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16일 일요일

이브-알랭 부아, '애도의 의무' (1986), 이영철 엮음, 현대미술과 모더니즘론에서 인용.

"이제 뒤샹에 대해 말해보자. 그의 레디메이드는 회화에 대한 부정이자 줄곧 (그리고 이미) 존재해온 회화의 기계적인 성질에 대한 존증일 뿐 아니라 우리 문화 내에서 예술작품이 사용가치를 위해 모든 겉치레를 내다버려야만 하는 물신임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예를 들어 레디메이드는 유용성의 영역으로부터 추상된 하나의 미술적 생산물이다.). 더욱이 레디메이드는 소위 예술의 자율성이란 것이 맑스가 소비의 관점 하의 생산의 관점이라고 불렀던 것을 끊임없이 은폐하는 유명론적 제도에 의해 생산되었다(인종학자 마르셀 마우스가 주목했던 것처럼 "예술작품은 어떤 한 집단에 의해 그것 자체로 승인되는 것이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 뒤샹의 행위는 예술작품을 특별한 상품의 일종으로, 맑스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술작품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특별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을 때 주목했던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사용가치를 갖지 않기 때문에 예술대상은 그 자체로 어떤 교환가치이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사회적 작업의 양에 따라 좌우된다. 쇠라는 세간제로 보수를 받고 싶은 그의 욕망을 통해 이러한 불합리를 설명했다를 갖지 않는다. 뒤샹이 주목하고 싶어하는 것은 예술작품이 진주나 훌륭한 포도주만큼이나, 시장의 일반 법칙에 따라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예술의 망에 의해 유지되는 독점체계에 따라 교환되며 그것의 근본원인은 예술가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작품의 교환이 경쟁이나 그밖의 어떤 시장법칙 밖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그것들의 무한한 가격은 예술작품의 가치를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서 오는 기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세계에서 가치는 어떤 독점체계의 중심에 있는 '심리적' 메커니즘, 즉 희귀성, 진정성, 유일성 그리고 수요 공급의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미술 생산물은 수집가의 영혼의 보충물인 순수한 상징적, 관념적 가치에 대한 환상을 절대적으로 만족시켜주는, 사용가치도 교환가치도 없는 절대적 물신이다." (86쪽)

"그래서 '모더니즘 회화' 놀이가 완결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회화' 게임이 완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가올 수많은 날들이 이 예술 앞에 놓여 있다. 그러나 상황은 한층 더 복잡하다. '모더니즘 회화' 놀이는 회화의 종말에 대한 놀이기 때문에, 그것은 종말의 느낌과 종말을 향해 어렵게 나아가는 것 모두에 반응한다. 그리고 이 놀이는 산업화라는 사실에 의해(사진, 상품 등) 역사적으로 결정됐다. '화회의 종말'이 완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이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복제 가능성과 물신화가 삶의 모든 국면에 침투해온—우리의 '자연스러운' 세계가 되어 온—것처럼 보이는 때에, 누가 이러한 주장을 할 만큼 그렇게 순진할 것인가?

... 명백하게 이것은, 할 포스터가 정확하게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작품이 차용미술의 전개로 보여지거나 아니면 추의 흔들림으로 보여져온 최후의 '추상'화가 그룹의 주장은 아니다. ... 피터 핼리가 강조한 것처럼 그들 모두는 역설적이게도 장 보드리야르에 많이 의존하는 가운데 종말이 도래했다는 것을, 종말의 종말은 끝났다는 것을 시인한다(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다른 놀이를 시작할 수 있으며 우리는 종말의 감정이 아니라 단지 그것의 모조품을 가지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포스터가 쓴 것처럼, "이러한 새로운 추상회화에서 시뮬레이션은 최대한으로 그것에 저항하는 ... 바로 그 예술의 형식에 침투해왔다. 보드리야르는 그가 가진 천년왕국의 도래를 기대하는 감정의 바로 그 본질에 의해 시뮬레이션의 시대의 매력에, 허무주의로 가장된 우리 자신의 무기력의 차이에 이끌렸다. 나에게는 문제의 젊은 예술가들이 시뮬레이션의 문제자본에 의해 생산된 추상적 시뮬레이션의 문제를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이 공격한다고 주장한 것에 매혹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뉴먼의 숭고의 내용을 제거하면서도 그것을 언급하는 필립 타페처럼) 심술궂게 혹은 (시뮬레이션의 도상학적 표현이 '감장'과 '도관'이라는 그의 회화적 수사법을 통하여 비판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한 피터 핼리처럼) 무의식적으로 말이다. 보드리야르와 같이 나는 그들을 조증에 걸린 애도자라고 부르겠다."(93-94쪽)

"그러나 애도는 금세기 전반을 통해 회화의 활동이었다. "현대적으로 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라고 롤랑 바르트는 언젠가 말했다. 그러나 애도의 작업이 반드시 병리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에는 종말의 감정이 회화의 설득력있는 역사, 즉 우리가 묻어버리려고 애를 쓰는 모더니스트 페인팅을 생산했다. 회화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의 생명력은 일단 우리가 우리의 조증과 우울증을 치료하고, 우리가 역사 속에서 행동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다시금 믿게 되어야만갈수록 교묘해지는 방어의 메커니즘을(조증과 우울증이 이에 관계되는 것이다) 통해 그것을 피하고 우리의 역사적 임무, 즉 애도의 임무를 해결하기보다는 차라리 다시 한번 종말을 철저히 만들어내는 우리의 기획을 받아들여야만시험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전보다 쉽지 않을 것이지만, 내 생각으론 회화의 가능성은 모더니즘 회화가 분리해서 생각해온 세 가지 경우(상상적인, 실제적인 그리고 상징적인 것)의 결합된 해체(conjunctive deconstruction)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예언은 틀리게 될 것이다. 단지 회화에 대한 욕망(desire)이 아직도 남아 있고 이 욕망이 전적으로 시장에 의해 기획되거나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만을 말하자. 즉, 이러한 욕망은 미래 회화의 가능성의 유일한 요소, 즉 비병리학적인 애도의 유일한 요소이다. 어쨌든 5년 전 로버트 뮤질이 내다봤던 것처럼, 어떤 회화가 여전히 도래하게 된다면, 화가들이 여전히 나타난다면, 그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곳으로부터 오지는 않을 것이다." (95쪽)

파란색 부분은 원문 대조 후 고침.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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