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6일 수요일

수고와 올드미디엄

김훈 선생은 아직까지 200자 원고지에 연필과 지우개를 사용해 집필한다고 한다. 최근에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의 수고를 이미지로 보았는데, 줄로 찍찍 긋고 괴발새발 글씨체가 머리속에 기억에 남는다.

나는 파편적인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벤야민은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밖의 준비되지 않은 파편화랄까...그런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괜히 번호를 매겨서 글을 쓰는 것도 그래서 좋아하지 않는다. 파편화는 전일성 다음에서야 유의미한 것일 텐데 전일성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것들이 마치 전일성 다음의 파편화인 양 그 형식을 차용해서 스타일로만 쓰기 때문이다. 모양은 비슷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아름다움의 격은 차이가 심대하다.

글을 손으로 쓴다는 건 머리 속에 그 구조가 다 있다는 것이며 조금 더 솔직하게 사유가 손을 거쳐 저장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정신의 장식적인 요소가 직조의 방식보다 개입할 여지가 덜하다. 나는 그게 좋다.

오늘날에 글을 쓰는 방식은 거의 99퍼센트가 짜깁기다. 물론 글은 예로부터 짜깁기였다. 하지만 그 짜깁기가 필자의 머리 속에서 정렬되어서 나오는 방식이 예전이었다면 요즘은 짜깁기 자체가 그대로 가감없이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사실은 원래 그런걸 원래 그렇게 보여준다는 것과도 같다. 바디우가 들뢰즈의 차이를 비판하는 방식과 비슷하게도...

뭐랄까. 더 이상 수고의 방식은 효과적이지 않다. 아마 알파고 같은 프로그램은 나중에 키워드 몇개만 넣으면 인간이 생각하지도 못한 논문을 줄줄이 꿰어서 내 놓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고에서 우리가 뒤늦게, 회고적으로 발견하는 건 무엇일까. 인간 정신의 위대함, 그것의 자유에 대한 강한 믿음과 기대, 요청, 책임 뭐 그런 거 아닐까 싶다. 과거엔 그런 것이 있었다는 어렴풋한 상기.

이것이 올드미디엄이 최소한 할 수 있는 역할이자 효과일지도 몰겠다.는.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