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20일 일요일

얀스 호프만, 큐레이팅의 예술과 예술의 큐레이팅 (2004)

source: http://www.theutopiandisplay.com/platform/the-art-of-curating-and-the-curating-of- art

10년 전이구나. 이 사람은 창조적 큐레이터의 모델을 예술가로부터 도출해낸다. 옛날부터 예술가가 큐레이팅을 한 경우가 많았고, 그런 전시는 단순히 기계적인 디스플레이나 쇼가 아니라 창작물이었다는 것이다. 멀게는 쿠르베, 조금 더 가까이는 뒤샹, 더욱 가까이는 마우리치오 카텔란 같은 사람을 거론한다. 이들이 큐레이팅한 전시는 그야 말로 창작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렇게 판단한다.

그래서 그는 제도 기관에 속한 큐레이터가 물론 어떤 위험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 예로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 니콜라스 샤프하우셴, 마지프 코르툰, 마리아 린드, 마리아 히아바조바, 니콜라 부리요를 든다. 그는 이들이 제도에 속해있는 큐레이터지만 전혀 제도화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제도 안에서 제도를 바꾸는 타입이라고.

큐레이터가 이런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예술가들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창조적으로 큐레이팅을 지속하는 한, 창조적 큐레이팅의 모델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얀스 호프만은 주장한다. 예술가가 있는한 큐레이터는 구제될 수 있다.

요즘 상황을 보자. 자세한 내부 사정은 모르겠지만 니콜라 부리요는 보자르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당했다고 한다. 드아펠의 로렌초 베네데티도 비슷한 꼴이다. 이것을 일반화하긴 무리가 있지만, 이정도 이름 있는 자들에 대한 제도의 처사는 놀랍도록 냉정하다. 제도 안에서 제도를 바꾼다는 것은 제도가 참아줄 수 있는 꼭 그만큼 아닐까? 제도가 참아줄 수 있는 만큼, 그리고 또한 어떤 예술의 창조적 요구 또한 수용할 수 있을만큼만 큐레이터가 창조성을 발휘해 제도 내에서 큐레이팅 할 수 있다면 조금은 맥이 빠진다. 동시에 그런 일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인줄 알기 때문에 뭐라고 할 말은 없다.

창조적 큐레이터는 거의 예술가만큼 자유로운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 것 같다. 조금 막나가는 행동도 하는 것 같다. 이플럭스에서 누군가는 드아펠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

I hear voices from De Appel saying his leadership was lacking, he was abroad too often preparing for new projects, he wasn’t able to engage his own staff, the municipality and other institutions in the city in his plans. (http://conversations.e-flux.com/t/popular-curator-lorenzo-benedetti-unexpectedly-fired-from-de-appel/2480)

카더라 통신이라서 그렇긴 하지만 여하튼 조직 사회에서 큐레이터가 문제를 일으킨 것만은 틀림없다. 관료주의 큐레이터(예컨대..국현 큐레이터)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유를 누리는 만큼 관료 사회에서 신용도는 반비례한다. 이것이 창조적 큐레이터가 가지는 어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딜레마는 제도에 여전히 남아있는 큐레이터에게 어떤 혐의를 부과할 수 있다: 어떻게 그들은 아직까지 살아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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