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1일 토요일

메모: 졔졔

아마 졔졔의 작업 이야기를 한국의 일반 작가가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대다수는 첫 몇 마디에 흥미를 잃을 것이다. 오직 작가 자신에 의한 자신에 대한 자신을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졔졔는 다른 작가의 작업이나 미술현장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나 밝지 않고, 제도, 시스템에 관해서도 그러하며, 오직 자신이 느꼈는 사소한, 중요하지 않은 불편함이 마치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다룬다. 그렇다고 관계를 다루지도 않는다. 오직 어떤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이 온전히 남에게 전달되리라 생각하거나, 혹은 전달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한다.

이건 성격에 관한 이야기지만 졔졔는 '푸시'가 느껴지면 갑자기 감정적으로 변한다고 한다. 반대로 푸시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굉장히 수동적이고 순응적이다. 여기서 푸시란 엄청난 강압이라기보단 자신의 컴플렉스를 건드리는 그런 것이다. 말하자면 약점이 잡히면 그것을 인정하고 한편으론 스스로를 피해자로 위치시키면서 감정적으로 나온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너 때문에 그렇다"라는 식? 한편 푸시가 느껴지지 않는 한, 상대방은 '동일시'의 대상이다. 마치 어머니처럼 말이다. 이건 졔졔와 장시간 이야기하면서 내가 느낀 바다.

간명하게 이것은 졔졔의 어떤 특성이 남들과 소통하는 법을 모른다는 점으로 귀결된다. (동일시 가능성이 있다는 전제 하에) 남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 아니면, 남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거나, 남들의 이야기를 무작정 수용한다. 이것이 졔졔와 이야기할 때 무작정 들어야 하거나 무작정 이야기해야 하는, 그게 아니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그런 곤란함을 만든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졔졔와 대화할 때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뭔가 공통감이 있는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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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논리적일 수 없다 은유와 환유의 연쇄로 강하고 약한 트라우마를 바꿔치기 하면서 그것을 계속 반복한다. 만약 정신분석학에 의존해 졔졔의 작업을 다룰 수 있다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졔졔를 정신분석해서 신경증을 치료하고자 함이 아니다. 어떻게 그 신경증이 나왔는지를 사회적이고 구조적으로 좀 더 잘 고찰할 수 있는 방법론을 얻고자 함이다. 만약 졔졔의 작업을 일종의 꿈으로 놓을 수 있다면 우리는 졔졔의 작업 하나하나를 구현화된 공공의 꿈으로 상정하고 분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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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다른 이야기지만 작업 <비극 생산기>와 그 작업이 출품된 전시 [카타스트로피]는 그런 양극단에서 생각 거리를 제공한다. 내 세계의 파국이 세상의 파국이다, 라는 명제는 일본의 세카이계의 전형이다. 아마 세카이계를 분석해 보면 졔졔의 빠진 링크가 무엇인지 규명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다시 정리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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