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세련된 신좌파가 보고 싶어하지 않는 어떤 이미지. 이것은 운동적인 경향을 담고 있는, 어딘가 낡고 무식해보이며, 단도직입적이고, 무례한, 그래서 감각적인.
둘. 우익이 보고 싶어하지 않는 이미지.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본 모습.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것이 출현하면 단박에 자신의 거울상이 되어버리는 민중(미술)적인 무엇, 그래서 쉽게 독해 가능한, 감각에 호소하는.
"안 본 눈 삽니다"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보기 싫거나 끔직하거나 혐오스러운 걸 보면 눈이 멀 것 같다는 말도 한다. 상상이나 가능한가? 스펙터클이란 말이 거의 아무대서나 쓰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어떤 이미지가 이렇게까지 위협적이라니? 정말로 이미지에 우리는 무뎌진 것일까? 민감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홍수라는 말은 오히려 어떤 불길한 이미지의 철저한 억압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언가를 본 것 만으로(사실은 보여진 것에 가깝지만) 부정탄다고 믿어버리는 미신은 일찍이 S. 프로이트가 지적한 언캐니한 감정으로, 그 기원은 고대 사회의 애니미즘까지 올라간다.
한국사람은 아직까지 추상적인 것을 독해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 추상적인 단어가, 특히 근대 이후에 태동한 사고방식을 규정하는 그런 단어가 한국어에 많이 없기 때문일까?
한국미술계에서 좋은 작품이란 어떻게 보면 추상화의 성공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꼬아져있어야 한다. 반대로 해석이 가능해야지만 좋은 작품이라는. 그런데 이때 좋은 작품이라고 만족감을 느끼는 주체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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