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30일 토요일
2016년 4월 29일 금요일
2016년 4월 28일 목요일
현 상황
예술가와 디자이너, 관객 (행정가, 평론가, 큐레이터, 심지어 정치인, 더 심지어 인스타그래머 페이스부커 트위터리안 등등등등) 모두가 유사-예술가, 이미지-메이커가 되고 싶다는, 혹은 그게 괜찮다고 모두가 합의를 해버린, 혹은 무감각해져버린 뭐 그런 거시기한 상황.
여기서 그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좋은) 이미지란? 네거티브가 판치다 보니 네거티브를 통해서 도출해낼 수 있다. 첫 번째, 어느 누구에게도 거슬리지 않는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정치적으로 밍밍한 이미지, 이 포지션이 가장 좋다.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면(거의 불가능해보인다) 특정 집단을 거스르지 않는 (특정 편을 거스르는) 이미지가 주효하다. 그것도 불가능하다면 모두를 거스르는 모두까기 이미지. 그리고 이런 이미지 메이커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전용하고 싶은 (자신의 이미지 언어를 아직 가지지 못한) 이미지 팔로워들이 있겠지.
여기서 그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좋은) 이미지란? 네거티브가 판치다 보니 네거티브를 통해서 도출해낼 수 있다. 첫 번째, 어느 누구에게도 거슬리지 않는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정치적으로 밍밍한 이미지, 이 포지션이 가장 좋다.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면(거의 불가능해보인다) 특정 집단을 거스르지 않는 (특정 편을 거스르는) 이미지가 주효하다. 그것도 불가능하다면 모두를 거스르는 모두까기 이미지. 그리고 이런 이미지 메이커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전용하고 싶은 (자신의 이미지 언어를 아직 가지지 못한) 이미지 팔로워들이 있겠지.
2016년 4월 27일 수요일
2016년 4월 26일 화요일
2016년 4월 25일 월요일
2016년 4월 21일 목요일
2016년 4월 18일 월요일
래디컬 뮤지올로지
물속에 들어가서 대강 끝까지 읽었다. 그정도로 볼륨은 크지 않다. 만오천 원이라는데 샀으면 꽤나 아팠을 것 같다.
오역이 군데군데 발견되지만 치명적인 건 아니다. 오히려 피드백에서도 비슷한 지적을 누가 할 거라고 생각하면 그정도는 애교로 보인달까.
여튼.
참여적 박물관과는 일종의 대척점에 있는 책이다. 벤야민주의적 역사철학을 바탕으로 박물관 소장품과 그 활용을 현재란 시간 감옥을 깨부술 수 있는 단서로 제시한다. 박물관과 큐레이터를 시간수집자, 내지는 거의 작가 위치(브뤼콜뢰르)로 상정한다.
동의하는 지점이 많다. 미술관 박물관의 정신분열증 현재주의는 분명히 깨부숴져야한다. 변증법적 동시대성, 간단하다. 소장품을 모아 미술관 컨셉과 전통을 확립하는 동시에 그걸 끊임없이 연구 재해석해서 현재 상황에 맞게(혹은 비평적으로) 제시하는 것. 그러니까 <서울바벨> 같은 전시하지 말고 제발 좀 본연의 기능으로 돌아가라.
최정화의
이번 416 작업은 정말 패도적이다. 근작들은 모두 쒯이었는데 이건 그런 수준을 넘어선다. 어찌하여 M+에서 했던 그 스펙터클한 풍선을 분향소 앞에 박아 넣을 수 있을까. 색깔 하나 안 바뀌었다. 그 작업의 제목은 <색즉시공>이었다. 그 사람은 그렇다 치고, 아니 포함해, 권용*, 안규* 등 출품 작업 대다수를 보면 큐레이터의 정신머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고질적인 미술관 스펙터클에 아무 생각 없이 416을 적용시켜 416 스펙터클이 튀어 나왔다. 해악의 큐레이팅이 아닐 수 없다.
2016년 4월 17일 일요일
2016년 4월 16일 토요일
광화문 분향소에서는
또 대형 모니터를 전시장 안에 설치했다. 집중 추모기간에 맞춰 대중에게 선전하기 위해서다. 광화문 분향소 전시관 실장님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지점이 바로 전시장 안에 설치 되어 있던 기존 물건들을 어찌할 것이냐다. 물론 의미가 있기 때문에 설치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철수하거나 이동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물건들이 모여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전시를 한다는 건 소통의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일인데, 마치 그 버글거리는 사물은 소통을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마치 예전 레지던시에서 일할 때 사소한 기자재 하나 긁힘없이 보관하려고 했던 시설 담당 직원이 떠올랐다. 국가 재산이기 때문에 손상되거나 소실된다면 책임은 그 사람이 지게 된다. 그 물건이 그 자리에서 한치도 옴짝달싹 할 수 없이 제 기능을 상실한 채로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 그런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를 모두 수긍한다면 전시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내가 큐레이터로서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 딜레마 조건을 협상하고 최선의 길을 찾는 것이 현장 큐레이터로서 중요한 것 같다. 아니, 어짜피 최선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차선을 모색하고 선택하는 일. 반쯤은 포기하고 질문하자면 작가와 큐레이터가 갈라지는 지점이 그런 것일까? 하아 잘 모르겠다. 현시점에선 사회 현장에선 최선의 문화적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너무 많은 제도적 정치적 관계 속에서 움직이게 된다. 오히려 그런 지점에서 미술관이 그런 실천에 더욱 어울리는 장소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문화적 자율성을 급진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장.
좋은 걸 보면 분명히 관객들도 좋은 걸 느낀다. 내가 이걸 소중하고 심각하게 여긴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그것을 대한다. 하지만 여기엔 조건이 하나 붙는다. 물건은 제 자리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좋은 물건도 제 자리에 있지 못하면 쓰레기가 된다. 나는 좋은 물건을 떼어 와서 적합한 자리에 놓아주고 싶었다. 좋은 물건은 작가로부터 나온다. 적합한 자리에 놓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귀신 영화에서 귀신은 배우들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장소와 조건에서 배우는 귀신이 될 수 있다. 큐레이터의 일은 그런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그래도 개별 관객들, 혹은 분향소 관계자분들께서 전시를 잘 봤다고 말해주실 때, 뭔가 위안 같은 걸 받았다. 지금까지 분향소에서 이런저런 전시가 많았지만 이번 전시가 제일 깔끔하게 잘 됐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사진을 보고 감동했다는 코멘트도 들었다. 이 전시장에서 내가 가장 신경썼던 부분이 관객이 사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정부분 의도대로 된 것 같아서 그건 다행이었다.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를 모두 수긍한다면 전시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내가 큐레이터로서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 딜레마 조건을 협상하고 최선의 길을 찾는 것이 현장 큐레이터로서 중요한 것 같다. 아니, 어짜피 최선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차선을 모색하고 선택하는 일. 반쯤은 포기하고 질문하자면 작가와 큐레이터가 갈라지는 지점이 그런 것일까? 하아 잘 모르겠다. 현시점에선 사회 현장에선 최선의 문화적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너무 많은 제도적 정치적 관계 속에서 움직이게 된다. 오히려 그런 지점에서 미술관이 그런 실천에 더욱 어울리는 장소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문화적 자율성을 급진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장.
좋은 걸 보면 분명히 관객들도 좋은 걸 느낀다. 내가 이걸 소중하고 심각하게 여긴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그것을 대한다. 하지만 여기엔 조건이 하나 붙는다. 물건은 제 자리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좋은 물건도 제 자리에 있지 못하면 쓰레기가 된다. 나는 좋은 물건을 떼어 와서 적합한 자리에 놓아주고 싶었다. 좋은 물건은 작가로부터 나온다. 적합한 자리에 놓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귀신 영화에서 귀신은 배우들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장소와 조건에서 배우는 귀신이 될 수 있다. 큐레이터의 일은 그런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그래도 개별 관객들, 혹은 분향소 관계자분들께서 전시를 잘 봤다고 말해주실 때, 뭔가 위안 같은 걸 받았다. 지금까지 분향소에서 이런저런 전시가 많았지만 이번 전시가 제일 깔끔하게 잘 됐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사진을 보고 감동했다는 코멘트도 들었다. 이 전시장에서 내가 가장 신경썼던 부분이 관객이 사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정부분 의도대로 된 것 같아서 그건 다행이었다.
2016년 4월 13일 수요일
quotes from Boris Groys, "On the New"
"As I have mentioned, a new artwork should not repeat the forms of old, traditional, already museographed art. But today, to be really new a new artwork should not repeat the old differences between art objects and ordinary things. By repeating these differences, it is possible only to create a different artwork, not a new artwork. A new artwork looks really new and alive only if it resembles, in a certain sense, every other ordinary, profane thing, or every other ordinary product of popular culture. Only in such a case can the new artwork function as a signifier for the world outside the museum walls. The new can be experienced as such only if it produces an effect of out-of-bounds infinity—if it opens an infinite view on reality outside of the museum. And this effect of infinity can be produced, or rather staged, only inside the museum: in the context of reality itself we can experience the real only as finite because we ourselves are finite. The small, controllable space of the museum allows the spectator to imagine the world outside the museum's walls as splendid, infinite, ecstatic. This is, in fact, the primary function of the museum: to let us imagine what is outside the museum as infinite. New artworks function in the museum as symbolic windows, opening up a view on the infinite outside. But, of course, new artworks can fulfil this function only for a relatively short period of time before becoming no longer new but merely different, their distance to ordinary things having become, with time, all too obvious. The need then emerges to replace the old new with the new new, in order to restore the romantic feeling of the infinite real.
The museum is, in this respect, not so much the space for the representation of art history as a machine to produce and stage the new art of today—in other words, to produce "today" as such. In this sense the museum produces, for the first time, the effect of presence, of looking alive. Life looks really alive only if we see i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museum because, as I said, only in the museum are we able to produce new differences—differences beyond differences—differences which are emerging here and now. This possibility of producing new differences does not exist in reality itself, because in reality we meet only old differences—differences that we recognize. To produce new differences we need the space of culturally recognised and codified "non-reality". The difference between life and death is, in fact, of the same order as that between God and the ordinary human being, or between artwork and mere thing—it is a difference beyond difference, which can only be experienced, as I have said, in the museum or archive as a socially recognised space of "non-real". Again, life today looks alive only when seen from the perspective of the archive, museum, library. In reality itself we are confronted only with dead differences—like the difference between a new and an old car."
The museum is, in this respect, not so much the space for the representation of art history as a machine to produce and stage the new art of today—in other words, to produce "today" as such. In this sense the museum produces, for the first time, the effect of presence, of looking alive. Life looks really alive only if we see i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museum because, as I said, only in the museum are we able to produce new differences—differences beyond differences—differences which are emerging here and now. This possibility of producing new differences does not exist in reality itself, because in reality we meet only old differences—differences that we recognize. To produce new differences we need the space of culturally recognised and codified "non-reality". The difference between life and death is, in fact, of the same order as that between God and the ordinary human being, or between artwork and mere thing—it is a difference beyond difference, which can only be experienced, as I have said, in the museum or archive as a socially recognised space of "non-real". Again, life today looks alive only when seen from the perspective of the archive, museum, library. In reality itself we are confronted only with dead differences—like the difference between a new and an old car."
2016년 4월 11일 월요일
2016년 4월 4일 월요일
ㅇㄹ
좀비 형식주의란 말이 부상하기 전에 2000년대 초반 경, 그 시조가 될만한 뉴욕의 쓰리탑이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뻘 피터 핼리의 아이들이라고 할만한 그 인물은 Torben Giehler, Sarah Morris, Benjamin Edwards. 지오메트릭 앱스트랙션의 일종의 반복이었지만 인테리어 디자인에 적격이어서 굉장히 날개 돋힌듯 팔려 나갔다고 한다. 어딜가나 이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고. 내가 보기엔 벤저민 에드워즈가 그나마 낫다. 나머진 귀엽고 웃긴 도형들의 나열이다. plastic art and pure plastic art를 향한 노스텔지어. 굳이 한국에서 미국산 좀비에게 물린 토종 좀비를 보고 싶진 않다고...
돼지 목에 금목걸이
누군가는 봤을 때 모르면 알려줘도 모른다는 걸 잠언으로 삼는다는데, 가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한테 애써 가치를 설명해줄 필요 없다. 난 이런 것이 가치롭다고 생각한다.
능력 밖의 일을 하려고 할 때
할 수 없는 걸 해내려고 할 때
부족함을 족함으로 바꿔내려고 할 때
인간은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향상될 수 있기 때문에, 어제와는 다른 내일이 있으므로 인간은 인간이다. 이런 노력, 가치를 알려고 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자들은 상종할 수 없다. 지능? 재능? 머리가 좀 돈 우생학적 사이코패스 같다. 제 입에 묻은 똥을 좀 보고, 주제파악 할 의향은 없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