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30일 토요일

내용 없는 인간

예컨대 공간도 서점도 디자이너도 다 갖춰져 있다. 그 모두가 이걸 채울 컨텐츠만을 기다리고 있다. 싹수가 보인다 싶으면 당장 뿌리까지 뽑아내 사유지에 심어 제낀다. 스스로 뭣 좀 해볼 시간을 놔두지 않지. 24/7 풀타임 가동되는 이 세계에서, 새로운 생산기구를 선점하기 위해 쟁투하면서.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 빛과 소금 (1991)


너무 좋다.

2016년 4월 29일 금요일

2016년 4월 28일 목요일

현 상황

예술가와 디자이너, 관객 (행정가, 평론가, 큐레이터, 심지어 정치인, 더 심지어 인스타그래머 페이스부커 트위터리안 등등등등) 모두가 유사-예술가, 이미지-메이커가 되고 싶다는, 혹은 그게 괜찮다고 모두가 합의를 해버린, 혹은 무감각해져버린 뭐 그런 거시기한 상황.

여기서 그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좋은) 이미지란? 네거티브가 판치다 보니 네거티브를 통해서 도출해낼 수 있다. 첫 번째, 어느 누구에게도 거슬리지 않는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정치적으로 밍밍한 이미지, 이 포지션이 가장 좋다.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면(거의 불가능해보인다) 특정 집단을 거스르지 않는 (특정 편을 거스르는) 이미지가 주효하다. 그것도 불가능하다면 모두를 거스르는 모두까기 이미지. 그리고 이런 이미지 메이커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전용하고 싶은 (자신의 이미지 언어를 아직 가지지 못한) 이미지 팔로워들이 있겠지.

항상

최악에서부터 시작하라.

2016년 4월 27일 수요일

뿌린대로 거둔다.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 두고 보면 알겠지. 

2016년 4월 26일 화요일

Martha Rosler, Semiotics of the Kitchen (1975)


http://www.e-flux.com/journal/a-sea-of-data-apophenia-and-pattern-mis-recognition/

웃긴 아줌마...한국인이었음 디씨인사이드 폐인 아니었을까.

사진이란 옛 매체

사진전을 하나 큐레이팅하고 사진가, 특히 다큐멘터리언/저널리스트와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 나름 새로운 장르(?) 사람들과 교류하며 이런저런 업계 이야길 듣는 것이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론 사진, 특히 스트레이트 사진...에 대해 새롭게 인식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 인덱스라는 것. 시공간뿐만 아니라 감정의 흔적이라는 것.

비숍의

글은 너무 명쾌하다. 그래서 때때로 의심이 들기도 한다.

2016년 4월 25일 월요일

뉴다큐멘터리

http://www.jinyoungpark.com/index.php?mid=information&page=3&listStyle=gallery&document_srl=7451

2016년 4월 21일 목요일

세상은

일관된 멍청함이 다양한 경로로 강고하게 연결되어 있는 곳 같다. 이것을 '연대'라고 부르고 싶은 것...

2016년 4월 18일 월요일

래디컬 뮤지올로지

물속에 들어가서 대강 끝까지 읽었다. 그정도로 볼륨은 크지 않다. 만오천 원이라는데 샀으면 꽤나 아팠을 것 같다. 

오역이 군데군데 발견되지만 치명적인 건 아니다. 오히려 피드백에서도 비슷한 지적을 누가 할 거라고 생각하면 그정도는 애교로 보인달까. 

여튼. 

참여적 박물관과는 일종의 대척점에 있는 책이다. 벤야민주의적 역사철학을 바탕으로 박물관 소장품과 그 활용을 현재란 시간 감옥을 깨부술 수 있는 단서로 제시한다. 박물관과 큐레이터를 시간수집자, 내지는 거의 작가 위치(브뤼콜뢰르)로 상정한다.

동의하는 지점이 많다. 미술관 박물관의 정신분열증 현재주의는 분명히 깨부숴져야한다. 변증법적 동시대성, 간단하다. 소장품을 모아 미술관 컨셉과 전통을 확립하는 동시에 그걸 끊임없이 연구 재해석해서 현재 상황에 맞게(혹은 비평적으로) 제시하는 것. 그러니까 <서울바벨> 같은 전시하지 말고 제발 좀 본연의 기능으로 돌아가라. 

최정화의

이번 416 작업은 정말 패도적이다. 근작들은 모두 쒯이었는데 이건 그런 수준을 넘어선다. 어찌하여 M+에서 했던 그 스펙터클한 풍선을 분향소 앞에 박아 넣을 수 있을까. 색깔 하나 안 바뀌었다. 그 작업의 제목은 <색즉시공>이었다. 그 사람은 그렇다 치고, 아니 포함해, 권용*, 안규* 등 출품 작업 대다수를 보면 큐레이터의 정신머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고질적인 미술관 스펙터클에 아무 생각 없이 416을 적용시켜 416 스펙터클이 튀어 나왔다. 해악의 큐레이팅이 아닐 수 없다.

2016년 4월 17일 일요일

책을 두 권 정도 공동 번역하고 나니 뭔가 번역 요청이 연이어 들어온다. 하지만 나는 전문 번역자가 아니라서 좀 불편하다. 단지 이론적 관심으로 읽을 따름인데 말이지.

416에

간만에 페이스북을 리액티베이팅 시켜봤다. 이젠 재미있게 페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하지만 권용*이란 작가의 페북 포스팅을 접하고 다시 멘붕에 빠졌다. 경기도미술관을 가득 메운 대형 설치물 사진과 도덕적 우위를 점한듯한 발언, 그리고 SNS가 가지는 얄팍하지만 강력한 홍보력, 그 사람이 과거에 했던 416 관련 (책임감 없었던) 전시 등이 생각이 나면서 토가 쏠리는 기분이 아니들 수 없었다.

2016년 4월 16일 토요일

광화문 분향소에서는

또 대형 모니터를 전시장 안에 설치했다. 집중 추모기간에 맞춰 대중에게 선전하기 위해서다. 광화문 분향소 전시관 실장님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지점이 바로 전시장 안에 설치 되어 있던 기존 물건들을 어찌할 것이냐다. 물론 의미가 있기 때문에 설치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철수하거나 이동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물건들이 모여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전시를 한다는 건 소통의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일인데, 마치 그 버글거리는 사물은 소통을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마치 예전 레지던시에서 일할 때 사소한 기자재 하나 긁힘없이 보관하려고 했던 시설 담당 직원이 떠올랐다. 국가 재산이기 때문에 손상되거나 소실된다면 책임은 그 사람이 지게 된다. 그 물건이 그 자리에서 한치도 옴짝달싹 할 수 없이 제 기능을 상실한 채로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 그런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를 모두 수긍한다면 전시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내가 큐레이터로서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 딜레마 조건을 협상하고 최선의 길을 찾는 것이 현장 큐레이터로서 중요한 것 같다. 아니, 어짜피 최선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차선을 모색하고 선택하는 일. 반쯤은 포기하고 질문하자면 작가와 큐레이터가 갈라지는 지점이 그런 것일까? 하아 잘 모르겠다. 현시점에선 사회 현장에선 최선의 문화적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너무 많은 제도적 정치적 관계 속에서 움직이게 된다. 오히려 그런 지점에서 미술관이 그런 실천에 더욱 어울리는 장소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문화적 자율성을 급진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장.

좋은 걸 보면 분명히 관객들도 좋은 걸 느낀다. 내가 이걸 소중하고 심각하게 여긴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그것을 대한다. 하지만 여기엔 조건이 하나 붙는다. 물건은 제 자리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좋은 물건도 제 자리에 있지 못하면 쓰레기가 된다. 나는 좋은 물건을 떼어 와서 적합한 자리에 놓아주고 싶었다. 좋은 물건은 작가로부터 나온다. 적합한 자리에 놓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귀신 영화에서 귀신은 배우들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장소와 조건에서 배우는 귀신이 될 수 있다. 큐레이터의 일은 그런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그래도 개별 관객들, 혹은 분향소 관계자분들께서 전시를 잘 봤다고 말해주실 때, 뭔가 위안 같은 걸 받았다. 지금까지 분향소에서 이런저런 전시가 많았지만 이번 전시가 제일 깔끔하게 잘 됐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사진을 보고 감동했다는 코멘트도 들었다. 이 전시장에서 내가 가장 신경썼던 부분이 관객이 사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정부분 의도대로 된 것 같아서 그건 다행이었다.

2016년 4월 13일 수요일

quotes from Boris Groys, "On the New"

"As I have mentioned, a new artwork should not repeat the forms of old, traditional, already museographed art. But today, to be really new a new artwork should not repeat the old differences between art objects and ordinary things. By repeating these differences, it is possible only to create a different artwork, not a new artwork. A new artwork looks really new and alive only if it resembles, in a certain sense, every other ordinary, profane thing, or every other ordinary product of popular culture. Only in such a case can the new artwork function as a signifier for the world outside the museum walls. The new can be experienced as such only if it produces an effect of out-of-bounds infinity—if it opens an infinite view on reality outside of the museum. And this effect of infinity can be produced, or rather staged, only inside the museum: in the context of reality itself we can experience the real only as finite because we ourselves are finite. The small, controllable space of the museum allows the spectator to imagine the world outside the museum's walls as splendid, infinite, ecstatic. This is, in fact, the primary function of the museum: to let us imagine what is outside the museum as infinite. New artworks function in the museum as symbolic windows, opening up a view on the infinite outside. But, of course, new artworks can fulfil this function only for a relatively short period of time before becoming no longer new but merely different, their distance to ordinary things having become, with time, all too obvious. The need then emerges to replace the old new with the new new, in order to restore the romantic feeling of the infinite real.

The museum is, in this respect, not so much the space for the representation of art history as a machine to produce and stage the new art of today—in other words, to produce "today" as such. In this sense the museum produces, for the first time, the effect of presence, of looking alive. Life looks really alive only if we see i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museum because, as I said, only in the museum are we able to produce new differences—differences beyond differences—differences which are emerging here and now. This possibility of producing new differences does not exist in reality itself, because in reality we meet only old differences—differences that we recognize. To produce new differences we need the space of culturally recognised and codified "non-reality". The difference between life and death is, in fact, of the same order as that between God and the ordinary human being, or between artwork and mere thing—it is a difference beyond difference, which can only be experienced, as I have said, in the museum or archive as a socially recognised space of "non-real". Again, life today looks alive only when seen from the perspective of the archive, museum, library. In reality itself we are confronted only with dead differences—like the difference between a new and an old car."

급진적

급진적 리버럴이란 게 있다. 70년대 미국에 출몰했던 무정부주의적 실천이 이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다. 이거랑 아몰랑이랑 헷갈리면 안 된다. 전자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신이 책임진다는 자기윤리와 자부심이 있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공통 마음, 세상이 망했으니 아몰랑 되는 대로 살거야 하는 것과는 완벽히 다르다. 후자는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닐 성질이 아니다. 

괜찮은

몸이 너무 안좋아서 조깅을 시작했다. 체력이 바닥이 나서 3키로 뛰었는데 헐떡거린다. 그래도 뛰고 나면 뭔가 기분이 평상시보다 좋다. 이런 기분을 여전히 느낄 수 있다면 아직까지는 괜찮은 걸지도 모른다. 

2016년 4월 11일 월요일

저장소에서는

전시 홍보를 바보같이 하고 있다.

이 모두 원애*라는 바보같은 담당자의 개인적인 욕심+능력부족 때문인 것 같다.

힘들게 준비했는데 이런 모양새로 보여져서 너무 안타깝다.

2016년 4월 5일 화요일

난 왜

페인트 칠만 하면 온 몸에 묻히는가. 

2016년 4월 4일 월요일

ㅇㄹ

좀비 형식주의란 말이 부상하기 전에 2000년대 초반 경, 그 시조가 될만한 뉴욕의 쓰리탑이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뻘 피터 핼리의 아이들이라고 할만한 그 인물은 Torben Giehler, Sarah Morris, Benjamin Edwards. 지오메트릭 앱스트랙션의 일종의 반복이었지만 인테리어 디자인에 적격이어서 굉장히 날개 돋힌듯 팔려 나갔다고 한다. 어딜가나 이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고. 내가 보기엔 벤저민 에드워즈가 그나마 낫다. 나머진 귀엽고 웃긴 도형들의 나열이다. plastic art and pure plastic art를 향한 노스텔지어. 굳이 한국에서 미국산 좀비에게 물린 토종 좀비를 보고 싶진 않다고...

돼지 목에 금목걸이

누군가는 봤을 때 모르면 알려줘도 모른다는 걸 잠언으로 삼는다는데, 가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한테 애써 가치를 설명해줄 필요 없다. 난 이런 것이 가치롭다고 생각한다.

능력 밖의 일을 하려고 할 때
할 수 없는 걸 해내려고 할 때
부족함을 족함으로 바꿔내려고 할 때

인간은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향상될 수 있기 때문에, 어제와는 다른 내일이 있으므로 인간은 인간이다. 이런 노력, 가치를 알려고 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자들은 상종할 수 없다. 지능? 재능? 머리가 좀 돈 우생학적 사이코패스 같다. 제 입에 묻은 똥을 좀 보고, 주제파악 할 의향은 없는지.

말과 행동

"아 진짜 슬프다...."

전시장에서 뵈었던 유가족 어머니 중 한 분이 몇번이고 되뇌었던 말이다. 다소, 그녀가 정말로 슬퍼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기묘했다. 슬픔이란 말은 슬픔을 의미하지만 정말로 그 말 자체가 슬픈 건 아니다. 하지만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뭔가 잘못된 것이다. 슬픔이란 강박적 말만이 빈껍데기처럼 전시장 안에서 울려퍼졌다. 이미 슬픔이 많이 가신 상황에서 슬픔이란 말로 그것을 구속하려고 애썼다. 그 말은 진실이 아닐까?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