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5일 수요일

백남준은 왜

Nam June Paik, Prepared Televisions, 1963

당대의 (뉴)미디어아트라고 불려지는 (하지만 대부분의 영상) 작업의 조건을 말해야 한다면 자동으로 블랙박스가 떠오른다. 과거에 회화가 그랬듯이, 이런 작업은 스크린의 환영성이 이미 부동의 전제가 된 상태에서 창작/전시된다. 블랙박스가 없으면 빔프로젝터를 사용해 대형 화면을 벽에 띄우는 일 자체를 하지 못한다. 반대로 대형 빛 화면을 띄우기 위해 블랙박스라는 (비자연적인) 임의의 공간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물론 또 하나의 화이트큐브에 다름 아니다. 영화를 예를 들면 좋을 텐데, 영화 관람객은 현실을 잊기 위해, 현실을 잊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영화관 블랙박스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위험성은 브레히트가 이미 경고한 적이 있다.

아무튼 이런 조류 속에서 비디오 조각/설치 같은 것을 보면, 굉장히 고리타분하게 느껴진다. 고리타분하다는 것은 어쩌면 이해불가능한 느낌과 맞닿아 있는데, 생각해보면 이건 영화적 기술, 그러니까 몰입의 기술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비디오 조각/설치에서 우리는 몰입을 할 수 없거나, 혹은 그것은 몰입을 방해한다. 비디오 조각/설치는 영상도 전통 조각도 아니다. 블랙박스를 필요로 하지 않아야만 하는 영상이기에 조각일 필요가 있었고, 그렇다고 전통 조각이지 않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영상이어야만 했다. 이런 중첩이 주는 다의성은 오늘날 중요해보인다.

백남준이 비디오 설치를 처음 시도한 1960년대는 매스미디어가 팽창하던 시기다. 특히 당시 라디오를 대체하고 있었던 TV 같은 미디어는 대부분의 가정을 블랙박스화 했다. 이 원시적 블랙박스는 곧 사회로 확장됐고, 보드리야르 같은 사람이 비슷하게 언급했듯이, 세계는 전지구적인 극장이 됐다. 이젠 시뮬라크라의 사회라는 명제는 너무나 당연해서 말하면 유치다고 핀잔을 들을 정도가 됐다. 통째로 들어내서 혁명을 하지 않는 이상 딱히 해결방도가 없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디오 설치/조각은 어떨까. 이건 실제와 시뮬라크라의 중첩지대라고 할 수 있다. 그 경계 위에서 작업은 실제와도 시뮬라크라와도 거리를 두면서 계속 물음표를 던지고 있었다. 시뮬라크라를 완전부정하기 보단, 그것에 의해 고정된 기호로 고착되기 전에 모습-이미지를 바꾸면서 현존을 통한 교란의 전략을 세운다. 비디오 설치/조각은 이런 전략의 원시적 형태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여기에 눈길을 던지는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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