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19일 토요일

오타쿠의 정신승리

적어도 내가 주로 봤던 애니메이션을 염두에 두고 말하자면, 남성-오타쿠 진영을 소비자층으로 상정한 작품이 많다. 주인공은 대개 평범한 소년-학생-남성인데, 현실에서 평범한듯하지만 사실 특이한 이능의 힘을 가진 탓에 세계평화를 위해 조용하게 살고 있는, 사실 되게 똑똑하고 냉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실은) 혈통도 어마무시하고 집도 부자라는 그런 설정으로 종종 등장한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평범하거나 잘 안나가는 건 사실 남주가 다름 평범한 이들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다. 오타쿠들의 마음, 정신승리인 것이다.

남주가 여주와 마주치는 방법은 더욱 오타쿠들의 심리를 반영한달까. 남주는 절대 여자에게 관심을 먼저 표하는 법이 없다. 하지만 상황이 정말 '우연히'도 여성들과의 조우를 강요한다. 갑자기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룸메이트로 여성이 배달? 되기도 하고 길가다가 우연히 부딧쳤는데 변태로 오인받기도 하고 사실은 남주를 좋아하는 클래스메이트가 있었으며 기타 등등. 남주는 절대 '원치 않는데도' 불구하고 만남이 반 강제적으로 만들어진다. 가만히 있는데 자꾸 귀찮게 한다는 식이다. 어쩔 수 없이 반응해줘야 한다는 식이다.

오타쿠는 수동적 공격성의 화신이다. 가만히 있지만 가만히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내 능력은 이런 같잖은 일에 쓰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 이때 능력을 끌어내는 조건은 '감히' 평범해서는 안되고, 엄청나게 스바라시한 이유여야 한다는 거다. 그게 대마왕이든 공주든 미인이든 어쨌든, 자신의 엄청난 능력은 합당한 이유로 개시되어야 하는 거다. (귀찮겠지만...) 그게 되지 않는 이상, 현실 세계와 담을 쌓거나, 굉장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아큐 같은 인물에서부터 내려오는 정신승리의 전통.

오타쿠들의 정신적 해리 증상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엔 해소되어야 할 것임에 분명하다. 현실과 가상 사이에 선을 그어버리고 가상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에 만족을 느끼는 삶, 그 자체에 대해서 비난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행복의 기준은 다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분명히 관계맺어야 한다. 어쩌면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이 이유에 대해선 나중에 써봐야 겠다.

여튼 오타쿠의 수동적 공격성은 반대로 손을 내밀어달라는 긴급한 요청으로도 보인다. 수동적 공격성은 이들의 일종의 리트머스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건 실로 짜증나는 것이지만, 사회적 약자가 에고를 보존하기 위한 일종의 방화벽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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