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우쉽에서 한참동안 나온 젠트리피케이션 화두. 그때 떠들었던 걸 두서없이 복기한다. 예술이 뭔가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데 합의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변화는 기존의 것이 더이상 그것이 아니게끔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는 기존의 틀에서 항상 폭력적이다. 예술적 폭력이 가장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으로 드러난 것이 아방가르드라고 한다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물론 미래주의가 걸었던 길처럼, 항상 긍정적이지는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뒤샹 등이 한편으로 증명하듯이, 아방가르드 전체가 전체주의적 이념에 의해 추동됐냐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뒤샹조차 기존 미술계에선 꽤 오랫동안 불편한 자로 생각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럼에도 생각하는 것은 예술은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변화시키는 자는 항상 기존 질서와 그에 속해 있는 자들에게 불편함을 준다. 심지어 예술가가 들어와서 (예컨대) 마을 경제 수준이 높아져 잘 살게 됐더라 하더라도 기존의 마을을 좋아하던 사람에게는 폭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혹은 시대에 맞게 변화하고 있는 마을과 그런 변화(그것이 자본주의적 기업화든 뭐든)에 동의를 표하는 사람들에게 전통의 고수, 역사의 복원의 제스쳐는 어쩌면 척화비를 세우는 흥선대원군 못지 않은 폭력적인 역변화/(폭력으)로 보일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술가라는 행위자가 어떤 장소에서 활동을 했을 때 뭔가가 변화한다는 건 당연하다. 여기엔 분명히 어떠한 폭력성이 동반된다. 어찌보면 예술가는 불화를 일으키는 행위자, 폭력 인자에 가깝다고 말해볼 수도 있다. 기존 지역의 관습적 커뮤니티를 고수, 보전하려는 입장에서 예술가는 그런 것이다.
예술가 주도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에서 예술가는 이중의 위치를 점한다. 젠트리 아닌 젠트리파이어로서, 오로지 변화를 시키는 자의 위치에만 기입되어 있다. 그래서 장소에서 최초의 예술가는 젠트리에 가까운 젠트리파이어로 지역에선 굉장히 불편한 존재다. 폭력적인 존재다. 조금 관심있는 거주민은 지나다닐 때마다 예술가 작업실을 의구심의 눈초리로 볼 것이며, 조금 더 관심있는 거주민은 꼬치꼬치 캐묻고 제제를 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가가 장소를 점점 변화시키고 그것이 관습화 된다면, 그러니까 어느정도 안정화 단계에 오면 예술가는 거주민이 된다. 더 이상 젠트리파이어가 아닌 것이다. 바로 그때 진짜 젠트리가 등장한다.
이런 방식의 변화는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의 이해 없이 예술 작업 활동 지속과 장소 장기거주가 가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기본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조건이 흔들리는 것이다. 여기선 사회운동을 하든 지자체에 지원금을 요구하든 인프라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운동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예술과 젠트리피케이션의 관계를 함께 고찰한다기보단 젠트리피케이션을 지자체 등에게 해결하도록 맡기고/요구하고 그게 해결됐을 때 예술을 마음 편하게 해보겠다는 이분법적 사고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판적인 예술가는 있지만 비판적인 예술은 없다. 안 좋게 말하자면 미적 자폐주의.
다른 하나의 주장은 이런 것일 수 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예술과 예술가는 젠트리파이어와 같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때 젠트리파이어는 단순히 지대를 올려주는 행위자라기 보다 '변화'와 관련된 다양한 레이어와 관련되는 행위자라고 봐야한다. 예술과 사회를 연결지어 생각하고 싶다면 나는 이런 방식이 좀 더 이득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의 변화 능력을 아방가르드적 실천으로 다시 생각하기 위함이다. 그랬을 때 아방가르드 예술이 폭력을 행사해야 하는 대상은 분명하다. 참을 수 없이 자본화된 삶 과정 그 자체다. (나중에 다시 정리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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