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8일 목요일

quotes from David Joselit, "The Self Readymade," in Infinite Regress: Marcel Duchamp 1910-1941

"만약 뒤샹의 수직으로 세워진 체스판이 "지워질 수 있는 아름다움"의 회화적 이상을 실현한다면, 트라비쉐는 두 번째 미학적 질서를 개진하는데, 여기서 게임의 움직임manoeuvre은 일상 공간으로 쏟아져 나온다. ... 이것이 스튜디오 공간 안에서 6년 뒤에 트리비쉐가 명백히 성취한 것이다: 트랩을 가장해서 일상의 영역으로 게임을 마이그레이션한 것. 체스는 그러므로 두 가지 방향 속에서 예술과 만난다--페인팅 면의 식민화를 통해, 그리고 레디메이드 영역으로 밖으로 프로젝션 한 것에 의해. 체스는 두 가지 공간을 점유할뿐만 아니라 경첩처럼 그것들을 통합한다."(160)

"체스에 관한 뒤샹의 강조점, Fresh Widow에서 똑같이 등장했던 그것은 뒤샹의 기계화 담론의 두 번째 변형을 구축한다--분리하는 기계의 근본적인 능력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나 힘의 경제로서의 상태status를 중심에 두는 것. 체스에 관한 뒤샹의 "발견"--나는 이것을 그가 게임을 했다는 게 아니라 미학적 유사어로서 이 용어를 채택했다는 의미에서 쓴다--은 그가 <자전거 바퀴>의 구축과 함께 1913년에 소개했던 그 문제를 풀었다. <자전거 바퀴>는 그가 <Rotary Glass Plates (Precision Optics)>에 이르기까지 그가 생산했던 유일한 키네틱 오브제다. 뒤샹은 미래주의자가 가졌던 움직임의 시뮬레이션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이어그램화하려고 했다. 측정 그리드로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서 말이다. 실로, 뒤샹의 큐비즘 페인은 그가 체스를 찬미했던 것의 반대를 성취했다. 만약 체스가 "정적static이라는 의미에서 지오메트릭하지 않고," "그것이 움직이기 때문에, 기술적이라면," 그의 큐비즘 명작은 <큰 유리>와 마찬가지로 움직임과 그 기계를 움직이지 못하게immobilize한다: 그것들이 도입하는 다이나미즘은 실로 정적이라는 의미에서 지오메트릭하다. 뒤샹은 움직임에 매혹됐지만, 그는 동일하게 그가 "도시적 인상주의"라고 부른 무엇에 떨어지지 않고 그것을 재현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자전거 바퀴>는 이런 어려움의 엠블렘이고, 벽에 걸린 체스판과 박닥에 못박힌 트레비쉐 사이에서 드러나는 그것의 현전은 언캐니하게 우리가 "뒤샹주의적 체스"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담론장을 완성시킨다. 체스와 함께 정적인 레디메이드는 <유리>에서 일깨워진 것보다 심지언 훨씬 더 복잡한 일련의 상호작용으로서 재무대화된다. 그 게임은 뒤샹에게 시스템적 기계 움직임 모델을 제공했는데, 그것은 <큰 유리>나 <갖 된 미망인>과는 다르게 가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예술 오브제이거나, 최소한 "지워질 수 있다erasable." 체스는 레디메이드 모델을 움직임 속에 놓는다. 체스판의 회화적 면과 함께 그리고 일상계 안에서.(163)

뒤샹이 1920년대 동안 체스 때문에 예술을 포기했다는 게 사실일지라도, 그러한 재뉘앙스화는 동어반복적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면 그에게 그 게임은 그의 예술이 선점했것의 심각한 이어나가기였기 때문이다. 사실은 뒤샹은 절대로 예술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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