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7일 목요일
<지젝: 비판적 입문>의 저자(Ian Parker)서문 - 이안 파커(Ian Parker)
이 책을 위한 영어 원고를 출판을 위해 보낸 것은 2003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의 주인공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가 반동 세력들로부터 근거를 탈취하고 있는,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지형이 변동했다. 민족주의, 종교적 원리주의, 치료적 정서, 신자유주의, 지성적 회복 등의 새로운 형태들이 근본적 관념들을 외치는, 근본적 관념들을 철저작업하고 실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긍정적으로 사고하라는 요청을 듣는 시대인 오늘날 더더욱 그러하 며, 따라서 다시금, 언제나 다시금 열어놓을 수 있는 부정성의 공간들 내부로부터 작업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리는 오류를 통해 나타난다는 언명―슬라보예 지젝이 가장 숨막히는 이데올로기적 사고 체계들의 심장부로부터 만회하는 부정성의 교훈―을 예시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바 로 이 책이다. 5년 전, 지젝의 저술에 대한 건설적 “소개”와 “비판”을 제공한다고 자처한 정식화들 속에서 이 책이 취한 잘못된 첫 걸음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진리 자체는 아니더 라도, 진리의 정치에 더 근접한 무언가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진화하고 있는 작업물에 대한 제한되고 편향적인 오재현으로 취급해야만, 무엇이 실제로 의도된 것인지를 똑똑히 밝히겠다고 공허하게 약속하는 스냅사진으로 취급해야만, 무엇이 그 책에서 진정으 로 기만적인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어떤 테제를 향해 애써 나아간다. 지젝이 이 책이 다루는 세 개의 주요한 개념틀 의 어느 하나를 가지고서 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어떤 것을 불신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나면, 이 테제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 테제는 이렇다: 지젝은 실제로 라캉을 통해 헤겔을 읽으면서 라캉 독서를 통해 굴절된 헤겔 판본을 산출하고 있으며, 또한 그런 연후에 이러한 독서를 맑스주의에 의해 구조화된 것으로 그가 가정하는 일련의 문화 형태들에―즉 세계관으로서의 맑스주의가 기저에 놓인 당연하게 간주되는 좌표들을 제공하 고 있는 방식으로 이미 조직화되어 있는 어떤 현실에―적용한다. 그래서 이 테제의 저자인 이안 파커 자신은 이와 같은 비판을 산출하기 위해서 무엇을 가정하는가? 적어도 다음을 가 정한다. 즉 그의 표적에 의해 제시된 헤겔 그림이 부분적이라는 것을, 선택된 라캉의 측면 들이 오도적이라는 것을, 맑스주의가 부당하게 물화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지젝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실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설상가상으로 이 저자는 이론적 체계들의 본성과 상호연관에 관한 일련의 그럴 듯한 가정 들을 밀수입한다. 자신이 발견하여 밝혀주는 관념들에 명확한 기원들이 있다는 가정, 무엇 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파내야 하는 숨겨진 심층이 있다는 가정, 그리고 부 정확하다고 간주되는 것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어떤 정확한 독해를 산출할 필요가 있 다는 가정. 기원과 심층과 독해에 대한 이러한 가정들은 이 책을 조직하는 원리로서 우리를 끌어당긴 그 특정한 테제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또한 이 책에서 우리가 시종일 관 조심할 필요가 있는 잘못된 가정들이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오류들을 추적하면서 우리 는 그것들 각각의 단순한 대립물을 찾는 데 만족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이 책의 출간 이후로 그 오류들이 지젝의 그의 저술에 격자로서 부과하는 좌표들을 거부할 필요가 있다. 이를 기회로 삼아서 우리는, 이 책을 넘어서서, 앞으로는 지젝이 이 책의 출간 이후 해왔던 일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뒤로는 확정적 판결이라는 가면을 쓴 편파적 판단임 이 이제 더욱 분명해진 무엇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저술의 가정된 “기원들”과 관련하여, 우리는 저 모티브가 다섯 장 각각에서 상이한 형 태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다. 바로 그 처음부터, 어떤 이론적 체계의 외견상의 발전은 슬 로베니아에서,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국가에 도전했던 시민사회, 이견[불찬성] 운동, 평크 사 이의 모순적인 관계에서 무대화된다. 그것이 이론적 체계가 결코 아니라고 하는 한 마디는 지젝을 저주하는 것으로 가정된다. 문제의 정치적 체계들―“스탈린주의”―은 이미 망가져 있 었고 붕괴할 운명이었다는 근거에서 말이다. 이 책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은―이 장의 깔개 역할을 하는 “가능성의 조건”과 “불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일체의 이야기에도 불 구하고―지성적 기원들의 이야기를 맥락화하고 이러한 맥락을 배경으로 해서 그러한 이야기 를 늘어놓는 덫에 걸려드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파열시키고 이 민족적 맥락의 역사 에 대한 항구적인 사후적 재구성을 주장하는 대립적 실천들에 대한 힌트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러한 힌트들은 대부분의 경우 구 사회주의의 붕괴 및 구 사회주의에 대한 싹트는 향수에 관한 내러티브 속으로 잠기고 만다.
지젝이 “새로운 슬로베니아 예술”(NSK) 그룹의 과잉동일시 전략에 미친 세간에 알려진 영향력을 놓고, 그리고 지젝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그들의 실천으로부터 그 전략을 채택하 여 이론적으로 세공한 것을 놓고 벌어진 논쟁에 대한 짤막한 논의가 있다. 하지만 이데올 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계속 나오며 또한 예컨대 “라이바흐에서의 계몽”에 대한 다른 많은 공개적 텍스트들에도 나오는 이 그룹에 대한 지젝의 옹호에 대해서는 아무런 상세한 논의도 없다. (포스트-펑크 밴드 라이바흐는 또한, “시간 속의 NSK 국가(NSK State in Time)”라는 역설적인 반-민족주의를 비틀면서, 2006년 찬가(ahthem) 앨범 “Volk”와 더불 어 모든 선량한 애국자들의 가슴 속으로 들어갔다. 이 앨범의 비디오들은 이제 유투브를 통 해 세계 전역에서 확산되고 있다.) 2005년에 지젝은 MIT 출판사의 “단락(Short Circuits)” 시리즈로 알렉사이 몬로의 빈틈없는 설명(심문 기계: 라이바흐와 NSK)을 출간하면서 이 책에 대한 서문을 썼는데, 이 서문에서 그는 어떻게 NSK-국가 실천들에서 이데올로기의 비가시적인 외설적 선율이 물질화되고 제시될 수 있는지를 다시금 보여준다.
진정한 슬로베니아 예술과 이를 위한 정초작업과 여하한 독립적 민족이, 외부에서 빌려와 짜맞추어진 외적 자원들을 통해 결합되어지는 과정은 그의 저술에서 주요 동기였다. 그것은 “맥락”에 대한 이야기들로부터도 단절하며, 또한 과거에서 온 개념들이 현재의 저 똑같은 개념들의 재출현을 설명해주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기원적인 자기동일적 내용들의 논리로부 터도 단절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헤겔을 다룬 2장에서는, 지젝이 이용하는 실제적인 하이 데거적 틀을 추적하려는 노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러한 틀은 어떤 이유 때문에 기독교 가 개념적 자원으로서 특권화되게 되었을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다. 지젝의 작업에 대한 허위적인 틀짓기에서 저자가 이미 동원했던 기원의 이야기는 이른바 낭만적이고 회향 적인 추동을 간파하고 폭로하기 위해 지젝의 작업 속으로 투사된다.
지젝이 전술적으로 기교독와 관계하는 방식은―그런데 이를 통해서 초재적 자기-분열과 구원이라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물질적인 그것의 실천이 재절합될 수 있는 것인데―고의로 오 독되어진다. 일련의 텍스트들―2003년의 꼭두각시와 난쟁이(이 책의 부제인 “기독교의 도 착적 중핵”을 통해 우리는 이 책의 비판적 칼날에 대한 단서 정도는 찾았어야 한다), 2005년의 이웃: 정치적 신학의 세 가지 탐구와 신학과 정치적인 것: 새로운 논쟁에 실린 글 들, 2008년의 포스트모던 철학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훈은 더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논쟁을 싫어하고 신학자들이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면서 그러한 논쟁을 피해가는 오늘날의 역겨운 자유주의적 이견자들과는 달리, 이데올로기의 가장 강력한 형태들이야말로 그것들의 현실적 기능의 모순성, 자기동일성의 결여, 불가능성이 파열의 지점까지 이를 수 있도록 껴안아야 하는 것이다.
임상적 실천에서의 정신분석의 기원은 3장에서 다시금 지젝을 오도적으로 특성화하는 데 동원되며, 그가 아무런 특별한 개인적 충성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가 우리에게 이 이론 적 실천의 “기원적” 현장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여러 번 보여주었던, 어떤 기원적인 탐구 현장에 그가 충실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데 동원된다. 또한 유사-스탈린주의적 밀레적 인터 네셔널의 유령이 소환된다. 이 전통에 대한 지젝의 충성은 그가 자크-알랭 밀레의 개입을 치료적 기획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기획으로 보기 때문에 더더욱 의심스러운 것인 양 말이다. 그의 저술에 정신분석적 “행위”의 충격에 대한 과장이 있다는 비판에는 나의 책에서 수사학 적 힘이 부여되고 있다. 이는 바로 그와 같은 과장이 그것의 척도가 되어야 할 진정한 현장 은 임상적 현장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확언적인 원환고리에는―정신분석이 어떤 지식 체계로 전환되고, 그런 연후 에 이 지식 체계는 특정한 비분석가들을 평가하기 위해 이용되는바―명시적으로 비선형적이 고 반-발전적인 임상외적 정신분석과의 그 어떤 실재적 맞물림도 체계적으로 회피해야만 하는 일련의 가정들이 있다. 이러한 종류의 정신분석은 이미 지젝의 초기 저작을 통해서 가 공되었으며 나중에 2006년 라캉: 무언의 파트너들 같은 편집서들에서 세공되는 어떤 것 이다. 그리하여, 라캉적 정신분석의 정치적 역할과, 라캉주의 논쟁들에서의 정치적 개입들과 정신분석을 맑스주의 이론 및 실천과 절합하는 작업은 배반을 당한다.
노동자 국가들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로서의 맑스주의 역사에서 어떤 특정한 노선이, 지젝 을 특정한 유형의 (비)맑스주의자로 국부화하기 위해서, 끝도 없는 하위-트로츠키주의 분파 적인 세밀함으로 장황하게 이야기된다. 언표행위의 정치적 기능들―이 비판적 입문서의 저자 가 라캉에게서 배웠어야 했던 교훈―은 지젝이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놓고 했던 진술들 로 환원되며, 그런 연후에 이러한 진술들은 진짜 돈으로 취해져 현금으로 교환되어 지젝이 정확히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데 이용된다. 마치 그가 스탈린주의적인 국가주도의 관료제 가 짜 사회주의의 붕괴에서 자신의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인 양, 마치 때때로 그가 스스로를 스탈린주의자라고 선언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실제로 스탈린주의자라는 끔찍한 결론을 이 끌어내야 하는 것인 양 말이다.
2007년에 혁명적 텍스트들을 그가 주해와 더불어 재출간한 것은 그 증거로 불릴 수도 있 을 것이다. 하지만 시리즈물―마오의 실천과 모순에 대하여, 로베스피에르의 덕과 공포― 로서 그것들은 그의 정치적 저작의 실제적인 출발점과 궤적이 무엇인지를 간파하려는 그 어 떤 시도도 사실상 가로막는다. 기독교의 중핵에 있는 “도착”이라는 어구와 마찬가지로, 20 세기 맑스주의 전통의 현실적 국가통치에 붙어다니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어떤 다른 종류의 정치적 개입들의 반복을 도발하기 위한 것이다. 지젝에 대한 이 “입문서”는 그 것이 21세기의 정치경제적 조건들 속에서 새롭게 착수되어야 하는 반복이라는 것을 포착하 는 데 실패하며, 그 대신 우리의 저자는 반복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이 지젝에 의해 배치되 는 방식 사이의 비일관성을 찾아내는 일을 고집하고 있다. 예컨대, 2001년 독일의 에센에서 열린 한 심포지움에서 레닌의 만회―결코 복귀로 의도되지 않았던 반복―는 위태로운 모험이었고, 지젝이 필연적으로 그리고 영웅적으로 그 대가를 치른 행위였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비-이상화된 하지만 정치적으로-유효한 레닌이야말로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적어도 2007년 재장전된 레닌: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의 출간까지는 계속해서 나침반을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지젝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가로막는 오해의 장막들을 것 어내려는 이러한 시도의 목적은 결국에 가서는, 마지막 장에서 그렇게 보이는바, 이 책의 개별적 주체인 이 특정한 인물의 결점들을 붙잡는 것이다. 슬로베니아의 폭넓은 이론가 집 단―지젝이 계속해서 함께 집필을 해왔으며 최근에 지젝이 영어 출간의 출구를 제공해주고 있는 이론가들―에 대한 발빠른 참조에도 불구하고, 이 “비판적” 설명을 중심으로 마침내 기 원의 덫에 걸려들게 된다. 그 설명이 한 특정한 이름의 저자에대한 비판으로 환원될 때 말이다.
여기서, 상품형태 및 그것과 증상의 상동 관계를 다룬 영어로 출간된 지젝의 첫 책에서 시작해서 지젝 자신의 저술에 담긴 모든 교훈들은 흐려지며, 지성적 상품 체계의 이 단일 생산물―지젝 그 자신의 형상―은 추상화되고 물신화된다. 그리고 이 한 명의 동유럽 미개인 에 대한 “서구의 응시”의 역할은 이 책의 저자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용되며, 서 구 청중을 위한 히스테리적 “행동화”로 비난당하는 한 이론가에 대해서 자신만의 아무런 특 정한 가치판단도 내리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 이용된다. (지젝의 모든 의심스 러운 움직임에 대한 저자 자신의 강박적인 일람표작성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 다.) 하지만 술수는 이런 것이다. 즉 이 응시 자체는, 이 책의 그 장에서의 서술을 통해, 응 시의 대상 안으로 배가되며, 그리하여 우리는 끝에 가서는 우리가 우리의 탐구 대상에 대해 서, 이 주체에 대해서 이제 더 많은 것을 실로 이해한다는 잘못된 인상을 갖게 된다.
기원들에 대한 관심―이는 그 자체로 이 책의 의식되지 않은 그리고 종종 부인된 측면이 다―이 지젝의 저술 안에서―혹은 심지어, 때로 그렇게 보이는바, 그 사람 자체 안에서―깊은 곳에 대한 탐색으로 우리를 유인하는 데 봉사함에 따라서, 문제들은 축적된다. 예컨대, 어떻 게 특정한 사건들이 유고슬라비아의 붕괴 내러티브 안에서 짜맞추어지는지에 주목하자. 그 리고는 한 명의 핵심적 인물이 무대에 등장하며, 이론가로서, 그리고는 정치꾼으로서, 그리 고는 세르비아 폭격을 열광적으로 지지하는―상이한 청중들에게 자신의 분석의 상이한 판본 을 유포함으로써 술수를 감추는―유사-민족주의자로서 무대 중앙에 나타난다. 이 책에서 드 러나는 그와 같은 궤변―이 책의 희생양-주체를 악의적 행위자로 뒤바꾸는 것―이야말로 심 문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러티브의 개인화는 이론적 논쟁들의 집합물이 일련의 이름이 명기된 개인들로부터 아이 디어를 선택하거나 배제하기 위해 지젝이 했다고 가정되는 선택들로 환원될 수 있도록 배치 되게 된다. 그리고 나면, 철학사와 정치이론사에 등장하는 일련의 저자들이 그들에 대한 지 젝의 충실성이 평가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그들에 반하여 규정한 한 명의 개인 으로 두드러지게 될 수 있도록 논평되는 것은 전적으로 말이 되는 것이 된다. 이 내러티브 는 또한 지제과 동시에 이론가들 사이의 비교들을 말끔하게 둘러싸며 승인한다(알랭 바디우 와의 동맹과 논의들은 지난 5년간 더욱 중요해진 하나의 사례로서 두드러진다). 그리하여 개개인의 특정한 별도의 공헌들은 나머지에 대항하여 맞세워질 수가 있다.
이러한 종류의 개인화된 독서는 헤겔에 대한 논의를 전염시키고 있다. 그리고 철학적 선 택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줄 어떤 숨겨진 의도들을 알아내려는 시도는 심지어 유대 교와 기독교에서 나오는 아직도 문화적으로 유력한 신학적 전통들의 관계에 대한 지젝의 특성화의 배경 속에 반유대주의의 어떤 형태가 잠복해 있다는 함축을 낳기도 한다. 서구 사상 의 인류학적-역사적 국면들에 대한 유사-헤겔적인 조작, 지젝이 상당히 명시적으로 반대하 는 선형적인 역사 개념 등이 지젝이 기독교를 우선시한다는 비판에 도달하기 위해서 반복되 고 있다.
지젝의 진정한 의도에 대한 이러한 환원적 접근은, 그리고 아마도 더 나아가, 그 자신이 모종의 은밀한 반유대주의자라는 암시는 문제적인 것이며, 이제 2008년의 폭력에 비추어 볼 때 한층 더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폭력이라는 책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를 뒤 집어놓으며, 이제 유대교에 주어질 수 있을 우선권에 관하여 혼란스러운 주장을 한다. 이는 자신들이 지젝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혹은 지젝이 실 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풀어내는 것이 그의 작업이 유용한지 아닌지를 식별하는 데 도 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혼란스러운 것이다. 다시금, 폭력에 대한 “여섯 개의 곁눈질”로 이루어진 이 최근 텍스트의 틀은 우리가 여하한 종류의 이론적 선택 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그 무엇에 일치할 저자의 의도에 도달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우리가 유념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인권의 이데올로기적인 틀에 대항하여, 우리가 자선의 마음에서 후진적 전통에서 구해내 려고 하는 사람들이 해내야 한다고 요구하는 “선택들”이라는 서구적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틀에 대항하여, 지젝은 폭력에서 서구인들이 이슬람 원리주의로부터 히잡을 두른 불쌍한 여자를 구해내고자 할 때 그 여자를 자유롭게 해줄 것은 그 여자가 하는 “선택”이라고 하는 숨겨진 이데올로기적인 가정이 있다는 지적을 한다. 이 “선택”은, 그녀가 히잡을 두르기로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녀를 개인주의적인 인간의 “권리”라는 서구적 틀 속으로 기입 한다. 그리고 아마도 지젝에 대한 독해들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 한 독해들은 우리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를 우리 가운데 한 명으 로 취급할 수 있도록 그가 자신이 한 개념적 “선택들”에 대해서 분명히 하는 한 명의 개인 적 주체로서 우리에게 읽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심층의 모티브와 결합된 기원의 모티브는 지젝을 가치를 가진 상품으로 바꾸어놓으며, 그 가치는 그 상품 안에, 지젝 안에 내속하는 것으로 가정된다. 마치 추출하여 즐겨야 할 어떤 숨겨진 사용가치가 있는 양 말이다. 그와 같은 가정을 막으려는 지젝 자신의 시도들―가장 초기 저자들에 나오는 상품형태에 대한 연구들 속에서,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로 그리고 이제 점점 더 변증법적 유물론자로 위치지으면서 스스로 명시적으로 쓰고 서명하는 일련의 정치적 논평들 속에서 이론적으로 세공된 시도들―은 그를 조롱하기 위해 이용된다.
지난 5년간의 강렬한 이론적 활동은 관념들보다는 사상가에 초점을 맞추는 학계와 미디 어 기구에 대한 과잉동일시와 결합되어 있었다. 지젝은 종종 이에 대해서 논평을 했으며, 개인으로서의 그에 대한 초점맞춤이 그의 논변에 대한 관심을 돌려놓으려는 의도라고 지적 했다.
그러므로 (2005년의 현실의 제조: 슬라보예 지젝과 가상적인 것의 현실과 지젝! 같 은) 다큐멘터리들은 이중적 효과를 낳는다. 한 가지 계기에서 그는 다큐멘타리의 주체로 참 여하면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연후에 그 다음 계기에서는, 그가 공연 배후에서 영화제작자와 청중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장면들의 우스꽝스러운 병치는 NSK-국가 정치가들인 라이바흐에 의해 교묘하게 꾸며진 것만큼이나 놀라운 효과를 산출한 다. 결론적으로, 아마도, 이것이 관객들만큼이나 합리적인 어떤 지성에 의해 무대화된 것일 뿐이라고 관객들을 안심시켜줄 그 어떤 다른 숨겨진 심층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이 모든 모순적인 자료들을 휘저으면서 그는 실제로도 그런 것을 의도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비판적 입문서”의 이 저자가 공연 배후에 있는 요점에 이르고자 노력할 때, 그는 이점을 놓치고 있을 것이다.
저자가 어떻게 지젝을 읽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어떻게 읽지 말아야 하는지를 경고하는 약속된 과제에 열을 올릴 때 이 책에서 우리가 추적한 오류들 각각은 혼합된다. 그래서, 초 기 텍스트 중 하나인 삐딱하게 보기의 교훈은 주목되고 나서 신속하게 잊혀진다. 이론적 인 텍스트들의 내적으로 모순적인 성격을 다루는 대신에, 상이한 청중의 입장들의 기능으로 서 세공될 수 있는 상호 양립불가능한 해석들의 범위를 다루는 대신에, 지젝의 저술의 현실 적으로 존재하는 고정점을 결정하려는, 그것의 의미가 수정처럼 투명해지도록 그것을 해명 하려는 시도가 있다. 지젝의 실제로 의미하는 것을 분명하게 본다는 환상은 독자들이 어떻 게 그를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도덕적 평가로 연결된다. 이 책은 독자들을 보호하려고, 무엇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독자들에게 말해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제 독자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이 책의 노선 그 자체가 의문시되어야 한다.
지젝이 초기 텍스트들에서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는 내용은 2006년의 시차적 관점에서 취해져 일련의 이론적 물음들과 정치적 현상들을 통해 다시금 읽혀진다. 그리고 여기서 어 떤 새로운 개념적 자원들이 여하한 텍스트에 대한 하나의 정확한 독해를 찾는 것의 불가능 성에 대한 오랜 관심사와 절합된다. 여기서 지젝은 우리가 빠딱하게 보아야만 한다는, 우리 의 탐구 대상을 옆쪽에서 일별하면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층 더 명시적으로 표명한 다. 레비-스트로스에게서 가져와 종종 인용되는 사례―위네바고 마을의 구조에 대한 그 마 을의 상이한 부족들이 제공하는 분열된 설명―는 “시차” 개념과 더불어 제시된다. 여기서, 일본의 맑스주의자 가라타니(그의 칸트 독해는 정치와 경제의 이율배반적 관계를 포착하기 위해 “시차”라는 개념적 장치를 이용한다)의 저작에 대한 검토는 사물들이 결코 단지 있는 그대로 읽혀질 수 없다는 지젝의 주장을 재가공할 기회이다. 한 현상에 대한 우리의 독해는 언제나 이미 분열된 적대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입장에 의해 매개된다.
이 독해의 문제―하나의 “정확한” 독해에 대한한 논변―는 지젝의 2006년 How to Read 라캉 같은 텍스트나 이제는 고전이 된 영화에 대한 책들의 새 판본에서 반복해서 다루어져 왔다. 영화에 대한 작업은 또한 2006년 다큐멘터리 The Pervert’s Guide to Cinema로도 나온 바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이미 텔레비전으로 세계 전역에 방영되었고 이제 DVD로 구 해볼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시차”라는 개념이, 현실에 대한 적대적인 경쟁하는 파악들이라는 개념이 지 젝에 의해 정치적 영역에서 적용되며, 또한 기독교―도덕적으로 규범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 현상임을 기억하자―에 대한 그의 논의를 미국에서 점차 유력해진 이스라엘 에 대한 기독교적인 원리주의적 환상들과 연계시키는 개입들에서 적용된다. 이러한 정치적 개입들 속에서 지젝은 우리가 동시대적 사건들을 [그것을 통해서]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좌 표들을 교란하며, 우리에게 위안을 주기를 거부하며, 신앙고백적 갈등에 대한 손쉬운 상식 적 해답이 있다는 보증을 주지 않는다.
학술적이고 문화적인 이스라엘 보이콧을 위한 팔레스타인 운동이 지젝에게 2006년 7월 예루살렘 국제 양화 페스티벌에 참여하지 말 것을 요구했을 때, 지젝은 그의 표현대로 “유 대인 보이콧”이라는 낡은 반유대주의 노선을 따르지 않겠다는 그의 거부에서 확고부동했다. 그 대신 그는 페스티발 그 자체의 게스트가 아닌 감독 우디 알로니의 게스트로 참석할 것이 라고 선언함으로써 이에 응답했다. 그래서 그는 알로니의 2002년 영화 <로컬 엔젤: 신학적 정치적 단편들>에 대한 이후의 논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리고 DVD에는 이 영화에 대한 지젝, 바디우와의 대담이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와 페스티발에서의 상영을 둘러싼 대한 논 쟁에서 지젝의 실천적인 정치적 제안은 예루살렘을 포기해야 한다는, 아랍인들과 유대인들 이(그리고 또한 그 문제라면, 기독교인들도) 예루살렘을 포기해야 한다는, 그리고 예루살렘 을 비-참회의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젝에 대한 이 책에서, 애매하고 쾌활하고 사고를 자극하는 개입들은 너무나도 자주 도 덕적 평가들로, 어떻게 그가 읽혀야 하는가에 대한 지시들로 환원된다. 지젝의 저술에 대해 독자들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된 해석과 관련해 독자들에게 경고를 하려는 점증하는 필사적 인 시도는 마지막 장에서 절정에 달한다. 거기에는 텍스트의―실로, 겉보기에 내적으로 일관 된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로서 기만적으로 취급된, 지젝이 쓴 모든 상이한 텍스트들의―핵심 으로서 제시되는 어떤 것에 대한 기술이 있는데, 이는 지젝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으로서 기능한다. 바로 이러한 것을 배경으로 지젝은 물신화되며, 여하한 다른 상품처 럼 취급된다. 아무런 내재적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지만 무언가 비밀을 내포하는 양 우리가 다른 상품들과 계속해서 교환하는 상품으로서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정확한 독해를 제공하는 것의 불가능성이 가장 명시적으로, 생산적으로, 전 복적으로 전개된 것은 지젝에 대한 겉보기에 가장 물신화된 재현들 속에서였다. 2007년 온 라인 공개 잡지 지젝 연구 국제 저널의 창간은 그 자신의 게임에서 여러분의 사람이 참여 하게 한다. 상세한 학술적인 개념 해석들과 그의 작업의 적용들이 Ž-상표 의류와 도자기 판매와 함께 있다. 그는 그 웹사이트를 결코 보지 않았다고, 그것이 그에게는 다소 외상적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실로 이데올로기적 기입의 표면들과 그것들의 비인간적 향유의 환상적 하면에 관해 그가 우리에게 말하려고 노력해온 바로 그것을 응축하고 실연한다. 그 를 셀리브리티 상품 교환 시스템 속으로 용해시킴으로써만 그는 자신의 모습대로 그리고 그 가 아닌 모습으로 동시에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그의 저술에 바쳐진 저널은 그것의 대상의 모순성과 복사服事들의 익살맞은 행동들을 한껏 즐긴다. 이는 그가 무엇을 말하며, 그가 왜 그것을 말하며, 그가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한 판옵티콘적인 “비판적 입문”의 정반 대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이론적인 기원들, 심층, 정확한 독해를 포착하고 규정 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며, 또한 지젝을 이해하는 데 더 가까이 이르기 위해서라면 실패해야 만 하는 것이다.
이안 파커, 2008년 3월 이성민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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