모 땅굴들 위에 있다고 주장해온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남굴사)’은, 땅굴을 증명하기 위해 파헤친 거대한 구덩이에서 베트남제 호미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기타 등등. 우리는 애써서 음모를 파헤치고, 그것이 거대한 음모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강박적으로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이미 공개된 사실 자체가 그러한 과장이나 강박을 충분히 능가하며, 이를 무색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과연 믿을 수 있는가?

이 작업의 다른 한 축은, 파워포인트 프리젠테이션에 등장하는 세편의 미국영화를 대한뉴스의 땅굴장면, 또 신파가요의 대사와 섞어 편집한 비디오이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고 열심히 편집한 장면은 영화 ‘마룬드’에서 소련 우주비행사가 미국 우주비행사를 우주에서 놓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모리스 블랑쇼가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상기 시킨다. 이미지는, “ 부재의 증후가 아니라 모든 것이 결핍되어야 할 때도 존속하는 낯설고 과도한 존재의 흔적이다. 그것은 부재하는 무엇인가의 지표가 아니라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무엇인가의 주장이다.” 내게 이 이미지는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무엇인가의 주장이다.

*****


세트 SETS
2000 , 2004(재제작)
160개의 35mm 사진 슬라이드 연속 상영
15분

‘세트’에서는 북한의 조선영화촬영소 서울거리, 남한의 서울종합촬영소, 남한 군부대안의 시가전 훈련장 사진들이 일제시대부터 현재까지 시간 순서로 배열되어있다.  여기서 시간 순서란 이 세트들이 건설된 시간이 아니라, 이 세트들이 모방하여 나타낸 시대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북한 조선영화촬영소는 1930년대에서 50년대, 남한의 서울종합촬영소는 70-80년대, 군부대 세트는 90년대의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특정한 시대의 서울이나 판문점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구성한 시대 순 배열 역시 허구이다. 나는 여기서 미디어, 영화 등이 역사를 허구적으로 구성한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나는  그 보다 오히려 더 단순하고 기초적인 사실을 전달하고자 했다. 영화는 그 자신의 독자적인 실체를 창조하며, 허구를 전달하기위한 일련의 물리적 장치들 - 때로는 특정한 장소에 벽돌과 시멘트 등으로 이루어진- 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왜 이러한 단순한 사실이 중요할까? 사실 로드첸코, 브레히트, 고다르 이래 ‘장치를 드러낸다’는 이러한 입장이 갖는 특별한 새로움은 없다. 환영의 장치들을 드러냄으로서 환영의 미혹에 거리를 유지하려는 다양한 미학적 구상이 이미 좀 지겨우리만큼 계속 되어왔다. 개념적 영화들에서 그 극단적인 형식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모간 피셔(Morgan Fisher)의 필름이 기억난다. 사실 나는 98년 무렵에야,  알렉산더 클루게(Alexander Kluge)의 단편 영화들과 장 보드리(Jean Baudry)의 영화이론을 접했다.
  다른 한편, 90년대 이래 국내 문화의 상황에서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 미국에서는 이미 50년대에 시작한 것이겠지만, 한국에서 본격적인 미국식 대중문화는 90년대 이래 본격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에서 영화와 텔레비전과 같은 매스미디어가 문화지형을 주도하게 된 것(또는 그렇다고 널리 인지되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또 그럴수록 미디어에 대한 성찰이나 비평이 절실했지만, 미디어 비평은 대개 정보조작, 사실왜곡이나 정치적 편향 비판에 국한되었다. 그만큼 사진, 비디오, 영화에 대한 예술계의 관심은, 거의 최근 까지도 직관적인 단편들 이외에 별다른 것이 없었다. 
  1997년 ‘블랙박스: 냉전이미지의 기억’ 이라는 작업을 하면서, 나는 분단국가와 미디어, 미디어와 집단기억의 관계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해보려고 했다. 이것은 사진이 부가된 ‘글쓰기’에 더 가까운 작업이었다. 반면, ‘세트’에서는 단순한 사실정보의 나열 이외에 아무런 글쓰기나 내러티브 구성을 시도하지 않았다.
  ‘세트’를 구상하게 된 계기였던 ‘미디어시티_서울 2000’이라는 전시의 제목 자체가,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전시는 서울시가 주최한 대규모의 비엔날레로, ‘미디어’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와 같은 시기에 ‘쉬리’나  ‘JSA공동경비구역’이 분단을 소재로 수백만의 관객을 동원한 것은, 예술과 미디어의 지형에서 당시의 변화를 압축해 설명해준다. 예술에서도 미디어를 미래의 약속인양 추켜세우는 분위기였고, 이제는 일상용어가 된,  ‘대박’이라는 도박용어가 영화로 인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오직 사진 찍혀지기 위해 존재하는 영화세트장들과, 군부대안의 시가지 시뮬레이션이야말로  ‘미디어시티’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세트들은 물론 미디어를 위한 것이며, 그 자신도 미디어라는 의미에서 ‘미디어시티’ 그 자체지만, 이 미디어시티는 ‘미디어시티’라는 화려한 말답지 않게, 무인도시처럼 적막하며 실제적(factual)이다. 나는 ‘미디어아트’라는 멋진 말도 ‘대박 영화’란 집단욕망도, 분단국가의 정치문화적 공허함을 채우지도 달래주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반대로, 이 단순한 사실화(寫實畵)들은 극적인 상상의 덧없음을 일깨워 줄 수 있으며, “시뮬레이션 사회에서 실제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충격이야말로, 실제의 존재를 암시한다”는 생각을 전달한다.

*****



블랙박스; 냉전이미지의 기억
1997
사진 및 글

다음의 글은, 1997년  ‘블랙박스; 냉전이미지의 기억’이라는 제목의 첫 개인전 당시 썼던 글의 일부이다. 전체 글은 텔레비전, 영화, 포스터, 사진, 전쟁기념관 등에 대한 준-논문적인 에세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에 영화에 관한 부분이다.

*****

의심: 영화

철학자 : ... 그런데 자네(극작가)들이 자네 관객들을 이미 파블로프의 개처럼 병들게 해놓았단 말일세.
- 베르톨트 브레히트, 놋쇠사기

그리고 강박증 환자가 우리의 정신생활의 안전판에 있는 약점, 즉 우리의 기억은 믿을만하지 않다는 약점을 발견하면, 그것을 이용해서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할 수도 있게된다.
- 지그문트 프로이드, 쥐인간

미국인 존 카펜터John Carpenter의 영화 ‘괴물’The Thing에서 서스펜스의 절정은, 인물들 서로의 서로에 대한 의심과 그들에 대한 관객의 의심이 최고조로 달할 때와 같은 순간이다. 외계 괴물이 인간을 복제하여 그것이 사람인지 괴물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자, 그 중에서 사람인 것이 상대적으로 확실하다고 믿어지는 국립과학조사단의 헬기 조정사는 사람들(혹은 괴물들)을 모두 묶어 줄줄이 의자에 앉혀 놓는다. 포박당한 그들로부터 한 명씩 채혈하여 하나씩 하나씩 이름표를 붙인다. 그리고는 화염에 달군 전선으로 이 “타자들”의 피에 충격을 가한다.
  극의 논리에 따르면, 혈액이 신체와는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괴물이라면 피에 가해진 열에 감응하여 세포복제를 하게 되기 때문에 그 정체를 드러낼 것이요, 인간이라면 아무 반응이 없는 이치로 신원이 조회되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누가 괴물로 판명될 것인가 보다는 의혹으로 미정된 순간의 구렁 속으로 깊이 빨려든다. 만약 누가 괴물이고 누가 인간인가 하는 실험 결과만을 기대했다면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내 감정은 그렇게 심하게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 씬scene에서의 독특한 매혹은 상황의 구조적으로 유다른 모순에 있다.
  그것은 의심하고 있는 내용의 불확실성이, 그들이 서로 의심하고 있다는 상황의 확실성과 기묘하고 가파른 긴장을 이룬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구성원 상호간의 의심이 최고조로 달해 있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그 의심의 내용은 그 누구도 확언할 수 없는 일종의 유언비어일 뿐이다. 그들의 신경이 모두 외부로 솟구쳐 있어서 마치 그들의 내면은 무언가에 송두리째 빼앗겨 있는 것 같다. 그렇게해서 순수한 의혹의 상태, 성원들 사이의 의혹의 상대적인 관계만이 남게 된다. 문제는 서로에 대한 서로의 의심,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유명한 말로 바꾸어 말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의심’이다.

의심은 언제나 상대의 정체를 그 상대가 스스로 주장하는 방식대로 보기를 기피하는 부정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내가 너를 의심한다는 사실 자체를 숨겨야 할 필요가 생긴다. 주체들의 상호적인 의심 속에서, 주체는 자신이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숨겨야만 의심받지 않으리라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영화 ‘괴물’의 전체를 통해 강조되는 의심하는 대상처럼, 정확히 말해서 너의 의심의 대상은 내가 아니라 나의 너에 대한 의심이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의심을 의심한다. 따라서 의심관계의 강렬함은, 이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표명될 수 없다는 점만이 서로에게 투명하다는 것에 있다.

주지하다시피 1950년대 이래의 ‘복제성 괴물’ 영화들은 미소 냉전이 설계한 사회심리 속에서 만들어졌다. 괴물과 사람이 혐의에서 정체로 막 전화되려는 이 숨막히는 장면은,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강렬한 알레고리가 아닐 수 없다. 결코 자수하지 않는 분열증식성 외계 생물은, 일종의 과학적 혈액실험과 전기고문이 혼성된 방법을 통해 정체가 밝혀지고, 격리되고, 전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연구의 대상이 된다. 괴물도 괴물이지만, 말 그대로 연좌(連坐)된 사람들 역시 적어도 최후의 판결 이전 까지는 괴물과 같이 묶여 있어야만 했다. 심지어 그들 스스로도 인간인지 괴물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 중 누가 괴물이었는지 몰랐다고 주장해보았자 그것은 불고지의 혐의를 강화할 뿐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문제를 거꾸로 생각해 볼 때가 된 것 같다. 냉전이 사회적 의심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을지라도, 이토록 의심이 강하게 지탱되어오고 지배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이용되어 온 데는, 우리에게 의심 욕망이 깊숙이 배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chcock의 ‘토파즈’나 '너무 많이 아는 사나이’와 같은 영화에 매료되는 관객처럼, 그러나 그렇게 흥미진진하지는 못하게 말이다.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대체'(displacement)되는 장면들의 연속이므로, 그것은 인물들 사이와 인물들과 관객 사이에서 맺어지는 사실상 무한한 의혹의 순열을 유희하고, 의혹의 상태를 다양하고 복합적인 형태로 발전시키는 방법에 알맞은 매체일 것이다. 복제성 괴물영화 모두에서, 플롯이란 영화의 시간 속에서 망각과 기억이라는 공들로 곡예 하는 기억의 기술이다. 50년대 또 다른 고전 ‘신체 강탈자의 침략(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의 인물들이 화면 밖의 시공간 어디선가에서 괴물로 변하듯이, 우리가 그들을 못 보는 사이에, 즉 우리가 눈앞에서 전개되는 다른 사건이나 인물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이에 그 밖의 것들은 비밀스럽게건 아니건, 복제나 전염, 설득이나 매수, 사랑이나 죄의식 때문에 변한다. 놀라운 것은 영화 쪽이기 보다는 오히려 관객 쪽이다. 극중 인물이 화면의 프레임 밖으로 일단 나갔다가 단 몇 분 안에 프레임 안으로 다시 돌아와도 우리는 그 인물을 이미 전의 그 인물이 아닌 것으로 의심하기 때문이다. 시장에 다녀온 아내를 아내가 아니라고 믿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이것은 영화에서의 연속적인 대체가 한편으로는 몰입된 감정의 축적에 의존하기 때문에, 기억하는 동안 망각해야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영화의 감정몰입이 다른 매체보다 강한만큼 능숙하게, 화면 안의 시공간이 영화 화면 밖의 시공간을 시청각적으로 조정, 통제, 때로는 검열함으로써 마치 까꿍놀이를 하듯 관객은 다음 장면에 경악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이제 냉전시대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기를 희망하는 우리들이 마치 지독한 공상과학 공포영화를 보고 막 빠져 나오려는 관객들과 어떤 점에서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냉전질서 속에서 상호의심이 그토록 강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간단한 서사기술에 잘 속는, 혹은 속고 싶은 마음처럼, 우리 안의 의심 욕망이 깊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브레히트는 과격하게도 감정이입적 연극을 조건반사 실험에 비유하면서, 관객이 줄거리를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는 ‘의심을 찬양함’이라는 시에서 이런 말을 한다. 그가 보기에는 대개 의심이 많은 사람이 진짜로 의심해야할 것을 철썩같이 믿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소화능력은 놀라웁고, 그들의 판단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사실을 믿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믿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사실이 그들을 믿어야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그들의 참을성은
한계가 없다. 논쟁을 할 때 그들은 첩자의 귀로 듣는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의심을 찬양함


2. ‘비행 Flying’ 에 대한 메모

비행 Flying
2005
13분, 비디오

배경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약 500만 여명이 사망하였다. 이는 베트남전쟁 희생자의 네 배가 넘는 숫자이다. 북한은 미국의 폭격에 의해 전국이 초토화되었다. 북한이 핵개발을 고집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전쟁의 기억 때문이다.

2000년 6월, 분단 50년 만에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그에 따라, 전후 처음으로 남북 직항로가 열렸다. 김대중 대통령과 남한 대표단은 두 대의 비행기로 서울에서 평양까지 직항로로 비행하였다.

모호성

나는 한국의 여러 방송국에 요청하여, 당시 방영되지 않은 촬영분(footage)을 포함한 소스 영상을 편집할 수 있었다. 편집된 비디오의 전체 길이는 약 10분이며, 실제 비행시간은 약 1시간이다.

비디오를 보는 동안 지난 50년은 짧게, 그러나 상영되는 10분은 길게 느껴질 것이다. 10분은 미술관 작품으로는 너무 길다. 1시간은 관객을 포기한 시간이며, 50년은 불가능한 시간이다. 그래도 비디오는 지루하다.

북한의 이미지는 마치 저승과 같이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민족적 동질성’을 자극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협이기도 하고 동족이기도 한 남북관계의 이중성, 통일에 대한 불안과 희망 사이의 ‘창조적 모호성’을 나타낸다.

음악

이 비디오에 사용된 음악은 1977년 윤이상 선생이 작곡한 <더블 콘체르토>의 앞부분이다. 이 민족주의적 현대음악은 북한의 국가주의 키치와 만나 또 다른 모호성을 낳는다.

이 곡은, 견우와 직녀 설화에 바탕을 두었다. 설화에 따르면, 왕의 벌을 받아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던 견우와 직녀는, 이를 불쌍히 여긴 새들이 다리를 놓아주어 1년에 한번 만날 수 있다.

윤이상은 이 설화를 남북관계에 비유했다. 견우와 직녀의 만남은 통일을 상징한다. 그러나 남북 사이의 거리 또한 은하처럼 멀다. 윤이상은 아마도 다리를 놓은 무한수의 새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윤이상은 분단된 고국에 돌아오지 않고 통일된 독일에 묻혔다.


명확성 

‘창조적 모호성’이란, 2005년 북핵문제에 관한 6자회담에서 남측 수석대표가 거론한 말로,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는 협정에 대한 외교적 관용어로 명확한 의미를 지닌다.

북한인민에게 비행기는 창조적이지도 모호하지도 않다. 북한 인민에게 비행기는 아직도 즉각적으로 폭격을 연상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한 시민 대다수에게 비행기는 이제 B-29가 아니라, 여행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