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시간이 남고 해서 캡션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한다. 원래는 페북에 올리려고 했으나 무슨 영광을 누릴 꺼라고..하는 생각에 그냥 여기다가 기록만 한다.
전시를 준비하다보면 생각보다 많은 공을 들이게 되는 것이 캡션이다. (하나라도 실수하면 작가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 인쇄물을 모두 회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보통 많이 쓰는 스타일은: 작가, 작품제목, 제작연도. 재료, 크기. 위치 등 기타 등등.
중요도 순으로 대충 이렇게 간다. 중간 중간에 마침표(.)가 찍혀있다는 게 포인트. 하지만 정확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제작 연도가 맨 뒤로 가기도 하고 크기가 재료 앞으로 가기도 하고 제각각이다. 사실 국현 소장품과 같은 곳에서 내놓은 지침이 있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 현장의 동시대작품과 맞지도 않고 보통은 네오룩 스타일을 무의식적으로 많이들 따라하는 것 같다(큐레이터도 많이 참고한다). 네오룩은 무엇보다 작품의 캡션을 많이 가지고 있는 온라인 기반 아카이브가 아닌가 한다.
다양한 작가의 캡션을 정리하다보면 엄청나게 혼란스럽고 자잘하게 고쳐야 하는 상황에 짜증이 나고 왠지 옛날 아이튠즈 엠피쓰리 태그 정리하는 것과 비슷한 욕심이 일어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를 준비하다가 종종 마주하게 되는 작은 고민에 대해 몇 가지 던져 보면,
1. 한글 제목과 다른 언어(예를 들어 영어; 지금부턴 그냥 영어로 씀) 제목이 아예 뜻이 다른 경우: 이 경우 만약 영문 캡션을 따로 만들어야지 하고 접근하는 경우 혼란에 빠진다. 물론 번역되는 컨텐츠의 경우 제목을 바꾸는 경우가 왕왕있다. 하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경우는 저자가 '직접' 다른 언어로 된 다른 뜻의 두 제목을 하나의 작품에 쓰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두 언어를 병치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번역 될 작품 제목의 부정확성을 미리 염려해서 친절하게 미리 만들어 놨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일단 그렇다고 치고.
2. 한 캡션에 두 가지 이상의 언어가 동시에 들어가는 경우: 1번에서는 작가가 다른 언어를 한 작품에 병치시킨 것인지, 아니면 친절하게 미리 번역해준 것인지 다소 불명확했다면 2번에 와서는 병치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경우 작가가 캡션을 읽는 독자를 한글과 영어 둘 모두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염두에 뒀다는 것을 의심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한글 제목을 달라고 했는데 김철수, <apple>, 2020. 캔버스에 유화, 20 x 20 cm. 라고 왔다면, 분명히 apple만 다른 언어인데, 큐레이터는 이것을 사과라고 번역 해야할지 아닐지 한참 고민할 수밖에 없다. (진지 빨자면 어떤 미술이론가에게는 비교문화연구의 문제로 간다.) 이 예는 약과고, 김철수, <인물 (apple)>, 2020. 캔버스의 유화, 50 x 20 cm이라는 캡션이 있다고 치면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portrait (사과)>? 큐레이터는 이런 의문을 품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통 작가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고 작가의 말을 따르려고 한다. 하지만 작가도 보통 노아이디어인 경우가 많다.
3. 영어 캡션만 있는 경우: 차라리 영어 캡션만 받은 경우는 혼란이 그리 크진 않다. 작가에게 한글 번역을 해달라고 요청하면 될 일이다. (받으려면 며칠 걸린다.) 종종 작가 이름만 한글이고 모두 영어로 쓰여 있는 캡션(예를 들어 김철수, <apple>, 2020, oil on canvas, 20 x 20 cm)을 받기도 하지만 이건 큰 문제가 아니다. 혹시 작가에게 한글 캡션도 주세요~라고 부탁드렸다면, 추후에 김철수 영문명도 달라고 한 번 더 연락해야 한다. (또 며칠 걸릴 수도 있다.)
4. 작품의 구성물이 관례화된 재료나 기법을 뛰어 넘는 경우: 사실 앞에까진 잡설이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여기서부터다. 예를 들어 퍼포먼스의 캡션을 어떻게 쓰고 있을까? 네오룩에 들어가서 검색란에 퍼포먼스를 치고 아무 거나 손에 잡히는 전시를 골랐다. 2016년 국현의 <<예기치 않은>>이란 프로젝트다. (참고 링크: https://neolook.com/archives/20160817g) 하나를 골라서 보자면: 고재욱_Die for_관객참여형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_2016. 본의 아니게 고재욱 작가의 캡션이 처음 나왔다. 이 캡션은 이 작업, 혹은 이 이미지에 대해서 얼마나 말해줄까? 고재욱의 "관객참여형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는 그나마 자세하게 써준 거고, 그 아래에 보면 옥정호나 조형준의 작업의 경우 그냥 "퍼포먼스"라고 압축되어 있다. (심지어 만약 이런 방식이 합당하다면 회화의 매체도 단순 회화라고 표현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다수 최소한 캔버스에 유채 정도라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작품을 표현해 왔고 여기에 매우 익숙하며 문제가 없다고 느낀다. 장소특정적 미술의 캡션을 단순히 재료로 퉁친다던지 아니면 installation이라고 표현한다던지, 복합적인 요소를 가진 작품은 그냥 혼합매체(mixed media)라고 하면 편안하다. 다시 말해서 현대 작품에서 개념과 방법론이 점차 중요해져 왔지만, 여전히 그것을 표현하는 캡션은 중력의 제한에 걸려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5. 작업이 집단적 실천인 경우: 이 경우 대부분 리더격 예술가만이 캡션에 등재된다. 좀 더 호의적이라면 기껏해야 공동체 이름 정도로 뭉쳐서 등재될 것이다. 협업은 아마 평등주의적 실천일 텐데, 그것을 기술하고 재현하는 방식은 여전히 저자중심적(단일 저자나 단일 집단)이고 재료중심주의적이다. 작가, 작품제목, 제작연도, 미디엄, 크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 소셜 프랙티스로 확장해서 보자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잠깐 스쳐간 많은 사람들은 캡션에서 고려대상이 아니다. 기껏해야 동네 사람들 정도?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했던 많은 (비물질적) 활동은 캡션에서 거의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 활동 후 남은 구조물 정도가 재료와 함께 거론되는 정도랄까. 이것이 과연 맞는 캡션일까? 왜 이런 방식으로 다시 캡슐화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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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기에 작가, 작품명, 제작연도, 미디엄, 크기로 이어지는 캡션 스타일은 페인팅이나 조각, 판화 같은 전통적인 작업에 가장 알맞다. 특히 미디엄을 표현하는 관례적 방식은 동시대미술의 복합적인 성격과 상당히 불화를 일으킨다. 이런 관례적 방식의 문제는 횡단적 실천을 다시 특정하게 장르적으로 분할한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다양한 사람이 참여하고 빠진 프로젝트에 최소 조각도 판화도 있고 페인팅도 있고 춤도 있고 워크숍도 있다면 그런 프로젝트는 어떠한 캡션을 가져야 할까? (기껏해야 커뮤니티아트나 다원예술이란 아무것도 표현해주지 않는 레이블?) 내 생각에 캡션은 일종의 몸에 새겨진 영구 문신 같은 것이다. 작가가 그렇게 정하기로 하면 다른 언급이 없는 이상 다른 사람이나 기관은 여러가지 이유로 절대 바꾸지 못한다. 나는 소위 포스트-코로나 시대가 최소 캡션계의 발전엔 유의미한 일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실제로는 과거에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서도, 만약 이미지와 캡션으로 우리가 작품을 접할 수밖에 없다면, 그리고 그것이 강화된다면 캡션이 가지는 힘도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 점차 사람들이 캡션에 신경을 쓰게 될 것이고, 긍정적으로 보자면 지금껏 무성의하게 처리되어 왔던 부분도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정확한 재현이란 없고 어떤 경우에도 어떤 건 도드라지고 어떤 건 삭감된다. 그래서 캡션은 단순한 부가정보나 제목 정도가 아니다. 캡션에는 어떠한 결정이 내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