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트의 [토성의 고리] 5장에는 로저 케이스먼트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제국의 시대에 백인이면서도 콩고의 흑인들을 연민하고 벨기에의 범죄를 고발하려고 애썼던 그 사람 말이다. 그 장의 말미에 제발트는 케이스먼트가 그토록 타자를 연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아일랜드인이자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라고 썼다. 나는 그 대목을 읽으면서 또 다른 아일랜드인이자 동성애자, 평생 타자를 연민하고 사랑했던 어떤 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오늘 세상을 떠난 베네딕트 앤더슨이다.
그는 1950~60년대 인도네시아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며 민족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인도네시아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언젠가 읽었던 글에는 동생인 페리 앤더슨이 형에게 인도네시아의 특수성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좀 더 포괄적인 작업을 해보라고 충고한 일화가 소개된다. 그런데 벤 앤더슨은 “나의" 인도네시아는 너무나 특별해서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우리 세대의 인도네시아 연구자들이 그처럼 인도네시아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결론내린 적이 있다. 그가 인도네시아가 제3세계의 맹주로 새로운 민족국가를 세우던 그 찬란하던 시기를 목격했다면 우리는 그 모두가 무너지고 남은 기이하게 아름답지만 뒤틀린 잔해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괴물이 되어버린 인도네시아마저 차마 사랑했다면 우리는 그 기이함을 기꺼이 끌어안을 수 없었다(사랑이란 언제나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가 아니었던가).
어쨌거나 동남아시아를 특히 인도네시아를 공부한다는 것은 어쩌면 베네딕트 앤더슨의 자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주제에 관해 공부하더라도 그를 피해갈 수 없다. 내가 인도네시아 역사를 배운 선생은 그의 제자였고, 지금 번역하고 있는 에카 쿠르니아완의 장편소설 두 편을 처음 알게 된 것도 그의 글을 통해서였다. 그 두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고 한국어로도 번역될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덕일 것이다. 에카의 열렬한 팬이었던 벤 앤더슨이 소설의 서문을 써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상상의 공동체]를 쓴 저자로만 알려졌지만 그의 관심사는 그보다 훨씬 넓고도 깊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작업을 정치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쓰기도 했고 동남아시아의 실험영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언어의 힘에 주목했던 그는 호세 리살의 [나를 만지지 마라]를 다시 읽는 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 글들은 비평과 학술논문 사이를 오가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종류의 독특한 글들이 되었다. 종종 그가 정치학자가 되기에는 너무 문학적이고 소설가가 되기에는 너무 과학적(!)이라서 그런 글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게 아닐까라고 생각해보았다.
실제로 그를 본 건 딱 한번뿐이다. 몇년 전 방콕의 한 영화제 상영장. 그는 ‘마우이’ 티셔츠를 걸치고 나타났는데 그냥 보기에는 방콕의 바에 차고 넘치는 여느 백인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 할아버지를 ‘벤’이라고 부르는 걸 보고서야 그가 바로 그인 것을 알아차렸다. 다음 날은 강연이 있었는데 그는 바띡 셔츠를 걸치고 나타났다(확실히 이번엔 좀 달라보였다.) 당연히 영어로 진행될 줄 알고 간 것이었는데, 그는 대뜸 태국어로 말문을 열었다. 그냥 인사말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강연 전체가 태국어였다. 그래서 내용은 좀체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그냥 감탄만 하며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지역학 연구자의 모범 같은 게 있다면 바로 그가 바로 그 화신이 아닐까.
그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떠오른 수많은 생각들을 조금이라도 정리해봐야겠다고 메모장을 열었는데 쓰면 쓸수록 더 많은 기억들이 파편처럼 떠올라서 어떻게 마무리해야할지 모르겠다. 동남아시아를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모범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던 빡 벤, 편히 쉬시길. 아 그리고 새로 번역 중이라는 Imagined Communites가 빨리 나와서 그 책에 대해 다시 논의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하는 바램.
로저 케이스먼트는 반역죄로 사형당하고 말았지만, 벤 앤더슨의 죽음은 축복에 가까운 죽음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추억이 깃든 자바의 장소들을 돌아보다가 잠든 사이에 찾아온 죽음. 화장된 재는 자바해에 뿌려진다고 한다. 평생 인도네시아를 사랑했던 이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장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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