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4일 화요일

예술 / 노동

크티틱칼의 홍태림씨 글을 읽다가.

노동은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가? 여기엔 노동과 예술을 분리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마치 '돈이 있어야 연애'를 하지 같은 말처럼 들린다. 실제로 요즘 돈이 없어서 연애를 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같은 논리로 노동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예술을 하지 않겠다는 논조로 들리기도 한다.

노동 조건이 만약 해소가 된다면 예술과 예술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여가활동이 되는 건가? 아니, 프롤레타리아트의 미감에 부합하는 예술만이 권장될 것인가? 아니면 노동 문제가 해결된 예술가는 "자유"롭게 어떤 예술, 이를테면 초 엘리티시즘 미술을 해도 된다는 걸까? 그렇다면 여전히 프롤레타리아트는 예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인가? 그건 노동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에 그것대로 괜찮은 건가? 문화적 계급의 격차는 불평등과 아무런 관련성이 없을까? 문화는 자본이 아닌가? 등등 이런 질문은 노동에서 해방된 예술가에게도 고스란히 남는다. 현재까지 노동에서 해방된 예술가, 예컨대 교수 작가의 행보를 보면 대체로 졸라 비관적이지만, 그렇다면 이런 글을 쓰는 자는 그런 위치의 예술가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교수 신분의 작가는 당연히 더 좋은 작업을 해야 하는 데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는 걸까? 그런데 그런 것이 지금 우리가 하려는 예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소한 구축주의자들로부터 배우자. 그들은 현재 자신의 예술을 노동화하려고 했다. 역사화하려고 했다. 변화하고 생성하는 장으로 만들려고 했다. 예술이 빠진, 예술과 노동의 개념 논쟁, 그러니까 (예술) 제도는 이러이러해야 한다 같은 제도비판은 너무너무 지겹다. 호두는 안에서 썩고 있는데, 호두 껍데기를 어떻게 까는 것이 올바른지 고민하고 있는 바보 천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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