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타스의 <보들레르, 나는 선(線)을 옮겨 놓는 움직임을 미워한다>는 책 작업인데,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수록된 "아름다움"이란 시를 레퍼런스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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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는 요롷게 생김. 제목은 <아름다움>의 시구 중 하나를 발췌해서 사용했다. '나는 선/시행(line)을 옮겨놓는 움직임을 혐오한다.' |
첫 번째 페이지에 이 시가 통짜로 프린트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이 붉은색으로 저 행을 강조하고 있다(이미지는 못구함).
아름다움 / 샤를 보들레르
나는 아름답다 오, 인간이여! 돌의 꿈과도 같이.
그리고 누구나번갈아 상처 받는 내 가슴은,
물질처럼 말없는 영원한 사랑을
시인에게 불어넣어 주려고 만들어진 것.
나는 흡사 수수께끼의 스핑크스, 창공에 군림한다.
나는 눈(雪)의 마음을 백조의 흰 빛에 결합한다.
나는 선(線)을 옮겨 놓는 움직임을 미워한다(Je hais le mouvement qui déplace les lignes.)
그리고 나는 아예 울지 않는다, 아예 웃지도 않는다.
가장 의젓한 기념상에서 빌어 온 듯한
내 존대한 몸가짐 앞에서, 시인들은
준엄한 탐구 속에 평생을 탕진하리.
왜냐하면, 이 유순한 애인들을 홀리기 위해,
나는 모든 것을 한결 미화하는 맑은 거울 가졌으니.
그것은 나의 눈, 영원히 반짝이는 커다란 눈!
그러나 브로타스는 다음 페이지부터 "Je hais le mouvement qui déplace les lignes"에서 단어를 하나씩 따로따로 떼어내서 페이지 아래쪽에 하나씩 배치한다. 다시 말해서 팽창, 즉 쭉 늘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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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안보이지만 저 아래 부분에 페이지 별로 하나씩 보이는 단어가 왼쪽은 'les' 오른쪽은 'lignes'다. |
크라우스는 이것이 시행을 이동(shift) 혹은 전치(displacement)했다고 봤다. 다시 말해 브로타스는 "I hate the movement that shift the line"이라고 해놓고 바로 그 line을 이동(shift)시켰다. 흑화된 보들레르의 <아름다움>.
한편 크라우스는 이 보들레르의 시를 재해석한 <보들레르> 작업이 브로타스의 또 다른 작업, <Un coup de dés jamais n'abolira le hasard(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폐기하지 못하리라)>와 반대라고 했다. 갑자기 말라르메를 가지고 오는 건 <보들레르> 작업 설명을 그것과 비교해서 편하게 하기 위해서...이 작업의 표지는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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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로타스의 말라르메 페러디 작품. 표지다. |
크라우스 말에 따르면(나는 안봐서 모르겠다) 여기서도 모든 페이지 하단에 제목의 단어가 분절되어서 나타난다고 하는데, 핵심은 시행을 이미지처럼 만들어 놨다는 것. 말하자면 이 작업에서 브로타스는 말라르메가 하고자 했던 것(이미지즘; 완벽한 형식)을 극단으로 밀고나갔단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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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시를 까만줄 친듯. 진짜 오리지널 시에서도 시행이 저런식으로 이미지처럼 배치되어 있다. |
크라우스는 이런 방식이 (글쓰기의 순차적 조건을 움직임 속에서 동시적 영역으로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보들레르>에서 나타나는 "Fig." 넘버와 비슷해보일 수 있지만 사실 반대라고 주장한다.(50-51쪽)
이유는 첫째, 브로타스의 "Fig." 개념은 (그 스스로가 주장했듯이) "이미지의 이론"이다. (말라르메에 의해서 시도됐듯이) 글과 이미지를 동시에 융합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이때 "Fig." 개념은 언어(word)의 불완전하고 파편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저항하는 것은 바로 이미지의 완전한 자기 현전(self-present)이다. 크라우스는 이것을 받아서 "Fig."는 이미지를, 픽션(fiction)의 자기-수정(self-deferring)과 전치하는 위상(displacing status)으로 이론화한다고 주장했다.(51쪽) 이런 견지에서 "Fig."는 말라르메의 시를 캘라그래피적으로 모사하는 것처럼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질문한다.
둘째, <보들레르>에서 나타나는 순차화(sequentialization) 작업의 방법이 말라르메식 작동방식과 다르다. 크라우스는 말라르메 시에서 나타나는 건 끊임없는 페달 포인트(지속음)인데, 이것은 음악의 통시적 흐름을 단음의 공시적 공간으로 순간적으로 변형시킨다고 한다. 무슨 음악적인 비유를 많이 드는데 그러니까 그냥 다 똑같아보이고 그것의 지속이라는 것. 하지만 <보들레르>에서는 그것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즉 이미지의 게슈탈트를 서사적으로 탈바꿈시킨다.(52쪽) (하지만 일방향 서사는 아닌 것 같다.) 이런 예가 크라우스는 <북해에서의 항해>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고 한다.
<북해...>는 모더니즘의 도전의 역사를 뒤섞어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그리고 있다. 이때 크라우스가 보기에 브로타스가 서사화, 혹은 픽션화(크라우스는 fiction을 가상이란 뜻으로도, 소설적 구조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듯) 하는 것은 어떤 불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그의 픽션은 단선적 모더니즘을 복잡화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픽션 작업 안에서 모더니즘은 끊임 없이 자기-수정하는데, 그의 픽션 구조가 그것을 그렇게 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한 브로타스에게 픽션은 하나의 확장된 매체다. 아닌게 아니라 <북해...>작업은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책의 형태를 차용한다. (그림책은 가상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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