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8일 월요일

[스크랩] 전 지구에 공명하는 고래의 노래 / 김남수

6500만 년 전, 혜성 충돌과 함께 중생대 공룡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신생대 포유류의 시대가 열린다. 이러한 종의 교체는지구사의 중요한 모멘텀이긴 하지만, 여기서 더욱 더 극적인 것은 고래의 출현이었다. 본래 포유류란 바다에서 시작된생명이 시간의 화살이 가는 방향을 따라 육지로 상륙하면서 탄생한, 진화의 결정체이다. 그런데 고래는 육지에서 다시바다로 되돌아가는 역행을 택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퇴화가 아닌가 싶지만, 학계의 일치된 견해는 진화가선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시간 역행’의 결과로 고래는 바다로 돌아가 깊이 잠수하는 동물이 되었다.

“나는 잠수하는 모든 이들을 사랑한다. 수면 가까이에서는 어떤 물고기든 헤엄칠 수 있지만 5마일 이상을 내려갈 수있는 것은 큰 고래뿐이다. 태초부터 사유의 잠수자들은 충혈된 눈을 하고 수면으로 돌아왔다.” — 허먼 멜빌, ‹서신› 중에서

고래는 무려 8킬로미터 심해로 잠수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고래는 그런 상태에서 노래를 한다. 고래가 부르는 20hz의 노래는 이론상 전 지구의 모든 바다에 있는 고래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한다. 가령, 남극에서 부른 노래가 알류산열도나 그린란드의 고래에게도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고래의 노래는 6개월 후에 다시 재회했을 때, 그대로 재현될수 있을 만큼 지능체의 유목민적 예술 형태를 띠고 있다. 이렇게 고래의 노래, 혹은 심해의 사유는 6500만 년 전의 ‘시간역행’의 산물로서 인류가 지구촌을 꿈꾸기 훨씬 이전에 이미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성했던 것이다. 역사의 시간을 지구가탄생한 시점부터 확장한다면,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고래일지도 모른다.



근대의 리콜

세상이 바뀌었다. 세상이 평평해졌다. 평평해졌다는 것은 유럽과 아시아의 저울추가 평행선을 이룬다는 것이다.1750년대 이후 줄곧 ‘근대’라는 개념은 아시아의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서구와 비서구(혹은 유럽과 나머지 세계)라는구도는 그 트라우마의 표현으로서 아무리 비서구가 열심히 ‘근대화’를 진행해도 서구가 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의 뉘앙스가깃들어 있다. 기계를 깎는 기계로서 공작기계의 발명, 모든 지식의 결집으로서 백과전서 35권 출간, 마네의 모더니즘 회화,밤의 정복으로서 전구의 발명, 증기선과 대포의 결합으로 진전된 군사력 등등으로 표상되는 서구 근대에, 비서구는점근선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비서구에게 근대의 위력은 그렇게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그런데 ‘근대’는 과대평가된 개념이라는 사실이 폭로되고 있다. 급기야 서구 내부에서도 ‘근대’의 특권화가 잘못된 것임을증명하는 사상가들이 출현하기에 이른다. 가령, 21세기의 가장 핫한 사상가 브뤼노 라투르는 ‘정화 과정’으로서 근대의기획을 설명하는 방식이 은밀하게도 ‘번역 과정’이라는 혼합적 하이브리드적 실천을 통해 수행되었음을 증명하고,실제로는 “근대는 없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의 논지는 ‘근대’라는 주술이 사실은 서구와 비서구로 구분한 권력관계로부터 움튼 것이었음을 방증한다.

현재의 지적 동향은 분명히 이렇게 의미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초의 세계는 여전히 ‘근대’의재구축 작업으로 가득하다. 최근의 ‹애니미즘› 전시나 집단무의식의 사용 역시 ‘근대’라는 기원 신화를 새롭게 바라보는정도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여전히 세계가 유럽중심주의의 자장 안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문명과 야만, 근대와전근대, 이성과 비이성, 역사와 역사 부재라는 이분법의 스키마로 가득한 세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예술극장은 이렇게 ‘근대라는 환영’이 자욱한 철로 위를 지나가고 있다. 그 위에서 아시아는 물론 유럽의 다양한문화들이 반대편에서 함께 달리고 있음을 바라본다. 수많은 문화적 다양성이 존재하는 세계의 여러 마음들이 하나로모아지려면 ‘서로가 함께 달리고 있음’을 깨닫는 상대론적 관점이 필요하다. 아울러 권력과 지배로 점철된 근대의패러다임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아시아예술극장의 위상은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움튼 것이다.



아시아예술극장의 위상

아시아예술극장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주축 기관으로서 아시아의 동시대 공연예술을 창제작하고 유통시키는 역할을맡는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 문화의 특이성을 통해 담론과 이론을 생산하여 아시아가 세계 공연예술의 새로운 흐름을형성해나가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아시아예술극장은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서구와 비서구의 도식 대신에 유럽과 아시아가 대칭적 관점에서마주보는 형상을 새롭게 수용하여 ‘유라시아’라는 개념의 재발명을 꾀할 것이다. 단지 아시아만의 내부적 나르시시즘에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유럽과의 긴밀한 교섭과 반영상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려면 이러한 개념이 긴요하다는판단에서이다. 우리는 아시아와 유럽의 공연예술계와 지성이 이러한 ‘유라시아’라는 구도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함께’만들어나가는 세계를 지향한다.

아시아예술극장은 공연예술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예술계가 즐거운 소문으로 들썩거리는, 그래서 소문의 붐이 돌림병처럼전파되고 피드백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아연한 활기, 예측불허의 흥분감과 현장의 들끓는 정동(情動), 그러나 그럼에도불구하고 한편에는 예술 실행의 과정과 개념을 십분 보고하고 생산할 수 있는 냉철한 지성의 작용… 지금까지 유럽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이 모든 과정이 아시아라는 범주, 나아가 유라시아라는 범주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것이 아시아예술극장의 역할인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에서 진행되어온 대부분의 국가 주도의 예술 프로젝트들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측면이 강했던 반면, 이사업은 그 지향점을 국제적인 측면에 맞추고 있다. 한국과 아시아, 아시아와 아시아, 그리고 아시아와 유럽이라는 여러층위를 복합적으로 다루는 예술 실행에 중점을 두고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사업은 국가가 주도하는 것이긴하지만, 근대적 관점으로서의 국가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성격도 아울러 갖고 있다. 아시아예술극장이 국가의수도가 아닌, 광주라고 하는 지방도시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과 맞닿아 있다. 국가적 개념으로서 다른아시아와 수직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영토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닌, 관계망을 중요시하는 국가 주도의 예술 프로젝트는 이제까지는 없었다.따라서 그 비전을 설계하고 동시대의 모든 공연예술계와 지성에 전파하는 일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했다.



지구사로의 ‘관점 이동’: 유라시아의 재발명

아시아예술극장은 전혀 낯선 영역으로 가기 위한 ‘관점의 이동’이 필요한데. 우리가 선택한 것은 지구사라는 새로운역사적 패러다임이다. 지구사라는 관점은 글로벌화 이후의 평평한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서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관계를대칭적인 구도로 바라보는 대안적인 역사관을 열어준다.

20세기의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그리고 21세기의 9.11 사태 등은 직접적으로 역사를 보는 관점을새로운 흐름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헤게모니 국가로서 미국의 하향곡선은 눈에 띄게 진전되기 시작했고, 블록화된유럽연합의 새로운 부활은 중국이나 일본 같은 일국의 국가에 대응하는 성격이 강했다. 무엇보다 개발도상국에서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시작한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약진은 기존의 완강했던 서구 중심의 세계 질서를 요동치게 했다.1980년대 이후, 세계의 하부구조는 완연히 변동기로 접어들었다. 이렇게 되자, 역사를 보는 눈 역시 이전과는 다르게새로운 구도로 재편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시대적 요청이 일어났다.

지구사는 바로 이러한 세계사적 신질서를 반영하고, 기존의 탈식민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다루는 길을 제시하면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유럽 중심의 지배적 문화라는 소위 ‘근대’를 해체하고자 했던탈식민주의는 20세기 중후반부터 각광을 받아오고 있으나, 결국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근대’를 지나치게결정론적으로 전제하고, 그 우월성의 식민화 전략에 대해서 탈주하려는 태도가 항상 ‘근대’의 재환기로 귀결되기 때문에그러하다. 결국 ‘탈근대’라는 도돌이표를 찍으면서 공회전을 거듭하는 시지푸스의 운명인 것이다.

지구사는 “시간의 규모에 걸맞게 역사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시도”(데이비드 크리스천)로서 이러한 문제를 돌파하고자한다. “거대하지만 일관성 있는 패턴들에 초점을 맞춰서 역사에 접근”(브루스 매즐리시)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으로역사를 다시 바라보게 되자, 지금까지의 세계사는 ‘서구 근대’라는 특정 시기에 초점을 맞춰 기술된 ‘지역사’에 불과했다고성찰하기 시작했다. 또한 서구 근대의 산물인 ‘과학적 합리성’에 의해 배제되었던 시간과 공간들도 역사 연구의 영역으로새롭게 들어오게 되었다.

역사 기술의 범위는 시공간적으로 ‘지구적 층위’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럼으로써 자연과 인간이 상호 교류한 흔적들이역사의 표층으로 부상했으며, 민족국가의 지리적 영역에 의해 인위적으로 갇혀 있었던 관점 역시 개방되었다.인간중심주의와 근대 사회의 총체적 위기에 대한 성찰적 인식으로서 생태사(ecological history)가 출현했으며,민족국가를 넘어서 상호 연결성을 갖는 포괄적이고도 상호 대칭적인 지역 단위(예를 들어, 아프로-유라시아)로서 역사를사고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구사는 교류와 수렴(convergence) 그리고 분기(divergence)의 메커니즘에 그 방법론을세우는데, 이는 문명 교류의 쌍방향적인 역동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지구사가들은 최근 몇 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왜곡을 넘어서서, 제국들과 헤게모니들이 남긴 피상적 구성물들을꿰뚫어보면서, 인류 조건들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 과거에 인류의 운명을 만들었고, 미래 인류의 운명을좌우할 동력에 대한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 ‹글로벌히스토리란 무엇인가› 중에서

아시아예술극장은 지구사의 패러다임에 의한 ‘관점 이동’의 실행으로서 ‘유라시아’라는 개념을 설정했다. 이는 유럽과아시아의 대칭적 관계를 표상한다. 우리는 그 지리적 개념 위에서 유럽과 아시아가 ‘자기성과 대타성의키아즘(chiasme)적 교잡’을 일으키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꿈꾼다.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키아즘은 몸과 몸이 만나 상호 체감하는 어떤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느낀다’는 것은 보통‘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성이라는 부분과 대타성―내가 아닌 상대하고 마주봤을 때의 반향—이라는 부분이접촉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일 때, 타자에 대한 감각은 엑스터시에 가깝다. 바깥에 있는 것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일찍이 고대의 유라시아 기마 유목민은 인간과 말을 일체화시킬 수 있는 ‘등자’를 발명했다.(이것은 앞서 기술한 바대로,지구사가 주목하는 교류와 수렴 그리고 분기의 메커니즘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말 잔등 위에 올라탄 기마 유목민은그 최첨단의 테크놀로지에 의해 말과 인간 그 어느 종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제3의 종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13세기에 칭기즈칸을 만나 인류 최초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말에서 내리지 않고 끊임없이 속도감을 체감하면서 달려가는 몽골의 기마 궁수는 움직이는 표적을 향해 활을 당긴다.달리고 있는 말 위에서의 관점과 움직이는 표적의 관점이 순간적으로 교차하면서 만들어지는 제3의 관점, 즉 그 관점들의키아즘으로 발생하는 간극에서 행위가 이뤄지는 것이다. 기마 궁수는 두 개의 속도를 가늠하여 시각적인 것을 넘어선미래의 공간으로 화살을 보내는데, 이것이 칭기즈칸의 몽골세계제국을 가능케 한 장면이다. 한때 서구에겐 공포와 경악의대상이었던 칭기즈칸이 공교롭게도 유라시아라는 공간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를 포괄하는 연결망을탄생시킨 것이다.

아시아예술극장이 설정한 ‘유라시아’라는 개념은 그러한 모티프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순히 아시아 지역에만 국한하고있는 것이 아닌, 서구 유럽까지 포괄하는 것으로서 유라시아인 것이다. 오늘날의 공연예술은 이 대지 위애서 각각의문화적 특이성이 상호 존중받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문화 간의 연결을 이뤄내는 중요한 매개로서작용하고 있다. 이제 아시아예술극장은 21세기의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공연예술로써 유라시아를 횡단하여 아시아와아시아가, 아시아와 유럽이 공존하고 연대하는 장을 열고자 한다. 이는 하늘 아래 다문화, 다종교, 다인종이 어우러져,헝가리 평원에서부터 중앙유라시아를 거쳐 인도양과 동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에 평화가 깃들었던 시대의 재요청이기도하다. 그리고 그것은 아시아인으로서 우리 내부에 잠재된 무엇, 즉 아시아 정신의 요체이기도 하다.

진정한 생각(혹은 도래할 예술)은 ‘시간의 잠수’를 통한 지구사적인 시도를 할 때 출현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주어진전제로부터 이탈하고자 하는 행위가 선행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시간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지 못한다는 믿음이우리에겐 있다. 20세기의 많은 철학자들이 신세를 졌던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한 구절처럼 지금은 “시간의 지도리가어긋나 있는(The time is out of joint)” 상태이다.

한 무리의 포유류가 바다로 뛰어들어 다시 수생동물인 고래로 역행하는 것처럼, 이 벗겨져버린 시간의 지도리가 과거와미래를 개방하기 시작했음을 우리는 감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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