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3일 목요일

만화 잡담.

나는 애니메이션보다 만화를 선호해 왔다. 이유는 내가 긴 영상 자체에 좀 지루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해나 예상 가능한 부분은 건너 뛰고 싶고, 싫어하는 장면은 보고 싶지 않은데, 영상 감상 형식에서는 그것이 용이하지 않다. 그렇다고 여기저기 스킵하면 뭔가 제대로 보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고. (영화도 마찬가지 이유로 어느 순간부터 잘 보지 않게 됐다. 영화관에 가는 건 더욱 불편해졌는데, 진행이 지루해져도 계속 앉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반드시 대화면으로 봐야해! 타입도 아니기도 하고.)

그리고 또 하나는 작화 퀄리티의 문제다. 내가 만화를 봤던 이유는 잘 그린 그림을 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까지 미술 같은 거에 관심이 있었을리가 없으니 그림을 보기 위한 창구는 오직 만화/애니메이션 뿐이었다. (그래서 미대 입학 이후 만화에 대한 열정이 급격히 떨어졌달까. 더 풍부하고 잘 그린 그림들이 많다는 걸 깨달은 후.)

90년대만 해도 애니메이션(특히 OVA)의 작화의 질이 굉장히 낮았다. 비례감 같은 것이 제로인 작품이 많았다. 슬램덩크 같은 것만 봐도... 안습이다. 펜선의 맛 같은 건 기대해선 안되고, 거기다 명암이라던지 이런 처리들이 굉장히 단순해서 (아마도 비용 때문에) 컬러임에도 불구하고 흑백 만화의 풍부함을 따라가지 못했다.

편집 기법도 마찬가지로, 한 화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애니메이션(혹은 영화)과는 달리, 만화는 두 페이지에 필연적으로 여러 컷이 동시에 배치되고 시선 처리를 신경써야 하기에, 훨씬 이 쪽이 재미있었다. 애니메이션 아키라와 만화 아키라 중 뭐가 작품성이 낫냐고 한다면, 내 쪽은 단연 만화 아키라다.

만화 취향은 소년만화 쪽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현실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열심히 노력하고 성장해서 행복해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 정의가 편파적이었든 어찌됐든 정의가 결국 승리한다는 단순히 그런 이야기가 아직도 좋다. 아무리 현실이 정의의 편이 아니더라도.

그래서 애니메이션은 거의 본 것이 없지만, 다들 그렇듯이 지브리껀 또 굉장히 사랑해 마지 않았다. 제일 좋아했던 건 천공의 성 라퓨타였는데, 몇 번씩 돌려보고 OST를 사서 무한 반복으로 듣고, 당시 비싼 돈 주고 일본판 설정 자료집도 사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알고보면 착했던 그 괴물 같이 생긴 거신 로봇! 완전 좋아했다. 미대에 진학면 천공의 성 라퓨타 같은 작품을 꼭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꿈을 꾸기도 했었지.

아 또 지브리 중에선 귀를 귀울이면이라는 작품도 참 좋아했다. 소년과 소녀가 만나서 서서히 감정의 틔우며 꿈을 향해 함께 성장해 가는 이야기였다. 작 중 소년이 바이올린 반주를 하고 소녀가 노래를 부르는 미니 뮤직비디오 같은 장면이 있는데, 어린 나이에 굉장히 인상깊었달까. 그때 그 씬은 내 이상적 풍경 중 하나가 됐지. 연인과 함께 노래 합주하는...

아무튼...

요즘 애니메이션 동향도 파악할 겸 쭉 보고 있는데, 작화의 갭 자체가 정말 많이 좁혀진 것 같다. 놀랍다. 예전엔 비례미가 안정적인 미형 캐릭터를 애니메이션에서 찾기 힘들었다. 그런 미형 캐릭터는 몇 장만 제대로 그려내면 되는 게임 일러스트레이션 쪽이 압도적으로 우위였다. 그런데 요즘 애니메이션은 거기에 준할 정도로 따라왔다. 뭔가 얼굴형이 평준화된 느낌만 빼면 그럭저럭 볼만하다. 배경 퀄리티도 엄청나게 높아졌다. 아마도 컴퓨터 그래픽의 힘일 테다. 반면 이야기 쪽은 오히려 쇠퇴한 느낌이다. 모에 요소만 작위적으로 산재해 있는 경우가 많다.

메모. 시대마다 미형 캐릭터의 대세가 분명히 있는데, 이걸 한 번 분석해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예전에 한 번 일본 사람이 쓴, 미인을 잘 그리는 작화가에 대한 짧은 계보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퍽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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