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theartro.kr/arttalk/arttalk.asp?idx=67
이 글은 아트로에 기고한 박수지씨의 글이다. 원래 나에게 청탁이 온 글인데 큐레이터로서 내 전시를 평하는 게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녀를 추천했다. 날 선 비판이 오길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글은 손쉬운 비판의 스텐스를 취한다. 가장 결정적인 점은 사업=미술 프레임이다. 아시아문화전당이 잘못됐다면 거기서 일어난 모든 예술행위는 모두 잘못됐는가? 이 글에서는 이 구분을 하지 못했거나 최소한 여기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사업의 실패를 예술의 실패로 치환한다. 이건 문화예술위의 정책이 잘못됐기 때문에 한국의 미술은 모두 잘못됐어, 라고 주장한다거나, 확장해서 한국은 대통령이 샤머니즘 정치를 하기 때문에 한국인은 모두 비합리적이야, 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제도 그 자체는 현실의 일부를 아주 도식적으로 나타낼 뿐이다.
이 글에서 박수지는 네트워크/킹을 사업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네트워킹으로 무엇을 했냐는 실용주의적 심문이 결론에서 기다릴 것이란 점은 중제만 봐도 알겠다. 목적론적인 네트워크는 사실 아시아문화전당 자신이 설정한 아젠다로, 큐레이토리얼 팀이 실제로 몹시도 저항했던 아젠다이기도 하다. 미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미적으로 네트워크는 모든 가능태의 징표다. 윤리적으로 네트워크는 전당이 단순히 참여 공간/작가를 대상화시키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네트워킹이라는 사태가 전시 자체가 되길 원했다. 네트워크는 여기서 철학적 고찰의 대상이 되었으면 했다. 성과주의를 위한 방법이 아니라.
나는 미술계에서 나타나는 많은 종류의 비판이 제도비판을 향하고 있지만, 그것이 실로 헛발질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제도는 구체적인 작업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도 이것을 인정한다면, 둘 사이의 상호관계/구조를 더욱 정치하게 파고 들어야 한다. 단순히 제도가 잘못됐다는 식으로 편하게 결론 내리는 건, 나아가 근본적으로 제도를 바꿔야 예술도 바뀐다는 (감춰진) 입장까지 나아가는 건 너무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좌파 포퓰리스트적인 태도라는 생각까지 든다. 당신을 두고 과연 정말 비판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비판적인 것이 그렇게 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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