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7일 목요일

<트랜스 아시아 영상 문화> 중에서

<트랜스 아시아 영상 문화> 중에서

...에 문자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과잉 동일시)으로 볼 것이다. 과잉 동일시를 통해 상징적 질서의 중핵에 맴돌고 있는 잉여- 향유를 폭로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상징적 질서를 요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지젝이 강조하는 전략이 아닌가? 그러나 가장에 둘러싸여 있는 대상 a와 관찰자 사이의거리가 이데올로기적이라면, 관람성의 차원에서 이미지를 전복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리얼(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실재가 아니다)이 물질적인 것에 관련된 것이라면, ‘힘’을 뜻하는 라틴어 virtus에서 비롯된 버추얼은 정신적인 것에 관련된 것으로 이미 현실적으로 특정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잠재력이다. 그러므로 버추얼은 가상(假想)이 아닌 실상(實相) 이며, 버추얼 리얼리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버추얼 액추얼리티와 리얼 액추얼리티 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터넷 접속을 끊음으로써 대상 a와의 조우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a와 만나는 순간 혹은 만나지 않는 순간 모두 삶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구체적인 장소에서 지배와 종속의 권력관계가 행사되는 훈육사회에서 권력이 삶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는 ‘통제사회’(Deleuze, 1995: 177~ 182)로의 이행을 목격하고 있다(그것은 물론 훈육사회를 포함한 통제사회로의 이행이다). (p.147)


...지젝은 < 사이버스페이스에서 판타지의 횡단은 가능한가>의 마지막 부분에서, 판타지의 횡단을 과잉 동일시(over-identification) 의 전략과 연결시킨다. 그것은 주체가 사물의 실제 상태를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도 아니며, 자신의 근본적 판타지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는 것도 아니다. 과잉 동일시한다는 것은 근본적 판타지의 상상적 요소들에 문자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을 가리킨다. 과잉 동일시를 끝까지 밀어붙여, 경험의 일관성을 보증하는 판타지 프레임을 극복하는 것,그럼으로써 존재의 비일관성과 마주하기, 바로 그것이 판타지 횡단의 주된 내용이다. 그러나 이후에 지젝은 《믿음에 대하여(On Belief)》 (2002b)와 《실재 사막으로의 초대》 (2002a) 에서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그노시스주의의 현대판 판본인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포르노(특히 미트샷)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신체없는 기관’의 콜라주다. 우리는‘신체 없는 기관’들의 가벼운 경련, 근육의 수축과 이완 운동들 속에서 어떠한 메시지도 해석할 수 없다.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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