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는 세계화와 그 영향이며, 두 번째는 그 보다 최근 개념인 ‘인류세(Anthropocene)`입니다. ‘인류세’는 제가 기획하여, 몇 주 전에 개막한 2014년 타이페이 비엔날레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인류세는 1980년대 과학자들이 사용한 과학적 용어로, 인간의 활동이 지구환경에 끼친 영향이 나타나는 지질학적 기간을 가리킵니다. 세계화부터 인류세에 이르는 개념을 살펴보며 ‘엑스폼(exform)’을 소개하고, 그것이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이 강의를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주제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논의할 건가요? 첫 번째로, 매우 어리석은 일이긴 합니다만, 예술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입니다. 예술에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을 매번 다시 정의해야 합니다. 예술은 첫째 우리가 살아하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는 활동이자 도구입니다. 세계화와 인류세에 대해 언급했습니다만, 이 두 가지 개념은 오늘날의 예술에서 매우 가시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특정한 층위입니다. 그것은 감각적 인식과 우리가 ‘형태’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형태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로제 카이와는 형태를 매우 흥미롭게 정의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네 종류의 가능한 형태는
-거기엔 다섯 번째 형태라는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네 가지만 있습니다. 첫째로, 성장에 의해 생성되는 형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식물처럼 말입니다. 또한, 우연으로 발생된 형태가 있습니다. 그리고, 틀에 의한 주조로 만들어진 형태가 있습니다. 네 번째 종류의 형태는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기획에 의해 생성된 형태입니다. 예술은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형태입니다. 그것은 개인이나 집단을 투영하며, 매우 특정한 종류의 형태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성장에 의한 것도, 우연에 의한 것도, 틀에 의한 것도 아닌, 기획에 의한 형태입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현대미술은 이 네 가지의 형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여러분은 많은 전시들에서 식물적인 요소, 또는 무기물, 틀에 의한 형태, 그리고 우연에 의한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위해 아주 간략하고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예술은 세상과의 관계를 구체화하는 활동입니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안경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세계와 맺은 특정한 관계의 구체화는 어떤 종류의 요소로도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몸짓이 될 수도 있고, 사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관계를 구체화시키는 그 어떤 것이든 가능합니다. 예술은 그 자체로 영향을 주며 현실에 관여한다는 사실에서 다른 여러 활동과는 다릅니다. 예술은 현실에 관여하고, 그 결과로 예술 고유의 영역을 만들어 냅니다. 선사시대 동굴부터 지금에 이르는 모든 예술의 공통점중 하나는 축소된 모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른 규모의 것입니다. 실제 사물과 일대일의 크기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다른 규모의 것입니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현실에 분명히 직접적으로 개입하며, 현실 속에서 현실과 함께 작업을 합니다. 현실의 재현일 필요는 없지만, 예술은 여전히 다른 크기의 축소된 모형으로 여겨집니다. 예술의 또 다른 특성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요소들을 다시 불러낸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이곳 카페에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 영국작가 리암 길릭은 예술가의 활동을 주인이 던진 물건을 물어오는 개의 행동에 비유했습니다. 예술가들은 방 한가운데에 있는 카펫위로 물건을 다시 가져옵니다. 이것은 늘 원심적, 구심적 움직임입니다. 물건을 던지는 ‘원심적’ 움직임, 물건을 카펫위로 다시 가져오는 ‘구심적’ 움직임 이러한 움직임이 바로 제가 ‘엑스폼’이라고 부르는 그것입니다. 이것은 배제와 수용의 과정에 있는 형태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사회가 보고 싶어 하지 않지만, 예술가들이 현장으로 다시 가져오는 모든 것들―요소들, 기호들, 형태들―입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했지만, 매우 광범위한 서론이 되었는데요.
이제 세계화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세계화는 현재 우리 모두와 관여된 인류의 과정입니다. 세계화는 사실 오래전에 시작되었지만, 미술계에는 최근에야 그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시점을 1989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1989년은 <지구의 마술사들>이라는 대형전시가 열린 해입니다. 이 전시는 세계 곳곳의 작가들이 참여한 첫 전시였습니다. 1980년대 이전 주요 전시나 비엔날레의 작가명단을 보면, 거의 몇몇 정해진 같은 나라의 작가들만 참여했었습니다. 1989년은 또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로 세계화 운동이 확산되고, 세계의 수평화가 시작된 해입니다. 이는 곧 미술 세계화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 영향으로서의 세계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비록 아주 극적이고 가시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세계화는 근원이라는 발상에 대한 물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근원이라는 개념은 제가 지금까지 써온 모든 책과 글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입니다.
언급되었듯이 관계미학은 예술작품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대한 고찰입니다. 의미는 정말로 작가에 의해서만 생성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집단적인 과정, 혹은 상호 교류적 과정일까요? 90년대 초에야 대두되긴 했지만, 이것은 새로운 개념이 아닙니다. 들라크루아는 그의 일기장에 예술작품은 마치 구름과 같다고 적었습니다.예술가는 에너지와 의미를 응축하여 작품을 만들어내고, 감상자는 그 의미를 “비”를 맞듯 전달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항상 삼각구조를 이룹니다. 우리가 예술가와 맺는 관계는 항상 삼각관계입니다. 거기엔 저자, 즉 예술가가 있고, 작품이 있으며, 관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이해를 도울 간단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관념주의 철학자에 대립되는 유물주의 철학자를 아주 평범한 기차 이미지에 비유하여 정의했습니다. 관념주의자에 대한 비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알튀세르에게 관념주의 철학자나 관념주의 사상가는 기차가 어디에서 오고, 기차가 어디로 떠나는지 알고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유물주의 철학자는 어디서 기차가 오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기차에 타는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세상을 보는 매우 대립된 방식입니다. 저는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데, 저는 기차가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기차에 올라타서 주변사람들과 함께 의논하며,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또 다른 책 <포스트프로덕션>에서 근원에 대한 이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제기하고자 했습니다. 이 책의 요지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화의 생산자란 무엇이고, 문화의 소비자란 무엇일까요? 여러 다양한 현상에 의해 그 경계의 소멸은 점점 더 가속화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산과 소비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를 음악에서 찾아본다면, 바로 디제이입니다. 디제이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음악을 틀지만, 동시에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요소의 연결이고, 이는 그 음악의 원재료보다 중요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현대미술에 적용해보면, 그것은 오늘날 전시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여러 측면으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구조를 이용해 작업하는 작가들.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 둘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우선 리크릿 티라바닛을 예로 든다면, 리크릿 티라바닛는 항상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구조를 이용합니다. 이것은 관람자에게는 잘 드러나지 않는 그의 작품 양상이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유쾌함만큼 중요합니다. 리크릿은 항상 이미 존재하고 있는 형태들로 작업을 합니다. 그는 그 형태들에 거주합니다. 과거로부터 온 형태들에 거주하는 방법을 만들어냅니다.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서, <레디컨드>라는 책에서도 근원에 대한 고찰을 다룹니다. ‘레디컨트’는 사전에서 존재하는 단어로, 일반적으로 ‘레디컬’ 바로 다음에 나오는 단어입니다.아시다시피 ‘레디컬’은 근본적임을 의미하고 ‘레디컨트’는 근본, 뿌리가 뻗어 나가며 자라는 식물이나 유기체를 의미합니다. 아이비나 딸기와 같이 말입니다. 20세기의 모더니즘은 레디컬 했습니다.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것과 동의어인 급진성(radicality), 급진주의(radicalism)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뿌리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21세기의 모더니즘이 다양화되는 뿌리들, 증식하는 근원들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근원은 우리가 정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에 우리 자신을 동일시해야 할까요? 이것이 실제 주된 질문이고, 이 질문에 오늘날의 많은 예술가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된 세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뿌리’와 ‘근원’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며, 특권들에 대한 질문들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고, 다중화 되는 정체성, 변화하고 유동적인 정체성의 개념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레디컨트는 생장이 진행됨에 따라 그 뿌리를 확장하는 유기체입니다. 그것은 주체인 개인과 환경 사이의 새로운 관계 양상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움직이는 매순간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예술에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요소입니다.
저는 강연 앞부분에서 엑스폼을 과정으로 끌어들여진 형태라고 정의했습니다. 이 형태는 하나의 안정된 형태로 포착하기에 매우 힘든 것입니다. 이것은 늘 다른 관점들에 의해서 정체성이 부여되는 형태입니다. 예를 들어, 모더니티의 근원으로 돌아가 보면, 여기서 저는 근원이라는 용어를 하나의 역사적인 용어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테면 모더니즘의 역사 말입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정치 세계를 한쪽에 두고, 이에 포함되지 않은 모든 것들을 다른 한편에 두는 형태입니다. 우리가 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화적 윤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이나 지배적인 이념에 의해 폐기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겼던 사상, 사물, 장면들에게 존엄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긴 투쟁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모든 시대와 장소에는 공식적인 이념이 있는데, 이러한 이념은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거부된, 공적인 논의가 불가한 것들을 만들어냅니다. 지난 두 세기 동안 모더니즘의 역사를 살펴보면, 회화나 조각에 있어 예술가들이 복원하고자 했던 대상 혹은 상태를 찾을 수 있습니다. 1863년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를 예로 들면, 물론 쿠르베도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올랭피아>는 프랑스에서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처음 살롱전에서 거부된 이후, 2년 후인 1865년에야 전시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관람자와 주류 인식들은 이 작품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올랭피아>에 그려진 창녀와 꽃을 든 하녀의 모습을 알아봤고, 이는 절대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절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공적인 영역에서 감춰지고, 보이지 말아야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창녀였습니다. 둘째로, 한스 벨팅이 쓴 매우 흥미로운 글에 따르면, 이것은 분명하게 돈의 이념을 가시화한 회화였고, 그 회화 자체를 상품화하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당시 관람객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한편엔 부르주아, 즉 기득권층이 있고, 다른 한편에 그에 반하는 논쟁자, 아웃사이더가 있습니다. 그 사이에는, 둘 사이의 타협 대상인 거대한 무리의 기호와 이미지들이 줄지어 놓여 있습니다. 모더니즘 회화는 이전에 보여줄 수 없었던 대상과 주제를 화면 속으로 가져왔습니다. 19세기 회화 주제의 위계질서는 매우 분명하였고, 명문화되어 있었습니다. 역사화는 고상한 것이었지만,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그림은 하찮게 여겨졌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 회화의 역사는 하찮게 여겨졌던 대상들이 주된 주제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현실은 합의의 산물입니다. 그것은 함께하는 토론이며 타협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제가 제 어깨 위에 분홍색 토끼가 있다고 한다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은 믿지 않으시겠지만,제가 정말 있다고 여러분을 설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서로 의견일치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과정이 있을 것입니다. 예술은 이러한 의견일치의 파기, 혹은 균열입니다.
예술은 배제되고 감추어진 것을 가시적 영역으로 드러냅니다. 이것이 지난 두 세기 동안, 문화계에서 벌어진 배제와 수용의 움직임이었습니다. 20세기 심리학, 이념, 예술과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패턴입니다. 이것이 모더니즘의 초석입니다. 모더니즘의 예술가들은 발터 벤야민이 유물론적 역사학자라고 불렀던 개념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벤야민이 보들레르에 대해 썼던 글에서 유물론적 역사학자를 넝마주이에 비유한 매우 흥미로운 구절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 예술가들에 대한 절묘한 정의가 될 수 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넝마주의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여기 매일 도시의 잔재를 줍는 사람이 있다. 대도시가 폐기하고, 잃어버리고, 멸시하고, 망가뜨린 것들을 그는 목록화하고 수집한다. 그는 방탄한 생활의 아카이브인 쓰레기더미를 뒤진다. 그는 마치 보물을 모으듯 한다. 신성한 산업이 내친 모든 쓰레기들은 이제 실용적인 대상 혹은 쾌락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쓴 이 짧은 구절은 폐기되고 버려진 것들을 다시 살려내는 과정으로서의
20세기 모더니즘의 역사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리암 길릭이 말한 던져진 뼈를 다시 카펫 위로 가져오는 개와도 같습니다. 지난 20년간이 어땠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물론 60년대도 살펴볼 수 있을 겁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와 같이 잔재를 수집하고, 사회가 폐기한 작은 요소들을 모으는 수집가가 되었습니다. 많은 작가들은 이처럼 사회가 무시하고, 폐기하고, 묻어버린 것들을 여러 방법으로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예술가는 현재를 발굴해 가는 고고학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정의와 관련이 깊습니다. 벤야민을 다시 인용하자면, 이것은 실제 그의 정치철학의 주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역사는 항상 승자들에 의해 기록됩니다. 오로지 승자만이 역사를 기록하고, 그들 관점의 역사를 적용합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이와 상반되는, 전쟁에서 패한 “패자”들에 의한 역사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특히, 지난 30년간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의 급증 속에서 우리는 승자의 버전이 아닌 역사, 소수집단과 군소공동체에 의한 그들 입장에서의 역사와 현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그려본다면 그것은 마치 전쟁터에 묻혀 있는 것들, 즉 패자들의 것들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발터 벤야민이 제기한 역사이론입니다. 19세기 이후의 이런 경향의 미술을 `리얼리즘(Realism)`이라고 불렀습니다.
쿠르베가 정의한 리얼리즘은 조형적인 측면에서 사실적 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욱 복합적인 것이었습니다.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폐기된 요소들을 다시 현장으로 가져오는 것이었으며, 사회의 소수세력을 대변하는 노동자들을 화폭에 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쿠르베가 정의한 리얼리즘입니다. 시각적인 리얼리즘이 아니라, 정치적 리얼리즘입니다. 그것은 권력의 이상화에 대항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어떤 권력이든 그들의 존재를 이상화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형태들을 이상화합니다. 예술가의 역할은 이런 요소들을 탈-이상화(de-idealize)시키는 것입니다. 이상화는 세계가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정당화하는 과정이자, 기존질서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과정입니다. 예술가들은 그 정반대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예술을 `현실`이라고 불리는 영화를 다른 방식으로 생산해내는 `편집테이블(editing table)`로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예술가는 항상 세계를 재편집합니다. 새로운 버전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세계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권력이 얼마나 연약하며 불안정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권력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세트이자, 시나리오 더미인 `미장센`입니다. 우리는 시나리오를 따릅니다. 예술의 역할은 대안적인 시나리오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쿠르베가 이야기 하는 리얼리즘, 오늘날 제가 말하는 리얼리즘은 예를 들어, 저에겐 리암 길릭은 `리얼리스트(Realist)`입니다. 시각적인 리얼리스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리얼리즘은 문화적 위계질서에 대한 비평입니다. 이것은 사회가 배제의 메커니즘을 유지하는 전제조건들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리얼리즘은 이러한 메카니즘을 가시화시키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예술가는 우리가 폐기하고, 버리고, 거부하는 방식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리얼리즘입니다. 이러한 리얼리즘은 예술뿐만 아니라 정치학, 심리학과도 연관됩니다. 칼 막스의 역사론을 예로 들자면, 그 주제는 `프롤레타리안`입니다. `프롤레타리안`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라틴어 `프롤레스 proles`로부터 나왔습니다. `프롤레스`는 자식 이외에 어떤 부(富)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뜻합니다. 이것이 `프롤레스`의 정의입니다. 존재하기 위한 생물학적 위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프롤레타리안`입니다. 19세기 지그문트 프로이드에 따르면 심리학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심리학의 주제는 무의식입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의 내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의식으로부터 추방된 것을 말합니다. 모두 같은 방식입니다. 범위는 다르지만, 과정은 같습니다. 프롤레타리안은 사회로부터 밀려난 대상입니다. 무의식도 의식으로부터 쫒아낸 것입니다. 모더니즘의 역사에서 현대예술의 주제는 이와 동일합니다. 그것은 과소평가된 것들, 경시된 것들, 폐기된 것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가장 사소한 기호들, 가장 우스꽝스럽고, 경시되는 형태나 이미지에 미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모더니즘의 역사가 보여주는 주된 패턴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스스로에게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원심적 활동의 최근 형태는 무엇인가입니다. 19세기엔 모든 것이 훨씬 단순했습니다. 한쪽에는 권력이 다른 한쪽에는 예술가가, 한쪽에 배제가 다른 한쪽에 수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훨씬 복잡해지고, 더욱 수평화 되었습니다.
오늘날 수용과 배제의 이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두 가지 주된 특징을 상기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 시대의 문화, 21세기 문화의 특징적 요소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미지의 영역 terra incognita’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 구석구석을 모두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처음 맞이하는 상황입니다. 지구의 마지막 미지의 장소는
20세기 초에 발견되었습니다. 보르네오가 그 미지의 장소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구석구석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새로운 현상입니다. 인류는 지금과 같은 완전함을 느끼며 산 적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지구상에 미지의 장소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점과 연결시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과거, 아카이브, 역사에 그렇게 관여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탐험할 수 있는 마지막 대륙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공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미래와 과거 같은 시간에 대한 발견과 탐구입니다. 지난 20년간 예술에서 역사가 차지했던 중요성을 되돌아보면, `미지 영역 terra incognita`의 종식에 대한 공명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능성, 이것이 제가 제시하는 가설입니다.
이러한 진화의 또 다른 부산물 혹은 효과는 우리는 다양한 시간이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처럼 과거가 현재와 함께 공존하는 때는 인류 역사상 없었습니다. 이를 위한 지식의 주된 도구는 인터넷입니다. 우리는 모든 시대의 이미지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베르메르의 그림, 프랭크 스텔라의 작품, 또는 작년에 생산된 작품들이 오늘날엔 모두 같은 층위에 있습니다.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 것은 역사적 깊이입니다. 지난 세기에 우리는
`과거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겐 중세나 지난 세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요소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역사에 대한 우리의 시간 개념은 밤하늘의 별자리와 같습니다. 밤하늘을 보면 별자리를 볼 수 있는데, 그 특징은 여러분이 보는 요소들, 여러분이 보는 별들은 모두 다른 시간대에서 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별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여러분이 보는 것은
환영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 옆에 더 가까이 존재하는 별이 있다 해도, 모두 같은 층위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것은 다른 시간대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 대한 완벽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별자리의 패턴은 인터넷에서 더할 나위 없이 구현됩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매우 평면적입니다. 여러분은 한 사이트에서 다른 사이트로 이동할 수 있는 수평성을 갖습니다. 별자리 개념과 그것의 가상세계 장악, 그것이 진행되는 방식, 오늘날 우리가 지식을 찾는 방식들이 모두 같습니다. 별자리와 인터넷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21세기의 두 번째 특징은 제가 ‘과생산 hyper-production’이라 부르는 현상입니다. 제가 25년 전 처음 젊은 큐레이터로 일을 시작했을 때, 현대미술계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여전히 가능했습니다. 60년대에는 더욱더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부터 어떤 분야든 한 분야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너무나 많은 작품들, 출판물 등이 생산되어 한 분야의 모든 지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박학다식 교양인의 개념은 이제 불가능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지식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지식은 여러 정보들 속에서 원하는 것을 검색하는 최적의 방법을 찾는 것이며, 선택을 위한 올바른 열쇠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현대미술에서도 과생산의 공명을 볼 수 있습니다.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하는 많은 예술작품들, 제가 언급했던 수집의 개념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아카이브의 개념은 심지어 더욱 구체적입니다. 그러한 작품 안에서 정보, 데이터는 축적되지만 읽거나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추상적인 형태의 지식입니다. 이러한 개념에 부합하는 첫 번째 작품은 일본계 미국인 작가인 온 카와라가 1971년에 만든 <일백만 년>이라는 작품입니다. 일백만년을 나열한 것입니다. 물론 아무도 읽지 않겠지만, 매우 강력한 개념을 보여주었습니다. 1971년은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발명된 해였습니다. 기계발전으로 계산에 대한 인간의 한계를 넘는 순간을 목도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카이브의 개념입니다. 아무도 아카이브의 전체를 파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여러분은 온 카와라의 작품과도 같이 우리의 가능성을 초월하는 수많은 예술작품들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과도한 기억의 세상 hyper mnemonic world`에 살고 있습니다. 아카이브의 거대한 구조체인 박물관과 같은 세계입니다. 박물관은 우리가 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꺼내어 쓰는 보고이자 우물입니다. 하지만 그 아카이브는 인간의 가능성을 초월합니다. 예술가는 이 기억의 문지기이자, 역사 속을 항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저는 예술가들을 ‘기호-항해사 semio-naut’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semios`는 `기호`에서 왔고, `nautos`는 `항해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술가는 기호를 통해 항해하고 기호들을 연결하는 방법을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이런 과생산의 세계에서 항해 능력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식을 얻기 위한 주된 도구입니다. 매일 우리가 마주하는 거대한 데이터 구름을 뚫고 항해할 우리의 나침반은 무엇일까요? 예술가들은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맞설 수 있는 패턴, 혹은 모델을 제공합니다. 배제와 소외는 과생산-우리가 살고 있는 과축적된 아카이브 (hyper archive)와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저는 3명의 매우 다른 예술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제프 쿤스, 가브리엘 오로즈코, 피에르 위그, 이 세 작가들은 다른 종류의 기호를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제프 쿤스는 유치하거나 상업적인 하찮은 기호들에 럭셔리 코드들을 흥미롭게 적용합니다. 이것은 쓰레기와 대중문화의 간극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간극은 제프 쿤스의 작품에서 ‘자본 이득 capital gain‘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부가 가치 말입니다. 이것은 무작위적으로 시작됩니다. 제프 쿤스가 사용한 기호나 형태는 기념품과 같은 교환의 세계로부터 온 것입니다. 공항에서 볼 수 있는 조잡한 기념품의 세계 말입니다. 그가 사용하는 모든 기호는 이런 조잡하고 빈약한 기념품, 장남감, 도구의 세계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대개 교환에 관한 것입니다. 자본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제프 쿤스의 작품은 이런 식으로 자본의 잔인함을 보여줍니다. 임의로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이유로 그의 작품이 많은 경우 무자비하다고 간주되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오로즈코의 작품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그는 주로 건축 자재, 돌, 나뭇잎, 동물화석 등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산업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과 문화 사이의 긴장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문화는 학문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자연과 문화 둘 다 산업의 지배를 받습니다. 둘 다 산업화 과정으로 왜곡됩니다. 가브리엘 오로즈코의 작품에서 인간의 존재는 무엇일까요? 인간은 자국, 흔적, 또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의 모습이 묘사되어있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의 흔적, 지문, 얼룩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존재는 희미해집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피에르 위그의 작품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 작가는 제가 90년대에 쓴 <관계 미학>에서 많이 언급한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는 인간의 영역에서 생태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최근 퐁피두 센터의 전시에서, 이 전시의 새로운 버전이 곧 로스엔젤레스의 LACMA에서 열릴 예정입니다만, 그는 이 전시에서 조개와 같은 작은 동물들을 가지고 작업을 했습니다. 심지어 독감 바이러스와 같은 박테리아도 사용하였고, 개미 등과 같은 미생물의 형태를 사용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중심에서 보다 확장된 생태계의 영역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영역에서 생태영역으로 확장된 진화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이 관계 미학 이면에 숨은 가장 중요한 핵심 중에 하나입니다.
이러한 상황 또한 변화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에는 소셜 네트워크가 존재하지 않았고, 스마트폰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늘 기계에게 이야기하고, 이것을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현상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계에 대고, 기계를 통해 말하며 지낼까요? 몇 년 후에는 늘 기계와만 대화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 우린 점점 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관계 미학 이면의 이러한 실제적 핵심에 대해 잠시 후에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올해 타이페이 비엔날레의 바탕이 된 주제이기도 하며, 인간이 저버린 모든 가능한 영역 속에 인간을 다시 들여오는 개념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잠시 후 다루겠습니다. 오늘날 배제와 소외의 새로운 형태인 엑스폼을 요약하자면 사회나 시민에 의해 거부되거나 요구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호가 엑스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수용과 배제의 이중적인 활동을 취하는 형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문화적 위계질서는 더 이상 이분법적이지 않습니다. 더 이상 권력과 시민사이의 대화가 아닙니다. 더욱 복합적이고 수평화 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잡하게 얽힌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네트워크 되고, 자본이 유동하고, 이주민의 이동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현재 유동과 네트워크는 장소보다 더 중요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19세기 민속학은 아마조니아로 연구자를 보내 ‘타자’의 생활을 사진으로 기록하거나 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은 ‘타자’에 대한 정의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타자는 더 이상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소셜 네트워크만 보더라도 거의 모든 이가 현실의 이미지, 삶에 대한 정보와 기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리포터가 되었습니다. 모든 이가 이미지를 생산하고, 이미지를 보내거나 공유합니다. 이러한 집단적인 공들임은 몇 십 년 전만해도 불가능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영화 평론가 세르주 다네가 말한 여행과 사진 찍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는 사진 찍는 것이 극도로 폭력적인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 그는 엽서를 샀는데, 그곳 사람들 스스로가 표현한 그들의 이미지이기 때문입니다. 엽서는 거의 사라지고 있지만, 그 비유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저는 세계화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세계화와 병행하는 또 다른 양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류세 anthropocene`입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세계 2차 대전이후 우리가 접어든 이 지질학적 시대는 인간의 활동이 지구에 끼치는 영향으로 인해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세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이라는 주체 자체입니다. 인류가 지구의 한 종으로서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각각의 개인으로서 우리가 현실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인류세 역설 anthropocene paradox”입니다. 우리는 기술적 영역으로서 지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개인으로서 우리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점점 미미해 집니다. 우리는 스스로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느낍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21세기의 또 다른 특징은 인간이 시스템의 잔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관계미학을 다시 언급하려는 이유이고, 제가 타이페이 비엔날레 전시인 <극렬가속도 劇烈加速度 The Great Acceleration>에서 다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첫째로 최근의 철학에서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는 것은 중앙 집중화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비평입니다. 분명, 소위 중심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비판하고 해체하며, 더욱 수평성을 확보하려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주된 비평은 ‘인간중심주의 anthropocentrism`에 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관계미학과 인간의 관계성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예술가들의 실천들이 많은 사상가와 철학자들로부터 인간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최근 철학의 경향이 ’사변적 리얼리즘 speculative realism‘입니다. 이것은 사물, 현상, 그리고 인간을 같은 층위의 것으로 보는 `사물의 민주주의 democracy of objects`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퀀틴 메이야수가 아주 흥미로운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항상 주체와 객체 간의 상호관계 결과라고 보고 이를 ‘상관주의 correlationism’라 말했는데, 전형적인 서구 철학의 관점입니다. 상관주의를 벗어난 전시나 예술은 무엇일까요? 사실,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예술의 개념 자체가 상관주의, 즉 인간의 의식과 상황의 공존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셀 뒤샹에 따르면, 관람객이 그림을 작품이 되게 하고, 그것이 인간의 의식에 의해 활성화되지 못한다면, 모든 작품은 단순한 사물이나 상품으로 변형되고 맙니다. 이것이 제가 새로운 관계적 풍경을 포함한 새로운 관점으로 관계미학을 다시 생각해보는 방식입니다.
저는 앞에서 우리가 늘 사용하는 여러 종류의 기계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자연이나 동물들과 맺는 관계도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 영역의 측면에서 보자면 더 이상 그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타이페이 비엔날레는 관계적 세계의 이러한 새로운 전개양상을
다루고자 한 전시입니다. 90년대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인간적 척도가 무너졌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회는 스스로를 구성구요.
이렇게 다시 설명해보겠습니다. ‘경제 economy`라는 단어는 `집의 구성`을 의미하는 ‘오이코스 노모스 oikos nomos’라는 그리스어에서 왔습니다. 그것은 매우 가정의 차원이고 인간적인 척도를 기반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경제의 75%는 기계와 로봇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고빈도 매매 high-frequency trading’라고 합니다. 인간은 그들 자신을 위한 기술영역, 기반시설의 방관자이자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금융체의 75%가 사람이 아닌 기계에 의해 생산됩니다. 이 전시는 제가 어떤 기사를 읽고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상에 인간보다 로봇이 더 많다는 내용이었는데, 이것은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인터넷은 90년대에 소통의 수단으로, 유희를 위한 수단으로, 교환의 가능성을 증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터넷에서 인간은 소수집단이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인터넷에서 인간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인터넷 상에서 개인정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봇에 의해 수집된 정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체계가 뒤집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새로운 상황의 특징은 우리가 각각의 개인으로서, 시민으로서, 그리고 동물, 식물, 자연적 요소, 대기로 구성된 새로운 부차적인 계층으로서 상호관계의 필요성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기술 산업 체계의 공격을 받고, 시민사회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동양과 서양 사이, 서양의 사상과 아시아의 사상 사이의
새로운 대화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서양철학에 전제되어 있는 개념은 메이야수가 말한 `상관주의 correlationism`입니다. 그것은 한 편에 자아가, 다른 한 편에 그 자아가 세계를 통해 보거나 인식하는 것, 이들에 대한 사유 없이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서양 철학에 따르면 자아의 바깥에는, 모든 것의 가치를 평가하는 인간의 인식의 바깥에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전시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사물, 자연요소, 동물, 다양한 생명체들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형태의 연결성을 어떻게 확립할 수 있을까요? 가능한 한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52명의 작가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모든 작품의 이미지를 보여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영역들 사이의 새로운 형태의 연결성과 대화를 보여주는
몇몇 작품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를 약화시키거나 과소평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거대한 `상호활동 영역 co-activity sphere`인 이 세계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한 것입니다. `상호활동 co-activity`이란 인간, 자연현상, 동물, 그 외의 생명체들이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며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벨기에 출신 예술가 해롤드 앤카르트의 작품입니다. 그는 먼지나 불을 사용한 작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미지의 왼쪽에 보이는 커다란 더미는 작가가 우연히 발견한 1930년대 프라하 동물원의 카탈로그를 재인쇄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노아의 방주와도 같은, 이미 사라진 동물원의 동물들에 대한 이상한 모음집을 재인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알리사 바렌보임의 작품입니다. 이 작가는 합성 재료, 새로운 재료, 폴리머를 이용해 작품을 만듭니다.
이것은 피터 부게누 작품의 이미지입니다. 이 작가도 조각 작품의 주된 재료로 먼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타니엘 멜로, 여기 보이는 두 작품은 그가 `애니마트로닉스 animatronics’라고 부르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말하며 움직이는 두상을 비디오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주요 캐릭터는 여러분 왼쪽에 보이는 네안데르탈인입니다.
셰자드 다우드. 여기 보시는 이 작품은 3D 두상조각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자연적인 요소와 기계적인 요소가 뒤얽혀있는 오늘날의 인간 모습을 그만의 형식적 혼합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시는 것은 양혜규의 설치작품입니다. 거대한 월페이퍼와 조각은 기계적인 요소와 자연적인 요소를 모두 담고 있는 토템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카미유 앙로의 조각입니다. 이 작품은 그녀가 척추지압사와 같은 각기 다른 치료사들에게 진흙판 위에 그들의 활동을 실행하게 한 후, 그것을 청동조각으로 만들어낸 일련의 연작 중에 한 부분입니다. 인간의 척추 같아 보이지만 조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로저 하이온즈의 작품은 먼지가 된 비행기를 보여줍니다.
닐 벨루파는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시간이 부족해 설명하지 못했지만 무척 흥미로운 양상입니다. 인터넷과 스크린 자체가 우리가 영상과 맺는 관계를 아주 깊이 변화시켰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이 슬라이드에서는 잘 안보이겠지만, 거기엔 영상과 영상에 나온 사람들과의 논의에 대한 정보가 중첩되어. 투명한 스크린 시스템에 의해 잘려진 이미지들은 항상 움직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닐 벨루파 작품의 세부 이미지입니다.
로르 프로보스트는 여기 안쪽 블랙박스 안에 보이는 비디오작품을 설치했습니다. 양 옆에 설치된 모든 사물들은 실제 비디오를 촬영할 때 사용한 것들입니다.
브라질 작가 마테우스 로샤 피타는 매우 동시대적인 또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일상적인 이미지에 밀도와 무게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멘트입니다. 실제 브라질에서 저렴한 묘지석을 만드는 방법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시멘트 연작입니다. 로샤 피타는 손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 작품의 한 부분에 작가가 사용한 사진 이미지가 보입니다.
그리고 작가는 작품위에 사진 속의 손을 정확히 재현해 냅니다.
미카 로텐베르그의 비디오 작품입니다. 이 작가는 생산라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시에서 이 작가는 다른 많은 생산라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비디오 작품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 생산라인들, 예를 들어, 왕포치가 일하는 실제 생산라인 말입니다. 여기 이 모습은 매우 비정상적인 형태의 생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매우 복합적이며, 부조리합니다.
시마부쿠는 선사시대 유물과 스마트폰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합니다. 스털링 루비도 매우 선사시대적인 원형의 형태들을 보여줍니다.
수라시 쿠솔롱의 작품입니다. 전시 관람객들은 작품 속에 숨겨진 금목걸이를 찾기 위해 거대한 설치작품 속을 뒤집니다. 그 공간속에서 부조리한 활동을 유발하려는 시도입니다.
저는 활동에 대해 능동성과 수동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키워드일 것입니다. 제가 ‘관계 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술가들이 관람객들과 만들어내고 있는 활동에 대한 논의입니다. ‘포스트프로덕션’도 능동성에 대한 것입니다. 과학의 생산과 소비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타이페이 비엔날레 전시에서 소개한 `상호활동`이라는 개념은 동물, 기계, 인간과 자연적 요소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며, 관계의 영역이 이들 기계, 동물, 식물 더 나아가 무기물까지 확장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핵심이며, 미래의 예술을 위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현실을 구성하는 여러 다른 영역들을 다룰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러한 영역들을 이제 더 이상 무시할 수도 없고, 우리가 이전에 그랬듯이, 그것들을 장악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언급한 ‘사변적 리얼리즘’이라는 철학적 경향이 제시하는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사물, 자연, 동물과 맺는 우리의 관계에 대한 것이며, 예술이 이들 사이의 관계를 창조해내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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