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8일 수요일

순수와 반동

한국미술계에서 미술시장과 상품으로서의 미술을 비판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다. 왜냐면 거의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주류라는 것이 없을까? 그 주류라는 것에 문제가 없을까? 라는 질문을 해보는 것은 유의미하다.

한국미술계에서 주류는 공공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미술 제도에 속해진 자들이다. 한국 미술씬은 자본주의 논리가 떠받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공 인프라스트럭처가 떠받치고 있다. 여기서 공공의 영역에란 정부 지자체가 만든 창작 지원금, 레지던시, 지원 사업, 뮤지엄과 갤러리, 미술상을 포함해서, 민간차원에서 구축한 문화재단과 뮤지엄, 미술상 등도 해당된다. 미술시장은 여전히 단색화 정도의 순환에 골몰하고 있는 와중에, 예술가는 공모전에 일희일비한다. 공모전에 당선이 된 예술가는 전시 기회를 얻는 것과 동시에 예술계 전체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다. 그렇게 유명세를 쌓은 예술가는 젊은 모색이든, 올해의 작가상이든 크고 작은 미술상을 수상하며 한 계단 두 계단씩 올라간다. 아마 올해의 작가상,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참여 작가 정도가 되면 공공 영역에서 만들어진, 올라 갈 수 있는 지원 제도는 끝이 난다. 그리고서 남은 길은 해외 전시, 작품 소장... 갤러리 작품 판매는 거의 기대할 수 없다. 아마 작가는 강의나 다른 교육 쪽으로의 진출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공공 영역에서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상품 논리가 적게 작동하기 때문에 자율성을 (반강제적으로) 보장받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 동시대 미술'계'는 그 자체로 상당히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계'의 지나친 순수함에 대해 문제 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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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함의 반동은 우리가 지난 몇년간 겪은 <굿즈> <스크랩> <퍼폼> <유니온아트페어> 등 작가 주도 장터의 우후죽순격 창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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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뷔르거는 <아방가르드 이론>에서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귀착점이 예술과 삶의 잘못된 지양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그 유명한 모더니즘의 키치화, 문화산업의 창궐이다.

어쩌면 상품에 대한 철지난 관심이 표면적으론 '순수'라는 방탄유리를 깨부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혹자는 순환 그 자체의 미덕과 혁신성을 보다 강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여기에는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상품의 순환 속에 둘러 싸여 있다. 여기에 미술상품 하나를 추가한다는 것이 그리 혁신적일까? 그 미술상품의 순환이 가속화되며, 허물어진 순수의 자리에는 무엇이 자리잡을까? 혹은 미술상품 그 자체가 순환되면서 축적되는 미술상품계라는 자본은 우리가 크게 간과해도 될 미미한 수준에 불과할까? 그렇기 때문에 괜찮을까? 그렇다면 그것이 더욱 존재감을 발휘하게 되는 시간이 온다면, 만약, 그렇다면 그때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예술은 살을 취하고 뼈를 내주는 꼴이 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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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87년을 민주화를 이룬 기적적인 해로 기억하지만, 한편으론 이 해를 기점으로 한국은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87년 6월 항쟁은 완전한 혁명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런 서사가 비극적이게도 젊은 장터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더욱 자율적인 자본의 도입으로 미술계의 보호무역을 깨부순다는. 일시적인 정신승리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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