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에 있어 결정적인 것은 사물이 본래의 모든 기능에서 벗어나 그것과 동일한 사물들과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긴밀하게 관련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는 유용성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며, 완전성이라는 주목할 만한 범주에 속하게 된다. 이러한 '완전성'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현존이라는 사물의 완전히 비합리적인 성격을 새로운,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역사적 체계 속에 배치시킴으로써, 즉 수집을 통해 극복하려는 장대한 시도이다. 그리고 진정한 수집가에게 있어 이 체계 속에 들어 있는 하나하나의 사물은 어떤 시대, 지역, 산업이나 원래의 소유자에 관한 만학의 백과사전이 된다. 마지막 전율(취득되는 데 대한 전율)이 한 사물을 빠져나가는 가운데 사물이 응고되는 순간 특정한 물건을 하나의 마법의 원(magic circle: 마법진을 말하는듯) 안에 봉해버리는 것이야말로 수집가가 가장 깊숙이 마술에 홀리는 순간이다. ... 그는 자아를 잊어버렸다. 이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지푸라기라도 하나 붙잡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그의 감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의 바다에서 그가 지금 바로 손에 넣은 수집품이 하나의 섬처럼 더오르는 것이다--수집은 실천적인 상기의 한 형식이며 '가까이 있는 것'의 온갖 세속적인 현현 중에서 가장 구속력이 강한 현현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인 고찰은 아무리 사소한 종류의 것이라도 골동품 거래에서 신기원을 여는 것이 된다."(533쪽)
'실내, 흔적'에 관해 쓴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다른 장에서 벤야민은 실내와 장식이 서구 초기 부르주아의 어떤 소외와 관련이 있다고 쓴다. 그래서 상기 인용에서도 수집가는 "자아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한' 수집가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쓴다. 이 진정한 수집은 사물에 다른 방식으로 완전성--즉 아우라를 주입하는 수집가의 어떤 능력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부르주아의 실내 장식은 진정한 수집이 아니다.) 수집으로 아우라는 (세속적인) 가까이 있는 것(proximity)으로 떠오른다. 벤야민은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인 고찰"이라고 썼다. 벤야민이 수집에 관해 이렇게 통찰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텍스트에 관한 훌륭한 수집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하나의 수집 프로젝트며, 그런 한 벤야민은 이것을 정치적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
"수집가의 가장 비밀스러운 동기는 아마 이렇게 표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분산에 맞서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 [반면에] 알레고리가는 말하자면 수집가의 대극을 이루고 있다. 알레고리가는 각각의 사물들이 어떤 유사성을 갖고 있으며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을 통해 사물을 해명하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 이와 반대로 수집가는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로 결합시킨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수집가 속에는 알레고리가가 숨어 있게 마련이며, 모든 알레고리가 속에는 수집가가 숨어 있게 마련이다. 수집가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의 수집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단 한 조각이라도 결여되어 있으면 그가 수집해온 모든 것은 이러한 패치워크에 머문다. 다른 한편 알레고리가에게 사물들이란 사정에 정통한 사람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런 사전의 표제어에 불과하므로 그는 어떤 사물을 수집해도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침잠해서 사유하는 것을 통해 사물들 하나하나에게마다 어떤 의미를 반환하도록 요구할 수 있을지는 어떤 반성으로도 예견될 수 없는 것인 만큼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의 자리를 대신할 가능성은 그만큼 적기 때문이다."(546-547쪽)
상기 인용은 수집가 Vs. 알레고리가에 관한 설명. 하지만 수집가가 어떤 완전한 마술적 백과사전을 이룬다고 할 지라도 그것이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비밀스럽게 수집가는 알레고리가라고 주장. 한편 알레고리가는 어떤 사물로 다른 사물을 대체하는 것이 장기이지만 알레고리가가 사물의 의미를 제대라 모르는 이상 그 사물 자체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알레고리가는 사물을 계속 수집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어떤 덕후가 금발벽안 피규어를 완벽하게 수집했다고 했을 때, 정말 그런지는 확인 할 길도 없으며 새로운 피규어가 지금도 나오고 있는 이상 그럴 가능성도 없다. 언젠가 수집하지 못한 무언가는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완벽 수집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한편 금발벽안이 트랜드일 때 구입했던 얼리아답터는 금발벽안의 묘미를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계속해서 적안흑발, 흑안적발 같은 새로운 피규어를 사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얼리아답터 또한 어떤 데이터베이스를 계속해서 끌어모으는 수집가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골동품 수집가는 계속해서 체계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 얼리아답터가 되어야 하며, 얼리아답터는 어떤 것도 제대로 만족하며 사용해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만족을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수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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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수집가의 아이디어는 곧 바로 동시대 미술에서 주류의 형태로 떠오른 아카이브적 미술로 연결된다. 할 포스터는 <아카이브적 충동>에서 포스트모던 알레고리 충동과 구분해서 동시대 미술에서 나타나는 아카이브적 충동을 주목한 바 있다. 그는 데이터베이스 미술--인터넷이란 메가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하는 가상적 레디메이드로서의 예술--과 아카이브적 예술 사이에 선을 긋는다. 그는 데이터베이스 미술이 철저히 가상적이라면 아카이브적 예술은 촉각적이고 면 대 면의 방식이라고 한다. 데이터베이스 예술이 다루기 쉬운 재료를 쉽게 가공해서 재조합하는 예술이라면, 아카이브적 미술의 재료들은 다루기 힘든, 대체물을 생각할 수 없는 파편들이다.한편 포스터는 크렉 오웬스식의 알레고리적 충동과 아카이브적 충동 사이에도 선을 긋는다. 길게 설명하지 않지만, 오웬스의 알레고리적 충동은 모든 것을 무질서하게 파편화시킴으로써 "저자적 상징의 총체"에 저항했다. 하지만 아카이브적 충동은 (이것이 상식적이진 않을지라도) 새로운 질서를 제안하는 "접속으로의 의지"이며 그것을 위해 무질서한 파편을 취한다.
포스터는 이런 예술가상을 편집증자에 비유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편집증자는 불길하게 같아 보이는 세상에 의미를 투사하려고 노력하는데, 이때 포스터가 보기에 편집자로서의 아카이브 미술가가 질서를 투사하는 배경에는 어떤 문화적 실패가 근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실패는 다름아닌 "유토피아적 차원"이다. 포스터는 묻는다. "만약 사물이 원초적 장소와 지독하게 분리된 것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접속이 그렇게 열병적인 이유가 있을까?"(Foster, p. 22.)
따라서 포스터는 아카이브적 미술이 "구축적 장소", 즉 땅 위에서 무엇을 짓는 유토피아적인 것이라고 쓴다. 이것은 그가 얼마 전에 지지했던 "발굴적 장소", 그러니까 역사 안에 침잠하는 어떤 트라우마적인 것과 상당히 대비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포스터는 이 글에서 벤야민을 언급하지 않는다. 아마 알레고리적 충동을 지지하면서 벤야민을 그토록 써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_-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터의 아키비스트로서의 예술가상은 벤야민의 수집가와 많이 겹친다. 알레고리가와 대비되는, 자신만의 백과사전을 구축하려고 하는 '진정한' 수집가 말이다. (물론 이건 완수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안의 '충동'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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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계에서도 아카이브란 말이 떠돈지 이제 몇년 된 것 같다. 대부분 특정한 전시 형식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예컨대 안젤름 프랑케의 <애니미즘>이나 박해천의 <다음문장을 읽으시오>.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연 몇몇 전시가 그렇다. 물론 이것이 흘러간 역사를 모아서 각주를 다는 일인 이상 <아케이드프로젝트>에서 벤야민이 한 작업과 같은 수준에서 이야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내 불만은 이런 것이다. 이런 방식은 역사를 쓰는 작업에서 아주 흔한 것이며 미술관 급과 큐레이터들은 항상 해왔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별 특별할 것이 없다. 여기에 아카이브란 생소한 말을 사실 붙일 필요도 크게 없다. (포스터도 아키비스트로서의 예술가는 큐레이터로서의 예술가와 같은 의미라고 말한다. 즉 큐레이터는 아카이빙을 늘상 하고 있단 이야기. 단, 제도적이고 관습적인 차원에서 그렇단 것인데 내 생각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너무 미술관 싫어하는 듯...)
아카이브란 말을 유행시킨 포스터가 이 말을 쓴 이유는 작품 비평을 위해서였다. 데이터베이스의 세례를 받는 세계가 도래하면서 알레고리적 충동으로 설명되지 않는, 레디메이드 데이터베이스를 매체 삼아 어떤 가상적 결과물을 직조해내는 예술가(포스트프로덕션에 익숙한 프로듀서로서의 예술가)가 출현했고, 할 포스터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새로운 모델(더욱더 촉각적인, 아키비스트로서의 예술가)을 만들어낸 것 같다. 하지만 한국 미술계에서 아카이브란 말은 단지 자료전을 뜻하기 위해 더욱 많이 쓰인다.
틀렸다곤 볼 수 없겠지만 조금 이상하다. 마땅히 예술가와 작업에 먼저 쓰여야할 미술 용어가 제도적 차원에 더욱 적용되고 있다니 말이다. 물론 아카이브적 충동이 "제도적"이고 "입법적"인 이상 제도 기관과 친밀함을 보여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리고 아키비스트로서의 예술가의 원형은 어쩌면 큐레이터인 것도 맞다. 하지만 제도 기관으로서 미술관과 그에 부속된 큐레이터의 창조 행위란 의심스럽게 그지 없다. 주어진 제도는 그 제도의 경계를 넘지 못하기 때문에 제도다.
두 가지 가정이 있을 수 있다. 첫째, 한국에는 '아카이브적 충동'으로 해석될 만한 작업이 별로 없다. 둘째, 한국에서 창조적 행위와 권력은 예술가에서 제도적 수준으로 넘어가버렸다. 첫째 가정은 일단 선후관계가 틀렸다. 작업이 먼저 있고 해석이 있는 것이다. 아카이브적 충동이 먼저 나올 이유가 없다. 하지만 또한 아카이브적 작업이 없다는 것도 상상은 안된다.
둘째 가정은 과장되었지만 의미심장하다. 개인전보다 기획전--과장하자면 비엔날레--이 제대로된 대접을 받는다. 어떤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인지가 어떤 전시의 인장 역할을 한다. 작업보다 공간의 이름이 넘친다. 지원 제도 없이는 전시를 하지 못하는 작가와 공간이 수두루빽빽하다. 등등... 알아주지 않아도 자생자족하면서 그 나름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그런 방식의 문화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 제도들이 미술의 조건을 지탱하고 있다. 반대로 말해 이런 조건이 없는 현재의 미술계란 상상이 거의 불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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