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분명하게 적을 수 있는 건 버리는 건 싫다. 분명히 그걸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버리는 건 역시 싫은 것이다. 나는 이것을 기억의 물화라고 불렀다. 이건 학부 시절 그림 그릴 때 생각해낸 말인데, 기억하기 싫은 것을 물건에 대리하는 습관에 그렇게 이름 붙였다. 설령 내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이 물건이 그것을 기억해준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이상 아무 것도 버릴 수 없다.
생각해보면 이건 먀샬 매클루언 같은 사람이 미디어 테크놀로지 발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며 참조한 생리학 용어 '자가-절단' 개념과 닮았다. 자가절단은 쉽게 말해서 도마뱀 꼬리자르기다. 신경 수준에서 외부 자극에 위협을 느낄 시점, 그것을 잘라내어 본체를 보존하는 일종의 생존술이다. 매클루언에 의하면 테크놀로지가 발전할 수록 인간은 자신의 감각을 테크놀로지에 대리 이전하는 한편, 본래 감각을 닫아버린다. 본래 신체로선 한도 초과인 것이다. 나르키소스의 멜랑콜리아. 그러니까 기억의 물화는 기억의 자가절단과 닮았다고 볼 수 있다. 기억을 다른 장치에 이전시켜버리는 것. 그리고 거기에 대한 감각을 닫아버리는 것. 지키기 위해서랄까.
이건 사실 나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하드디스크가 날아가면 곤란할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클라우드 서비스는 데이터를 얼마나 실시간으로, 글로벌하게 긁어 모으고 있는지. 데이터베이스가 확장될 수록 인간, 혹은 그의 신체는 우울해진다. 이건 헤겔식의 역사의 종말과 인간의 소멸 테제의 또 다른 버전일지도 모른다.
여튼. 침실에 우두커니 걸려 있는 옛날 사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오래 전에 제주도 놀러갔을 적 사진일 텐데 그걸 아직까지 걸어 놓은 것이다. 그냥 못이 있고 비어 보여서 사진 액자를 걸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손에 잡히는 대로 그냥 걸었던 것 같다. 분명히 행복했던 때다. 지금은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지만. 오늘의 아침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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