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2일 토요일

얼마만큼 비판할 수 있을까

서구 비판적 미술은 이렇게 흘러간다. 자 예술로 혁명을 해보자!(아방가르드) 아..그런데 해보니 예술을 포함해, 제도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네? 제도-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해체하자!(네오아방가르드) 그런데 지금은 제도 없으면 예술 자체가 성립이 안되네? 그렇다면 제도 안에서 제도를 바꿔보자!(뉴인스티튜셔널리즘 등) 그런데 바뀔 생각을 안하네? 멘붕...아니면 새로운 제도를 자유롭게 상상이라도 해보자!(관계미학)--상상만... 그와중에 예술은 감각적인 것을 재분배하는 힘이 있으니 우리의 희망입니다.(랑시에르)--그거 우리 맨날 해오던 건데 이 꼴이자나...

한국에서 아방가르드와 네오아방가르드가 있었다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만, 확실히 현시점에서 제도가 없으면 창작행위를 지속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문화재단 지원사업 개편, 서울시립의 일련의 전시 같은 것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것 같다.

하지만 이건 굉장히 의심스럽다. 그들은 제도가 변화하길 원하지만 근본적으로 바뀌길 원하지 않는다. 어떤 차원에서는 굉장히 제도 다운 제도를 요청한다. 예컨대 개념 정의에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식이다: 미술관은 미술관 다워야 하고 미술은 미술다워야 한다. 혹은 어떤 사람들은 제도가 무한대로 확장되길 원한다: 미술관이 이것저것 다 포용해야 한다는 식...

이 말이 꼭 틀렸다곤 볼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다. 제도는 비제도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내줄 준비가 되어있는가? 만약 제도가 어떤 변화를 시도한다면 어떤 이유에서? 당연히 제도 그 자신을 위해서다. 그런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안전한만큼만 그 비판을 수용해 다음 버전으로 갱신된다. 

이런 견지에서 미술관의 정상화 같은 가능할 법한 일에 대한 요청/비판은 사회운동 차원에서 분명히 시도될 수 있고 그래야 하겠지만, 사실 가장 근본적인 비판은 아니다. 근본적인 비판은 가장 불가능한 것, 제도가 가장 수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말하기다. 여기엔 대안이 없다. 하지만 반드시 말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예술 작품 그 자체로부터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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