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 커뮤니티 아트는 마을 공동체란 낭만주의적 집단을 상정하고 작업 과정에 그들을 개입시키는 작업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기 위한 말로 쓰였다. 이 글은 예전에 썼던 글(요거: http://daewoongahn.blogspot.kr/2014/12/blog-post.html)의 자그마한 보충이다.
내가 한국의 행동주의 공공미술, 즉 커뮤니티 아트를 이전의 공공 조형물과 똑같이 보는 이유는, 이것이 강도 높은 공공의 폐허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양자를 비교해 보면, 나는 공공 조형물 쪽을 차라리 지지하고 싶다. (극단적으로 올덴버그의 <스프링>을 지지할 수 있다.) 공공 조형물은 어쨌거나 외부의 폐허의 문제이지만, 커뮤니티 아트는 인간 내부에 심리적 폐허를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비인간적이다.
커뮤니티 아트는 상정된 참여적 주체를 분열적으로 다룬다. 공동체의 필요성은 당연히 개인화 일반의 문제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니까 공동체, 공동의 삶이란 테마는 근대 (자본주의) 이후 탄생한 개인이 소위 소외되는 과정 속에서 나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적 삶의 모델로 거칠게 정리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이라는 주체가 공동체의 요청에는 어느정도 전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커뮤니티 아트가 이뤄지는 장소에 도대체 어디에 그런 독립적인 개인이 존재한단 말인가. 다시말해, 퍼블릭, 즉 공론의 장에 스스로의 의사를 표출해 여론을 조성하는 개인'들'을 지칭하는 이른바 '공중(public)' 과연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가? (이런 관점에서 커뮤니티 아트의 관심을 투사해서 본다면) 호명받지 못한 잡다한 주체들이 그저 자신의 삶을 아무도 모르게 꾸려나가고 있을 뿐이다. 공동체, 즉 커뮤니티라는 적당히 올바르게 보이는 자리를 만드는 데 복무해야 하는 커뮤니티 아티스트들은 따라서 잡다한 주체를 개인으로 만들 필요가 있으며,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공동에 대한 이념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일은 이런 순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모순되는 상황 때문에 이들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있어 몹시 어려움을 겪는다. 의견을 피력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참여적 개인이 필요할 때, 마을 사람은 항상 소극적이며, 한편으로 특정한 공공의 영역을 설립하길 시도할 때, 마을 '사람들'은 항상 배타적이다. 여기서 낙천적이고 소박한 정신을 가진 공공미술가는 마을과 사람들을 분열적으로 대하게 된다. 공동체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것과 동시에 개인의 탄생을 은밀하게 바라야 한다. 참여자에게 개인이라는 주체 모델을 요청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이 결집하길 바라야 한다. 이것이 도대체가 가능한 일인가?
커뮤니티 아티스트와 함께하는 한, 거기에 동참하면 할 수록,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가 그 공공미술가가 필요로 하는 개인도, 그렇다고 공동체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됨으로써 스스로의 삶에서 소외되며, 그 간격은 어떤 면에서 그들에게 커다란 외상으로 남는다. 다시 말하면 커뮤니티 아트는 한국 현실에 비추어 봤을 때, 마을 사람들이 원천적으로 커뮤니티 아트에 참여할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기계로서 작동한다. 그런 외상은 문화 자체에 대한 원천적 거부로서 계속해서 출몰할게 될지도 모른다. 그 결과 커뮤니티 아티스트들의 에토스, 즉 참여적 공동체란 도덕주의적 (민주주의적?) 이념은 과연 스스로를 역공한다. 커뮤니티 아트는 (잘 됐을 경우) 계몽 프로젝트로서 폐허를 남기며, (잘 되지 않았을 경우) 파괴를 위한 파괴로서 주는 것 없이 폐허를 남긴다. 이 폐허는 모두 심리적인 것으로, 내가 봤을 땐 공공미술 그 자신이 가진 미학적 테제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참여자마저 스스로를 부정하게 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다음에 시간이 난다면 커뮤니티 아트와 자본에 관하여 한 번 써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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