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8일 금요일

말 할 준비는 언제부터

나는 말 할 준비가 되었나? 비판을 한다는 건 비판을 받는다는 것과 동일하다. 비판을 하면서 비판받지 않겠다는 생각은 결국 안전한 비판만 한다는 의미이거나 혹은 자기 할 말만 하겠다는 독선적 태도에 다름 아니다. 가장 비평다운 비평은 기존의 인식을 깨뜨리거나, 기존의 인식과 다른 방식의 사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비평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때로는 심한 말을 들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꽤나 우울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본격적인 비평가가 되려면, 말을 하려면, 역으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도 혹독하게 매운 말을 정면으로 들어 내고 똑바르게, 선의에 찬 마음으로 답해낼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들이 비록 나를 싫어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내가 언젠가 그렇게 하는 날이 온다면, 아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를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 근본적이고 세밀한 지점까지 들어갈 수록, 가장 불편한 면을 드러낼 수록 대다수 사람들은 나를 외면할 것이다. 그러면 외로워질 것이다. 그렇게 쭉 생각했다. 만약 내 옆에 한 사람만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면 왠지 힘이 나서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비판을 해야할까? 이건 더욱 근본적인 문제다. 나는 왜 비판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비판을 하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소박한 인간일 뿐이다. 미술을 했고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미술을 더욱 잘 알고 싶은 그냥 그런 사람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비판적 프리즘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여가의 대상이면 고급진 거고, 어려워하거나 관심없어 한다. 그러니까 꼭 미술을 공부해도 비판적일 필요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왜?

짜증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어떤 불편함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발을 신는데 뭔가 발에 신발이 안맞아 불유쾌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식의 불편함이랄까. 분명히 밖에 나가서 걸어다닐 수는 있는데 신발을 벗기 전까진 계속해서 신경쓰이는 그런 방식의 불편함이랄까,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니까 미술이 매일 신고다니는 신발이 되었을 때, 그런데 미술이 내 발에 잘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것을 참지 못하게 됐을 때 비판을 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렇담 미술은 내 신발이 맞을까? 과거엔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이건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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