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16일 토요일

광화문 분향소에서는

또 대형 모니터를 전시장 안에 설치했다. 집중 추모기간에 맞춰 대중에게 선전하기 위해서다. 광화문 분향소 전시관 실장님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지점이 바로 전시장 안에 설치 되어 있던 기존 물건들을 어찌할 것이냐다. 물론 의미가 있기 때문에 설치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철수하거나 이동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물건들이 모여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전시를 한다는 건 소통의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일인데, 마치 그 버글거리는 사물은 소통을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마치 예전 레지던시에서 일할 때 사소한 기자재 하나 긁힘없이 보관하려고 했던 시설 담당 직원이 떠올랐다. 국가 재산이기 때문에 손상되거나 소실된다면 책임은 그 사람이 지게 된다. 그 물건이 그 자리에서 한치도 옴짝달싹 할 수 없이 제 기능을 상실한 채로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 그런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를 모두 수긍한다면 전시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내가 큐레이터로서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 딜레마 조건을 협상하고 최선의 길을 찾는 것이 현장 큐레이터로서 중요한 것 같다. 아니, 어짜피 최선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차선을 모색하고 선택하는 일. 반쯤은 포기하고 질문하자면 작가와 큐레이터가 갈라지는 지점이 그런 것일까? 하아 잘 모르겠다. 현시점에선 사회 현장에선 최선의 문화적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너무 많은 제도적 정치적 관계 속에서 움직이게 된다. 오히려 그런 지점에서 미술관이 그런 실천에 더욱 어울리는 장소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문화적 자율성을 급진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장.

좋은 걸 보면 분명히 관객들도 좋은 걸 느낀다. 내가 이걸 소중하고 심각하게 여긴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그것을 대한다. 하지만 여기엔 조건이 하나 붙는다. 물건은 제 자리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좋은 물건도 제 자리에 있지 못하면 쓰레기가 된다. 나는 좋은 물건을 떼어 와서 적합한 자리에 놓아주고 싶었다. 좋은 물건은 작가로부터 나온다. 적합한 자리에 놓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귀신 영화에서 귀신은 배우들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장소와 조건에서 배우는 귀신이 될 수 있다. 큐레이터의 일은 그런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그래도 개별 관객들, 혹은 분향소 관계자분들께서 전시를 잘 봤다고 말해주실 때, 뭔가 위안 같은 걸 받았다. 지금까지 분향소에서 이런저런 전시가 많았지만 이번 전시가 제일 깔끔하게 잘 됐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사진을 보고 감동했다는 코멘트도 들었다. 이 전시장에서 내가 가장 신경썼던 부분이 관객이 사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정부분 의도대로 된 것 같아서 그건 다행이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